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분노를 노래하소서 (2)
세르게이 비테는 러시아가 가졌던 재상들 중 최고의 천재는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총명함과 집념, 그리고 세심함은 분명 맹점 또한 가지고 있었다. 당장 그가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안목을 지녔더라면 저 저주받아 마땅한 볼셰비키들을 끌어들이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두마의 강력한 ‘간언(soviet)’과 라스푸틴의 은밀한 조언 덕에 비테의 후임으로 표트르 스톨리핀이 등용되었을 때, 자칭 차르의 충신들을 대변하여 저 간악한 일린과 그의 무리를 멀리하게끔 말해줄 사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비테가 만들어둔 모든 체계가 스톨리핀의 개혁안에 통합되어, 이름도 그럴듯한 ‘신경제정책(NEP, Novaya Ekonomicheskaya Politika)’이 발표되었을 때, 그리고 그것을 가장 외진 시골까지 전파할 수 있는 수단이 볼셰비키 손에 이미 들어가 있음을 깨달았을 때, 그에 반대하여 어떤 그럴듯한 대안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이 내건 개혁이 무엇인지 그 전모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그 함의를 깨우치는 이들 또한 늘어나고 있었다.
교회는 백성을 따름으로써 이끌어야 한다고 목청 높이는 게오르기 가폰의 주장을 따르는 성직자들이 늘어나고, 마침내 미국에서 정교회 교단을 정비한 경험 덕에 러시아 바깥 세상의 변화를 익히 알고 있던 야로슬라블 대주교 티혼(Tikhon)과 같은 이들도 가폰에게 동참하자, 아무리 그래도 저것은 아니라고 여기는 이들도 그만큼 늘어났다.
지금까지는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던 농지개혁이 두마가 빌린 차르의 힘으로 본격적으로 전국에서 시행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포고가 뒤따르자, 농촌의 지주들 중에도 ‘국가’가 제공하겠다는 어음을 불신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개혁이라면 당연히 저들에게 더 많은 목소리가 돌아오리라 여겼던 도시의 중산층 상당수는, 그들이 멸시하던 어리석은 노동자들조차 - 비록 더 적기는 하지만 - 엄연히 투표권을 행사하게 된다는 소식에, 또 그들이 공장과 작업장에서 ‘노동자 소비에트’를 만들고 있다는 소식에 놀라고 또 반감을 가졌다.
그러나 이 모든 변화에 가장 큰 반감을 마땅히 가져야 할 차르 니콜라이는 귀를 굳게 닫고 있었다. 그의 귀가 ‘얼음물 세례’ 이후로 어딘가 분위기가 바뀐 라스푸틴에게만 열린다는 것은 이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그 누구도 모르지 않았다.
“어찌 되었는지요?”
오흐라나 국장 플레흐베가, 막 궁전을 다녀온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대공에게 물었다.
나갔다가 돌아올 때까지 걸린 시간을 계산해 보면, 사실 굳이 물을 것까지도 없는 질문이기는 했다.
“오늘도 접견을 거부하셨네. 아시아 삼국의 귀빈들을 맞이하기 위함이라고 시종장은 말했지만...”
“아마 ‘우려스러운 생각’을 재고하기 전까지 우애를 위해서 계속 피하시려는 것이겠지.”
그의 동생 세르게이 미하일로비치 대공이 형의 말을 받아서 마쳤다.
“물론 그 중 얼마만큼이 본인의 뜻일까 싶기는 한데. 흠흠, 말실수였네.”
그러나 이 자리에 모인 불만 가득한 사람들은 말실수가 아님을 뻔히 알고 있었다.
“아아, 안타깝기 이를 데 없습니다! 대공 전하의 충심이 이리도 무심하게...”
“솔직히 말하게. 자네는 그냥 장관 자리 빼앗긴 것이 억울한 것뿐이잖은가.”
세르게이 대공이 콕 지적하니, 두마의 ‘강력한 권고’로 인하여 저 대신 쿠로파트킨(Aleksei N. Kuropatkin)에게 전쟁성 장관직이 돌아간 것에 앙심 품고서 이 모임에 합류한 블라디미르 수호믈리노프(Vladimir A. Sukhomlinov) 장군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세료자(세르게이), 그렇게 따지면 너도 비슷한 처지잖아. 우리 모두가 사실 그리 크지 않은 일로 모이게 되었지만, 우리 황실과 러시아를 위해 함께 힘을 합치게 되었으니, 그렇게 누구를 콕 집거나 하지는 않는 게 좋겠어.”
