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사람을 노래하소서 (6)
알자스에서 시작한 항명이 북으로는 베르됭, 남으로는 칸(Cannes)까지 퍼지는 데 걸렸던 시간보다도 더 빠르게, 샹젤리제의 시위는 런던과 베를린으로, 또 비엔나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그런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전쟁 끝내자는 데 동의하는 것도 아니요, 또 각 도시의 중론(衆論)도 같은가 싶으면 달랐다.
또한 나라의 처지 다른 곳들도 여럿 있었으니, 잃은 것은 인명뿐이니 얻은 것 있을 때까지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는 파와, 더 잃어본들 무엇을 얻겠느냐며 관두자는 파, 애초에 통일이니 무어니를 할 때부터 문제였다며 은근슬쩍 불만 꺼내는 파가 갈리는 이탈리아도 있었고, 창의단과 무관하게 이미 에디르네 전선에서 대치할 때 서로 기력 다하였건만 그 티를 최대한 내지 않고자 노력하는 발칸 국가들과 오스만 투르크도 있었다.
“... 반면 우리로서는, 이제 때가 왔다. 그렇게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키예프로 당당하게 찾아온 블라디미르 일린이 지칭하는 그 ‘우리’에 정작 듣는 세 대공들은 포함되지 않을 것이었다.
“무엇을 원하는가.”
몇 년 동안 팍 늙은 듯한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이 물었다.
“여전히 각국의 공식 입장은 정전이지만, 그것이 휴전이 되고, 어쩌면 종전까지 갈지도 모른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그때가 되었을 때도 베를린의 카이저가 대공들을 지지해줄지, 아니, 애초에 그 카이저가 제관을 지킬 수는 있을지도 불확실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공격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전(全)러시아 소비에트총회에서 전쟁은 반대한다는 결론을 내렸으니까요. 그에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장 동원 가능한 병력을 제외한 모든 것이 불리한 상황에서, 키예프 정부는 농촌의 지지를 기대하였고, 어느 정도 그것은 눈앞에 다가왔다. 몇 년 사이 빠르게 성장한 부농들 중에도, 볼셰비키들이 완전히 집권하면 다시 그 농지를 빼앗아갈 것이라는 선동에 혹하여 넘어오는 경우가 있었고, 그런 부농들과 서로 경계하는 사이인 지주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군량이 필요해서라도 볼셰비키 본색을 드러낼 줄 알았건만, 우크라이나의 곡창을 빼앗아 이를 충당하려 섣부른 공격을 해오지도, 내놓지 않으면 가져가겠다는 양 농촌에 군대를 보내지도 않았다.
수상하리만큼 곡식이 많은 페트로그라드 정부의 비밀을 알았을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다급해진 키예프 정부는 지난 1년 동안 전선을 조금이라도 북쪽으로 올려보려 노력했지만, 아무리 기병 위주의 부대가 깊숙하게 침투한다 한들 주요 거점들을 점령할 역량이 없는 상태에서는 별 의미가 없었다. 오히려 생각보다 유능했던 페트로그라드의 정부와 반쪽짜리 군부가 조직한 기병대의 반격에 큰 피해를 입었을 뿐이었다.
오히려 페트로그라드 측에서 저런 군대를 가지고 자칫 전쟁에 나설 뻔했다는 사실에 경악할 정도였다.
흔들리는 승리의 가능성 앞에서 흔들린 키예프 정부가 흑해함대가 있는 오데사로의 이전을 슬슬 검토할 무렵, 그들 중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 서유럽에서 벌어지기 시작했다.
“아직 충성스러운 군대는 많이 남아 있고, 흑해함대도 건재한 상황일세. 차라리 당당하게 승부를 벌인다면...”
“비록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하면 생채기 수준이라지만, 우리 러시아인들의 목숨도 벌써 수십만 가까이 상했습니다. 그것을 기어이 늘리시고 싶다면, 말릴 수 없겠지요.”
“그것은 우리도 원하지 않고, 폐하께서는 더욱 반대하실 일일세. 그렇지만 페트로그라드의 그... 무엄한 모임을 해산하고 폐하께 응당 돌아가야 할 절대적 권세를 보장하지 않는다면, 우리 또한 물러설 수 없으이.”
