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과학자의 국경 (2)
하버가 나간 뒤, 마리 퀴리는 멍하니 자리에 앉아 책상을 보았다. 말 없는 우라늄 광석이 부러울 따름이었다.
책상 위에는 앞서 하버가 두고 간 종이쪽 두어 장이 여전히 덩그라니 놓여, 그와 주고받은 대화를 계속 상기시켰다.
“이 유독기체의 발명이 도덕적인 문제를 몰고 오는 것은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면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건가요? 과학으로 하는 살인이라니...”
“사람 죽이는 것은 이 나라에서 그렇게 열심히 만들고 있는 기관총도 마찬가지지요. 죽음은 그저 죽음입니다.”
차라리 하버의 눈동자에 광기가 이글거리고 있었더라면 마리 퀴리의 마음도 조금은 위안을 얻었으련만, 오히려 침착한 숙고만이 비치고 있었다.
“물론 부인의 전공과는 조금 동떨어져 있는 분야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이곳 연구소의 설비와 자원을 조금 빌려주신다면 부인의 이름이 저희 독일 대사관을 경유해 크라쿠프까지 전달되도록 힘쓰도록 하겠습니다. 저를 이리로 보내신 분이 다름아닌 뷜로우 총리시니, 정성껏 말을 올리면 분명 제대로 전해질 것입니다.”
“미쳤어요? 나는 그렇다 쳐도, 피에르는 엄연히 프랑스 사람인데...”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힘써주셨다는 게 더욱 대단한 것이 되겠지요.”
지난 폴로늄 일로 인해, 자신의 이름을 아는 사람들도 적지 않게 생겼을 테다. 여전히 자신이 파리에 있었더라면, 러시아와의 관계를 생각해 설령 소란이 일어나도 조용히 묻었을 테지만, 대륙 반대편 조선에서 일어난, 말하자면 남의 일이었기에 오히려 이곳저곳 해외 소식란에 실렸으니 나름 아이러니였다. 그리고 그만큼 이름의 가치도, 위험도 커졌다.
“딱히 독일과 사이가 좋지만은 않은 이곳 조선에서 그런 연구를 하고자 하는 그 대담함만 할까요?”
“공식적으로는 살충제 연구가 될 것입니다. 부인께서 시설을 협조해주신다면, 그 연구가 훨씬 매끄럽게, 그리고 안전하게 이루어질 수 있겠지요. 조선을 남몰래 해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가능한 범위 내에서 애국의 길을 찾는 것뿐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과학자도 사람이고, 사람은 어딘가에 속해야만 합니다. 저는 제가 속한 나라를 위해 힘쓰고자 할 뿐입니다. 부인께서도 폴란드를 항상 마음에 두고 계시기에 고민하시는 것 아닌가요?”
“그만.”
“독일은 평화를 원합니다. 독가스도 아무리 흉악하고 혐오스러울지언정 평화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얼마 전 카이저가 언론을 통해 직접 천명한 바이기도 했다.
지난 알헤시라스 회의 이후 벨기에의 늙고 병든 국왕 레오폴 2세가 중립을 버리고 비밀리에 독일 편으로 돌아서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던 것이다.
물론 어떤 대국적인 판단보다는 영국과 프랑스에 대한 원한에 따라, 반쯤 노망난 채로 펜을 놀린 것이었고, 조금씩 말이 새어나가자 사실상 국정을 대신 돌보고 있던 그의 조카 알베르와 내각이 진화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지만, 콩고 문제로 시달렸던 국민들 사이에서는 오히려 늙은 왕이 마침내 정신을 차렸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었다.
이 틈에 확실히 한쪽으로 확실히 저울추를 옮기고자, 빌헬름은 독일은 급변사태가 없는 한 결코 군대를 먼저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하면서, 오히려 반대편 프랑스야말로 도박에 가까운 전략으로 국민과 인접국들을 모두 위태롭게 하고 있는 것 아니냐며 비난했다.
