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294화 (294/320)

97. 빗자루 별 (1)

일본국에 이어 조선국에서도 비료공장을 세우게 되면서 가장 피해를 본 이들이 있으니, 바로 그 조선국 세자로 인하여 머나먼 서태평양 한가운데 모이게 된 무정부주의자들이었다.

류큐 정부로부터 임대한 우후아가리 제도에서 구아노를 채굴하는 사업은 가뜩이나 생산성이 썩 좋지 않아 고전하고 있었다. 이는 땅의 문제라기보다는 사람의 문제였는데, 그러잖아도 제 멋에 겨워 사는 작자들을 한데 모아두니 있던 인류애도 없어질 판이었던 것이었다.

사무 총괄하는 크로포트킨은 멀리 런던에 있고, 한때 일본과 류큐 두 나라의 분쟁까지 불러왔던 구아노의 값어치는 비료공장으로 말미암아 죽 떨어질 것이 명백하였다.

결국 숙의 끝에 ‘창조적 해체’를 하기로 결정이 되었는데, 막상 떠날 때가 되니 아쉬운 것이 또 사람 마음이라, 그간 고생하였던 것과 다투었던 것에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려고들 하였다.

하여, 누구는 결국 톨스토이가 옳았다며 (최근 그의 ‘일탈’은 묻어두고) 농촌 공동체가 정답이라 우기면서 돌아가고, 누구는 진정한 무정부는 인간의 의식에 내재된 정부 그 자체를 배제해야만 이루어질 수 있다면서 사회운동에 투신하겠다며 귀국하였는데, 극동에 있는 동안 ‘보스니아 사람’이 되어버린 세르비아인 페타르 코치치(Petar Kočić)는 조금 더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사람은 이상만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꿈은 저 창공을 향하더라도, 시선은 땅을 떠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열변 토하는 코치치와 마주앉은, 합스부르크령 크로아티아에서 태어난 세르비아인으로, 조선에는 미국 국적으로 들어와 살고 있던 니콜라 테슬라는 영 시큰둥하였다. 그에게는 조국이 어쩌고, 독립이 저쩌고 하는 것보다 지금 앉은 이 카페를 밝히고 있는 저의 형광등과 바깥의 네온등 – 둘 다 비싸게 받고 맥안공행에 넘겼다 – 이 더 흥미로웠다.

“그래서, 원하는 바가 무엇이오?”

바쁜 사람 붙잡고서 하는 얘기가 영 미적지근하다 여기는 테슬라가 되물었다.

서양에서 인기 있는 이태백의 시를 빌리자면, ‘하늘이 내 재주 내리셨으니 필히 쓰임 있으리라(天生我材必有用)’ 여기며 근근이 버티던 사람이 지금은 ‘인생 뜻대로 될 때 즐거움 다 누리라(人生得意須盡歡)’ 하게 되었으니, 그가 미국에서 고생하던 것을 본 이가 만일 있더라면 훨씬 총명한 것을 제외하면 에디슨과 다름없다 할 만했다.

“물론 선생님께서 정치에 큰 관심이 없으신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왕 독립한 나라입니다. 과거에 얽매인 그 어떤 낡은 나라보다 훌륭하게 기둥 세우는 일이라면 선생님의 그 지성과 명성을 쓸 만한 가치가 있지 않겠습니까?”

튀르크 압제자들이 허무하게 무너지고, 입헌군주정을 부활시킨 젊은 장교들은 저들이 부활시킨 선거에서 자신들이 패배하며 내분에 빠져 있었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쿠데타로 인해 루멜리아를 상실하고, 영국과 러시아는 저들 마음대로 해협의 통행권 보장을 주고받았으며, 남은 우방 독일조차 우정의 값을 먼저 내라면서 트라블루스와 페잔(現 리비아)을 뜯어가 이탈리아에게 주었으니, 낮은 지지는 자업자득인 셈이었다.

