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312화 (312/320)

100. 이웃이 있으리 (2)

“참 길었구려.”

김가진이 상 위의 ‘마우재 장기’판 치우면서 말했다.

창밖에는 김가진이라면 모를까 김옥균에게는 낯선 모스크바 교외의 풍경이 느릿느릿 지나가고 있었다.

“그래도 그 옛날 배편으로 구주 오가던 것에 비하면 축지법 쓰는 것과 다름없소.”

“그야 그렇겠지.”

“무어, 융비총국에서 하는 말로는 몇십 년 뒤에는 또 그 비행기니 비행선이니 하는 기물로 사람이 쉽게 천하 방방곡곡 다닐 수 있게 될 것이라 합디다. 그때가 되면 우리네 먼 후인(後人)들은 한양에서 주뇌부(제네바)까지 한 사나흘 걸려도 퍽 길었노라 떠들지도요.”

성상을 비롯한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면 희언(戲言)으로 여겼는데, 김옥균은 성상을 믿는 쪽에 들었다. 그 ‘돌기름 수레’로 인해 직접 고생하면서, 그 이후 몇 년 동안은 한강을 차로 지날 때 도저히 바깥을 쳐다보지 못하기도 했던 것이다.

“사나흘이라! 그리 된다면 조선 팔도 오가기는 여반장이겠소. 지금도 하루이틀이면 동래부에서 의주까지 가는 세상인데.”

“하하. 분명 지금 세상과는 또 다를 겝니다.”

허나 그보다 김옥균 마음에 남은 물음은. 정녕 비행하는 기물들의 놀라운 발전이 어디까지 갈지보다는, 그런 발전이 이루어졌을 때 과연 세상이 어찌 될지에 있었다.

노비는 물론이요 어지간한 양민들도 작정하고서 금강산 한 번 유람하면 평생 구경 다 했다 여기던 시절에 김옥균은 태어났고, 구주 가는 것만 해도 자신이 처음 떠날 때는 집안이 한 번 크게 뒤엎일 뻔하지 않았던가.

그때부터 천지개벽하는 변화 있어 오늘에 이르렀는데, 이제 몇 달, 몇 순도 아니요 며칠만에 천하 어디든 닿을 수 있게 된다면, 그때는 정녕 사해가 모두 이웃과 같이 될 터.

‘이웃이라.’

오는 내내 그의 머릿속에 미련 남긴 단어가 또 떠올라, 무어라 첨언하며 장기판 조심스레 집어넣는 – 이곳 모스크바에서 하루 머무르는 동안 누군가를 만나 앙갚음할 일이 있다 하였다 – 김가진에게 대꾸하는 것을 잊었다.

며칠 전, 아직 도성에 있을 때 성상과 세자, 대군들이 모여서 하였다는 그 고민을 떠올리며 끄적인 낱말들이 발단이었다.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지만, 사람이 머리 쓰는 데 있어서는 오히려 사람 많을수록 중구난방이 되기 쉬웠는데, 이 ‘유엔’의 일도 그러하였다. 화로의 숯이 모두 식도록 나라의 귀한 사람 넷이 고민하였건만 결국 해괴한 말만 여럿 만들고 말았는데, 이튿날 다시 김옥균 불러 하나 고르라 하니 그나마 가장 멀쩡한 – 또는 가장 평범한 - 것은 이 ‘유나이티드 내이숀스(United Nations)’였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최선이었는가 싶어, 한양에서 출발하여 동삼성 지나고 우랄을 넘는 내내 틈 나면 종이에 영어 낱말 끄적이며 김옥균도 종종 고민하곤 하였다.

두 글자 중 미련 남던 것은 역시 N으로, 세자가 떠올렸다는 ‘Neighbour(이웃)’와 비슷하면서도 조금 더 적절한 낱말 있을까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한문으로 옮겨도 ‘덕은 외롭지 않으니 반드시 이웃 있으리(德不孤 必有隣)’ 구절과 뜻이 맞닿고, 자칫 천하대란으로 번질 뻔한 금번 전쟁이 의도치 않게 보여준 것처럼 이미 하나로 긴밀하게 엮인 세상을 빗대기에 썩 좋은 말이기도 했다.

그러나 진지하고도 품위 있는 것을 (과도하게) 좋아하는 구주 식자들에게는 영 흡족하지 않을 것이요, 무엇보다 같은 뜻의 법국 말(Voisin)과는 한참 동떨어져 있어 곤란할 것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우리 옆의 나라가 원수라면 몰라도 이웃이라니 가당치 않다 하는 이들, 그리고 이역만리 나라는 그저 남일뿐 무슨 이웃을 말하느냐 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었다.

