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285화 (285/320)

94. 과학자의 국경 (1)

테슬라는 이용익과 함께 방음기 만들어 파는 재미에 빠졌고 – 의외로 영국이나 프랑스에서는 매상이 부진한 가운데 독일과 러시아에서 주문이 많이 들어왔다 – 호조도 마침내 일감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 일감 줄어든 사정은 꽤 파란만장하였는데, 몇 번 이야기했건만 끝내 제자리로 돌아오더라 하는 이야기 들은 귀남이 ‘거 참 안쓰럽다’ 하고서는, 호조의 젊은 관원들 윤대(輪對)에서 이름이나 관직 언급된 다른 아문 사람들과 군신의 정의(情誼) 가득한 한때를 보내었던 것이다.

그런 자리에서 대개 이르기를, 호조가 바빠진 것은 열에 아홉이 저의 발상에서 나온 것인데, 이로 말미암아 같이 국록 받는 처지에 누구는 바쁘고 누구는 한가롭다면 이 또한 탕평의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라.

주상이 친히 누구를 어여삐 여겨 사사롭게 업무를 줄여주거나 하는 것은 국제의 큰 뜻에 맞지 않지만, 백관에게 두루 일을 맡기는 것은 엄연히 국제 첫머리에 있는 이치였다. 그러므로 모두 공평하게 바빠지면 될 일 아니겠는가 하유하니, 한 번 그런 이야기가 나오기 무섭게 그 다음부터는 자리에 들자마자 곧장 자신의 아문을 이러이러하게 개선하여 폐단 없애겠노라 단언하였다.

(연후 어윤중이 다분히 아쉬운 낯으로, 조금 일찍 힘써주시지 그랬느냐는 말을 배배 돌려서 아뢰었는데, 귀남도 딱히 할 말이 없어 그저 군밤이나 구워줄 따름이었다.)

좌우지간 그런 곡절 끝에 마침내 도성에 화평 돌아왔으니, 구주에서는 열방이 마침내 다시 드러난 큰 균열을 두고 어느 편에 설까, 합종연횡(合從連橫)으로 바람 잘 날 없다지만 이쪽에서는 알 바 아니었다.

구중궁궐 정강사에서 무슨 논의 오가는 줄 모르는 여항의 백성들이, 이대로 구주에서 전란 일어나면 필히 그 틈을 타고 조선국 공상(工商)이 웅비할 것이니, 어느어느 양행 식주를 지금 사두어야 한다 운운하며 얘깃거리로 삼는 것이 그나마 관심의 일부랄까.

개국 오백십칠년(1908) 참의대부 추거를 노리고 있는 엘러노어 마르크스에게는 그마저도 사실 그렇게 중한 상황은 아니었다.

“이게 시제품인가요?”

“네, 보시다시피, X선 촬영에 필요한 장비는 모두 적재되어 있답니다.”

주문한 차량이 나왔다는 소식에 이곳 교남의 창고에 찾아온 것은, 추거 준비의 일환이었다. 괜찮은 물건이 나온 듯하여, 마리 퀴리에게 흔치 않은 미소 지어주는 엘러노어였다. (가뜩이나 매부리코 두드러진 인상이 늙으며 더욱 사나워진 엘러노어였다. 남편 전봉준이야 늘 좋다고 하지만.)

“이대로 일곱 대만 더 부탁합니다.”

그들 눈앞에 있는 것은 요새 서서히 늘어나고 있는 하물차(화물차)였는데, 뒤에 짐칸 대신 쇠로 벽과 지붕을 세우고는 그 안에 전기 설비를 해두어 적재된 장비로 X선 전신촬영을 가능하게 해 두었다.

“네, 나오는 대로 확인해서 알려드릴게요.”

기실 차 만드는 것도, X선 촬영기기 제작하는 것도 마리 퀴리의 일은 아니요, 오직 제대로 된 물건이 나왔는가 검수하는 것이 전부였다. 돈벌이에 재미 붙인 테슬라와는 달리 – 이 X선 기기도 얼마 전 확장한 그의 공장에서 나왔다 - 퀴리 부부는 방사선으로 무슨 경제적 이득을 얻을 생각은 없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가 한사코 권하여 여기 오게 된 것이었다.

