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이웃이 있으리 (4)
닐스 보어의 새로운 원자 모형이나, 전쟁에서 구사일생한 – 헬리골란드에서 대패한 영국 해군이 과학과 관련 있는 모든 인재를 연구인력으로 차출해가지 않았더라면 일선으로 보내질 뻔하였던 것이다 – 젊은 영국인 헨리 모즐리(Henry G. J. Moseley)의 X선 분광법을 통한 방사성원소 연구법 등등.
학계의 쟁쟁한 사람들을 한데 모아두었기에 그만큼 함께 머리 싸매면서 고민할 건도 많았다. 거기서 희열을 느낀다는 점이 김가진이나 이 호텔 바깥의 일반인들과는 다른 부분이겠지만.
그러나 김가진이 꺼낸 이 ‘원자폭탄’은 그런 흥미로운 주제를 두고 이야기 나누던 – 또는, 이야기 나누던 중 갑작스레 찾아온 아이디어에 급히 수식을 끄적이던 – 사람들의 이목을 단번에 끌어모을 만한 것이었다.
“물론 방사능 붕괴로 막대한 에너지가 나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인간이 이용할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지 않습니까? 더구나 폭탄이라니...”
“퀴리 선생 두 분의 제자들이 모여 계산한 바에 따르면, 이론적으로 가능하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원리에 있어서는 아직도 빠진 부분이 그렇지 않은 부분보다 훨씬 많다고도 했습니다만.., 우선 한 번씩 보시지요.”
프랑스로 돌아온 이후에는 그 옛날 진령군에게 들었던 묘한 소리 - ‘관측이 결과를 바꾼다’ -를 바탕으로 한 추론으로 아인슈타인과 대립각을 세운 피에르 퀴리였지만, 조선에 머물 무렵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업적을 가장 먼저 아시아에 알린 사람도 또한 피에르였다.
아직은 방사성 동위원소와 그 붕괴 등에 대해서도 알려지지 않은 것 투성이였지만, 이곳 유럽의 과학자들과는 달리, 하임 바이츠만과 신채호를 위시한 한양의 격치물성청 젊은이들에게는 이미 답이 정해져 있었고,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지만 상상하면 되는 문제였다. 그러한 사고가 얼마나 학술적으로 허술한지는, 애초에 과학의 배움이 허술한 신채호가 알 바 아니었다.
그 결과 나온 여러 난삽한 가설들은, 오히려 이 솔베이 회의 학자들의 흥미를 한층 돋구었다.
“허어... 이론상 가능은 하겠군. 반감기가 짧은 동위원소로의 연쇄반응이라.”
“실험으로 증명되어야 할 전제가 한둘이 아닌데요. 과학적으로 흥미롭기는 하지만 아직 진지하게 검토하기에는 무리가 많은 추론들입니다.”
그 모든 가설이 기반으로 삼고 있는 질량-에너지 등가식을 고안한 아인슈타인이 골똘히 계산에 빠져있는 동안, 좌중에서 툭툭 평론과 반론이 나왔다.
“저는 과학자는커녕 제대로 된 학자도 아니기 때문에 여러 선생들의 그런 말씀에 대해서는 무어라 답변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여쭙고자 하는 바는 이렇습니다.
만약 이 가능성 중 하나라도 현실로 이루어져, 방사능의 무기화가 이루어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김가진 대꾸에 곧장 반문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글쎄요. 무기를 만드는 기술은 기술이고, 그것을 만들어 전장에 배치하는 것은 사람이지요. 과학 하는 사람으로서, 그런 정치적 활용에 대해서까지 고민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독일인 오토 한이 삐딱하게 물었다. 비록 국경 없는 과학자회가 솔베이로부터 받은 기금으로 시작한 국제회의라지만, 이 자리에 참여한 모두가 퀴리 부부의 그 이상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었다.
김가진이 무어라 반론하려던 차, 마리 퀴리가 먼저 그를 옹호하고 나섰다.
“반대로 묻지요. 그런 무기를 만든다면 과연 여러분의 양심에 저촉되지 않는 방식으로 그것이 사용되리라 장담할 수 있을까요?”
