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281화 (281/320)

92. 수레바퀴 굴리기 (2)

이만하면 그럭저럭 잘 끝난 편이라 자축하며, 겉모습과는 달리 호화롭게 꾸민 그 ‘헤어(Herr) 일당’의 집을 나와 어둑어둑한 골목길 걸어가던 에리히 레더 대위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계속 조선에 남길 것이라면 하다못해 특진이라도 시켜줄 만하지 않은가? 대위 생활이 몇 년에 이렇게 외지 근무까지 하고 있거늘.

더구나 그 프리츠 하버라는 초짜 학자가 조선에 와서는, 그 세르비아인 테슬라 따라다니면서 종종 딴에 애국한다며 ‘첩보’를 보내오는데, 그것을 관리하고 간혹 정말 쓸만한 것을 추려내는 일도 고스란히 레더에게 돌아오게 되었다. (하버가 조선에 오게 된 원인을 제공한 것이 레더 본인이기 때문이라는, 그로서는 다소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홀로 백 번 원망한들 무엇하랴. 남들 앞에선 꺼내질 못할 넋두리 삼키는데, 문득 뒤에서 눈총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설마 영국인들이나 좋아할 만한 싸구려 통속소설에 나올 법한 그런 일이 제게 일어나겠는가 싶었는데, 뒤통수 계속 따가우니 암만 생각해도 어째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듯했다.

만약 레더가, 하다못해 저기 동아프리카 탕갸니카(탄자니아) 같은 곳에서라도 복무한 바 있었더라면 육감이 조금 더 날카롭게 반응하였을 것이련만, 그렇지 못하였기에 그림자 자각하는 것도 한 박자 늦었다.

지금쯤 몸 날래게 돌려 달려들면, 아마 동양인일 그자의 멱살을 잡을 수 있겠거려니 하고서 잽싸게 몸 돌려 팔을 뻗었는데-

“어이쿠!”

레더의 주먹은 뒤에 따라오던 이의 멱살 대신 가슴팍에 가서 맞았다.

“이놈의 자식이 사람을 치고!”

“이것 놓아라!”

조선말과 독일말 욕지거리가 오가고, 곧장 레더가 역으로 멱살을 잡혔다. 힘겨루기 끝에 근처 가로등 아래까지 밀렸는데, 불빛에 상대 모습 드러난바 기골 장대한 젊은이요, 씩씩대는 것으로 보아 눈은 이미 뒤집힌 듯했다.

레더도 어디 가서 싸움에 쉽게 질 사내는 아니건만, 상대 얕보고 시작한 주먹다짐은 차포 떼어주고 시작한 장기판과 같은 고로, 결국 가로등 기둥에 겨우 등을 의지하고서 먼저 항복하고야 말았다.

“그만, 그만, 나, 공사관 사람이오. 덕국, 도이칠란트!”

“뭐, 공사관?”

그래도 드러난 몰골을 보니, 저쪽도 얻어맞은 티 역력하였으므로, 함부르크 사람 자부심을 완전히 못 지켰다고는 못할 것이었다.

“그렇소. 그대, 어디 사는 누구요? 책임 묻겠소.”

“사는 곳은 알 것 없고, 형조에서 좌랑으로 있는 김창암이외다. 선수는 댁이 질렀으니 딴말 하지 말고. 시시비비 분명하니 나랏일 맡은 사람으로 내빼지 마시오.”

그러고서 씩씩대며 어색하게 헤어졌는데,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김창암이 등청하자마자, ‘조금 봅시다.’하고 불러내는 관원들이 있었다.

말이야 같이 녹봉 받는 관원이라지만 복식은 관복이 아니므로, 예조의 범상한 벼슬하는 이는 아닐 것이요, 사헌부 사람이라면 정면에서 들이치기 마련이므로, 그를 ‘정중하게’ 연행해간 곳이 공안서임은 그닥 놀랍지 않았다.

그러나 놀랄 일이 곧 생겼으니, 곧장 어느 방으로 안내받아 들어갔더니 한 각쯤 뒤에 들어온 초로의 사내가 다름아닌 동농 대감이라.

마찬가지로 관복은 입지 아니하였으나 입은 것과 진배없는 기척의 김가진이 앞에 와, 전혀 따뜻하지 않은 미소 지으며 앉으니, 사세 재미 적게 돌아간다 하는 걱정과, 아무리 그래도 먼저 얻어맞은 것은 저이므로 허물이 있다면 저쪽에 있다 하는 생각이 김창암 머릿속에서 세를 겨루었다.