“저기, 그런데 한 가지 여쭈어도 될지요?”

“말씀하세요.”

“왜 꼭 저인가요? 방사능의 위험성이야 저 녹화회에서도 충분히 검증 가능하고, 테슬라 씨도 조금... 속물적이기는 하지만 분명 능력이 있는데요.”

“퀴리 부인의 이름을 널리 알리기 위함이지요. 우리 공산당도 부인의 명성에 조금 편승해볼 생각입니다.”

“어... 네...”

“좋은 게 좋은 거니까요. 후훗.”

딴에는 사람 좋게, 그러나 저기 독일의 로자 룩셈부르크 같은 사람이 보았더라면 ‘매부리코 마녀는 내가 아니라 저 사람이요’ 할 만한 웃음을 지으며 엘러노어가 답했다.

X선, 조선에서 부르는 말로는 예(乂)자선 유행이 바람처럼 지나간 지 두어 해쯤 지났지만, 아직 군현에는 그런 해괴한 물건이 있다 정도로만 아는 이들이 많을 것이었다.

처음 이 예자선으로 재미 본 사람은 다름아닌 개화당 박영효였다. 그의 집안에서 운영하는 유서깊은 요체원(療體院)은 본디 환재대감 박규수가 요치원으로 시작했던 것이 점점 번영하여 온 몸의 병이란 병은 다 돌보게 되었는데, 그 중 접골(接骨)도 업으로 삼다 보니 자연스레 이 예자선 기기를 들여오게 되었다.

그 반응은 대개 서양과 비슷하여, 요사한 물건이 들어와 사람 속을 다 들여다본다는 소문이 돌면서 크게 민심이 놀랐는데, 적어도 잔머리는 유명한 선대(先代) 닮은 박영효가 선제적으로 광고 싣기를,

‘증자께서도 만년에 손발을 펴보라 하시며 「소민(小旻)」 구절을 읊으셨으니, 이는 효도의 큰 뜻이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살갗의 온전함만을 효로 알고, 정작 내장과 근골의 부실함은 알지 못하니, 어찌 이것이 개화한 사람의 생각이라 하겠는가? 물려받은 뼈 이백 하고도 여섯이 모두 온전함을 밝히고자 하는 그대여, 예자선 아래 서라!’

하여 쏠쏠한 소득을 올렸던 것이다.

“다음 선거에서든, 그 다음에든 꼭 여성 선거권을 확립하는 것이 우리 공산당의 목표거든요. 아직도 시골에 가면 ‘어딜 여자가 감히’ 어쩌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여기서 촬영하고 난 뒤에 이것이 바로 부인의 손을 거친 물건이라 하면 생각이 조금은 바뀌지 않겠어요?”

그만큼 귀씨부인 마리 퀴리의 이름값이 꽤 높은 덕이었다. 물론 처음으로 발견했다고 이름 남긴 사람은 노씨권학상까지 받은 저 뢴트겐(Wilhelm C. Röntgen)이지만, 어쨌든 퀴리 부부의 연구도 이쪽과 관련이 아예 없지는 않았으니 그렇게까지 억지도 아니었다.

“여성 참정권이요? 조선 정치에 개입할 생각은 없는데...”

“하하, 주저하지 마셔요. 이건 질 수 없는 싸움이니까.”

처음 자신이 조선 땅을 밟았을 때, 인천 부두에서 그 불한당 뺨을 시원하게 갈겨준 이래로 확인한바, 지금 조선에서 부동의 권위를 지닌 지존 국왕의 뜻은 확고하였다. 아래에서 문제삼고 나선다면, 보나마나 지지해줄 것이요, 이미 남편 전봉준이 총리 하던 시절 은근히 탐문한바 과연 안건으로 여성 참정권을 내걸면 성공은 따놓은 당상일 것이었다.

