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환생-2화 (2/308)

[2] 제1장 시리도록 푸르렀던 그날로

최강철은 천 길 낭떠러지 다리 위에 서서 멀리 보이는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지평선은 하늘과 땅을 이으며 아름다운 경계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죽을 때는 말없이 고독하게 죽는 것이 좋다.

그래서 찾은 곳이 바로 밴쿠버 시내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휘슬러계곡이었다.

번지점프로도 유명한 곳이었는데 겨울이라 그런지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죽기를 결심한 이유는 비참하면서도 간단한 것이었다.

한평생 멋있게 살고 싶었으나 인생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니었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삼류 대학을 겨우 나와 중소기업에 취직한 그는 일주일 전 일방적인 해고 통보를 받고 실업자가 되었다.

노동법을 들먹이며 버틴 그에게 회사에서 내린 조치는 직원들이 다니는 복도에 책상을 내주는 것이었다.

부끄러웠으나 참고 견뎠다.

평생을 바친 직장에서 이토록 냉정하게 내쳐지면 분노를 느끼는 것이 당연했으나 그 분노는 현실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를 차디찬 의자에 앉게 만들었다.

돌봐야 할 가족들이 있었고 그가 무너지면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까지 같이 무너진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었다.

아내와 아이들은 이곳 이국땅 캐나다에서 벌써 7년 동안 공부를 하고 있었다.

두 아이의 학비를 부담하는 건 중소기업의 만년 부장에게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혼한 지 15년 만에 겨우 마련했던 33평 아파트를 3년 전에 처분해야 했고 두 달 전에는 13평 전세금마저 빼서 보내주고 월세방에서 살았다.

그럼에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그의 숙명이자 책임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나이는 이제 성년이 다 되어간다.

큰아들은 20살이 되어 대학교에 들어갔고 둘째 딸은 18살이었다.

처음에는 자주 통화를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아이들의 목소리를 듣기가 어려웠다.

머리가 커지면서 통화가 되어도 전화하는 시간이 점점 짧아졌고, 그마저도 최근 1년 동안은 아예 통화가 되지 않았다.

하긴, 그것은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통화비를 걱정했으나 일주일에 한두 번씩 꼭 전화를 하던 아내는 어느 순간부터 한 달에 한두 번으로 횟수가 줄어들었고, 이제는 자신이 전화를 해야만 겨우 통화가 되었다.

복도에서 일주일을 견디며 수모를 참고 있던 그에게 상무가 다가와 서류를 내민 건 추위로 인해 온몸을 쓰다듬고 있을 때였다.

난방이 들어오지 않는 복도의 싸늘한 기운은 그의 온몸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툭.

회사의 실세인 박 상무가 서류를 그의 책상에 던지며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그는 51살로 그보다 3살이나 어렸지만 벌써 3년 전에 상무로 진급해서 회사의 실세가 된 놈이었다.

“이게 뭔지 압니까?”

“뭐죠?”

“당신이 저지른 회사 공금 횡령에 관한 증거 자료요.”

박 상무의 말에 급히 서류를 살피던 그가 내용을 확인하고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서류에는 그가 대명산업과의 계약 대금 중 일부를 횡령했다는 것이 적혀 있었는데 무려 3억이나 되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랬기에 그는 박 상무를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나는 대명산업 업무에 전혀 관계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횡령이라뇨?”

“그렇게 오랫동안 직장 생활을 했는데도 무슨 뜻인지 모르는구만. 이보세요, 최강철 부장. 이 서류는 회사에서 당신이 떠나주기를 바라는 증명서요. 3일 주지. 그때까지 이 책상에서 일어서지 않는다면 당신은 집으로 가는 대신 경찰서에 가게 될 거요.”

여전히 비릿한 웃음을 지은 채 복도를 걸어가는 박 상무의 뒷모습을 보면서 최강철은 눈앞이 컴컴해졌다.

이제 끝났다. 자신의 초라했던 이 반항이 오래 가지 못할 것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회사에서 이렇게 치졸한 수법을 들고 나올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자신이 횡령을 했다면서 압박하는 회사의 수작에 대응하는 방법은 수도 없이 많다.

3억이란 거금을 횡령했다는 회사의 주장은 일방적인 것이었으니 변호사를 동원해서 싸운다면 이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길고 긴 싸움이 될 것이고, 자신에게는 그럴 여력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뻔한 수작질임에도 최강철은 박 상무가 던져준 자료를 보면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자신처럼 자존심을 팽개치고 거머리처럼 달라붙은 문제 사원을 처리하는 데 횡령만큼 좋은 방법도 없었으니 회사의 선택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25년간 일해왔던 직장에서 빠져나오는데 손에 들린 건 잡동사니가 들어 있는 박스 한 상자뿐이었다.

절망.

아직 그의 나이는 54살에 불과했으나 처참하게 길거리로 내몰리고 말았다.

회사에서 걸어 나오는 순간, 더 이상 아이들의 학비를 대줄 수 없다는 현실이 눈앞으로 바짝 다가서자 암담함이 몰려왔다.

조금만 생활비가 늦어도 쨍쨍거리는 아내의 목소리가 귓가에 환청처럼 들려왔다.

월세방에 들어가 소주를 마셨다.

지금까지 어려움 속에서 꿋꿋이 버텨왔으나 더 이상 가족들을 캐나다에 두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했다.

그나마 퇴직금으로 1억 5천만 원이란 돈을 받았기 때문에 마지막 희망은 남아 있었다.

비행기를 타고 주소 하나만을 든 채 밴쿠버로 향했다.

그 흔한 외국 여행 한번 해보지 않았고 영어조차 서툴렀기 때문에 두려움이 바짝 몰려왔으나 최강철은 초췌한 모습으로 주소를 찾아 반나절을 헤맸다.