그런 혼란 속에서 샤리아법의 복구를 주장하며 일어난 반란을 신속히 제압한 젊은 장교 케말 파샤(Kemal Pasha)에게 개혁파의 (남은) 인망이 모여들고 있었는데, 마침내 독립한 발칸 국가들에게는 아직 중요치 않은 사실이요, 그보다 중한 것은 이처럼 코스탄티니예가 혼란스러워 바깥을 위협할 여력이 없으니 더 이상 그들의 이웃에게 억지 미소 지어줄 필요도 없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그나마 루멜리아의 남은 조각을 마저 병탄하고 코스탄티니예의 이름을 차리그라드(Tsarigrad, 콘스탄티노플의 슬라브식 명칭)로 바꾸어야 한다고 우기는 불가리아의 목청 큰 자들은 소피아의 스탐볼로프 총리와 부쿠레슈티의 카롤 1세가 힘써 틀어막고 있었지만, 든든한 뒷배 있을 때 아드리아해까지 진출할 욕심을 한껏 내던 세르비아는 사정이 달랐다.

“한 사람의 세르비아인으로서, 마침내 되찾은 세르비아 국가가 새로운 압제자가 되어 다른 민족을 탄압하는 것을 방관할 수는 없습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공존과 협력의 땅이 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선생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지금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세르비아인이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것은, 반대로 그를 이 무대로 끌어올리는 자에게는 – 만약 그리할 수만 있다면 - 엄청난 이익이 된다는 뜻이었다.

“나 또한 어머니로부터 세르비아 서사시를 배웠고, 혈통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만, 그뿐이외다. 더구나 내 고향은 보스니아가 아니라 크로아티아 땅이란 말이오.”

그러나 이대로 본심 더 드러냈다가는 쫓아내기는커녕 오히려 더 피곤해질 듯하여, 그럴듯한 핑계를 대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그대의 주장에는 다소 공감하는 바이나, 알다시피 나는 조선 정부와 산하의 여러 관청, 그리고 기업가들과 계약한 사이요. 계약기간을 연장한 것이 그리 오래 되지도 않았는데, 당분간은 계약을 엄수하여야 하지 않겠소?”

“그러셨군요. 알겠습니다. 생각이 바뀌시면 언제든 연락주십시오.”

테슬라는 저의 핑계가 유효하였다 여겼지만, 사실 코치치도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물러날 사람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보여준 태도로 보아 테슬라 스스로 생각을 바꾸지는 않을 듯했다. 그러나 무릇 할 만한 가치가 있는 모든 일은 나서서 쟁취해야만 이룰 수 있는 법. 생각이 바뀌도록 만들면 될 것이었다.

결연한 마음을 품은 코치치는, 채굴 현장의 설비를 처분하면서 나온 ‘퇴직금’으로 잡아둔 손탁 호텔의 특실로 돌아가기 전, 회동서관(匯東書館)에 들려 옥편과 『신증동문선(新增東文選)』 한 질을 샀다.

코치치도 극동에서 몇 년 지내면서 보고 배운 바가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이곳 사람들이 ‘참된 문자(眞書)’, 또는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한족의 글(漢文)’이라 부르는 중국의 고전 문어였는데, 아무래도 조선어와 일본어, 류큐어를 동시에 배우는 것보다는 중국 문자를 외우는 쪽이 그나마 속 편했기에, 섬에 있을 적 바깥 오가는 일 맡던 사람들은 종종 배우곤 하였다.

그렇게 익힌 고전 중국어 실력은, 저의 본고장 보스니아의 어려운 사정과, 내심 그 사정 알고 도우러 가고자 하나 조선국에 신의 지켜야 하여, 눈물 삼키며 남아있는 테슬라 선생의 딱한 사연을 적어 내려가기에는 충분하였다.

물론 현지 지식인들 보기에는 어색할 수도 있지만, 언론의 힘 막강한 조선국이니 신문에 실리기 전 윤문 거치면 별 탈 없을 것이다. 대만 원주민들의 억울한 사연도 실어주는 양심적 언론인 일당 선생이 조선국에 계심은 얼마나 다행이란 말인가!

