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318화 (318/320)

終.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2)

청국 다음은 당연히 일본국 차례였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조선국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나라로 치는 나라라지만 (청국에서도 마찬가지로 조선국 다음으로 중요한 나라를 일본국으로 두고 있으니, 만년 이등 신세인 일본은 퍽 서러울 만도 하였다.) 청국과 확연하게 비교되는 것이 하나 있으니, 전시관의 규모는 비등할지언정 막상 고종대왕 순행에 얽힌 물건은 별로 보이지 않던 것이었다.

하다못해 그 흔한 기념우표도 고작해야 ‘일조수신(日朝修信) 50주년’ 등으로, 귀남 본인 방문한 것과 관련이 없는 것뿐이었다.

“일본국 방방곡곡 돌아다니니 참 만감이 교차하더이다. 머릿속으로야 눈앞 일본인들과 옛적 왜놈들 다른 것을 알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리 쉽게 고쳐지질 않으니 원.”

군밤장수 귀남이, 여기서는 백 년 전 일이지만 제게는 기껏해야 몇 년 전 일이었던 그때 일을 생각하며 산신령에게 말했다.

“허. 그래서 저리 기물 구성이 단출한 것이오? 구원(舊怨) 이어짐이 참 장구하구려.”

청국에서야, 북경 관광을 시작으로 만리장성 구경도 해보고, 강남에서도 온갖 수려한 풍경은 다 보았기에 이런저런 흔적을 많이 남겼고, 또 기념품도 군데군데 들릴 때마다 한움큼씩 챙기곤 하였다.

비록 조선 선비들만큼은 아닐지라도 귀남 역시 소싯적 글공부 가락이 있었기에, 눈앞 호수가 동정호라 하면 나름대로 감탄하고, 멀리 보이는 언덕이 옛 적벽 터라 하면 또 감흥 일어나곤 하였던 것이다. 물론 강남을 한때 제 집처럼 주유하던 김옥균이 옆에 있었기에, 그가 주상이 좋아할 만한 곳만을 추려서 함께 다녔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허나 일본국으로 말하자면 백 년 넘게 지난 지금도 감정이 ‘나쁘다’에서 ‘미묘하다’ 정도로 좋아진 것이 전부였다. 더구나 일본국에서 조선국 상왕 일행 맞이한다고 나온 이들의 좌장이 늙은 이등박문이었으니 오죽했을까.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 세상 일본 사람들이 그리 옹졸하지는 않았소. 또 일본국 풍광 둘러보니 의외로 마음에 맞는 곳도 없지 않았고.”

마음 같아서야 일본국 사람들이 저를 꽤 어렵게 여김을 알았기에, 여차하면 곤란한 구석만 쿡 짚어가며 골려주겠노라 하는 짓궂은 생각도 하였다. 예컨대 대판(오사카) 가서 풍신수길이 못된 작당하던 곳 어드메냐 묻는다던지, 양국의 항상 좋지만은 않았던 인연이 장구하다 보니 걸고 넘어질 건수는 한없이 많았다.

그런데 그런 궁리를 실행에 옮길지 말지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전에 그 사건이 터지고야 말았다.

“당시 공식적으로 만들어진 기념주화나 우표 같은 것이 없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산신령과 비슷한 반응을 이사장 귀남도 보이기에, 이 기이한 무리를 이끌고 안내하는 김미란이 먼저 설명에 나섰다.

“고종대왕께서 방일하셨을 때, 일본국 정세는 새 국주(國主)가 자리에 오른 뒤 겉으로는 잠잠해 보여도 그 이면에서는 분란이 조금씩 일어나고 있는 상태였지요...”

그제야 군밤장수 귀남도 무언가 떠오른 바가 있어 산신령에게 알려주었다.

“그러고보니, 그때 함께하고 있던 고균이 내게 전해준 은밀한 사정이 있었소. 이 사람 맞이하는 예를 두고 나라 안에 무슨 큰일이 나서, 쉬쉬하느라 아예 내 돌아다니는 이야기를 크게 떠들지 않았다더군.”

“허, 그렇소이까?”