프랑스는 기욤(빌헬름) 저치가 혹시 ‘엘랑 비탈’ 교리와 작전계획을 입수하고서 하는 말 아닌가 하여 시끄러워졌고, 독일 군부에서도 기껏 입수해둔 프랑스군 작전계획이 무용지물 되는 것 아니냐며 볼멘소리가 나왔지만, 카이저의 정부가 정말 문명과 평화의 편인지 내심 반신반의하며 애국의 명분을 찾던 독일의 지식인들에게는 이만한 ‘증거’가 없었다.
“그만하라고 했습니다.”
“네, 부인. 죄송합니다. 하지만... 부디 재고해주시지요.”
죄송하다는 말과 재고해달라는 말 모두 진심 담겨있어 오히려 듣는 이 마음을 무겁게 하였다.
“저기... 실은 이렇게 노트로 정리해두고서 가지고 있었습니다. 혹시 생각 바뀌시면 한 번 읽어주십시오.”
혹시나 테슬라 주변에 놓았다가 들킬까 두려워 항상 지니고 다니는 공책에서 두어 쪽을 북 뜯어내며 하버가 말했다. (대사관에서 나온 사람에게 전해주고자 어깨너머로 본 테슬라의 수많은 구상들 중 군사적인 함의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옮겨적어둔 것이었는데, 하버 본인의 구상도 꽤 들어 있었다.)
“아, 보시면 아시겠지만 우라늄은 ‘그것’과 관련 없습니다. 제 제의에 어떻게 마음을 정하시든, 우라늄은 저희 쪽으로 보내주십시오.”
그리 말하고서 하버는 사라졌다.
“후... 피에르...”
그 빈자리를 보며 마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남들이 폴란드인이라고 꺼려하거나 부담스러워할 때, 그리고 터럭만큼의 주저 없이 그런 우려와 부담이 거짓이 아니라며 저의 조국 생각을 떳떳이 밝혔을 때, 외려 저를 보듬아주고 아껴준 사람이 피에르였다.
과학에 대한 사랑과, 사람에 대한 사랑, 조국에 대한 사랑이 모두 하나로 묶일 수 있다고 믿는, 나이 먹어도 변치 않는 순수함이 아름다운 사람.
그러나... 하버의 말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무기로 쓰이기 위해서는 그 유독기체는 공기보다 무거워야 할 것이다. 풍향과 지형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니, 정해진 위치에서 방어자가 공격자에게 사용하는 무기가 될 수밖에 없으리라는 결론은 마리의 일천한 군사적 식견으로도 금방 내릴 수 있었다.
물론 당하는 쪽은, 일전에 가족과 함께 소풍 삼아 근처 산의 불교 신전에 찾아갔을 때 보았던 그 지옥도와 같이 될 테지만.
그때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문득 밖에서 까르르 하는 아이 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의 본능으로 금방 식별한바 이렌도 아니요, 에브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 부부를 제하고서 격치물성청에 아이를 데려올 수 있는 다른 사람이라면...
“자, 여기가 아빠 일하던 곳이란다.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이 예전엔 다 아빠 아랫사람... 억.”
무등 태운 색동옷 입은 여자아이와 대비되는 양복 차림의 청년은 – 엄연히 따지면 퀴리 부부의 상관은 아닌 – 안양대군이었다. 자신이 앞서 교남으로 나가는 것을 보고서, 지금이라면 청사 안의 굵직한 사람들은 모두 부재중이리라 여기고서 이러고 다니는 것일 테다.
“험험. 일찍 돌아오셨구려.”
아이를 내려놓으며 안양대군이 급히 둘러대었다.
“얘, 인사드려라. 이분이 그, 조선소(朝鮮素, 조소늄)에 이름 붙이신 귀씨 부인이시란다.”
