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316화 (316/320)

100. 이웃이 있으리 (6)

천하태평 장구토록 하고자, 세자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서 열국 주유하겠노라 하는 임금의 뜻이 전국에 퍼졌다. 일전에 전란으로 고통받는 구주 도우러 가자고 윤음 내렸을 때와는 또 사정이 달랐으니, 이번에는 ‘여차하면 임금 자리 내려놓겠다’가 아니라 그저 ‘내려놓겠다’였던 것이다.

그러나 논리가 다하고 말 꾸미는 재주 궁색하여 협박조로 꺼내었던 그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귀남도 진심이었다.

그리고 그 진심을 얕보거나, 어떻게든 어심 돌려볼 수 있으리라 여기던 신하들은, 언변이라면 몰라도 억지 부리는 재주로 따지면 그들의 주상께서 참으로 빼어나심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세자와 대군이 엎드려 간곡히 청하였건만 그마저도 효험 없었다고 하였으므로, 뒤이어 성균관의 문형(文衡)을 필두로 노신(老臣)들이 나아와 통촉하여 주시옵기를 재차 간청하였다.

그러자 귀남은 그들에게 들라 이르고서 하답하기를,

“내 임어(臨御)함이 벌써 오십 년이 되었으니, 그 사이 그대들을 비롯하여 여러 현량한 대소신료의 도움을 받아 공덕을 많이 이루었소. 무릇 공자께서 이르신 것처럼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일진대, 나로 하여금 계속 머물게 하려는 그대 또한 앞으로 족히 반백 년은 벼슬살이하리라 믿소.”

하였다.

환로(宦路) 길고 광영되는 것이야 수많은 신료들이 늘 꿈꾸는 바이건만, 지금 저 억지 주장에 끌려들어갔다가는 후에 어찌될지 모르는 것이었다.

또한 어제군밤 몇 톨씩 뇌물삼아 내려주면서 이르기를,

“내 이것이 누구를 시험하거나 충간(忠肝)을 가리려 하는 것이 아니외다. 세자가 장성한 지도 오래되어 벌써 나이 마흔이 눈앞이거니와, 여항에서도 치사(致仕)의 법도 본받아 기로(耆老)가 힘겹게 일하는 것을 금하였소.

그러니 나 또한 이미 화갑을 넘긴 몸으로써, 여러 사람들 하는 것처럼 물러나 쉬면서 천하를 둘러보고자 할 따름이오. 당장 그대들과 일가붙이들도 강남이니 유구국이니 다들 찾아가 유람하거나 휴양하거나 하지 않고 있소이까?

허나 경들의 충심만은 참으로 고맙소이다. 부디 그 마음으로 세자의 치세도 잘 보필하여주기를 청할 뿐이오.”

하니, 차라리 이 궐의 귀신이 될지언정 성상께서 대위(大位) 내려놓으심은 받아들일 수 없노라 각오하였던 이들은 도리어 그 충심으로 말미암아 말문이 막혔다.

이 문답이 밖으로 새어나가니, 젊은 신료들 또한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이미 노신들이 물러난 판에 저들끼리 또 나서기 저어되기도 하였고, 무엇보다 자신들은 잘못하면 정말로 오십 년 채울 수밖에 없게 될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발이 절로 무거워졌다.

‘죽여주시옵소서’ 하고서 엎드렸다가는, 허허 웃으면서 앞으로 수십 년은 더 사직의 동량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며 만독(萬毒) 합한 것보다도 무서운 덕담을 건넬 터였다.

이에 오 장성공(오페르트)의 애사(哀史)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공조에서는 ‘저리 말씀하시거늘 어찌 우리가 충(忠)과 불충(不忠)을 옛일만을 따라 판별하겠느냐’ 하는 말이 조심스레 나오고, 호조는 연명으로 상소하자는 자들을 내치고자 아예 궐외각사 대문의 빗장을 걸어잠갔다는 심상찮은 풍문까지 돌았다.

