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두려움 없어라 (1)
조선국에서 통용되는 ‘과학’이란 낱말은 본디 ‘제과잡학(諸科雜學)’이므로 낮춤말인데, 그것이 몇 년 사이에 엉뚱하게 전용되어 온갖 잡다한 곳에 다 쓰이게 되었다.
무엇이든 앞에 ‘개화’ 붙이던 것이 식상해졌음이 한 가지 이유요, 처음 ‘개화’ 타령하던 것과는 또 결이 다른 신문물이 근년 사이 이곳저곳 퍼져나가 선보인 것이 또 다른 이유였다.
예컨대 태씨라는 용한 공인이 창안한 태씨환(泰氏環, 테슬라 코일)으로 말하자면 수십년 전 장터에 선보였다면 당장 몽둥이 들고서 어디 요사한 물건으로 천지의 기운을 뒤흔드냐며 서생 여럿이 달려나왔을 터인데, 바로 그리하였을 서생들, 또는 그 서생의 문하에서 배운 젊은이들이 요새는 앞장서서 그런 기물을 들고 강연이니 무어니 하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희한한 이치였다.
그러나 사정 알고 보면 썩 말끔하지는 못한 것이, 그런 복잡한 전기의 기물로 돈벌이하는 자유당 큰손 안씨네 맥안공행과, 이왕 시작한 강연으로 여러 사람들 마음을 사로잡으려던 자유당 서생들 생각이 맞아떨어졌으니 결국 정략(政略)에 따름이었다.
허나 정말로 물정 어두운 시골 생원이 있어 별 해괴한 도깨비 놀음도 다 있구나 하고 입 헤 벌리며 구경하다가, 남의 시선 닿으면 곧장 입 다물고서,
‘대개 저러한 기물이 기이하여 사람을 홀리나 그 본질은 완물(玩物)을 넘지 않으니, 기예(奇藝)가 어찌 명도(明道)를 넘겠는가?’
하고서 수염 가다듬으려 하면 곧장,
‘저것은 모두 과학의 소산으로 공장이 만든 기물인데, 그 이치를 헤아리면 결국 사람이 알 수 없는 것이 드물다. 기실 괴력(怪力)은커녕 천지 조화의 일부요, 사람이 오직 귀한 존재로서 능히 이를 헤아리고 깨달아 저의 것과 같이 하기를 불이나 옷감과 같이 하니 이 또한 자연스러운 성정의 발로다. 어찌 호학(好學)하는 뜻에서 과학을 덜어낼 수 있겠는가!’
하면서 근래 곡부에서 논의되는 성학(聖學)의 첨단도 들어보지 못한 고루한 서생으로 대접하니, 아무리 선비가 선비라지만 엄연히 호승(好勝)하는 조선 사람일진대 어찌 가만히 있겠는가.
그렇게 면박당한 이들은 대개 그날로 『격물신문(格物新聞)』처럼 이 과학 이야기만 다루는 글을 구해 읽거나 적어도 신보에 나오는 비슷한 소식은 뚫어져라 눈여겨보고서, 저와 비슷한 처지의 다른 사람들 앞에서 유세 부리며 아는체하곤 하였다.
간혹 그러지 않고, 진지하게 이 과학이란 것에 기반한 소위 개화문명이 얼마나 사람에게 이로운가를 논하려 하는 선비들도 있었는데, 그런 이들은 대개 유일(儒逸)이므로 사람 하나가 귀한 자유당으로서는 곧장 모셔올 일이었다.
그리고 그 『격물신문』 펴내는 곳은 다름아닌 공조요, 그일 총괄하는 사람은 변수(邉燧)이니, 이것이 정착되면 다른 신보국에 넘겨 번잡한 일은 줄이고 소득도 올리려는 것이 공조 아문의 계획이었다.
