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272화 (272/320)

89. 작은 사람들의 사귐 (2)

아주대회는 시작하기 전부터 소란의 근원이니, 예조로서는 잔뜩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 아주대회 개최 논의부터가, 그저 몇 나라끼리 어울리려 하던 것에 비율빈이 난입하며 일이 커져 끝내 구주 나라들까지 끌려들어오는 모양새가 만들어지고야 말았으니, 시작부터 그런 전례 남겼으므로 어찌 그 전통을 버리겠냐는듯 장기(나가사키)에서 열린 첫 대회에서는 그 몽고 마적이 뛰쳐들어 또 한바탕 난리를 일으켰다.

그리고 개국 오백십삼년(1904) 평양 대회로 말하자면, 열리는 곳이 다름아닌 조선국 안이므로 우선 거기서 힘든 일이 하나요, 기전 발굴이 허탕을 친 이래로 한 번 자존심이 구겨졌던 유경(柳京, 평양) 사람들이 과하게 달라붙어 열의 보였으므로 그 또한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태국 옹주가 그 나라 국사들을 이끌고 친히 찾아와 경양대군과 만나겠다 하니, 왕가의 일이고 아직 나라의 여론이 남녀 사사로이 만나는 것을 그리 좋게만 보지 않는 고로 공공연히 방문의 뜻이 신보에 나돌지는 않지만 예조로서는 민감히 신경을 기울일 수밖에 없는 사안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예조 홀로 고생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니, 이왕이면 대회 전까지 태조대왕의 건국한 이야기는 모두 섭영에 담았으면 좋겠다 하는 어명 한 마디에 공조에서는 곡소리가 나왔고, 숱하게 드나들 국외인들을 경호하고 또 내부 단속하는 일을 두고서는 감군 소리에 얼른 공 세우기를 원하는 병조와, 근래 가뜩이나 잡범 늘어나 눈치 받던 경무서 상전 이조가 저의 관할이라며 사사로이 다투다가 사이좋게 함께 (훨씬 늘어난) 일을 맡게 되었다.

성상께서 이왕이면 그 대회 시작할 때 큼직하게 예식을 갖추어 성대함을 널리 보임이 좋겠다 하는 바람에 – 심지어 원래는 그 활동섭영도 개회할 적에 수천 명 앞에서 함께 보여주자 하던 것을 공조에서 기기의 한계를 언급하며 겨우 뜯어말렸다 – 고생이 한층 더해졌으나, 이전 장기 대회는 물론이요 멀리 법국 파리에서 열린 오량파득(1900년 파리 올림픽)보다도 훨씬 거한 구경거리를 선사하였으니 지나고 난 뒤에 비로소 보람이 있었다.

“대회 시작한 지 벌써 며칠이 지났건만 아직도 개회할 때의 색판희(色板戱, 카드섹션)가 여러 나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니, 실로 성상의 신산(神算)에 탄복할 뿐입니다.”

능라도에 불어오는 선선한 강바람을 맞으며, 다음 경기 준비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임금 귀남 옆에 찾아온 전봉준이 입을 열었다.

“내 무얼 하였다고 그런 찬사를 듣겠소? 그저 떠오르는 생각을 말했을 뿐이오.”

그러나 진심어린 칭송과 겸양과는 별개로 귀남의 입꼬리가 올라갔기에, 남들이 보면 영락없는 아첨꾼 모양새였다.

물론, 누가 대조선국 국왕과 총리, 그리고 뒤에는 왕가의 사람들까지 주루룩 앉은 이 자리를 함부로 염탐하며 그런 말을 했겠냐만. (만일 정말 그런 간 부은 자가 있다면, 경양대군이 며칠 전부터 어딘가로 사라져 보이지 않음을 알아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한들 그 공백이 섬라국의 공백과 연관 있음은 쉽게 헤아릴 수 없겠지만.)