결국 두마는 차르의 은총에 힘입어 열린 것이었고, 그 차르는 멀리 키예프에서 억류 아닌 억류생활을 하며 사실상 이 사태를 방관하고 있었다.
이때 볼셰비키가 던진 승부수가 두마의 기능을 정지하고 저 소비에트 총회를 세운 것이었다. 철지난 구호를 인용하자면, 차르 폐하께서 사라지셨으니, 그 아래의 권력이라도 한데 모아 소비에트에게 돌려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다 한들, 결국 톨스토이 이하 자유주의자들이 끼어드는 것은 그대로였으니 – 톨스토이와 그의 추종자들, 그리고 옛 인민주의자(나로드니키)들처럼, 오히려 볼셰비키보다 더욱 열광하는 이들도 많았다 – 냉소적으로 보면 범위를 행정이 닿는 곳 전체로 넓힌 비효율적인 조직이요, 두마에서 소비에트로 간판 바꾸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말하자면 요식행위를 위한 요식행위라고 비꼴 수도 있었지만, 키예프 정부가 보기에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차르의 거룩한 은총과 배려가 아닌 국민의 지지에 따라 모였다는 명분을 내걸었을 때, 대공들은 저들이 반기 든 것이 정당하였노라. 저 반역도당이 정녕 저런 무엄하고도 망측한 생각을 품고 있지 않았던가 하는 안도감까지 들었다. 키예프 정부가 궁지에 몰리던 것을 생각하면 금방 퇴색될 안도감이었지만.
“우리 정부는 폴란드국 정부를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무어라? 지금 뭐라 하였는가?”
“폴란드라 하였습니다. 왜 그렇게 이상하게 보시는지요? 이곳에서 먼저 바르샤바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던가요? 참고로 함께 말씀드리자면, 이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의 소재지로서 키예프 또한 인정할 예정입니다. 현실적인 한계로 인해 아마 민스크에서 먼저 결성되겠지만, 아마 호응은 적지 않겠지요.”
“맙소사...”
“물론 저나 다른 내각 인사들의 독단은 아닙니다. 소비에트총회의 반전(反戰) 결의에 따른 것이지요.”
물론 그 소비에트총회의 의결 과정이 전적으로 민주적이였는가 하면 일린 본인조차 완전히 수긍치는 않을 것이다. 아무리 소강 국면이라지만 전쟁은 전쟁이요, 더구나 암만 스톨리핀이 애를 쓴다 한들 아직도 러시아 인민 중 과반 이상은 정치를 이해할 능력도, 감히 이해하려 할 생각도 없을 터.
하지만, 그런 어설픈 제도로도 저의 곳간, 저와 저의 자식들의 목숨을 대가로 어디 멀리 떨어진 땅을 지키고 싶지는 않다는 솔직한 욕망을 확인하기에는 충분하였다. 만약 그들이 위대한 러시아, 유라시아 절반을 점유한 러시아를 원했더라면, 진작에 곳간을 열고 총력전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을 테니.
국내의 여론이 문제되지 않는다면, 그리고 전봉준이 귀띔해주고, 스톨리핀이 확약해준 러시아의 미래를 생각하면, 잃어버린 영토는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었다.
“거기에 더불어, 발트 국가들이나 저 중앙아시아의 옛 칸국들, 그리고 이곳 우크라이나까지 원한다면 독립을 인정할 방침입니다. 물론 영토에 있어서는 평화적 인정에 대해 적당한 양보를 해야 할 것이고, 무엇보다 정치체제에 있어서도 우리처럼 소비에트 체제를 설립한다는 조건을 붙일 예정입니다만.”
정전 얘기 꺼냈다가 종전 얘기에 휩싸인 유럽 정부들은 곧 그 압력에 굴복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전쟁을 시작할 때는 ‘현 시간부터 24시간 후 전쟁의 상태가 존재할 것임’이라는 단신 하나로 족하지만, 끝낼 때는 구구절절 이어지는 협상이 필요했다.
그 협상에서, 유럽 국가들은 차라리 조선의 선의가 다른 ‘선의’, 예컨대 미국의 선의보다는 나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페트로그라드의 이 전향적 조치는, 적어도 희망하기로는, 그런 협상을 최대한 이용하면서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발판이 될 터였다.
