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빗자루 별 (3)
젊은 보스니아회 모임에서 몇몇 불평분자들이 난동을 일으켰고, 저명한 과학자 겸 기업가 니콜라 테슬라 선생이 거기에 휘말려 중태에 빠졌다는 소문이 사라예보 전역에 금방 퍼졌다.
곧 나온 정정 보도에 따르면, 본인이 개발한 호신장치와 동양의 신비한 무술을 익힌 조선 경호원 덕에 습격자 대부분을 무찔렀으나, 혼란 중 그 호신용 지팡이를 집어든 습격자 하나가 빈틈을 노려 기어이 세르비아인의 자랑 테슬라 선생을 기절시키기에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비열한 습격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호신용 전기 지팡이에 내재된 완벽한 안전 기능 덕분에 테슬라 씨는 곧 의식을 되찾았으며, 공식 일정을 수행하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을 전망이다. 다 받아적었는가?”
“예, 선생님.”
며칠 사이 기력이 쇠한 코치치가 맥 없이 펜을 놀렸다. 그의 문재(文才)가 이렇게 낭비될 줄 알았겠는가.
“테슬라 선생 본인의 술회에 따르면 습격자들의 인상착의와 이름은 다음과 같다.
벨리코 추브릴로비치(Veljko Čubrilović). 콧수염을 길렀으며 오른쪽 눈썹이 왼쪽보다 김. 보산스카 그라디슈카 출신. 보그단 라덴코비치(Bogdan Radenković). 동그랗고 작은 얼굴에 약한 탈모. 왼쪽 뺨에 점 세 개. 보이슬라프 탄코시치(Vojislav Tankosić). 풍성한 머리에 카이저 수염. 왼쪽 턱에 사마귀...”
이쯤 되면 없던 어이도 되찾고서 그 독함에 찬탄하여야 할 것이다.
“정말 그렇습니까?”
테슬라에 의해 졸지에 동방의 무림 고수가 된 – 테슬라 딴에는 그를 공범으로 만들 심산이었다 - 김창암이 물었다.
“내 기억력을 무시하는 겐가? 엊그제 연설 전에 다들 달라붙어 어디 사는 누구인지 경찰 조사라도 받는 것처럼 털어놓던데, 이 정도야 별 것 아닐세.”
불쾌하다는 듯한 반문이 돌아왔다.
“하지만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많습니다. 누가 믿어주겠습니까?”
“뭐, 거기 청중으로 모여 있던 자들을 모두 뭉쳐보아야 나만큼 믿음직하지도 않을 텐데. 여기 코치치 씨가 말했던 것처럼, 내 위명이 워낙 여기서 높으니 말일세.”
논리적인 사람이 작정하고 비논리를 무기로 쓰기 시작하니, 그날 모임에 끼어 있던 ‘검은 손’ 사람들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공세였다. 물론 어찌어찌 예상하였더라도 대응하기는 난망하였겠지만.
예컨대 그가 지목한 이들 중 누군가가 ‘당신은 거짓을 말하고 있소! 그날 내가 보기로 분명 연단에서...’라며 항의한다면,
‘그대야말로 당일 그곳에 있기는 했는가? 만일 그랬다면 답해보라. 그날 탄코시치는 무슨 옷을 입고 있었는가? 나는 습격당했을 때 증언을 남기기 위해 필사적으로 주변 모든 사람들의 인상착의를 기억해두었다.’
하며 반박이 돌아올 것이었다.
지금껏 보스니아는커녕 발칸에 발 들여놓지 않았던 명망 높은 테슬라와, 베오그라드에서 ‘세르비아인의 단결’을 위해 찾아온 옆 나라 군인일 지도 모르는 수상한 젊은이들의 주장이 대립한다면, 누가 보아도 후자가 일을 벌여놓고 발뺌하는 격이었다.