“오직 이곳 평양의 부민들이 나랏일 돕고자 하는 그 충심으로 나섰으니, 칭송한다면 그들을 기려야 하지 않겠소? 총리는 이번 일이 끝나면 묘당과 논의하여 행사를 도운 부민들을 인색치 않게 포장(褒獎)토록 하시오.”

“가부가 있겠나이까.”

가뜩이나 나라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아주대회가 이곳 평양에서 열린다 하여 열의 넘쳐흐르는데, 이번에 정식으로 종목 채택하기 전 시범으로 도입하게 된 ‘피구희(避毬戱)’-‘석전’은 이제 돌로 싸우지 않으니 맞지 않기도 하고, 또 戰이라는 글자가 과히 부담스럽기에 아예 이름을 고쳤다-는 물론이요, 개회할 때 거하게 열고자 하는 예식에 있어서도 참여하려는 이가 줄을 지었다.

비록 천조와 번국의 질서는 사라졌지만, 다 함께 도의 숭상하는 그 큰 뜻은 남았음을 기리고자 팔일(八佾)의 춤 정도로 엄숙하게 열고자 하던 당초의 뜻과는 한참 어긋나는 반응이었는데, 대개 재보나 시문으로 거들지 못하는 이들이 몸소 나서는 것이었으므로 딱히 재주가 좋지도 못하였다.

그때 주상 귀남 전교하기를,

‘그 활동섭영이란 것을 보니, 그림 여럿을 빠르게 바꾸어 마치 움직이는 듯한 눈속임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생각건대 사람도 여럿이 뜻을 맞추면 능히 그리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였으니, 그 정도면 조선말 알아듣는 두 팔 달린 사람이라면 남녀노소 공히 할 수 있을 것이요, 주상 말씀대로 색칠한 나무판자 따위는 그 값도 얼마 되지 않는 것이었다. 하여 일천 명을 평양 일원에서 선발하여 지난 봄부터 연습을 하였는데, 그 모양새 참으로 그럴듯하고, 특히 무슨 군졸이나 재주꾼도 아니요 그저 도시의 사람들이 빈부귀천 무관하게 모여 그림을 이루었다 하니 그 사정을 글로 옮기면 더욱 훌륭하였다.

여하간 그것도 며칠 전 일이요, 오늘은 어(御) 겨루는 날인데, 문세(文勢)에서는 지난 대회에서 차가 고장나 아쉽게 옥패를 놓친 양기탁(梁起鐸) - 자유당의 촉망받는 인재이기도 하였다 – 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며 사람과 차가 하나된 경지를 보여주었고, 이제 무세(武勢)를 위하여 여기저기 사람들이 뛰어다니며 준비를 하고 있었다.

대게 문세는 매끄럽게 운행하는 모양새를 두고 겨루고, 무세는 굳세면서 빠르게 움직이는 형상을 두고 견주니, 직접 차 모는 이가 아니고서야 무세가 훨씬 보기 흥미진진한 것이라, 다른 데 구경갔던 이들도 삼삼오오 돌아오는 것이 눈에 띄었다.

“허나 총리도 무세 구경하러 온 것은 아닐 테고... 혹 긴요한 일이 있는 것이오?”

“예, 전하. 예조에서 급히 신문(申聞) 올리기를, 일전 기무회의에서 새로 세운 방침에 따라 자금을 각국 공사관에 보내었는데, 그것이 실제로 구주 오지리국에서 쓰인바 큰 소란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평소였더라면, 유야납(빈)에서 처음 그러한 장계 들어왔을 때 유대인 문제는 과거 법국에서도 큰 논쟁으로 이어진바 있고, 또한 근방의 토이기 번국들이 근래 조선과 강남에서 다시 화포와 화약을 사들이고 있는바 반드시 재차삼차 숙고한 후에 다루라고 답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주대회로 말미암아 차마 그러지 못하였고, 구주 열국에 나가 있는 외신(外臣)들이 모두 스스로 사리분별을 모자람없이 할 만큼 뛰어난 것도 아니었다. 문중의 연을 내세워 곧 귀국하면 공산당 쪽으로 끌어들일 생각인 영국 공사 민영환이나, 과거 법국에서 혁혁한 공 세운 전 총리 김홍집이 오히려 예외에 들 것이다.