인재 한 번 잡아두면 좀처럼 놓아주지 않는 조선 정부지만, 그 동포가 어려움에 처한다면 언제 붙잡았냐는듯 쉽게 놓아주곤 한다는 것도 잘 알려진 바였다. 과거 드레퓌스 논쟁에서 오페르트가 그러하였으니, 테슬라도 예외가 아니어야 할 터였다.

하지만 드레퓌스 때와는 전후의 맥락이 크게 달랐으니, 코치치가 저들 겨레의 애사(哀史) 기고하였을 무렵 조선에 대사관 혹은 공사관 두고 있는 여러 유럽 나라들이 기민하게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전하의 정부에 고용된 기업가 겸 과학자 테슬라 씨가, 조만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방문할 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듣고 이처럼 결례를 무릅쓰고 접견을 청하게 되었습니다.”

존 조던(John N. Jordan) 영국 대사가 정중한 인사와 더불어 본론을 꺼냈다.

“아직 내각에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사안으로 알고 있소만.”

경양대군과 태국 며느리가 제주도에서 돌아왔다기에, 잘 지내다 왔는가 얘기나 들으려던 차 조던 대사의 요청이 들어왔던 고로, 귀남의 대꾸는 썩 살갑지 아니하였다.

“예, 전하. 이르신 대로입니다. 외무부, 아니, ‘예조’에도 본국의 우려를 전하였으나, 근래 진행되고 있는 협상과 관련하여 특히나 염려되는 바가 있어, 재차 강조를 위하여 이처럼 불편을 끼지게 되었습니다. 결례에 대해서는 재차 사과드립니다.”

예조에서 급히 올린 수본(手本)에 따르면, 사정은 이러하였다.

덕국이 모든 겨레는 나라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마치 그에 호응하는 것처럼 조선국 이완용이가 아주 일진(一進) 운운하면서 영국과 법국은 크게 경계하게 되었다.

물론 공식적으로는 여전히 조선은 법국의 동맹이요, 일본은 영국의 동맹이지만, 청국은 어느 한쪽의 동맹도 아니요 오히려 여러 해 전 남미 위내서랍국(베네수엘라) 소란에서 덕국의 도움 받은 바 있었으며 영법 양국에는 원한이 있었다.

그나마 일본국에서 덕천(도쿠가와) 총리가 물러나면서 조금 숨 돌리는 듯했건만, 얼마 전 추거에서 젊은 층의 지지를 받으며 자유당이 크게 뛰어올랐으므로 다시 걱정이 태산과 같게 되었다.

그러니 자칫하면 남들 싸우는 통에 저들끼리 이익 보는, 영국이 지금까지 저들의 전영(특허)으로 여겨왔던 일을 조청일 삼국이 행할까 두려워하던 영법 양국은, 구주에서 큰 다툼 일어나면 꼭 병력을 보내지는 않더라도 물심 양면으로 동맹의 의무를 다한다는 확약을 받고자 근래 한양과 일본 경도(교토)를 부지런히 오가고 있었다.

“태씨가 비록 아국을 위해 일한다 하나, 아국이 노비를 폐한 지 오래이거늘 어찌 뜻에 반하여 붙잡아놓을 수 있겠소?”

“지당한 말씀이십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민감한 시국에서, 자칫 잘못된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으니, ‘오이밭에서 신발을 고쳐신으면 아니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분히 의도적으로 조선 속담을 인용하는 조던 대사였다.

“우선 뜻은 알겠소이다. 내각과 함께 재차 숙고토록 할 터인즉 금일은 이만 물러감이 어떻겠소?”

“예, 전하.”

계속 트집을 잡는다면, 다음 번 신년하례 때는 군밤을 아니 구워줄 생각까지 품고 있었는데 정말로 무례 범할 생각은 아니요 오히려 본국의 지침에 떠밀렸을 뿐이었던 조던 대사는 눈치껏 물러갔다.

근래 천덕만이네 효자율 과자가 멀리 연해주까지 퍼져 아라사 사람들 사이에서도 큰 인기를 끌고 있었던 바, 이 소식 들은 아라사 대사는 그 효자율의 원본인 어제 군밤을 더 먹을 수 있을 기회 놓쳤다며, 본국에 보고하면서 소소하게 아쉬운 마음을 품었다.