그런데 태씨환 이야기가 대서특필된 곳도 다름아닌 『격물신문』이었는데, 이는 변수의 다른 업무가 태씨, 그러니까 니콜라 테슬라가 어디 엉뚱한 데로 튀어나가지 않도록 감리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차하면 벼슬 내려놓고 신보사나 하나 차릴까 싶기도 합니다. 근래 돌아가는 형국을 보면 꼭 용문(龍門) 오르는 것만이 영달하는 길이 아니요, 간혹 도롱뇽이 이무기도 거치지 않고 용이 된다던가, 용 있을 곳에 봉이 떡하니 자리잡는다던가 하던데...”
그리고 하필 『격물신문』에 태씨환이 한동안 대서특필되었던 것에는, 낙심한 테슬라의 사기를 나름대로 북돋기 위한 뜻이 있었다. 그 낙담의 원인을 자신이 제공하였다는 데 대한 일말의 미안함도 있었으리라.
“여하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좋다 여기는 기물 고안하는 것이 선생의 재주 아니겠습니까? 금번에 여의치 않게 되었다지만 다음에는 능히 진(進) 자를 받을 수도 있으니, 너무 낙담치 마시지요.”
장판 사건 이후로 그 괴팍한 성질과 함께 풀도 꽤 죽은 테슬라였다. 물론 운현궁 주인 살아계실 적 그리 궁궐에 불을 냈더라면, 풀 죽기에 앞서 사람이 죽었을 것이련만, 전기장판은 참으로 쓰임새 큰 물건이니 죄주지 말라는 어명 있었기에 봉변을 모면할 수 있었다.
장판은 그 이후로 개량하여, 값이 헐하지는 않아도 나라의 중신들에게 은사할 만한 만큼은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다. 가격과 안전 등등을 위해 타협하고 타협하다 보니 장판보다는 보료라 부를 만한 물건이 나왔는데, 그래도 조선 사람들 사이에서는 크게 사랑을 받을 만한 것이라, 특히 양옥 사는 사람들로서는 그만큼 절실한 물건도 드물었다.
어제 군밤에 이어 어사 전기보료의 온기를 느끼게 된 이들이, 결국 조선사람 피는 못 속이는 김옥균을 비롯해 여럿 있었는데, 테슬라로서는 저의 천재성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 물건이라 영 마음이 편치 못했다.
“후... 말은 고맙소.”
괴상한 발음을 제하면 조선말이 퀴리 부부보다도 더욱 능숙한 테슬라가 성의 없이 대꾸하였다.
“그리고 여차하면 도저히 못하겠다며 드러누우면 될 일 아닙니까? 호조 사람들은 일이 내려오면 우거지상 팍 쓰고 별별 상스런 말은 다 입에 담으면서도 끝내 다 해내던데, 제 생각에 이는 올바른 양생(養生)의 도가 아닙니다.”
물론 정말로 테슬라를 위한 말만은 아니었다.
공조 안에서도 여기저기에 쓸 일이 많은 것이 테슬라의 재능인데, 예컨대 소양선생 후보가 힘써 짓고 있는 제방에 물의 힘으로 발전하는 기물 들여놓는 것이 하나였다.
그런데 다른 것은 제쳐놓고 이 ‘자산기(自算機)’ 구상에 매달려 있으니, 아무리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지만 일의 우선순위 따지지 못하는 테슬라 성정은 보는 이로 하여금 답답케 하는 바 적지 않았다.
“도무지 그럴 수 없으니 어쩌겠소? 다음 네 번째 작품은 잘 되기를 바라야지. 초심으로 돌아가서 전기회로를 어떻게 잘 만들기만 하면...”
테슬라 본인의 명명으로는 ‘테슬라 자동 연산 기계’라 하는 이 물건은 어제 퇴짜맞은 것까지 포함해 1호부터 3호까지 있었는데, 모두 나름대로 작동은 하지만 흠결이 많았다.
1호는 저의 야심껏 진공관과 기타 복잡한 – 아마 테슬라 본인이 마음만 먹으면 논문으로 써낼 수도 있을 – 전기의 기법을 총동원하였는데, 그의 머릿속에만 있다가 세상에 처음으로 선보인 물건이라 장담한 것이었다. 헌데 정말로 세상이 낯설었는지 호조 관원들 앞에서 시연하던 중 진공관 네 개가 동시에 터져버리고야 말았다.