“예, 형님.”
두 대공과 여러 장군들, 그리고 아직 톨스토이에게 영합하지 않은 보수파 몇몇이 주도하는 이 모임은, 본디 그리 멀지 않지만 까마득한 옛날 푸리쉬케비치 등등이 라스푸틴의 암살을 모의하던 것에서 시작했다.
처음 ‘붉은 일요일’ 때부터 차르가 너무 유화적으로 나섰다고 여기던 이들도 있었지만, 대개는 그 두마가 개혁을 위해 이곳저곳 건드린 데 앙심 품고 모인 쪽이었다.
딱히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두마의 건방진 ‘보수파’ 입헌당 의원 로지안코가 그의 정부(情婦) 마틸다 크세신스카야의 비리를 폭로하고도 멀쩡히 거들먹대는 것을 보고서 앙심 품고 이 모임에 합류한 세르게이 미하일로비치 대공이 그 좋은 예였다.
군부 사람들도, 볼셰비키 – 정확히는 스톨리핀 – 입맛에 맞는 군제 개혁안을 내놓거나 그에 찬동하는 이들만이 출세하기 시작하면서 저들의 입지가 좁아진다 여기던 차, 이런 모임 있는 것을 어디선가 듣고 모여들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렇게 모였건만 어느새 무슨 엄청난 대의를 위하는 것과 같은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으니, 자신이 그처럼 사소한 일로 원한을 품었다고 인정하기 싫은 그런 치기어린 마음에서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여러 사람들과 이야기 나눈다 보니 저들이 당한 소소한 모욕이 실은 훨씬 더 큰 변화의 산물임을 깨달았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었다.
당장 두 대공만 하더라도, 곰곰이 생각할수록 이 나라가 사실상 영국과 같은 체제로 옮겨가고 있다는 것이 보였기에, 그리고 그 발걸음이 근래 더욱 가속되고 있음을 깨달았기에, 가장 확실한 수로 차르의 마음을 움직이려 몇 달 동안 헛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처럼 ‘임페라토르’의 권위를 무너뜨리려 도끼질 하고 있는 사람이, 그렇게 함으로써 정말로 그의 어떤 전임자보다도 더 굳건한 인민의 존숭과 경애를 받을 수 있으리라 믿는 차르 니콜라이 본인이었음을 깨달았을 때 얼마나 경악했던가.
“휴우, 라스푸틴 그자만, 하다못해 ‘두 대머리’ 중 하나만 어떻게 폐하로부터 떨어뜨려놓을 수 있다면 희망이 있을 텐데.”
‘두 대머리’는 서로 경계하면서도 항상 붙어다니는 일린과 스톨리핀을 지칭하는 관용적인 표현으로 굳어진 지 오래였다. 언제부턴가 로마노프 남성에게 유전되는 그 불운 (또는 모종의 빈곤)을 이어받은 두 대공이 할 말은 아니었지만.
“이미 시도했고, 실패한 일입니다. ‘해야 하느냐’가 아닌 ‘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된 지가 오래지요.”
플레흐베가 덤덤히 말했다. 비테의 죽음을 빌미로 두마에서는 오흐라나에 목줄을 채우려 힘쓰고 있었다. 그것이 실패하자, 볼셰비키는 차르의 묵인 하에 저들만의 오흐라나를 만들기로 마음을 먹었다.
물론 두마와 여론을 고려하여, 어디까지나 공식적으로는 당내의 불온한 자들을 미리 걸러내기 위한 것이었지만, 러시아 전역에 걸친 조직을 자랑하게 된 볼셰비키인 만큼 이 ‘특별위원회(체카, Chrezvychaynaya Komissiya)’의 눈과 귀는 꽤 밝았다.
더구나 그 수장, 곰보 그루지야인 주가슈빌리 – 요새는 어디서 누가 붙여준 이름인지, ‘스탈린’이라는 성을 쓰고 있었다 -와 그의 수족 폴란드인 펠릭스 제르진스키 모두, 미리 알았더라면 오흐라나가 천금을 주고 포섭했을 만큼 ‘그쪽’에 자질 있는 사람들이라, 대응하기도 녹록지 않았다.
“결국 답은... 간사한 입에 재갈을 물리는 것뿐인가.”
