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떼지어 나는 기러기 (3)
정강사가 병조 아래 관아로 옮긴 뒤 몇 년이 지나면서, 그 안에서 논의되는 바도 꽤 달라졌다. 그 계기는 역시 그 자산기에 값 높이 부르기 위해, 김윤식 이하 주요 성원들의 이름을 팔았던 것이었다.
차라리 꽁꽁 병조 아문 안에 숨어 있었다면 모르겠으되, 남들 눈길 끌고자 화려하게 전면에 나섰으니, 도로 물릴 수도 없는 일이요, 국록을 허비한다며 수군대는 소리 나오게끔 방치할 수도 없었다.
하여, 부득불 『동서정세시론(東西情勢時論)』이니, 『근세병감(近世兵鑑)』이니 하는 글들을 잊을만 하면 찍어내게 되었다. 허나 이마저도 썩 좋은 소일거리는 되지 못하였는데, 근본적으로 일감이 떨어진 탓이었다.
먼저 열국의 군사에 관한 일을 정리하는 것은, 어느새 지략 있는 무관들이라면 반드시 거쳐가야 하는 곳으로 – 한 번 몸 담으면 연 맺는 고관이 여럿이었으므로 일리 있는 생각이었다 – 떠오른 정강사라, 위에서는 일별(一瞥) 하고 산삭(刪削)한 뒤 내면 될 일이었다.
그나마 『정세시론』은 김옥균이 총리로 나선 뒤 남은 셋이서 주도하여 내는 글이었는데, 그마저도 정강사 맨 위를 이루는 이들이 원체 뛰어나다보니 너무 싱거워서, 썩 좋은 소일거리는 되지 못하였다.
국제 정세를 두고 하는 말이야 대개 여러 나라가 병립하고서 세를 다투고 있다는 것 정도요, 거기에 깊게 들어가면 미리 승인받은 공안서 발 기밀을 조금 담거나, 옛 청사를 상고하여 동서고금의 유례(類例) 붙여보는 정도였다. 물론 이것만 하여도 용렬한 서생 여럿이 달라붙어야 할 일이건만, 김윤식·김홍집·어윤중 셋이 있으니 외려 너무나 금방 끝나는 것이었다.
“구주 소란한 지금도 이러할진대, 이러다가 정말 천하대란 아니 일어나면 어찌 되겠는가?”
흰 수염 멋들어지게 늘어뜨린 김윤식이, 해하(垓下) 싸움 형국이 된 마우재 장기판에서 김홍집의 항우, 아니, 상(象, 퀸)을 노리고 매복계를 꾸미며 말했다.
김윤식은 연배로 따지자면 김홍집이 아니라 최익현과 어울릴 나이건만, 마치 주안술(朱顔術) 닦은 도인마냥 정정하였는데, 묻는 사람 있으면 껄껄 웃으며 연소한 사제(師弟)들과 어울리며 사는 고로 그렇다 하곤 하였다. 물론, 김홍집과 어윤중도 이제 환갑 넘겼으니 꼭 맞는 말은 아니었지만.
“뭐, 한 바퀴 빙 돌아 옛 중추원이 다시 열리는 격 아니겠습니까? 영 한산하면 저기 해몽 선생이라도 데려오도록 하지요.”
“지금 안사람 외조(外助)에 바쁘다지 않았는가. 추거가 그리 머잖으니.”
딱히 비꼬는 말투 없이 김윤식이 대꾸했다.
전봉준쯤 되는 사람이 여인네에게 끌려다닌다며 흉 볼 사람은 이미 흉 보고도 남았고, 반대로 마자(馬子) – 그의 글 완독한 이는 조선에 여전히 드물었으나, 대개는 그 해몽 선생과 함께 존함 거론되니 퍽 훌륭한 선비이리라 지레짐작들 하곤 했다 – 의 여식 되는 분이라면 그만큼 높이 대접받음이 마땅하다 여기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한양 서부는 가뜩이나 국외인과 그 가족, 그리고 신중인 등등이 많은 곳이요, 더구나 이미 법국 사람 백래를 참의대부로 낸 바 있었으니, 승산이 적지 않았다. 당색이 자유당이었다면야 어려운 싸움이었겠지만, 이미 꽉 잡고 있는 공산당이니 무슨 거리낌이 더 있겠는가.
