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분노를 노래하소서 (4)
1911년 ‘침묵의 성탄절’로부터 다시 여러 달이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전쟁은 끝났다.
이 대전쟁이 어떻게 그토록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끝을 고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살피기 위해서는, 가장 처음, 그러니까 개전 직후 모두가 낙관에 젖어 있을 때부터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1910년 초가을만 하더라도 해를 넘기기 전 전쟁을 끝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전망이 아직 유효했다. 그러나 그런 희망을 런던부터 키예프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 – 반독 기조에 따라 고친 이름으로는 페트로그라드(Petrograd) - 부터 코스탄티니예까지 모두 품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그런 기대는 기대로 끝나고 말았다.
독일은 둘로 나뉜 러시아령 폴란드 주둔군을 손쉽게 제압하고, 신생 폴란드 국경선까지 단번에 진격해 재편된 러시아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물론 더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아니요, 페트로그라드 정부군을 붙잡아놓는 데 의의를 두고 있는 것이었다. 어차피 러시아의 정복이 아닌 정권교체가 목적이었으니, 독일인의 피를 흘리지 않고 해결하는 쪽이 나았다.
더구나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을 대체할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의 폴란드 군단은 베를린과 비엔나 어느 쪽의 예상보다도 빠르게 러시아령 폴란드를 접수했고, 빠르게 세를 불리고 있었다. 고무된 카이저 빌헬름은 옛 리투아니아와 쿠를란트(現 라트비아 남부) 등에도 똑같은 공작을 시도할 것을 지시했다. 성공한다면 (독일인의)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서 상트페테르부르크 코앞까지 나아갈 수 있을 것이었다.
프랑스는 독일이 국경에서 지연전을 펼치며 몰트케 계획에 따른 방어선으로 철수하는 동안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심지어 알자스와 로렌 방면에서는 병력의 집중 운용으로, 몰트케 계획의 주방어선을 돌파하고 예비 방어선으로의 후퇴를 강요하였다. 실지(失地) 탈환에 한껏 달아오른 언론은 인명피해가 예상을 상회하기 시작했다는 보도 대신, 이 기세대로라면 라인강 서안(Rive gauche du Rhin)까지 빼앗아와 (또는 ‘수복’하여) 1870년의 복수를 완수할 수 있으리라는 장밋빛 전망을 게재했다.
그에 놀란 영국은 아직 준비가 완료되지 않은 대륙원정군 6개 사단을 전선에 급파하기로 결정했다. 그때 전시내각에서 해군장관을 맡게 된 윈스턴 처칠은, 호위를 위해 함대를 분산시키느니 차라리 병력 수송과 함께 함대를 일제히 출동시켜 독일 해군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자고 제안하였다.
그리고 제안은 곧 명령이 되어, 함대의 준비에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피셔 제독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작전은 강행되었다. 덴마크가 중립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해협에 기뢰를 부설하였으니, 영국도 들어갈 수 없지만 반대로 러시아 발트함대 – 비록 영러협상 후 건함경쟁에서 뒤처지기는 했지만 규모는 무시할 수 없었다 – 를 견제하기 위해 킬(Kiel) 군항에 주둔한 독일 해군도 나올 수 없게 되었다는 계산에서였다.
페트로그라드에서는 동원령이 성공적으로 완수되면 인민의 파도만으로 반동세력을 질식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었다. (키예프 입장에서는, 칼미크인 피가 흐르는 일린이 루스인 대공들을 사람으로 질식시킨다는 것이 썩 유쾌한 비유는 아니었다.) 반면 키예프에서는 비록 값이 비싸기는 했지만 ‘도덕적 우위’ (그리고 믿음직한 독일군)를 얻었고, 돈(Don)과 쿠반(Kuban) 코사크의 지지를 확보했으며, 볼셰비키와 자유주의자들의 연대에 반발하는 향촌의 지주들 상당수의 마음을 얻었다.
그리고 페트로그라드든 키예프든 카프카스 방면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으리라는 냉정한 판단 하에, 루멜리아 전선에 모든 힘을 투입하기로 한 오스만 투르크는 마침내 신승(辛勝)이나마 거두며 옛 압제자를 은근히 업신여기던 발칸 동맹국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그리고 ‘비탄의 10월’이 되자, 모든 나라들이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닫게 되었다.
