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사람을 노래하소서 (4)
동방에서 이 기이한 적십자 무리가 도착하기 전에도, 전선 바로 뒤까지 따라와 사람 하나라도 더 구해보려 노력하는 이들이 없지 않았다. 애인(愛人)을 말하든, 애국을 말하든, 사랑의 대상은 달라도 이루는 공은 같았다.
동양 삼국의 대군(?)이 찾아온 이후로는 유럽 안에서도 그렇게 자원하는 사람이 훨씬 많아졌는데, 이들은 대개 나라보다는 사람을 위하는 쪽이었다.
덕분에 재정과 시간의 한계 가운데서 겨우 아슬아슬한 선을 지킬 것 같았던 창의단 사정이 조금은 나아져, 전선 곳곳에 모래알처럼 흩어져 소임 다할 수 있게 되었다.
각국 전선의 병사들에게 귀한 쌀을 주었더니, 조리한답시고 섣불리 손을 댄 끝에 마소도 돌아보지 않을 정체불명의 무언가를 만들어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에 – 어느 섬나라에서 온 육군 가운데서 유난히 자주 보고되는 사례였다 – 국적 막론하고 발 동동거리던 동양인들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리하여 분명 문명인으로서 도의를 다하러 가겠다고 온, 배움이나 생각 중 하나 이상은 깊은 젊은이들이 군중에서 밥이나 짓고 있게 되었으니, 세운다는 공덕이 졸지에 수인씨(燧人氏)와 같게 되었다.
“그래도 생각보다는 평화로운 듯합니다. 전선에 그런 말이 어울린다면요.”
몇 년 전 은퇴하여 고국으로 돌아간 – 은거하며 영혼의 신비를 탐구하고자 한다는 사람 치고는 행장이 수상쩍게 화려했지만, 제자된 도리로서 무어라 하지 않았다 – 진령군을 대신하여, 그의 도우(道友) 여럿 데리고 찾아온 박수무당 알레이스터 크로울리가 유창한 조선말로 인사를 건네었다.
음사(淫祀) 배격을 마땅한 것으로 여기는 최익현으로서는, 처음 총리에 올랐을 때 그 진령군이라는 무당을 대원군이 보냈던 것도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 그 도를 이어받아 무언가 하나의 학(學)을 세워보겠다고 설치고 다니는 이자도 썩 좋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이 어디 냉온수 가릴 계제던가. 원혼 달래는 굿판이라도 열겠노라 하지 않는 이상은 차마 내치지 못하리라.
“그런가? 듣기로 당장 파리만 가도 이곳 전장의 모양새를 잘들 모른다 하던데.”
“그것이 요새는 조금 흔들리고 있습니다. 파리는 몰라도, 런던도 꽤 시끄럽던데요.”
스승에게 살짝 배우고 저도 나름대로 단련한 – 고대 룬이나 타로 카드 따위를 붙잡고 있는 것보다 훨씬 영적·세속적 사업에 도움 되는 기술이었다 – 재주로 최익현의 얼굴을 슥 살핀 크로울리가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전선의 병사들을 대신해서 편지를 전달해주는 일도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인명 구호를 위해 오신 분들이 우편 업무도 해주신다니 조금 의외라고 생각했는데, 아마도 이곳에 머무는 창의단 사람들이 노린 바와 그리 멀지 않겠지요?”
“그것이 그리 중한가? 우리는 그저 의에 따를 뿐일세.”
창의단 사람들이 전·후방을 자유롭게 오가게 되면서 그들에게 부업이 생겼는데, 바로 전선의 병사들과 후방의 가족들 사이 편지를 대신 전해주는 일이었다. 이곳저곳 돌면서 모았다가, 다시 창의단 내에서 모으고, 그것을 후방에 물자 구하러 갈 때 민간 우체국에 전하는, 그리고 반대로 받아올 때도 마찬가지로 받아오는 식이었다.
