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마지막 정거장 (1)
서기 1909년은 조선이나 러시아 어느 쪽에도 그렇게 특별한 해는 아니었다. 차르의 40세 생일이라면 진작에 지났고, 차르의 득남을 축하하기에도 몇 해쯤 늦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졸지에 전직 총리 및 최초의 ‘참의부인(參議夫人)’ - 관직 명칭을 두고서 아직도 구름재에서는 설왕설래하고 있었다 – 의 남편 된 전봉준을 정사(正使)로 삼아 꽤 성대한 사절단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했으니, 이는 여러 사람의 뜻이 실타래 뒤엉키듯 얽힌 결과였다.
네 공주를 득한 뒤 비로소 얻은 귀한 늦둥이 아들이, 실은 괴질(怪疾) 앓고 있다는 설이 돌았는데, 외국 대사·공사들의 부인 통해 이런저런 소식 전해듣는 민씨는 그 소식 듣고 참으로 안타까워하였다. 귀남도 열 몇 해 전 용상 오르기 전의 사황(차르) 만났을 적 인상이 꽤 좋았던 고로, 그런 안타까움을 함께하였는데, 생각하기를 무슨 병질인지는 몰라도 허약한 몸을 고치면 대개 물러가든 경증이 되든 할 것이었다.
그리하여 내의원에 일러 아라사 태자에게 줄 용한 보약을 지어 올리라 하였다. 녹화회 생긴 이후로 그간 처방하던 약재 중 얼토당토 않은 것도, 잘못된 것도 적지 않았음을 깨달으면서, 약재의 정확히 무엇이 도움이 되는가 연구하는 본초학(本草學)이 성행하고 있었으니, 내의원 또한 이를 충실히 받아들이면서 수십 년간 체통 구겨왔던 것을 만회할 기회 얻고자 하였다.
그런데 정확히 같은 시기에, 이미 유명무실해진 아시아개발은행을 혁파하는 건이 저기 북해도에서 제의되었다. 러시아의 빈약한 금융만으로도 충분히 조선과 일본에 유의미한 투자 할 수 있던 시절이 한참 지나고, 설령 여력이 있다손 쳐도 시베리아나 노보러시아(現 우크라이나 동남부 일대)에 투자할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융비총국에서 청 올리기를, 나씨(羅氏) 형제가 근래 완성된 비행기 선보이며 팔 심산으로 각국을 순방코자 하는데 이 구상 창안에 도움 주었던 치씨(콘스탄틴 치올코프스키)에게 먼저 실물 보여줌이 도리라, 이왕 가는 길에 함께 가도 되겠느냐 하였다.
한편, 정사로 전봉준이 명 받들게 된 것은, 추거도 아쉬움 남기고 그럭저럭 끝나 – 힘 잃을 것 같던 자유당이 일진회 덕에 도로 약진하여, 순위는 그대로 유지되었지만 정립한 세 당 간의 차이는 확연히 줄었다 – 한가하던 차, 아라사국 일린과 친분 있다 하여 추천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일린이 조선에 이미 두 번 왔으니 저도 한 번쯤 답방하는 것이 예의지국 조선 사람 답기도 하고, 더구나 가뜩이나 논란 많은 아내 옆에 제가 있으면 바깥사람 믿고서 전횡한다 이야기할 못난 작자들이 분명 있을 것이라, 겸사겸사 전봉준은 교지를 받들었다.
그만한 사람이 외국 나가는 것도 그리 흔치는 않은 일이라, 감히 일개 당 영수에게 심부름시킬 만한 사람은 또 심부름을 시키려 들었다. (물론 ‘혹시, 만약, 정말로 시간이 남으면’ 어째서 러시아에서는 저의 라디오가 잘 팔리지 않는지 알아봐 달라 청탁한 테슬라처럼 그런 눈치 없이 얼토당토않은 소리 하는 자도 있었다.)
예컨대 정강사에서는 간단하면서도 묵직하게, 그 나라 안의 고관대작들이 혹 무엄한 마음 품지 않은가 살펴달라 하였다.