누가 그들을 탓할 수 있으랴? 김옥균 본인부터 그렇게 여기고 있거늘.

다만 옛날 김옥균과 지금 김옥균이 다른 점이라면, 전자는 현실 그러하니 그에 맞추어야 한다 여기고, 후자는 현실 그러하니 이제 바꾸어봄직하다 결론 내렸다는 데 있을 테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이 약간의 술수와 반목에 의존하여야 하겠지만, 애초에 저는 자공은 몰라도 안연(顏淵)은 될 수 없는 사람.

“그래도 나폴레옹마냥 절해고도에 틀어박힐 일은 없게 되었으니 다행이려나.”

“무어라 하였소?”

“아, 속의 말이 삐져나왔소이다.”

그사이 기차는 기나긴 여정을 마치며 야로슬라브스키(Yaroslavskiy) 역에 당도하였다.

아라사가 환골탈태 방불케 하는 지금의 변법을 완수하면 곧 천도(遷都)하여, 그들의 시조 발흥한 이곳으로 돌아올 예정이라고 하였던가.

아라사의 옛 도읍 겸 새 도읍 예정지라고 하기에는, 주변 오가는 이들 가운데 동양 사람들이 퍽 많았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창의단 사람들과, 러시아의 곡창이 다시 유럽에 수출을 재개할 때까지 한두 해 정도는 이어질 곡물 수출을 관리하기 위해 온 서리와 일꾼들 등등. 이 도시에 마지막으로 이렇게 동양인들 많이 오갔던 때보다는 훨씬 화기(和氣) 감도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중 그 기풍이 유독 도드라지는 무리 있으니, 언뜻 보아도 고관들이요, 남의 나라에 이렇게 고관 우르르 보낼 동양 나라라면 높은 확률로 조선이다.

“허, 여기서 이리 많은 분들을 뵐 줄은 몰랐습니다.”

창의단 중진들 여럿과 볼셰비키 몇몇 대동하고서 기다리고 있던 전봉준이 반갑게 맞이하였다. 서양식으로 익숙하게 김옥균과 악수한 전봉준은, 이어 김가진에게도 예를 갖추었다.

“이역만리에서 참으로 고생이 많았겠소. 졸지에 아라사 호조판서 신세가 되었으니.”

물론 진짜 호조판서 노릇은 아니지만, 구주와 아주 사이에서 오가는 인력과 곡량 등등을 관리하는 것이라면 그만큼 바쁘고 고된 사무라 할 만했다.

“하하, 고생 아니라면 그 또한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청사에 길이 남을 현장에 함께하고 있으니 어찌 볼멘소리를 하겠습니까.”

김옥균도, 김가진도 동의할 만한 말이었다.

역을 떠난 세 사람은 곧장 시내 여각(旅閣, 호텔)으로 향했다. 이틀 여유 동안 최대한 여독 풀기 위한 것이기도 했고, 또 전봉준에게 직접 현지 상황 듣고자 하는 뜻도 있었다.

“한창 외유하던 시절에는 연경이나 연해주 정도에 출타하곤 하였으니, 눈과 귀 있을까 걱정하기보다는 없을까 걱정하는 일이 더 많았소. 이런 상황은 또 오랜만이구려.”

김가진 농담하듯 뼈 살짝 넣어 말하니, 전봉준도 가볍게 답했다.

“그 걱정은 아니 하셔도 되겠습니다. 소위 백군이라고 해보아야 이제 그림자조차 보기 드물어진 데다가, 지금 이곳에서 공안서 비슷한 것 맡고 있는 이들 성정이 결코 세작을 허용치 않을 테니까요.”

정확히는 ‘그들’ 외에 그 누군가가 러시아 내에서 첩보 모으는 것을 원치 않는 것일 테다. 스탈린은 전봉준 보기에 권신(權臣)이라면 모를까 군민공치 나라의 정승판서 노릇은 못 하고 또 해서도 안 될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이럴 때는 나름대로 믿을 만하였다.

“허허, 이웃나라이기도 하니, 조만간 양국 관헌끼리 만나 배움을 주고받는 것이 마땅하겠군.”

하고서는 쓱 일어나 나갔다.

“동농 대감은 구주에 따로 일이 있어 가는 것이니, 꼭 듣지 않아도 괜찮다고 하였소.”

“강화회의 말고 다른 일이 있다는 말씀이신지요.”