그럼에도 뜻 굽히지 않은, 참으로 대조선국 오백년 신도(臣道)를 몸에 새긴 이들이 없지 않았다. 임기 초에 횡액이라 대놓고 말할 수조차 없는 대흉(大凶)한 횡액을 당한 영의정 박은식이 급히 『실록』을 상고하여, 조종조에 이처럼 황망한 일이 또 있었는가, 그때 선정(先正)들께서는 어찌 어심 돌렸던가 그 사례를 살폈건만, 모두 허탕을 치고야 말았다.

임금이 스스로 부덕함을 말하면서 세자에게 양위한다 하던 경우는 있었고, 그 대부분은 부덕을 자인(自認)해서라기보다는 차마 함부로 말할 수 없는 다른 뜻을 흉중에 품고서 그리하였던 것이었다.

그러나 정말로 보위와 그 권세에 욕심 없이, 오십 년 했으면 족하지 않으냐, 나도 너희들 하는 것처럼 물러나 쉬고 싶다 하는 그런 일은 실록이 아니라 『춘추』부터 『통감』까지, 더 나아가 이십사사(二十四史)를 모두 뒤져본들 찾기가 난망하였다.

그때 김옥균이 찾아와 성상의 ‘진의(眞意)’를 전하니 – 본뜻의 일부에 불과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진의는 진의였다 – 이미 군밤으로 흔들린 결의가 마침내 와르르 무너지고야 말았다.

“신들이 어리석어 성상의 깊은 뜻을 미리 알지 못하였나이다! 마침내 천하를 위하여 성덕(聖德) 베푸시고자 옥체를 오히려 가볍게 여기시니, 신 등은 뒤늦게 깨닫고서 눈물이 흐름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신들이 세간의 헐뜯음을 백 번 당할지언정 이 성단(聖斷)을 두고 어찌 한 마디라도 더 하겠나이까?”

『경화시보』와 『청구시무』가 웬일로 비슷한 논조로 성상 물러나시고자 하시는 뜻과 그 성단의 전말을 전하니, 민간의 반응도 슬프고 아쉽게 여길지언정 차마 더 말리려 하지는 못하였다. 절로 눈물 나오는 사람들조차 그것을 삼키려 애쓰고, 스스로 다독이며,

“성상께서 그리하시기를 원하신다니 바라시는 대로 하시도록 도움이 마땅하리라!”

하곤 하였다.

일이 그렇게 되니, 말주변 없는 저와, 저보다 약간 나은 두 동생이 함께 달려들어도 돌릴 수 없는 어심이지만 문무백관과 만백성이 통촉하여주시옵기를 청한다면 필히 아바마마도 회심하시리라 여겼던 세자의 발에 불똥이 떨어진 것과 같았다.

온갖 근심걱정하며 창덕궁 거닐고 있는데, 조심스레 봄이 돌아오고 있는 부용지 지날 무렵 익숙한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세자는 어디를 그리 가는고?”

어디 갈 곳이 없어 배회하고 있노라 솔직히 고하니, 부용정에서 빼꼼 고개 내민 아버지께서 안으로 들라 말씀하시었다.

“실은 내관으로부터 네가 서성이고 있다는 얘기 듣고서 몰래 와서 기다리고 있었느니라.”

부왕 곁에는 사관은커녕 내관이나 궁인도 보이지 아니하였다. 두리번두리번 살펴보니 저기 부용지 건너편에서 이쪽을 바라보던 사관과 내관 둘이 눈 마주치자마자 급히 고개를 돌렸다.

필히 추상같은 어명으로 저기 멀리 가 있으라 명하셨을 것이었다.

통상 이럴 때면 앞에 화로라도 하나쯤 놓여 있곤 하였는데, 오늘은 그마저도 없었다.

“그래, 정말로 임금 노릇하기가 싫은 게냐? 그렇다면야 뭐, 몇 해쯤 더 못할 것도 없느니.”

하면서도 섭섭한 기색 용안에 역력하니 세자가 무겁게 답하였다.