지금 국법에 여인의 출사(出仕)나 추거단자 쓰는 것을 딱히 금하지는 않고 있으니, 길 막는 것이 있다면 나라 안의 통념이 하나요, 그 자격인 향시(鄕試)가 또 하나였다. 여학(女學) 나온 사람들로 벼슬 욕심 내는 이들은, 대개 그 보이지 않는 벽을 넘어 고시를 치르려 하는 대신 여인들 당당하게 들어가는 명부사 자리를 노리기 마련인데 – 이쪽 취재(取才) 또한 나름대로 어려웠기에, 들어온 젊은 궁인들은 자부심이 있었다 – 향시는 또 이야기가 달랐다.

지난 두 내각을 거치며 향시의 과목은 서당과 함께 조금씩 바뀌어, 경의(經義)뿐 아니라 여러 과목을 보게 되었다. 물론 난도는 꽤 낮추어야 했기에, 지금도 참의원에서 종종 논쟁의 대상이 되곤 하는 선안(選案, 선다형)을 시범적으로 채택하고 있었다. (어찌 저것을 배움 시험하는 척도로 삼느냐 하는 것이 논쟁의 핵심이었는데, 그 뒤에는 저들 보았던 고시나 향시에 비해 너무 쉽다는 억울한 심정도 적잖이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다 보니 점점 서당에서 가르치는 바와 여학에서 가르치는 바가 겹치면서 자연스레 향시도 여학생들이 풀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처음에야 여인의 몸으로 배움 힘쓰는 것이 기특하다면서, 따로 시험 보게 하는 등 장려했지만, 지난해에는 응시자 비율이 무려 십육대 일에 이르면서 이대로는 안 된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여사(女士) 나옴에 무슨 가타부타할 것 있느냐며 목청 높이는 이들, 아무리 그래도 남녀유별이라는 이들 등등이 자유당과 개화당에서 각각 갈렸는데, 유독 공산당은 당론이 거의 하나로 묶였으니, 전봉준이 총리 나선 이후 당무 이어받은 –그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 엘러노어 덕분이었다.

“항상 남들보다 먼저 엉뚱한 일 벌이는 조선국인데, 여성참정권에서는 저기 핀란드에 한 발 밀렸단 말이지요. 얼른 앞서나가야...”

영국의 서프라제트(여성참정권 운동가)들이야, 결국 부르주아적 자유주의에 찬동한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지만, 정당 가운데 공산당이 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는 것이 엘러노어의 결론이었다. 간혹 편지 주고받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콜론타이도 찬탄할 해법이었다.

그런데 핀란드 얘기를 하니 마리 퀴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제야 ‘아차’ 하는 생각에 얼른 말을 덧붙였다.

“흠흠, 미안해요. 예민한 이야기를 해서...”

“괜찮아요.”

1905년 시위 이후에 마침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두마가 세워져, 사회민주노동당이 당당히 한 자리 차지한 이후, 저들 땅에도 자치의회 세우도록 해달라는 청원이 하나씩 올라오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선례를 따라 차르의 마음을 노려 온갖 아첨을 덧붙인 청원의 발신지를 보면 첫째가 바르샤바요 둘째가 헬싱키였는데, 핀란드 대공국에 의회 개설을 허용한 지 한참 지난 지금도 폴란드 쪽에는 답이 내려가지 않고 있더랬다.

제2의 고향 파리와 제3의 고향 한양에서 지내면서도 고국을 잊지 못하는 마리 퀴리, 아니, 스크워도프스카에게는 마음아픈 일이었다.

“혹시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이래봬도 아직 유럽에 꽤 끈이 남아있답니다.”

“네, 고맙습니다.”

미안한 마음과 민망함에 엘러노어는 얼른 자리를 옮겼다.

오늘은 강의가 따로 없는 날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배움에 끝은 없고, 밝혀야 할 진리는 많은 고로, 교남에서 다시 자신의 애마 ‘바르샤바’를 타고 격치물성청으로 향했다.