“그때가 참 좋았지. 그렇지 않았던가?”
겨울의 첨병인 양 음습하게 내리는 늦가을 비를 보며 카이저 빌헬름이 말했다.
“지금도 전선의 군인들은 승리의 영광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전하. 해군의 티르피츠 원수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신임 참모총장 에리히 폰 팔켄하인(Erich von Falkenhayn)이 말했다.
시작은 영국이었다.
피셔 제독의 영국 해군은 기존의 해안봉쇄 전략에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고 나름대로 미래의 해전에 대비하려 노력하였지만, 안타깝게도 시간은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결국 그들이 피해를 최소화하며 영국 해군의 우위를 살리는 작전을 내놓기 전 대륙원정군은 최소한의 준비를 마쳤고, 그들이 해협을 건널 때 해군도 출동해야만 했다.
수적 우위로 작전의 엉성함을 만회하고자 하였지만, 이마저도 요격에 나선 독일 함대가 예상을 뛰어넘는 규모였기에 무색하게 되었다. 러시아의 내홍 가능성을 접하고 또 은근히 부추긴 카이저가, 덴마크가 영국의 묵인 하에 해협에 기뢰를 부설하기 전 미리 킬의 함대를 유틀란트 반대편의 빌헬름스하펜(Wilhelmshaven)으로 이동시켰음을 알아채지 못한 것이 한 가지 패착이었다.
더구나 그렇게 어느 정도 열세를 만회했음에도 여전히 영국과의 격차가 현저했기에, 독일의 티르피츠 제독은 검증되지 않은 기술에 기대를 거는 도박을 했고, 영국에는 더욱 안타깝게도 이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투한 영국 해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으면서도 그에 조금 못 미치는 피해를 독일에 강요하였다. 헬골란트(헬리골란드) 앞바다에서 벌어진 대해전은 전략적으로 보았을 때는 독일의 승리였지만, 독일 해군은 다시는 그런 승리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영국 역시 등골을 부러뜨리는 대가로 한쪽 다리 정도는 내어주고야 말았다. 지금껏 높이 서서 남들 내려다보기를 즐겼던 이들에게는 심대한 충격이리라.
“영국은 심지어 동양 삼국이나 남미 제국(諸國)에 인도하기로 한 전함까지 묶어두고 있다더군.”
“소장 또한 들었습니다.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그만큼 많은 수의 전함을 손실했다기보다는, 가용한 전함의 수가 갑자기 줄어든 것에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절박한 수를 쓰려는 것이겠지만.
“그러니 이제 심기일전하여 반격을 준비할 때 아니겠는가. 국토를 잃는 것은 그만하고.”
계속 맞장구 치던 팔켄하인이 잠시 뜸을 들였다.
그 이유를 모르지 않았기에, 빌헬름 또한 무어라 하지 않았다.
독일군이 쓰는 것 같은 ‘구식’ 철모를 만드느니 차라리 그 재료로 소총 한 정, 포탄 한 발을 더 만들어 속전속결을 도모하는 것이 옳다고 믿던 프랑스군은, 그 소총과 포탄과는 달리 인명에는 한계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야전에서 겪은 두 달 간의 (달갑잖은) 경험을 바탕으로, 공세 전 체계적인 포격으로 방어자를 제압하고, 참호선 돌파와 침투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임시편제를 조직하는 등 많은 노력이 있었지만, 빠른 공세를 요구하는 파리의 지휘부에 따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야포와 신형 화기 등이 전선에 도착하기 전 보병만으로 공격을 감행하여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십수 년 동안 고착된 엘랑 비탈 교리를 고치기에, 사상자 50만의 값어치는 너무나 헐했다.
거기서 20만의 인명피해를 더 입으면서 몇 킬로미터를 진격해 알자스와 로렌을 완전히 수복하였다는 것은, 지도만을 보는 이들에게는 승리로 간주되었으며, 자국뿐 아니라 동맹국 영국에도 그렇게 전달되었다. 이 ‘승리’에 덩달아 고취된 영국 원정군 지휘부는, 해군이 주춤하는 사이 육군이라도 전공을 올려야 한다는 계산 하에 계획대로 단독공세를 취했고, 곧 동맹국의 전철을 밟았다.