조선과 함께 그 창의단 계획에 동참하여, 아주 삼국이 똘똘 뭉쳐서 그 후 강화회의에서도 목소리 큼직하게 낸 것은 좋았다.

그러나 그 직후 파란만장하였던 메이지 시대가 막을 내리고, 연호가 다이쇼(大正)로 바뀌면서 다시 일본의 앞날에 대한 고민과, 고민을 가장한 제 욕심 차리기가 재개되었다.

하나로 아주가 묶이고 그 가운데에 청국-‘지나(支那)’라는 명칭은 사장된 지 오래였다-이 있게 된다면, 일본은 그 버금가는 자리 정도는 노려야 할 것이었다. 물론 예전처럼 아예 아주 전체를 아우르겠다느니, 조선을 누르고 맨앞에 서겠다느니 하는 멋모르는 소리는 나오지 않았고, 어디까지나 아주 삼국의 협력체제 내에서 제2의 자리를 얻는 것이 논제였지만.

그리고 입헌정우회의 이토 히로부미와 그의 후계자 가츠라 타로(桂太郎) - 군부의 앞날이 깜깜함을 깨닫자마자 곧장 이토 편으로 돌아서서는, 노쇠한 이토의 파벌을 그대로 삼킬 궁리를 하고 있었다 – 에게 있어, 그 선결 과제는 결국 현인신(現人神)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국체명징(國體明澄)이었다.

총리 선거도 이겼고, 때마침 새로 발족하는 이 ‘유나이티드 네이션스’ 만국연합에서 청과 함께 아주를 대표하는 치적까지 절로 굴러들어왔기에, 가츠라 내각은 이제 슬슬 새 천황을 끌어와 권위를 높이고 지방의 옛 다이묘들 억누르는 계획을 실행에 옮기려 하고 있었다.

국회도, 선거도 다 좋지만, 군민공치(君民共治) 모양새 갖추려면 우선 군(君)이 바로 서야 할 것 아니겠는가. 나라의 가운데를 바로 세워 신주(神州) 역량을 한데 모아야 한다는 식의 케케묵은 논의가 마침내 그 위의 먼지를 털어내고 있을 무렵.

그 위엄을 스스로 걷어차겠노라 나선 사람 있으니 바로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다이쇼 천황이었다.

‘조선국 선왕께서 어려운 발걸음을 해주었는데, 마땅히 내 직접 나가 맞이하고, 또 전국까지는 무리일지라도 이곳 교토나 나라 정도까지는 함께 움직임이 가하지 않겠소?’

‘폐하... 하지만 그것은 전례없는...’

궁내대신(宮内大臣) 홀로 도저히 막지 못해 가츠라 본인을 비롯해 내각 고관들이 모두 달려와 만류하고 있었지만, 예전의 그 병약하고 사람 낯 가리던 태자 요시히토가 아니었다. 그토록 친하게 지내던 현 조선 국왕의 고집스러움이 묻어온 듯 싶기도 했는데, 한탄해보았자 때늦은 일이었다.

‘전례가 없기는. 옛날 노서아 황태자가 찾아왔을 때도 친왕이 직접 맞이하여 안내하지 않았소? 조선은 노서아보다도 훨씬 가깝고, 또 지금 오시는 분은 사사롭게는 내 벗의 아버지 되는 분이요, 또 우리 이웃나라를 수십 년간 이끌고 우리 일본국과도 연 깊으신 이외다.’

이 이치를 어찌 설명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들의 천황은 여느 나라 임금과 같으면서도 다르니, 세속의 군주인 동시에 그 이상의 무언가임을,

끝없이 전통과 전례를 의심하는 철저한 자유주의자나 급진주의자라면 모를까, 일본인 태반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그 이치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을 테다. 하다못해 천황을 ‘통치와 통합의 상징’으로 못 박아버린 ‘쇼군 총리’ 요시노부마저도 예외는 아니었을 터. 허나 그들조차 형용하지 못하는 바를 이 고집스러운 천황에게 전달하지는 못하고, 그저 막무가내로 말릴 뿐이었다.

‘부디 황실의 위엄을 생각해주십시오!’

‘위엄이라. 우리 일본국도 이웃 조선국도 다 같은 자주지방이라고 서로 확인까지 한 사이인데, 무슨 위엄 상할 일이 있소?’