“이 가설 대부분은 현재의 과학기술로는 검증 자체가 불가능한 전제들을 근거로 삼고 있지 않습니까? 설령 그런 폭탄을 실제로 만들 수 있다 해도, 그 위력이 대단치 않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방사성 원소의 붕괴 과정에서 발생하는 에너지 전체를 사용하는 폭탄이라면... 지구 대기를 통째로 연소시킨다던가 하는 것도 가능할 수 있지요.
설령 이 모든 것이 허황된 공상에 불과하다 한들, 그것을 검증하는 것은 특정한 국가나 개인의 욕심이 아닌, 국제 평화와 과학의 이름으로 이루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국경 없는 과학자회의 주장에 동조하던 이들 여럿의 고개가 함께 끄덕여졌다.
“조그만 폭탄으로도 군항(軍港) 하나를 완전히 파괴할 수 있는 그런 위력이라고 전제한다면... 확실히 누군가 미리 관리할 필요가 있기는 하겠지요. 어느 한 나라가 먼저 손에 넣는다면 다들 따라서 만들든 입수하든 하고자 노력할 것이고,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누가 실제로 쓰는 일도 발생할 테니...”
계산을 얼추 마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마침내 의견을 내놓았다.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우리 조선국에서 예상한 이 ‘원자폭탄’의 가장 효율적인 활용 방법은 도시에 대한 타격입니다.”
김가진 본인은 별 생각 없이 덧붙인 말이었지만 – 본디 전쟁 일어나면 성 하나쯤은 통채로 어육(魚肉) 되는 것이 고금 전란의 슬픈 현실 아니던가 – 과학자들에게는 이전보다도 더 큰 충격을 주는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허... 설마 그렇게 쓸 리가...”
“아닌 게 아니라, 그렇게 쓰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지 않습니까? 이번 전쟁만 보더라도, 어느 누가 개전 초에 이리 될 줄 알았으려고요.”
그 뒤로는 우선 김가진의 제안을 마저 듣자는 데 좌중의 암묵적 동의가 이루어졌다.
여러 사람들이 지적한 것처럼, 지금으로서는 엄청난 위력의 무기가 될 가능성만을 겨우 주먹구구로 점쳐볼 수 있을 만큼 멀리 떨어진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만큼으로도, 그런 가능성에 특정한 나라가 주목하기 전 과학자들끼리 손을 써둘 필요가 있다는 데 금방 뜻이 모였다.
“... 하여, 제안드리고자 하는 바는 이렇습니다.
지금 이곳 제네바의 다른 곳에서, 항구적인 평화를 담보할 국제기구 결성을 둘러싸고 논의가 벌어지고 있는 것을 들어 아시리라 믿습니다.
그 기구가 발족하는 대로, 우리 조선은 산하에 과학 전담기구를 두어 이 방사능물질의 무기화 가능성을 연구하자고 제안할 것입니다. 그때 여러 선생님들의 많은 참여와 지지를 부탁드리고자 미리 이렇게 찾아온 것입니다.”
“아예 그 기구를 통해 그 누구도 이 원자폭탄을 연구하지 않기로 합의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 논리대로라면, 방사성 원소와 원자의 구조에 대한 모든 연구를 금지해야 할 텐데요. 보셨겠지만 지금 우리가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이대로라면 반드시 누군가 이 방사능을 무기로 쓸 발상을 하리라는 점 하나뿐이에요.”
실제로 그런 사례를 접하였던 – 이 ‘원자폭탄’에 비하면 훨씬 순하다 해야겠지만 – 마리 퀴리가 재차 말했다.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그렇게 되느니, 차라리 이 기술을 구현하는 데 필요한 모든 연구를 공동으로 수행하고, 그 결과도 공동으로 관리하는 쪽이 현실적이겠지요...”
공안서 총관으로서의 마지막 일이 그렇게 순조롭게 끝나가는 것을 보면서 김가진은 안도의 한숨을 삼키었다.
그렇게 다시 논의의 흐름이 순수한 과학으로 – 주제가 조금 바뀌기는 했지만 – 돌아갈 무렵.
“허심탄회하게 말씀드리자면... 김 선생님과 조선의 주장을 옹호하기는 했지만, 솔직히 뒷맛이 씁쓸한 것은 어쩔 수 없네요.”