2호는 전기장판 소동 직후에 고안한 것이라, 반대로 전기를 최대한 배제하고 톱니바퀴와 작은 활차(滑車) 따위로 정교하게 만들었는데, 테슬라 본인 말대로 평소 그가 하던 것과는 매우 이질적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만들다 보니 특정한 연산을 빠르게 하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여러 용도로 두루 쓰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그런 물건이라면야 일본국에서 개량한 자동 주판을 더 사들이는 것이 낫겠다는 게 재무참판 이용익의 단평이었다.
절치부심 끝에 나왔다가 호조 문턱도 넘지 못한 3호는 천공단자(천공카드)를 이용하여 나름대로 검증된 제도를 토대로 했는데, 그 성정 죽이고서 본인 말로는 ‘에디슨이나 마르코니 같은 부류가 하던 짓’을 하다 보니 정말로 미국 공인 호씨(허먼 홀러리스)의 전영(특허)을 침해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친히 찾아온 변수였다.
“덕분에 호씨에게 그 기계를 주문하는 일이 호조에서 논의되고 있다니 나랏일에 도움은 된 셈입니다.”
“그렇다 한들 내게는 도움이 되지 않잖소. 후... 이런 데서 한계를 느낄 줄이야.”
“흠흠, 심기일전할 만한 일이 하나 있다 하면 위안이 되겠습니까?”
“무엇이오?”
“남들 앞에서 선생의 재주를 뽐낼 기회지요.”
테슬라가 저의 자랑하기를 좋아함은 그의 수많은 괴벽 중의 하나라.
얼마 전 병조와 삼군부가 머리 맞대고 논의한바, 지난 참의대부 추거에서 공산당이 또 득세하였으니 자유당과 손잡으면 쉽게 대부의 과반을 넘길 수 있으므로 감군의 추세는 멈출 수 없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군부가 앞장서서, 어떤 부분에서는 양보를 할 터인즉 이쪽에는 재정을 아끼지 말아달라 제안함이 어떻겠느냐 하는 말이 나왔다.
정강사 모임의 세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 안에서 고심하는 내용이 대개 비행기 같은 새 기물로 국익 도모하는 것이라. 새로운 문명 이기 도입하여 나라 방비와 민생을 모두 돌본다 하면 지존과 내각에서 보기에 모두 좋을 것이었다.
하여 뭍과 물 지키는 나라의 장수들이 한동안 돌아가며 테슬라의 공방을 찾았는데, 처음에야 재밌었지만 곧 듣는 이들 중 백에 아흔아홉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림을 깨달았기에 다시 기분이 푹 꺼졌다.
“너무 그들을 탓하지 마십시오. 이 기물들에 들어간 공과 재주가 얼마나 심원한데, 그것을 무부(武夫)들이 어찌 단번에 이해하겠습니까?”
도리어 무안해진 변수가 저의 일상 되어버린 테슬라 달래기를 또 하고 있는데, 앞서 공방을 훑고 지나가던 일행의 말미에 있던 젊은이가 도로 고개를 들이미는 것이 보였다.
“게 누구인가?”
“어, 그, 한 가지 여쭐 것이 뒤늦게 떠오른바 이리 흠례하게 되었습니다.”
군례 올리는 부위는 아직 이립 나이도 되지 않았을 법한 앳된 젊은이인데, 흑색 예복에 각 잡힌 군모 보니 소속은 수사(水師)였다.
“부위 신순성(愼順晟)이라 합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태 선생께 여쭙고자 하는 바가 있습니다.”
“묻게.”
심드렁한 대꾸에 조심스럽게 신순성이 물었다.
“저 자산기 2호라 하신 기물은, 혹시 수를 더하고 빼는 것에만 쓸 수 있는지요?”
“그럴 리가 있는가? 응용할 바는 무궁무진한데...”
“그러면 혹시, 전선에 이를 싣고 함포를 겨냥할 때 쓸 수도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장차 해전에서 쓰임새가 아주 많을 듯합니다.”