물론 군사우편이라는 게 있기는 하지만, 도저히 믿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분명 문답 주고 받는데 어째 아귀가 맞지 않는 경우도 있고, 간혹 멀쩡한 편지가 영영 도착하지 않는 경우까지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차, 미국이 창의단 활동에 공개적으로 지지를 보내며, 더 나아가 열강들이 중재에 응한다면 전후 복구를 위한 재정 지원을 해줄 의향이 있다고 표명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 ‘재정 지원’이란 결코 무상도 아니요, 저 유명한 영국인의 희극에 나오는, 사람 안심 1파운드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유대인보다도 악랄한 조건이 붙어 있었으니, 어느 한쪽 편 든다는 소리 듣지 않으면서 저의 명분과 잇속을 모두 챙기겠다는 의도가 명백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이나 프랑스는 단칼에 거절하지 못했고, 독일 역시 중재의 단서를 주렁주렁 달기는 했지만 미국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하며, 반대편이 원한다면 휴전 내지는 정전 협상에도 응할 의향 있다 하였으니, 남보다 먼저 그 협상을 거절함으로써 상대가 단독으로 미국을 끌어들이거나 미국이 앙심 품고 딴짓할 위험을 초래하기에는 모두 사정이 여의치 않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선심 쓰는 시늉에 유럽 역시 부득불 마음에도 없는 답을 한 것이었지만, 계절이 봄에서 슬슬 여름을 내다볼 무렵이 되자 공세가 쌍방에서 공히 잦아들고 있었으므로 멋모르는 전방에서는 엉뚱한 생각들 품을 법도 했다. 누가 시작했는지는 몰라도, 어차피 곧 끝날 전쟁인데 소식이라도 자유롭게 주고받자는 생각으로 그들 옆에서 밥 짓는, 또는 짓는 법 가르쳐주러 돌아다니는 동양인들 옷깃에 종이 한두 쪽씩 밀어넣기 시작한 것이었다.
“저쪽 반대편에서도 똑같은 일을 하고 계시겠지요?”
“어느 한쪽을 편들 마음으로 온 것이 아니니, 인의를 따짐에 있어 어찌 다름을 두겠는가?”
그러나 지금 파리나 런던이 시끄러운 것처럼 베를린이나 비엔나가 시끄럽다는 소식은 적어도 언론에는 보도되지 않고 있었다.
아마 둘 중 하나일 테다. 정말로 저쪽의 국론이 일치단결하여, 모든 남정네들이 죽고 다치는 한이 있더라도 승리를 거두겠다 각오하였거나, 아니면 그쪽도 이쪽만큼 시끄럽지만 남의 혼란 비웃기에는 이쪽 사정도 여의치 않거나.
“혹시나 했는데 정말이었군요. 걱정 마십시오. 제 입은 굳게 닫고 있겠습니다.”
“굳이 그리할 것도 없네. 이미 여러 나라에서 내게 물어왔고, 의심하는 바가 옳으나 엎어진 물 어찌하겠느냐 답한 것이 여러 날 전이니. 자네도 이미 여기 와서 나를 만난 이상, 나라의 눈길을 한껏 받게 되었을 게야.”
갑자기 각지에서 반전 여론이 고개를 들고, 일선의 동요도 가뭄에 콩 나듯 위에 전해지고 있을 테니, 무언가 의심하는 자들이 각국 군부 안에서 나타나는 것은 그리 이상하지 않았다. 선의로만 무장하고 온 줄 알았건만 이렇게 비수를 꽂았다며 노여워한들,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이었다.
창의단 사람들에게 편지를 전하던 병사 중 그 누구도 조국을 배신할 생각은 품지 않았다. 나름대로 군사보안에 저촉된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빼고, 전선 어디든 마찬가지일 테니 설령 누가 보더라도 군 기밀을 누설했다고 할 수는 없을 만한 내용만을 집어넣곤 하였다.
그러나 그것만 하더라도, 개전 초 잠깐 전해졌던, ‘많은 희생을 치렀지만 영광스러운 승리를 거두었다’ 운운하는 소식이 곧 먹줄 가득한 편지로 바뀌고, 언론 보도에는 수상한 공백이 생긴지 오래였기에, 아마 잘 되고 있겠거려니 여기면서 모호한 걱정만을 하던 후방의 사람들에게는 적잖은 파장을 몰고 왔다.
자신들은 이렇게 고생하지만, 분명 후방의 사정은 그리 나쁘지 않으리라 여기면서, 얼른 전쟁이 끝나고 고향에 돌아갈 생각을 하던 중, 식량 배급이니, 전력통제니 하는 말이 그대로 편지에 적혀 돌아온 것을 받아본 병사들 역시 동요하기는 매한가지.
