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278화 (278/320)

91. 심장은 왼쪽에서 뛴다 (2)

조선 사람들 호주(好酒)함은 예로부터 유명한데, 정말로 술의 맛을 즐기는 사람보다는 옛적 송강(정철) 선생 읊은 것처럼 ‘꽃 꺾어 세워놓고 무진무진(無盡無盡) 먹세그려’ 하는 신념으로 목을 적시는 이들이 훨씬 많았다.

세 정당 사람들도 술 사랑은 같으니, 세간의 농담으로 이르기를 만일 삼당(三黨)이 일통한다면 마땅한 이름인즉 오직 주당(酒黨)이라. 참의원 회기 끝난 뒤 구름재 주변 술집 매상을 살핀다면 아마 그 말에 일리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세수(稅收) 늘리는 방편으로 양주세(釀酒稅) 걷는 것은 그 옛날 박규수 시절부터 나왔다가 흉년에도 술 빚는 것을 금하지 않아도 될 만큼 논밭의 소출 는 뒤에 실제로 시행되었다. 그러던 중, 금번 내각에 이르러 착안한바 저 술도 장사의 요긴한 품목이라, 소소하게 집에서 담그던 것을 고을마다 한데 모아 공장처럼 만들면 그 또한 자잘한 공상(工商) 진흥하는 길이었다.

더 이상 집안에 내려오는 비법을 전할 도리 없는 청상 과부 몇몇이, 그 법을 세상에 알리고자 이에 동참하기도 하고, 또 가뭄에 콩 나듯, 막술보다는 품격 있는 약주가 개화된 백성들에게 어울린다며 그런 가주(家酒) 만드는 법을 고을 양주창(양조장)에 전해주는 뜻있는 선비(혹은 이름난 술꾼)도 있었다.

그리하여 일국 총리 겸 한 당의 영수 집에도 그런 술 몇 병이 들어와 있었으니, 인천부 살 때 오씨양행이나 배달상회 통해 근근이 양주 사 마시던 시절에 비하면 전-마르크스 부부의 음주생활도 퍽 다채로워졌다.

“캬, 역시 좋습니다.”

형 따라다니며 몰래 맛 보던 것 말고, 제대로 술 배운 것은 다름아닌 조선에서였기에, 저 술 마시고 ‘캬아’ 하는 버릇도 들어버리고야 말았다. 아내 크룹스카야 앞에서야 교양 없는 사람 취급받기 싫으니 자제하지만, 저 한없이 조선스러운 감탄사를 이곳 한양에서는 마음껏 뱉을 수 있었다.

“고생이 많았네.”

“고맙습니다. 정치라는 게 참 어렵더군요.”

소싯적부터 울리야노프를 보았던 전봉준과 엘러노어 부부 눈에는 그의 마음이 꽤 흔들린 것이 들어왔다. 그렇기에 무슨 고생인지는 몰라도 고생하였다는 것만은 쉬이 알 수 있었다.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겠나. 폭력이 답이 아닐지라도 사람이 폭력에 호소하는 것은 그만큼 쉬워보이기 때문이지.”

“그래도 무슨 사연으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슬슬 말해봄직도 한데.”

“후... 사연이 깁니다.”

지나친 성공이 화의 근원이었다.

비테가 붙여준 스톨리핀 덕에, 사회민주노동당의 농지개혁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아니, 이루어지는 듯했다.

당장 세르게이 비테 본인부터가, 농촌 부흥에는 오직 곁가지 관심만 두고 있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바라는 것은, 공업화를 지탱할 내수시장, 그리고 조금 더 욕심 내면 지금보다도 저렴하게 공급될 곡물 정도였지, 밀밭에서 시작해 도시의 공장으로 향하는 개혁의 불길이 아니었다.

연해주에서 들어온 유행어로, 호랑이 새끼를 키운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비테를 덮쳤다. 그리고 비테에게는 의심 정도였지만, 러시아의 광대한 대지 위에 켜켜이 쌓인 기득권의 주인들에게 서린 것은 공포였다.