“다만 두렵고 걱정될 뿐입니다.”

솔직한 답이었다. 아버지께서 인군(人君)으로 누리는 권세와 칭송이 그 임금 되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요, 반백 년 치세의 업적과 성덕(盛德)에 말미암은 것임을 익히 알았으니, 임금 자리가 욕심이 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렇기에 더욱 두렵고 괴로웠다. 지난해 일본국 국상(國喪) 조문하러 갔을 때, 언제고 저의 아버지도 떠나실 수밖에 없음을 알았기에, 그 전에 하고자 하시는 바 있으시다면 마땅히 들어드려야 한다 결의했건만, 아버지의 빈자리 채울 자신이 있느냐 하면 절대 아니요, 그 자리 채우고자 하는 욕심은 있느냐 하면 그 또한 없었다.

“무엇이 그리 두려우냐? 세자가 되어서 부왕 양위한다 할 적에 덥석 받았다고 누가 흉이라도 볼까. 그런 무엄한 놈이 있으면 내 살아있는 동안 아주 혼쭐을 내줄 터인즉 너는 염려치 말거라.”

사람 마음가짐이 한 번 정해지면 그에 따라 말투와 몸가짐도 달라지기 마련. 평소에도 그리 위엄을 차리지는 않았지만 지난 몇 달은 더욱 격의없이 말 꺼내는 귀남이었다.

“소자 나이가 이제 이립을 훌쩍 넘겼는데, 아바마마 보령이 소자의 절반도 채 되지 않으셨을 적 치세하시던 것을 보면 소자와 더불어 두 대군까지 뭉쳐야 겨우 반절을 따라갈 것입니다.”

“내 무엇을 그리 잘 했다고 그렇게 어렵게 여기느냐? 그저 사람을 얻으면 될 뿐이다. 더구나 내 너를 위하여 정사 제도를 편히 만들어 두었으니, 이제는 그저 백관에게 맡기고 가운데만 지키면 절로 이루어질 다스림 아니겠느냐.”

“그 사람 얻고 가운데 지키는 것이야말로 아바마마 치세의 요결 아니겠습니까.”

“인석아. 저기 정선방(貞善坊) 저자에서 군밤 팔던 꼬마아이가 요결을 알면 얼마나 알았겠느냐. 그저 남 믿고 맡기고, 누구 편들거나 함부로 해치려 하지 않고, 정 안 되겠다 싶으면 나쁜 놈들 하는 일에 온갖 훼방 놓으면서 좋은 쪽으로 팔 비틀고.”

정말로 말할 수 없는 그런 비결이라 해보아야, 이미 공안서에 잘 전해주었다. 예컨대, 청국 모택동과 조선국 김일성 두 사람이 언제고 나온다면 필히 예의주시하라는 것 정도가 있었다.

“또 누구 원한 쌓을 만한 짓은 하지 말고, 혹 그런 짓을 했다면 얼른 보상해 주고, 또 그 외에는 여력 되는 대로 주변 이웃들 돕고. 그렇게 하다 보니 절로 주변에서는 참으로 훌륭하다 떠들곤 하였지만 어디 거기에 무슨 엄청난 비법이 있겠느냐.

굳이 무언가를 더 말하자면 조금 운이 따랐고, 거기에 군밤 구워서 소소하게 인심 얻던, 그 정도가 있을 뿐이다.”

“...”

“네가 재주가 없다 싶으면 재주 있는 사람을 주변에 두고, 누가 재주 있는 사람인지 도통 모르겠다면 어떤 사람도 끌어앉을 수 있도록 베풀고 또 두루 사귀거라.”

그걸 잘 하는 것이 치세 요결 아니면 무어란 말인가? 고개 끄덕이며 부왕 말씀을 깊이 새기는 세자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의심하고 두렵게 여기는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털끝만큼 걱정이 있어도 얼굴에 동동 떠 있을 세자가 그리 근심하니 어찌 귀남이 모를까.

