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275화 (275/320)

90. 두려움 없어라 (2)

“그것이 참으로 신통한 기물입니다. 선전의(旋轉儀, 자이로스코프)와 나전(螺栓, 다이얼) 몇 개를 더 달았을 뿐인데, 전함의 화포를 백발백중으로 맞추게끔 할 수 있는 것이 나왔으니, 날붙이나 화약은 조금도 들어가지 않지만 작금 천하에 실로 매서운 병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지엄한 기무회의에서 신나게 태씨의 자산기가 얼마나 군문에 쓰임새 많은지 열변 토하는 사람은 다름아닌 병판 김기범이었다.

“자고로 수군은 멀리서 화포나 어뢰로써 적의 전선 제압함을 으뜸으로 삼으니, 고 수신 이순신의 병법도 이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제 이 기물이 우리 전선에 모두 보급된다면 그 어떤 거함이 오더라도 능히 상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 주상 전하의 성덕에 말미암음이니 어찌 찬탄치 않겠습니까?”

그러나 나머지 내각 사람들은 떨떠름하였으니, 융비총국에서 태씨의 시연을 보고 온 김기범이 그 소감을 떠드는 길에 적벽대전부터 금상 재위 초의 오지리와 이태리 싸움(제3차 이탈리아 독립전쟁)까지 고금의 수전(水戰)까지 총망라하여 저기 엄익관에서나 하면 좋을 일대 강연을 한 바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상전하 납시오’ 소리에 비로소 끊어졌던 그 말이, 회의 시작하고서 다시 안건으로 올라오니 재개되고야 말았다.

물론 군무에 병조판서가 발언하지 아니함도 곤란한 일이지만, 결국 전선을 정비하는 일은 재정이 들고, 이는 공산당 내각이 싫어할 안건이 아닐 수 없었다.

“대개 금번 토이기 제번이 소란한 데서 우리 기관총이 널리 쓰였는데, 이로 미루어보아 기병의 제도는 화포가 정예하면 쓰임이 자연히 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감군이 내각의 방침이요, 이전 추거 끝난 뒤에도 참의원에서 재차 확언을 받았으나, 신이 생각건대 수륙(水陸)의 균형을 조금 옮기면 능히 감군을 하면서도 이 기물을 우리 전선에 널리 도입할 수 있을 것입니다.”

평소답지 않게 말이 많은 김기범이었는데, 저 좋아하는 얘기 하느라 주변 사람들 눈치는 보지 못하여도 그 주장에 나름의 논리는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내각 중신들에게 그러하였듯, 듣는 귀남에게도 그 말의 십분지구는 다른 쪽 귀로 빠져나가고, 남은 인상은 무엇인지는 잘 몰라도 수사(水師)의 위력 크게 키울 수 있는 물건이 나왔다는 것이었다.

애통한 일 당하지 않으려면 나라에 힘이 있기는 해야 하고, 그 힘이란 물론 마음가짐도 중하겠지만 결국 무기를 벗어나 생각할 수 없는데, 어떤 무기가 중한가 하면 그의 경험으로 미루어보건대 총포가 있고, 땅크가 있으며, 로케트니 원자폭탄이니 하는 것도 있었다.

개중 기관총은 완전히 마음에 들지는 않아도 그럭저럭 쓸만한 물건이 나왔으며 그 후로도 꾸준히 개량되고 있었다.

애무왕, 아니, 자장방총은 영 성과가 신통치 않아, 흠 하나를 고치면 둘이 튀어나오곤 하던 중 천우신조로 어느 미국 공인 하나가 융비총국에서 일자리를 구하기에 곧장 기용한바 조만간 문제가 말끔히 해결될 것이라 하였다. 백이의(白耳義, 벨기에)국에서 일하다 한창 그 나라 사정 어려울 적 군대도 따라서 줄어드는 바람에 새 일터 찾던 이였는데, 이름이 보람인가 보랑(존 H. 브라우닝)인가 하였던 듯했다.