독일은 그간 전략적, 또는 전술적 우위를 점해나가는 듯했지만, 정작 정치적으로는 큰 손실을 입었음을 깨달았다. 수백만 젊은이들을 전선으로 내몬 독일의 위대한 부상이라는 목표는, 영토를 넓히기는커녕 오히려 프랑스군에 다시 땅을 내어주었다는 사실, 그리고 영국 해군에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 대가로 러시아 해군(실제로는 크론슈타트를 떠나지 않고 있었지만)에게 발트해를 넘겨주다시피 했다는 사실 앞에서 무색해졌다.
전시내각에서 그의 장기인 선전과 선동을 마음껏 하게 된 오토 뵈켈은, 대신 그들의 철벽 방어선에서 얼마나 많은 프랑스인이 죽어나갔는지, 얼마나 큰 절망과 비참함이 저쪽에 감돌고 있는지를 선전하였다.
그러나 매일같이 치솟는 그 수치는, 영광만이 있는 지도와는 달리 집계하는 사람조차 공포에 질리게 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아무리 유리한 방어전이라고 해도 적 두셋이 죽을 때 아군 하나도 죽을 수밖에 없었고, 프랑스군의 초기 공세에 밀려나면서 방어에 최적이었던 주 방어선의 상당 부분을 포기하면서 독일의 피해 역시 늘어나고 있었다. 차라리 그들이 프랑스나 벨기에 – 협상국과 동맹국 모두 건드릴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 에서 싸우고 있었다면야, 더 유리한 방어선으로 물러나는 결정을 쉽게 내릴 수 있었겠지만, 이미 알자스-로렌을 내준 상태에서 이 또한 여의치 않았다.
“물론 현재로서는 쉽지 않겠지. 자네의 전임자가 물러나면서 올린 보고는 나도 잘 읽었네.”
자신의 이름을 딴 계획으로 수십만 젊은이들이 죽어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몰트케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는 신경쇠약이 아닌, 서부전선에서의 ‘일부 실책’에 대한 책임을 물어 교체하는 것이었고, 이는 자연스레 그 실책을 만회해야 한다는 중압감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동부전선도 곧 정리될 예정이야. 프랑스군의 역량이 크게 소진되었고, 영국 육군은 형편없는 것으로 드러났으니, 그리 어렵지는 않을 걸세.”
동원된 병력으로 따지면 서부전선 이상일지도 모르는 러시아의 현황은 복잡하였지만, 적어도 볼셰비키가 바라던 이상적인 상황과는 거리가 있었다.
동원령으로 최소 수백만 병력을 확보하고자 했지만, 실제로는 직접 통제가 가능한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 일대, 그리고 우랄 정도만 호응해왔다. 이미 농지개혁이 완료된 곳에서는 심지어 여학생들까지 자원입대를 한다는 소식이 전해졌지만, 반대로 그렇지 못한 곳, 그리고 아직 개혁이 진행 중이던 곳에서는 소극적인 태업부터 격렬한 사보타주까지, 동원을 위해 필요한 전 과정을 가로막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다.
더 골치아픈 것은, 그런 움직임의 상당 부분이 키예프를 지지하는 반동이 아니라, 소위 ‘톨스토이파’, 심지어 자생적인 볼셰비키 조직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말했다. 아직 내전도 아닌데, 심지어 수도에서는 총 한 번 쏘지 않고 평화적으로 대치를 해결했다던데, 왜 그들의 자식들이 한창 바쁜 밭을 떠나야 하는가? 스스로 일군 것은 스스로 거두어 가질 수 있게 한다던 나라의 약속은, 사실 구호에 불과했는가?
한편, 독일의 꼬드김을 받은 발트 연안의 지도자들은, 저들이 폴란드처럼 독일의 편으로 넘어가기를 원치 않는다면 대가를 약속하라고 강짜를 부리고 있었다. 물론 아예 회유를 거절하거나, 반대로 무력으로 키예프 정부를 진압하려는 페트로그라드 측에 전적으로 협력하거나 하지는 않았으니, 그들 딴에는 양쪽 사이에서 최대한 저들 겨레의 이익을 얻고자 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키예프 정부의 미래가 밝기만 한 것은 또 아니었다. 니콜라이 2세는 러시아인끼리 피 흘리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뜻만을 밝힐 뿐, 이 정부에 그리 협력적이지 않았고, 차르의 명 받들겠다며 키예프에 연락 취한 군 부대 상당수도 그에 따라 조건부 충성만을 서약했다.