크게 숨 한 번 들이마시고 내쉬고는,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지 않던 이야기에 거짓부렁 한껏 덧붙여 늘어놓았다.

“실은 내게 비법이 하나 있느니라.”

“무엇입니까?”

“내 밤을 굽던 중 이인(異人)을 만난 이야기를 하였더냐?”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이 지금부터 한참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인데...”

산신령인지 뭔지, 저를 이곳 조선국으로 보낸지 수십 년 지나도록 얼굴 한 번 보이지 않는 자칭 단골 손님이라면 이름 한두 번쯤 팔아먹어도 되지 않겠는가.

“... 하니, 아 글쎄, 저 북악산 산신령이라고 하지 않더냐. 그러고서는 껄껄 웃으면서 나보다도 못난 사람이 보위 오르면 어찌 될지 그것을 보여주었느니라.”

나라가 망하여 일본국 사람들이 와서 꿀꺽 삼키고, 온갖 패악질 부리다가 미국에게 당해 물러갈 무렵 나라가 두동강이 나고, 지독한 전쟁과 가난에 시달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십 년 만에 다시 번듯하게 일어난 이야기.

그 이야기 속에서도 귀남은 끝내 불행하였기에 마침내 산신령 만나 여기에 이르렀지만, 저의 아들을 위하여 그 부분은 쏙 뺐다.

“이 이야기에 교훈될 바가 있다면 무엇이겠느냐?”

두 손 꽉 쥐고 땀까지 흘리며 듣던 세자가 잠시 머뭇거리던 끝에 답했다.

“그만큼 위정(爲政) 무게 중한 것 아니겠습니까? 자칫 이천만 백성이 도탄지경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할지도...”

“아니지, 인석아. 설령 유별나리만큼 못나게 임금 노릇 하더라도 결국 이 나라는 절로 일어난다 이 말이다. 하물며 누구 원한 살 일 안 하면서 여기저기 두루 돕는다면 성세(盛世) 이루기가 여반장 아니겠느냐?

그러니 조금 못한들 뭐 어떻더냐? 사람들이 무어라 여기든, 네 나름대로 좋은 일 하면서 형제와 아들딸 잘 챙기고 우애롭고 화목하게 살면 그만이다. 걱정할 것도, 아쉽거나 분하게 여길 것도 없지 않으냐.”

아버지 말씀하신 이야기가 참일 공산이야 얼마나 되겠냐만, 그래도 그리 말씀해주시는 것이 참으로 감사하고도 뭉클하여 세자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아바마마 가르침을 반드시 흉금에 깊이 새기어 잊히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대단한 가르침 필요 없다는 가르침이었는데 무얼 깊이 새기려 하느냐, 이 녀석.”

그러나 가벼운 핀잔만큼이나 어느새 부자의 표정도 공히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위안 되었다면 슬슬 물러가보아도 좋으니라. 저기 사관에게는 얘기하지 말고.”

“예, 아바마마.”

세자는 그리 나갔다.

그로부터 한 달 보름 뒤, 경복궁 근정전에서 내선(內禪)의 예를 다하고 마침내 세자 척이 대조선국의 스물일곱 번째 임금으로 즉위하니 이때가 개국 오백이십이 년(1913) 오월이었다.

조종조 오백여 년에 초유(初有)라 해도 무방할, 기이한 즉위였다.

성복(成服, 상복 입는 절차)하지 아니하고 곧장 관면(冠冕) 갖추니, 대행왕(大行王)을 위하여 슬피 우는 소리도, 어좌(御座) 앞에서 사왕(嗣王)이 꺼이꺼이 우는 일도 없었다.

기이함이 그뿐이랴? 법궁 경복궁에서 임금이 즉위함도 누대(累代)에 걸쳐 없던 일이요, 청국을 포함하여 열국 대사들이 찾아와 하례함도 역시 없던 일이요, 수많은 사람들이 기차 타고 팔도와 그 너머에서 찾아오는 것도, 그 모든 것이 방음기 통해 중계되는 것도 역시 없던 일이었다.