‘폐하! 부디 재고를...’

그렇게 몇 번 더 ‘재고’ 소리가 오가고, 끝내 못이긴 대신들이 또 다른 사람을 불러오고... 그렇게 밀고 당기기가 이어지니, 본래 그리 깊지 못했던 천황의 인내심이 끝내 바닥을 드러내고야 말았다.

‘듣기 싫소! 천황도 사람이오! 사람! 만나고 싶은 사람 만나 하고 싶은 이야기 나누겠다는데 무슨 잔소리가 그리 많소?’

이번에는 ‘폐하!’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저 발언의 무게를 깨닫고 침묵에 빠진 이, 무게와 그 파장을 헤아리던 중 머리가 그만 멈춰버렸기에 입조차 닫지 못하고 있는 이. 어전에는 응당의 침묵이 내리게 되었다.

그리고 천황 요시히토는 씩 웃었다. 마침내 이 시끄럽고 귀찮은 무리를 다루는 술수 하나를 얻었구나!

“...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국 고위층 안에서는 대정(다이쇼) 천황이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이야기를 꺼내었다 하는 것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김미란이 마치 보충하듯 설명을 이어갔다.

“그랬기 때문에, 우선 대정 천황이 원하는 대로 일정을 진행하되 최대한 소란스럽지 않도록 하기로 암묵적인 합의가 이루어졌지요. 순행 당시의 기록이나 그에 관련된 기물이 청국에 비해 유달리 적은 것은 그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대정 천황의 결의는 이후 대황란 당시에 비로소 빛을 발하게 되었지요.”

‘천황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하고픈 것 하기를 원한다.’ 하면 경악한 주변 사람들이 끝내 요시히토의 뜻을 받들게 되는 이 기묘한 보도(寶刀)는 여러 해 뒤 미주발 대황란이 닥쳤을 무렵 비로소 빛을 발했다.

‘같은 나라의 같은 사람으로서, 이해를 함께하고 평안과 곤고(困苦) 나누면서 모두 용왕매진(勇往邁進)하자’ 하는 요지로 공표되면서 일본 내외 모두에게 전해진 이른바 ‘인간선언(人間宣言)’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 이 인간선언은 마치 옛 계사황란 당시 고종대왕께서 널리 담화 전하셨을 때처럼, 일본 전체에 희망을 북돋아주면서 마침내 일본국이 동양 삼국 중 가장 먼저 황란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물론 그럴듯하게 포장되었을 뿐, 그 선언의 시작은 그저 친한 옆집 형 아버지를 환대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 자리에 있던 일본국 대신들 또한 회고록에 ‘동양평화의 대세를 이어가기 위한 성단(聖斷)’ 운운하며 자세한 맥락은 의도적으로 은폐하였기에 전말이 모두 밝혀지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이 사람도 그때 고균이 전해주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사정이었소.”

일왕인지 천황인지, 퍽 곰살맞고 소탈한, 딱 저의 막내아들뻘 될 그 젊은이를 생각하며 고종 귀남이 씩 웃고, 이어지는 김미란의 설명도 유심히 듣던 산신령은 다른 이유로 재밌다 여기며 따라 웃었다.

일본이 다른 범속한 나라와는 다른, 신이 깃들고 또 신이 지켜주는 나라라는 그 관념. 지난 수십 년 굴곡진 역사로 인해 억눌렸을 뿐 뿌리 남아 있던 그 생각을 ‘현인신’ 본인이 스스로 베어 없앴으니, 동양삼국, 동양평화 운운하면서도 아련하게 그 동양이니 아주니 하는 나라들과 일본 사이에 스스로 세우던 벽을 무너뜨리는 첫걸음이었다.

지금 저 눈앞의 코 큰 조선인이 하등 거리낌 없이 ‘대정 천황’이라고 그를 호칭해줄 수 있는 것 역시 일부는 그 공이 있을 터.

대황란 이후로 동양 열국 중 국내총생산 2위 자리를 두고 조선과 일본이 여러 차례 경합하고, 마침내 인구에서 앞서는 일본이 조선 위에 있는 것이 익숙하게 된 지금까지, 서로 경쟁하고 놀릴지언정 증오하고 질시하지 않는 것은, 그 시작은 몰라도 전체를 통틀어 보면 결코 조선만의 공은 아니었다.