‘안녕하세요’ 하며 고개 꾸벅 숙이는 이는 대군의 딸일 테다. 주변에서 항상 영어와 프랑스어만 쓰기에 생활회화 정도로만 늘어난 조선말로도 대충 돌아가는 판은 알 수 있었다. 딸 생각에 번민이 잠깐 가셔서 – 해맑은 아이 얼굴 보고서 낯을 찡그릴 수 있겠는가? - 잠시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그, 아버지 일하시는 곳 구경을 하고 싶다고 해서... 어린아이, 그것도 여자아이를 융비총국이나 그런 곳에 데려갈 수는 없는 노릇이잖소.”
아이 못 알아듣게 급히 영어로 사설 붙이는 안양대군이었다.
데려가려면 데려갈 수야 있겠지만, 돌아온 뒤 대군의 일신이 건승하지는 못할 것이다. 물론 퀴리가 듣기로 – 한양 사는 외국인들끼리 모이면 가십으로 나오는 것 중 하나가 왕실 이야기였다 – 그의 아내가 남편을 직접 괴롭힐 성격은 아니었지만, 부부 사이의 군략(軍略)이 어디 말다툼만 있던가.
그리고 민망함이 가실 무렵, 현주(縣主)의 얼굴 보고 조금 풀린 기분도 목전의 일로 인해 도로 상했는데, 그제야 마리 퀴리의 기색이 평소와 같지 않음을 깨달은 대군은 잠시 현주에게 나가 있으라 하였다.
“‘어른들 일’이라고 하면 조용히 나가서 혼자 가만히 있는 것이, 얼마나 대견하고 기특한지... 아, 그 얘기가 아니라. 무슨 일이라도 있소?”
‘별 일 아닙니다’라고 답하기 위해 떨어진 입술 사이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공연히 닫혔다 열리기를 몇 번.
하버의 제안이 귓가에 어른거렸다.
그 폴로늄 하나를 제하고서, 그가 여기서 조국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처음에는 그저 그러려니 했지만, 한 번 생각에 불이 지펴지니 계속 뇌리를 맴돌았다.
명분과 도덕을 내세우는 조선국이라지만, 챙길 명분은커녕 국경조차 남지 않은 폴란드에게 도움은 되지 않을 것이었다. 남편과 언쟁할 때 말한 것처럼, 이곳 조선에 남아있다면 전화(戰禍)는 반드시 비켜가겠지만, 반대로 무어라도 해볼 여지도 전혀 없을 것이다.
차라리 하버를 도와 유럽의 정세에 한쪽 발이라도 걸쳐둔다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꼭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 해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나누어 가진 옛 폴란드령만 해도 결코 작지 않다.
공백이 길어질수록 안양대군의 얼굴에 서린 걱정과 궁금함도 짙어졌다. 그러나 지금 하버의 계획을 발설한다면, 기회도, 신뢰도 다시 돌아오지 않을 터.
“실은...”
“실은...?”
그러나, 이 무정한 세상에서 이해와 무관하게 편 들어주는 나라가 하나 있다면 그나마 조선일 테다. 주기율표에서 폴로늄과는 물음표 세 개를 두고 떨어져 있는 조소늄처럼.
정말로 독일과 조선 중 하나를 믿어야 한다면 어디를 믿겠는가? 잠시 눈 질끈 감고 질문을 그렇게 꼬아보니 마침내 답이 나왔다.
“혹시 하버 씨가 유독성 기체로 실험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는지요?”
테슬라가 쓰는 공방은, 근래 그 라디오가 유럽에서 크게 성공한 이후로 그 세르비아인 영감 마음이 온통 그쪽에 쏠리는 바람에 요새 텅 비어있기 일쑤였다. 그만큼 하버의 정신 건강에는 좋은 일이었지만.
마리 퀴리로부터 답이 오면 어떻게 작업을 진행할까, 곰곰이 향후의 일을 생각하고 있는데 ‘테슬라 특허 출입 기록/증명장치 (미완성)’의 종소리가 울렸다.