“지금으로써는, 과감한 결단 외에 나아갈 길은 없어 보입니다.”
“믿고 맡겨주십시오! 두 분 대공께서 마음을 정하신다면, 우리 거룩한 황실과 나라를 위해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수호믈리노프 장군이 벌컥 일어나며, 가슴을 두드렸다. 이어지는 세르게이 대공의 지적에 곧장 다시 앉게 되었지만.
“그러나 장군의 아랫사람들도 모두 그런 준비가 되어있다고 확언할 수는 없을 텐데... 그렇지 않은가?”
“그것은... 그래도 아직 폰탄카의 마음은, 적어도 그중 과반의 마음은 올바른 곳에 향해 있습니다. 최소한 코사크 연대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 가지는 못할 터였다. 근위사단이 수도 근방에 주둔하고 있다는 것은, 불온한 세력들을 억지하는 면도 있었지만, 반대로 그런 세력이 수도에서 준동할 때 그 영향력에 쉽게 흔들릴 수밖에 없음을 뜻하기도 했다. 그것을 제지할 장교들조차, 체계적인 교육과 훈련, 진급제도 등 볼셰비키가 내건 목표에 혹한 이들이 더 많았다.
군제개혁으로 피해를 보는 쪽인 코사크들이라면 모를까, 나머지 근위사단의 군심(軍心)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는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보아도 명백하였다. 그나마 이런 ‘해로운’ 영향력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전방의 부대들은 조금 사정이 나았지만.
그나마, 개혁의 방향성에는 공감하던 상트페테르부르크 군관구사령관 ‘꺽다리’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이 이러한 흐름의 저변에 있는 볼셰비키의 영향력을 발견하고 심정적으로 이들 음모자들에게 기울게 된 것이 다행이었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세료자. 우리가 원하는 바가 저들 볼셰비키처럼 그렇게 음흉하고 간악한 것은 아니잖아? 폐하의 마음을 돌려놓을 만큼의 시간 동안만 이곳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질서를 유지하면 될 일인데.”
세르게이 대공도 이번에는 딱히 빈정대지 않았다.
“이번만한 기회가 없는 것도 사실이야. 이를 놓친다면 그다음에는 언제 기회가 올지, 아니, 애초에 기회가 오기는 할지 모르는 일이니.”
영국에서 구주 정세 심상치 않다는 소식 듣고서, 귀국도 신속하게 하고자 마음 먹은 조선 세자로 인해, 이곳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일정도 크게 단축되었다.
젊었을 적 경험으로 조선과 일본에 관심 많고, 거기에 중국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도 계속 들었던 차르 니콜라이에게는 아쉬운 일이었는데, 그로 인해 역으로 제안하기를, 본인이 친히 니콜라예프스키 역까지 나아가 환송해주기로 하였다.
이 전례없는 일정은 차르의 거둥을 보좌할 사람들에게는 머리아픈 것이었는데, 충심 또는 반심 품은 이들에게는 그만큼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결국 이날 모임은 거룩한 가호가 있기를 빌며, 다들 결연한 표정으로 해산하였고, 그 속에 섞여 있던 카이저의 수족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근위대가 황제의 신변을 좌지우지하게 되는 셈이었으니, ‘세 번째 로마’ 자처하는 나라다운 일이었다.
동양 삼국 귀빈들을 배웅하러 여름궁전 떠난 차르가, 열차가 출발하자마자 그를 경호하던 근위대에게 이끌려 겨울궁전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 소식 듣고서, 일린은 급히 당사 안에 있던 사람들을 불러모아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 자리에 빠져 있던 여러 중진 중 하나였던 브론시테인이 문을 발칵 열고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일린 동지! 일린 동지! 큰일입니다!”
“나도 들었네. 마침 잘 왔군그래. 지금 중요한 것은, 이것이 군부 전체의 반역인지, 아니면 근위대 내 일부 반동의 독단인지를 확인하는 일이야.”
“현재로서는 불가능할 듯합니다. 창밖을 보시지요.”
자신이 들고 온 ‘큰일’이 일린이 짐작하던 것과 다름을 뒤늦게 깨달은 브론시테인이, 설명하는 대신 말했다.
일동이 우르르 일어나 창밖을 보니, 굳이 보지 않아도 귀만 기울이면 파악할 수 있을 상황이 펼쳐져 있었다.
“너희는 포위되었다! 순순히 나와 조사에 응하라!”