(물론 그와는 별개로 일인당 소득은 항상 조선이 우위였으니, 적어도 조선 쪽에서는 굳이 일본에 먼저 나쁜 마음 가질 이유가 적었던 덕도 있을 테다.)

가호자산기(家戶自算機, PC)로 상징되는 전자기술에 힘입어 다시 조선이 일본 제칠 기미 보일 때도, 또 그 이후 잠시 주춤하였다가 개국 육백 년대 효수대혁(爻數大革, 디지털 혁명)으로 조선이 또 한 번 앞설 기세 드러낼 때도, 딱히 규제하거나 싫은 소리 하지 않고, 어찌하면 옆 나라의 발전된 기술 들여와 일본이 잘 하는 일들 – 예컨대 그 ‘만화(漫畫)’ 및 그와 관련된 각종 장사들 – 에 유용하게 쓸 수 있을까 고민하는 식으로 양국 우의는 어쨌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어쨌든, 만에 하나 서로 거슬리는 일 있을까 걱정하였던 것 무색하게 편안하고 즐겁게 잘 노닐었다 해야 할 게요. 그러면서도 이런저런 덕담도 여기저기서 하고 다녔으니, 기록이야 그리 잘 남지 않았다 하더라도 뭐 얼마나 아쉬울 게 있겠소.”

후대에 연구하는 사람이야 골치 아프겠지만, 귀남이 알 바는 아니었다.

이제 구주 쪽으로 김미란 일행이 발걸음 옮기기에 뒤따라 움직이는데, 산신령이 피식 웃으며 반문하였다.

“허, 덕담도 하고 다녔소?”

“군밤장수 노릇이 임금 노릇보다 길었다지만, 그래도 들은 풍월은 적지 않았다 이 말이오. 더구나 즉석에서 그럴듯하게 원고 만들어줄 수 있는 천하의 유능한 인재가 옆에 있었는데, 덕담도 하고 할 수 있지.”

그러고 보니 육군대학에 들렸을 때였던가. 좋은 말씀 해달라 부탁하기에, 못할 것도 없거니와 따지고 보면 이 세계여행의 목적 중 하나가 바로 그런 덕담 하는 데 있었으므로 흔쾌히 받아들여 연단에 섰을 때 만났던 눈 똘망똘망한 젊은이 하나가 떠올랐다.

천하대란 이후 이 태평의 시대에 군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일지, 저의 생각 약간, 김옥균 생각 구분(九分)쯤 담긴 내용으로 죽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어째서인지 불만 가득해 보이는 젊은 장교가 손 들고 묻기를, 이 평화는 결국 물질의 힘으로 잠시 이루어진 불안정한 것인데, 그 힘이 다하게 되면 어찌 이를 지켜나갈 수 있겠느냐, 결국 언젠가 완전한 평화를 위한 새로운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하였다.

공손한 말투라지만 사실 따지고 드는 것에 가까운 물음이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왜인 가운데 간악한 사람 있는 것에 그리 놀라지 않는 귀남이었으므로, 준비한 반론을 꺼내려 하였는데, 역시 손 번쩍 들며 대신 반론하기를 청하는 장교가 또 있었다.

그가 말하기를,

‘설령 물질의 힘이 부족하여 눈앞에 난국이 닥친다 한들, 만국평화와 우의를 위하는 무적의 정신력으로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동양 문명은 정신의 문명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하는 것이었다.

후에 김옥균은 아무리 도덕과 문명이 중해도 저 청년은 논리가 너무 허황되다며 혀를 찼는데, 의외로 그 자리에 있던 일본인들은, 아직 젊어서 그런지, 아니면 귀남 옆에 있던 천황이 저도 모르게 고개 끄덕이는 것을 보아서 그런지 다들 그 엉성한 논리 펴는 젊은이 편을 드는 듯하였다.

