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분노를 노래하소서 (3)
그해 여름은 더웠다.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열풍이 알프스를 넘어올 리는 만무하니, 베를린의 열기는 끓어오르는 격정 탓일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의 통첩이 당도했습니다, 폐하.”
“어차피 내용이야 뻔하지! 우리가 키예프 정부를 지지하고 나선 것에 반대할 때부터 예상한 일이야. 읽어주지 않아도 되네.”
‘윌리’의 벗 ‘니키’는, 이 사태가 평화적으로 해결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 당부하였고, 카이저 빌헬름은 이에 적극 부응할 생각이었다.
차르가 반강제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키예프로 옮겨간 직후, 독일은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지지하면서 동시에 키예프 임시정부(아직 차르 한 사람이 있을뿐, 구색 맞추기 위한 내각조차 다 마련되지 않았다고 했다.)가 적법한 정부임을 주장하였다. 아직 헌법도 없는 러시아라지만 당연히 차르가 있는 곳에 정통성도 함께 가는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상트페테르부르크 ‘정부’는 동원령을 선포했다. 군의 상당수가 키예프의 편으로 돌아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독일 역시 어찌할지 장담할 수 없을 테니 이해할 수는 있는 조치였지만,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독일의 대응을 강제하는 측면이 있었다.
아무리 러시아군의 지휘관 대부분이 정치에는 무관심하고 능력보다는 차르에 대한 충성심과 연줄로 그 자리에 올랐다지만, 모두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었고, 오히려 유럽에 가까운 곳에 있을수록 이 사태에 불개입하려 애쓰거나 사상이나 정책에 대한 신념으로 인해 상트페테르부르크 쪽으로 돌아설 가능성도 높았다.
당장 지금이야 가용한 병력이 많겠지만, 인구로 보나, 경제력으로 보나 키예프 측이 장기적으로 우위를 지킬 수 있는 판이 아니었다. 반(反)개혁의 기치가 아무리 몇몇 계층의 심금을 울린다 한들, 이미 저들의 힘과 욕심을 깨달은 농촌의 ‘순박한’ 옛 농노들이 곧장 엎드린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러니 영국과 프랑스가 세상을 저들 입맛대로 굴려나가고자 저 정통성 없는 정부를 지원한다면, 독일이라도 나서서 도와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곧 우리도 동원령을 선포할 것이니 준비하라고 몰트케 원수에게 말해두었네.”
“폐하...”
“우리 모두가, 언제고 이 순간이 올 것을 알지 않았는가? 한 번. 단 한 번이면 되네. 전 유럽이, 전 세계가 우리 독일의 우위를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단 한 번의 순간. 어차피 벌어져야 할 일이라면, 적어도 우리의 손으로,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일으키는 것이 옳으이.”
주군의 의지를 확인한 뷜로우 수상 또한, 한사코 만류하는 대신 침묵을 택했다. 어쩌면 그 또한, 지금껏 반전(反戰)을 공공연히 내세웠지만 이번 사태에 대해서는 ‘전쟁을 막기 위한 모든 수단을 강구한다’라는 면피성 짙은 단서를 붙여 정부의 결정을 지지한 사민당의 베른슈타인과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 전쟁의 필연성에 체념 감도는 수긍을 하고야 만 것일지도 몰랐다.
(듣기로, 그 결정을 두고 사민당 안에서 룩셈부르크 같은 자들의 극렬한 반대가 계속되고 있다 하였는데, 지난 수십 년 동안 카이저가 시도하였으나 끝내 실패한 사회주의자 분열이 이렇게 일어나게 된 것은 참으로 묘한 일이었다.)
“내가 직접 의회에서 연설을 하도록 하겠네.”
카이저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하나의 카이저, 하나의 제국, 하나의 국민’이라. 이만하면 거대한 사변을 일으키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딱히 누군가를 향하지 않는, 만약 향한다면 그의 아버지 누워계신 저기 포츠담의 프리덴키르헤(Friedenkirche) 영묘를 향해야 할 혼잣말이 나왔다.