신보에 실리는 소설 속 일목대왕(一目大王, 궁예)도 아니고, 그것을 어찌 쉽게 알아내겠냐며 물었더니, 청을 전해준 김가진 왈,
‘근래 아라사가 변법하여 자강 도모하고 있다 하는데, 그 완준(緩峻, 완급) 두고서 당이 다시 갈렸다 하오. 비록 우리 북쪽에 연접하였으나 워낙 대국이라 멀리 떨어진 그 도성의 사정은 우리 공안서도 바로 알지 못하는데, 그대와 같은 현달한 사람이 손수 찾아간다면 반드시 듣지 못하는 사정을 들을 수 있지 않겠소?’
하였다. (또한 사사로이 곁들여 청하기를, 지난번에 일린 찾아왔을 때 전하지 못한 말이라며, ‘그러게 소싯적 마음 곱게 쓰지 그랬느냐’라고 전해달라 하였다.)
영국은 높아지는 덕국의 위세에 갈팡질팡하던 것을 멈추고 마침내 법·아 두 나라와 손을 잡았으며, 덕국 역시 오지리를 끌어안고 이태리와 토이기 등을 한데 묶어, 완전한 평형은 아니되 어느 한쪽이 크게 밀리는 지경은 면하게 되었다. 천하가 소란스러워도 한동안은 소란(小亂)으로 그치리라는 전망은 이에 근거를 두고 있었는데, 만일 어느 한쪽 나라가 크게 뒤흔들려 이 대오에서 이탈하게 되면 그때는 또 어찌 될지 모르는 일이라, 앞날 대비하는 정강사와 공안서에서 좌시할 수는 없었다.
물론 설령 무슨 난이 일어나도 조선까지 여파 미치려면 한참은 걸릴 것이라 단정하면서, 시기상조 걱정은 관두라 할 수도 있었겠지만, 정강사의 그러한 생각 들은 성상께서 아라사국은 장차 천하 대세에서 지금보다도 훨씬 중하게 될 것이니 살필 수 있다면 살핌이 마땅하다 한 마디 하셨으므로 그대로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일린이 두 번 찾아왔으니 저도 한 번쯤 찾아감이 마땅하지 않겠느냐 기별하고서는 그 옛날 연행이나 통신사를 방불케 하는 성대한 일행과 함께 시베리아 횡단철도에 올랐다.
“아무리 그래도 이만큼 환대를 받으니 무안하고도 민망하군그래. 내 사진까지 들고 나올 줄은 몰랐네.”
심지어 지난 ‘붉은 일요일’에는 시위할 때도 들고 다녔다던가.
“그럴 만한 업적이 있으니 그렇지요.”
사민노동당 당사 죽 둘러보는 전봉준의 소회에 일린이 여상히 답했다.
“물론 내 저서 쓸 때 나름대로 심혈 기울인 것은 맞고, 글쓴이로서 찬사 받음은 언제나 기꺼운 일이지. 허나 내가 한 일은 그저 한 가지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지, 항상 들어맞는 정답이라고 자부할 생각도, 그런 정답을 제시할 자신도 없으이.”
저는 읽지 못하는 아라사 글 신보를 일린이 옮겨서 읊어주기를 ‘전 선생’ 오셨다는 쪽도, ‘그 타타르인’이 침노해 왔다는 쪽도 있다 하였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장인어른 따라가기에는 저의 앎과 안목이 너무 부족하였는데, 다만 장인이 보지 못한 바를 보았기에 ‘이럴 수도 있지 않겠느냐’ 의의(疑義) 달았을 뿐이거늘 어느새 이렇게 논쟁의 가운데 있게 되니 놀라우면서도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물론 자네가 필요할 때 도움을 주고, 내 생각을 제시해주기는 하였지. 허나 그것을 바탕으로 기회를 만들어내고, 이 많은 사람들의 지지 이끌어낸 것은 블라디미르 자네와 이곳 동지들의 공 아니겠는가?”
물론 자기 저서에 담긴 생각이 틀렸다고는 여기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언제 어디서든 옳은 만고진리냐고 묻는다면 전봉준 본인부터가 고개를 저을 것이다.
“그리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다만, 많이 보셨겠지만 선생님 존함을 계속 내세워야 하는 사연이 있습니다.”
마르크스-전 노선을 완성하여 풍요롭고 행복한 사회를 건설하는 것은 유럽과 아시아 두 세계에 모두 속한 러시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잘 모르는 전봉준도 금방 눈치를 챌 수 있을 만큼 사민노동당의 선전은 노골적으로 이러한 기조를 담고 있었다.