“그야 그렇겠지...”
저와 같은 고민을 저 영국의 피셔(John A. Fisher) 제독을 비롯해 유럽 열강의 해군이 공통으로 하고 있음을 알 리 없는 신순성의 천진난만한 물음이었다. 반면 그 질문에 ‘그렇다’라고 답할 만한 물건을 보유한 나라는 아직 조선 외에는 없었다.
“그래서, 정확히 무슨 연산이 필요한가? 자네가 말하는 그 용도에는.”
조선국이 아직 남들 가지지 못한 무기를 지녔다는 사실은 평소와 같았더라면 정강사 통해 귀남의 귀에까지 들어가 크게 기꺼워하는 원인이 되었으련만, 그 무렵 조선 땅에서 나온 병기가 천하에 큰 파란을 이미 일으키고 있었으므로 기쁨과 함께 두통을 유발하게 되었다.
그 사정은 지구 반대편 동루멜리아에서 발원하였다.
동루멜리아(東 Rumelia)라는 주(vilayet)의 이름은 그 자체로 부자연스러웠다. 루멜리아라는 이름부터가 사실 이 큼직한 반도 거의 전체를 지칭하는 것이었는데, 트라키아와 불가리아 사이의 땅만을 콕 집어 동루멜리아라 부르는 것은 오직 땅을 빼앗기지 않기 위함이었다.
거의 삼십 년 전의 대타협에서, 북쪽과 서쪽 공국들이 사실상의 주권을 인정받으면서, 파디샤와 ‘숭고한 문(Sublime Porte, 오스만 정부)’은 불가리아에게 고스란히 넘기기 무엇하였던 땅을 따로 떼어내 별도의 주로 독립시키기로 하였다.
사실상 독립한 공국들의 후원자를 자처하는 러시아는 ‘남 불가리아’라는 이름을 제안했는데, 언제고 불가리아가 집어삼키게 될 것이라는 노골적인 뜻을 담고 있었다. 이에 궁여지책으로 붙인 이름이 동루멜리아였다.
그러나 그런 움직임이 무색하게도, 외교와 뇌물 끝에 동루멜리아의 총독직은 불가리아 대공이 겸임하게 되었다. 그나마 합의 직후 대공 알렉산더르(Alexander of Battenberg)가 병사하고 그의 아들은 아직 어렸기에, 소피아(불가리아 수도)와 코스탄티니예의 합의로 총독을 임명하는 형태로 파디샤의 체면이 조금은 유지되고 있었지만.
그리고 이제 그것도 위태롭게 되었다.
지난해 벌어진 악몽, 불가리아와 ‘루마니아’ - 로마인들의 황제도 자처하는 파디샤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국명이었다 – 에 이어 세르비아, 보스니아, 알바니아, 몬테네그로까지 모든 발칸 속국들이 명목상의 종주권까지 일제히 거부하고 나선 이래로 군사적 긴장은 죽 유지되고 있었다. 저들끼리 모아두면 곧장 땅이나 이름을 두고 사생결단 벌일 작자들이, 반역에 있어서는 보조를 맞추니 신께 한탄할 일이었다.
그러므로 이제 ‘숭고한 나라’에서 반역자들에게 선공을 가하든 (가능성은 별로 높지 않았다) 독립과 함께 영토를 확장할 생각으로 저쪽에서 먼저 공격해오든 (이쪽은 불쾌할 만큼 가능성이 높았다) 동루멜리아는 전화(戰禍)에 휘말릴 것이었다.
어떻게 하면 위대한 투르크 민족의 명예를 지키면서 물러날 수 있을 것인가? 승리가 요원함을 현장에서 바로 알아차렸기에, 눈이 있는 사람이 짊어질 수밖에 없는 고민을 하는 젊은 중령 엔베르 파샤(Enver Pasha)는 침묵하는 지도를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때, 뒤의 장막이 걷히면서 낯선 냄새가 훅 밀려왔다.
“여기에 중령이라는 자가 있다 들었는데.”
“여기 이 사람입니다.”