“아, 대공 저하.”
“거 위험한 기물을 만들고 있다 들었소.”
하버는 단도직입 물음에 깜짝 놀랐다. 그러나 이곳 속담으로 호랑이에게 납치당해도 이성 잃지 않으면 살 수 있다 하지 않던가.
결국 퀴리 그 여자가 저의 제의를 거부한 모양이었다. 그 단견(短見) 아쉽게 여기는 것은 우선 제쳐두고, 정공법으로 전환할 때였다.
“그렇습니다. 본래 제 조국 독일을 위해 고안하고 있던 것인데, 원하신다면 암모니아의 합성에 이어 여기에 있어서도 협력하도록 하겠습니다.”
소령으로 진급하여 본국으로 영전하기 전, 에리히 레더가 신신당부하기를 – 그 또한 본국에서 절절히 받은 당부의 말이라 하였다 – 어지간하면 조선과 직접 엮이지 말라 하였지만, 저쪽에서 먼저 와 엮이기를 청하니 어쩌겠는가.
“그, 아국에 와서 몰래 딴짓하던 것인데 무어라 변명할 생각은 없소?”
“무슨 부끄러움이 있겠습니까? 이 독기는 얼핏 생각하기에 흉악하기 그지없는 것으로 여겨질지 모르지만, 결국 무기란 사람 쓰기에 달린 것입니다. 오히려 그 참혹함이 널리 알려지면 세상 여러 나라들이 침략전쟁을 벌이기 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겠지요.”
“아니, 그것도 그렇지만... 나라 사이 신의가 있는데, 미리 한두 마디라도 했어야지 않소?”
“조선에서 쓰는 말로 ‘진충보국’하는 마음은 어디나 같으니, 저 또한 나라의 덕을 입은 사람으로서 마땅한 일을 할 뿐입니다. 그리고 사람에게 쓸 수 있도록 개량할 마음을 먹기는 했지만, 아직까지는 그저 벌레 죽이는 정도의 독만을 만들었을 뿐입니다. 귀국의 아름다운 이름에 누가 되지는 않겠지요.”
즉 이 일을 트집삼아 그의 조국에게 무어라 할 생각은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의외로 당당하게 저의 ‘혐의’ 인정하면서 되려 고개를 드니, 안양대군이 오히려 할 말이 없어졌다.
머리 긁적이다가 문득 떠올라 물었다.
“그런데... 이 독기를 조제한다면 정말 효험이 있기는 하겠소?”
하다못해 그리도 유독하다는 조선소(조소늄)도, 녹화회에서 쥐에게 먹였더니 죽는 데까지 꽤 오랜 시일이 걸렸다지 않던가. 물론 극미량이라도 한 번 중독되면 몇 달 내로 죽는다 하니 유독하다는 경고가 무색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병기로 쓰기에는 영 곤란한 물건이었다.
“제 계산대로라면, 전장의 균형을 대번에 뒤바꿀 수 있는 물건입니다.”
조선도 나라인 이상 – 그것도, 그토록 군비를 중시하는 나라인 이상 – 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큼 귀한 물건이라면, 하버가 조선 국왕이라도 동맹국에게 쉬이 넘겨주려 하지 않을 것이었다.
물론, 조선이 이 말에 넘어와 독가스도 암모니아와 함께 공동으로 개발할 것을 청한다 하더라도, 곧이곧대로 유독한 물건을 넘겨줄 생각은 없었지만.
“허, 그렇다면 마땅히 궐에 알려야 하겠구려.”
한편 안양대군으로 말하자면, 하버의 호언장담에 떠오르는 사람 계신즉 단연 아버지 주상이었다.
“그리 하시지요.”
곧 덕국인 하버가, 그의 말대로라면 싸움의 묘리를 능히 얻게끔 할 수 있는 무시무시한 병기를 고안하려 한다고 안양대군이 직고하니, 심란함을 겨우 다스리던 마리 퀴리에게 국왕이 하버의 제의를 듣고 참으로 기뻐하며 그로 하여금 곧장 입궐케 하였다는 소식 들려온 것은 그 다음날이었다.