“생각해보면 자네 나라 조선 덕이 크네. 물론 마르코니 그 도둑놈을 먼저 높이 세워준 것은 지금도 유감이지만, 어쨌든 조선에서 지내면서 그간 얻지 못하였던 것의 곱절은 이름을 떨쳤으니, 이렇게 계획대로 일을 처리할 수도 있게 되었잖은가.”
필사적으로 테슬라의 라디오를 모방하고 거기에 자기 아이디어와 경험을 넣어, 유럽과 미국 시장에서 빠르게 테슬라의 경쟁자로 (재)부상하고 있는 굴리엘모 마르코니가 들었더라면 한 소리 하였을지도 모르는 뒤끝이었다.
“정치에는 관심이 없다고 하셨던 듯한데요.”
“정치가 내게 관심을 가지니 문제지. 어떻게 얻은 사업 기회인데 고작 정치가 발목을 잡게 둘 수는 없잖은가. 이러다 전쟁이라도 일어나면 곤란하다 이 말이야.”
가뜩이나 인구로도, 구매력으로도 그렇게까지 대단하다 할 수 없는 동유럽과 발칸인데, 중국으로 따지면 고작 성 하나 안에서 쓰는 말도 거의 같은 사람들끼리 구분짓고 싸우는 꼴 아닌가. 머나먼 나라 일이라면 몰라도, 자신의 고향 사람들이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느라 자신의 훌륭한 발명품을 접하지 못한다면 (사업가로서) 안타까운 일이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을 만났을 때는 제발 조금 더 정련된 언사를 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사이 기사 초고를 방문 앞에서 기다리던 직원에게 넘겨주고 온 코치치가 말했다.
“나도 맵시 부릴 때는 부릴 줄 아는 사람일세. 그래야 할 필요를 자주 못 느껴서 그렇지.”
결국 1909년의 성 비투스 축일은 무사히 지나갔다.
페타르 코치치를 통해 성 비투스 축일이 그런 의미가 있음을 뒤늦게 깨달은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그런 의도가 없었음을 즉석에서 해명했고, 은연중 반발하던 세르비아인 청년들도 어느 정도는 납득하였다.
물론 여전히 ‘합스부르크의 압제자 지망생’을 미워하고 경계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지만, 그들을 이끌 사람들이 니콜라 테슬라의 흠잡을 데 없는 증언에 의거하여 모두 경찰의 수사를 받는 신세였으니, 무언가 일을 일으켜 보려 해도 구심점이 없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상해를 입기라도 했다면, 그러게 왜 신중하지 못하게 그리 처신했느냐며 비아냥거림으로써 국제적 문제를 일으키고도 남았을 베오그라드의 세르비아 정부조차, 그들 스스로 위대한 세르비아 사람으로 떠받들었던 테슬라의 고변에는 (최대한 소극적으로) 자국 젊은이들이 남의 나라에 넘어가 신중하지 못한 행동을 한 것은 잘못이라고 밝히게 되었으니, 꼬였던 일대의 사정이 조금은 풀렸다고 조심스레 말해볼 만했다.
“참으로 잘 하였네.”
일정 마치고 홀로 돌아온 – 테슬라는 몇 달쯤 더 머물다 돌아온다 하였다 – 김창암이 미처 전보와 서신으로 보고하지 못한 바를 다 술회하자, 김가진이 흐뭇하니 웃으며 말했다.
“감히 말씀드리자면, 기실 그간 일어난 일에서 제가 직접 거든 바는 거의 없었습니다.”
하다못해 그 ‘동양 무술의 달인’이라는 낯뜨거운 표현도 테슬라 본인이 생각해낸 것이었다.
물론 사후에 어떻게 하면 그 ‘흑수계(黑手契)’가 도로 뭉치지 못하게 할 수 있을지를 두고 코치치에게 공안서의 술수 몇 가지를 넌지시 알려주기는 하였으니, ‘태씨 난행을 막고 일대 화평을 해치지 않도록 힘쓸 것’이라는, 처음 받든 지시에 따른 셈이었다. 그러나 이 역시 딱히 칭찬이나 포상을 바랄 만한 공은 아니었다.