“그래도 이번 달 나갈 글은 꽤 보람이 있게 되었으니, 한중망(閑中忙) 고맙게 여길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 또한 옳은 말일세.”
그 보람이란, 사연이 꽤 길었다.
저의 나라 영사가 종친 – 그것도 근래 조금 총애 받았다 여길 뿐 딱히 잘날 것도 없는 – 에게 얻어맞았건만 외려 일을 벌이지 않음에 감사하고서 물러나는 일본국 대사를 보고, 영 께름칙하게 여긴 주상 귀남이었다.
몇 달 사이 그나마 ‘수척’해졌던 지아비가 도로 옛 풍채 회복한 것을 보고 어찌해야 할까 고심하던 중전 눈에 그 수심이 들어왔는데, 사정 묻고서 제의하기를 이럴 때 도움 구하려 머리 좋은 사람 모아둔 것 아니겠느냐 하였다.
거 좋은 생각이라 여기고서 다음날 경무대 행차하는 길에 마침 멀리서도 흰머리 흰수염 잘 보이는 김윤식 지나가는 것이 눈에 들어와, 굳이 부르는 수고를 덜었다.
하유하기를,
‘정강사에서 나오는 글이 근래 세인의 눈길을 끌고 있으니, 여기에 이번 일본국 영사 봉변한 것과 같은 한스러운 일이 재발치 않게끔 할 방편을 싣는다면 필히 아국 사람들은 스스로 경계하고 일본국 사람들은 안심하여 원한 품지 않게 될 것이다.’
하였으니, 간만에 정강사가 보람찬 일 한다는 것의 전말이 대강 이러하였다.
“일재(어윤중)가 늦는군그래.”
“우정(羽亭, 홍종우)에게 미리 통화하자고 기별 넣어두었다는데, 혹 기기에 무슨 어려움이 있는 것일지도요.”
어명 내리고서 세 사람이 머리 맞대고 고심해보니, 이번 일은 결국 경제의 문제였다.
조선국 자강불식은 국책으로 꾸준히 노리는 바요, 이대로 죽 각종 술기와 비법을 들여오고 나아가 창안한다면 일본국이 따라잡기는 당분간은 소원할 것이라. 서로 다른 이 경제의 운영에 서로 부딪히기보다는 돕고 시쳇말로 심본위(心本位, Symphonie) 이룰 방편 구한다면 결국 아주 열국 사이의 무역과 각국 안에서 공상 진흥하는 일에 맞닿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일에 천착하는 사람이 옛날 어윤중 아래에 있었으니, 지금은 가야산 자락에서 후학 가르치는 홍종우였다.
“엇, 저기 돌아오는 이가 일재 형인 듯합니다.”
십면매복은 아니고 삼면매복에 당하여 저의 전공 혁혁한 장기말을 잃을 위기에 처하였던 김홍집이 벌떡 일어나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곧 문 드르륵 열리면서, 무슨 종잇장 여럿을 들고 어윤중이 들어왔다.
“전도기(傳圖機, 팩시밀리)로 그림 받아오느라 다소 늦었습니다.”
“그림이라? 음, 기러기떼 날아가는 형상 아닌가.”
“예, 맞습니다. 우정도 근래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아직 세밀한 이론으로 뒷받침하지는 못하고 우선 발상한 바를 이렇게 정리하였다고 합니다.”
어윤중이 벽면의 만국전도 옆에 그 그림을 턱 붙였는데, 잘 보니 수식인지 문장인지 모를 글 여럿이 기러기 사이에 함께 날고 있었다.
“옛날, 그러니까 맥안공행 처음 문 열고 미리견 땅에서 전영(특허) 청이 막 들어올 무렵 저와 우정이 논의했던 바가 있었습니다. 아국이 비록 면포와 인삼 등으로 교역의 이익 얻었으나 그것이 오래갈 수는 없으니, 반드시 더욱 정교한 공상의 업으로 옮겨가야 하리라 하였지요.”
“결국 그대로 되지 않았는가. ‘경제개발’이 과녁으로 삼은 바가 그러하였으니.”