“눈치 보아하니 무슨 곡절로 이리 왔는지 얼추 아는 듯하군그래. 사연이나 들어보세나.”

“평소 맡아보는 일이 도성 안의 잡범들 단속할 방편 마련하는 것인 고로, 퇴청하여 가로 오갈 때도 살피는 바가 대개 그러한데, 문득 수상한 기척의 양인이 골목을 횡행하기에 따라갔더니 그자가 갑자기 몸 돌려 제 명치를 때리지 않겠습니까?

사내가 되어 어찌 맞고만 있겠습니까? 더구나 말 대신 손찌검 바로 나온 것을 보아하니 분명 떳떳하지 못한 자라, 저 역시 우선 제압할 생각에 부득불 몸을 놀리게 된 것입니다.”

하였더니 김가진이 껄껄 웃는 것 아닌가.

“형조의 좌랑이 소란 일으켰다기에 백면서생 범부인 줄로만 알았더니, 기개가 있군그래. 그 기개에, 이 장대한 기골로 남의 뒤를 은밀히 밟기까지 하였으니 솜씨도 좋고. 차라리 무관을 하지 그랬나?”

“그것은...”

“허허, 되었네, 되었어. 영달하여 가문 일으킨다 하면 아직은 엄익관보다 성균관 나오는 것을 이름난 것으로 여기지 않던가. 물론 내 듣기로 자네 집안은 자네 말고 다른 사람 이름을 빌려 위세를 부리고 있다 하였지만은...”

그것은 김창암 본인도 마냥 떳떳하지만은 않은 사정이었다. 애초에 그가 상경하여 안씨네 집에 머물게 된 것부터가, 그의 아버지가 아들 앞날 생각 반, 그들 집안 업신여기는 옆 동리 진주 강씨와 덕수 이씨네를 이름으로 찍어누를 생각 반으로 힘쓴 덕이었다.

그랬는데 혹 코 베이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어머니 달래고자, 저와 안씨네 젊은 종손 중근이 퍽 절친하여 함께 돌아다닌다, 이만큼 잘 살고 있으니 걱정 말라 하였던 것이 엉뚱하게 돌아가고야 말았다.

얼마 전 설 쇠러 해주 집에 내려갔더니 듣기를, 그의 숙부들이 작당하고서 평소 그들 깔보던 옆 동리 진주 강씨네에 짓쳐들어가, 네놈이 순흥 안문의 위엄을 우습게 보느냐, 고작 자유당 말석에 앉은 자가 어찌 난행하느냐 하면서 그간 업신여김 당한 원한을 풀었다는 것 아닌가.

창암 그도 고시와 성균관 거쳐 관복을 입었고, 벗 응칠이도 집안도 집안이지만 국사(國士)로서도 이름 떨쳤으니, 위세 빌리고픈 그 마음도 이해는 갔지만, 아무리 그래도 어딘가 불편한 구석이 남았다. 세상이 그가 어렸을 적 들었던 것만큼 불의한가 하면 그것은 아니요, 결국 사람이 하기 나름임을 서울서 보고 또 겪었기 때문이기도 하리라.

그리하여 큰 마음 먹고 강씨네와 이씨네에 세배하러 갔는데, 겉보기 원한이야 털자 하여 털어냈다지만 원망과 두려움 섞인 그 눈빛만은 김창암 마음속에 그대로 남았다.

헌데 불자들 말하는 대로 업보라는 게 있는 것인지, 그것이 공안서 귀에 들어갔을 줄이야.

”내 듣기로, 근래 자유당 안에 분란 있어 당인(黨人) 이합집산 분주하고, 한쪽에는 일당 선생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일군의 젊은이들이 있다 들었네. 그리고 자네와 자네의 벗 중근으로 말하자면, 후자에 속하지 않던가?”

저의 벗 응칠이 이름이 나오니, 창암도 저도 모르게 다시 혈기가 올랐다.

“저의 벗 안중근은 아직 젊은 사람으로, 공사(公事)로는 오직 아주대회서 총 쏜 것 외에는 맡은 바 없습니다. 이 일과는 하등 무관합니다.”

“허허, 무언가 오해한 모양일세. 자네나 자네 벗 중근에게 사람을 붙인 것은 아닐세. 그 집안에야 물론 눈과 귀가 향해 있지만.