“허, 자네가?”
순수한 놀람이 경멸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물론 엔베르 파샤도 눈앞의 경기병대 대장을 업신여기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카라파팍(Karapapak) 부족의 대장 되십니까?”
“알아보는군. 테레케메(Terekeme) 부족과 함께 기병 칠백 명을 이끌고 왔다네. 파디샤의 적들은 어디에 있나?”
‘지도는 볼 줄 아시지요?’라고 비꼬는 대신 최대한 건조하게 지도를 짚으며 말했다.
“이 주 전역에 반란군 전초부대, 그리고 그에 동조하는 반역자들이 고루 퍼져 있습니다. 그러던 중 어제 저녁, 척후가 여기서 40베리드(Berid, 40베리드=약 9km) 떨어진 마을에서 수상한 움직임을 포착했지요.”
“확실한가?”
“분명 불가리아 반역자들의 군복을 보았다고 합니다. 전 병력을 이끌고 가서 위엄을 보이시지요. 공은 가감없이 적어서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대치가 길어지면서, 접경지대부터 시작해 불가리아군이나 루마니아군이 동루멜리아를 드나드는 일도 함께 늘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무력시위나 산발적인 교전 정도가 전부였지만, 점차 양쪽의 병력이 증강되고 있으니 언제까지고 그런 모호한 상태가 계속되리라 볼 수는 없었다.
“뭐, 알아서 하게. 우리야 적이 마을에 박혀 있으면 오히려 더 좋지! 취할 수 있는 것이 더 많으니.”
애송이에다가, 눈앞의 사냥감도 스스로 취하지 못하는 겁쟁이라고 생각하는 듯한 반응이었다.
“신의 가호와 무운이 있기를.”
곧 말발굽 소리와 웃고 떠드는 소리가 우렁차게 병영을 메우고, 들이닥친 것처럼 빠르게 사라져갔다.
‘두메산골 야만인들 같으니.’
카라파팍이 어느 골짜기에 사는 부족인지는 몰라도, 기껏해야 쿠르드인이거나 개종한 아제르바이잔인 아니겠는가? 투르크 겨레가 죽고 다치는 것보다 저들이 먼저 나서는 것이 크게 보면 모두에게 이로웠다.
그렇기 때문에, 그와 그의 동지들은 동맹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새 우방 투르크 사이에서 중재하고자 독일이 얼마 안 되는 외교적 수완을 총동원하고 나서면서 애매한 긴장이 유지되는 동안, 술탄이 동쪽 변경에서 러시아의 코사크를 본떠 조직한 하미디예(Hamidiye) 경기병대를 움직이고자 노력했다.
압제자 압뒬하미트 2세는 그것이 순수하게 저의 천재적인 발상이라 착각하고 있을 것이다. 한때 예니체리가 루멜리아를 휩쓸었을 때를 생각하며, 자신의 이름을 내릴 만큼 공들여 육성한 이 경기병대의 재배치를 인가했을 것이련만, 그 방안을 넌지시 제안한 동루멜리아와 노비 파자르(現 세르비아 남서부) 주둔군 보고서는 다름아닌 그들, ‘통일진보위원회’ 소속 장교들이 작성한 것이었다.
아무리 저들 ‘반란군’이 강대국 군대에 비하기 어려운 수준이라지만, 그들을 훈련시키고 무장시킨 것은 유럽 열강들의 장교들이요, 그들의 무기는 비록 술탄은 비싼 장난감일 뿐이라며 코웃음 치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정교했다.
패배하거나, 승리하더라도 상처뿐인 승리로 끝날 전쟁에 억지로 끌려들어가기 전, 제대로 개혁을 밀어붙여야 하며 그 걸림돌은 술탄 본인임을 드러내는 데 있어 그의 이름을 딴 저 경기병대의 목숨만큼 좋은 땔감이 있겠는가?
위원회 장교들 중에서도 선임인 니야지 베이(Ahmed Niyazi Bey)가 요새 열심히 주장하는 것처럼, 그들 튀르크인은 저들 조상 잘났다며 헛소리하는 저 아쳄(페르시아인)들보다도 까마득히 위대한 피를 이어받았다.