흐뭇하게 웃는 상왕이 엄연히 계신즉, 악부 갖추되 풍악 연주하지 않는 관례도 없이 되어 장엄한 음악이 근정전에서 광화문까지 퍼졌다.

종친과 백관이 산호(山呼)하고 국궁사배 마친 뒤, 홍로(鴻臚)가 예필(禮畢, 예식의 끝)을 알릴 때까지, 눈물 흘리는 사람은 있을지언정 겉으로 호곡(號哭)하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앞날이 걱정되지 않아서 그런 것인가? 그럴 리 없었다. 마음 같아서야 예식 끝나고 아들 임금에게 축하하고자 다가가는 상왕의 발목을 붙잡고서, 저희를 버리고 어디 가시나이까 묻고들 싶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임금께서 말로는 이제 물러나 쉬기를 원한다 하시고, 실제로는 겨우 얻은 천하의 태평을 위하여 열국을 주유하고 순수하신다 하니, 그 이치를 들어 아는 이로써 어찌 그런 말을 이와 입술 사이에 감히 담을까.

모두가 하나같이 근심하고, 또 그로 말미암아 새삼스레 그들의 옛 임금께 감사하며, 이제 성상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그만큼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한다며 논설 싣던 여러 신보의 주장대로 그들 해야 할 일에 더욱 힘쓰고자 마음을 굳혔다.

그렇게 굳힌 마음은 몇몇 서생들을 제하면 며칠에서 몇 달 사이에 대개 풀어져 예전과 같이 돌아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는 남아 서책과 신보로, 또 말로 전하는 이야기를 통하여오래도록 유전(流傳)될 것이었다.

이미 큰일이 끝난 판에 오래 남아 있으면 서로 미련만 커진다며, 미리 해둔 여행 채비에 서둘러 마무리를 짓고 귀남과 아내 민씨는 한양을 떠났다. 아주대회에 개화당이 깊이 관여하고 또 벌열가 사업들 중 대회의 후원으로 인하여 연 깊은 경우가 많았기에 어차피 가야 했던 김옥균도 상왕 부부와 함께하였고, 대남 공산당과 한 번쯤 만나볼 생각이었던 전봉준도 옆을 지켰다.

상왕 전하께서 하내 아주대회를 친람하신즉 조선국 국사들은 모두 분발하여, 가장 많은 옥패를 얻었으니 이는 지난 남경 대회에서는 놓쳤던 영예라.

대회 끝나고 그 나라 젊은 임금과 만나 국정을 논하고 – 황제라는 칭호와는 별개로 깍듯하게 듣기에 귀남은 다소 놀랐다 – 대남에도 공산당 생겼다는 소식 듣고서는 전봉준에게 말하기를 무엄한 일 하지 않도록 각별히 얘기해두라 하였다.

그러고서는 배편으로 북경으로 향해, 황제 자이티얀과 어린 황태자를 만나 정담을 나누었고, 이어서 기차 타고 강남 유람 후 유구국 거쳐 일본국으로 향하였다.

뒤이어 서사국 주내부에 마침내 만국연합이 그 회합을 시작한다 하니, 상왕은 아라사, 아니, 소련을 거쳐 구주 향하여 열국을 방문하고, 조선국 사람들이 주내부의 만국연합 회당에서 연설하는 것을 참관하기도 하였다. 돌아오는 길에는 배편으로 토이기와 애급(이집트)에 들리고, 이어서 천축과 사돈 나라 섬라국 등도 고루 찾았다.

돌아와 한 해를 휴양하고, 뒤이어 약 마흔 해 전 그 나라 전 백리새천덕 구씨(율리시스 S. 그랜트)의 방문한 것에 마침내 화답한다는 명분으로 하와이국을 거쳐 미국과 여타 미주 나라를 돌았다.