“코사크들이로군.”
“동지들! 전신도, 전화도 모두 끊겼습니다! 놈들이 통신을 장악하고 있거나, 적어도 이곳 당사에서 나가는 회선을 끊은 것이 분명합니다.”
뒤늦게 들어온 또 다른 사람이 외쳤다.
“우선 저쪽이 하는 말을 들어나 봅시다. 누구 백기 가진 사람 없소? 시간 끄는 동안 건물 안쪽 방비도 좀 하고.”
태연자약하게, 또는 최대한 태연자약한 시늉을 하며 일린이 말했다.
책상과 의자가 모두 나가 휑한 회의실에, 그들 대표하여 나갔다 온 브론시테인과 코바, 아니, 스탈린이 돌아왔다.
“여름궁전으로 환궁하시는 길에 차르 폐하를 습격하려던 음모가 발각되어, 급히 계엄을 선포하고 의심되는 자들을 취조하려 한다는군요.”
그러나 전적으로 따진다면 보수파와 그들의 끄나풀들을 잡아들여야 할 것이다. 생각이 그에 미치니 배후가 어느 쪽인지는 분명하게 드러났다.
“군부 전체의 뜻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급조한 계획이거나, 군의 일부만을 동원할 수 있던 사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여전히 변함없는 어조로 – 러시아어가 완전히 유창하지는 않았기 때문이었지만, 듣는 이들은 달리 해석하기 마련이었다 - 스탈린이 말했다.
“어째서 그런가?”
“정말로 군 전체를 장악했다면, 바로 정권을 획득하면 되는 일입니다. 우리를 포위할 것이 아니라, 당장 당사에 불이라도 질렀겠지요.”
그 당사 안에 당장 저들이 있지 않은가. 거침없는 스탈린의 말에 다들 놀란 사이, 제르진스키 한 사람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두마나 입헌당 당사, 그 외 시내 요지에서는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들 말처럼 전면적인 계엄을 시행하기에는 병력이 부족하겠지만... 이 혼란이야말로 그들에게 필요한 시간을 대신 벌어주는 셈이겠지요.”
“젠장, 바깥에 어떻게 소식을 전할 수만 있다면...”
여름궁전에 남아 있던 라스푸틴이나, 시내 어딘가에서 빈민들을 구호하고 있을 가폰 신부에게라도 소식을 전해야 했다.
그때, 알렉산드라 콜론타이가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흠흠, 저들이 한 가지 실수를 한 것이 있는 듯하네요. 정말 우리 당을 무력화하려 했다면, 다른 곳은 몰라도 이곳 당사는 반드시 점령해야 했을 텐데.”
“그 무슨... 아! 고맙소, 동지.”
“별 말씀을요. 얼른 지하실로 가시지요.”
얼마 전 나랏돈으로 조선에서 들여온 라디오는 시내 곳곳에 놓여 있었고, 그중에는 사민노동당 클럽이나, 당에서 운영하는 학교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와 함께 볼셰비키는 『불꽃』이나 『진실(프라우다, Pravda)』 지의 헤드라인을 읽어주는 방송을 시작했는데, 아무래도 잡음이 많다 보니 개중 목소리 가장 또렷한 콜론타이가 직접 장비를 다루고 있었다.
그런 사정을 바깥에서 당사 포위하고 있는 코사크 연대 사람들이 알았더라면 진작 어떻게든 조치를 취했겠지만, 그 문물과 그것이 지닌 힘을 이해할 역량이나 의사가 있는 장교는 대개 그쪽의 편이 아니었다.
“신이시여, 차르를 보우하소서!”
성가를 합창하는 소리가 겨울궁전을 메웠다.
라디오 방송을 들을 수 있던 사람은 소수였지만, 그 정도로도 군중을 불러모으기에는 충분하였다.
가폰 신부를 필두로, 옛 ‘붉은 일요일’만큼은 아닐지언정 기세는 똑같이 맹렬한 시위대가 겨울궁전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이들을 궁 앞의 광장에서 가로막는 마지막 저지선은 코사크 연대였다.
“산드로,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지?”
그들을 ‘습격’한 군중을 창밖으로 내려다보며 차르가 말했다.
“안타깝지만, 무력으로라도 해산할 수밖에요.”
“병사들이여! 폐하의 백성을 쏘지 말라!”