“그리고 송구스럽지만 한동안은 더 그래야 할 듯합니다. 모든 세력을 끌어안고 간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니어서요. 당장 ‘러시아를 위한 러시아식 개혁’ 어쩌고 하면서 발목을 잡으려는 무리가 있습니다.”
“이곳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우리 대사관이 운영하려던 클럽에 영 호응이 없다더니, 그런 사정이 있었던 모양이로군.”
전봉준 본인이 총리 재임시에, 나라 사이 다툴 구석 줄여보겠다고 야심차게 추진한 정책이었건만, 큰 기대를 하지 않던 오지리나 덕국에서 성사(成事)된 것과 달리 조선에 우호적인 아라사에서는 별 진전이 없다 하였다. 처음에는 아직 이 두마에 익숙하지 않아 그러려니 했건만, 더 깊은 사정이 있는 듯했다.
“그건 아닐... 음... 어쩌면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붉은 일요일’ 이후 개혁 행보를 느리고 엉성하게나마 꾸준히 이어가고 있는 러시아였다. 당연히 그에 반발하는 세력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스톨리핀과 일린 두 사람과 논쟁을 벌인다면, 솔직히 러시아 안의 그 누구도 이겨낼 수 없었다. 하물며 그들이 두마가 열릴 즈음 영국과의 타협이라는 엄청난 성과를 가져온 뒤에는 더욱 그러했다.
농촌의 유지들도 젬스트보에서의 권력을 조금 내려놓고 토지개혁에 협력한다면 상상도 못한 부(富)를 얻을 수 있다는 꼬드김에 넘어가기 시작했고, 교회마저도 신성종무원장 포베도노스체프(Konstantin P. Pobedonostsev)가 은퇴 후 곧 사망하면서 게오르기 가폰을 필두로 하는 개혁파 사제에게 넘어가는 신도들의 마음을 다잡을 구심점을 잃었다.
결국 보수파들이 취할 수 있는 전략은, 그들이 혐오하는 조선에서 배워온, 그러나 지난 이십 년간 특효를 발휘했기에 어느새 오흐라나의 특기로 자리잡은 분열책이었다. 다양한 사람들을 한데 묶어 빠르게 덩치를 키운 볼셰비키에게는, 바로 그 덩치를 약점으로 잡는 뼈아픈 공격이기도 했다.
“... 밀류코프(Pavel N. Milyukov)와 같은 자유주의자들과 로지안코(Mikhail Rodzianko)처럼 개혁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온건 보수주의자들이 손을 잡았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러시아식 개혁’을 주장하면서 헌법을 만들고 의회제를 정착시키는 것 이상의 정치적 개혁에는 반대하고, 나머지 부분에서도 점진적인 변화가 훨씬 낫다고 하고 있는데, 꽤 골칫거리입니다.”
물론 ‘입헌당’을 세운 중도 좌우파 세력들은 저쪽 보수파 귀족들에게 놀아나고 있다는 일린의 어투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 딴에는 시류를 타고 저들 생각하는 바람직한 개혁을 이끌 기회를 잡은 것이었으니.
그리고 그런 생각에도 일리가 있어, 당장 볼셰비키 외에 개혁을 완수할 세력이 없다 여기면서 계속 붙어있던 스톨리핀부터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붉은 일요일’에 함께했던 지식인들 중에서도, 이미 큰 목표는 달성했으니 지금부터는 딴길 가도 되지 않겠느냐며 저쪽에 합류하는 이들이 많았다.
“심지어 최근에 듣기로는 톨스토이 공작과 같은 명망 있는 사람들까지 저들 편으로 끌어들이겠다 하더군요. 옛날 같았더라면 꿈도 못 꾸었을 일인데...”
“톨스토이라면 그 문인 아닌가?”
“예, 맞습니다. 저도 최근 작품 몇몇을 제외한 그분 소설은 정말 감명깊게 읽었지요. 하지만 교회에서 파문까지 당한 이이기도 합니다.”
