[9]
1980년의 봄과 여름은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슬프고 치열했으며 고통스러운 기간이었다.
암살로 인해 박정희 정권이 무너지면서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후 광주 학살이 벌어졌고 전국에서 신군부를 반대하는 대학생들과 지식인들의 데모가 끝없이 이어졌다.
그러나 군부의 철저한 통제를 받은 언론은 그러한 사실들을 제대로 보도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반국민들은 세상의 흐름과 격리된 채 하루하루를 살아갈 뿐이었다.
특히 고등학교의 삶은 더욱 그랬다.
아직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을 제대로 알지 못한 학생들은 공부와 서열 정리에 정신을 팔고 있었다.
고등학생 때를 사람들은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부른다.
그만큼 뜨거운 피를 가졌고, 반항에 익숙했으며, 행동에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지금과 다르게 그때의 고등학교는 폭력에 관대했고 학교 측에서도 문제가 생기는 걸 극히 꺼렸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학생들 간의 싸움을 노출시키지 않으려 했다.
특히 질이 떨어지는 학교일수록 더했다.
부익부빈익빈.
명문고일수록 뛰어난 학생들이 많았고, 질이 떨어지는 학교일수록 문제아들이 지천에 깔려 있으니 학교 폭력이 하루걸러 한 번씩 생겨날 정도였다.
군부독재에 익숙한 교사들은 살아남는 방법을 너무나 잘 알기에 그러한 싸움을 모른 체 눈감으며 학생들을 제어하는 수단으로 이용했다.
이만석이 쳐들어온 이후 최강철이 공부하는 3반은 초긴장 상태에 빠져들었다.
단순히 밤안개 패거리들이 폭력을 휘두른 것이라면 워낙 비일비재로 벌어지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러려니 넘어갔겠지만 막상 최강철이 당당하게 싸움을 받아들이자 반 전체가 오후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고 술렁거렸다.
불안, 초조, 동정, 비난 등의 감정들이 학생들 사이에 흘렀다.
최강철의 말도 안 되는 행동을 지켜본 학생들의 반응은 대체적으로 두 가지뿐이었다.
하나는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최강철이 이만석에게 도전한 것을 비난하며 자기들에게 불똥이 튈지 모른다고 불평하는 쪽과 다른 하나는 밤안개의 횡포에 당당히 맞선 용기를 부러워하면서 피떡이 되어버릴 최강철을 동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가장 안절부절못한 사람은 이성일이었다.
스스로 한번 부딪쳐 봤기 때문에 밤안개 패거리들이 얼마나 비겁하고 잔인한지 너무나 잘 알기에 최강철이 막상 싸우기를 결정하자 그는 오후 수업 내내 불안감을 숨기지 못했다.
한 달 만에 무섭게 변해 버린 최강철의 모습을 봤지만 열 명이나 되는 놈들과의 싸움은 복싱과 다르다.
일 대 다수의 싸움은 그만큼 불리했고 비겁한 밤안개 패거리들은 분명 손에 무기를 들게 뻔했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 말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책감. 그래, 자책감이 들어 어쩔 줄 몰라 했다.
놈은 자신이 당한 것에 대한 복수심 때문에 이런 결정을 한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최강철은 자신의 불안감을 뒤로하고 수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놈이 언제부터 이렇게 심장이 커진 걸까.
중학생 때부터 거의 4년을 사귀었지만 최강철은 착해서 싸움과 거리가 멀었고 성격도 나약해서 남들과 언쟁이 벌어져도 스스로 져주는 편이었는데, 언제부턴가 불쑥불쑥 보여주는 카리스마가 장난이 아니었다.
이윽고 모든 수업이 끝나자 모든 반 친구들이 최강철을 바라봤다.
그들의 눈은 전부 최강철이 정말 체육관 뒤로 갈 것인가에 대한 기대심과 불안감이 담겨 있었다.
“강철아, 종례 끝나면 바로 튀자.”
“튀다니?”
“그 새끼들 체육관 뒤로 갈 테니까 담 넘어서 도망가자고.”
“미친놈.”
“이 새끼야, 정말 싸우면 다칠 수 있어. 뭐 하러 그런 짓을 해!”
“남자의 약속은 천금과 같은 거야.”
“씨발, 정말 할 거란 말이냐?”
“그래.”
“좋다. 그럼 오늘 같이 죽자. 개새끼들, 오늘 끝장내 버리지, 뭐.”