“가장 거룩하고도 고결해야 할 교회조차 불순함으로 물들고 있습니다. 저들이 불경스러운 말로 신실하고 순박한 농노, 아차, 농민들을 꾀어내는 것을 언제까지 감내해야 하겠습니까?”

“토지개혁은 거짓입니다. 고작 농지를 재분배하는 것만으로 생산량이 그렇게 늘어난다는 것이 말이 되는 일입니까? 우리 농촌에 물론 문제가 있기는 하겠지만, 그 정도로 낙후되어 있는지는 않을 것입니다.”

현실에서의 거리 이상의 진심으로 백성들을 생각한다고 스스로 믿는 이들의 말이 이러하였으며, 백성 걱정마저도 위선인 자들의 비난은 한술 더 떴다.

결국 비테의 마음도 조금씩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이게 다 애국심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전쟁만큼 애국심을 고취하는 것도 없지요. 지금의 우리 군대는 이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고배를 마셨던 그 군대가 아닙니다.”

“오늘날 국제 정세를 보십시오. 대적(大敵) 영국은 믿었던 독일에 이빨을 세우느라 우리를 가로막을 겨를이 없습니다. 투르크 땅에서는 경험 없는 청년들이 술탄을 유폐하다시피 하고 있고요. 지금이야말로 보스포루스를 넘어 지중해로 진출할 기회입니다.”

이때다 싶어 보수파를 거들고 나서는 군부도 있었다. 당장 처음 발칸 국가들이 술렁일 때도, 오스트리아와 협상할 것이 아니라 슬라브 동포들을 도와 발칸 전역을 해방해야 – 물론 그 해방이란 러시아가 폴란드에게 했던 그런 식의 ‘해방’이 될 것이다 – 한다는 목소리를 겨우 찍어누르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 이후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합의에 고무된 발칸 국가들이 숫제 독립을 선언해버리고, 그들을 진압하러 가야 할 근대식 군대는 술탄에게 총구를 돌렸으니, 군부에서 아쉬운 소리가 그칠 줄을 몰랐다.

물론 그때만 하여도, 군부의 부풀어오른 자신감 이면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던 – 국방예산의 실태를 누구보다 잘 아는 자신 앞에서 군대의 위세를 자랑하는 장군들을 보면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 비테였기에,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렸지만, 끝내 저 볼셰비키들이 저의 등을 찌르고야 말았으니 이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러던 차, 올해 초에 그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스톨리핀과 일린 두 사람의 힘으로, 곡물의 생산량이 다섯 곱절이나 늘었다고 하였다. 그 소식 듣고 환호하는 도시의 노동자들은, 이제 빠듯하기만 하였던 살림에 비로소 여유 생기리라 지레짐작하며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그런 날은 오지 않고, 오직 사람 괴롭히는 백야만이 계속될 뿐이었다.

결국 누군가 외치기 시작했다. 어째서 저렇게 좋은 개혁이 그들의 삶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가? 누가 그것을 막고 있는가?

그리하여 오흐라나 추정 칠만 명, 볼셰비키 호왈 삼십만 명의 군중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는데, 누군가는 헌법을 외치고, 의회를 외치고, 심지어 어느 얼간이는 ‘신께서 보우하시는 차르 폐하 아래의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라는 구호를 만들어 퍼뜨렸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 중 앞부분만, 또 어떤 경우에는 뒷부분만 시위 현장의 외침으로 이어지곤 했다.

혹자는 차르 일가의 초상화를, 혹자는 성모 마리아의 성화(聖畫)를, 또 혹자는 칼 마르크스와 전봉준의 사진을 들고 행진하는 이 오합지졸 시위대의 공통점이라면, 더 나은 삶을 위해 저들 목소리 내고자 하는 마음이 하나요, 병사라면 몰라도 장교쯤 되면 모를 수 없는 그 붉은 깃발을 휘날림이 또 하나였다.