바깥에서 가폰의 선창을 시작으로 울리는 함성이 대꾸하듯 울렸다.
그런데, 그때 엉뚱한 목소리도 바깥에서 들려왔다.
“전우들! 총을 내려놓으시오!”
“코사크 동무들! 정부군에 합류하시오! 당신들은 지금 반역을 저지르고 있소!”
늘 나오던 붉은 깃발 외에, 연대기 휘날리며 군중 한가운데 있는 제복 무리가 눈에 띄었다.
“맙소사...”
제1근위보병사단의 세묘노프스키 연대, 제2근위보병사단의 파블로프스키 연대, 심지어 연대기 없이 단독으로 나온 듯한 몇몇 기병들까지.
혼란 속에서 판단을 유보하였을 친(親) 볼셰비키 근위부대들에게도 볼셰비키의 ‘진실’ 방송이 전해졌던 것이다. 두 가지 상반되는 보고 가운데서 굳이 하나를 고른다면, 자신이 믿고 싶은 쪽을 고르는 것이 사람의 상정.
“접근하면 발포하겠다!”
“그쪽이 발포한다면, 우리 또한 국민과 정부를 지키기 위해 발포할 수밖에 없다!”
“무기고까지 연 듯하군그래.”
“저것이야말로 반역입니다, 폐하. 결단을 부탁드립니다.”
시끄러운 볼셰비키와 두마만 막아두고, 상트페테르부르크 바깥으로 소식이 퍼지지만 않게 하면 금방 차르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 있으리라 여겼던 허술한 음모는, 라디오라는 물건 하나로 말미암아 실패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볼셰비키들에게만 유리하게 작용하였던 차르 니콜라이의 우유부단하면서도 고집 센 면모가 여기서 발목을 잡게 되었다.
“결단을 내렸네, 산드로. 이곳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뜻은 다를지언정 내게 충성하는 백성과 군인들의 피가 흘러서는 아니 될 것이야.
어느 한쪽의 편만을 들 수는 없지. 하지만 내가 여기 머무는 이상, 계속 이렇게 대치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겠나?”
가족과 함께, 이들 보수파를 따라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나는 조건으로 보수파 근위대가 시내에서 물러나는 것을 제안하는 차르 니콜라이였다.
이미 반대편 근위대가 움직이기 시작한 이상, 수도를 장악한다는 계획은 실패로 돌아간 것과 다름없던 보수파 – 음모자들뿐 아니라, 이들과 한배를 타게 된 셈이었던 꺽다리 니콜라이 대공까지 – 는 이 제안에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볼셰비키로서는 따를 이유가 전혀 없었는데, 안타깝게도 겨울궁전에는 라디오 방송장비도 없었고, 설령 있었더라도 차르는 굳이 남들에게 알릴 필요를 느끼지 못하였을 것이었다.
사실상 일방향으로만 의사가 전달되는 상황에서, 가폰이 이끌던 군중은 차르가 직접 나타나 자신의 ‘성단(聖斷)’을 알리니 저들도 모르게 길을 터주고야 말았다.
“모스크바로 향할 것인가?”
딴에는 어느 한쪽 편도 들지 않았으니 나라의 주인으로서 소임 다했다 여기는 차르 니콜라이가 두 대공에게 물었다.
“아닙니다, 폐하. 키예프로 모시겠습니다.”
“키예프?”
“폐하의 뜻에 따라, 저들과 무력으로 다투기보다는 대화와 협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군의 지지가, 또 외국의 지지가 필요합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잃는 것이 기정사실이 된 이상, 선택지는 국경의 군을 움직이는 것뿐이었다.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진격하지는 않는다 해도, 여차하면 진격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강력한 협상의 카드가 될 것이었다.
적어도, 보수파 수뇌부의 생각은 그러했다.
“외국이라면... 설마 독일을 말하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폐하. 그와 더불어, 폴란드에 관해 약간의 양보를 한다면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지지도 끌어올 수 있으리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물론, 저들이 외세를 끌어들이지 않는다면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누가 처음 꺼낸 말이었을까? 두 대공도, 수호믈리노프도, 플레흐베도 아니었다.
그러나 뒤숭숭한 분위기 가운데에서 ‘이러다가 영국이 개입하면 어떻게 하나?’라는 두려움이 일어나면서, 다들 자연스럽게 누가 꺼낸 말인지는 몰라도 독일을 끌어들일 대비는 해야 한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당연히, 영국도, 독일도 러시아 사태에 대한 자국 입장을 표명하는 데 있어 상트페테르부르크나 키예프 어느 한쪽의 의사는 신경 쓰지 않았다.