결국 처음 세 대공 – 졸지에 휩쓸려 내려온 ‘꺽다리’ 니콜라이까지 합쳐 부르는 명칭이었다 – 을 따르기로 한 돈과 쿠반 강가 코사크들이 키예프 정부가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군사력의 전부였지만, 이는 베를린과 비엔나에는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는 현실이었다.
“준비에 만전을 기하도록 하겠습니다, 폐하.”
“그래... 조금만 더 버티도록 하세. 그대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것을 독일과 세상이 알아주겠지.”
공세를 말하면서 동시에 더 버텨야 한다고 말하는 그 모순을, 팔켄하인은 알면서도 지적하지 않았다.
대륙 건너편에서 언뜻 볼작시면 이 모든 일이 강 건너 불구경과 같았다. 남 싸움 이야기가 가장 흥미 돋우는 법이니, 물론 유럽에서 수많은 젊은이들 죽어가며 그 피를 고루 뿌리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깝지만, 반대로 신보에서 그저 기문(奇聞) 정도로 다루는 건도 있었다.
예컨대 놀랍도록 인명피해가 적고, 또 개전 초부터 모든 희망이 깨졌기에 다른 나라들 비통하게 좌절하는 동안 오히려 덤덤한 나라로 이탈리아가 있었다.
개전 초 알바니아와 몬테네그로에 상륙전을 펼쳤다가 패배하고, 프랑스의 거의 전 병력이 독일 전선에 쏠려 있으니 그나마 수월하리라 여겼던 사보이(Savoy) 공세도 거하게 실패하였기에 역설적으로 더 꺼질 희망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졸전하는 육군과는 달리 이탈리아 해군은 지중해에서만은 열강 자격을 증명하겠다는듯 필사적으로 영국과 프랑스 해군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고 있었지만, 그런 전략은 성공할수록 하등 성과가 없는 것이라, 대륙 반대편은 물론이요 옆의 베를린과 비엔나에서도 그 공을 잘 쳐주지 않을 것이었다.
또한 전란통에 프랑스를 제치고 온전히 모로코 삼키려던 스페인은 모처럼 유리한 국제정세를 틈탄 보람도 없이 곤경에 처하고 있었는데, 이 ‘서반아국 낭패지경’ 이야기 또한 신보에서 퍽 많이 다루는 것이었다.
자유주의 헌법 제정을 대가로 술탄이 끌어들인 젊은 베르베르인 군사지도자 압드 엘-크림(Abd El-Krim)은 스페인군을 모로코 전역에서 패퇴시키고 있었는데, 이 또한 조청일 삼국에서 보기에는 아무래도 모로코 쪽 응원할 법한 일이었다.
신보마다 물론 차이는 있어, 서반아와 이태리라 쓰는가, 아니면 ‘에스빠니아’와 ‘이딸리아’라 쓰는가 정도의 소소한 다름부터, 비꼬는 기색 역력한 『해동신보』와 진심으로 안타까운 마음 전하는 『청구시무』처럼 논조 판이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공통점이라면,
“꼴 좋다.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거 어언(語言) 쓰는 것이 일국 총리치고는 퍽 천근(淺近)하군그래.”
이제 임기가 두세 달 남짓 남았지만, 어쨌든 총리는 여전히 총리였다. 그러나 정강사 찾아와서 늙은이 다 된 사형들과 노닥거리고 있으니, 아직 두 번째 임기 많이 남은 미국의 시어도어 루즈벨트 같은 자가 보았더라면 ‘레임덕’ 따로 없다 놀렸으리라.
“일국의 공당 이끄는 사람답게 다시 언명하자면, 쟁투(爭鬪)로 흥한 구주 쟁투로 망해가니 천하 대세 흐름 이와 같노라. 이 정도 되겠습니다그려.”
그러나 김옥균도 그렇고, 김윤식 이하 세 사람도 그렇고, 막상 일이 터져버리니 뒷맛 씁쓸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애초에 남의 어려운 사정 보고서 긍휼히 여기지 않는다면 군자라 하기는 어려운 법이지요. 허나 이미 일어나버린 대란이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딱히 없지 않습니까?”