그러나 운은 거기까지였으니, 지금의 자동차는 땅크는 고사하고 장갑차도 겨우 만들 정도요 – 물론 기관총 한 정만 올려도 쓸모가 아주 많기는 했다 – 그 이상은 귀남 본인도 원리는커녕 어떻게 만드는 물건인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김기범 말하는 것처럼, 줄일지언정 아예 폐하지는 못하는 군대이니 기술로써 더욱 매섭게 가다듬음은 가하지 않겠는가 생각했다.

다른 안건들, 예컨대 근래 부쩍 늘어난 도회의 무뢰배 징치하는 법도나, 떨어질 줄을 모르는 인광석 값을 어찌 충당할지 등등 여러 논의가 이루어지는 동안에도 계속 뇌리에 남았는데, 그 사이 모임이 파하였다.

“다음은 정강사 경리가 들기로 하였으렷다?”

“예, 전하. 그러하옵나이다.”

귀남 기억하기로 임금 노릇이 옛날에만 해도 참 번거롭고도 까다로웠는데, 번잡한 예 중 근거가 없거나 귀남이 꺼리는 것은 혁파하였으니 아들 녀석이 물려받게 되면 편리할 것이었다.

그런데 함께 벼슬하는 것도 인연이라지만 혈연만은 못한지, 윗사람이 아랫사람 배려하는 법도가 관료들 사이에서는 조금 다른 듯하였다.

얼마 전 사사롭게는 호조의 어느 관원과 사촌이라는 참의대부가 모임에서 제의하기를, 관리의 퇴직하는 연수(年數)가 국법에 본디 정해져 있었으니, 그 제도를 재차 시행하여 민간에서 하는 것처럼 소위 퇴년(退年)을 정하자 하였다.

헌데 가장 먼저 나서서 가로막는 이가 다름아닌 노신(老臣)들이었다. 그 필두로 최익현이 나서서는, 나라에서 기로(耆老) 높이는 아름다운 뜻을 드러낸다면 더욱 견마지로를 다함이 신료의 도리라, 품계를 높이고 궤장(机杖) 하사하는 예가 어찌 헛되이 있겠느냐 하였다.

최익현의 나이도 나이거니와 그의 스승 화서 선생도 불편한 몸 이끌고 일흔 넘어 환로(宦路) 올랐음을 모두가 알기에 함부로 반론치 못하는데, 거기에 편 드는 이들이 여럿 있었다. 예컨대 노환으로 거동 불편한 노신 오배도 양주에서 상서(上書)하기를 사람은 모름지기 쓰지 않으면 궁벽해지고, 재주는 드러내지 않으면 용렬해진다 하였는데, 반대로 퇴년 정하자는 데 동조해줄 사람들-이를테면 어윤중-은 하필 이번 내각에서는 다들 야인이었다.

그리하여 중론은 최익현 말마따나 궤장 내리던 예가 있으니 품계에 따라 치사(致仕)하지 않아도 되는 (즉 못하는) 사람을 가르자는 데 닿게 되었다.

혹 올해로 나이 일흔하나인 김윤식이 그에 불만을 품었을까 안색 살피니, 연고후덕(年高厚德)한 기색에 별 불평 없는 듯하였다. 과연 옛 박규수 문하의 네 사람 중 가장 사람됨 무던한 이답달까.

“신 정강사 경리 김윤식 입시이옵나이다.”

“어서 오오. 시각이 시각인 고로 내 밤은 못 구워주겠구려.”

“수어지교(水魚之交)의 아름다움이 이 조정에 고루 있음을 어찌 모르겠나이까. 미신(微臣)을 제하여도 조정과 참의원에 두루 인재가 많으니 아끼시는 뜻을 널리 펼치신들 하등 거리낄 바 없을 것입니다.”

넌지시 최익현 말에 동조하는 뜻 보이는 김윤식이었다.

그런데 이윽고 본론 나왔는데, 최익현 의론에 동조하는 바는 퇴년의 건뿐만이 아니었다.

“근래 토이기 번국들이 아조의 기관총으로써 싸움의 이익을 크게 얻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장차 아국이 병비를 만들어내는 것을 둘러싸고 허물이 생길까 두려워하는 논설이 있습니다. 신이 생각건대 이번 자산기의 일이 그에 들지 않을까 합니다.”

“어찌 그렇소?”