급히 후방을 오가는 창의단 사람들 옆에 감시를 위한 ‘경호’인력을 붙이고, 우정 체계 전체의 검열을 강화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고 있다지만, 일어난 일을 아예 없던 것으로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자네를 경계할지언정 드러내놓고 해를 끼치지는 않을 터이니, 너무 걱정은 말게.”
최익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전시 보안과 국민 사기 운운하며 최익현에게 항의하러 온 장성들은, 오는 족족 오히려 한소리씩 꾸중을 듣게 되었다. 일국 장수로 수십만 대군 거느린 자들이, 사졸의 마음은 물론이요 민심을 우롱하려 하니, 어찌하여 이를 옳다 하겠느냐 하는 식으로 꾸짖는데, 마음 같아서야 그들도 할 말 많았겠지만, 당장 취할 수 있는 조치는 외교적 항의 외에는 없는 실정.
그러니 최익현이 앞으로는 (또는 앞으로도) 도의에 따라 처신하겠노라 모호하게 답하는 것만을 듣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얘기 들은 크로울리는 더욱 걱정스러울 뿐이었다. 이번에는 그쪽의 감정이 이쪽에 보였는지, 최익현이 말을 이었다.
“우리는 이곳 구주, 유럽 땅이 휘말린 참화를 조금이라도 줄여보고자, 그리고 더 욕심 내어 아예 막아보고자 이곳에 왔네.
그러나 여러 나라의 참혹한 지경을 잠시 도와주려 한들, 마치 숯불 위에 부채를 부치는 것과 같아 일시의 열기는 가실지언정 아예 불을 잡지는 못하고 있네. 나라 사이를 도로 화평케 하지 못하니, 대신 그 나라 사람들을 화목케 할 방도를 마련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엄밀히 말해 다른 나라의 전쟁 수행을 방해하는 행위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양측에 공히, 치우침도 편가름도 없이 하는 일이기도 하네. 무슨 거짓을 퍼뜨린 것도, 도성에 괘서 붙인 것도 아니요, 그저 가운데서 가로막는 일이 없도록, 양쪽을 오가며 할 수 있는 일을 하였을 뿐일세.
그러니 전화(戰禍) 무엇인지 이제 조금씩은 다들 알았을 것이야. 앞으로 어찌할지는 이곳 땅의 백성들이 정할 일이지, 우리 중 누구도 나서서 무어라 할 바가 아닐세.”
처음 정강사에서 내었던 연환계 계책의 숨겨진 사슬이었다. 여차하면 이 지경까지 오지 않고 끝내기를 바랐지만, 그러지 않을 공산이 훨씬 큼을 알았기에 마련한 권도(權道). 누구는 인의라 하겠지만, 누구는 배신이라 하면서 원한을 품을 계책.
지난해 초 구주에 사람 보내 중재 권하면서 살핀 각국 전선의 사정과 민간 여론을 참고하고, 이곳에 당도할 적 여기저기서 젊은이들이 들은 바를 종합하여 결국 결행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경전을 벗 삼아 쓴 장계로써 멀리 한양의 조정에 재가를 구하고, 조정에서는 시서(詩書)로써 답하였으니, 계획 동참할 때 은밀히 내막 전달받은 나라들이라면 모를까 유럽 땅의 당국들은 설령 도청하였다 한들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설마... 처음부터 조선국에서는 이것을 노렸던 것이었는지요?”
크로울리 물음에, 늙은 얼굴에 가벼운 미소 띄우며 최익현이 답했다.
“오롯이 이 한 사람의 생각이었다네.”
식량의 배급량이 약간 늘어나고, 판매할 수 있는 빵의 종류도 다시 3종으로 늘어났다는 소식에, 전황이 조금은 풀리는가보다 짐작하며 기뻐해야 했을 파리 시민들은 도리어 노여워하고 있었다.
“저들의 분노에도 일리는 있소. 싸움 끝에 궁한 지경 처한 것을 돕는다고 양곡을 보내왔건만, 그것을 전쟁에 쓰려 한다 하면... 후... 비록 근시안적이기는 하지만, 이해가 아예 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
아직까지는 언론들도 검열 지침을 잘 따라주고 있었다. 그러나 조르주 클레망소의 정치적 감각은, 그 인내가 오래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각하, 설마...”