그 역시 스스로 공부한 것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조선인에게 듣고, 후에 다른 ‘불순한’ 지식인들에게 물어 물어 들은 것이라고 하니 완전히 믿을 수는 없겠지만, 한때 중국을 정복할 뻔했고, 전성기가 한철로 끝난 저 무굴(몽골)과는 달리 지금도 (조금 빛이 바래기는 했지만) 영광을 이어가는 것이 튀르크 겨레라면 자랑스러워할 만하였다.
그리고 그런 겨레를 다시 위대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면, 약간의 폭력, 약간의 비정함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한 이백 명쯤 죽고 다치기는 하겠지. 저쪽이 여기저기서 무기를 들여온 지도 꽤 되었으니, 고작 경기병들이 뚫을 수 있을 리가 있는가.’
그러나 해질녘에 밝혀진 바로, 엔베르 파샤의 생각은 절반만 맞았다.
경기병들이 대패하여 비참한 몰골로 돌아오리라는 예상은 적중하였으나, 이백 명쯤 죽고 다친 것이 아니라 이백 명 정도만 살아돌아왔던 것이다.
기관총 앞에 쓸려나간 것은 옛적 몽골 차하르부의 왕공들도, 아비시니아 황제의 군세를 향해 돌격하던 수단의 마흐디군도 마찬가지였지만, 이번 전투는 다름아닌 유럽 코앞의 발칸에서 벌어졌기에 유럽 여러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분명 오장육부 칠공구규 다 같은 사람일진대, 죽음에 따르는 사람들 이목은 다르니, 천하의 이치가 대저 그러하였다.
기껏해야 멀리서 총질하며 십수 명씩 죽고 다치던 와중 단번에 오백 명이 고혼이 되어버렸고, 불가리아 측에서는 주장하기를 삼십 년 전 발칸 전역에서 봉기 일어날 적 투르크 군대가 패악질하던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 하였다.
또 한 차례 무고한 사람들 살상당할까 두려워, 인도적인 차원에서 스스로 지킬 수 있는 정도의 무장만 공여했을 뿐인데, 정의가 살아있어 이처럼 복수 이루어졌다 하는 것이 ‘발칸 연합국’ 측의 주장이었다.
동시에 동루멜리아와 트라키아의 젊은 장교들은, 이미 어떤 무기를 판매하였는지를 뻔히 조선에게서 고지받았으면서도 그에 맞는 군비를 갖추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어디를 보아 ‘잘 보호되는 나라(오스만 투르크의 별칭 중 하나)’냐며 압뒬하미드 2세에게 반기를 들었다.
그리고 간혹 나라 사이 정리를 해친 조선국을 탓하는 이들이 있었는데, 그런 이들은 대개 호적이 베를린에 있거나, 이름에 ‘폰’이 들어가거나 하였다.
그러나 도의 숭상한다 자부하는 조선국으로서는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흥국부도(興國扶道)가 자칫 흥국무도(興國無道) 되어버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살펴야 할 일이오. 일전 몽고의 일이야 난적(亂賊)을 징벌함이었고, 금번 토이기 강역의 일도 시시비비 따진다면 그 임금이 포학한 탓이라 하겠으나, 융비총국이 계속 정예한 화포를 만들고 이를 만국에 퍼뜨린다면 언제고 우리 또한 궁벽한 지경에 처할 수 있지 않겠소이까?
더구나 금번에 태씨가 기이한 창안을 하여, 기관총만큼이나 병비에 중대하게 쓰일 수 있는 기물이 나왔다 하니, 지금 반드시 살피지 않을 수 없는 일이외다.”
저의 말을 그가 가장 싫어하는 조선의 선비 최익현이 받아, 조금 결은 달라도 사실상 맞장구를 치고 있었으니, 빌헬름 2세가 들었더라면 저래서 상종하고 싶지 않은 나라라며 혀를 찼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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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씨환은 잘 알려진 테슬라 코일입니다. 그 자체로는 별 쓰임새가 없지만, 확실히 멋있기는 하지요. 원 역사에서도 바로 그 이유로 인해 구경거리와 과학 교보재로 모두 폭넓게 쓰였습니다.