요새는 늘 그렇듯, 슬슬 퇴청하는 사람들 생길 무렵이라 그런지 대교가 병목처럼 콱 틀어막혀 있었다. 한강에 다른 대교를 만들자는 이야기가 솔솔 나오고 있었는데, 과연 두 번째 대교를 볼 때까지 그가 여기 한양에 머물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간만에 인천이나 재령 쪽에서 불어오거나 한양에서 스스로 만드는 매연 대신 상쾌한 북풍이 불어와, 맑은 하늘이 보였다. 그에 화답하듯 밝게 넘실대는 한강이 오늘은 그리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지난해 남편 피에르가 크게 다친 것도 소나기 내리고 화창하게 갠 날이었다. 보도의 포석에 미끄러져, 지나가는 자동차에 부딪혔는데, 그 후유증으로 아직도 다리를 절고 있었다. (피에르 말로는, 만일 마차였더라면 훨씬 크게 다쳤을 것이라고 했는데, 그리 위안이 되지는 않았다.)

처음 조선에 왔을 때 딸 이렌을 낳았다. 그 꼬물거리던 아기가 어느새 꼬마 과학자가 되어, 툭하면 엄마 아니면 아빠 따라가겠다며 투정부리게 되었으니 세월이 빠르다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사이 자신에게도 많은 일이 있었다. 그 폴로늄 사건 이후로 제게 따라붙은 이목은 차치하고라도, 남편과의 사이가 조금씩 갈라지기 시작했다. 이렌의 앞날 때문이었다.

피에르가 조금 나아서, 지팡이 없이도 걸어다닐 수 있게 되었을 무렵이었다.

‘아무리 조선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고 하지만, 우리 딸들의 미래를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가정교사 말로도 이렌은 정말 뛰어나다고 하는데...’

‘그렇지만, 잘못하면 전쟁 한복판으로 들어가는 것 아닐까? 기껏 아시아로 왔는데...’

‘여보, 생각해봐. 정말 전쟁이 일어나겠어? 그리고 만약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끽해야 국경에서 한두 달 싸우고 휴전을 하겠지.’

물론 자신과 딸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저렇게 말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글쎄. 프랑스를 예전처럼 사랑하고 있는가 하면 자신도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유럽의 정세가 급변하면서, 그의 조국 폴란드도 다시 풍운 한가운데 놓이고 있었다. (지금 유럽의 소국들 치고 풍운에 휩싸이지 않은 나라라면 사실 스위스 하나 빼면 없을 것이다.) 빈에서는 폴란드까지 아우르는 대연방국을 만들자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나오고, 독일에서도 – 물론 반독 정서를 자극하기 위한 과장이 섞였겠지만 – 과거 폴란드 대분할로 삼킨 땅을 제외한 나머지 영역에서 폴란드가 재건되는 것을 찬성한다는 말이 나온다 하였다.

물론 그 선정적인 보도가 사실이라 해도, 카이저가 순수한 마음으로 폴란드를 위해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설령 이름뿐인 독립이라 하여도 아예 그 독립조차 빼앗긴 입장에서는 아쉬울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더구나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적어도 카이저보다는 진심인 듯했다. (합스부르크 깃발이 날리는 크라쿠프에서 제국의 후원 하에 독립군을 조직하고 있다는 유제프 피우수트스키(Józef Piłsudski)가 ‘자랑스런 동포’에게 편지를 보내 지지를 구하기도 했다.)

과연 반대편,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가 폴란드의 독립을 지지할까? 그 동안 문명세계의 선두를 자처하던 영국조차, 점차 독일의 추격 앞에서 밀리기 시작하자 그 해법으로 식민지에 새롭게 재갈을 매려 하고 있었다.

물론 그렇게 폴란드의 편을 누가 들어줄까를 두고 가르게 되면, 이 조선도 프랑스의 동맹국이니 떠나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오스트리아령 폴란드로 가자니, 남편 피에르를 설득시킬 자신도, 그 뜻을 억지로 꺾어 끌고 가고픈 마음도 없었다. 미래가 창창할 두 딸이 눈에 밟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격치물성청은 건물이 공식적으로 세워진 지는 얼마 되지 않아, 자동차 댈 곳이 떡하니 있었다. 주차하고서 내리니, 익숙한 얼굴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 부인. 좋은 오후입니다.”

독일에서 온 프리츠 하버는 다리 불편한 남편 피에르를 도우러 종종 이쪽에 들리곤 했다. 피에르가 혼자 걸어다니게 된 뒤에는 다시 테슬라를 쫓아다니고 있을 텐데, 이렇게 찾아온 데는 필히 이유가 있을 터였다.