오후 내내 했던 말을 한번 더해본 이성일이 똑같은 대답을 해온 최강철을 향해 시퍼런 눈빛을 보내왔다.
비록 보름 동안의 짧은 수련이었지만 이성일도 나름대로 타고난 싸움 실력에 복싱 기술을 익혔기 때문에 같이 싸울 생각인 것 같았다.
하지만 최강철은 그의 말을 들은 후 빙그레 웃었다.
“저번에 너 싸울 때 나는 가만히 있었잖아. 그러니까 너도 오늘 그냥 지켜만 봐.”
“네가 싸우는데 내가 그냥 있을 것 같아?”
“응, 그냥 있어.”
“이 미친놈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렇게는 못 해. 일대일이라면 몰라도 그 새끼들 떼거리로 덤비면 내가 죽여 버릴 거야.”
“네가 끼어들면 상황이 복잡해져. 그리고 내가 제대로 싸울 수도 없고. 너 때문에 내가 제대로 싸우지 못하면 좋겠어?”
“으…….”
“그러니까 내 말대로 해. 오늘 좋은 구경 시켜줄 테니까 재밌게 지켜보기나 해.”
종례까지 끝나자 최강철은 이성일과 함께 천천히 체육관 뒤 공터로 향했다.
이성일이 당할 때는 그들 둘뿐이었지만 오늘은 그들 뒤로 십여 명이 따르고 있었다.
호기심을 도저히 참지 못한 놈들이 멀찍이서나마 싸움을 구경하려는 게 분명했다.
최강철이 체육관 뒤 공터로 향하는 오솔길을 따라 들어가자 이만석이 패거리들과 함께 담배를 피우며 낄낄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놈은 오늘 싸움을 안중에도 두지 않은 것처럼 전혀 긴장하지 않고 있었는데 같이 온 패거리가 11명이나 되었다.
그중에는 이성일과 시비를 붙었던 김원진도 포함되어 있었다.
최강철이 이성일을 뒤에 매달고 공터로 들어서자 패거리와 장난을 치던 이만석이 담배꽁초를 바닥에 던지며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역시 비겁하고 졸렬하다. 놈들 옆에는 단단해 보이는 각목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는데 수틀리면 무기를 사용하겠다는 뜻이었다.
“어이, 용감한 최강철. 정말 왔구나. 난 또 네가 도망갈까 봐 담장 쪽에 애들을 보내놨지 뭐야.”
“그럴 리가 있나. 나는 너같이 비겁한 놈이 아니거든.”
“하아, 이 새끼 정말 죽으려고 환장했군. 어떻게 사람이 한순간에 변할 수 있지? 요즘 들어 자주 드는 생각인데 넌 또라이가 된 것 같아. 겁을 상실한 또라이 말이야.”
“크크크… 또라이라. 그거 좋은 말이네.”
최강철이 어이없어하는 이만석을 바라보며 하얗게 웃었다.
전혀 두려움 없는 웃음이었고 시선이었다.
뒤쪽에 있던 패거리들이 그가 웃자 욕을 해댔다.
특히 김원진은 그렇게 당하고도 따라온 이성일을 향해 이빨을 드러냈는데 바닥에 놓여 있던 각목을 든 채였다.
“이 개새끼들, 오늘 완전히 죽여 버리겠어. 만석아, 더 이상 말할 필요 없잖아. 저런 새끼들은 박살을 내놔야 기어오르지 못해.”
“넌 가만있어!”
김원진이 한 발 앞으로 나오자 이만석이 눈알을 부라려 그가 다가오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웃긴 일이지만 놈들 사이에서도 서열이 확실한 것 같았다.
김원진을 제압해서 뒤로 물러나게 만든 이만석이 다시 최강철을 보면서 공터 중앙으로 이동했다.
놈의 얼굴에는 여전히 비릿한 웃음이 흐르고 있었는데 최강철과의 싸움을 통해 오랜만에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싶어 하는 기대감이 담긴 것이었다.
“저놈이 나와 한판 붙고 싶다는 말 들었지. 이건 내 싸움이니까 너희는 끝날 때까지 끼어들지 마. 우리한테 덤빈 것에 대한 처벌은 그다음이야. 알았어?”
완전히 양아치의 전형적인 행동.