저 밖에서 노구 이끌고, 조선국이 멀고 멀어 따로 개입할 수 없다면, 적어도 구주 나라들 사이에서 중재는 하여야 한다, 말 다르고 생김새 달라도 같은 사람일진대 수백만 젊은이 죽어나가는 것을 어찌 좌시하는가 외치는 최익현을 보면서, 안타까워 하면서도 끝내 선뜻 동의하고 나서지는 못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나라 사이 도의 지킴을 중히 여겨온 조선국이지만, 전 구주가 전화에 빠져들어간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는가? 지금껏 나라의 이익과 도덕을 모두 지켜왔다는 데 자족하던 정강사 사람들의 쓴웃음에는 그런 안타까움과 무력감이 있었다.
이만하면 난의 뿌리는 못 뽑아도 당분간 고식(姑息)은 되었으려니 여겼건만, 만국화평 위해 진력하던 것은 모두 허사가 되었고, 수십 년 뒤를 바라보고 비행기니 무어니 개발하던 융비총국 노력도 아직 뾰족한 무언가를 내놓지는 못하는 실정이었다.
“그래도 나라 경제에는 소득 쏠쏠하니 그나마 다행이라 할까요. 쓴맛은 가시지 않지만... 그래도 나랏돈이 공연히 나가는 것보다는 낫겠거려니 싶습니다.”
김옥균과 김홍집 대화 듣던 어윤중이 끼어들었다.
그 말대로, 정강사에서 하던, 또는 이어받은 모든 일이 허사는 아니었고, 적어도 쏠쏠한 벌이는 되고 있었다.
비행기는 그 가치 알아본 구주 나라들이 성급히 사들이고, 각자 여력에 따라 자체개발하던 것을 서둘러 양산하거나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를 모방하거나 하고 있었다.
기관총도 마찬가지로, 자장방총 쓰임새에 뒤늦게 경탄하고서 저들에게 팔아달라거나 남들에게는 팔지 말라는 청도 꽤 들어왔다. 자장방총을 쓸만하게 만들어준 그 브라우닝이 만든 이른바 ‘부씨기관총’도 사정은 비슷하였다.
그러나, 애초에 정강사가 떳떳한 관청으로 만들어지고, 그로부터 여러 해에 걸쳐 주상의 총신들이 드나들었던 까닭이 저 천하대란을 예견하고 그에 대비하기 위함이었지 않은가. 허탈하지 않다면 거짓일 게다.
당장 김옥균부터가 그러하였다.
‘W. 처칠’이라고 친히 서명된 정중한 서한, 전보나 팩스가 아니라 쾌속선으로 직접 전해진 그 서한으로, 전함을 인도하지 못하는 사정을 최대한 예의 갖추어 고하고, 부디 양해해달라 청하는 그 글을 받아보았을 때. 그때 기분이 어떠하였던가.
아국은 이미 아라사 서백리에서 날뛰는 자들을 제압하기 위해 연해주를 지켜 피득혁 조정의 명 받들게끔 하고 있고, 청국 역시 그 번속한 동삼성과 몽고의 옛 팔기 자제들이 뭉쳐 서백리 철도 인근을 경비하고 있는데 (엉뚱하게도, 장작림이라는 이름난 한인 무관이 이끌고 있었다.) 이만하면 우의에 상응하는 조치는 다 하였거늘, 어찌 이럴 수 있느냐며 거짓 역정 내었을 때.
그때 그 구업(口業)에 합당한 상쾌함이 그의 마음을 스쳤던가.
그 일 회상하며 영문 모를 수심 젖을 무렵, 정강사 마루에 울리는 소리 있으니 주상전하 행차 알리는 소리였다.
모두 일어나 예를 갖추는데, 성상 대뜸 하문하였다.
“이보시오. 영상.”
“예, 전하.”
“근래 천하 대란한데 돌이켜 막을 방도 없다고 아뢰지 않았소?”
김옥균과 예조와 정강사가 모두 동의하는 바였다. 그렇다 아뢰니 되묻는 윤음 이러하였다.
“그대는, 그리고 이곳 정강사의 제경(諸卿)은 모두 국조에 드문 인재요. 그 지모로 더 고심한다면, 필히 다른 수 무언가가 나오리라 내 믿소.”
