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이웃이 있으리 (5)
한양에 서사국(스위스)으로부터의 낭보가 전해진 것은, 추거가 마무리될 무렵이었다.
각 나라 백성의 성화 못 이겨 끌려나오다시피 모였던 구주 삼국을 필두로, 전란을 완전히 끝내고 만국연합 발족하는 데 함께하겠노라 화약하였다 하니, 이미 반절 가까이 병력이 물러난 전선에서 허송세월하던 병사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시작으로 환호하는 소리가 서에서 동으로 퍼져왔다.
무엇보다도 창의단 보내었던 나라들은 더욱 열광하고, 특히 그 발원지라 할 수 있는 도성은 더욱 그러하였다.
물론, 영국 속번(屬藩)에서 어찌하면 통상 허용하는 시늉을 하면서 미국을 막아낼까 고민한다던가, 법-덕 양국 사이의 두 군(郡)의 물산 나누는 협약을 두고서 서로 밀고 당긴다던가 하는 일로 인하여 그 화약의 모든 절목이 이행될 때까지는 더 시일이 걸리겠지만, 동양 조선국에서까지 깊게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그에 반해 고 최익현의 시호 문제는 여러 사람의 신경쓰는 바였는데, 문충(文忠)과 문정(文正) 사이에서 의견 분분하던 것이 저 서사국 주내부 화약 소식 전해지면서 문정으로 기울었다.
화서 학통 이은 선비들은 그의 이룬 바가 천하의 도의를 헌양한 것이니 정암·우암(조광조·송시열)에 비하고도 남는다 말하고, 아무리 자유당이 옛 붕당 후예들의 화해를 도모했다 한들 ‘송자(宋子)’에게 감정 좋지 못한 집안의 서생들도 국조(國朝) 인물 대신 사마온공이나 범노자(사마광·범중엄)에 그 업적을 빗대었을 뿐 숭모하는 어조는 유사하였다.
자유당 일색으로 끝난 총리대신 추거와 참의대부 추거에 대해서도, ‘이번은 그럴만하였다’ 하는 것이 개화당과 공산당 양측의 생각이었다. 물론 다음 추거는 결코 순순히 물러나지는 않으리라 투지도 다졌지만.
이어서 일본국에서는 국주(國主)가 바뀌어, 사왕(嗣王)과 친분 있는 세자가 직접 현해탄 건너가 조문하는 일이 있었고, 또한 개국 오백이십일년(1912) 열려야 했지만 국사(國士) 할 사람 상당수가 구주에 가 있기에 끝내 순연된 하내(河內, 하노이) 아주대회도 이제 다시금 준비해야 할 것이었다.
조청일 삼국이 ‘아주’ 운운하면서 저들은 곁가지가 되었다는 데 은근한 불만 품고 있던 대남국(베트남)은 이번에야말로 무언가를 보여주겠다며 나라의 위엄 보이고자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는데, 그 일환으로 일본국 장기(나가사키). 청국 남경(난징) 등과 더불어 이전 대회 개최하였던 평양에도 사람을 보내어 배울 바를 배워가려 하고 있었다.
이처럼 다사다난한 세 해를 마치고 개국 오백이십이년을 맞이한 조선국은 나름대로 시끌시끌하였는데, 귀남을 놀라게 한 소식은 따로 있었다.
“허, 청일 양국이 정녕 그리하였다는 말이오?”
“예, 전하. 두 나라 정사(正使)들이 공히 전하기를, 이제 만국연방의 위세를 대주(大洲, 대륙)에 따라 나누게 되었으니, 반드시 동양 열국이 한데 묶여서 모두에 이익될 바를 함께 논의해야 할 것이라며, 그러한 기구를 만든다면 반드시 아국이 열국의 재추(宰樞) 되어야 하리라 하였습니다.”
귀국하여 며칠에 걸쳐 협상 전말을 고하던 김옥균이 귀남에게 아뢰었다. 귀남으로서는 기쁜 것과는 별도로 의아한 일. 물론 청국이야 그만큼 가깝고 또 믿음직한 우방이 조선이니 능히 그럴 만도 하지만, 감정 복잡미묘한 – 귀남의 전생에 비하면야 훨씬 낫겠지만 – 일본도 그에 동의하였다는 것이 놀라웠다.