러시아 사람들이 재밌고 유려한 글을 종류 불문하고 애호함은 잘 알려진 바였는데, 일린은 그 중에서도 꽤 두드러지게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와는 별개로 톨스토이가 말하는 개혁이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성격의 것인지에 관해서는 진지한 의문을 품고 있었는데, 입헌당 쪽에서 누가 떠올린 발상이건 간에 이를 몰고서 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그보다는, 자신들의 마르크스-전 노선과 같은 ‘외국 사상’과는 대비되는, 러시아식의 사상이라며 내세우고자, 일종의 상징으로 끌어들이려는 데 가까운 듯하였다. 아무리 정정하다지만 세상 물정에 점차 어두워지고 있는 팔순 노인일진대, 그들 당수로 모시고자 떠받들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그런데 난리를 쳤을 법한 보수파 쪽이 잠잠한 것이야말로 의외의 움직임이었다. 물론 톨스토이의 파문을 주도한 포베도노스체프가 세상 떠났다고는 하지만, 분명 반발하는 소리가 여기서든, 모스크바에서든 나와야 할 터인데, 아직까지도 그러지 않고 있으니 의심할 만하였다.
“자네 말대로라면, 정말 제대로 분란이 일어날 지도 모르겠군그래. 만일 이것이 어떤 의도에 따라 이루어진 바라면, 정말 우리네 대사관이 클럽 차리는 일에 훼방 놓는 것도 관련이 있을 지도 모르겠어.”
“입증하기는 어렵겠지만, 충분히 가능성이 있습니다.”
“거 참... 세상에 쉬운 일 없군그래.”
“그러게 말입니다.”
일린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래도 행운이 아직 우리 당과 러시아를 버리지는 않은 듯하더군요. 저희 당에 의외의 재능 있는 사람이 하나 있어서요.”
“그게 누군가?”
“그리고리 라스푸틴이라고, 조금 이상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나름의 쓰임새가 있습니다. 오늘은 입궁하여 이곳 당사에는 없지만, 언제고 돌아오면 소개시켜 드리겠습니다.”
라스푸틴이 무얼 하는 자냐 묻는다면, 차르 니콜라이와 차리나는 신의 일을 하는 자라 답할 것이요, 그들 부부의 딸들에게 묻는다면 상냥하고 재밌는 아저씨라 할 것이며, 정부의 공식 입장에 따르면 그저 황실에 고용된 일꾼으로 성화 아래 향로에 불 붙이는 사람일 뿐이었다.
궁 밖으로 나와서 다시 묻는다면 가장 사악한 이단자, 가증스러운 요설로 성총 흐리는 변절자, 러시아 민중을 대변하는 자, 볼셰비키 끄나풀, 어쨌든 착하고 훌륭한 사람 등등.
사실 일린 본인도 라스푸틴이 왜 저들 모임에 계속 붙어있는지는 잘 알지 못했다. 어쩌면 정말로 그때 저들더러 회개하라며 당사에서 소란 일으켰을 적, 당의 대의를 생각하며 설득하려 노력한 것이 정말로 그로 하여금 개심케 하였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반대로 지금까지 그가 맴돌던 귀족들의 살롱보다 이곳 사민노동당에서 자신이 희구하는 그 권력을 더 많이 얻을 수 있으리라 판단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고, 심지어 털끝만한 가능성이지만, 그에게 바로 빠져들지 않는 자유분방한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에게 도리어 푹 빠졌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다만 그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이쪽에 발 담갔음은 알았기에 그것으로 족하였다.
“조선 공산당의 성공에는 국왕의 친부 되시는 분께서 후원해주신 덕이 컸지요. 우리 또한 ‘차르 폐하의 성은’에 힘입어 권력을 확고히 할 생각입니다. 행운이 다가왔을 때 꽉 부여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라스푸틴이 저를 추천해준 주교나 그의 후원자를 자처한 귀족 여인들을 저버리고 볼셰비키들과 어울린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그가 그 전까지 쌓아두었던 명성은 어디 가지 않았다. 결국 얼마 전 입궐하여 병약한 황태자와 독대하였더니 그 병증에 차도가 있게 되었다.
그 이후에도 라스푸틴은 차르와 차리나, 그리고 그들 주변의 귀족들을 맴돌면서, 얼마나 백성들이 그들 일가를 찬미하는지, 그런 선량한 백성의 뜻을 차르가 이해하고 도울 수 있도록 두마의 사람들 – 특히 ‘어떤 당’의 당원들 –이 노력하고 있다고들 하는지, 곳간을 버림으로써 오히려 채우는 차르의 그 지혜가 얼마나 위대한지에 대해 떠들고 있었다.