이만하면 평생 어디 구경 못하고 산 것은 모두 풀리고도 남았다 할 것이라. 아내 민씨도 도합 오 년 여행이 끝날 무렵에는, 어디 갈 때마다 높이 추앙을 받고 장엄하게 예식 갖추어주는 것을 보고서, 끝내 풀리지 않은 미련이 모두 풀린 듯 후련한 표정이었다.

“이만하면 나쁘지 않은 팔자였소.”

서기로 따지면 1919년이 된 지 스물 하고도 하루가 지난 어느 날, 상왕 귀남이 문득 허공을 향해 말했다.

저 멀리 보이는 북악산을 보며 꺼낸 혼잣말이었다.

“평생 호의호식도 호의호식이거니와, 더불어 자식손주 모두 잘 사는 것도 보게 되었고, 어찌어찌 정 붙인 아내와 함께 해로하고 있으니, 이만하면 한참 남은 장사였지. 그렇고말고.”

그랬더니, 귀남의 귓가에 아스라이 바람 타고 사람 소리가 들려왔다.

“허허, 그만큼 맛난 군밤이었소이다.”

‘게 뉘 있는고’라 굳이 묻지는 않았다. 들은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또렷이 기억나는 목소리였다.

“그리고 장사 이문 남기기로 말하자면, 임자보다 오히려 세상 쪽에 훨씬 남는 장사였지, 무어.”

“근 육십 년을 조용히 있더니 이제 와서 말을 다 거는구려.”

“허, 세월이 벌써 그리 되었소이까? 이것 참.”

“이 양반이, 제멋대로 사람 넋 가지고 장난치고서는 이제야 나타나는 법이 어딨소?”

“장난이라니, 이 사람은 분명 임자에게 다 알려주고서 한 일이었는데... 그리고 산신령 신통력에 무슨 법이 있겠소? 임금 노릇 여러 해 하였으니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엥이.”

나타나자마자 불평에 시비 주고받는, 옛 군밤장수와 그 단골이었다. 그러나 그 전부터 맨날 허튼소리한다고 산신령에게 타박하던 것이 귀남이었으니, 그리 낯선 대화도 아니었다.

“북악산 나이가 반올림하면 이억 년은 족히 되었고, 내 산신령으로 지낸 것도 못해도 천 년은 넘었는데, 고작 수십 년 가지고서 아쉬운 소리 하다니, 단골 대하는 정이 영 아니구려.”

“얼마만에 보았는데 또 허튼소리 하기요?”

“허, 매정하기는. 좌우지간 이래 찾아온 것은 임자 팔자가 금일부로 끝날 팔자이기 때문이외다. 한오십년 살면서 세상의 온갖 사주팔자와 업(業)을 다 뒤틀어놓았으니 오늘밤 절명하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약조한 거래는 거래이니 이래 찾아왔소.

보니까, 여한은 딱히 없는 듯한데... 궁금한 것 있으면 물어라도 보시오.”

“뭐, 소원 하나쯤 말해보아라 하는 그런 것은 없소? 이왕이면 오래오래 장수하면서 손주랑 증손주 크는 것까지 보고 싶은데.”

“거, 사람 욕심 한 번.”

“삼천갑자 동방삭이도 죽기 싫어서 도망다녔다지 않소. 암만 호의호식 수십년에 여한 없다지만은 그래도 죽으라면 죽고 싶은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소.”

“아니, 이 사람. 몸이 워낙 멀쩡하고 덕도 많이 쌓아서 앞으로도 꽤 오래 무병장수할 터인데... 좌우지간 소원 들어주고 그런 것은 내 함부로 하지 않으니, 묻고픈 것 있으면 물어나 보시오. 싫으면 말고.”

“사실 몇 가지 있기는 한데... 이 몸 원 주인은 어찌 되었소? 또 조선국 망하려던 팔자는 어찌 되었고? 이왕이면 자손 대대로 잘 먹고 잘 살았으면 좋겠는데...”

“몸 주인 행방이야 그렇다 쳐도, 조선국 명운이라니, 그만큼 난리를 쳐 놓고서 아직도 안심하지 못하는 게요?”