자리에 함께 앉은 사람들은 군복 차림이 반, 민간인 차림이 반. 그러나 전쟁을 언제까지 끌 수 없다는 데는 모두가 동의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다는 데는 나뿐 아니라 모두가 동의하고 있겠지. 그렇지들 않소?”
“물론입니다, 각하.”
“무슈 최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에서도 동일하게 그... 구호 인력의 일탈 행위가 이루어졌다고 인정했고, 실제로 우리와 비슷하거나 더 심한 동요가 일어나고 있다는 믿을 만한 첩보가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독일이오. 독일의 의지를 무너뜨려 어떻게든 협상장으로 이끌어낸다면, 오스트리아도, 이탈리아도, 저 키예프 정부도 오래 버틸 수는 없을 테니.”
“거기에는 나도 동의하오. 하지만 우리가 흘린 피만큼의 대가를 받아낼 만큼 저들을 몰아세우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지. 뾰족한 수가 있소, 총리?”
개전과 동시에 클레망소에게 밀려났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대통령으로서 할 말은 하던 레몽 푸앵카레가 딴지를 걸었다.
“그 얘기를 꺼내려던 참이었소.”
고개를 슥 돌리니,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는 군인이 하나 있었다.
지난 아르덴 공세에서 메츠를 방어해낸 공으로 이름을 날리고 마침내 총사령관 자리까지 올라온 로베르 니벨(Robert G. Nivelle)이었다.
“단 한 번의 공세로 승부를 결정지을 것입니다. ‘엘랑 비탈’의 감투정신을 마지막으로 발휘해, 흔들리는 독일군을 무너뜨리고 베를린까지 나아갈 것입니다.”
테이블 옆의 지도를 지휘봉으로 가리키며 니벨이 유창하게 자신의 계획안을 꺼내놓았다.
“종합적으로 따져보았을 때, 아직 상황은 그리 나쁘지 않습니다. 독일군은 최근 완전히 한계에 봉착한 국내경제의 유지를 위해 병력 감축과 철수를 추진하고 있고, 이로 인해 취약점이 일시적으로 여럿 발생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그럴듯한 계획이었다.
거창한 수사로는 ‘베를린까지 나아간다’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만큼은 아니요, 그저 알자스-로렌 방면에서 추가 공세를 감행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이 소박함은 현실성을 더해주는 것처럼 보였다.
“현 여론을 고려해, 포격을 최대한 활용, 예상되는 인명피해를 최소화할 것입니다. 우리 대육군이 독일 내로 깊숙히 진격할수록 국민과 장병의 사기는 재차 고취될 것이며, 반대로 우리 이상으로 한계에 봉착한 독일은 더욱 곤경에 처하겠지요.”
포격이라면 니벨의 장기로도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지금껏 군, 특히 육군을 믿었다가 여러 차례 당혹스러운 상황에 처했던 클레망소는 코멘트를 붙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되기를 이 사람도 누구보다도 열렬히 바라지만... 내각의 수반으로서 한 가지 당부를 빠뜨릴 수 없구려. 이 공세를 어떤 수를 써서라도 성공시켜야 할 게요.”
그리고 니벨은 호기롭게 답했다.
“걱정 마십시오. 이것은 이 전쟁의 향방을 결정하는 마지막 공세가 될 것입니다. 공세가 실패한다면 48시간 내로 취소하도록 하겠습니다.”
1912년 6월. 서부전선 개전 이후 가장 사상자가 적었던 5월을 뒤로 하고, 다시금 심상치 않은 기운 감돌 무렵.
카이저 빌헬름은 정부와 군부 인사들을 모아놓고, ‘힌덴부르크 프로그램’과 아시아로부터의 곡물 지원으로 생긴 여유 전력을 어떻게 공세에 투입할지 논의하고 있었다.
본래는 프랑스의 니벨이 자신 있게 공언한 – 부정적 여론을 가라앉히고자, 자신의 공세 계획을 열심히 떠벌이고 다녔던 것이다 – 공세에 대응하기 위한 모임이었는데, 그 실패가 불과 이틀만에 명백해진 덕에, 이 승리를 어떻게 최대한 활용할지를 두고 다방면으로 논의하게 된 것이었다.