국경의 군 전체가 이반하는 최악의 사태에 대비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차르 없는 정부는 동원령을 선포했고, 그와 함께 전 유럽이 전화(戰禍) 속으로 끌려들어가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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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입장에서야, ‘울리야노프’나 ‘주가슈빌리’나 난해한 이름인 것은 매한가지지만, 러시아인들에게는 유독 후자가 낯설게 느껴졌던 듯합니다. 원 역사의 레닌이 ‘스탈린’이라는 별명을 지어주기 전에도 이미 스탈린의 본명은 여러 사람을 곤란케 하였지요. 일례로 ‘코바’의 본명이 도저히 기억나지 않아, 다른 동지들에게 물어보는 내용의 레닌의 손편지도 남아 있습니다.
노어의 ‘v’ 발음을 ‘우’로 옮기는 관행(지금도 북한에서는 이를 고수하고 있습니다)으로 인해 우리에게는 ‘프라우다’로 더 잘 알려진 『진실(프라브다)』은, 원 역사에서는 1912년 창간되었습니다. ‘종이를 쓰지 않는 신문’에 큰 관심을 가졌던 레닌은 혁명 후 국내 사정이 안정되자 곧 전국 단위의 라디오 방송을 추진하였고, 그의 사후인 1924년 전(全)연방라디오(Vsesoyuznoye radio)가 개국하게 되었습니다.
작중에서는 귀남과 테슬라로 인해 라디오가 훨씬 빠르게 개량되어 보급되었고, 그 나비효과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알렉산드르 2세의 선대였던 니콜라이 1세부터 로마노프 황조는 많은 자손을 남겼고, 그 결과 제정이 끝날 무렵에는 비슷한 이름과 생김새(두발 포함)를 가진 수많은 대공들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이중 상당수는 군인으로 재직하였는데, 러시아 제국의 후진적인 군 구조와 맞물려 그리 두각을 드러내지는 못했습니다. 1차대전 초기 러시아군을 지휘했지만 실책만을 남발한 ‘꺽다리’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키가 2미터에 가까웠기에, 차르 니콜라이와 구분하기 위해 그렇게 불렸습니다.)이나, 포병총감으로 재직 중이던 1916년 본인의 무능과 애인인 발레리나 크세신스카야의 부정부패로 인해 미하일 로지안코에게 탄핵당한 세르게이 미하일로비치 대공도 그런 경우라 하겠습니다.
러시아군의 후진적인 구조는 군 내에서도 지속적으로 문제로 인식되었고, 개혁의 움직임도 자발적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이러한 시도는 정치적 문제(차르와의 연줄 부재)나 예산 부족으로 인해 좌절되곤 했습니다. 오늘날에는 러일전쟁의 패장으로 알려진 알렉세이 쿠로파트킨도 그런 경우에 속했습니다.
반면 그와 동갑내기인 블라디미르 수호믈리노프는 라스푸틴과의 친분을 이용해 승승장구하였습니다. 물론 그도 나름대로 개혁을 위해 공군을 창설하고 군의 양적 증대를 이루는 등의 치적은 남겼지만, 비효율적인 군의 구조 자체를 일신하려는 의지는 없었지요. 라스푸틴의 몰락과 함께 수호믈리노프도 곧 실각하게 되는데, 그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세르게이 먀소예도프, 블라디미르 둠바드제 등 그의 주변인들 상당수가 독일 간첩이었음이 밝혀졌습니다. 적백내전의 혼란을 틈타 국외로 도주하기는 했지만, 결국 모든 재산을 잃고 베를린에서 노숙자로 살다가 사망하게 됩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도시 이름과 마찬가지로 독일식 이름(Leib-gvardiya, Life guard)을 가진 러시아 제국의 근위대는 원 역사에서도 러시아 혁명기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1905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의 시위를 무력진압하는 데 투입되었고, 반대로 1917년에는 개중 상당수의 부대가 2월혁명과 10월혁명 당시 볼셰비키 편으로 돌아서면서 혁명이 성공하는 데 일조했습니다. (작중 언급된 세묘노프스키, 파블로프스키 연대는 원 역사에서도 가장 먼저 볼셰비키 편을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