계속 입헌당에 눈길 주고 있는 스톨리핀이 아직도 볼셰비키에 남아서, 볼멘소리는 할지언정 개혁 정책을 계속 이어나가고 있는 것도 라스푸틴의 덕이 컸다. 그래도 이쪽에 남아야만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어나갈 수 있는 권한을 유지할 수 있다는 확신마저 없었더라면, 진작에 당적을 옮겼을 것이었다.
“물론 그런 변덕스러운 행운에만 기대기에 우리가 짊어진 대업이 너무나 막중함은 잘 알고 있습니다. 개혁에 박차를 가할수록 성과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 드러나면 그때는 결과가 우리를 대신해 말해주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그때까지만 임시변통을 위해 이름을 빌려주시지요.”
“알겠네.”
‘임시변통’이라고 하였을 때 무언가 께름칙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내일 차르를 알현하여야 했기에 잠시 생각을 접어두었다.
“지금의 상황은 기차가 폭주하기 직전 마지막 정거장에 서 있는 것과 같습니다. 행동을 취해야 합니다!”
그 무렵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다른 곳에서는 귀한 신분의 사람과 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 여럿이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그 중 블라디미르 푸리쉬케비치(Vladimir M. Purishkevich)가 일동을 대표하여 선언하였다.
“차르 폐하의 귓가에 간사한 자들의 목소리가 맴돌고 있는 한, 도저히 저치들을 막을 수 없습니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아요.”
조소와 고소(苦笑)가 반씩 걸린 입가에 잔을 가져다대며, 마치 저의 얘기 아니라는 듯 관망하는 사람은 세르게이 비테였다.
“그대들이 그토록 자랑하던 ‘검은 백인대(Black Hundreds, Chornaya sotnya)’는 이럴 때 쓰려고 있는 것 아니었소?”
자칭하기로는 ‘러시아 인민 연합’, ‘거룩한 연대’ 등등 거창하였지만, 그 실체가 어떠한지를 오흐라나와 관계 밀접한 비테가 모를 리 없었다.
“각하, 지금은 냉소가 아니라 열정이, 관망이 아니라 결단이 필요한 때입니다.”
동석한 오흐라나 국장 플레흐베(Vyacheslav von Plehve)는 목청 높이는 보수파의 거물들에게 동조하고 나왔다.
“지난날 선동당해 날뛰는 군중에게 굴복한 것은 엄연히 잘못이었습니다. 이렇게 뜻있는 사람들이 여럿 있는 줄 알았더라면, 저라도 각하께, 아니, 차르 폐하께 직소해서라도 군중을 해산시켰을 것입니다.”
“후... 그래서 어쩌겠다는 건가? 저기 사민노동당 당사에 불이라도 지를 셈인가?”
이대로 일린과 스톨리핀이 두마를 계속 점유하다시피 하면, 비테 자신이 나름대로 주도하던 산업화 정책을 온갖 핑계로 가로막을 공산이 크다는 판단에 이들 모임에 처음으로 찾아오기는 하였지만, 이 보수파 사람들에 대해서도 감정 좋지 않기는 매한가지였다.
저 볼셰비키들이 내무와 외교 양면으로 화려한 실적을 보이면서 지지를 얻어내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사민노동당이 분열되어 곧 힘을 잃으리라는 전망이, 대안 세력으로 등장한 자유주의자 연합마저도 개혁을 긍정하면서 헛된 것으로 밝혀지지 않았더라면, 이들이 저를 초청하여 동참을 권유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었다.
“그야... 필요하다면...”
“군부에도 불만 품은 세력이 꽤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포섭에 들어간다면야...”
다들 우물쭈물하는 사이, 이전부터 마음이 이쪽에 기울어 있던 플레흐베가 대신 대답했다.
“지금처럼 민감한 상황에서 폭력을 남용하다가는 자칫 감당하기 어려운 지점까지 갈 수 있습니다.”
“나도 그 부분에는 동감일세.”
비테는 그저 이 소모적인 다툼을 끝내고 하던 일을 마저 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물론 자신이 사람을 잘못 보고 일린에게 신뢰를 실어준 것이 이 모든 일의 발단이었으므로, 일말의 책임의식은 있었지만.
“하지만 지금의 상황이... 정공법으로 돌파가 가능하다고는 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어쩌자는 겐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대포가 아니라 단검입니다. 볼셰비키들이 흔들리면서도 완전히 쪼개지거나 무너지지 않는 까닭은, 결국 그들과 폐하를 잇는 불경스러운 자가 있기 때문이지 않겠습니까?”