“신 등이 검토하기로, 그 자산기가 화포의 예리함을 곱절로 할 수 있음은 아직 시험하지 아니하였으나 일리가 있습니다. 허나 그 실리를 모두 취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전선으로는 어려우니, 지금의 전함은 크고 작은 화포를 모두 싣고 있기에 자산기로 얻는 효용이 그리 크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강사에 몇 년 앞서 구주 열국에서도 앞서거니 뒷서거니 당도하는 결론은, 거함이 여러 종류의 포를 나누어 싣는 것보다는 오직 거포만을 싣는 것이 장차 싸움에 이롭다는 데 있었다.

자산기만 하더라도, 그 쓰임새는 능히 포탄을 수십 리 밖에 날리는 거포에서 가장 큰데, 그러므로 거포를 많이 싣고 있는 전함이어야만 비로소 그 효험을 보았다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태씨의 재주가 훌륭하다 하지만, 그에 맞는 전함을 우리가 스스로 만들기에는 힘이 부치고, 다른 나라를 통하여 만든다면 우리가 창안한 바가 결국 남에게 드러나고야 말 것입니다.

더구나 현 내각이 천하대란에 대비하여 내놓은 대계를 살피면, 무엇보다 아국이 계속 도의의 나라로서 바르게 처신하는 것이 중한데, 이제 정예한 병기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하여 곧장 이를 뽐내듯 드러내게 되면 어떻겠습니까?”

“하면 태씨가 만든 자산기를 그대로 묵히자는 말이오?”

“신 등이 논의하기로, 이미 영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비슷한 궁리를 하고 있으니, 설령 우리가 한 발 앞섰다 하여도 몇 해 안으로 저들 또한 유사한 기물을 만들어낼 것입니다.

물론 태씨의 창안이 훌륭하기는 하나, 드러낼 수도, 쓸 수도 없으니, 이것이 자산기를 두고 주저하는 까닭입니다.”

기껏 만들었건만 애물단지라는 것인데, 아무리 그래도 그냥 버려둘 만큼 나라 둘러싼 사정이 안심할 만하냐 하면 그것은 아니었다.

“다른 쓰임새는 없겠소?”

하다못해 휘고 부러진 숟가락도 엿과 바꿔먹는 쓰임새는 있을진대, 모처럼 참신한 기물이 나와 국방에 큰 보탬 될 지도 모른다는데 그냥 두기는 아쉬울 뿐이었다.

“재차 논의토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손수 쓴다 하더라도 지금은 어려움이 많을 것이니 삼가 헤아려주시옵소서.”

말이 ‘재차 논의’지, 실제로는 재고하여도 답이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골판지 상자 하나도 주워다가 긴요하게 쓰던 귀남으로서는 그냥 내버려두자는 것이 영 마뜩지 않은 고로, 잠시 체통 잃고 책상 두드리더니,

“그러면 이 자산기 법도를 당당하게 내다 팔면 어떻겠소?”

하며 변죽인듯 변죽 아닌 곳을 쳤다.

어차피 조만간 도로 불릴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때를 조금이라도 늦춰보려는듯 교남에서도 (아직) 한적한 곳에 새로 거처 마련한 어윤중에게 불청객 찾아온 것은 그로부터 사흘 뒤였다.

“아니, 운양(김윤식) 형께서는 무슨 일이십니까? 고균 아우는 또 웬 일이고?”

“일재 형, 우리 일 하나 함께 하십시다.”

“자네가 단도직입으로 나오니 외려 무섭군그래.”

거두절미하고 김옥균이 나섰는데, 그것도 저리 싱글생글 웃으며 말하니 반드시 경계해야 할 것이었다. 당장 개화당이 한창 경제개발 운운하며 나서던 시절 실무가 모두 어디로 떨어졌는지 생각하면, 김옥균이 억울하다 할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옆의 김윤식이 웬일로 막내 – 이제 오십줄 들었으니 ‘막내’란 말도 영 이상하지만 – 사제(師弟)를 옹호하고 나섰다.

“험험, 고균이 평소 하는 일과는 달리 그리 음험한 일은 아니니 걱정 말게. 조정의 일이기는 하나 자네가 호조에서 하던 것에 비하면 별반 어려울 것도 없다네.”