시위대가 향한 시내의 겨울 궁전이 아닌, 교외의 알렉산드르궁(宮)에 머물던 차르 니콜라이 2세가 급보를 전해듣고, 소싯적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있던 일을 떠올리고서 사격중지 명령과 더불어, ‘요구를 긍정적으로 검토할 터이니 충직한 신민들은 해산토록 하라’ 하는 황명을 내리면서 소요는 일단락되었다.

“이제 만족하는가?”

“그것은 저 한 사람이 홀로 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닙니다.”

문제의 그 일요일이 지난 뒤, 여전히 어수선한 거리를 지나 세르게이 비테의 집무실로 불려간 일린과 스톨리핀에게 비테의 질책에 가까운 질문이 쏟아졌다.

“결국 차르 폐하께서 친히 헌법 수립과 의회정치를 약속하셨네! 이만하면 되었잖은가? 아니, 되고도 남았지.”

‘불충한 놈들 같으니’ 하는 혼잣말이 꼬리로 붙었다.

“결국 기한은 명시되지 않았잖습니까. 노동자-농민 대중은 이미 자신의 힘을 깨달았습니다. 돌이킬 수 없지요. 무엇이 약속되었든 이행되지 않는다면 똑같은 일이 또 일어날 것입니다.”

일린이 당당하게 대꾸했다.

“어리석기는. 개혁은 수단일 뿐일세. 자네들 좋아하는 그 개혁을 골백번 한들 공장에 석탄과 철강이 절로 채워지는가? 지금 자네들이 하는 일은 혼란만을 불러올 뿐이야!”

“그러나 정치개혁 없이는 그 어떤 변화도 오래 지속될 수 없습니다. 이제 다른 도시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끝없이 일어날 것이고...”

“그러다 선을 넘게 되면, 끝내 피가 흐르게 되겠지.”

또 지지 않고 반박하려는 일린을 스톨리핀이 제지했다.

“내가 자네들을 기용하고, 그 뒤에 무슨 짓을 하든 지금껏 용인한 것은 개혁이 국익에 합치되기 때문이었네. 이 점을 잊지 말게.

당분간 자중하도록. 알겠나?”

“예, 각하.”

역시 스톨리핀 한 사람의 답변이었다.

“물러가게들.”

두 사람이 나간 자리에 회한만 남았다.

제국의 발전을 위해, 어딘가는 개발되고 또 시장으로서 개척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번에 밝혀진 것처럼 낙후된 농촌을 시장으로 개발하려는 노력은 정치적 비용이 너무 컸다. 군부의 머저리들과는 달리, 지금 러시아가 홀로 발칸이나 아나톨리아, 페르시아를 홀로 어찌해볼 방법은 없었다.

그렇다면 답은 극동뿐이었다. 시베리아횡단철도 개통 후, 조선과 중국에 대해 다시 제목소리 내어야 한다고, 만주를 시베리아의 앞마당으로 삼고 연해주를 다시 진정한 러시아령으로 돌려놓아야 한다고 줄기차게 주장하는 강경파들의 말이 결과적으로 맞아떨어진 셈이었다. 만일 러시아가 하나의 사람이고 비테 본인이 두뇌라면, 만주는커녕 지구 어디에서도 위험한 대외공작은 하지 않을 것이련만, 결코 그렇지 않으니 어찌하겠는가.

그는 어딘가에 정치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었고, 왼쪽은 이번에 명백히 밝혀진 것처럼 답이 아니었다.

“들어와보게. 군부와 외무부에 보내야 할 전갈이 있네.”

비서를 부르는 비테의 고달픈 목소리가 울렸다.

당사로 돌아와 중진들을 모으려는 차, 스톨리핀이 일린을 막아세웠다.

“다시 한 번 기록을 위해 말하지만, 블라디미르 일리치, 나는 시위에 반대했소.”

이 ‘운동’이 열혈 젊은이 몇몇의 탁상 놀음을 떠나 러시아 전역을 휩쓰는 폭풍이 된 지도 여러 해였지만, 그 핵심에 있는 일린과 스톨리핀은 여전히 데면데면하였다.