“그렇지. 어떤 일인지는 아예 이목 없는 곳 아니면 아직 전해주기 어려우니 양해 바라오. 무슨 떳떳지 못한 사안은 아니지만, 무슨 뜻으로 그런 일 벌이냐고 묻는 이 나오면 곤란한지라.”

“하하, 저 또한 공안서를 아래에 거느려본 사람이니 어찌 모르겠습니까.”

어쩌다 보니 함께 서사국, 스위스로 향하게 되기는 하였지만, 둘의 목적지는 엄연히 달랐다. 물론 크게 보면 이 ‘유엔’, 가칭 만국연합을 위한 일이라는 것은 동일하였지만.

“그러고 보니 동농 대감도 이제 내일모레가 고희일 터인데 참 정정하십니다.”

말하면서 전봉준의 표정 살짝 어두워지는 것이, 필히 최익현을 떠올린 것이리라. 김병학과 김병국이 퍽 장수하고, 거기에 김가진도 이처럼 노익장 과시하니 세간에는 혹시 장의동에 장수 비결 있는 것 아니냐는 말도 돌고 있었지만, 농은 농일 뿐이었다.

“곧 치사(致仕)할 마음은 정해둔 듯하였소. 이번 큰일이 아마 마지막이 되겠지.”

“허...”

사실 공안서 생긴 이래 그 우두머리는 여럿 바뀌었지만 사실상 허직(虛職)이었으니, 총관 자리가 실직(實職) 된 이후로는 오직 김가진 한 사람만이 이끌어왔다 해도 무방할 터였다.

“이르기를, 눈여겨본 젊은 관헌들이 여럿 있고, 그들이 공 세우기 전 몇 년쯤은 석현(이용익)이 능히 빈자리를 메울 것이라 하였소.

장차 적어도 십여 년은 전란보다는 공상(工商)으로써 나라의 힘을 북돋거나 되찾는 것이 열국의 급선무가 될 터인즉, 석현이 제자리 돌아가는 것을 두고 누가 무어라 하겠소?”

설령 김옥균 자신이 노리는 대로 되지 않는다 하여도, 유럽 여러 나라들은 전쟁의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한동안 군비는 신경쓰기 어려울 것이다. 옛날 자신이 사형 어윤중과 함께 강남 제조국들 돌았던 때처럼, 유럽 여러 나라에 사람 보내어 재주 들여올 만한 적기(適期)였다.

“세월이 참으로 빠르다, 그 생각이 감돌 뿐입니다.”

“퍽 다사다난한 세월이었지. 그래도 이번 전란을 어찌 잘 마무리 짓고 번듯한 결론을 낼 수 있다면, 희망컨대 우리네 사는 동안 이러한 위태로운 때를 또 만나지는 않을 것이오.

이 사람도 이번에 큰 성은을 입었으니 총리대신 자리는 다시 구하지 않을 생각이외다. 당무에서도 공식으로는 물러나고, 뒤에서 사람들 타이르고 부추기는 것도 이제 몇 년 내로 삼가야겠지.”

영의정 자리는 개국 초부터 있었고, 붕당 내력도 따지자면 지금 구주 나라들 태반이 생기기 전부터 있던 것이었다. 일각에서는 조선국 개화 요결이 이처럼 오래된 군신(君臣)의 법제와 붕당의 이력 덕이라고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음을 그 조선국의 식자들은 (아직은) 기억하고 있었다.

더구나 영의정 자리가 어떤 자리인가. 국제 정하여 그 권한이 훨씬 커지고 추거로 인해 그 위엄이 높아졌으며, 무엇보다 다룰 수 있는 나라의 힘 자체가 조선국 개국 이후로 여러 곱절이 뛰었다.

일신 지재는 차치하고 권력 욕심만 두고 보면 저의 조상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일 김옥균이 이런 말을 겉으로 꺼낸 것부터가 심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니 이번 한 번은, 못된 심보 다 부려보아야 하지 않겠소?”

김옥균이 갑자기 짓궂게 웃었다.

담소 마치고서 러시아와 주변국 실정 전해들은 김옥균이 내린 결론은 이러하였다.

‘해볼 만하다.’

내전의 주범인 세 대공에 대해서는 암묵적인 국외추방령이 내려졌고, 나머지 동조자들은 별도의 범죄 혐의가 없는 이상 역시 추방형 정도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영국이나 프랑스는 물론이요, 독일조차 난색을 표하면서 차라리 미국은 어떠냐고 답했다고 하니, 아무래도 나폴레옹 전쟁 후의 공로증(恐露症, Russophobia)이 백 년 만에 돌아온 듯하였다.