“그렇지요. 허나 문제는 일본국도, 그리고 종국에는 청국도 우리와 같은 과녁을 노리리라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앞서나가고서는 뒤에서 따라오지 못하게 막는 형세가 될 수 있는데, 이것을 불인(不仁)이라 여기게 된다면 이웃나라 사이에 실의(失宜)하게 되는 단초가 되겠지요.
그러나 이른바 경제학에서 내세우는 바를 상고(詳考)하면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미리견과 구주에서 술기를 들여올 수 있고, 청국이나 일본국은 그 땅덩이나 나라 안 사정으로 인해 하지 못하는 금력과 인력의 집중을 할 수 있는 조선국이므로, 어떤 새로운 물산이나 제법(製法)을 마련함은 그나마 두 나라보다 수월할 터였다.
그러나 그것이 점차 널리 퍼지게 되면, 결국 대량으로 헐하게 만드는 데 있어서는 일본국, 그리고 그 뒤의 청국에 비할 수 없으니, 이제 낡은 것이 된 제법은 그쪽으로 넘기고 조선국은 새로운 것을 들여오거나 만들어낸다.
“그러니 마치 기러기떼 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아국이 가장 앞에서 나아가고, 그 뒤에 일본국과 청국이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흐름을 의심하거나 경계하는 마음으로 어느 한쪽에서 가로막지 않는 한, 선후의 차이는 있어도 필히 아주 전체가 부흥케 될 것입니다. 이상이 저와 우정이 이야기 나눈 바입니다.”
김윤식과 김홍집이 한 번 눈을 마주치더니,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서는 돌아가며 평론 내놓았다.
“그만하면 일본국 안에서도 볼멘소리가 조금은 잦아들 듯허이. 아국이 앞서나간다 하여도 반드시 일본국이 아예 뒷전으로 밀려나라는 법은 없다는 뜻 아닌가.”
“국내로 말하자면 적어도 고균과 개화당 사람들은 많이 좋아할 이야기로군. 결국 지금과 같이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절로 수호(修好) 지켜나갈 수 있다는 뜻이니.”
“공산당이야 원래 여러 나라가 함께 나아간다는 소리를 하는 이들이고, 어쨌든 여러 나라에 공장과 제조국 흥성한다면 반대하지는 않겠지.”
“자유당도 좋게 여길 듯허이. 근래 아주가 하나되어 나아가니 어쩌니 의론 내놓고 있는데, 족히 거들 수 있는 언설 아닌가, 이... 안행론(雁行論)은.”
“다만 어찌 또 이익을 먼저 말하느냐며 면암 선생은 진절머리 칠지도 모르겠는걸.”
자유당은 이름 그대로 종심소욕(從心所欲)을 말하므로, 영국 수씨(애덤 스미스)와 상통하는 바가 없지 않았다. 더구나 그 수씨도 본디 심학(心學)하던 사람이 경세제민 법도를 구하여 그 유명한 글을 남긴 것이니 어찌 자유당과 맞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의를 위하여 이익이 쓰일 때뿐이니, 이 안행론이 올바른 도의가 아니라 그저 공상의 제법과 교역으로 아주를 이끈다 하는 것에 관해서는 크게 의심하여 비판할 만 하였다.
“암만 그럴듯한 언설이라도 남에게 드러내기 전 안에서 이론(異論) 나오면 통하기가 어렵지요. 우선 면암 선생부터 설득시킬 방편을 구해야 하겠습니다그려.”
“그야 그렇겠지. 그런데 일재, 왜 나를 보는가?”
“연배로 보면 존형께서 가장 면암 선생에 가깝지 않습니까? 이제 제가 다시 논의를 개진해볼 터이니 하실 수 있는 데까지 공박해주시지요.”
“이 사람, 그 면암 선생 손잡고 영규(영의정)까지 오른 도원도 있잖은가.”
“그러면 돌아가면서 하시지요.”