농촌을 개혁하여 러시아를 발전시킨다는 데 있어서 뜻을 함께할 뿐, 그 발전이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 그것이 완수된 뒤의 러시아는 어떤 나라여야 할지에 대해서는 결코 뜻이 좁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만큼 서로 필요한 존재였고, 그렇기에 누가 말하지 않아도 지금까지 공적인 교류 외의 친교는 삼가고 있었다.

“똑똑히 기억하고 있소. 시위를 지지하던 내 입장에도 변화는 없소, 표트르 아르카디예비치 (스톨리핀).”

당의 공식 입장은, 러시아의 유서깊은 자치의 전통을 언제고 되살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르크스-전 노선에 따르면 도시와 농촌 사이의 억압적 관계가 해소되는 한, 일견 부르주아적으로 보일 수 있는 자유주의 제도개혁도 – 그것이 종착점이 아닌 중간 단계라는 전제 하에서 – 충분히 목표로 삼을 만했다.

그러므로 처음 시위가 촉발되었을 때, 우발적이기는 하지만 당 차원에서도 참여를 독려할 만하다고 일린과 그 동지들은 결론을 내렸다.

“그러잖아도 조금씩 여기저기서 견제가 들어오고 있었잖소. 이번은 너무 나갔소. 불측한 무리들에게, 우리가 차르 폐하의 손목을 감히 비틀었다며 모함할 빌미를 주었잖소이까.”

처음에는 그루지야의 티플리스에서 그 ‘주가’ 어쩌고 하는 젊은이가 『불꽃』 지를 무단으로 번역해 유통했다는 혐의로 구속되었다던가 – 죄목이 가벼워 지금은 석방되었고, 얼마 전 공식으로 입당하였다 들었다 – 하는 식의 단편적인 견제였다.

그러나 그 뒤로는, 농지개혁 시범 촌락으로 선정된 마을의 작물이 갑자기 시든다던가, 이유 없이 화재가 난다던가, 파업을 시도하던 그 옆 도시의 노동자들이 불량배들에게 몰매를 맞는다던가 하는 식으로, 견제의 손길이 조금씩, 그러나 꾸준히 옥죄어오고 있었다.

“운동에 마찰이 없는 것은 물리학자의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오.”

“하지만 마찰이 지나쳐 불이 날 정도가 되면 안 되겠지. 그러기에 우리 당의 개혁은 너무나 중요하오.”

지를 때는 지르는 성미는 두 사람이 닮았는데, 그렇기에 가감없이 스톨리핀은 저의 생각을 바로 꺼냈다.

“당분간 러시아를 떠나 있는 게 어떻겠소? 한 몇 달 정도만이라도.”

“지금 날더러, 우리 당을 버리고 도망치라는 말이오? 이 정도 반발 때문에?”

“아니, 우리 러시아를 위해 잠시 떠나달라는 뜻이오. 그대가 이곳에 남아있는 한, 지금의 과열된 여론은 반드시 그대를 중심으로 더욱 불타오를 것이오.

우리는 이미 한 배를 탄 사이요. 그리고 그대들과 어울리면서 깨달은 점이 하나 있다면, 나는 행정이라면 몰라도 정치에는 재주가 없다는 것이오. 그대들이야 나를 버리더라도 새로 시작할 수 있겠지만, 나는 이 당이 없으면 저들을 상대로 버틸 수 없소. 나를 믿지 못한다면, 대신 우리의 적들을 믿어주시오.”

“... 그리하여 아라사 사람 일린이 신의 처소에 찾아오게 된 것이었습니다.”

어젯밤 술자리에서는, 남들 앞에서는 흔들림 없는 당의 지도자로서 행세해야 했기에 털어놓지 못한 일린의 회의와 걱정, 불안이 알코올로 인해 갈라진 틈을 타고 뿜어져 나왔는데, 하필 그 자리에 동석한 사람이 엘러노어 마르크스와 전봉준이라, 술자리 넋두리가 졸지에 즉석 이론 논쟁으로 비화하고야 말았다.

