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환생-4화 (4/308)

[4]

“야, 일어나, 인마. 선생님 들어오신다.”

누군가가 거칠게 흔드는 손길을 받으며 정신이 서서히 돌아왔다.

거대한 바위와 몸이 부딪치는 순간, 하얀 광채에 사로잡히며 정신을 잃었는데 막상 누군가가 자신의 몸을 흔들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눈을 뜨자마자 벌떡 몸을 일으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그를 향해 꽤 많은 놈이 시선을 보내오며 어이없다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바위가 눈앞으로 다가오는 순간, 루시퍼와의 대화가 자신이 만들어낸 상상이라고 생각했었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으나 끝없는 분노와 슬픔이 그런 망상을 만들어낸 것이 분명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막상 정신을 차리고 교실과 그 옛날 같이 공부했던 친구들의 모습이 확인되자 온몸에 오한이 돋았다.

정말 돌아왔다.

루시퍼에게 보내달라고 했던 그 시절로.

“너도 참 병이다, 이 자식아. 어째 점심만 먹으면 병든 닭처럼 맨날 자빠져 자냐?”

최강철이 머리를 문지르며 슬그머니 자리에 주저앉자 옆에 있던 놈이 옆구리를 찔러 왔다.

이성일.

자신과 함께 중학교 때부터 친했던 불알친구였고, 마지막 죽기 직전까지 함께해 준 인생의 동반자였다.

놈은 돈이 없어 쩔쩔매는 자신에게 잔소리를 하면서도 없는 돈을 긁어모아 수시로 도와주었고, 자신의 슬픔과 기쁨을 언제나 함께한 친구였다.

짧게 자른 머리, 콧구멍이 보일 정도의 들창코. 어린 얼굴이었지만 분명 놈은 이성일이 맞았다.

친구의 얼굴을 다시 보게 되자 반가움이 미친 듯이 몰려왔다.

와락 달려들어 몸을 끌어안자 이성일이 불에 덴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최강철을 밀쳐냈다.

“이놈이 미쳤나. 너 내가 여자로 보이냐? 왜 갑자기 끌어안고 그래!”

“갑자기 네가 예뻐 보여서.”

“지랄한다. 자고 일어나더니 아직도 정신이 정신을 못 차린 모양이네.”

이성일이 째려보는 것을 보면서 비실비실 웃음이 나왔다.

놈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은 말과 다르게 여전히 따뜻했다.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자신의 몸을 확인했다.

허약한 몸매.

키는 178㎝로 제법 큰 편이었으나 몸무게는 60㎏이 겨우 넘을 정도로 마른 모습이었다.

죽기 직전에도 비슷한 체형이었지만 나이가 든 이후에는 배가 불쑥 튀어나왔었는데 지금은 거의 절벽 수준이었다.

루시퍼에게 다시 돌려보내 달라고 했던 시간은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더없이 푸르고 푸르렀던 청춘의 한 귀퉁이부터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막상 약골인 자신의 몸을 확인하자 루시퍼의 약속이 잘못된 게 아닌가란 의구심이 들었다.

최강의 체력과 운동신경을 준다고 했는데 자신의 몸은 예전과 하나도 달라진 게 없었다.

“성일아, 오늘이 무슨 날이냐?”

“오늘따라 이놈이 왜 이런데. 갑자기 무슨 날이라니? 절대 내가 멘스하는 날은 아니니까 눈에서 눈곱이나 떼라, 이 자식아.”

“인마, 장난하지 말고. 오늘이 며칠이야?”

“하아, 미치겠네. 5월 13일 목요일. 지금은 점심시간이 끝나고 지겨운 수학을 배울 시간이시지. 됐냐?”

“올해가 1980년 맞지?”

“너 자꾸 그러다 맞으면 더 아프다. 나 이제 슬슬 신경질 나거든.”

이성일이 엉뚱한 질문을 하는 최강철을 향해 슬그머니 손바닥을 올렸다.

한 번만 더 이상한 짓을 하면 응징을 가하겠다는 신호가 분명했다.

그랬기에 최강철은 피식 웃으며 놈의 팔을 끌어내렸다.

“인마, 나쁜 꿈을 꿔서 그래.”

“무슨 꿈인데?”

“그런 거 있어.”

사실을 말해줘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을 말해줘서도 안 된다.

때마침 수학 선생님이 검은색 출석부와 교과서, 몽둥이를 들고 교실 문을 열었기에 최강철은 이성일에게서 눈을 돌린 후 수학책을 꺼내 책상에 올려놓았다.

그가 다닌 고등학교는 영등포 외곽에 있는 정문고등학교였다.

명문과는 한참이나 먼 고등학교였고, 학생들의 수준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워낙 부모들의 삶이 열악했기 때문에 과외는 생각지도 못했고, 자식들이 어떻게 사는지 챙기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그건 최강철도 마찬가지였다.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고등학교에 들어올 때까지 성적 가지고 부모님께 혼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한 반의 학생수가 60명에 달했고 1학년만 해도 9개 반으로 구성되었는데, 거기서 최강철은 중간 정도의 성적이었지만 사는 게 빠듯했던 부모님은 성적에 대해 연연하지 않았다.

어차피 공부를 잘해봤자 대학에 보낼 형편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임시 공무원으로 근무하면서 트럭을 운전했던 아버지는 6남매를 건사하느라 허리가 휘어질 정도였고, 어머니는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매일 전쟁을 치렀기 때문에 최강철에게 신경 쓸 새가 없었다.

수학 선생님은 교과서를 편 채 열심히 수업을 했지만 듣고 있는 놈들은 절반도 채 되지 않았다.

다른 짓거리를 하는 놈들 대부분은 최강철과 비슷한 환경을 지닌 놈들로서 공부보다는 다른 것에 관심이 많았다.