자네와 교분 있는 안문(安門)도 이제 그만하면 하나의 세족이라 일컬을 만하지 않은가. 청계(淸溪, 안태훈) 선생이야 품행이 올바르다 하지만, 대개 부귀란 기름과 같아서 자칫하면 사람 여럿 미끄러지기 마련일세.”

자칫 국제적 문제를 일으킬 뻔한 것이 고작 어제였음을 생각하면 자제도 할 만하건만, 애시당초 창암의 성품이 그렇게 쉽게 다스릴 만하였다면 앞에 가던 이가 명치를 후려갈겼다 하여 바로 드잡이질할 생각은 아니하였을 테다.

“제가 비록 품계는 구실아치 겨우 면한 정도지만 그래도 엄연히 관원입니다. 공사(公私) 분간을 못 하겠습니까? 목전에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까닭은...”

“내가 공안서 사람이기 때문이지. 대조선국 국인이라면 무릇 자유가 있으니, 뜻대로 변통하는 것을 두고 흠이야 잡겠냐만, 자유당의 두 파벌 모두 우리 공안서로서는 눈여겨보지 아니할 수 없는 사정이 있다네.

자, 그러니 이제 가감없이 털어놓아보게. 어찌하여 자네들 그 ‘교양사(敎養社)’ 모임에서 나와 일당 선생네 문앞을 서성이게 되었는가?”

‘교양사’의 교양이란 곧 일본국에서 들어온 말로, 덕국의 ‘븰둥(Bildung)’을 옮긴 말이라 하였다. 그 모임 꾸린 사람은 『해동일보』의 떠오르는 실세 이승만이요, 당색 따지면 자유당인 젊은이 여럿, 이승만이 만든 판에 멋모르고 끌려들어간 안중근 등이 그 안에 있었다.

김창암은 자부하기를 어떻게 연줄 못 구할까 좌고우면하는 다른 젊은 관료들과는 다르다 여겼는데, 저의 벗 중근이 어째 영 마음에 들지 않는 이승만과 교우한다 하니, 궁금한 마음 십분지일, 걱정 십분지구로 가끔 그 모임에 동석하곤 하였다.

“교양사가 소설과 고금 시문을 논의하는 곳이 아님은 이미 알고 있네.”

은근한 채근에 결국 김창암 입이 다시 열렸다.

교양사에 얽힌 내력은 이러하였다.

관로(官路)는 넓어진 듯하면서도 위로 올라가기는 오히려 어려워졌으니 곧 애로(隘路)요, 대학원까지 나와 바깥에서 그 학문에 맞는 자리 얻기는 또 갈수록 힘든 것이라. 따지자면 옛 조상들 부럽잖게 살 수 있지만, 반드시 정승이나 문형쯤은 되어야 현달한 것으로 여기는 고지식한 집안 사람들로 인해 젊은 식자들은 궁색하고 곤란하였다.

그렇다고 물성(物性)을 깊게 궁구하여 이름을 떨치고자 한다면, 과거에는 그저 홀로 깊게 생각하고 동서고금의 관련된 서책 몇 질을 섭렵하면 당대의 대가로 이름 남겼을 것이련만, 지금의 학문은 평생 파헤쳐도 새로운 이치를 깨닫기는커녕 남이 새로이 밝혀내는 이치 이해하기도 어려웠다. 당장 격치물성청 귀씨가 열심히 소개하려 노력하는 서사국 서생 안 모(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논의만 하더라도, 빛의 빠르기가 어쩌고, 세월의 흐름이 저쩌고 하는 것이 참으로 난해하였다.

이승만 생각하기에 장차 자유당 나아갈 길은, 그렇게 먹고사는 것 외의 다른 고민으로 답답한 지경 처한 이들을 끌어들여 당의 토대로 삼는 것이었다. 그 첫 발걸음은, 이들끼리 뭉칠만한, 즐길만한 문물을 들여옴이 능사요, 그 중 하나가 바로 일본국에서 유행하는 저 ‘교양’의 읽을거리였다.

때마침 조선국에도 지난 소동으로 이름 알려진 프로이트 씨가 조선국 신보와의 논사(論事, 인터뷰) 말미에 소설 한 권을 추천하였으니,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의 『페터 카멘친트(Peter Camenzind)』였다.