그렇게 이틀쯤 할 무렵, 일진회 사람이 무도한 짓 하였다는 이야기 뒤늦게 듣고 최익현이 헐레벌떡 입궐하여 죄를 청하였다. 정강사 경리 김윤식에게 그 ‘안행론’ 대강 들었던 귀남이 일러주기를, 이지용이 한 사람이 행패 부린 것도 허물이지만 나라 사이에 다툼 일어날 구실 방치함이 더 큰 잘못인 고로, 정강사에 명하여 이에 대응할 방책을 구하게끔 하였노라 하였다.
그리하여 다음 번 경연에서 정강사 사람들 불러다가 그 안행론을 듣기로 하였으니, 토론에서는 나이 일흔 넘기고도 여전히 서초패왕과 같았던 최익현이 이번에야말로 십면매복에 걸려들게 되었다.
“고생이 많았소.”
요즘 젊은 것들은 입맛을 다 배려놓아, 이 군밤의 진가를 벌써 몰라보고 있었지만, 최익현의 세대까지는 – 그러니까 귀남으로부터 대략 예순 살쯤 동생뻘 – 아직 이 구수함을 무엇보다 높이 칠 것이었다.
허탈함과 갑갑함 교차하는 최익현 기색을 보니 이 군밤이 딱 위로가 될 듯하여, 간만에 어제군밤을 구워 하사하였다.
“신이 미욱하여, 미진한 논의로 성총을 흐렸나이다.”
“거 무슨 말이오. 나는 그저 제경(諸卿)이 나랏일 위하여 머리 맞대고 생각 주고받는 그것이 아름답고 보기 좋다오.”
세종대왕 시절 명신 황희가 (마침내) 치사(致仕)하였을 적 – 그 과정 순탄하지 않았음이 근래 밝혀졌으나, 자칫 육조 관리의 사기를 떨어뜨릴 수 있다 하여 『실록영연』에서는 생략되었다 – 삽살개와 눈싸움하다 끝내 이기지 못하였다는 고사가 새삼스레 떠오르는 최익현이었다.
물론 평소보다 곱절은 길게 늘어진 경연에서 최익현이 지적한 바 상당수는 정강사 사람들도 이론의 흠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항상 나라의 술기가 앞으로 더 나아갈 수는 없다는 비판은, 멈추지 않도록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는 말 외에 내놓을 바가 없었고, 무명보다 모시가 귀하고 자전거보다 자동차 귀한 것은 모두가 아는데, 나라의 공상 사이 계서(階序)가 굳어진다면 반드시 질투하고 시기하는 마음 생기라는 반박도 역시 도의를 굳건히 지킨다는 원론 외에는 대응할 방편 없었다.
허나, 그러한 흠결에도 불구하고 다른 대안 있느냐 묻는다면, 최익현도 내놓을 수 있는 바가 딱히 없었다. 그가 나랏일과 경서 모두 통달한 지 오래이므로 굳이 말을 꾸민다면 꾸밀 수 있겠지만, 그렇게까지 하여 억지 대안 만들기는 최익현 본인이 원치 않았다.
그리하여 결국 정강사에서 이 안행론을 공식으로 발표할 때 최익현이 단 의의(疑義)도 향후 보완해나갈 것으로 명시하기로 하고 경연 파하였는데, 허탈한 최익현 보고 귀남이 불러세워 밤이나 먹고 가라 한 것이었다.
“그리고 일신의 지닌 재주로 따지면 보천욕일 지재가 경과 같은 이들이 셋이었잖소. 범부끼리 싸움을 하여도 일대 삼은 어려운데, 하물며 옳고 그름 따지는 언쟁이야 어떻겠소.”
물론 최익현의 허탈한 낯이, 그저 언쟁에서 밀렸기 때문이 아님은 귀남도 알았지만, 나이 먹어도 남 위로하는 재주가 그렇게 쉽게 생기지는 않으니 군밤에 의탁할 뿐이었다.
그사이, 벌겋게 달아오른 숯불은 화로 양 옆 사람의 속 따위 개의치 않고 밤을 구워내고 있었다.
그리고 달달하고 구수한 것이 목을 넘어간 뒤에야 비로소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정확히는 귀남 본인의 궁리가 아니라 민씨가 일러준 바를 그대로 돌려주는 것이었지만.