“하지만 돌아가는 사정을 면밀히 살피고 오지 않았는가. 애초에 우리 공안서가 하는 일이 그런 것이지. 심지어 곧 사위(嗣位)한다는 풍문 파다한 오지리 대군도 만나 전언을 받아왔으니, 국록에 상응하는 공은 족히 세웠다 할 만허이.”
잠시 시계 꺼내본 김가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간 살펴온 구주 동정은 내각과 정강사에서 긴히 쓰일 것이야. 한 보름쯤 쉬고 오게.”
“예, 대감.”
김창암을 돌려보내고서는, 곧장 입궐하여 정강사 사람들 모인 곳으로 향했다.
궐문 지나 정강사 있는 곳으로 향하니, 오늘도 어김없이 무언가를 두고 열심히 논쟁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 낭청(郎廳) 신세였을 때부터 백발 무성해진 – 이제 김옥균조차 그 대열에 합류하고 있었다 - 지금까지 한결같은 이들이었다.
얼핏 들어보니, 자신도 얼추 들어본 이야기인 듯하였다. 김윤식과 김홍집, 어윤중이 모여서 사람들 사이 분란 일으키거나 의혹 심어놓는 이야기, 또는 세치 혀로 도둑이 제발 저리다 못해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리게 하는 방편 등을 논의하지는 않을 테니, 겹치는 바라면 역시 나라 사이 동정일 테다.
“태씨가 나아간 이래 그 일대 여론이 크게 움직였으니, 난이 일어난다 한들 크게 번지지는 않을 듯합니다.”
“예로부터 사람이 한 번 탐심(貪心) 품으면 쉽사리 다스리기 어려운데, 세랍아국(세르비아)이 하루아침에 군자의 마음을 터득하겠는가?”
“도덕의 힘이란 참 묘해서, 실체 없음을 깨닫게 되면 그 밑천이 순식간에 드러나지만, 반대로 한 번 있다고 믿게 되면 다시 실체가 생기기 마련이지요.”
“허, 도덕의 힘을 말하는 고균이라. 우리 영상도 연로하기는 연로한 모양이로군.”
네 사람 중 최근에 구주 다녀온 김홍집이 김옥균에게 토 다는 것이야 익숙한 광경이지만, 그 김옥균이 도덕을 말하고 있으니 김윤식 너털웃음에 일리가 있었다.
“비록 지금은 그 일대가 막 토이기 번속을 벗어나 마치 아국의 옛날을 보는 것 같다지만, 장차 함께 흥업(興業)하면 이익만을 노리는 얕은 마음으로도 함께 화평 지킴을 이롭게 여기게 될 터이니, 고균 말에 일리가 있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오지리나 아라사, 영국 등이 편들어줄 것을 믿으면서, 더욱 그 욕심을 차리려 들 수도 있겠지. 무사히 시일이 흘러, 그 일대의 민생이 도로 펴고, 오지리국도 지금 그 대군이 노린다는 것처럼 국제를 크게 변통하기에 이른다면 큰 다툼 없이 넘어갈 수 있겠지만, 적어도 아직은 안심할 수 없다는 것이 여전히 내 생각일세.
고균 말대로 도덕의 힘이 허실(虛實)을 넘나든다면, 더욱 ‘반드시 이러하다’ 단언할 수도 없지 않겠는가?”
“자자, 여기 동농 대감 오셨네. 말다툼이야, 남는 것이 시일일진대 나중에 하여도 별 탈 없으이.”
김윤식이 저보다 연소한 – 그래보아야 다들 환갑 넘겼거나 마주보는 나이다 – 이들을 제지하며 말했다.