더 이상 영국이 세상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는 것도, 옆의 프랑스가 그 영국에 빌붙어 저들의 국력에 맞지 않는 목소리를 계속 내려 하는 것도 좌시하면 안 된다며, 독일민족당의 나팔수들은 떠들고 있었고, 그 정도는 다를지언정 전 독일이 호응하였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영국이 보여주었듯 평화란 결국 함포와 총칼이 지탱하는 것이었다. 그 자리를 대신 독차지하지는 않더라도 반절 쯤은 나누어 가지고픈 독일 또한 그 모범을 따라야 하지 않겠는가?
다음날 제국의사당에 울린 카이저의 연설은, 독일민족당의 주장과는 반대로 사실 그렇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의사당의 모든 사람들은 연설이 끝났을 때,
“그대에게 승리의 왕관을(Heil dir im Siegerkranz)!”
을 함께 노래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상트페테르부르크 정부가 동원령을 선포한 지 일주일 만에 독일 제국도 동원령을 선포하였다.
다시 그 다음날, 영국과 프랑스 정부는 일주일 내로 동원령을 철회하고 앞서 전달한 통첩을 수용하지 않는다면, 해당 기한에서 24시간이 경과한 시점부터 독일 제국과 영·프 양국 간에 전쟁 상태(state of war)가 존재할 것이라는 최후통첩을 전달하였다.
세계는 – 유럽인 대다수가 보기에 세계와 유럽은 아직까지는 동의어였다 – 차곡차곡 대전쟁으로 향해가고 있었다.
파리의 거리에는 지중해를 건너온 열풍이 마르세유에서 건져온 듯한 뜨끈뜨끈한 『라 마르세예즈』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그러나 열띈 분위기로 조국의 승리와 펄럭이는 삼색기를 외치는 사람보다는, 수긍인지 체념인지 모를 결연한 표정의 사람들이 더 많은 듯했다.
튈르리 궁에서 거리를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대통령 레몽 푸앵카레(Raymond Poincaré)가, 저의 등뒤에서 묵직한 한담 주고받던 거국내각 사람들에게 말했다.
“결국 베를린의 기욤(빌헬름)에게 어떻게 응답할지의 문제는, 동원령에 달려 있소. 저쪽의 동원령에 우리도 동원령으로 맞받아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평화적 해결을 주장하면서 다른 국가들을 지원하는 정도로 그칠 것인가.”
“러시아에 대한 동맹국으로서의 의무를 다해야 하는 것 아니었소?”
얼마 전 출범한 거국내각에는, 파나마 스캔들의 정치적 상흔이 잊히면서 노령에도 불구하고 정계 복귀를 꾀하던 조르주 클레망소가 끼어들어 있었다.
“러시아가 독일의 침략을 당했을 때 군사적 부조를 제공해야 하는 것은 맞소. 하지만 아직까지 독일은, 공식적으로는 러시아 침공이 아닌 폴란드 해방과 키예프 정부 지원을 내세우고 있지.”
독일의 키예프 정부 지지에 붙어 있는 (거의 유일하게 공치사가 아닌) 조건은, 바로 폴란드의 해방이었다. 새로 건국될 폴란드는 물론 독일령 단치히(그단스크)나 포젠(포즈난) 같은 땅은 모두 배제하고, 대신 동쪽으로 깊숙히 러시아 영토를 파고들 것이다.
그리고 러시아의 (아마도 사후가 될) 동의 하에 독일군은 평화와 질서 유지를 위해 바르샤바로, 그리고 그 너머로 나아갈 것이며, 그 선두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지원을 받는 유제프 피우수트스키가 있을 것이다.
공식적으로는 독일의 평화로운 의도를 증명하기 위해, 그리고 실제로는 프랑스가 이 기회에 고토를 수복하겠다며 후방을 찔러올 가능성에 대비하여, 동원된 병력 대부분은 독일에 잔류할 것이라고 카이저의 정부는 밝혔다.
“동원령을 선포하지 않더라도 다른 국가들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더 나아가 삼각동맹에 대한 견제를 수행할 방편은 있소. 예컨대 ‘발칸 동맹’을 지원한다던가.”
영-러 협상을 믿고 반합스부르크 입장을 취해왔던 세르비아와 루마니아-불가리아가, 키예프 정부의 성립으로 러시아의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된 것을 깨달은 오스만 투르크는 지난 백여 년 굴욕의 만회를 위해 전쟁을 검토하고 있다고 했다.