밤에 대한 기호는 조금씩 달랐지만, 오지리와 법국 등등, 테슬라의 ‘고향’ 행에 각별한 관심 있던 나라의 대사들도 속히 보고함은 마찬가지였다.

어전에서 정확히 어떤 말이 오고갔는지는 알 길도 없고, 억지로 알려 하였다가 역으로 크게 당할 위험도 많았으니 깊게 파헤치지 않았지만, 영국 대사가 급히 조선 국왕을 접견하는 이례적인 일이 있었다는 사실만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영국이 그러하였다는 말인가.”

“예, 전하.”

비엔나의 호프부르크 궁은, 정당한 주인 대신 이론상 곧 정당한 주인이 될 사람, 즉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독차지하고 있었다.

“정말 세르비아에게 무슨 큰 기대를 품고 있는 것인가? 이해하기 어렵군.”

“아마 지난번 튀르크와의 전쟁에서 큰 감명을 받은 것 아니겠습니까?”

“알바니아 독립에 대해 세르비아에게 조금 더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는 계산의 발로일지도요.”

그의 주변에 모여든 관료와 정치인들이 하나씩 의견을 꺼냈다.

불가리아와 루마니아, 세르비아가 독립하면서 졸지에 함께 독립하게 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 몬테네그로, 알바니아 등지에 대해, 세르비아는 노골적으로 욕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허나 그 욕심이 완전히 정당하지 않은 것만은 아니었다. 발칸 제국(諸國)의 독립을 승인하는 과정에서, 오스만 투르크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그럴듯한 떡밥 하나쯤 던져주려던 독일과 아드리아해 반대편 영토를 욕심내는 독일 편의 여러 나라들을 이간질하려던 영국의 이해가 맞아떨어져, 무슬림 주민이 압도적이었던 알바니아가 세르비아령이나 그리스령이 되는 대신 별도로 독립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겨우 되찾은 독립이 다시 이처럼 열강의 회의장에서 거스름돈으로 쓰이지 않도록, 불가리아와 루마니아가 손잡은 것처럼 저들도 덩치를 키워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는데, 차이라면 영광스러운 대(大)세르비아를 지향하는 욕심이 본의냐, 아니면 이름이야 세르비아든 유고슬라비아든 무방하니 남들 발에 치이지만 않았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생각이 본심이냐 정도였다.

그리고 어느 쪽이든 뒤숭숭한 독립 직후의 상황에서 속뜻을 실천으로 옮기기에는 힘이 부족하였으므로, 그 욕심은 대개 허황되기 일보 직전의 거친 언사로 드러나곤 하였다.

“어쨌든, 영국이 급한 마음에 보기 드문 실책을 범한 것은 사실이라 보입니다. 아무리 테슬라 씨의 명망이 높다지만, 사라예보에 아무런 기반이 없는 이상 설령 한두 번쯤 찾아온다 한들 유의미한 파급효과를 가지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전쟁에서 기득권의 안전을 보장받는 안건과 연결지어 버렸으니, 졸지에 조선에게 큰 부담을 주어버린 셈입니다. 그리고 조선은 그렇게 외부에서 압력이 들어올 때 결코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지요.”

굳이 정확한 비유를 하자면, 순순히 물러나면서 친절하게 옆의 낭떠러지로 밀어넣곤 하였다고 하는 쪽이 맞겠지만, 신임 외무장관 알로이스 렉사 폰 에렌탈(Alois Lexa von Aehrenthal) 백작이 보기에는 거기서 거기였다.

더구나 영국이나 동맹 프랑스 어느 쪽도, 더 이상 쉽사리 조선이나 일본 등에 압력을 가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만약 대전쟁이 일어나고, 거기서 영국이 압승한다면야, 그때의 원한 갚겠다며 손을 쓸 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양식 있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썩 가능성 높은 상황은 아니었다.

“에렌탈 백작, 자네가 보기에 우리가 무언가 할 수 있는 바가 있겠는가?”