“복잡다단한 나라 사이 사정을 궁구하고자 지재 빼어난 이들 모아 정강사를 세웠으니, 그들의 궁리하는 바가 정교하여 쉽사리 논박할 수 없음은 당연지사요. 허나 그대의 스승 이 문경공(이항로)의 아호를 딴 학원이 있고, 거기서 경의 후인들이 역시 천하 이치를 고루 탐구하고 있지 않소이까? 고장난명을 홀로 서럽게 여길 일만은 아니외다.”
듣고서 마침내 깨우친 최익현이 사례하고, 생각의 마중물이 그 뒤에 쏟아지는 단물과 같지 않음을 알기에 귀남은 머쓱하게 받았다.
“막힌 바를 뚫어주시니 성은이 실로 망극하옵나이다.”
화서학원 제월당(霽月堂)은 옛 제월대에서 바라보이는 너른 공터에 양옥 형상으로 올린 큼직한 강당인데, 그곳을 가득 메웠던 인해(人海)는 최익현이라는 달이 연단 아래로 내려가니 곧장 썰물 모양새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의자의 갯벌에 남아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 면면을 살피면, 이제 몇 남지 않은, 최익현과 동문수학한 노선비들, 다음으로 조선국 전 총리이자 자유당 초대 영수에게 말이나 한 번 붙여보려는 이들, 마지막으로 금일 강연의 주제였던 ‘종횡학(縱橫學, 국제정치학)’ 새로 가르치게 된 이들이었다.
“... 그런 사정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어디 가서 얘기하진 말게. 나도 떳떳한 길로 들은 바는 아니어서.”
고시 노리다가 결국 관두고 학원으로 돌아온 이경응이, 졸지에 그의 첫 제자 된 안창호(安昌浩)에게 말했다.
결국 유인석 아래에서 박사 노릇하게 되어, 그럴 것이었으면 애초에 왜 떠났느냐며 동문들 사이에서 동정 반 놀림 반 받던 이경응이었는데, 인생사 실로 새옹지마라, 새로 학과 생기는 통에 조교(조교수)에서 교수로 바로 올라서게 되었다.
이 ‘종횡학’이란 대개 나라 사이의 정리와 도의, 그리고 그 다투고 화평하는 이치를 궁구하는 학문이 되어야 한다고 최익현은 말했는데, 이 화서학원 안에서는 여전히 최대의 전주(錢主)인 장동 김문보다도 더욱 목소리 큰 사람이 그리 말하였으므로 곧장 그대로 되었다.
물론 실제로는 나름대로 그러한 학문이 이제는 필요하다는 것을 그 『안행론』 발간에 부쳐 몇 순(旬)간 설파하였으므로 그렇게 된 것이요, 원생들 중에도 배움에 뜻 있는 이들은 그 취지에 공명하여 이 새 학과에 투신하겠다 나서는 이들이 없지 않았다.
저의 젊은 시절, 코앞 평양의 기전(箕田)에서 벌어졌던 소동을 보면서, 정말로 조선국을 조선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더 나아가 나라와 겨레를 그 나라와 겨레로 만드는 이치는 무엇인가 고심하게 되었던 안창호도 그 중 하나로, 동서고금 역사를 공부하다가 마침내 이쪽으로 옮기게 되었다.
“아닌 게 아니라, 사연 알려지면 떠들고 헐뜯기 좋아하는 이들은 고작 언쟁에서 졌다 하여 원한 품고 학문 하나를 만들었다고 하겠군요.”
“물론 설령 그렇다 한들 무슨 부끄러움 있느냐며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실 분이시지. 알지 못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 하시고 후학에게 더불어 궁구해보자 하셨으니.”
앞서 강연에서 최익현 이르기를, 이른바 ‘종횡’이란 옛 종횡가에서 따왔으나, 그 가운데 있는 것은 오직 중(中)이요 균(均)이라.
나라 사이의 사귐에, 항상 세력이 같을 수 없으니 반드시 크고 작음이 있고, 도리와 이익이 함께 같이 갈 수 없으니 반드시 갈림길에 맞닥뜨리는 법. ‘무엇이 옳은가’와 ‘무엇이 가한가’를 두고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가장 어려운 가운데 길을 노림으로써 겨우 아주 동쪽에 갖추어진 아름다운 형국이 이지러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이 학문의 뜻이라 하였다.