김옥균의 두 번째 총리 임기도 이제 거의 끝을 보고 있었다. 황란과 함께 시작한 지난 번에 비하면 훨씬 무탈히 흘러가고 있었는데, 그도 사람인 이상 긴장이 풀리는 것도 당연지사였다.
정강사도 지난 안행론 이후로 굵직한 건은 없고, 처음 대비한다고 모였던 천하대란조차 먹구름은 잔뜩 끼어도 천둥은 울리지 않고 있었다. 구주 국가들이 전쟁을 열심히 떠드는 지금이야말로 오히려 그럴 걱정이 없을 때라는 것이 참으로 묘하였지만, 구주 천하에 균세(均勢) 되돌아오고 있었고 그나마 남은 옛 토이기 강역에서도 이처럼 일이 잘 풀려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남는 것이 시일이라는 말도 나오는 것이요, 김윤식도 저의 나이 생각해서, 김옥균이 영상 자리 내려놓을 때 같이 치사할까 슬슬 생각할 무렵이었다.
“흠흠, 귀국한 창암으로부터 들은바, 떠나기 전 장계 올린 바와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일로, 유야납(빈) 돌아온 오지리 대군이 아국에 전언한 바가 있다 하였는데, 창암을 불러 대군이 하였다는 말과 대조하니 그 대강이 같아 예를 갖추고자 꾸민 말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테슬라를 거두어 그 재주를 펼치게 해준 것과, 자신의 요청에 따라 사라예보로 올 수 있도록 배려해준 것을 뭉뚱그려 고맙다고 사의를 표했다.
어쨌든 그가 원하였던, 합중국 안을 한 발짝 더 밀어붙이기 위한 발판은 충분히 얻은 셈이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돌아간지 얼마 되지 않아, 보스니아 임시정부는 공식적으로 왕정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그와 더불어 국민의 총의를 얻기 전까지는 왕을 모시지 않기로 했는데, 여기에는 테슬라의 ‘협조’를 받아 창당한 페타르 코치치의 생각이 크게 반영되었다고 했다.
어차피 국왕을 바깥에서 모셔온다 한들, 지금 유럽의 정국을 보면 설령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후손을 어디선가 찾아 모셔온다 해도 반드시 독일이나 영국·러시아 중 한쪽을 편들었다는 말이 나올 것이었다. 곤란하기로는 안에서 세우는 것도 마찬가지였는데, 그 집안 혈통이 세르비아인인 동시에 보슈냐크인일 수는 없으니 반드시 뜻이 갈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왕 없는 왕국으로 두고, 만일 합스부르크 제국의 개혁이 성공한다면 그쪽으로 갈 수 있다는 입장을 공식으로 삼되, 반대로 세르비아가 옛 영토를 모조리 저들 아래에 두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무언가 다른 구상을 내놓는다면 그쪽으로 향할 여지를 남겨두자는 것이었다.
페타르 코치치 홀로 외쳤더라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을 주장이, 테슬라가 거들고 합스부르크의 후계자가 받쳐주고 가니, 분명 같은 내용이건만 의외로 그럴듯하게 보이게 되었다.
“사의를 표하면서 동시에 구주 사람들의 호전(好戰)만큼이나 호화(好和)함을 믿고, 앞으로도 지금과 같이 도의를 위해 힘써달라 하였다고 들었습니다. 소관이 들은바, 창암에게 한 말도 비슷하였다 합니다.”
“흠흠, 굳이 따진다면 이 역시 제 말에 힘 실어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김옥균이 우쭐대며 먼저 단평하였다.
“그래, 고균 자네가 퍽 자공과 같으이. 이제 얼른 가서 다섯 나라나 움직이고 와 보게.”
“수레 타고 출발하면 도착하기도 전 임기가 끝나지 않겠습니까.”