그런 사정을 모두 알지는 못하고, 설령 듣더라도 완전히 이해하기는 어려울 세 대공이었지만, 군사적·정치적 재능은 부족할지언정, 지성이 부족하지는 않은 대공들이었다. 적어도 폴란드와 우크라이나가 언급되었을 때 그 함의는 금방 이해한 듯, 표정이 급히 어두워졌다.
“아무리 그래도... 무조건 항복은 불가하네.”
“그렇습니까?”
바깥에서 지지해줄 나라는 모두 사라지고, 도리어 안팎의 적만 늘어난 상황. 폴란드 전선에서 병력이 새로 투입되고, 그 폴란드의 우호도 기대할 수 없으며, 키예프 내에서도 반드시 불온한 무리가 나타날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끝까지 무력으로 승리 거둬볼 생각이라면야... 라고 일린이 생각할 무렵.
“차르 폐하께서는 죄가 없으시네. 우리에게 잘못이 있다면 – 신께서 판단하실 일이지만 – 그 책임은 오롯이 우리들이 져야 할 것이야. 그러니 그 소비에트니 무어니 하는 것은 철폐해 주게. 그것을 보장해주면 자네의 ‘제안’을 재고해 보겠네.”
“대공 전하. 아직도 저희 볼셰비키가 내세우는 바를 이해하지 못하신 듯합니다.”
일린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이제부터 러시아는 앞서가야 하고, 반드시 앞서갈 것입니다. 물론 선대 차르들께서 확보한 강역을 스스로 포기한다는 것이 과격하게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몇 년 내로 다른 모든 경쟁자들도 비슷한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맹세컨대 차르 폐하께 어떤 무엄한 짓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정통 노선을 따르는 사회주의자로서 어찌 그런 마음을 품겠습니까?”
그 말에 함축된 모순과, 그 모순마저 정상으로 보이게 하는 기이한 현실에 대한 약간의 실소, 그리고 그런 모순이 존립할 수 있음을 보여준 이들에 대한 존중 등을 담아 일린은 답했다. 그것을 알 리 없는 대공들은, 안도와 체념 섞인 한숨으로 답했지만.
발신지가 키예프에서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바뀐 편지를 내려놓으며 카이저 빌헬름은, 작년 초부터 버릇이 된 것처럼 미간을 문질렀다.
편지의 발신지는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페트로그라드라는 새 이름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고집. 그리고 최고 통치자의 고집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이름.
편지에는 차르 폐하의 은덕에 황송해하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났다가, 여전히 차르 폐하의 은덕을 말하지만 이제 두 해 전만큼 감읍하지는 않는 페트로그라드로 돌아온 그의 벗 니키의 당혹감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이제 러시아의 군대가 베를린이나 비엔나를 향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걱정도.
“서부전선이 사실상 파업한 상태지만, 러시아의 위협이 눈앞에 닥쳤다고 하면 모두 다시 조국의 부름에 응할 것입니다. 더구나 아직 공식적으로는 아무런 소식도 닿지 않았으니, 과하게 근심하지 마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융커들의 희망을 대신하여 말하는 에리히 루덴도르프였다.
폴란드의 피우수트스키는 여건이 그것을 허용한다면 언제든 야심을 내보일 수 있는 자였다. 오스트리아령 폴란드와 러시아령 폴란드에 이어, 옛 프로이센이 가져간 땅까지 내놓으라며, 러시아의 손을 잡고 비교적 온전한 그 군대 –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빠듯한 전시예산을 쪼개며 후원해준 그 군대 – 의 총부리를 서쪽으로 돌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키예프 정부가 결국 볼셰비키들의 통첩에 굴복하였고, 그에 불응하는 코사크들과 몇몇 세력들만이 저항하는 상황. 페트로그라드의 사정도 좋지는 못할 테지만, 적어도 지금의 독일보다는 나을 것이다. 전쟁 초만 해도, 오합지졸 러시아 농민들이 어찌 프로이센의 강병을 이길 수 있겠냐는 융커 출신 장군들의 호언에 나름의 신빙성이 있었으련만, 그 강병의 생명이나 의지 둘 중 하나는 모두 사라진 지금은 결코 그렇지 않을 터.