“마침내 덕이 덕으로 돌아오니 참으로 잘된 일이오.”
“물론 덕으로 대한 지 수십 년이 되었기에, 서로 돕고 돕는 것을 익숙하고 기껍게 여기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지만, 다른 나라들이 한데 모여 힘과 목소리를 합친다 하면 우리 아주 또한 그리하여야 족히 대응할 수 있다는 심산도 있을 것입니다.”
성상에 대한 존중과는 별개로, 이제 따로 거창한 실직 맡을 일도 당분간 없으니 아뢸 말 아끼지 않는 김옥균이 첨언하였다. 그 자리 함께 있던 신임 총리 박은식은, 비록 그간 자유당과 정부 내각을 오가며 나름대로 경력 쌓았다지만 성상과 총신들 사이의 이러한 대화에 직접 참여함은 낯설었기에, 놀라서 물었다.
“하면... 결국 도의가 아닌 이익을 위한 모임이라 보시는지요?”
“어찌 그렇지 않겠소? 아무리 천하가 쟁투를 멈추었다지만, 나라의 이익을 따지는 것까지 멈추지는 않았으니, 설령 사이 돈독한 우리 삼국 사이라 한들 이는 다르지 않을 것이오.”
물론 박은식도 잔뼈 굵은 사람이라, 나름대로 그러리라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고균 대감쯤 되는 사람에게 저렇게 감춤 없는 말로 확언받음은 느낌이 달랐다.
더구나 자신이 무슨 지재 특출나서가 아니라 최익현의 덕으로 여기까지 왔다고 공언하며, 겸허한 몸가짐으로 네 해 국정 받들고 그 기조 이어가겠노라 천명한 박은식으로서는, 그 최익현에게 감명받아 천하 바뀐 바가 조금은 있었으면 좋겠다 여길 수밖에 없었다.
“이는 동양 바깥에 있어서도 매한가지요. 비록 성덕에 힘입어 금번 화약의 초안을 열국에 내보임으로써 이 만국연합의 틀을 잡기는 했으나, 이 또한 만세토록 불변하는 나라 사이 법도가 되기에는 전혀 충분치 않소.”
다른 사람도 아니요, 직접 다녀온 김옥균이 이리 말하니 듣는 박은식으로서는 연이어 찬물 끼얹음 당하는 심정이었다.
“당장 구주 각국이 지금처럼 국력이 잠시 쇠잔하였기에 군말 없이 받아들였을 뿐이오. 더구나 천축국을 포함하여 그 번속들을 자립지방으로 삼아 능히 스스로 다스리게 한다 한들, 반드시 뒤로 다른 수를 쓰고자 하겠지. 이 사람 또한 영법 양국에 그리하라고 권하였다오.”
커즌에게 그는 그렇게 ‘조언’했다. 인도의 독립 여론을 어떤 탄압으로도 잠재울 수 없다면, 차라리 분열시키고, 그러면서 설득시켜라. 인도에 영국의 지배가 가져다준 것들을 환기시키고, 그간의 정에 호소하고, 모든 수를 써서 그 민심을 얻어라. 총과 폭탄 대신 언론과 자본으로 싸움의 수단을 바꾸지 않는다면, 식민지를 둘러싼 투쟁에서 지배자들이 승리할 방도는 아예 없다는 것이 김옥균의 주장이었다.
물론 그렇게 하더라도 영국이 예전 같은 지배력을 유지하기는 그리 쉽지 않겠지만. 자칫 종속의 굴레 씌워질 뻔하였다가 빠져나와 비상하는 다른 나라들이 인도의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영국의 지배는 위협받을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만약 위협받지 않는다면, 위협이 되도록 미국을 끌어들이든, 청과 섬라를 끌어들이든 해야 할 것이고. (이 마지막 단서는 당연히 커즌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아직 그들의 손에 화포와 군영(軍營)이 있으니,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지지만은 않을 것이오. 그리 된다면 언제든 우리 또한 뜻을 함께 하는 나라들과 더불어 다시 앞에 나서야겠지. 도의를 겉에 두르고 이익을 취하든, 이익을 말하면서 도의를 취하든.”