어찌하면 보스니아를 다시 저들 것으로 삼킬 수 있을지와 같은 상대적으로 소소한 고민을 하던 세르비아와, 러시아가 혼란해지자 갑작스레 루멜리아 침공 주장도 쏙 들어간 루마니아-불가리아, 그리고 거의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점거자들과는 천 년 묵은 원한이 있는 그리스는 급히 발칸 동맹을 결성한 상태였다.
아드리아해 반대편에 끝내 일리리아 속주를 재건하려 하는 이탈리아, 그리고 러시아가 흔들리는 이 시기에 발칸을 확보하고 국내의 ‘연방국’ 타령을 끊어 없애려던 합스부르크 군부 및 헝가리 왕국은 이 발칸 동맹을 쳐내기 위해 칼자루를 만지고 있었다. (그 옛날 오스만 투르크가 빈을 두 차례나 포위하였던 것을 감안하면 참으로 후한 보답이었다.)
“이제 막 사흘 된 내각의 총리로서 한 가지 주장하자면, 이 사람은 이번 ‘위기’가 찾아와 참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소.”
클레망소가 말했다.
“독일은 이미 동원한 병력 상당수를 국내에 남겨두겠다고 공언했소. 설마 그들이 군복 입고 집에 머물면서 양배추나 먹으리라고 생각들 하지는 않으리라 믿소.
동원령은 우리 군부가 지난 십여 년간 갈고 닦아온 프랑스의 보도(寶刀)요. 우리, 솔직해집시다. 알자스와 로렌을 되찾아오기에 이번만한 호기가 있소?”
“흠흠, 말씀하신 바가 원칙적으로는 타당하지만... 반드시 공세를 취해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동원령을 선포하고 국경에 병력만 배치해두어도, 양면전선을 두려워하는 카이저가 어느 정도 대화에 나설 가능성이...”
“저 바깥에서 『라 마르세예즈』 부르는 사람들에게 그런 말씀을 해보시구려.”
클레망소가 외무장관 피숑의 말을 단호하게 끊는 사이, 푸앵카레가 다시 신중론을 제기했다.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독일보다도 영국이오. 우리가 먼저 동원령을 선포했다가, 영국이 ‘참 잘했소’라고 칭찬 한 번 하고서 뒤로 물러난다면, 그 정치적, 경제적 비용은 고스란히 우리가 뒤집어써야 한다 이 말이오.”
“전쟁에서 지지 않으면 될 일이잖소?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라면, 지출한 비용은 고스란히 독일에서 뜯어내면 될 일이오. 영국이 만약 개입하기를 원치 않는다면, 그대로 브리튼 섬 안에 틀어박혀 있으라지! 대신 전후 질서도 파리와 상트페테르부르크 사이에서만 결정하게 될 테니.
우리가 동원을 빠르게 완료하고 공세를 성공시킨다면, 그때는 오히려 저들 육군을 파견하게 해달라고 우리에게 사정하게 될 거요.”
1870년 전쟁의 패배로 값비싼 보상금을 물어내야 했던 그 통렬한 기억을 상기시키며, 그리고 그것을 반대로 강요할 수 있을 것이라는 복수심을 자극하며 클레망소가 말했다.
“총리 각하 말씀에 일리가 있습니다. 이미 독일이 동원령을 선포하였을 때, 그것이 허세가 아닐 가능성에 대비하여 우리 군 역시 동원령에 대비한 부대배치에 착수한 바 있습니다. 그것이 어제였으니, 곧 완료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먼저 공세를 취한다면, 독일 해군을 염두에 두고서라도 영국은 참전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바다에서 저들의 유일한 경쟁자를 꺾을 이 기회를 두고 볼 리 없지요.”
생시르 출신으로 군무에 밝은 전쟁성 장관 아돌프 메시미(Adolphe Messimy)가 클레망소의 편을 들었다.
“더구나 우리 군은 이미 메르시에 장관 시절부터, 동원과 신속한 파상공세를 골자로 하는 작전교리를 완비한 바 있습니다. ‘엘랑 비탈’. 우아하리만큼 정교한, 대육군(Grande Armée, 프랑스 육군의 별칭)에 어울리는 계획입니다.”
인격이라면 몰라도 능력으로는 특출났던 에콜 폴리테크니크와 생시르의 ‘메르시에파’ 인재들이 십수 년간 갈고 닦은 결과물이었다.