이승만이 구하여 읽어보니 그 내용에 감응할 젊은이들 많을 듯해 곧장 옮겨서 『해동일보』 산하 서국(書局)에서 발간토록 하였다. 젊은이 가운데서는 원어를 국문으로 풀어쓰는 것이 ‘모뎅(moderne)’하다는 풍조도 슬슬 드러나고 있건만, 아직은 현실의 벽이 높았기에, 이승만 마음에는 영 들지 않는 『벽촌청년구도기(僻村靑年求道記)』라는 제목으로 나왔는데, 그것이 곧장 크게 유행하였기에 이번에는 숫제 오스트리아에서 직접 헤세의 신간을 들여올 궁리를 하고 있었다.

“설마 그런 궁리 때문에 일당 선생을 만나고자 하였다, 그런 변명은 아니리라 믿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공안서 눈에 들었다면 어지간한 거짓부렁으로는 속일 수 없음을 저도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더구나 이미 그 책은 거의 다 옮겨졌고 이제 내기만 하면 되는데, 무슨 문집도 아니고 남에게 발문(跋文) 구할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한 구상은 이완용 알지 못하는 사이 이승만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었으니, 알아차린 이완용은 속으로는 노엽게 여길지언정 겉으로는 한껏 장려하고 있었다. (실제로 서국 소득에 쏠쏠한 보탬이 되기도 하였다.)

그런 연고로 금년 초 오지리에서 나온 그 『거철애사(拒轍哀史, 수레바퀴 아래서Unterm Rad)』도 아직 그 번안한 제목만 나왔을 뿐 국문이나 진서로 옮긴 것은 나오기가 요원하였건만, 하도 신보에서 미리 광고하였기에 그 줄거리 아는 이들이 많았다.

늙은 선비들 보기에 그 얼개는 송대의 왕안석이 남긴 『상중영(傷仲永)』과 별반 다를 게 없었지만, 젊은 식자들의 마음에는 공명하는 바가 있었다. 그리고 그런 젊은이 중 하나가 부군과 함께 그나마 날씨 따뜻한 제주도에 별장 자리 알아보고 다니는 중인 섬라국부인 차씨(왈라야 알롱꼰)였으므로, 이는 명부사의 일이기도 하였고, 나아가 공안서와도 연 있는 사안이었다.

“실은 그 교양사에서, 일당 선생이 근래 사람을 모으는데 개중 영 평 좋지 않은 무리도 있어 걱정이라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소관이 아예 국외(局外)의 상한(常漢)이라면 모르겠으나, 개중 행실 좋지 않은 이들이 있음을 이미 들어 알고 있으니, 그들이 혹 안문과 엮여 저의 벗 앞길을 해치지 않을까 걱정하였을 뿐입니다.”

나라에 세 당이 정립한 것도 벌써 여러 해가 지났는데, 그 중 가장 기반 위태로운 곳이 어디인고 묻는다면 단연 자유당일 것이다.

박은식과 황현 두 사람이 최익현 한 사람 보좌하던 초라한 당이 일어나 지금까지 온 것은, 박규수가 오경석과 유홍기 두 사람 데리고서 개화당 일으킨 것에 비할 만하지만, 그 뒤 개화당이 부호와 거족들 끌어들이고 민족 운운하면서 젊은이들 끌어온 것에 비해 자유당은 아무래도 선비들과 몇몇 세족들 제하면 힘이 달렸다.

그러던 것이 금년 총리대신 추거를 두고 마침내 당 안에서 입장 갈리기에 이르렀다. 최익현과 황현 등은, 권세의 쓰임이 나라와 백성에 있지, 무슨 욕심 채우는데 있느냐. 당의 형세는 개화당과 공산당 둘 사이에서 때로는 저울추가 되고 때로는 근본을 세울 만큼만 유지하면 족하다 하는 쪽이었고 최익현 따르는 선비들의 생각도 대개 그러하였다.

쓰일 때면 나아가고 그렇지 않으면 물러남이 마땅한 도리라 여기는 선비들이야, 이만하면 시류에 맞게 변통하였다 여길 것이요, 아무리 자유당 흔들린다 한들 여전히 군현 동리와 서원, 학원 등지에 자리잡고 있는 유생들의 세를 생각하면 근거 없는 생각도 아니었다.