의회정치를 통한 평화로운 점진적 혁명이 기득권의 저항으로 난관에 봉착할 경우 어찌해야 하는가 하는 이야기는, 물론 특진관으로 김옥균과 최익현 입시하고 공산당 영수 자격으로 전봉준 본인도 들어와 앉은 이 자리에서 고하기는 무엇하였다.

허나 공친왕 조문 갔다가 아라사 공사의 미심쩍은 행보를 접하고 온 김옥균이 그 이야기를 먼저 꺼냈으니, 아무리 당색 다르다지만 함께 나라의 앞길 논하는 사이에 어찌 일린의 사연 들은 바를 모두 감추겠는가.

“소싯적 추억 되새기려 찾아온 줄 알았건만 아니었던 모양이구려. 안쓰럽게 되었소. 그 일린이라는 사람도.”

전봉준이 축약한 일린의 사연 들은 귀남의 평이었다. 그냥 공산당 같은 것 하는 작자라면 모를까, 몇 년 전 전봉준을 시켜 널리 교화하도록 한 사람 중의 하나였는데, 그 사람이 입바른 소리 하다가 곤란한 지경 처했다니 안쓰럽지 않은가? 이곳 공산당 말고 진짜 공산당이라면 하등 쓸모없는 악한들 모임인데, 반대 이치로 쓸모있고 선량한 사람이라면 그런 진퉁 공산당은 아닐 터였다.

동석한 최익현도 성토하는 말을 꺼냈다.

“비씨 그자가 참으로 고약합니다. 백성들이 모여 올바른 정사를 간언하니 오히려 충간(忠肝)을 칭송하여야 할 터인데, 일국의 정승 되어 그리하다니...”

물론 저 공산당 울타리 안에도 범상(犯上)의 참람된 욕심 품은 자들이 반드시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대개 정사가 어질지 못하니 난신(亂臣)도 있는 것이라. 난신이 났기에 비로소 정사 어지러워졌다 하는 것은 위정자가 해도 되는 말이 아니었다.

“더욱 걱정스러운 바는, 아라사에서 만일 작정하고 땅이나 이권을 탐낸다면 동삼성이나 몽고, 토번 등지를 노림이 가장 유리한 수라는 점입니다.”

정강사에서 이미 이를 두고 의견 주고받았던 김옥균은 이익의 득실을 두고 말했다.

물론 지금 아라사 처지에 강역 넓힐 욕심을 내는 것부터가 하책이긴 하겠지만, 전봉준 말대로 부득불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 있다고 하면 동삼성에서 공친왕 공백 생긴 틈을 노림이 그나마 상책이었다.

“여러 해 전 청국이 백문제개를 공표하였을 때, 아라사가 이를 받아들인 것은 영국과 덕국 등의 세력을 홀로 당해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서백리 지나는 철도가 모두 놓였고, 영·덕 두 나라는 우의가 크게 상하였으니, 탐심(貪心) 있다면 어찌 청국의 번병(藩屛)을 노리지 않겠습니까.

아라사 막을 방책이라면 영국을 끌어들임이 가장 쉬운 길이겠으나, 아무리 근래 조금 정리가 상했다지만 아라사는 우리와 동맹한 사이요, 더구나 영국 국세가 예전같지 않다 하니 그 또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일린이라는 그 자를 시켜서 어떻게 해볼 방책은 없겠소?”

전봉준에게 배웠다는 대로 하였다가 곤란 처했다는 그 젊은이 처지가 여전히 걱정되던 귀남이 문득 던졌다.

“아라사를 막아 동삼성을 지키는 것도 물론 좋지만, 앞서 고균 이른 것처럼 엄연히 우리 벗이니 이는 옳지 못하오. 그들이 동삼성 노리지 못하게 한다면 다른 이익을 취하게 도와야 할 텐데, 마침 그 나라 사람이 이렇게 찾아왔으니 방도를 고민해 볼만하지 않겠소?”