원 역사의 컴퓨터가 발명되기 전에도 복잡한 계산을 대량으로 빠르게 처리해야 할 수요가 많이 있었습니다. (당장 ‘컴퓨터’라는 말부터가 본래는 그런 계산을 전문적으로 하는 계산원을 뜻했지요.) 19세기 후반 배비지의 해석기관이나 윌리엄 톰슨(켈빈 경)의 조수예측기계처럼 정밀한 아날로그 컴퓨터도 이런 배경에서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선구적 발명들은 범용성이 부족했지요.
1889년 허먼 홀러리스가 미국 국세청의 통계조사를 위해 천공카드를 읽는 ‘태뷸레이터(Tabulator)’를 개발한 것은 처음으로 그러한 시도가 상용화되었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비록 초기 모델은 많은 과정을 수작업에 의존했기에 시간적으로는 큰 이익을 얻지 못했지만, 비용에 있어서는 숙련된 계산원의 수요를 대폭 절감할 수 있었기에 태뷸레이터와 천공카드는 곧 널리 보급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홀러리스가 세운 회사는 곧 IBM의 전신이 되지요.
비슷한 시기에 전기회로를 이용한 연산 역시 연구되기 시작했습니다. 1924년 발터 보테가 처음으로 AND 논리게이트를 개발한 것을 생각하면, 진공관 논리회로를 이용한 테슬라의 컴퓨터 시제 1호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학문적인 탐구보다는 직관에 상당부분 의존했던 테슬라였기에, 보테와는 달리 노벨상을 받지는 못할 듯합니다.
태뷸레이터나 초기 컴퓨터들과는 반대로 주판 같은 계산 기구를 자동화·기계화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습니다. 이미 17세기부터 시작된 이러한 노력도 19세기 말에는 성과를 거두어, 다양한 기계식 계산기가 보급되었습니다. 일본의 발명가 야즈 료이치(矢頭良一)가 기계식 주판을 만들어 일본 정부에 납품한 것도 대략 이 시기였습니다.
이러한 아날로그 컴퓨터는 근대국가의 운영에 필요한 각종 통계와 데이터를 처리하는 데 주로 사용되었지만, 20세기 초 갑작스럽게 새로운 수요에 직면하게 됩니다. 드레드노트급 전함의 등장으로 이어지는, 전함 교전거리의 비약적 증가와 건함경쟁 속에서, 사격통제를 위한 정밀한 아날로그 컴퓨터가 요구된 것입니다.
하미디예 경기병대는 원 역사에서는 1891년 설립된 뒤 본래의 목적인 국경 방위보다 아르메니아인 등 소수민족 학살에 더 많이 동원된 것으로 악명이 높습니다. ‘경기병대’라는 이름과는 달리 부족 단위로 편성되었던 하미디예 경기병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터키 동부 일대의 거친 지형에서 나름대로 유용한 전력임이 인정되어 청년투르크당의 쿠데타 이후에도 이름만 바뀐 채 존속됩니다.
이스마일 엔베르 파샤는 청년투르크당 – 실제로는 단일한 정당이 아니라, 작중에 등장한 통일진보위원회와 여러 개혁파 지식인 등의 총칭입니다 – 의 핵심 인물로, 이후 오스만 제국의 근대화를 위한 마지막 노력과 실패, 그리고 그 뒤의 해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터키가 건국되는 과정에서 동기인 케말 파샤 (아타튀르크)와 갈등을 빚고 몰락하게 됩니다. 그는 1881년생으로 작중 시점(1905년 초)에서는 너무 젊은 것으로 보일 수 있는데, 실제로도 당시 근대화된 군사교육을 수료한 인재의 부족으로 임관과 함께 고속 진급을 하던 추세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보다 세 살 위인데 아직 고작 부위(중위)인 신순성에게는 부러운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