심지어 수도를 모스크바로 옮기는 것조차 어떤 공격적인 의도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심의 시선이 있다고 하니, 오히려 유럽에서 멀어지는 것을 그리 해석할 만큼 경계심이 높다고 할 수 있었다.

폴란드에 이어 핀란드, 발트 국가 등등이 독립한 이상 옛 수도 페트로그라드의 안전이 여러모로 위태롭고 – 물론 그들 나라들이 실제로 러시아와 대놓고 대립할 가능성은 희박하기 그지없었지만, 나라 다스릴 때는 그 만일에 대비해야 하는 법이었다 – 더구나 시베리아의 개발, 동양 나라들과의 교류 등등 경제적으로도 옮길 이유가 충분하였건만, 굳이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어째서겠는가.

특히 러시아 하면 가장 질색할 영국은 대서양 건너편 미국을 견제할 왕립해군마저 허리가 부러졌으니 더욱 심할 것이다.

“... 물론 대영제국은 이보다 어려운 곤경도 헤쳐나왔습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문명과 도덕의 전면에 서 있던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하여 세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노력하기를 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조선 역시 대화와 공정한 중재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제네바에 도착한 김옥균은 프랑스에 이어 영국 측과도 인사를 주고받고 있었다.

예상보다도 훨씬 살갑게 그를 맞이하는 새 총리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와 외무장관 커즌(George N. Curzon)의 모습은, 여러모로 김옥균의 판단에 추가적인 근거를 제시하고 있었다.

“조선 측에서 전달한 중재안은 미리 받아보았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귀국의 최익현 선생께서 작고하신 데 대해 다시 한 번 위로를 전합니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프랑스와 독일 사이의 국경 문제와 이에 따른 상호 반발을 최소화하기 위한 유럽 내 공동기구 설립, 건함경쟁 재발 방지를 위한 해군 군축조약 등, 미국이나 다른 유럽 나라들이 제안한 방안들과 비슷하기도 하고 아예 색다르기도 한 각종 제안들이 한데 묶여 전달되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한데로 묶을, 만국연합이라는 국제기구까지.

그러나 그런 작업에 얼마나 많은 노력과 지식이 필요한지, 그리고 조선이 떡하니 그런 방안을 내놓았다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 등에 대해 관심을 가질 만큼 영국은 여유로운 처지에 있지 못했다.

“모든 노력에 저희 또한 감사드리는 바이나...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식민지 문제에서 귀국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 회담의 사전 조율 과정에서 또 하나의 난관으로 작용한 것은, 참가 국가들의 자격 문제였다. 강화회담이라 하면 당연히 교전국들이 모두 참여하는 것이 맞는데, 양쪽에 모두 참여했음에도 교전은 하지 않은 창의단 나라들이나, 미국과 러시아처럼 전쟁 그 자체에는 주변적인 역할만 수행한 강대국 등, 그 범위가 참으로 애매했던 것이다.

다행히도, 애초에 전쟁부터가 공식적인 상부간 합의가 아닌, 양측 전선에서의 집단 항명과 반전시위로 인해 멎은 전례없는 상황이었기에 그렇게까지 이 문제가 발목을 잡지는 않았고, 결국 현실적인 논리에 따라 전후질서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어지간한 나라들은 모두 대표단을 보내기에 이르렀다.

“영국을 포함해, 우리 조선이 이 회담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 재차 동의해준 나라의 정부들에게는 다시 한 번 감사의 뜻을 표할 뿐입니다.”

그러나 그 나라 가운데는 독일도 끼어 있었으므로, 실제로는 그리 감사하다는 뜻이 아니었다.

“만약 독일의 무리한 주장이 강화회의에도 의제로 오르게 된다면, 이는 평화를 해치는 새로운 불안정 요인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당장 산발적으로나마 북아프리카에서는 무력충돌이 이어지고 있지요.”

“그리고 인도에서도 근심스러운 정황들이 있고요.”

김옥균이 빙빙 돌리던 로이드 조지의 말 가운데를 쿡 짚어 인도를 거론하니, 특히 아시아와 연 깊은 커즌으로서는 저의 명치도 아려오는 느낌이었다.

“솔직하게 답변드리자면 그렇습니다.”

인도 제국은 ‘왕관의 보석’이나 셰익스피어 한 사람 정도의 가치가 있는 땅이 아니었다. 커즌 본인부터가 인도 없는 영국은 삼류 강대국으로 직행할 수밖에 없다고 발언했다던가. 명실공히 대영‘제국’은 인도가 있기에 존재할 수 있었다.