“이왕 만났으니 확답 듣고야 싶지.”

“후... 좋소. 따라오시오. 마침 단번에 답해줄 수 있는 방도가 있으니.”

산신령 말하니 귀남의 넋은 그를 따라가고 몸은 방에 도로 들어가 이부자리에 편히 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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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진 것처럼 조선에서 양위를 거론하는 것은 전통적으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정치적 수단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태종대부터 내려오는 유구한 왕실의 보도로, 특히 취약한 정통성이 발목을 잡았던 선조(자업자득인 측면도 있지요)와 영조 등이 이를 자주 사용했습니다. 해외여행을 가고 싶어서 양위하는 경우는 조선은 물론이고, 세계사를 통틀어 보아도 그리 많지는 않을 듯합니다.

일반적인 상황에서 임금의 즉위는 장엄하되 슬픈 분위기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선양이나 반정으로 즉위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전임자가 사망하여 그 자리에 오르는 것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지요.

홍로는 통례(通禮)의 별칭으로, 국가의례를 관장하는 정3품 벼슬입니다. 각종 궁중 의례에서 행사준비 완료와 행사 시작, 완료 등등을 알리는 역할을 했지요. 원칙적으로는 전례에 해박한 사람이 맡아야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까지 전문성이 필요한 보직은 아니었기 때문에, 엉뚱한 사람이 낙하산 인사로 그 자리에 가서 해프닝을 일으키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고 합니다 (일례로 『영조실록』 영조 28년 4월 11일 기사에는 통례가 의례 과정에서 임금을 인도하기는커녕 자신도 혼동하여 절차의 앞뒤를 뒤바꾸거나, 걷던 중 임금 앞에서 자빠지며 ‘몸 개그’를 보이는 등 온갖 망신스러운 이야기가 기재되어 있습니다.).

대남의 ‘젊은 임금’이란 성태제(成泰, 타인타이)를 말합니다. 원 역사에서는 고종과 비슷하게 독립을 꾀하던 중 프랑스의 외압으로 인해 아들 유신제에게 양위하게 되었지요.

북악산은 서울을 둘러싼 다른 산들과 마찬가지로 중생대 쥐라기에 벌어진 대보 조산운동 당시 형성되었습니다. 꼭 그 기준이 아니더라도, 한 천 년쯤 살다 보면 수십 년 정도 차이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요. 서장에서 산신령이 ‘얼마 전’ 어느 꼬마의 황당한 소원을 들었다고 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귀염둥이 막내아들이 갑자기 실성하여 부모형제 낯도 못 알아보고 영문 모를 소리나 하고 있으니 일가가 발칵 뒤집혔는데, 요행히도 병약한 어머니를 알뜰살뜰하게 챙겨주던 인심 좋은 옆집 임씨 아주머니가 그 안쓰러운 사정을 듣게 되었다.

개국 육백이십이 년(2013) 올해 부로 나이 팔순인 김귀남 옹의 삶을 되돌아보면, 본인의 생각이야 어찌 되었든 그럭저럭 괜찮게 살았다고 할 만하였다. 아니, 한 백 년 전만 하더라도 그만한 팔자면 전생에 공덕 많이 쌓았다고들 할 테다.

그 나이 먹도록 정정하거니와, 저의 욕심만큼은 아니어도 적잖이 치부하였고 국장님 소리도 여러 해 들었다. 부부 금슬 좋지 못했지만 자손은 여럿 보았고, 개중 총명한 저의 둘째아들에게 자신이 일군 가업, 효자율제과와 육월당에 필적한다고 (저 혼자만) 자부하는 그 제과국을 물려주어 지금도 이름뿐이지만 이사장님 소리는 듣고 사는 것이다.

허나 그의 삶에 굴곡이 아예 없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으니, 무엇보다도 큰 시련은 소싯적 열 살 때 찾아왔다. 하룻밤 사이에 그 전의 기억을 모두 잊고서, 자신이 임자년 한성부 구름재댁에서 태어난 이명복이인 줄 알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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