마리 퀴리가 김가진 곁에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이 사람은 학자도, 재상도 아니요 고작 작은 아문의 관료일 뿐입니다. 그러나 부인께서 걱정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는 얼추 짐작이 되는군요. 이 전쟁이 끝나간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새로운 전쟁에 쓰일 새로운 무기를 걱정해야 하는 이 현실이 답답한 것이겠지요.”
“조선에 있을 때도 종종 느꼈던 것이지만, 안목이 참 매서우시군요.”
“하하, 사람 마음속 감춰둔 궁리와 감정을 샅샅이 살피는 것이 소관이니 말입니다.”
한 번 웃어주고, 곧장 표정 바꾸어 말을 잇는다.
“나라 사이의 대소사 논하는 입장을 벗어나, 그저 사사로운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늘 그렇게 답답한 가운데서, 어떻게든 답답하지 않게 살아보고자 함께 발버둥치는 것이 그나마 나은 길 아니겠는가, 그리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또 길이 통하여 발걸음 이어갈 수도 있는 법이지요.”
염세적이라 해야 할지, 낙천적이라 해야 할지. 분명 심사 어딘가가 배배 꼬여 있음을 드러내면서도 묘하게 위로가 되는 말이었다.
“우리 모임의 다른 사람들과도 이 제안을 검토해보도록 하지요. 다시 연락주세요.”
“물론이지요.”
한편, 과학자 아닌 사람이 과학자 모임에 가서, 그 과학으로 무얼 할지를 떠드는 것보다도 더욱 기이한 모임이 제네바의 다른 구석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 독일 삼국의 정치인들이 밀실에 모여 전혀 화기롭지 못한, 씁쓸함과 비장함 감도는 표정으로 화해와 협력을 말하고 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귀국의 빌헬름 폐하께서 결국 옳은 예측을 하신 셈이군요. 그 꿈 말입니다.”
로이드 조지, 조르주 클레망소, 그리고 사민당 내에서 가장 우파에 속한다는 이유로 혼란한 정국에서 그나마 가장 많은 지지를 받아 이 자리에 서게 된 프리드리히 에베르트(Friedrich Ebert)까지.
“동방으로부터의 위협이 대서양 건너편으로부터의 압박과 함께 오리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못했겠지만.”
로이드 조지가 에베르트에게 냉소인지 자조인지 모를 말을 했다. 동방에서 오는 공자의 꿈 이야기는 비스마르크 본인의 회고록-빌헬름 2세에 대한 비난과 비판이 다채롭게 들어간-을 통해 널리 알려져 있었다.
정말로 빌헬름에게 동조한다기보다는, 그만큼 이 강화회의에서 대영제국의 뜻이 제대로 이루어지기는커녕 돌아볼 때마다 벽에 부딪히는 현실에 답답함을 느낀 것이리라.
“어쨌든 우리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자존심도 좋지만... 때와 장소를 가릴 수밖에 없는 법이니.”
그나마 어깨에 짊어진 ‘카르마’가 가장 적은 에베르트가 입을 열었다.
“발칸 국가들은 동맹의 상설화를 거론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따라하는 모양새가 되기 전에 서두를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 말대로였다. 비록 유럽 쪽 영토를 거의 상실하기는 했지만, 발칸 동맹에 막대한 인명피해를 강요하고 심지어 그 영국의 공세까지 막아낸 오스만 튀르크의 선전(善戰), 그리고 이대로 승자 없이 종식되어버린 유럽의 전쟁은, 독립 직후 결코 감정 좋지 않았던 나라들로 하여금 서로 의지할 수밖에 없는 형국을 만들어버렸다.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 투르크 모두 지금 당장 국경 너머를 넘보지는 못할 상황이라지만, 그렇게 기진맥진한 나라 하나라도 열강의 세력다툼이 잠시 멈춘 지금 조금 욕심을 부린다면 그들 소국중 하나는 능히 상대할 수 있을 것이었다.