“존형께 기탄없이 말씀드리자면... 어떻게 빠져나온 아문일진대 함부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걱정 말게. 아문이 아니라 궐내로 등청하게 될 것이니.”

“그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저도 엄연히 문사(文士)로서 후대에 ‘일재집(一齋集)’ 한 질쯤은 남겨야 할 터인데, 이제 겨우 망중한 얻었으니 참으로 귀한 짬이란 말입니다.”

당장 저와 함께 고생한 홍종우만 하더라도, 대학원에서 재무와 이재의 학을 가르친다, 숫제 교범을 하나 쓴다 하면서 꽤 보람차게 살고 있었다. (그것을 ‘바쁘게’ 산다 하기에는 지난 몇 년의 업무가 너무 과중했다.)

“내 다시 말하지만 걱정 말게나. 제수될 벼슬은 실직(實職)이 맞네만, 실제로 무얼 하지는 않을 게야.”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곳 다음으로는 도원(김홍집) 형께 찾아갈 생각입니다. 왕년의 사총(四寵)이 다시 모이는 셈이지요. 성상 도와 나라 일으켜세우는 일에서도 공을 세웠으니, 이렇게 넷이 함께하면 세상에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또 말 끊고 대신 답하는 김옥균이었다.

“고균 말대로, 잠시 정강사 아래에 자네들 셋을 모두 모을 생각일세. 공공연하게.”

“그리하여 무슨 일을 하겠다는 것인지요?”

“나름 군국의 기무에 속하는 일인 고로, 한 번 꺼내면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찾아온 본말을 모두 전해주기 전에는 우리 또한 돌아갈 수 없고.”

나이 차이로는 거의 아버지와 아들뻘인 두 사람이 의기투합하여 괴롭히니 어윤중이 홀로 어찌하겠는가.

“후... 좋습니다. 도와드릴 테니 우선 무슨 곡절인지부터 다 말씀해주시지요.”

“별 건 아니고, 얼굴만 비추어주면 된다네. 거기에 더불어 융비총국 아래에서 새로 만든 기물들 시연하는 것을 조금 돕고.”

“그게 전부는 아니겠지요.”

김옥균이 씩 웃으면서 다시 나섰다.

“형님. 제가 이리 신나서 나섬에는 다 연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남 속이는 못된 궁리인가 보군.”

김홍집에 이어 어윤중까지 저를 이리 생각하다니, 은근 섭하다 여기면서도 사실 못된 궁리라서 이렇게 신나게 따라붙는 것이 맞았기에 별 말 못하는 김옥균이었다.

“차마 아니라고는 못 하겠네. 자, 들어보게나...”

자산기가 참 좋고 또 정교한 물건이기는 하지만 또 막상 쓰기에는 계륵(鷄肋)과 같으니, 차라리 나라에 이익 되도록 떳떳하게 팔아버리면 어떻겠는가 하는 것이 성상의 발상이었다.

“허나 그처럼 정교한 물건이라면, 제가 아는 서양 나라들이라면 어찌 기(器)에 밝지 못한 동양인들이 그런 훌륭한 것을 만들었겠느냐며 의심부터 하고 볼 듯한데요.”

“그러므로 형님을 찾아온 것 아니겠습니까? 운양 형님만 계시던 정강사에 갑자기 나머지 셋이 합류하여, 무언가 흉흉한 궁리를 하는 모양새를 잔뜩 취하다가 자산기 만든 것을 공표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예 믿지는 않더라도... 무언가 있다고 여기기는 하게 되겠군그래.”

“그러다 보면 급한 쪽 어디 하나쯤은 반드시 우리 쪽에 말을 건네오게 될 것입니다. 만일 그래도 적막하다 하면 더욱 요란스럽게 일을 벌이면 될 것이고요.”

김윤식도 끄덕이는 것을 보니, 김옥균이 즉석에서 내놓는 어설픈 계책은 아닌 듯했다.

“후... 좋습니다. 단 이번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유시(酉時)에는 퇴청할 것이니, 성상께 잘 아뢰어주십시오.”

“일국의 정승 하던 사람이 궐장(闕墻) 넘다 걸렸다는 소화(笑話)는 아니 돌도록 힘쓰겠네.”