곧장 농담 주고받는 것은, 그간 열심히 구주 여러 나라들로 하여금 서로 다투지 않게 하려던 조선과 여러 나라 여러 사람의 노력이 꽤나 효험 있었다는 자신 덕일 테다. 몇 달 전 영국 대사가 찾아와 평화와 도덕을 위해 택일해달라 하였다는 것이 과연 헛된 걱정 아니겠는가 생각하며, 다들 웃고 떠들었다.
개국 연호와 더불어 태양력이 널리 쓰이고야 있다지만, 세시 풍속은 옛날 그대로 지키고 있었으니, 관청과 국창(局廠, 회사와 공장)의 휴무일을 시헌력 따라 계산하는 것이 굳어졌기 때문이었다.
물론 서양에서 하는 것처럼 이레에 하루 반을 쉬는 것이 열흘에 하루를 쉬는 것보다 개화한 제도 아니겠느냐며 한동안 개화당과 천주교가 손잡고 나선 바 있었지만, 공산당 쪽에서는 주장하기를 저것이 휴일을 늘려주는 듯하여도 실지로는 이미 국법으로 정한 보름치 법가(法暇, 법정 유급휴가)를 줄이려는 빌미가 될 것이요, 피흉구길(避凶求吉) 핑계로 쉬는 삼짇날이나 수릿날 등등도 아니 쉬게 될 것이라며 반발하였다.
천주교 교인들이라면 몰라도 개화당은 정말 그런 의도였기에 딱히 억울한 누명도 아니었던지라, 결국 논쟁 끝에 일년에 휴무하는 날의 총수만 따지고 나머지는 알아서 하되, 관아의 휴무하는 날은 국법을 고수하기로 하였다.
그 사이 생긴 차이라면, 지난 북벌, 아니, 지부상소 이래로 정삭(正朔) 받아오는 구색도 갖추지 않게 된 고로, 대통력과 시헌력을 모두 갈음하는 명시력(明時曆)을 따르게 된 것 정도였다. (명시력이 처음 나왔을 때, 칭제건원이 무산되었다며 낙담하던 고루한 유생들이 그 ‘명(明)’ 자를 보고서 감격에 꺼이꺼이 울었다는 후문도 있었다.)
좌우지간 그리하여 진작 개국 오백십구 년(1910)이 되었건만 경술년 새해는 따로 쇠게 되었는데, 세밑부터 하늘에 기이한 일이 일어나 하계 사람들을 고루 놀라게 하였다.
섣달 보름께 발안국(트란스발)에서 처음 보였다는 혜성은 그믐 무렵에는 도성에서도 보였는데, 개밥바라기보다 밝기도 하거니와 갈고리와 같이 휘어진 꼬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후원에 억리경(천체망원경) 두엇 가져다 놓고서, 종실 사람들이 번갈아가며 구경하는데, 그 억리경 가져온 관원에게 귀남이 물었다.
“저것이 그 해씨 혜성인고? 사월까지는 아니 보인다 하였던 듯한데...”
“하유하신 것과 같이 금년 해씨 혜성은 양력으로 사월에 보여야 하는데, 지금 저 치우기(蚩尤旗, 꼬리가 휜 혜성)는 때도 맞지 않고 방위 또한 위수(危宿)와 실수(室宿) 사이에 있으니 해씨 혜성과 같지 않습니다.”
혹 저들 계산 틀렸다고 책 잡힐까 걱정하였는지, 관원이 열심히 설명하였다.
“대개 혜성이란 수십 년 주기를 두고 돌아오는 것도 있지만, 주기가 수만 년은 되는 것도, 한 번 드러난 뒤에 다시 나타나지 않는 것도 있다고 합니다. 짐작컨대 이것은 후자라 하겠습니다.”
“예로부터 재변(災變)과 맞닿는 일이라 한 것은 아마 이 때문일 듯합니다. 선기옥형(璇璣玉衡) 창안한 이래 사천 년 동안 모든 혜성이 때를 맞추어 나타났다면, 반드시 중국이나 해동에서도 선인(先人)이 이를 밝히지 않았겠습니까?”