주소는 밴쿠버의 외곽에 위치한 단독주택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단독주택은 제법 근사하게 지어진 목조 주택이었는데, 이 층이었고 잔디가 깔린 정원이 딸려 있어 자신이 보내준 돈으로는 절대 거주할 수 없는 곳이었다.

주춤거리고 다가가 초인종을 눌렀으나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근처 벤치에 앉아 1시간 동안 기다렸으나 집으로는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천천히 일어나 아들이 다닌다는 대학을 찾아갔다.

하지만 그곳에서 아들의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학교 관계자에게 몇 번이나 다시 물었으나 학생 중에서는 그런 이름이 없다는 것이었다.

허탈한 마음으로 딸이 다니는 하이스쿨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침 대학과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이스쿨에 도착하는 데 걸린 시간은 20분에 불과했다.

처음으로 이국 만 리 머나먼 타향 땅에서 가족들 중 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딸의 모습을 확인한 곳은 학교가 아니라 하이스쿨로 들어가는 입구에 마련된 공원에서였다.

몸서리치는 반가움에 달려가 딸을 끌어안고 싶었으나 최강철은 기둥 뒤로 몸을 숨긴 채 나서지 못했다.

딸은 가죽 자켓을 입은 채 사내놈의 품에 안겨 키스를 하고 있었는데, 그 주변에는 비슷한 차림새의 남녀들이 4쌍이나 더 있었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아직 수업 중이어야 할 시간에 딸은 공부 대신 불량한 놈들과 어울려 다니며 인생을 허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동안 딸의 기가 막힌 행태를 바라보다가 입술을 깨물고 되돌아 걸음을 옮겼다.

이게 아닌데… 이게……. 도대체 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버스를 타고 외곽까지 빠져나와 택시를 갈아탄 후, 왔던 길을 되짚어 아내가 살고 있다는 집을 향해 돌아갔다.

거기서 최강철은 또 한 번 충격적인 모습을 보고 말았다.

아내가 고급 차에서 내려 남자와 다정하게 저택으로 들어가는 게 두 눈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남자는 그곳이 제 집인 양 자연스럽게 아내를 데리고 들어갔다.

두 사람이 들어간 저택을 향해 미친놈처럼 뛰어가 초인종을 누르려던 그는 손을 거두고 정원을 돌아 뒤로 가서 안을 살폈다.

창문을 통해 아내가 늙은 놈의 품에 안겨 뜨거운 키스를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휴, 잠깐만. 우리 씻고 해요.”

남자의 뜨거운 키스를 받아주던 아내의 입에서 색기에 가득 찬 음성이 흘러나왔다.

아내는 그보다 5살이나 어렸는데 아직도 날씬한 몸매를 유지했고 얼굴도 예뻐서, 남자들에게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인다는 말을 주변 사람들에게 들어왔었다.

그럼에도 아내의 음성은 낯선 것이었다.

저렇게 다정스러운 목소리를 언제 들어봤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아내의 애교 섞인 목소리에 몸이 달아올랐던 남자에게서 여유 있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좋아, 선영. 그런데 언제 이혼할 거야?”

“곧 할 거예요. 3일 전에 이혼 서류를 보냈으니까 곧 소식이 올 거야. 그 남자, 고지식해서 쉽게 해줄 것 같지 않지만 어쩌겠어, 내가 살기 싫다는데.”

“그럼 이혼 문제는 나중에 해결하고 우리 식부터 올리자. 결혼만 하면 이 집은 완전히 당신 게 되잖아. 그동안 코 묻은 돈 받으면서 얼마나 찜찜했는지 몰라. 나는 말이야, 이제 선영이가 없으면 잠을 못 자겠어.”

“호호호… 거짓말.”

“정말이야. 선영이의 뜨거운 몸을 안아보지 못한 놈들은 이해하지 못할걸. 선영은 마치 뜨거운 용광로같이 나를 빨아들여서 하루라도 같이 있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어.”

“아이… 씻고 하자니까…….”

“괜찮아. 자기 몸은 안 씻어도 좋아.”

아직 해가 지지 않았는데 자신이 보는 앞에서 두 남녀가 뱀처럼 엉키고 있었다.

마치 에로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 장면이 마치 꿈처럼 여겨져 꼼짝할 수 없었다.

허깨비처럼 걸음을 옮겨 벤치로 향했다.

분노로 인해 칼을 들고 뛰어 들어가 두 사람을 찢어 죽이고 싶다는 생각 대신 최강철은 스스로를 자책하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멍청한 놈, 병신 같은 놈.

안 봐도 비디오다.

기러기 생활을 하면서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에 떠도는 불륜이 남의 이야기라 생각했는데 직접 자신의 아내가 다른 놈과 뒹구는 장면을 보게 되자 기가 막혀 꼼짝할 수 없었다.

그저 착하게, 열심히 사는 것만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결과가 겨우 이런 거였나, 하는 자괴감이 들었지만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었다.

한동안 멍하니 저택을 바라보다 천천히 걸어 택시를 타고 도심으로 향했다.

술을 마시고 싶었다.

이대로 정신을 잃을 만큼 술을 마시면 모든 것이 꿈이었던 것처럼 원래대로 돌아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명일까?

아니, 이건 운명이 아니라 누군가의 못된 장난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들을 본 것은 도심으로 들어가 택시에서 내렸을 때였다.

마치 히피처럼 머리를 기른 아들은 비슷한 놈들과 어울려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는데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고 있었다.

오늘 하루.

그의 인생에서 가장 지독한 장면들이 연속해서 이어졌음에도 아들이 으슥한 길거리에 앉아 마약을 코로 흡입하는 모습을 보게 되자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이런 모습을 보려고 내가… 그 힘들었던 시간들을 보냈단 말인가.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