그리하여 귀남은 듣기만 하고 부를 일은 없던 노랫말대로 역전의 전우들이 다시 뭉쳤는데, 거기서 그치지 않고 갑작스레 발표하기를, 모월 모일 인천 앞바다에서 수조(水操)를 할 것이니 그리 알라 하였다.

갑작스레 영수(寧守)가 모습을 드러내니 옛날 제물포 앞바다에 법국 함대 왔던 것을 기억하는 노인들은 감탄 금치 못하고, 그 위에는 양주에서 만들었다는 그 ‘비행기’가 창공을 자유자재로 누비면서 수조하는 함대 위를 장식하였다.

백발백중으로 멀리 표적을 맞추니 관중은 찬탄하고, 솔개와 같은 비행기의 번쩍이는 위용은 사람 눈을 붙잡는데, 여기서 사람이라 하면 단순한 구경꾼만 있지는 않고, 채사군도 일군(一群)이요, 외국 공사관을 대놓고 또는 은밀히 드나드는 이들도 또 일군 이루었다.

그러면서 대관절 무슨 곡절이냐 묻는 신보의 채사군들 앞에서는 공언하기를, 근래 대조선국의 병비가 신문물에 힘입어 대폭 정교해졌으니, 이를 공표하기에 앞서 우선 안의 사람들끼리 손발 맞춰본 것이라 하였다.

“혹 무슨 신문물이 있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이만한 ‘특안(特案, 특종)’에 얼뜨기들 시켰다가 중요한 것 놓칠까 두려워 직접 인천 바닷가까지 나온 『해동일보』의 이승만에게, 이렇게 섭영 찍힐 자리에서 이야기하는 일은 제게 꼭 맡겨달라 청하여 나온 김옥균이 씩 웃으며 답했다.

“이 자리에서 어찌 함부로 드러내겠소? 그러나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 하나는, 우리 조선국은 이전에도 그러하였듯 이런 병비를 결코 포학한 일에 쓰지 않을 것이니, 예와 의로써 함께 사귀는 나라에는 아낌없이 나누어 성상 전하의 아름다우신 덕에 누가 되지 않도록 할 것이외다.”

유럽 나라들이야 정강사인지 정강이인지 사실 그 자체로는 신경 쓸 일이 아니었지만, 청국과 일본국은 모두 발칵 뒤집혔고, 그러다 보니 대관절 무슨 일이기에 발칸 반도에 이어 아시아가 저리 시끄러운가 하며 결국 유럽 외교가까지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거기에 모르는 듯 조각조각 ‘비밀’들이 새어나가니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조선국에 문의 넣는 나라가 하나씩 생겼다.

그런데 그 중 가장 앞에 있던 것은 어느 누구도 – 심지어 그 나라의 군주도 – 예상치 못하였을 의외의 나라였다.

“전함의 사격통제를 자동화하는 획기적인 계산기를 개발했다고 들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혹시 전에 밝히신 그 ‘공여’의 대상에 이 계산기도 들어가는지 문의드려도 될지요?”

질문은 직설적이면서도 신사적이되, 묻는 사람 제복은 덕국 수사의 군복이니, 덕국 공사관에 머무는 무관이었다.

“그... 귀국 군주 전하나 내각의 동의를 받은 제의입니까?”

켕기는 구석 많은 눈치로 무관이 답했다.

“아닙니다. 제국해군대신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 제독의 비공식적인 문의입니다.”