이만석은 최강철과의 싸움이 끝나면 패거리들에게 먹잇감을 넘겨주겠다는 말을 자연스럽게 하고 있었다.
최강철이 교복을 벗고 공터로 나간 것은 놈의 말에 패거리들이 하이에나처럼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리고 있을 때였다.
“이 새끼들이 완전히 좆 까는 소리를 하고 있네.”
최강철은 런닝만 입은 채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이만석에게 다가가며 지체 없이 주먹을 날렸다.
선전포고? 그런 건 없다.
비겁한 싸움이 시작되었으니 오직 짓밟은 일만 남았을 뿐이다.
움찔하며 뒤로 물러서는 이만석의 안면에 정확하게 잽을 날려 균형을 무너뜨리고, 최강철의 오른쪽 스트레이트가 번개처럼 터졌다.
쉬익!
피하고 싶다 해서 피할 수 있는 주먹이 아니었다.
빠르게 뻗어나간 정권이 놈의 코를 가격하고 돌아오는 순간, 최강철이 접근하면서 놈의 비어 있는 좌우 복부를 갈겼다.
태권도 2단에 빛난다던 이만석이 복부를 맞고 허리를 숙이는 순간, 사이드스텝으로 돌았던 최강철의 좌우 스트레이트가 또다시 그의 안면에 작렬했다.
설명은 길었지만 불과 10초도 안 된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만석은 그 짧은 시간에 사지를 늘어뜨리고 바닥에 추욱 늘어졌는데, 뒤에 있던 패거리 놈들은 아직도 벌어진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버벅거리는 중이었다.
이만석이 쓰러지자 최강철은 곧장 몸을 돌려 그런 놈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맨 앞에 각목을 지팡이 삼아 구경하겠다며 서 있던 김원진이 첫 번째 제물이었다.
최강철은 번개처럼 접근해서 김원진의 안면에 강력한 스트레이트를 꽂아 넣은 후, 그 옆에 서 있던 놈의 관자놀이를 가격했다.
급소를 맞은 놈들이 바닥에 쓰러지는 순간, 최강철의 몸이 그대로 뒤에 있는 놈들을 향해 움직였다.
냉철하게 이어지는 판단력은 놈들이 바닥에 있는 무기를 들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 먼저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그의 행동은 급속했고 무차별적이었다.
양 떼에 뛰어든 맹수.
순식간에 친구들이 쓰러지는 걸 보며 당황한 놈들은 최강철의 공격에 제대로 대응조차 못 하고 얻어터졌는데 한 방 한 방에 전의를 상실했다.
최강철의 주먹은 무시무시했다.
그의 주먹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밤안개 패거리들이 픽픽 나가떨어졌다.
뒤늦게 몇 놈이 주먹을 휘두르며 덤볐으나 위빙과 더킹을 이용해서 놈들의 공격을 무력화시킨 최강철의 반격에 얼굴을 얻어맞고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최강철은 마치 야차와 같았다.
패거리들이 전부 땅에 처박혀 신음을 흘렸으나 그는 그런 놈들을 향해 다가가 하나씩 곤죽을 만들었다.
“살려줘, 잘못했어. 아악… 아이고, 나 죽네!”
놈들의 비명이 사방에 흘러 다녔다.
그러나 최강철은 절대 그냥 돌아갈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특히 최강철은 이만석과 김원진을 집중적으로 팼는데, 시간이 흐르자 놈들은 고통을 참지 못하고 바지에 오줌까지 지렸다.
한번 손을 댈 때 확실하게 대지 않으면 다시 덤빈다는 것을 경험으로 너무나 잘 안다.
그럼에도 이전 삶에서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예전에는 알면서도 못 했던 행동들이었으나 변해 버린 그의 강철 같은 심장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놈들을 박살 내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패거리가 전부 바닥을 설설 기며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 이성일이 달려들어 최강철을 붙들었다.
그대로 두면 놈들을 모두 죽여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성일의 행동에 최강철이 들어 올렸던 주먹을 천천히 거둬들였다.
최강철이 입을 연 것은 바닥에 쓰러졌던 놈들이 그의 눈치를 보면서 여전히 비명을 지르고 있을 때였다.
“지금 이 순간을 잊어버리지 마라. 성일이 때문에 지금은 돌아가지만 다음에 다시 이런 기회가 온다면 그땐 확실히 죽여주지. 내 말이 믿기지 않으면 다시 덤벼도 좋다. 언제든지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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