전쟁 한 번 끝냈다고 절로 만사휴의(萬事休矣)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았지만 내심 기대했던 귀남과, 그 사실을 더욱 또렷하게 알고 또 그만큼 희망찬 기대도 더 크게 품고 있던 박은식에게는 그리 가볍게 들을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 자리 아니라면 또 언제 이런 얘기를 듣겠는가.
멀리서 열심히 만년필 놀리는 사관 또한, 궂은 표정으로도 손놀림 머추지 않는 것을 보면 비슷한 심정일 테다.
“결국 이 만국연합 또한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계속 모두가 힘써야만 겨우 유지될 수 있을 것이오. 짜임새가 공고하지 못하고, 설령 금성탕지(金城湯池)와 같다 한들 그 기반이 될 열강의 마음과 위세가 제각각이며, 자칫하면 왕업(王業) 대신 패업(霸業)에 오용될 수도 있으니.”
시시각각 박은식의 표정 어두워지는 가운데, 귀남이 말했다. “고균, 천하태평 지키기가 그리 어렵다 하여도 계책은 반드시 있을 것이오. 그렇지 않소?”
금방 망하였을 나라도 어찌어찌 여러 사람 도움 받아 일으켜 여기까지 왔다. 전쟁 없는 세상이라고 해서 안 될 것은 또 뭐란 말인가? 이미 한 번 이루어낸 일, 또 언제고 더 할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귀남이었다.
“이번 일로 말미암아 얻은 변화의 단초라면, 그 이익과 도의가 합치될 여지가 마침내 생겼다는 데 있습니다. 결코 다툼이 없어지지는 않겠지만, 이왕이면 서로 정의(情誼) 상하지 않으려 힘쓸 것이며, 그들이 그리 여길 때 모여앉을 자리 또한 마련한 것입니다.
비록 인의를 모두 이루었다고 하기에는 참으로 부족하지만, 성상께서 처음 보위에 오르셨을 때처럼 모두가 승냥이와 같이 서로 노리는 때로 돌아가기도 이제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제 감투 내려놓았다고 흉중의 모든 말을 털어놓다 보니, 쓸데없는 말꼬리가 하나 붙었다.
“적어도 한동안은 그러하겠지요.”
“허, 아직 장구지계(長久之計)에는 이르지 못했다는 말인가.”
“송구스럽습니다. 허나 이번 전란의 참혹함도 결국 시일이 지나면 잊힐 것이요, 당장 같은 구주라 하여도 그런 참화를 겪지 않은 나라가 적지 않습니다. 그때까지 밤섬의 일이 마무리된다고는 함부로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밤섬의 일이란, 저기 마포 옆에 있는 그 밤섬에 짓고 있는 격치물성청 부속 연구소를 말했다. 성상께서 직접 말씀하신 그 도호부 하나를 능히 없앨 수 있다는 흉포한 진천뢰를 연구하기 위해, 격치물성청 본청에서 쉽게 오갈 수 있으면서도 인마 오가는 것을 통제할 수 있는 곳에 자리를 마련하고 있었다.
미국 사람 후보(후버)가 큰일을 완수하여 북한강과 남한강의 치수(治水) 이루면서 한강의 범람도 잦아든 지금, 그만한 적소가 없었다.
그러나 적재적소의 형국을 마련한다 한들, 그 결과가 언제 나올지는 아직 전망하기조차 어려웠다. 자동차 기물의 힘을 몸 시리도록 겪고, 또 비행기 건으로 한 번 더 망신을 당한 이래로 성상께서 말씀하시는 이 기물 이야기는 어지간하면 믿는 김옥균이었지만, 그 성상조차 하루아침에 될 일은 아니라 말씀하셨지 않았던가.
물론, 귀남이야 일본에 원자폭탄 떨어진 것이 그가 연도 똑똑히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건이었기에 그리 단언할 수 있던 것이었지만.
“고균 대감, 하면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도의로써 여러 나라를 설득하는 것도 장차 갈수록 어려워질 것이요, 이번 전란에서보다 더 많은 나라들이 이익을 탐하여 서로 다툰다면...”