“러시아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장군.”
뷜로우 수상이 대신 답했다.
그들을 후원하는 아시아인들이 원치 않을 뿐더러, 당장 군을 일으킬 여력도 없을 것이다. 물론 사람의 목숨과 달리 국고의 금은 시간이 지나면 금방 차오를 테니, 그렇다 해도 독일보다는 사정이 나은 축에 들었다.
더구나 어찌어찌 러시아가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 무언가 무력을 행사하려 한다고 해도 신경쓸 이유는 적었다. 그러기 전에 독일이 무너질 테니.
“바깥의 저치들에게 좋은 명분이 되겠군.”
바람을 타고 아련하니 들려오는 듯한 함성 소리를 떠올리며 빌헬름이 말했다. 아마 실제로 들려오지는 않을 것이다. 진작에 베를린을 피해 교외의 포츠담으로 처소를 옮겼으므로.
“송구스럽습니다, 폐하.”
그나마 아직까지 그의 곁에 남아 있는 독일민족당 인사인 뵈켈이 대신 고개를 숙였다.
“그것이 자네 잘못이겠는가.”
딱히 빌헬름이 관대해졌다기보다는, 화낼 만한 기력을 일으키기조차 어려울 만큼 지쳤기 때문일 테다.
나머지 독일민족당 사람들은, 그들의 호화로운 집에 궁상맞게 숨어 있거나, 아예 시골로 몸을 피했을 것이다. 아니면 자신은 사실 전쟁에 반대했었다며 시위대에 합류하였거나.
돌이켜보면, 이미 조선의 음모는 까마득한 옛날부터 진행되고 있었다. 저 시위가 전선에서 후방으로, 그리고 마침내 제국의 수도 베를린으로 퍼진 과정을 보고서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가장 먼저 반기를 든 극단주의자들이 어설프게 무장투쟁 따위를 시도하면서 진압의 빌미를 주는 대신, 사민당이 전쟁에 찬성하자 반발하여 탈당한 그 매부리코 룩셈부르크나 칼 리브크네히트 등과 함께 ‘평화로운’ 투쟁에 나선 것도.
그 투쟁이 아직 문을 닫지 않았던 라임나무 클럽을 통해, 대세에 어떻게든 동참해보려던 모리배 정치인들을 이끌어낼 수 있던 것도.
그들이 한낱 오락거리로만 여겼던 라디오를 통해, 신문이나 편지와는 비교를 불허하는 속도로 더 많은 군중을 거리로 끄집어낸 것도.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이라면, 런던과 파리의 사정은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으리라는 점이요, 위안이 아닌 것이라면, 바로 그 런던과 파리에서도 이곳 베를린 사정을 듣고 동일하게 위안거리로 삼고 있으리라는 점이었다.
“폐하, 아직 군의 충심은 모두 꺾이지 않았습니다. 만일 베를린의 군중이 폭도로 변한다면 언제든 단호한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이번에는 힌덴부르크 원수가 루덴도르프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말했다.
“군은 지금 퍼지는 티푸스부터 잘 단속하고서 그런 말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의료지원까지 받는 판국에, 불온한 무리에게 더 명분을 주어서야 되겠나.”
폴란드에서 시작한 티푸스는, 항명 초기 독일과 오스트리아 모두 동부전선에서 병력을 급히 더 차출하면서 서부전선으로도 퍼졌다. 그나마 바로 상대방 전선까지 퍼졌기에, 그들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후... 내 말이 심했네. 이해해 주게.”
아무리 자존심이 상했다지만, 프로이센인은 프로이센인이다. 역시 ‘예, 폐하’ 하는 무덤덤한 대꾸가 돌아왔다.
“그리고... 외무장관은 공식으로 협상 의사를 타진토록 하고. 장소는 적당한 중립국... 네덜란드 정도로 하면 되겠군.”
“폐하, 외람되오나... 다른 나라의 중재에 응하는 형식이 아니라면, 이어지는 협상에서 우리가 불리한 입장에 있다는 인식을 줄 수 있습니다.”
언제나 우울한 분위기 풍기는 외무장관 베트만-홀베그가 반대의 뜻을 표했다.