자신이 군에 있을 때 이 교리의 존재를 알았더라면 드레퓌스 사건과 그 이후의 군내 파벌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대신 정계에 투신하기로 했던 결정을 번복했으리라 여길 만큼 메시미는 엘랑 비탈에 심취해 있었고, 그가 처음 자리에 오른 작년부터 군 인사에도 이 점이 반영되고 있었다.
방어 일변도로도 충분히 전쟁을 수행할 수 있다고 주장하던 미셸(Victor-Constant Michel) 장군을 좌천시키고 대신 기수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부족하다는 평이 많던 조르주 조프리(Joseph Joffre)를 그 자리에 앉힌 것도 그 일환이었다.
“저도 그 엘랑 비탈에 대해서는 언뜻 들어보았습니다. 하지만 검증된 적은 없지 않습니까? 굳이 선제공격까지 가는 것은... 정치적으로는 물론이고, 국제정치를 감안해도 우리가 침략한 모양새를 만드는 격입니다.”
꼭 반대한다기보다는, 어느새 외교에서 전쟁으로 무대가 옮겨가는 것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피숑 장관이 토를 달았다.
“물론 지적하신 대로 유럽에서는 검증된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전 세계적으로 열강 군대가 실전을 겪어본 사례가 지난 수십 년의 평화 동안 얼마나 있습니까?
그리고 이 엘랑 비탈 교리와 그에 따른 작전이 성공적으로 수행된다면, 오히려 사상자는 최소한으로 유지할 수도 있습니다. 전선을 돌파하고 수십만 대군이 깊숙히 침투한다면, 그때는 적도 저항의지 자체가 말살되기 때문이지요. 조선과 중국 군사정부의 지난 전쟁이 입증하지 않습니까.”
물론 조선도, 청도 그때의 그 북벌은 전쟁이 아니었음을 한사코 주장하고 있었고, 조선왕이 전쟁 아님을 주장하며 하였다는 그 섬뜩한 말은 당시 외교관들의 회고록 속이라면 모를까 정부 고관들의 기억에는 들어있지 않았지만.
“너무 걱정들 마시오. 꼭 메시미 장관이 얘기한 대로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쨌든 짧은 전쟁이 될 것이니까. 카이저의 눈이 동쪽에 향해 있는 동안, 우리는 그의 등을 깊숙히 찌를 것이오. 올해 노엘에는 우리 모두 승리자가 될 수 있겠지.”
“잠깐. 통수권자는 나요. 우선은 신중합시다. 앞서 메시미 장관이 말한 것처럼, 동원령에 준하는 대비태세를 유지하되, 실제 동원령에 대해서는 독일의 반응에 따라 결정하여도 늦지 않소.”
푸앵카레 대통령이 통수권까지 들고 나오니, 결국 애매모호한 상태로 그날 모임은 파하게 되었다.
그러나 푸앵카레는 곧 그때 결정을 내리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되었다.
그날 저녁. 아직 보도의 열기가 열심히 공기중으로 방사되며, 대낮의 그 뜨거움을 상기시키고 있을 무렵. 튈르리 궁에 급히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이것이 사실인가?”
“각하, 저는 클레망소 총리와 달리 처음부터 이 내각에 있던 사람입니다. 전쟁에 있어서까지 정치를 끌고 올 생각도 없고요.”
손수 제2청(Deuxième Bureau, 프랑스군 정보부)에서 올라온 보고서를 들고 온 메시미 장관이었다.
“보시다시피, 동원령에 대비한 병력배치 사전조정에 따라 총 5개 군단이 전방으로 이동했습니다. 독일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국경에서 상당히 거리를 두었지요. 그리고 독일군이 오히려 아군보다도 국경에 훨씬 가깝게 배치되어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독일이 먼저 우리를 공격할 가능성이 있겠는가?”
“이미 우리는 동원령 선포에서 뒤쳐져 있습니다. 제2청의 판단에 따르면 아직 독일군의 병력 밀집이 공세를 의미할 정도는 아니라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첩보를 입수하였을 때 기준입니다.”
실제로는 이미 프랑스 내에 상당한 첩보망을 구축하고 있던 독일군이, 프랑스군의 전진배치를 미리 깨닫고 ‘몰트케 계획’에 따른 병력 배치를 부분적으로 시작한 것이었지만, 이미 독일의 의중을 의심스럽게 바라보는 쪽에서는 그 인과관계가 다르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젠장. 알겠네. 알겠어...”