“최 문정공이 한 것처럼, 누가 열국 주유하면서 한 삼사십 년만 서로 싸우지 말고 잘 지내자고 권하는 것은 어떻겠소?”
이번 평화에 있어 논공행상을 굳이 한다면 단연 맨 앞에 있을 사람이 최익현이었다. 그를 좋게 기억하는 사람 중 하나로서 – 그렇지 않은 사람은 조선 전체를 뒤져보아도, 끽해야 이완용을 비롯한 한줌이 전부일 테요, 그나마도 지금 분위기에서는 혀 놀리지 못할 게다 – 귀남 역시 김옥균의 냉정한 평에 걱정이 슬슬 도졌다.
“비록 문정공의 이룩한 바가 가볍지 않으나, 이는 그 한 사람의 비범함에 힘입은 것으로 다시 이루기 어렵습니다. 사람을 얻어야만 비로소 성사할 수 있을진대...”
“이 사람이 간다면?”
“전하?”
“슬슬 임금 자리도 넘겨줄 때가 되기는 했지.”
뒤이은 옥음이 두 신하에 이어 저쪽 사관에게까지 전해졌다.
이윽고 만년필 툭 떨어뜨리는 소리를 끝으로 정적이 내렸다.
“천부당만부당하옵나이다, 아바마마!”
“되었다, 인석아. 네 나이가 몇인데 언제까지 ‘자(子)’ 소리 듣고 살아서야 되겠느냐?”
부복하고서 아니된다 아니된다 외치는 세자에게 귀남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더구나...”
말 잇기도 전에 다시 요란한 우당탕 소리. 보나마나 다른 두 대군 중 하나일 테다. 지축이 아예 울리지는 않으니 안양대군일 공산이 컸다.
“아바마마!”
“늙은 아비가 이제 좀 쉬면서 어미와 함께 천하 유람 좀 하겠다는데, 자식이란 것들이, 쯧쯧... 저들은 저기 어디냐, 영국도 가고 일본도 가고, 천하에 좋은 구경은 다 하고 왔으면서...”
냉큼 ‘감사합니다’ 하면서 양위 소식을 받아들이면 불효자가 되고, 그렇다고 저리 말씀하시는데 다시 통촉하여 달라 청하면 그 또한 불효자라.
그제야 저의 하고픈 말만 하는 게 아니라 살살 타일러야 한다는 데 생각 미친 귀남이 말했다.
“어차피 뜻은 아니 돌릴 것이련만... 우선 일어들 나라. 아직 바닥이 차가운데 뭣들 하는 게냐?”
아직 군밤 굽기에는 너무 늦지 않은 계절임을 다행스레 여기며, 간만에 그의 비기(祕技) 보이면서 아들들 설복시킬 생각을 했다.
“경양대군은 아니 오고 있더냐?”
“필히 곧 당도할 것입니다.”
그 와중에 곧이곧대로 세자가 답했다.
“규(안양대군)야, 내관에게 말하여 화로와 밤을 들고 오게 하거라.”
“예, 아바마마.”
넋이 반쯤 나간 안양대군도 저도 모르게 일어나 명을 받들었다.
나가고 나서야, 아마 저와 비슷한 표정일 궁인들이 여기저기 조용히 오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밖에서 기다리던 상선에게 곧장 어명 전하고서 부왕께 돌아가려 하는데, 익숙한 초로 서생의 모습이 언뜻 저 멀리 보였다.
“고균! 이보시오, 고균!”
“대군 대감을 뵙습니다. 필히... 그 큰일 때문에 입궐하신 것이겠지요?”
“그렇소이다. 조금 도와주시오! 형님, 아차, 동궁 저하께서도 극구 만류하고 계시지만 부왕께서 무슨 일이신지 어심을 크게 굳히신 듯하오.”
“아마 그러실 것입니다. 소생 또한 그에 일조하였으니 잘 아는 일이지요.”
“무어라? 이보시오, 고균!”
“나름의 장고 끝에 나온 방책입니다. 우선 들어보시지요...”
한 시진쯤 전에 있던 일을 김옥균이 풀어놓기 시작했다.