“라스푸틴?”
푸리쉬케비치가 바로 그 자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쉿, 꼭 누구를 짚어 말하는 건 아닙니다.”
누구를 콕 짚으며 플레흐베가 말했다.
“정공법이 실패했을 때는 다른 길을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침 조선 사절단이 왔으니...”
다른 사람도 아니요, 오흐라나 국장이 제안한 발상이었기에, 다들 그럴듯하다 여기면서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마침 이 자리에 신분고하 막론하고 다양한 사람이 모였으니, 지인들까지 동원한다면 필요한 일을 수행하기 위한 사람들을 쉽게 모을 수 있을 것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 사절단이 도착한 김에 그간 여러 행정적 이유로 인해 가로막혀 있던 그 ‘대사관 클럽’ 개설 안건을 재검토한 결과, 사실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며 그간의 불성실한 직무 수행에 사과한다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당국의 통보가 대사관에 전해졌다.
마침 일린이 호소하던 정치적 갈등을 조금은 줄일 수 있는 기회라 여긴 전봉준은, 이왕 온 길에 두마의 모든 사람들과 여타 인사들을 모아 개설 기념 모임을 성대하게 열자고 제의하였다. 준비에도 나름의 기간이 필요하니, 본래 라이트 형제와 융비총국 사람들 몇몇만 가기로 했던 비행기 시연도 따라가기로 했는데, (러시아적 공간 관념으로는) 지척인 툴라(Tula)의 자기 영지에 찾아와줄 수 있겠느냐는 레프 톨스토이의 초청이 전봉준에게 전해진 것은 그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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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은 평균적인 러시아인 이상으로 문학을 좋아했고, 톨스토이 역시 – 당대의 많은 세계인들이 그러하였듯 –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기호가 혁명활동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원 역사의 러시아 두마는, ‘피의 일요일’과 러일전쟁 패배로 차르 체제에 대한 불만과 의구심이 한껏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좌우를 막론하고 온건한 중도파 - ‘10월당’, ‘입헌민주당’ 등-의 비중이 높았습니다. 그러나 니콜라이 본인의 역량 부족과 스톨리핀의 정치적 무능 등이 맞물리면서, 정치적 개혁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이는 결국 1차대전 도중 혁명으로 터져나오게 됩니다. 온건파의 등장과 연이은 실패로 불만이 누적되면서, 결국 상대적으로 소수였고 과격하였던 원 역사의 볼셰비키가 집권하기에 이릅니다.
‘검은 백인대’는 혼란스러웠던 20세기 초 러시아에서 활동했던 극우 정치조직으로, 때로는 준군사조직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각 도시별로 조직된 유사한 조직의 총칭이며, 보통은 작중에 언급된 것처럼 거창한 이름을 지니고 있었지요. 지주와 성직자, 프티부르주아부터 종교적 신념에 이끌린 노동자들까지 다양한 계층을 아우르고 있었지만, 점차 사회적으로 개혁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힘을 잃게 되었습니다.
블라디미르 푸리쉬케비치는 원 역사에서도 극단적이고 화려한 언변으로 유명했던 우파 정치인이었습니다. 원 역사에서는 그의 언행을 눈여겨본 펠릭스 유수포프가 먼저 접근해 라스푸틴 암살에 함께할 것을 제의하면서 이 역사적 사건에 이름을 내밀게 되었습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황태자 알렉세이는 당시 유럽 군주 사이에 만연하였던 혈우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생명과학 교과서에 유전의 사례로 자주 다루어지곤 하지요. 혈우병 자체는 비밀로 취급되어 알렉세이 생후 한동안 그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황태자가 병약하다는 사실은 그때에도 꽤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라스푸틴이 어떻게 알렉세이의 혈우병을 ‘치료’함으로써 차르 일가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을 수 있었는지는 지금도 미스테리로 남아 있습니다. 알렉세이에게 최면을 걸어 안정시켰다는 설이나, 의사들을 물리고 심리적 안정을 되찾게 했다는 설 등이 있는데, 개인적으로 가장 신빙성이 있다고 여기는 것은 당시 주치의들이 항응고 효능이 있는 것을 모르고 진통제로 처방하던 아스피린을 라스푸틴이 (의도치 않게) 끊었기 때문에 증상이 완화된 것처럼 보였다는 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