군사전략 외에도, 후방에서 아시아산 쌀 대신 루타바가가 여전히 배급되고 있다는 사실이 검열망을 피해 전방에 전해지면서 생긴 동요를 어떻게 진정시킬지 등등, 다루어야 할 안건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회의는 꽤 길어졌고, 이미 민간에서는 ‘치커리 커피’로 대체된 지만 아직 궁중에서는 즐길 수 있던 커피까지 여러 잔 내와야 했다.
그나마 전선의 승리 덕에 회의의 분위기가 – 중·노년 프로이센인들을 한 군데 모아놓은 것 치고는 - 비교적 밝았다.
“... 이제 계획대로 병력 철수를 진행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됩니다. 그러나 처음 상정된 것처럼 무기 생산량을 높이기 위해서는 폴란드로부터 노무자를 지원받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판단되는데...”
노쇠한 힌덴부르크를 대신해 사실상 군부의 좌장으로 행세하는 에리히 루덴도르프가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불가능합니다. 당장 저 조선인들을 받아들이면서 자칫 큰 위기에 봉착할 뻔하지 않았습니까? 거기에 폴란드인들까지 우리 독일의 핵심 방위산업시설에 받아들인다면...”
신생 폴란드는 물론이요, 아직까지 애매한 입장을 견지하는 발트 독립운동 세력들까지도 순순히 독일의 우위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었기에, 외무장관 베트만-홀베그(Theowald von Bethmann-Hollbeg)가 무겁게 말했다.
다행히, 다른 군부 장성들도 슬라브인들에게는 썩 감정이 좋지 않았기에, 대체로 그에게 동조하였다. 지금처럼 고자세로 무언가 대가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제발 독일 공장에서 일하게 해달라면서 간청한다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썩 내키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30만 명 이상의 노무자를 들여오지 않는다면 현 상황의 유지는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만약 모종의 이유로 동쪽에서 들어오는 식량이 차단된다면, 그 소요는 더욱 높아질 것입니다.”
“어려운 것은 영국과 프랑스도 마찬가지요! 굳이 그런 극단적이고 위험 큰 방안을 택하지 않더라도...”
그때, 문이 최소한의 정중함을 지키는 선에서 발칵 열렸다.
“폐하, 폐하! 전선으로부터의 급보입니다!”
“무엇인가?”
미간을 연신 만지작거리던 빌헬름이 일동 대표하여 물었다.
“프랑스군과 영국군 전선에서 대규모 항명이 발생하고 있다고 합니다! 실패한 공세의 선두에 섰던 부대들 중 최소 2개 사단에서 소요가 발생했으며, 인접 부대로도 빠르게 확산 중이라고 합니다.”
이른바 ‘니벨 공세’는, 킬로미터 당 전사자 4만 명이라는 기록을 세우면서, 48시간 만에 고작 3km 전진한 상태에서 멎었다.
힌덴부르크 프로그램에 따른 병력 감축으로 저하된 전투력을 요새화를 통해 일부 상쇄하고, 병력의 철수를 유보하고 예비대로 재배치하는 등, 니벨 공세가 어디로 향할지를 예측하고 그에 대비해둔 덕이었다.
“신빙성은 어느 정도인가? 확인한 경로는?”
이번에는 에리히 루덴도르프가 물었다.
“일선으로부터의 보고입니다. 양측 전선을 오가는 그... 동양인들을 통해 야전부대에서 확인했다고 합니다.”
그제야 모두가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대개는 승리를 미리 축하하였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이들도, 목전의 목표를 쟁취할 수 있는 방편을 더욱 희망차게 궁리하는 이들도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폐하!”
“마침내, 승리가 정말로 눈앞까지 다가왔습니다!”
“명령을 내려주시면, 즉시 예비대를 출동시켜 반격을 감행토록 하겠습니다.”
“24시간 내로 추가 공세 계획을 마련해서 보고토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양측 참호 사이를 오갈 수 있는 소식이라면 같은 참호선 따라서는 훨씬 빠르게 퍼지리라는 점은 떠올리지 못했다.
로베르 니벨이 경질 요구 속에서 사직하고, 본래는 전술적 수준에서 계획되었던 역습이 급히 확대되어 만들어진 가칭 ‘루덴도르프 공세’가 첫발을 뗄 무렵.
“이제 그만!”
“우리도 지쳤다!”