“뜻을 거두어주십시오,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김옥균이 먼저 부복하고, 박은식도 뒤따랐으며, 사관도 따라서 엎드렸다가 급히 몸을 조금 일으켜 옆에 떨어진 수첩과 만년필을 저의 앞에 가져다두었다.
“그러잖아도 조만간 물러남이 마땅하다 생각하고 있었다오. 내 일전에도 말하였지 않았소? 여차하면 직접 구주에 가겠노라고. 이 사람이 보위에 오른 것도 벌써 반백 년이 지났는데, 이만하면 슬슬 관둘 때도 되었지.”
어차피 물러난다 한들 호의호식하는 것이 끊어질 리는 없고, 저를 떠받드는 이들 마음도 어디 가지는 않을 것이었다.
임금으로서 누리는 권세 또한, 즉위 후 첫 몇 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어디를 가든 말 한마디 하면 가볍게 흘려듣는 이 없을 것이었다. 상왕이 되든 태상왕이 되든 이는 마찬가지일 터.
그렇다면 슬슬 하고 싶던 해외여행도 하고, 그러면서 저의 아들 대 골머리 앓을 일 조금은 덜하도록 손도 조금 써보는 그런 일을 해봄직도 하지 않은가?
그렇게 통촉 소리가 몇 번이나 울려 퍼졌을까. 임금의 뜻 또한 완고하여 결코 선대에 양위 말하던 때와 같지 않음을 김옥균과 박은식 모두 슬슬 체감할 무렵.
먼저 다른 말을 꺼낸 사람은 김옥균이었다. 반면 박은식과 멀리 (주저)앉은 사관은 총리대신이나 하던 사람이 그리한다는 데 다시 경악하였다.
“성상께서 원하신다면, 하유하신 바를 바탕으로 전대미문의 기책(奇策)을 꾸밀 수 있을 것입니다.”
정적 깨뜨리는 말에 반응이 교차하였다.
“오, 그렇소?”
“고, 고균 대감! 전하!”
“물론 전하의 성덕에 말미암아 태평함을 지키는 나라가 여럿 있으니, 그들이 크게 놀랄 것이지만, 이들을 타일러 계책에 함께하도록 달랜다면 충분히 가한 일입니다.”
지금 동양의 평화가 유지되는 데 성상 한 사람의 덕이 가장 크다는 것에 쉬이 반박할 사람은 드물고도 드물 터. 당장 창의단 결성될 때 성상의 옥음 한 번에 청국과 일본국이 대경실색하여 순순히 그 요청에 응한 것부터가 이를 증명하였다.
그러나 성상 보령이 김옥균 저와 같으니, 아닌 게 아니라 이제 슬슬 뒷일을 고민할 때이기도 했다. 당장 저부터도 본처 유씨의 자녀들과 여전히 보좌관 하는 안느장에게 무엇을 남겨주어 후환 없도록 할지 – 누굴 아끼고 사랑하는 것에 앞서, 저의 이름이 사후에도 깨끗하게 알려져야 할 것 아닌가 – 슬슬 고심하고 있었다.
한 사람의 덕에 크게 의지하는 구도라 함은, 그만큼 그 한 사람의 빈자리 또한 클 수밖에 없음을 뜻했다.
물론 김옥균이 그 청천벽력 같은 하유를 들은 지 1각도 지나지 않아 이런 것을 생각하고 있음을 박은식이나 다른 사람들이 알았더라면, 난신적자의 씨가 따로 있지 않았다며 비난 퍼부었겠지만.
“아니될 말씀이옵니다! 전하! 부디 하유하신 뜻을 거두어주시옵기를...”
“허나 일국의 국주(國主)로서 다른 나라에 함부로 찾아가는 것 또한 가볍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또 아무리 현량한 문무백관이 조정에 있다 하나 임금이 자리를 오래 비운다면 이 또한 가당치 않을 것이오. 그렇지 않소?”
“감히 아뢰옵건대, 이르시는 바가 온당합니다.
열국의 국빈으로서 천하를 주유하시되, 닿으시는 곳마다 서로 벗삼기를 말씀하시고 도타운 정을 쌓으시옵소서. 지금껏 조선을 이웃으로 여기지 않은 나라에 이르시면, 같은 하늘 이고 사는 사람끼리 이제부터라도 이웃으로 지내자 말씀하시옵소서.