“어떤 다른 나라가 선의랍시고 선뜻 중재 나서기 전에 우리가 먼저 손 내미는 것이 낫지 않겠나? 다들 남의 선의에는 똑같이 한 번 이상 데였으니, 이제야말로 우리끼리 무언가 해보자고 하면 응할 수밖에 없을 걸세.
설령 저들이 응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적어도 베를린의 군중을 달래는 정도 효과는 있겠지.”
이제 와서 카이저의 주장을 더 가로막기에는, 다들 지친 것이 사실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제의가 중립국을 통해 정식으로 전달된 무렵 다른 나라들도 순순히 동의했다는 점이었다. 비공식적으로 전달된, 또 한 번 남의 선의에 당하기를 원하느냐 하는 카이저의 말 또한 상당한 공감을 이끌어낸 듯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다른 나라들의 기웃거림 막으면서 그들끼리만 논의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협상국과 동맹국 모두, 곧 조선의 선의 정도면 그나마 미더운 축에 들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예컨대 협상에 앞서 중재안을 들고 직접 베를린에 나타난 배불뚝이 미국인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가 보여주는, 그런 류의 선의가 있었다.
“영국의 웰즈 씨가 그랬다고 합니다. 이 전쟁은 모든 전쟁을 끝내는 전쟁이 되어야만 한다고.”
“우리 독일은 항상 평화만을 원해왔소. 그 말에는 우리 또한 동의하는 바요.”
물론 평화를 원하더라도 전쟁은 그와 무관하게 인간 옆에 남아있기 마련이다. 빌헬름 본인을 비롯해 많은 이들이 동의할 것이다. 그래도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 같은 이들과 손잡고 영국에서 반전 운동 벌이고 있다는 그 웰즈의 이름을 언급했다는 사실은, 꽤 긍정적인 신호였다.
“이 재정지원 계획에 투입될 자금은, 미합중국 국민의 혈세에서 나온 것입니다. 따라서 제게는 이 자금의 융통이 최대한 합리적이고 공정한 방식으로 집행되도록 할 책임이 있습니다.”
카이저는 재정의 전문가가 아니었고, 눈앞의 미국인 또한 유럽 내의 편견과는 달리 재무에 그렇게까지 밝지는 않은 듯했다. 그러나 그가 함께 가져온 정보에 따르면, 영국과 프랑스 역시 독일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도움이 절실한 듯했다.
물론 금융계의 체급으로 따지면,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 오스트리아 등에 비할 바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식민지 각지에 불온한 움직임이 감돌면서, 해외에서 끌어올 수 있는 자본 상당 부분이 묶인 상황이었고, 어떻게 되든 내년부터 짧으면 수 년, 길면 최소 수십 년은 세계 금융이 시티 오브 런던 대신 뉴욕의 월가를 중심으로 재편되리라는 것이 명백했다.
“그래서 용건이 무엇이오?”
“말씀드린 사유로 인하여, 저는 수원국(受援國)의 재정건전성을 위해 몇 가지 조치를 권고할 수밖에 없는 실정입니다. 그러한 조치는, 뜻하지 않게 폐하의 정부에서 주장한 반식민지 주장과 접점이 있고요.”
어쨌든 독일은 폴란드라는, 러시아를 견제할 수 있는 완충지대를 얻었다. 비록 미덥지 못하기는 해도, 다시 산산이 조각나는 미래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그들은 독일과의 관계를 버릴 수 없을 테다.
거기에 식민지 해체 – 거기에 무슨 그럴듯한 명분을 붙이며 포장하든, 지금 이 미국인이 말하는 것의 본질은 그러하였다 – 가 이루어진다면, 독일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간만에 기분이 좋아지는 기미를 보이려던 차.
“그러나 미국은 엄연한 중립국으로서, 일방적으로 한쪽에 유리한 조치만을 지지할 수는 없습니다. 그에 상응하여 폐하의 정부도, 교전국들에게 어느 정도의 보상적 조치는 인정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컨대 해군력 제한이나, 점령당한 영토의 공식 양도 등...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선의에 입각한 제안이고, 어떤 구속력도, 강제력도 없습니다. 하지만,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미합중국 정부와 국민의 대리인으로서, 가장 합리적인 방식으로 한정된 재원을 분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이것도 굳이 원인을 따진다면, 이미 태프트의 머릿속에 있던 것을 끄집어내는 데 조선국 김옥균이 결정적인 기여를 해주었으니 조선국에서 나왔다고 할 수는 있을 테다.