러시아가 대국이라지만, 나라 사이 친한 사람 많은 것이 국력의 기준이라면 조선도 나름 대국이었다.

임금 귀남의 하유하신 바와 전봉준이 전한 아라사 속사정 듣던 김옥균 머릿속에 번쩍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방도가 하나 있을 듯합니다...”

러시아와의 진심 어린 협상(entente cordial)에 관심이 있느냐는 미심쩍은 제의가 런던 정계까지 흘러들어가게 된 것은 그 무렵이었다.

“귀국의 공식적인 제의입니까?”

“아닙니다. 저희는 그저 신임할 만한 중재자를 추천드리고자 할 뿐입니다. 블라디미르 일린 씨의 이름은 아마 들어보셨으리라 믿습니다...”

어떻게 체임벌린을 끌어내리고 다시 자유당 집권을 이끌어볼까 머리 맞대고 있던 자유당의 에드워드 그레이(Edward Grey) 경이, 조선 공사관이 후원하는 ‘콩코르디아 클럽(Concordia Club)’에서 돌던 그 떡밥을 가장 먼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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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폭음 경향은 『고려도경』부터 개화기 서양인들의 기록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기재되어 있습니다. 송나라 사람 서긍은 조선인들이 술을 마실 때 ‘절도 없이 많이 내오는 것을 힘쓸 뿐’이라며 – 아마 고려 사람들보다 주량이 달려서 자존심이 상했던 듯합니다 – 비판하고 있으며, 구한말의 선교사들 역시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마시는 문화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수량을 언급한 몇 안 되는 사례인 오페르트의 기록에 따르면, 그의 배에 탐문하러 온 조선인 관리 일행 네 명에게 양주를 대접했더니 30분 만에 샴페인과 셰리주를 합해 8병을 비웠다고 합니다.

레닌은 간혹 술을 마시기는 하였지만, 당시 러시아 기준으로 애주가는 아녔다고 합니다. 오히려 19세기 중반까지 국가가 전매했고 이후에도 정부 세수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던 보드카가 빈농의 자립을 막고 국가의 압제수단으로 활용된다고 보았기에 양조업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지요. 그 결과 1925년까지 소련 전역에는 금주령이 유지되었습니다. (동시대 미국의 금주령까지 감안하면, 아마 1920년대는 인류가 가장 정신 멀쩡하던 시기 아녔을까 생각해봅니다.)

작중에서는 ‘붉은 일요일’이 될 ‘피의 일요일’의 배경에는, 잘 알려진 것처럼 러일전쟁 외에도 노동자의 처우 개선 요구, 투표권과 입헌정치 요구 등 여러 요구가 있었습니다. 평화로운 시위이기는 했지만, 대중적인 이미지에서 그려지는 것처럼 순박한 민중의 행진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보다는 최후의 수단으로 차르에게 직접 호소한다는 성격이 강했고, ‘우리의 청원을 듣지 아니하신다면 차라리 폐하의 궁전 앞에서 죽겠나이다’ 하는 청원의 마지막 문장에도 이것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결국 무력진압으로 시위가 끝난 뒤, ‘차르는 이제 없다!’라고 누군가 외쳤다는 야사에는 이러한 절박한 최후의 시도가 실패했다는 절망감이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니콜라이 2세는 무력진압을 사실상 방조한 뒤, 반발이 예상보다 크자 성급히 두마(의회)의 설립을 비롯한 개혁안을 내놓았고, 이는 모두에게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였습니다.

원 역사의 스톨리핀은 훌륭한 행정가이기는 했지만, 일개 철도청 직원에서 시작해 내각을 장악한 비테에 비하면 정치적으로는 훨씬 부족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한편으로는 비테보다 훨씬 보수적이었지만, 자신의 급진적 개혁으로 인한 반발에 대해서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좌우 양쪽의 미움을 샀고, 니콜라이 2세마저도 스톨리핀을 보호하려는 의지가 거의 없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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