이때 두 임금 앞에서 대립한 일로 인해 자존심이 강한 이시와라 간지(石原莞爾)와 자존심만 강한 무타구치 렌야(牟田口廉也)가 불구대천 원수가 되고, 인성으로 보나 군재(軍材)로 보나 내세울 것 전혀 없던 무타구치가 그 대결에서 결국 성품 모난 이시와라를 꺾고 승승장구하게 되었다는 뒷사정은, 귀남도, 산신령도, 또 그런 쪽 전공은 아니었던 눈앞의 김미란도 모두 모르는 바였다.

일본 다음으로는 가장 화려한 구주 열강들의 전시관이 펼쳐졌다.

화려할 수밖에 없는 것이, 천하에 딱히 중심을 논하기 어려운 지금도 어쨌든 유수의 강국들이 포진한 구주 대륙이요, 귀남 그가 유람할 때는 말할 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어설프게 석파란 따라 친 난초 그림이었다.

서화를 어설프게 아는 정도의 사람이라도, 나쁘지는 않지만 그리 훌륭하지도 않다고 단언할 만한 솜씨였다. 하물며 아버지 석파란을 지금도 천하제일로 여기는 귀남 눈에는 어떻겠는가.

그러나 그가 덕국 백림(베를린)에 닿았을 때, 히틀러 그 콧수염 젊은이가 저에게 정성 들여 표구한 저 그림을 건네주며,

‘전하시라면 이 그림의 진가를 알아봐 주시리라 믿습니다.’

하고 사람 좋게 웃기에, 차마 무어라 못했을 뿐.

이사장 귀남의 눈도 그쪽에 가 있는 것을 보았는지, 김미란이 설명을 시작했다.

“독일과 중유럽합중국을 오가며 활동한 아돌프 히틀러의 그림입니다.”

“히틀러라?”

이사장 귀남이 돌이켜보니, 언뜻 옛날에 그 히틀러라는 이름을 들어보기도 했던 듯했다. 천하를 누비면서 재해 구호활동을 하는 그 국제돌격대(International Stormtroopers)를 이끄는 사람이라 했던가.

“독일이 공화국으로 바뀌면서 지금은 거의 잊히다시피 했지만, 한때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손꼽히기도 했지요.”

“그런 이가 어째서 난초 그림을 다 남겼단 말이오? 여기에는 어쩌다 저 그림이 걸리게 되었고?”

“히틀러 수상의 취미이자, 정치에 투신하게 된 계기가 다름아닌 서화였기 때문이지요.”

모든 운동에는 상응하는 반동이 있기 마련. 전쟁의 충격이 조금은 가시고, 당장의 기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면서, 평화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도 조금씩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일반인들 보기에는 식민지의 해방이니 전략물자의 공동관리니 하는 것은 오히려 뜬구름 잡는 소리요, 지도의 국경은 그들 나라의 영광과 직접 맞닿는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국경 또한 위정자 사이의 합의로 만들어지는 가공의 관념이건만, 지도의 색깔을 자랑스럽게 여기게끔 하는 교육을 받은 세대에게는 꼭 그렇지는 않았다.

물론 실제로 전쟁을 겪은 이들, 그리고 그 가족 또는 유족들에게 묻는다면 당연히 그 모든 것보다 평화가 중하다 하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알자스-로트링겐(알자스 로렌)을 그대로 넘겨주는 것은 너무 후하다, 이 전쟁을 조금만 더 했으면 어쩌면 이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운운하는 소리가 조금씩 나오기는 했다.

비록 사회적 지탄을 받았기에 그런 소리는 기를 펴지 못했지만, 그래도 저런 주장 펼치는 자들도 있더라 하는 정도로는 소개가 되곤 하였다.

딱히 독일인들이 유별나게 거만하거나 탐욕스러웠기 때문에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유럽 전체가 패배한 것과 다름없는 이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안착할 무렵, 퇴위한 빌헬름 2세의 뒤를 이어 다른 군주들도 하나씩 자리에서 내려와야만 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정치에 사실상 손을 놓고 있었지만, 개전이 기정사실화되자 정복전쟁을 통해 그간 실추되었던 위신을 되찾을 생각으로 군부를 적극적으로 지원한 합스부르크의 프란츠 요제프가 빌헬름 다음으로 노욕의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이어서 역시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여기는 이탈리아 국내 여론으로 인해 움베르토 국왕이 물러났고, 끝까지 버티려 노력하던 알폰소 13세의 스페인의 경우 당장은 무사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군주정 자체가 무너지기에 이르렀다.