“솔직히 말해, 그 어떤 프랑스인이 독일인과 영국인을 좋아하겠냐만... 그래도 저 미국 놈들이나 동양인들에 비하면 그나마 믿을 만한 사이지. 정정당당하게 전쟁은 걸어올지언정, 금융이나 도덕을 내세워 목줄을 채우려 하지는 않으니. 다들 그리들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왕이면 이 전쟁이 승리로 끝나, 파리나 런던, 아니면 베를린에서 이런 이야기 할 수 있기를 모두 바랐겠지만, 현실이 이러하니 어떻게든 대처할 수밖에.”
푹 늙은 클레망소의 말에 다른 두 사람도 고개를 끄덕였다.
조선이 들고 온 것은 그 기이한 국제기구 제안만이 아니었다.
독일이 알자스-로렌을 잃은 데 대한 보상으로 전략물자인 철강과 석탄을 공동으로 관리하는 방안, 전후의 취약한 경제에 부담이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한 영국-독일 군축 합의 등.
지구 반 바퀴는 족히 떨어진 곳에서 의외로 상세한 제안이 나왔다는 데 한번 놀라고, 그런 제안을 위해서는 최소 십 년 정도는 연구와 논의를 거쳐야 했으리라는 데 생각 닿으니 재차 뒤늦은 경악을 할 따름.
이들이 한데 모여서 전혀 살갑지 않은 정담 나누는 것도, 단순히 미국과 러시아에 대한 위협을 함께 인식하기 때문만은 아닐 테다.
그것보다도 훨씬 근원에 가까운 공포. 지금까지 세상의 이치를 말하고 또 기록함으로써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던 유럽이, 이제는 새로운 질서를 부여받고 그에 동참할지 말지, 그 양자택일을 강요당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차마 형용할 수 없는 두려움이 이들을 한데 묶는 또 하나의 매듭이었다.
그러나 그런 자기연민과 불안에 시달리는 것도 하루이틀. 제네바에 머물면서 그들 사이에 생긴 또 다른 공감이 있었다. 이대로 함께 무너질 수는 없다는 분함. 유럽의 해는 아직 지지 않았다는 희망어린 생각.
“그렇습니다. 얼른 이 국면을 청산하고, 주도당하는 쪽에서 주도하는 쪽으로 다시 돌아가야지요. 자, 내일을 위하여.”
“내일을 위하여.”
이것이라도 없으면 더욱 어색한 자리일 것이기에, 어울리지 않는 술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논의될 내용의 무게가 무게이기에, 다들 잔은 기울일지언정 실제로 목으로 넘기지는 않았다.
“자, 그러면 시작해봅시다. 이 세기의 협상을.”
독일은 유럽에서 영국과 프랑스에게 양보하고, 영국과 프랑스는 식민지에서 독일에게 양보한다. 대신 독일은, 이제 겉으로나마 놓아주는 시늉을 해야 할 식민지에 미국이나 러시아 같은 나라들이 함부로 진출하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한다.
달이 떠오르고 지는 사이에 대원칙이 합의되고, 세부사항이 논의된다.
그들의 이웃 아닌, 미덥잖은 남들이 꺼낸 제안과 명분을 어찌하면 저들에게 고스란히 되돌려줄 수 있을까. 자신들이 확보한 이권과 위세를 남들이 탐하지 못하도록 어떻게 최대한 그럴듯한 틀을 짤 수 있을까.
셋이서 머리 맞대고서 논의하자니 끝내 한계가 있어, 그 다음 밤부터는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도 끌어들여 다섯이 되었다.
그리하여 남 겁박하는 것 예사로 여기던 나라들이, 반대로 안팎으로 겁박당하는 시국에 맞서 뭉치게 되었으니, 일백 년만에 새로운 유럽협조체제(Concert of Europe)가 이루어진 셈이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한때 총부리 겨누었던 나라들이 이웃으로서 어깨 맞대게 된 현실에 대해서는 더 논평하지 않았다.
한편, 제네바의 다른 구석에서는 또 다른 묘한 회동이 벌어지고 있었으니, 청국 대표 육징상(陸徵祥)과 일본 대표 사이온지 긴모치 두 사람이 어찌하면 조선을 위해줄 수 있을까 고심하던 것이다.
“고균 선생은 뜻이 확고하더이다. 본국의 방침 또한 그러하다 하니, 쉽게 굽히지는 않겠지요.”
“물론 논리로 보아서는 타당한 제안이지만...”