안양대군이 슬쩍 와서 거들었다. 관원을 안쓰럽게 여겼다기보다는, 별단이와 아들딸 앞에서 멋 부리고 싶은 얄팍한 마음 탓일 테다.
“허허,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천하의 일이 변화무쌍하니 어찌 기이하지 않으냐.”
사내는 다 커도 어린아이 같은 면 있다 하던가. 그 모습 귀엽고 보기 좋아 귀남이 너털웃음 지었다.
멀리 있는 사관도 열심히 만년필을 놀려 하유하신 바를 적었다.
이를 훗날 실록으로 옮길 때에는 아래에 몇 줄이 더 붙었다가 마침내 적절치 않다 하여 지워졌다.
‘사관은 논한다.
천하의 일이 변화무쌍하다는 하교는 곧 『역』의 요체와도 같다.
혜성이 소구영신(掃舊迎新)하니 큰 변혁과 맞닿는다는 말은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던 것으로, 오늘날의 학문으로 살피기로는 근거가 없으니, 대개 세인(世人)으로 하여금 스스로 경계하고 다스리도록 하고자 하는 뜻에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나 경술년 이 해에 천하가 실로 한바탕 뒤엎이게 되었으니, 어찌 금인(今人)만 항상 옳고 고인(古人)은 항상 그르다 하겠는가? 아아, 알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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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4월 핼리 혜성이 근일점을 지나기 전, 동년 1월 말 남반구에서 엉뚱한 혜성이 관측되었습니다. ‘1910년 1월 대혜성’이라 불리는 이 혜성은 겉보기등급이 –5등급에 달했고, 북반구에서도 관측이 가능했던 2월 초에는 0등급 정도로 떨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긴 꼬리로 인해 쉽게 관측이 가능했습니다. 태양을 가깝게(약 0.13AU) 스치고 지나간 이 혜성의 공전주기는 약 6만년 정도로 추정됩니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토·일 휴무는 사실 동양은 물론이고 서양에서도 그리 기원이 오래된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영국의 경우, 일요일과 월요일에 휴식을 취하는 것이 전근대 수공업의 관례였고, 19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야 토요일 반일 근무와 일요일 전일 휴무가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조선의 경우에도 광무개혁 시기 관청의 휴무일이 요일을 기준으로 정해지면서 이것이 조금씩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명시력은 원 역사에서도 조선이 칭제건원을 하면서 사용한 책력입니다. 공식적으로는 양력을 따랐지만, 실제로는 기존 역법이 여전히 중요하였고, 또 동아시아적 의미에서 칭제건원에 당연히 따라오는 것이 역법의 편찬이기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는 청대 시헌력의 이름만 바꾼 수준이었습니다.)
성 비투스 축일은 특히 세르비아인에게 큰 의미가 있는 날이었는데, 세르비아 민족주의와 깊은 관련이 있는 1389년 코소보 전투가 벌어진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는 오스만 투르크와 세르비아 양쪽이 큰 피해를 입었고, 전략적으로는 오스만 투르크가 승리를 거둔 전투였지만, 세르비아 측의 야사와 전설 속에서는 여러 민족주의적·종교적 색채가 더해지게 되었습니다. 원 역사에서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암살당하게 된 이유 중 하나도 여기에 있었지요.
동아시아적 왕조 개념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왕 없는 왕정’은 유럽에서는 근대는 물론이요 현대까지도 종종 있었습니다. 발칸 국가들 상당수도 19세기 독립 후 유럽에서 그럴듯한 가계의 군주를 모셔왔고, 군주와 국민 모두 여기에 딱히 큰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았지요. 여러 사정으로 군주를 정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왕 없는 왕정’도 충분히 가능했는데, 헝가리의 독재자 호르티 미클로시(‘바다 없는 나라의 제독, 왕 없는 왕국의 섭정’)나 스페인의 프랑코 등이 그런 사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