이를 위하여 어떤 합종과 연횡의 계책은 성공하였고 또 어떤 것은 실패하였는가, 어느 계책은 어찌하여 성사하였건만 종국에는 이루지 못한 것보다도 못하게 되었는가를 동서고금 막론하고 모두 살피어, 오늘에 필요한 바를 찾아내고 또 널리 깨우침이 이 새로운 배움의 길이라.
그러면서 자신이 처음 서장관으로 연경 갔다올 때의 그 막막함과, 법국 정란 한가운데서 보았던 소위 문명 이면의 폭력, 자유당 만들고 이끌면서 보았던 수많은 인간 군상을 논하니 한 시진도 촌음과 같았다.
“허나 바라건대는 이런 배움이 실지로 중히 쓰이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일세. 작금 천하가 안온한 가운데에 아래에 불화 번지니 저처럼 간절히 말씀하신 것 아니겠는가.”
“우선은 우리네 앞가림부터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장 내일부터 갈 길이 멉니다, 스승님.”
종횡학 가르치게 된 교수와 훈도 일동은 이리 모이라는 소리가 연단 옆에서 나오매, 스승으로 하여금 먼저 나아갈 수 있도록 몸을 비키며 안창호가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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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역사의 안행론, 즉 안행형태론(雁行形態論)이나 ‘플라잉 기즈 모델(Flying Geese Model)’로 본디 1930년대 일본 히토츠바시 대학의 신진 경제학자 아카마츠 카나메(赤松要)가 제안하였습니다. 당시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하였지만, 전후 일본이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에서 새롭게 지역 경제를 주도하면서 다른 국가들과 분업구조를 형성하는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하자 재조명을 받게 됩니다. 일본 경제의 상대적 부진과 미국 주도의 세계화, 그리고 중국의 부상으로 말미암아 다시 관심 밖으로 밀려났지만, 당시에는 아시아 내에서 새로운 형태의 지역통합을 이끌 수 있는 기제 중 하나로 주목을 받기도 했습니다.
작중에서는 아시아 경제학의 발전이 귀남의 GDP 타령 등에 힘입어 상당히 빠르게 이루어졌고, 지역 내의 경제적 연계도 훨씬 활발하고 복잡하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약 20년가량 일찍 나오게 되었습니다.
작중에 지나가듯 언급된 팩스는 의외로 전화보다도 역사가 깊습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로 넘어가는 시점에는 비록 비용과 인프라 문제로 널리 보급되지는 않았지만 그럭저럭 상용화가 되고 있었습니다. 작중 시점에서 명문대에 해당하는 노사학원과 정강사 사무실 사이에 팩스가 놓여 있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닌 셈입니다.
국제정치학(IR, International Relations)은 이미 고대부터 이른바 ‘제왕학’이나 정치철학의 일부로 조금씩 다루어져 왔지만, 그것이 본격적인 학문 분과로 바로 서게 된 것은 의외로 역사가 짧습니다. 1차대전 직후 그러한 전쟁의 참화가 발생한 원인을 분석하고 사태가 재발하지 않게끔 한다는 목적으로 구미 양쪽에서 처음으로 국제관계학 또는 국제정치학 학과들이 세워지기 시작했고, 그 중 최초는 웨일스에 위치한 애버리스트위스(Aberystwyth) 대였습니다. 작중에서는 정강사로 대표되는 엘리트 관료집단의 경세치용론에 체계적으로 대응하고 대안을 제시하려는 – 또는, 작중에 나온 대로 말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 목적으로 약 10년 남짓 앞서서 조선에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안중근과 마찬가지로 평안도 출신의 순흥 안씨지만 가계는 매우 멀리 떨어져 있는 안창호는 본디 몰락 양반 출신으로 한학을 배우던 중, 청일전쟁으로 평양이 싸움터가 되자 이에 큰 충격을 받고 상경하여 신식 문물과 기독교를 접하였습니다. 작중에서는 평양이 다른 쪽으로 이런저런 사건에 휘말리면서, 본디 가던 길인 학문에 계속 매진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