그리하시면 능히 하유하신 뜻을 이룰 수 있으실 것입니다.”
“고맙소.”
여기까지 내막을 이야기하니 안양대군도 입이 쩍 벌어졌다.
후에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누구도 생각 못할 일을 거뜬히 행하시는 부왕과 더불어, 온갖 신기묘산을 발휘하였던 이 김옥균이 보통의 신료 축에 들리라 생각하는 것부터가 잘못이기는 했다.
“만국연합의 제도가 세워졌으니 해내(海內)에 천자는 더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덕 있는 누군가가 대신하여 순수(巡守)하여야 비로소 천하가 바로 되지 않겠습니까? 성상 전하의 이 뜻을 우리가 받들지 아니하면 누가 받들겠습니까?”
김옥균이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장난기 대신 의미심장한 결의만이 남아 있었다.
앞서 어전에서의 문답이 밖으로 퍼지게 되면, 김옥균의 이름 석 자를 곱게 읽어주는 사람은 한동안 조선 팔도에 아예 없을 것이다.
허나 그의 임금께서 마음을 이리 굳게 정하셨고, 지금까지 뜻하여 힘을 기울여온 바를 위하여 한 발 더 나서겠다 말씀하시거늘 어찌 가로막고만 있겠는가? 신도(臣道) 말하기에 앞서, 지금껏 걷고자 하는 길을 고수하여 마침내 오늘에 이른 그의 주군을 위하여 지켜야 할 의리였다.
더구나 성상의 성정에, 김옥균 그를 무어라 하는 사람이 나온다면, 다시 한 번 옥음방송을 해서라도 모두의 입을 틀어막으시지 않겠는가.
두 생각 중 무엇이 먼저 나왔는지, 김옥균도 알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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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법의 시작은 고대 중국에서부터지만, 시대가 흐르면서 여러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 중 한 가지 흥미로운 추세는 이른바 좋은 시호(미시美諡 또는 선시善諡)와 나쁜 시호가 점차 명확해지면서 일종의 ‘시호 인플레이션’이 일어난 것이었는데, 이는 조선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났습니다. 글 앞부분에 등장하였던 이유원도 요즘에는 모두가 ‘충忠’ 아니면 ‘문文’만을 원하기에 시호의 의미가 사라진다고 한탄한 바 있지요.
일례로 흔히 문신 시호 중 최고로 인식되는 문충공은, 왜 이 사람이 받았는가 싶을 만한 사람도 받아가는 경우가 종종 생기게 됩니다. 물론 청나라의 이홍장처럼 받을 만한 사람이 받는 경우도 있었지만요. 여담으로 최익현의 시호 논쟁에 언급된 범중엄, 사마광, 송시열, 조광조는 모두 문정 시호를 받은 문신들입니다.
순행(巡幸) 또는 순수(巡守)는 본디 천자의 예법으로, 『예기』는 5년에 한 번씩 천자가 사방을 순회하며 제후들을 고루 만나는 것을 순수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 이는 제후의 조회와 더불어 천조질서의 중요한 개념 중 하나였지요.
잘 알려진 것처럼 삼국시대 왕국들 역시 임금의 거둥을 ‘순수’로 지칭하였고, 조선도 마찬가지로 순행이라는 표현을 계속 사용했습니다. 다만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청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여러 다른 표현들을 사용하기도 했는데, 이 또한 순행에서 말미암아 나온 ‘행(幸)’자를 계속 썼기 때문에 눈가리고 아웅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대한제국 선포 후에는 다시 공식적으로 ‘순행’이라는 표현을 쓰게 되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리 의미 있는 것은 아니었지요.
지금은 무인도인 밤섬은 1960년대까지도 사람이 살고 있는 섬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여의도 개발과 한강 치수 목적으로 기반암이 폭파된 채 방치되었고, 거기에 다시 모래가 퇴적되면서 지금에 이르게 되었지요.
작중에서는 ‘후버 댐’이 여럿 생긴 덕분에 그런 치수의 필요성이 줄어들었고, 서울의 강남 방향 확장 역시 원 역사와는 다소 다르게 이루어지고 있어 밤섬이 원래대로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