그러나 그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 카이저 빌헬름의 정신 건강에 그리 좋지는 않을 것이었다.
더구나, 그에 이어 나름의 중재를 또 제안코자 프랑스 베르됭에서 건너온 최익현이, 베를린에 당도하자마자 전선에 도는 티푸스로 인해 쓰러졌으므로, 빌헬름에게는 또 다른 조선발 부담이 지워지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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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대전은 군대 간의 전쟁인 만큼 은행 간의 전쟁이기도 했습니다. 총력전을 수행하기 위해 각국은 자국의 모든 금융 역량을 투입해야 했고, 시작부터 돈을 빌려야 했던 러시아, 역시 전쟁 시작과 더불어 산업역량 상당부분을 상실한 프랑스 등은 물론이고, 19세기 세계 금융의 중심이었던 영국조차 러시아와 이탈리아의 전비 조달을 위해 상당한 부담을 짊어져야만 했지요. 이 과정에서 이들이 19세기 전체에 걸쳐 식민지에 투자한 금액의 3분의 1 이상이 전비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결국 1915년부터 가장 전비 부담이 큰 영국은 월가에 손을 벌려야 했고, 미국의 참전 이전부터 이 기회를 이용해 미국이 주도하는 전후 질서를 만들고자 하는 구상이 미국 내 공화당과 민주당 양쪽에서 나오게 됩니다. 민주당의 윌슨은 물론이고, 미국이 향후 세계의 경찰이 될 것을 주장한 시어도어 루즈벨트나, ‘평화강제연대(League to Enforce Peace)’라는 이름부터 의미심장한 단체를 만들어 활동한 태프트 등이 모두 여기에 참여했지요.
작중에서는 소모전이 절정으로 치닫기 전 전쟁이 끝물에 접어들었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이탈리아와 러시아라는 짐덩이를 내려놓은 대신 훨씬 많은 자본이 식민지에 얽매여 있는 상태고, 독일은 이탈리아라는 부담을 대신 짊어진 상태입니다. 가장 많은 유동자금을 보유한 미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것은 이 때문이지요.
킬 군항의 반란으로 전쟁이 끝나기 전에도 독일 내에서는 전쟁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고개를 들고 있었습니다. 전시경제로 인한 생활고와 더불어 1917년 러시아 혁명도 이를 자극하는 한 가지 원인이 되었지요. 1917년 7월 사민당이 기독교중앙당 등 다른 여러 당과 함께 제안한 평화결의안이나, 1917년 군수산업계 파업, 1918년 1월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독일에 걸쳐 광범위하게 벌어진 총파업 등의 사례가 있었지요.
그러나 군부의 강력한 통제 하에서 이러한 움직임은 결실을 거두지 못했고, 서부전선에서의 최후 공세가 실패하고 미군이 본격적으로 참전하면서 전선 붕괴가 눈앞에 온 상황에 이르러서야 빌헬름과 군부도 결국 상황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원 역사에서는 진작 빌헬름의 미움을 사 물러난 뷜로우 대신 전시수상을 맡게 되었던 베트만-홀베크는 그 음울하고 무기력한 성격으로 유명했습니다. 물론 1914년 시점에서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였으니, 설령 밝은 성격이었더라도 그것을 고수하기가 어려웠을 듯합니다.
세계대전 시기가 당겨지면서, 원 역사의 스페인 독감 대신 다른 전염병이 돌게 되었습니다. 1910년대 초부터 폴란드에서 유행하고 있던 티푸스는 1914년 시점에도 왕성하게 퍼지고 있었고, 개전 초 러시아가 동부전선에서 대패하면서, 패주하는 러시아군과 진주하는 동맹군 양쪽에 병이 퍼졌고, 이때 러시아 내부로 티푸스가 유입되면서 적백내전 시기까지 많은 희생을 초래하게 됩니다. 작중에서는 동부전선에서 차출된 동맹군으로 인해 서부로 유입된 티푸스가, 원 역사와는 달리 인원 이동이 자유로운 환경을 틈타 마구 퍼지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