물론 꼭 이유가 있을 필요는 없었다. 옆에서 함께 있기에는 ‘괴짜 니콜라’보다 피에르가 훨씬 좋은 말동무였고, 하버 역시 뛰어난 언변으로 항상 주변과 잘 어울리는 밝은 성격이었으니 – 과학자 중에서는 특히 드문 자질이었다 – 퀴리 부부에게도 하버는 그 목석같은 독일 사랑만 조금 접어두면 나쁘지 않은 친우였다. (특히나 조선에 온 두 해 사이에 부쩍 후퇴한 이마는 그가 얼마나 테슬라에게 시달렸는지를 입증하는 증거라고, 동병상련의 정신으로 피에르는 하버를 감싸곤 했다.)

“실은, 이번에 조소늄과 폴로늄 생산과 관련해서 새 산지를 구하셨다고 들어서 찾아왔습니다.”

“평산(황해도 평산군)의 광산 말씀이신가요?”

“예, 듣기로 무연탄 광맥에 우라늄이 혼입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해서 말입니다. 제가 ‘테슬라 씨의 도움을 받아’ 연구하고 있는 공정의 촉매를 바꾸어 새로운 공정을 모색해볼 생각입니다.”

그 고약한 세르비아인이 끝내 저의 이름을 붙인 ‘테슬라-하버’ 공법은 그에게 넘겨주고, 소소한 개량을 마쳐서 제대로 된 ‘하버 공법’을 몰래 본국에 보내줄 생각을 하고 있던 하버였다.

“뭐, 그 정도야 언제든 협조 가능한 부분이지요. 지난번에 염소(Cl)로 무언가 해보시려고 했다는 것은 잘 안 되었던 모양이네요?”

“하하, 염소는 이것과는 다른 일로... 엇.”

편하게 여겼기 때문일까. 말실수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목소리가 입술을 떠난 뒤였다.

“무슨 일 말씀인가요? 그 질소 고정 외에 따로 하고 있는 연구가 있었나요? 화학적인 것이라면 도와드릴 수 있는데...”

우물쭈물하던 하버가 결국 마음을 정했다.

“실은... 화학물질을 이용한 무기를 개발하고 있었습니다. 비슷한 발상을 테슬라 씨의 작업실에서 보았거든요.”

“잠깐, 염소... 무기... 제가 생각하는 그게 맞나요?”

“네, 독가스입니다. 아, 아직까지는 소규모로 실험만 조금씩 하는 수준입니다.”

“맙소사, 프리츠. 대체 무슨 생각으로...”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조금만, 조금만 시간을 주시면, 제가 왜 이런 일을 하는지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마의 땀을 닦다가, 그제야 마리 퀴리도 썩 상태가 좋아보이지 않는 것을 깨달은 하버가 한 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어쩌면 부인께서도 이 일에 함께해주실 수도 있겠지요. 부인께서 과학의 무기화를 꺼려하시는 것은 물론 압니다만... 어쩌면 인류 전체를 위한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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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에 언급되는 증자의 일화는 『논어』 <태백>편에 전합니다. 병으로 죽어가는 증자가 제자들을 모아두고 상처 없는 저의 몸을 보여주며, “내 발을 보고, 내 손을 보아라. 시경에 이르기를 ‘벌벌 떨고 움츠리니 깊은 못가에 임한 듯, 얇은 얼음을 밟는 듯.’이라 하였는데, 지금에 이르러서야 이 책임을 면한 것을 알겠노라 (... 啓予足啓予手 / 詩云 戰戰兢兢如臨深淵如履薄氷 / 而今而後吾知免夫 ...)”라 하였다는데, 그만큼 신체를 온전히 유지하는 것이 효도의 중요한 일부라는 인식을 보여줍니다.