그러나 순흥 안문이 개화당 반하는 뜻을 일으킨 뒤에 그 기세를 탐하여 모여든 자들, 혹은 개화당과 공산당 양측에 공히 척진 자들로서는 집정 욕심을 차마 버릴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 생각하는 이들은 다시 두 부류가 있으니, 공교롭게도 두 파벌의 수장은 모두 『해동일보』 사람이었다. 한쪽은 그 재주와 식견, 그리고 어떻게든 남 위에 올라서려는 그 성품 덕에 저의 이름 걸고 논설 게재하기에 이른 우남(이승만)과 젊은이들이요, 다른 한쪽에는 대만에서 돌아왔더니 그사이 자신이 『해동일보』에 일궈둔 터전이 모두 뒤흔들리고 있는 것을 보고 경악한 일당이 있었다.

이완용이 보기에, 개화당 김옥균이가 도대체 어떻게 어심을 움직였는지는 끝내 모를 일이지만, 좌우지간 다시 그런 일을 당하지 않으려면 그 누구도 쉽사리 넘볼 수 없는 세를 갖추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신의 이름이 높다 하여 세가 절로 오는 것은 아니었으니, 결국 사람을 모으는 것이 중하였다.

그러나 당 안의 사람들을 볼작시면 유길준은 그저 사람들이 저를 알아주면 족한 그릇 작은 사람이요, 박은식이나 황현은 세상 어느 권세보다도 마음대로 남의 흉보고 사는 것을 복으로 삼는 고루한 작자들이니, 결국 저와 같이 처세에 밝으면서도 현명한 이들을 모아 유유상종함이 상책이었다.

“행실 좋지 않은 이라?”

“공안서에서도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당연히 김가진도 알고 있었다. 그 이름 나오면 상께서 성려하시는 자들 여럿 있음을, 그리고 그런 자 중 이완용이가 앞을 다툼을 여러 해 성상 모신 김가진이 모를 리 없었고, 그가 귀국하자마자 멀찌감치 감시하는 이를 붙여두고 있던 것이다.

“그래도 한 번 들어보세.”

그러므로 김창암이 엉뚱한 사람과 다투게 된 사정도 모두 알고 있었으니, 그의 의중을 살피고자 떠보는 질문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김창암이 하나씩 이름을 읊는데, 김가진이 의심하는 이들은 대개 들어가 있었다. 활동섭영 일로 한 번 권세 맛을 보고서는 더 많은 것을 바라는 이지용이나, 재주 부족하다는 평으로 인해 반남 박문 안에서 겉도는 처지인 박제순(朴齊純), 생선 염장해 파는 일로 시작해 거부가 된 이근택(李根澤), 무관으로 오래 봉직하여 별다른 공 없이 참장(소장)까지 올랐건만 군복 벗은 뒤 혹 구름재에 자리 없는가 엿보고 있는 송병준(宋秉畯) 등등.

“그리하여 반드시 그들 중 하나이거나, 적어도 그들이 사사로이 부리는 자이리라 의심하고서 뒤를 쫓았더니 일이 어그러졌다, 이 말이로군.”

“그렇습니다.”

“잘 알겠네.”

슬슬 일어나려는데 김창암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혹 저로 말미암아 다른 이들에게 화 될 바가 있겠습니까?”

“지금으로서는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네.”

그때, 김가진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가 있었다.

“다만 내 물음에 하나 답한다면, 무언가 정해지는 대로 곧장 알려주도록 하지.”

공안서와 같은 아문이라면 유재시거(唯才是擧)가 정도인데, 저의 친우 생각하는 것이나 의협심은 물론이요, 소속은 형조라지만 실제 경무(警務)는 맡아보지 않았을 만한 자가 처음 하는 암행에서 그만큼 은밀히 움직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무엇입니까?”

“자네, 혹 부서를 옮겨볼 생각은 없는가?”

덕국 주재무관 레더와 주먹다짐한 자는, 전 형조좌랑 김창암과 그 생김새 매우 유사한 김구(金九)라는 평범한 백성이니, 우연히 저들 생김새 비슷함을 알게 된 김구가 사칭한 것이요, 그자는 공안서에서 추포하여 지금 조사 중이라는 글이 덕국 공사관으로 전해졌다.

그리고 덕국 공사관은, 왜 하필 그 시각에 그곳에 레더가 가 있었느냐를 묻지 않음을 다행으로 여기고, 레더 대위도 크게 개의치 않고 있으며 귀국의 배려에 감사한다는 답을 보내왔다.

그러니 겉보기로 사태는 일단락된 셈인데, 물음은 그대로 남았다.

“덕국 무관이 완용의 집을 드나들었으니, 분명 무언가 청탁하였을 것이오. 허나 이완용 그자와 덕국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기에...”