하면서 나오는 말에 김옥균 눈이 번뜩 뜨였다.
“총리 추거와 참의대부 추거 맞지 않음을 그대가 일전에 안타깝게 여긴 바 있었지 않소? 내 그 마음을 들어준다면, 남은 두 해 동안 뾰족한 방편 마련할 수 있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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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개입으로 일어나지 않은 전쟁들은 세계 해군사의 흐름도 어느 정도 바꾸어놓았습니다. 본디 청불전쟁에서 입증된 어뢰의 위력이, 실전의 부재로 ‘가능성’ 정도로 남아있고, 러일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은 쓰시마 해전에서 드러난 장거리 포격전 역시 그 이전 피셔 제독을 비롯한 유럽 각국 해군의 상상의 영역에만 머물고 있는 실정입니다.
물론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도 기술은 존재하는 이상 도입 추세는 그대로 나타났지만, 명백한 전훈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 도입의 속도에 큰 차이가 발생했고, 그것이 원 역사 1차대전 초에 벌어졌던 헬리골란드-바이트 해전이 작중에서는 엉뚱하게 흘러가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원 역사에서도 덴마크는 영국의 암묵적 동의 하에 해협에 기뢰를 부설함으로써, 영국 해군이 발트해에 진입하는 것을 막았습니다. 이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독일이 침공하는 구실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작중에서는 러시아 발트함대가 건재한 상황이기 때문에, 역시 엉뚱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라인강 서안’은 나폴레옹 전쟁 시기 프랑스령으로 편입되었다가 전후에 다시 떨어져나간 행정구역입니다. 아헨, 트리어, 마인츠 등 독일 서부의 알짜배기 지역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지요.
알자스-로렌은 산업적 측면과 정치적 측면에서도 중요하지만, 군사적으로도 프랑스와 독일이 직접 맞닿으면서 라인 강이라는 자연방어물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가치가 있었습니다. 이곳을 제외하면 프랑스와 독일이 서로 침공할 수 있는 루트는 벨기에의 저지대 평원을 관통하는 경로나, 룩셈부르크 등이 포함된 아르덴 고원을 돌파하는 경로뿐이었기에 (물론 스위스를 경유하는 방법도 있기는 하지만 실효성은 그리 없었습니다.) 더욱 그러하였지요.
원 역사에서 서부전선 개전 초에 프랑스가 국경 전투와 마른 전투 등으로 상실한 것보다 약간 더 많은 인명 피해를 내면서 프랑스가 알자스-로렌을 되찾은 것을 성공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완전히 틀렸다고만 볼 수는 없는 셈입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비호 하에 세력을 키운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는 폴란드 독립 직후 빠르게 정국을 장악하고, 폴란드를 중앙유럽의 강국으로 만들어내는데 성공했습니다. 1919년 시점 불과 수만 명 수준이었던 폴란드군은 곧장 소련을 침공하면서 70만 명 이상의 대군으로 빠르게 확장되었지요. 그러나 이때의 강력한 모습은 서방 국가들에게 잘못된 인상을 주어, 2차대전 초 독일의 폴란드 침공을 영국과 프랑스가 수수방관하는 한 가지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탈리아군의 낮은 전투력은 영국 요리와 비슷하게 일종의 유머로서 후대인에게 회자되는 면이 있지만, 영국 요리와 마찬가지로 사람 입과 글을 오가면서 과장된 면이 있습니다. 양차대전에서 이탈리아군은 부족한 국력과 군사력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분전했지만, 그 얼마 안 되는 전투력마저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는 전장을 강요당하는 경우가 많았지요. 결국 이탈리아 국가 자체의 한계였지, 이탈리아군만의 문제는 아니었다고 하겠습니다.
압드 엘-크림은 원 역사에서는 리프(Rif, 모로코 북부 산악지대) 독립운동을 벌이면서 1920년대 스페인을 곤경에 몰아넣었던 베르베르인 지도자입니다. 이미 프랑스의 보호국으로 전락했던 모로코와 손을 잡는 대신 독자적인 ‘리프 공화국’ 건국을 추진했던 원 역사와는 달리, 작중에서는 알헤시라스 회의가 무승부로 끝나면서 모로코의 독립이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술탄의 손을 잡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