원 역사의 핀란드는, 1840년 첫 헌법 제정 당시 여성참정권을 암묵적으로 보장한 하와이 이후 두 번째로 여성참정권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러나 하와이가 이후 백인들의 영향을 받은 개헌으로 참정권자를 남성으로 명시하였기에, 작중 조선에서 엘러노어 마르크스의 시도가 성공할 경우 세계에서 사실상 두번째가 되는 셈입니다. 1905년 총파업 (피의 일요일 사건에 영향을 받았습니다.)으로 1906년 과거 스웨덴 치하에서 세워졌던 의회를 재설립하게 되었는데, 이때 여성의 투표권과 피선거권을 모두 인정했고, 1907년 첫 총선에서 19명, 그 다음 선거에서는 21명의 여성 의원이 선출되게 됩니다.

흔히 폴란드를 한국과 비슷한 유럽 국가라고 언급하곤 하는데, 근세의 영광과 근대의 비극을 생각하면 사실 한국보다 여러모로 더한 면이 많습니다. 18세기에 3차에 걸쳐 분할된 폴란드는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령으로 각각 나뉘었고, 19세기 자유주의 혁명 역시 모두 실패하면서 1차대전 개전 직전까지 부분적인 자유화와 억압이 교차하게 됩니다.

특히 1차대전의 전운이 드리우게 되자, 동부전선의 최전방인 폴란드를 두고 열강의 이해가 교차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두각을 드러낸 지도자가 바로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로, 상대적으로 정치적 자유가 보장되던 오스트리아령 폴란드에서 무장독립조직을 세웠습니다. 이후 1차대전이 가까워오자 아예 오스트리아의 암묵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수천 명 수준의 병력을 갖추게 되었고, 개전 후 동맹국 측에서 러시아와 싸우면서도 협상국 측과 교섭하는 등 양다리 전략을 구사했습니다. 러시아가 1917년 무너지면서 그런 양다리도 큰 위험에 빠졌지만, 다행히 곧 전쟁이 끝나 폴란드로 금의환향하게 됩니다.

이후 그는 신생 폴란드 정국을 주도하게 되는데, 이때의 행보에 있어서는 공과가 극명히 갈립니다. 영 불리한 지정학적 상황에서 나름대로 생존의 방법을 찾아가려던 면도 있었지만, 독재를 고수하면서 달성 불가능한 꿈을 고집하여 폴란드 제2공화국 몰락의 단초를 가져왔다는 비판도 받습니다.

작중에 등장한 평산은 현재도 북한 최대의 우라늄 산지로, 전문매체 38노스(38North)의 분석에 따르면 무연탄과 우라늄이 함께 매장된 곳으로 추정됩니다. 북핵 협상이나 태풍 피해 등과 무관하게 한 번도 중단 없이 현재까지 채굴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Pabian, Makowsky, and Buck(2018.11.2.), “North Korea’s Uranium Mining and Milling Operations Continue and Pyongsan.”).

프리츠 하버가 처음 개발한 암모니아 합성 공정은 촉매로 오스뮴을 활용했습니다. 그러나 오스뮴은 지나치게 희소하여 가격 문제가 있었고, 이후 하버가 주목한 촉매는 오스뮴보다 구하기 쉽던 우라늄이었습니다. 원 역사에서는 이후 1909년, 하버와 함께 공법의 상용화를 추진하던 보슈의 연구팀이 현재도 사용되는 철 기반 촉매를 개발하였습니다.

X선은 발견된 직후부터 단순한 흥미거리를 넘어 의학적인 목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뢴트겐 본인이 이를 선도했고, 테슬라도 X선 촬영 기기들을 여럿 발명한 바 있습니다. 한국의 경우 가장 먼저 X선 기기를 도입한 곳은 한양의 세브란스병원이었다고 합니다.

원 역사의 마리 퀴리는 1차대전 발발 직후 야전용 X선 촬영 차량을 고안했고, 후원받은 차량을 개조해 실제 전선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이른바 ‘작은 퀴리들(petites Curies)’이라 불리는 이들 차량은 부상자 몸에 박힌 파편을 빠르게 찾아냄으로써 사망율을 낮추는 데 큰 공헌을 했습니다. 이를 운용하기 위해 퀴리는 직접 X선 기기를 다루는 법을 배우고, 거기에 운전과 차량 정비까지 독학하였습니다. 이후 ‘작은 퀴리들’의 수가 늘어나자, 본인의 연구소에서 장비 사용법을 가르치는 훈련과정을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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