귀남이 수염 만지며 말했다.

겉보기에는 그 누구도 적으로 돌릴 것 같지 않은 이완용이지만 실제로는 적이 아주 많았으니, 근래 그의 품행이 실로 위군자(僞君子)라 괘씸하게 여기는 최익현이나 인터내셔널에서 함정 팠던 것 기억하는 전봉준은 물론이요 실제로 악연 얽힌 김옥균도 있었다.

그러나 악연으로 따진다면 같은듯 다른 전생 이완용이가 팔아먹은 나라에서 고생한 귀남만한 사람이 없을 것이었다.

그런 자가 또 돌아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상한 일에 말려들어갔으니, 귀남의 실없는 생각으로는 나라 팔던 천성이 어디 가지 않아, 쉽게 나라 망하지 않을 판국에 그 본성이 갈 곳 잃고 끓어오르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그 일에 있어서는 아직 공안서에서도 들은 바가 부족하니 송구한 일입니다. 다만 듣기로 근래 덕국 국주(國主)가 영국과 법국, 아라사 교섭한 바를 듣고 크게 놀라고 노여워하였다 하였으니 그와 필히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북경과 일본국 경도에서도 전해오기를, 덕국 공사관에서 나온 이들이 조야(朝野) 막론하고 이름난 서생들을 찾아가고 있다 하는데, 모든 이들에게 두루 청탁하는 것도 아니라 하니 아직으로서는 귀추를 더 살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보고하는 김가진 뒤로 내관의 목소리 들려 총리 전봉준과 정강사 사람들의 입시를 알려왔으니, 그 귀추 살피는 일은 이제 신보만 보아도 알 수 있게 되었다.

“일진회(一進會)라?”

“그렇습니다. 그 회는 선언하기를, 천하 만방의 모든 겨레는 그 부류끼리 모여서 나라 세우는 것이 도리이니, 이를 위하여 온 아주가 하나로 뭉쳐 나아가야 한다 하였습니다.”

당연히 그 회의 장은 일당 선생인데, 이번에 자유당 총리대신으로 추거에 나서고자 하니 당원 제현(諸賢)은 그 뜻 알아달라 간곡히 청하는 논설이 따라붙었다.

이르기를, 이미 자신은 국내와 국외를 막론하고 여러 사람들이 내놓는, 저들끼리 잘 살아야 한다는 그런 설을 논박하는데 힘을 기울여 왔으나, 중과부적으로 뜻을 펴지 못하였다 하였다.

그러나 근래 천하 정국을 살피자면, 청국 남쪽 천축부터 구주 아래의 마락가국(모로코)까지 남의 억압을 당하고 있으니 이러한 불인무도(不仁無道)를 도덕 숭앙하는 나라로써 어찌 감내할 수 있겠는가. 조선국은 성덕이 무궁하여 그런 어려움을 피했다지만, 옆의 청국과 일본국은 모두 양이로 말미암아 그런 설움 겪다가 근래 겨우 빠져나왔으니, 함께 목소리 내어 불의를 규탄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따라오리라 하였다.

“근래 덕국이 널리 선포하기를 그 부속시킨 땅과 백성을 근시일 내 모두 자주자립토록 할 것이라며 그 연한을 밝히기까지 하였으니... 허.”

대만 대표사(다바오) 사건 때 이완용이 장동 김문 공박코자 그런 논설 낸 것을 눈여겨본 덕국의 누군가가, 그에게 이런 논설 내줄 것을 청하니 이완용 또한 평소 가졌던 욕심 차릴 방도를 여기서 찾은 것일 테다.

벌써 세간에 오르내리는 그 ‘거철애사’ 제목에서 빌려와, ‘아래에 깔린 만방 백성을 구하기 위하여, 함께 수레바퀴를 굴려나가자’하는 선언으로 끝나는 그 논설을 살핀 김옥균이 고소(苦笑)와 함께 첨언하였다.

“언설로 남을 옭아맴이 아국 장기였건만, 돌려서 당하니 즐겁지만은 않은 일입니다.”

듣는 귀남은 저의 나라 국권 팔던 이완용이 이제 천하 만방의 국권 회복을 말하는 이 상황이, 이해하려 하여도 쉬이 이해되지 않아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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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훈의 호 청계(淸溪)는 작가의 창작입니다.