처음에는 자신의 아들도 아닌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몇몇 헛물켠 작자들과 어울린다고 공공연히 냉소하던 카이저 프란츠 요제프는, 그 헛소리를 독일의 카이저 빌헬름이 그대로 받아들여 내세우자 당황하다 못해 아예 쇤브룬 궁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비엔나에 감돌던 이 미묘한 갈등을 읽어낸 야심가들은, 장차 권력이 어디로 향할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끽해야 시장 정도나 하면 적당하다 여겼던 카를 뤼거도 갑자기 평민들의 우상을 넘어 정계의 굵직한 존재로 부상하였는데, 이름에 ‘폰’ 자 들어간 이들이 가만히 있을 수는 없던 것이었다.

그리고 에렌탈 백작은 그런 야심만만한 자 중 하나였다.

“아시다시피, 지금의 보스니아는 대공 전하께서 앞장서서 내거신 민족 화합의 기치가 큰 힘을 발휘하면서 세르비아와의 합방을 주장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크게 줄어든 상황입니다. 비록 정치적 기반은 없지만, 니콜라 테슬라는 세르비아계 사이에서는 그 이름의 무게가 크고. 페타르 코치치 역시 문필가로서 명성이 작지 않습니다.”

대(大) 오스트리아 합중국 구상이 성공한다면, 그리고 그에 따라 그처럼 거들먹거리는 헝가리만큼의 권리를 보장받는다면, 꼭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라는 별도의 나라를 가져야 하는가 의문 품을 이들이 적지 않았고, 몬테네그로도 그렇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었다.

물론 그 구상도 실제로 옮기려면 암만 낙관적으로 보아도 십수 년, 비관적으로 보면 수십 년은 걸릴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구상이 성공한다면 기꺼이 동참하겠노라 하는 사라예보 신생 정부의 확약을 받는다면 반대로 합중국 건설이 더욱 힘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니 그들을 끌어들일 수 있도록 힘을 써보자는 말이로군.”

“영민하십니다, 전하. 조선 정부는 강압에는 강하지만, 도의에는 오히려 무르지요. 승낙해 주신다면, 조선 정부에 모든 정중함을 다 갖추어 영국과는 반대되는 제안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그것으로는 부족하네. 진심을 담아서 보내게.”

지도를 보며 잠시 고민하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첨언했다.

“이왕이면 조금 더 그럴듯한 명분이 있는 쪽이 좋지 않겠는가? 우리 대오스트리아-헝가리와 보스니아의 우정을 위하여 사라예보에 친선 방문을 할 생각인데,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의 위대한 과학자 니콜라 테슬라의 방문이 맞물린다면 평화와 민족 화합에 큰 의미가 있으리라고 전해주게.”

“친선 방문 말씀이십니까?”

자신이 이런 자리에 어울리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흡족히 여기고 있던 카를 뤼거가 깜짝 놀라 물었다.

“너무 즉흥적이었다면 미안하게 되었네. 하지만 내가 직접 나서는 것만큼 진심을 보여주기 좋은 방법이 딱히 떠오르지 않는군그래.”

“물론 지금의... 정치적 상황을 생각하면, 전하께서 바라시는 바를 가로막을 것은 없을 듯합니다. 다만 그만한 방문이라면 조금은 준비할 시일이 필요할 것입니다. 혹시 염두에 두고 계신 때가 있으신지요?”

“6월 28일로 하세.”

프란츠 페르디난트에 영합하여 출세를 노리는 자들 중, 왜 하필 그때인가 의문을 품는 이들은 없었다. 몇몇 무엄한 호사가들이, 그 합중국 구상이 실은 대중의 인기를 바탕으로 아내의 명예를 높여주고자 하는 마음에서 나왔다고 수군댈 만큼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아내 조피를 애틋하게 여겼는데, 그 결혼기념일이 바로 6월 28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민족 통합 운운하는 것치고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대부분 게르만인, 그리고 일부 폴란드인이었기에, 6월 28일이 율리우스력으로는 6월 15일, 즉 세르비아인들의 저항을 기리는 성 비투스 축일임을 그 누구도 지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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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 테슬라는 (축구나 전쟁범죄로 알려진 것을 제외하면) 근대 이후 가장 유명한 세르비아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태어난 곳은 당시 오스트리아령이었던 크로아티아 일원이었고, 본인도 이를 잘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대학 시절 세르비아 전통문화 동아리를 시작할 만큼의 민족의식은 있었지만, 그 이상의 구체적인 정치적 발언은 삼가는 편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전하는 그의 몇 안 되는 정치적 발언들을 종합해 보면, 이는 민족주의 자체를 반대한다기보다는, 그런 ‘사소한’ 생각은 자신의 재능에 맞지 않는다고 인식하였기 때문인 듯합니다.