“조선이 이번 전쟁에서 양측 모두에 인도주의적 지원을 한다는 결정을 내린 이유를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그런 사정을 김옥균이 알아줄 이유는 물론 없었다. 식민지가 본국 열강의 손을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조선에게는 이익과 명분 모두를 채워주는 것이었으므로.

“그것은 그렇지요. 하지만 귀국은 또한 이번 회담의 결과 항구적이고 견고한 평화체제가 수립되기를 원하고 있으리라고, 저는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토록 참혹한 비극을 빚은 전쟁이, ‘제1차 세계대전’으로 불리도록 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느 한쪽에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그런 방식의 해법이 채택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그에 있어서는 저와 조선 정부를 비롯해, 그 어느 나라 사람도 동의하리라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모두 화사하게 웃으며 악수와 함께 대화를 마쳤다.

로이드 조지와 커즌 경의 실수라면, ‘그 어느 나라 사람’이라는 표현에서 ‘나라’의 정의를 미처 묻지 않은 데 있을 것이다.

이어서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이탈리아 등 주요국 인사들을 만나고 태프트 같은 옛 인연과도 다시 만난 김옥균은, 인사 주고받을 열강과 여타 교전국의 명단 마지막에 이르자마자, 티끌만큼의 망설임도 없이 다음 귀빈을 방문하였다.

역시 화사하게 웃는 김옥균과, 함께 따라 웃으면서도 대체 왜 이 사람이 저를 찾아왔는가 어리둥절해하는 기색이 아주 조금은 남아 있는 인도국민회의의 모한다스 간디의 사진이 런던에 상륙하는 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는데, 이 또한 전세계가 다같이 이웃으로 묶이고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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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도 종종 언급된 것처럼, 20세기 중반까지도 국제어, 특히 외교무대의 국제어는 프랑스어였습니다. 미국이 초강대국으로 부상하고, 2차대전 후 탈식민주의로 기존 유럽의 외교 전통 바깥에서 수많은 신생 국가가 등장하면서 프랑스어의 우위는 비로소 종언을 고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NATO 로고에 거의 항상 OTAN이라는 프랑스어 표기가 병기되는 것처럼, 지금도 프랑스어의 영향력은 상당히 많이 남아 있지요.

원 역사에서 볼셰비키는 1918년 3월 모스크바로의 천도를 결정합니다. 이는 무엇보다도 혁명정부에 대한 다른 열강의 군사적 개입을 우려했기 때문이었지요. 특히 같은달 초에 체결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인해, 러시아의 국경은 오늘날의 국경보다 조금 나은 정도로 축소되었고, 발트 3국과 핀란드를 상실하게 되면 페트로그라드는 러시아 기준으로 국경이 코앞일 만큼 위험에 노출되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페트로그라드를 방어할 해군력도 발트 함대가 러일전쟁으로 괴멸하면서 거의 복구되지 않은 상태였지요.

작중에서는 그보다 훨씬 우호적인 환경에서 천도 결정이 내려졌지만, 여전히 안보적 요소도 고려 요인으로 남아 있습니다.

‘100년 전의 공로증’이란, 나폴레옹 전쟁 이후 대규모 육군을 바탕으로 일약 강대국으로 러시아가 부상한 것을 말합니다. 원 역사보다 훨씬 우호적인 상황에서, 적백내전 역시 훨씬 온건한 방식으로 해결되었지만, 오히려 그것이 유럽 국가들의 경계를 불러일으키는 역설적인 상황입니다.

원 역사에서 애스키스가 물러난 뒤 영국 전시내각을 이끌었던 로이드 조지(‘로이드 조지’가 통채로 성입니다)는 조지 커즌과 매우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당적도 달랐고 (자유당/보수당) 1911년 상하원 간의 갈등에서 서로 원한을 쌓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작중에서도 자유당과 보수당 사이가 그리 좋지 못하기 때문에, 관계는 비슷할 듯합니다.

그러나 로이드 조지는 커즌을 원 역사에서 외무장관 대행, 이어서 외무장관으로까지 기용하였는데, 이는 커즌이 젊을 때부터 인도뿐 아니라 아시아 전역을 여행하면서 해당 지역에 대한 전문성을 인정받았기 때문이기도 했고, 대영제국 전체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누군가는 내각 내 ‘악마의 대변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임자 아서 밸푸어의 중동정책을 뒤엎고 자신의 생각대로 이를 변경함으로써 오늘날 중동의 갈등 상황을 만들어내는 데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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