둘이 주거니받거니 한숨 쉬는 까닭인즉 이러하였다.
가칭 만국연합에서 상석 차지하고서 ‘특별한 역할’ - 그것의 구체적인 범위에 대해서는 아직 설왕설래가 이어지고 있었다 – 맡게 될 (역시 가칭) 평화유지이사회를 구성할 나라를 두고, 조선 쪽에서 제의한 바는 이러하였다.
어느 나라를 콕 짚어 그 구성국으로 삼게 되면, 반드시 후에 문제가 생길 것이라 하였다. 지금 강대국이라 하여 자리를 못박아두었다가, 그 뒤에 영락하여 위세 예전만 못하게 되면 어찌할 텐가? 새로 부흥하는 나라 하나하나에게 그 힘에 따른 지위 준다고 하면, 몇몇 나라만 짚어 이사회를 구성하는 의미가 없고, 그렇다고 그때그때 내쫓게 되면 매정하기도 하거니와 평화를 유지한다는 그 본연의 목적에 자칫 크게 어긋날 것이 명백했다.
그러므로 차라리 천하를 여럿으로 나누어, 각 땅덩이 안에서 스스로 몇 나라씩을 높이 세우고 그 진퇴는 내부의 재량에 맡기자는 것이 김옥균의 제안이었다. 후에 그 배분을 수정할 여지를 남기되, 우선은 구주에 자리 다섯, 미국과 아라사-새 이름으로 소비에트자유국연방(Soyuz Sovetskikh Svobodnykh Gosudarstv)-가 도합 둘, 그리고 나머지 세상이 넷.
그 ‘나머지 세상’ 자리야, 하나는 오스만 튀르크가 가져갈 것이요, 나머지 하나는 분명 영국이 인도를 밀어 넣고자 욕심부릴 것이었다. 당장 번듯한 나라의 수가 아주와 구주, 미주 벗어나면 그리 많지 않고, 비주(아프리카) 한복판은 사람은 있으되 나라는 없는 경우도 아직 남아 있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
문제는 아주였는데, 한 자리야 당연히 청국이 가져간다손 쳐도 나머지 하나가 문제였다.
조선이야, 하다못해 선양의 법도도 세 번 사양하고서 못 이기듯 받는 것이 이치거늘 어찌 스스로 제안하고 스스로 높은 자리 탐하겠느냐며 진작 일본국에 양보할 뜻을 보였다.
실제로는 애초에 완전할 수도 없는 제도요, 보나마나 어느 쪽에서는 볼멘소리 나올 수밖에 없는 이치기에 잠시 한발 뒤로 물러나려는 뜻이 있었다. 청국이라면 모를까, 일본은 눈치가 보여서 영영 평화유지위원회에 자리 굳히고 있지는 못할 테니 몇 해 있으면 ‘임기’ 다 되었다며 내려올 터.
그때 ‘우리가 처음 말한 뜻은 그것이 아니었다.’ 하면서 자연스레 일본국 다음으로 들어와 조정 필요한 사안에 힘 보태려던 것이었는데, 청일 양국 보기에는 결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어차피 이제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된 우리 삼국입니다. 어떻게든 조선의 체면을 살려줄 방법이 있을까요?”
일방적으로 양보만 받은 모양이 된다면, 두 사람 모두 본국 돌아가서 좋은 소리는 못 들을 것이 뻔한, 기묘한 상황이었다.
그때, 두 사람 중 유럽 돌아가는 정국에 조금 더 익숙하였던 사이온지가 제의하였다.
“듣기로, 구주 열국들이 아라사와 미국 위세에 공동으로 대응코자 한데 뭉쳤다 합디다. 이웃나라끼리의 정의로 따지면 이백 년 이상 서로 다툰 적 없고 근래에는 더욱 돈독해진 우리 동양 나라들이 제일일 텐데, 여기서 뒤쳐질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이 만국연합과 더불어 우리 동양 나라들끼리 뭉치는 기구를 하나 더 만들자 제의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우리 두 나라가 만국연합에서 세를 얻었으니, 그 기구에서는 조선이 상석에 있도록 보장해주는 것이지요.”