허나 자신있게 들어섰더니, 자신이 처음 입국하였을 때 접견하고서 처음 보는 조선 국왕의 표정이 영 좋지 못하였다.
“혹시... 그, 무기의 도덕성 문제 때문에 저러시는 것인지요?”
통역에게 물으니 곧 몇 번 말이 오가고서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이르시기를, ‘고안하는 지모에 다소 부족함이 있는 듯하니 더욱 힘쓰기를 바라노라’라 하시었습니다.”
“예?”
하버가 한 번 부풀리고 안양대군이 두 번 부풀린 보고를 듣고서, 올 것이 왔구나 – 왜놈들을 두 방에 무너뜨린 그 폭탄이, 설마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진 않았을 테니 몇십 년 전부터 조짐이 있지 않았겠는가 – 싶었던 귀남은 팍 기대가 식었던 것이다.
하여, ‘어디 이런 것을 두고 싸움의 향방 운운하느냐’ 하는 말을 수십 년 관록으로 뱅뱅 꼬아 말했는데, 그것이 다시 전해지자 하버가 부끄러워하는 대신 ‘네가 말 잘못 전한 것은 아니냐’ 하는 표정으로 역관을 보는 것 아닌가.
그제야 다른 생각이 퍼뜩 났다.
‘내가 제대한 지도 오래되어 정말 중한 것을 깜빡하였구나!’
군에 있던 시절, 어지간한 총이나 대포보다 훨씬 귀하였던 물건이 있었다.
곧 다시 말이 몇 차례 오가고, 하버에게 말이 전해졌다.
“혹시 그것으로 쥐나 벼룩도 잡을 수 있느냐고 하문하시었습니다.”
기대하던 그것은 아니었지만, 옷에 두어 번 머리통에 한 번 뿌리면 근 한 달은 족히 온 몸이 시원하던 – 그 뒤로 언제부턴가 없어져버리고 다른 것이 나왔지만 – 디디티 정도라면 충분히 쓸모있는 물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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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율표에서 폴로늄과 라듐 사이에 있는 원소들(아스타틴, 라돈, 프랑슘)은 작중에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라돈이 라듐과 공기중 기체의 반응으로 생기는 화합물이 아닌 비활성기체 원소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1909년이었습니다.
프리츠 하버는 원 역사에서도 열렬한 애국주의자였고, 자신의 발명이 조국에 이바지한다는 데 큰 자부심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필 태어난 곳이 독일이었던 것이 비극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는 개전 직후 독일의 전쟁범죄를 부인하고, 개전의 모든 책임은 협상국에 있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독일 지식인들의 공동성명인 ‘93인 성명서’에도 서명하였고, 이후 화학전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합니다. 처음으로 독가스가 사용된 제2차 이프르 전투에서는 직접 전선에 나가 독가스의 ‘효능’을 확인하기도 했지요. 이 무렵 반전주의자였던 하버의 아내 클라라 이머바르는 하버와의 말다툼 끝에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전후 다시 국영 화학연구소(카이저 빌헬름 물리화학·전기화학 연구소. 현 프리츠 하버 연구소)로 돌아간 하버는 독일의 부흥을 위해 화학 연구를 계속했는데, 이 과정에서 잠시 해수에서 금을 추출하는 것 같은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등 열정이 지나쳐 엉뚱한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비극은, 19세기 말부터 독일 내에서 종종 쓰이던 시안화물 농약을 생산과 사용이 편리하도록 개량한 것이었지요. 그와 연구진이 개량한 농약의 이름은 바로 치클론 A(Zyklon A)로, 그의 사후 치클론 B로 재차 ‘개량’되어 2차대전 중 가장 끔찍한 방식으로 오용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