백범 김구의 신장에 있어서는 180cm, 심지어 190cm에 달했다는 설이 존재하는데, 광복 후 실제로 정확한 신장이 기록된 미군 장성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 175cm 전후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그런 야담이 전할 만큼 그의 거구가 인상적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비슷한 방법으로 추정해보면, 키 175cm의 히틀러보다 반 뼘쯤 키가 작았던 에리히 레더는 대략 170~173cm 정도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튀빙엔大 데이터베이스(2015)에 따르면 1900년 독일 남성의 평균신장은 169.2cm이었으니 레더도 결코 체구가 작지는 않지만, 상대를 잘못 만났다고 할 만합니다.

지나가듯 언급되는 『상중영』은 송대의 정치가이자 당송팔대가의 일인이기도 한 왕안석이 지은 짧은 산문입니다. 방중영이라는 글짓기 신동이, 그 재주를 제대로 계발하지 못하고 아버지의 돈벌이에만 쓰이다가 결국 그 재주를 잃고 말았다는 이야기입니다. 헤르만 헤세의 1906년작 『수레바퀴 아래서』와 겉핥기로 따지면 언뜻 비슷하게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함께 언급된 『페터 카멘친트』는 헤르만 헤세의 첫 장편소설로, 큰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원 역사의 프로이트도 이를 극찬하며 적극적으로 주변에 추천한 바 있지요. 여기서 헤세는 『수레바퀴 아래서』나 『싯다르타』, 『데미안』 같은 그의 다른 대표작에서도 계속 등장하는, 젊은이의 성장과 자아 탐색이라는 줄거리의 원형을 그리고 있습니다.

근대 일본 교양주의는 근대교육이 보급되고 일본의 근대화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20세기 초반, 다이쇼 시기에 꽃피게 됩니다. 그 이전까지 근대 학문을 입신출세의 수단으로만 바라보던 시각이, 엘리트 상층으로 올라가는 길은 사실상 막혀있고 전근대 사회에서 열망의 대상이었던 ‘입신양명’의 길은 좁아지는 시대적 상황에 맞닥뜨리면서 그 모순을 내적으로 타파하기 위해 ‘교양’ 개념에 주목한 것이지요.

특히 문학은 이러한 교양주의의 핵심에 있었습니다. 대문호 나쓰메 소세키나 무(武)보다 문(文)에 훨씬 공이 큰 모리 오가이 등이 활동한 것도 이 시기였으며, 유명한 이와나미 서점은 서양 철학과 역사, 문학 서적을 문고판으로 간행하면서 교양인들의 ‘필독도서’를 만들어내고 전파했습니다. 길게 보면 아직까지 명맥이 내려오는 각종 세계문학전집들도 이러한 지적 흐름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을사오적 중 하나인 이근택은 무관 집안 출신으로, 1905년 당시 법부대신과 군부대신을 역임하였습니다. 임오군란 당시 피신한 중전 민씨에게 싱싱한 생선을 진상하여 눈에 들었다는 야사가 전합니다. 작중에서는 벼슬 외에도 출세할 길이 많이 생겼기에 엉뚱한 쪽으로 진로를 정하게 되었습니다만, 그 욕심만은 그대로였던 듯합니다.

역시 을사오적의 한 사람인 박제순은 반남 박씨지만, 그의 아버지 박홍수가 김윤식과 친분이 있었던 것을 제외하면 크게 박규수 및 개화파와의 관련은 없었습니다. 소년기에 계속 과거를 보았지만 여러 차례 낙방하였는데, 김윤식이 ‘뜬’ 직후인 1883년 별시 문과에서 (병과로 겨우) 급제한 것을 보면 모종의 관계가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작가의 추정입니다.) 이후 주로 외교를 맡아보다가 1905년에는 외무대신으로 재직하면서 역사에 오명을 남기게 되지요.

의외로 을사오적에는 들지 않는 (정미칠적 중에는 듭니다.) 송병준은 얼자 출신으로, 민씨 척족과 우연히 연이 닿아 군인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일본에 망명 중이었던 김옥균을 암살하라는 밀명을 받고 도일한 것을 계기로 일본과 연이 닿았고 – 결국 암살하는 대신 김옥균에게 동조하여 한편이 되었는데, 귀국 후 투옥된 그를 구명해준 사람이 민영환이었습니다 – 청일전쟁 후 아예 일본으로 건너가 살다가 러일전쟁 후 친일파로 중앙 정계에서 마각을 드러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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