무협지를 보는 놈들이 있었고, 꾸벅꾸벅 조는 놈들도 부지기수였다.

최강철이 중간 정도의 성적을 나타낸 것도 이런 놈들의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은 시험 며칠 전부터 공부를 했지만 다른 놈들은 아예 공부할 생각조차 안 했기 때문에 뒤로 줄을 선 놈들이 운동장 한 바퀴가 넘었다.

아직도 자신의 현 상태가 꿈꾸는 것처럼 느껴졌으나 최강철은 수학 선생님이 칠판에 써 내려가는 내용을 바라보며 눈을 오므렸다.

예전에는 전혀 이해되지 않았던 내용들이 선생님의 설명을 듣자 마치 솜이 물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이해되고 있었다.

그것은 다른 수업도 마찬가지였다.

과학과 역사 수업도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며 교과서를 읽어 내려가자 머릿속에 각인이 되는 것처럼 틀어박혔다.

체력과 운동신경은 몰라도 최고의 두뇌를 주겠다는 루시퍼의 약속은 지켜진 게 분명했다.

희망이 피어올랐다.

이제 다시는 과거와 같은 비참한 인생을 살지 않을 수 있다는 희망이 말이다.

모든 수업이 끝나고 담임선생님의 종례가 끝나자 마음이 급해졌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면 그토록 보고 싶었던 부모님과 형제들을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강철아, 농구하자.”

“안 돼, 오늘은 일찍 집에 가야 해.”

이성일이 붙잡았으나 최강철은 가방을 챙기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최강철을 향해 이성일이 눈을 부라렸다.

“그냥 간다고? 정말로 그냥 갈 거야?”

“엄마가 일찍 오라고 했다. 심부름 시킬 게 있나 봐.”

“어이구, 네가 언제부터 효자였어. 이 자식아, 오늘은 정태 패거리와 떡볶이 내기하기로 했잖아!”

“미안, 네가 나 대신 그놈들 혼내줘라. 떡볶이도 내 거까지 2인분 먹고. 내일 보자.”

최강철이 어깨를 툭툭 치면서 빠져나가자 이성일의 입에서 늑대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들의 유일한 취미는 농구였다.

그렇다고 아주 잘하는 것은 아니었고 비슷한 놈들끼리 팀을 짜서 시합을 했는데 룰도 파울도 없는 그야말로 동네 농구였다.

그럼에도 최강철과 이성일은 거의 매일 학교에 남아 농구를 했다.

어차피 집에 가봤자 할일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청춘의 뜨거움을 해소할 곳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 * *

학교에서부터 집까지의 거리는 3㎞가 넘었으나 최강철은 책가방을 둘러메고 달렸다.

아직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겠지만 어머니는 집에 계실 것이다.

너무나 보고 싶었던 얼굴.

오래전 치매를 앓다가 돌아가신 어머니는 그에게 더없이 소중하면서도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큰형과 둘째 형이 부모님과 절연을 했기 때문에 당뇨가 심해진 어머니를 어쩔 수 없이 3년 동안 모시며 살았으나 그 시간 동안 어머니에게 수많은 상처와 슬픔을 주었다.

아내였던 이선영은 어머니를 모시는 걸 극렬하게 반대했기 때문에 많은 다툼을 해야 했는데 심지어는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싸우기도 했다.

아마 어머니는 그와 사는 내내 엄청난 고통에 시달렸을 게 분명했다.

아내의 냉대를 맞으며 외로움과 싸우는 나날들이 거듭될수록 어머니는 쇠약해져 갔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쌓이면서 결국 치매라는 죽음에 직면했다.

더 이상 모실 수 없다며 집을 나가겠다는 아내의 주장에 결국 요양원으로 어머니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때의 어머니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어머니는 승용차의 뒷자리에 멍하니 앉아 계시다가 조용하게 그를 불렀다.

“강철아, 엄마… 버리지 마, 응? 강철아…….”

자신조차 알아보지 못했던 어머니가 그를 향해 부탁하는 음성을 들으며 피눈물을 흘렸다. 운전대를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고 백미러로 어머니의 눈을 확인하면서 통곡을 해야 했다.

그럼에도 핸들을 돌리지 못하고 어머니를 요양원으로 모셨다.

그것이 어머니가 그를 알아봤던 마지막 순간이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는 당뇨가 심해지면서 각종 합병증이 합쳐져 조용하게 숨을 거뒀다.

멀리서 그리웠던 집이 보이기 시작했다.

파란 대문이 있는 기와집.

아버지가 칠백만 원을 주고 샀다던 그 집은 오래되어 낡았으나, 운전을 하면서 6남매를 키운 부모님의 소중한 안식처였다.

문을 박차고 들어갔으나 어머니는 잠시 외출을 하셨는지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 시간에 집에 있을 사람은 어머니밖에 없었다.

큰형과 큰누나는 결혼해서 분가를 해 나갔고, 둘째 형은 군대에 갔으며, 둘째 누나는 회사에, 고3인 막내 누나는 아직 학교에 있을 시간이었다.

가방을 툇마루에 놓고 벌렁 드러누웠다.

하늘은 파랗고 5월의 봄 햇살은 너무나 따스했다.

지금의 이 순간이 꿈을 꾸는 것처럼 느껴졌다. 살아오면서 다시 살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을 느낀 적도 많았으나 실제로 이렇게 돌아오자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삐걱.

툇마루에 누워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철이 왔네. 왜 벌써 온 겨?”

“…엄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최강철이 문을 통해 들어오는 어머니를 향해 다가갔다.

대문을 통해 들어온 어머니는 주춤거리며 다가오는 아들에게 봄 햇살처럼 아름다운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