잠깐 갈등하던 푸앵카레가 결국 마음을 굳혔다.
“조금 늦기는 했지만, 국무회의를 다시 소집하세. 총동원을 선언하도록 하겠네. 영국에도 우리 조치가 불가피한 것임을 알려야겠군.”
결국 최후통첩의 내용대로, 전쟁의 상태가 몇몇 중립국을 제외한 유럽 전역에 존재하게 되었다.
모든 나라가 전쟁은 금방 끝날 것이라며, 열기에 불타오르는 청년들에게는 부채질을 하고, 저의 안위나 부모님을 걱정하는 청년의 등은 떠밀었다.
그해 크리스마스/노엘/바이나흐텐에는, 무인지대를 사이에 둔 참호 양쪽에서 돌아오지 않을 순수함과, 이미 떠나가버린, 그러나 반드시 불행하다고 할 수만은 없을 전우들을 위한 성가가 울려퍼졌다.
이듬해 성탄절에는, 서부전선 전역에 이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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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대전의 개전 원인에 있어서는 지금까지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 중 한 가지 주장을 살피자면,‘공격의 교단(Cult of the Offensive)’ 이론이 있습니다. 즉 외교관들의 관점과는 별개로, 1차대전 개전 당시 진영을 막론하고 빠른 동원령으로 먼저 전략적·전술적 이익을 얻을 수 있으며, 반대로 선수를 놓치게 되면 이를 막기 어렵다는 인식이 군부에 만연해 있었다는 것입니다 (Van Evera(1984), “The Cult of the Offensive and the Origins of the First World War.” International Security 9(1)).
몇 번 언급된 기관총처럼, 원 역사에서는 20세기 초까지 보어전쟁, 미서전쟁, 러일전쟁 등 산발적으로나마 전쟁이 몇 번 일어났기에, 무기의 발달을 깨닫고 이에 적응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작중에서는 그럴 기회마저 없었고, 실제 역사에서의 서부전선에서도 막상 존재했던 전훈은 대부분 참호전이 시작된 뒤에야 적용되게 되었지요.
그 결과, 공세지향적인 관념, 즉 공세의 때를 놓치면 돌이킬 수 없다는 관념이 그대로 살아남아 개전의 원인이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슐리펜 계획이 반려당하게 된 독일의 경우에는 그나마 나아졌지만, 협상국 쪽은 그대로 남았습니다.
1911년 원 역사에서 아돌프 메시미에게 경질된 빅토르-콩스탕 미셸은 프랑스군의 작전을 방어 위주로 전환하려던 인물이었지만, 작중에서와 동일하게 군 내부에 만연해 있던 공세 우월주의를 이기지 못하고 끝내 경질됩니다. 정확하게는 소수정예 병력의 공세가 아닌, 대규모 예비군을 활용한 방어를 꾀했는데, 2차대전까지도 프랑스 군부에 만연했던 예비군에 대한 불신(예비군의 전투력에 대한 불신과 더불어, 예비군에 의존하는 군 구조가 확립되면 정부에 군부가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는 관념 때문이었습니다.)으로 말미암아 여러 군부 인사들의 반발을 사게 된 것이었지요.
아돌프 메시미는 작중에 언급된 것처럼 군사문제에 관심이 많던 군 출신 정치인으로, 드레퓌스 사건의 재심을 둘러싼 논쟁이 불거지자 군복을 벗었습니다. 단순히 군대의 일에 이래라저래라하는 것을 넘어, 장관직을 내려놓은 뒤 실제로 발칸 전쟁의 전선에 가서 전훈을 도출해내려 노력하는 등 (그러나 그런 시도, 예컨대 프랑스군의 알록달록한 군복을 저시인성 색깔로 바꾸는 것 등은 대부분 반려당했습니다.) 정말로 군을 위해 노력한 면이 있었습니다. 이후 프랑스가 패배 직전까지 몰리자, 장관직을 내려놓고 여단장으로 복귀해 솜 공세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푸앵카레는 그런 메시미의 행적이, 어떤 명예감이나 책임감 때문보다는 그의 인격이 장관직에 부적합했기 때문이라고 회고한 바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