한때 세계를 전란으로 밀어넣으리라 예견되었던 발칸 나라들끼리 자강 도모하던 것이 유럽 나라들을 거쳐 이렇게 동양까지 건너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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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대전은 과학사에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독일의 경우, 하버의 독가스 연구에 우수한 과학자들이 투입되면서, 오토 한을 비롯해 1910년대 초 방사능 연구의 선봉에 있던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의 연구진 대다수가 이 ‘응용과학’ 연구에 매달릴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오토 한 본인도 전선에서 독가스의 다양한 사용법을 탐색하던 중 포스겐 가스에 중독되어 사망할 뻔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 손실일 지도 모르는 것은, 헨리 모즐리와 같은 젊고 뛰어난 인재들이 전선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이지요. 학계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지 고작 3년 만에 노벨상 수상이 유력하다고 점쳐졌던 모즐리는, 1915년 갈리폴리에서 일개 통신장교로 근무하던 중 케말 파샤가 이끈 투르크군의 필사적 반격으로 여단본부가 습격당하면서 전사하게 됩니다.
작중에서는 독가스가 사용될 만큼 전황이 절박해지기 전 창의단이 도착했고, 영국의 경우에는 독일 해군의 ‘첨단’ 과학기술에 왕립해군이 패배하면서 과학 인력을 조금은 더 아끼게 된 것이 변수가 되었습니다.
방사능 붕괴가 처음으로 관측되면서, 그 에너지가 막대하다는 사실도 곧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 실제로 원자폭탄과 원자력 발전에 필요한 핵분열의 가능성을 넘보는 단계까지 가는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지요. 원 역사에서는 엔리코 페르미 등 작중에 나온 학자들의 그 다음 세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런 단계에 도달할 수 있었고, 작중에서도 퀴리 부부나, 헨리 모즐리, 독일의 리제 마이트너 등 원 역사보다 더 활약할 여지가 있는 과학자들이 많지만 아직 본격적으로 핵분열의 가능성과 그 활용을 고심하기에는 한참 이른 상황입니다.
물론 결론을 이미 아는 입장에서, 그것을 모르는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 가설이라고 하기에도 어설픈 다양한 시나리오를 제시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겠지요.
원 역사에서 1차대전 패전 전후 시작된 독일의 혼란을 수습한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는, 사민당 소속임에도 불구하고 공화국 선포에 회의적이었으며, 그와 동시에 1919년 1월 스파르타쿠스단 봉기에서는 자유군단(Freikorps)의 봉기 진압을 방조하는 등 좋은 쪽으로나 나쁜 쪽으로나 중도에 속한다고 할 만한 인물이었습니다. 전후 혼란을 빠르게 수습하고 바이마르 공화국의 시작을 알렸지만, 초장부터 그리 견고하지 못했던 공화국 체제의 약점, 가혹한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한 경제문제 등은 끝내 그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그의 중도 성향도 연정을 세우는 데 기여했지만 그와 동시에 어느 한쪽의 지지도 확보하지 못한 채 바이마르 공화국 내내 이어진 정치적 불안정성을 초래했다는 비판도 받습니다.
그가 분단 이전 독일에서 평민 출신이자 非군인 출신으로서는 유일하게 독일 국가원수 자리에 오른 인물이었다는 사실은, 독일의 민주주의가 걸어야 했던 험난한 길을 방증한다고 하겠습니다.
원 역사의 파리 강화회의에 승전국 자격으로 참여한 일본 – 이때도 대표단에 전 총리 자격으로 사이온지 긴모치가 참가했습니다 –은 인종차별 철폐를 조약에 명시할 것을 제안하는 등 전후 질서에 자신의 영향력을 최대한 발휘하고자 노력한 바 있습니다. 이는 역시 회담에 참여하였던 중화민국조차 지지 의사를 표명한 안건이었지만, 끝내 조약문에 반영되는 데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유럽협조체제(Concert of Europe)란, 나폴레옹 전쟁 이후 소진된 국력과 자유주의의 발흥이라는 악조건에 처한 유럽 국가들이 평화를 위해 유지했던 협조 기조를 말합니다. 보기에 따라서는 1848년 혁명으로 붕괴되었다고도, 반대로 1차대전 직전까지 유지되었다고도 할 수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