방어선 단축을 위해 철수가 예정되어 있었지만, 갑작스러운 지시로 다시 공격을 명령받은 베르됭 방면 독일군이, 늘 그렇듯 수많은 인명피해를 입고 철수한 뒤에 그 뾰족한 철모를 땅에 내려꽂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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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역사의 알레이스터 크로울리가 1차대전 중 보인 행보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존재합니다. 1914년 전쟁 발발 무렵 금전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크로울리는, 미국으로 향해 독일을 위한 선전활동을 벌였는데, 진지하게 하는 선전이라고 보기에는 영 어설픈 활동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영국의 이중첩자로, 미국 내 반독여론을 일으키기 위한 것이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1차대전기 전반에 걸쳐, 진영과 무관하게 각국은 대규모 전시검열과 민간인 사찰을 시행했습니다. 작중에 언급되는 것처럼 편지의 내용을 확인하고 ‘민감한 내용’이나 ‘과장된 정보’를 삭제하는 것은 물론이고, 아예 편지 자체를 중간에서 폐기하거나 문제되는 내용을 작성한 병사를 스파이 혐의로 처형하는 등 다양한 사례가 있었지요. 이미 제2차 보어전쟁으로 여론의 중요성을 깨달았던 영국, 아예 각군 사령관에게 검열 전권을 위임한 독일 등의 사례가 대표적이라 하겠습니다. (물론 굳이 전선의 상황을 숨기지 않아도 되었던 미국이나, 검열에 필요한 행정체계가 미비했던 러시아 같은 예외도 있습니다.)
전쟁이 이어지면서, 이러한 검열의 범위는 확대되어 전선에서 후방으로 가는 편지뿐 아니라 후방에서 전선으로, 그리고 후방 내에서 오가는 편지까지 더욱 엄격하게 통제하게 됩니다. 특히 식량 부족이나 전시배급제 같은 주제들은 검열의 대표적인 대상이었지요.
전쟁의 빠른 종결이 불가능해지고, 외부 개입이 없는 한 총력전으로 힘겨루기를 하는 수밖에 승리의 길이 없다는 것이 명백해진 이후에도 서부전선에서는 서로 공세가 계속되었습니다. 물론 참호전의 한계를 피하기 위해 다양한 수단이 강구되었고, ‘후티어 전술’ 같은 침투 교리, 정교한 포격, 공군을 활용한 정찰, 독가스, 그리고 전쟁 말에는 탱크까지 많은 군사혁신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니벨 공세는 원 역사에서는 1917년 감행된 공세로, 서부전선에서 대표적인 실패 사례로 꼽힙니다. 여러 문제가 있었지만, 작중에서와 동일하게 니벨 본인이 사적인 모임에서까지 자신의 공세 계획을 떠들고 다니면서 독일군이 충분한 대비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이 결정적이었지요. 그러나 이미 염전(厭戰) 분위기가 만연한 상황에서, 지지 기반도 부족한 채 총사령관 자리에 올라오게 된 니벨로서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작전안을 널리 알려 지지를 모으는 수밖에 없었다는 옹호론도 있습니다.
그 프랑스 장군들 망신당한 일화가 독일군 참호에도 퍼지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어리석은 장군들을 비웃는 심리 이면에는 차마 저들 상관들은 대놓고 비웃을 수 없기에 국적만 바꾸어 조롱하는 마음 있다는 사실은, 히틀러 상병의 머릿속에 들어갈 여유가 없었다.
베를린을 발칵 뒤집은 일의 전말은 이러하였다.
아돌프 히틀러 상병의 전장 산수화는 본바탕이 박물관에서 슥 보고 어설프게 그린 모작인 데다가 그마저도 먹이 아닌 목탄으로 그린 것이라, 최익현 눈에는 썩 훌륭하지 않았다. 그러나 차마 참혹한 전장에서까지 예술혼 불태운 젊은이에게 그런 말을 대놓고 할 수는 없어 완곡하게 ‘더욱 정진하면 반드시 뜻을 이루리라’ 돌려서 평하였다.
그로부터 몇 달 동안 회상과 회상 끝에 약간의 망상이 더해진 히틀러 상병의 기억에 따르면, 이는 그 국제적 명사가 자신의 재능을 알아봐 준 것과 같았다. 그처럼 꼬장꼬장하고, 심지어 프랑스군 장성들에게는 호통까지 쳤다는 최익현이니, 자신에게 해준 평이 극찬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