아돌프 히틀러 상병이 만면에 함박웃음 지으며 뮌헨에 돌아온 것은 그런 뒤숭숭한 때였다. 그 웃음이 사라지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자신감 가득 품고서 제대로 붓과 먹물로 그린 그림은, 여전히 좋은 평을 듣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예전보다는 조금 낫다’ 정도의 평이었는데, 분명 무슈 최, ‘문명과 정의의 대공(文正公)’ 그분으로부터 친히 상찬을 받았다 여기는 히틀러의 성에 찰 리 없었다.

분명 동양인, 그것도 최익현이라는 명사에게 칭찬을 받은 그의 그림을 대체 왜 저들 비평가들과 화상(畫商)들은 도리어 박하게 평하는 것인가?

며칠 곰곰이 생각하던 히틀러는, 그가 보기에 더없이 합당하고도 자명한 결론에 이르렀다. 전쟁과 분란을 조장하고, 문명과 평화에 반대하는 사악한 자들, 유대인과 프리메이슨을 욕하면서 정작 그들은 더욱 음험한 짓을 하는 그들이 똘똘 뭉쳐서, 반전(反戰)의 기수로 나선 자신을 본보기로 탄압하려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나마 베를린이라면, 한때 반전시위까지 대대적으로 열렸다 하니 조금 나으리라 여기고서 무작정 상경하였는데, 평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저 악랄한 무리의 마수는 이미 독일 전역, 어쩌면 세계 곳곳까지 뻗쳐나가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예술에 천착할 때가 아니었다.

그런 결연한 의지를 담아, 때마침 베를린에 온 조선 전 국왕에게 전할 선물이자 출사표로서 히틀러는 난초를 쳤다.

“고종대왕의 순행에서 가장 큰 환영을 받은 곳은 역시 구주, 유럽이었지요. 보시는 것처럼 온갖 화려한 기념품들을 받으셨고, 또 순방을 기념하며 만들어진 주화와 우표 등도 적지 않지요. 하지만 대전이 끝난 후 평화가 안착할 때까지 가장 진통을 많이 겪은 곳 역시 구주이기도 했습니다.

히틀러 수상은 그런 혼란 속에서 덕국이라는 구주의 한 축을 맡아, 흔들리던 구주를 잠잠하게 하는 데 크게 일조하였지요.”

그의 독일평화주의노동자연맹은 다른 자유주의 정당들을 흡수하면서 한때 독일 최대의 정당이었던 국민자유인민당(Nationalliberale Volkspartei)으로 이어지게 되었다고, 김미란은 설명을 덧붙였다.

물론 본질적으로 어떤 특정한 사상이나 이념이 있다기보다는, 사회주의의 독주에 반대하는 자유주의자들, 보수파 내에서 비교적 온건한 쪽에 들었던 세력 등이 일종의 대안으로서 지지를 보낸 것에 가까웠고, 더구나 그 핵심 구성원 역시 히틀러의 평화주의에 진정으로 심취했다기보다는 개인적인 명예욕이나 권력욕에 따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결국 헤르만 괴링, 파울 요제프 괴벨스 등 당 중진의 비리와 부패 문제가 맞물려 국민자유인민당의 집권은 그렇게 오래 가지는 못했지만, 식민지 영향력을 차례로 상실하면서 불안에 휩싸이기 쉬웠던 프랑스와 영국을 한데 묶으면서, 아직 취약하던 유럽 내 협력체제를 이끌어간 공적은 부정할 수 없다고, 김미란은 짤막한 사설을 마쳤다.

“하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어쩌다가 지금은 이름도 잘 전하지 않게 되었단 말이오?”

“아무래도 끝마무리가 그리 좋지 않았던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의 공적이 핵무기라는 훨씬 심대한 사안으로 인해 묻혔기 때문이겠지요. 그에 대해서도 이어지는 전시관에서 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원자폭탄이라. 결국 그것이 성공하였다는 데 기대와 약간의 불안 함께 품는 군밤장수 귀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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