김옥균으로 하여금, 그 나라 임금 빌헬름도 퍽 속 썩일 일 많겠구나 하면서, 문득 남 걱정을 하게끔 하는 답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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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 조선이 서양의 과학기술을 수용하는 것을 넘어 그 발전에 미력하게나마 거들기 시작하면서, 과학 및 공학 용어들도 19세기 중반 중국과 일본에서 번역된 것을 넘어 독자적인 표현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선전의’나 ‘나전’ 같은 표현은 작중의 창작입니다. 원 역사 일본이 이 시기 동아시아의 지역열강으로 거듭나면서 서양 지식의 번역에서도 중추적 역할을 독점하게 된 것과 달리, 조선을 비롯한 한자문화권 전체가 그럭저럭 건재한 상황이기에 음역보다 한문으로의 의역이 훨씬 우세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나가듯 언급된 존 브라우닝은 오늘날까지 사용되는 수많은 총기들을 설계한 전설적인 총포 기술자입니다. 한때 많은 국군 장병들을 고생케 한 M2 중기관총이나 1914년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을 살해함으로써 원 역사 1차대전의 개전을 알린 M1910 권총, 100년 넘게 미군의 사랑을 받은 M1911 권총 등이 대표작 중 일부지요. 그러나 그의 재능에 비해 생전 그가 받은 대우는 썩 좋지 못했는데, 윈체스터 社 등 미국 내 총기 제조사들이 그에게 로열티를 지급하는 대신 푼돈을 주고 판권 자체를 사들이는 방식을 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미국 내에서 다른 파트너를 찾는 데 실패한 브라우닝은 소규모 조병창이었던 벨기에의 FN(Fabrique Nationale)과 계약을 체결하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윈체스터 사를 비롯한 미국 내 총기 제조사들과 완전히 사이가 벌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20세기 초 FN사는 한정된 시장인 유럽 총기시장을 벗어나 한창 사업 다각화를 꾀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자동차분야에 진출하려 노력했는데, 한동안은 성공을 거두었지만 끝내 1970년 완전히 철수하게 됩니다. 작중에서는 여기에 벨기에 정부의 눈물겨운 재정 상황이 겹쳐 어쩌다 브라우닝이 조선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안양대군이 영국에 갔을 때 보았던 증기터빈의 발명은, 다른 여러 기술의 발전과 함께 1차대전 직전 건함경쟁의 상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드레드노트급 전함의 건조로 이어지게 됩니다. 드레드노트급 전함은 단일한 구경의 주포를 원거리에서 최대한 정밀하게 사격하는 것을 목표로 설계되었는데, 이를 통해 적함이 유효타를 내지 못하는 거리에서 일방적으로 적을 공격할 수 있으리라 기대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독일에 대한 억지를 달성하기는커녕 오히려 대규모 건함경쟁을 촉발했고 – 심지어 아르헨티나, 브라질 등 남미 국가들도 경쟁적으로 드레드노트급 전함을 도입하게 되었습니다 – 영-독 양자합의를 통해 건함경쟁을 일정한 수준으로 제한하려는 노력이 양국 모두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동상이몽 상태에서 시작한 협상이었기에 결국 어떤 시도도 성공에 이르지 못했지요.

수십 킬로미터 밖의 표적을 함포로 타격하기 위해서는, 사격제원을 정밀하게, 그리고 신속하게 계산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 이미 아날로그 컴퓨터 분야에서 상당한 기술을 가지고 있던 영국은 다양한 아날로그 계산기를 도입했는데, 작중에서는 두마레스크(Dumaresq)처럼 단순한 계산 보조기구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 고차원적인 아날로그 계산기를 도입하여 일사분란한 사격통제를 달성하려는 노력은 피셔 경의 주도로 아서 폴렌(Arthur Pollen)이나 프레데릭 드라이어(Dreyer) 등에 의해 드레드노트 도입 전부터 추진되었지만, 결국 1차대전 발발 후에야 겨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이때의 시도를 통해 완성된 아날로그 컴퓨터 기술은 전간기를 거쳐 널리 보급되었는데, 영국의 해군본부 사통테이블(Admiralty Fire Control Table)이나 미국의 노던(Norden) 폭격조준기처럼 이러한 성공작들은 최고 수준의 군사기밀로 간주되었습니다. 이때 완성된 아날로그 체계들은 일부 개량을 거쳐 1970년대까지도 사용되었습니다.

예비군 창설은 1961년이었지만, 이들을 무장하고 훈련할 예산과 장비가 부족하여 한동안 예비군은 유명무실한 존재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후 월남전 파병에 대한 반대급부로 미국이 한국군 현대화를 지원하게 되고, 1968년 일련의 사건으로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이 높아지게 되면서 향토예비군이 실질적으로 창설되게 됩니다. 향토예비군가가 작곡된 것도 이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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