테슬라의 어머니 두카 만디치는 직접 살림살이 공구를 만들 만큼 손재주가 있었고, 또 세르비아 전통 서사시를 암송하는 장기가 있었습니다. 테슬라 본인도 자신의 재주와 천재적 기억력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았다고 술회한 바 있습니다.

무정부주의 에피소드에서 지나가듯 말미에 언급되었던 페타르 코치치가 다시 나왔습니다. 원 역사에서는 합스부르크령으로 합병되어버린 조국 보스니아에 머물면서 반(反) 합스부르크 운동을 열렬히 펼쳤고, 신경쇠약으로 인해 요절하기 전까지 정치활동과 더불어 단편소설과 희곡으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신증동문선』은 실재하지 않는 책입니다. 본디 신라부터 고려, 조선 초의 명문을 모아 서거정이 편찬했던 『동문선』은, ‘동국’의 명문들만을 모았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었고, 이후에도 이러한 의식을 계승·보완하는 (또는, 자기 입맛대로 새로 쓰는) 후속작들이 두 차례 나왔습니다. 『속동문선』(1518)과 『신찬동문선』(1713) 사이의 시간 간격을 감안하면, 작중 시점에서 소위 ‘쿨타임’이 찼다고 할 만합니다. 여담으로, 회동서관(匯東書館)도 실제 개화기 한양에서 성업하던 서점입니다.

원 역사에서도 압뒬하미트 2세의 전제정을 무너뜨리고 입헌군주정 도입을 시도한 청년투르크당은 예상보다 낮은 지지율과 정치적 혼란, 발칸 국가들과의 전쟁, 열강들의 영토 침탈 등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 와중 이슬람 근본주의와 반혁명주의를 내걸고 코스탄티니예에서 군대가 봉기를 일으키는 사건(3·31 사건)도 있었는데, 케말 파샤는 원 역사에서도 봉기 진압군의 선봉을 지휘하였습니다.

알로이스 렉사 폰 에렌탈 백작은 본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합병(1908)을 주도하였는데, 작중에서는 비슷하면서도 결이 꽤 다른 외교 공작을 맡게 되었습니다. 원 역사에서는 훨씬 일찍 합스부르크의 실질 지배하에 들어온(1878)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였는데, 야심만만한 에렌탈은 오스만 투르크의 혼란을 틈타 이를 완전한 합병으로 굳히고자 러시아와의 밀약을 추진하였습니다. 이후 세르비아가 반발하고 나서고, 러시아 역시 오스트리아가 밀약의 조건을 따르지 않자 세르비아의 편을 들고 나섰는데, 오스트리아는 독일을 끌어들여 러시아의 반발을 억누르게 되었지요.

작중에 언급된 것처럼, 발칸 국가들은 독립 직후부터 복잡한 민족구성으로 인해 여러 갈등에 휘말리게 되었는데, 특히 세르비아와 불가리아는 과격한 팽창주의 노선으로 말미암아 그런 갈등의 주축이 되었습니다. 20세기 초 두 차례에 걸친 발칸 전쟁은, 발칸에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가 타협할 수 있을 – 그러잖아도 희박했던 – 가능성을 없애버렸다고 평가받습니다. 발칸 내 러시아의 유일한 영향력 발휘 채널이 세르비아로 국한되면서, 양자관계에서 러시아가 오히려 세르비아에 끌려다니는 상황이 발생해버린 것이지요. 이는 1차대전으로 이어지는 중대한 원인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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