물론 전봉준은 속히 먼저 귀경해야겠노라 사정을 고할 뿐, 그런 변명을 주워섬길 사람은 아니었다.

하여 프로이트가 저의 교수직 청탁하려 제자 통해 공사관 기금 끌어오려다 된통 당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급히 자신이 아는 대로 고하였다.

“허어, 소란이라.”

“헌데 그와 더불어 유야납 판윤 누씨(뤼거)가 사사로이 공사관에 찾아와, 금번 사안에서 서로 이익 얻을 방편이 있노라 하였다니, 이 또한 살피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청하옵건대 먼저 상경하여 이 일의 앞뒤를 살피고 잘 단속토록 하겠습니다.”

“아니, 방금 말하기를 누씨가 유대인을 싫어하여 이번 일을 크게 키웠다 하지 않았소?”

“그렇습니다. 더구나 일개 판윤으로 외무를 맡지 않는 자가 공사관에 찾아와 교섭하였으니, 필히 다른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귀경하여 살피고자 하는 것 중 하나가 이 점이 되겠습니다.”

“거 겉과 속이 다르니 향원(鄕愿)과 같은 작자구려. 그런 자들은 대개 조심해서 다루어야 하니, 시일의 급함을 걱정하여 경거(輕擧) 범하지는 마시오. 도성에는 세자도 남아있고, 또 혹 홀로 결정하기 어려운 일이 있다면 전화가 또 있으니.”

세자가 남아있다는 얘기를 꺼내니 잠시 마음속으로 뜨끔한 귀남이었다. 아직 젊은 세자로 하여금 좋을 때 미리 구경해두라며, 평양으로 보내려 하였건만, 한사코 거절하며 이르기를 아주대회는 앞으로도 당연히 아주에서 열릴 것이요, 조선국이 갑작스레 저기 멀리 이태리와 맞바꿈이 된다거나 하지 않는 이상에야 언제고 다시 대회는 팔도 가운데서 열릴 것이라.

하여 내심 가고 싶어하는 부왕께 저는 괜찮으니 아바마마께서 원하신다면 친람하심이 어떻겠는가 청하였는데, 그 부자의 정이 없었더라면 의도를 크게 오해할 일이었다. 그러나 평양 내려온 뒤에 원래대로의 촉새로 돌아온 경양대군이 지나가듯 흘리기를 세자도 실은 퍽 가고 싶어하더라 하였으므로, 이제 와서 새삼 미안할 뿐이었다.

“전화라 하시면...”

왕명의 출납에 전화를 쓰지 않음이 이미 예로 굳어졌으니, 아마 귀남 다음 세자의 대부터는 고작 백 년도 되지 않은 전통을 ‘선왕의 법도’ 운운하며 따르게 될 것이었다. 물론 귀남이야, 전화기 없이는 살지 못한다는 전생의 철부지들과는 달리 별 불편을 못 느끼고 있었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혹 걸림돌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대군을 시켜 세자와 말을 주고받게 하면 될 일이오.”

세자와 대군을 고작 전화기 전음통(수화기)로 쓰자는 발상을 능히 낼 사람이 나라에 국왕 한 사람 외에 또 있겠는가. 별 생각 없이 자동차 구경하던 뒷자리 안양대군이 ‘대군’ 소리에 화들짝 놀라 두리번대었다.

공자가 덕의 적이라며 성토한 향원을 익숙한 말로 바꾸면 기회주의자 정도가 되지 않을까? 적어도, 가로등 불빛 아래에 멈춰선 마차의 뒤에 앉아 뤼거가 읽고 있는 『논어』 요약본에서는 그렇게 옮기고 있었다.

그러나 기회주의자가 무엇이 그리 나쁘단 말인가? 끽해야 우중(愚衆)을 선동해 저의 욕심만을 채운다는 비난을 듣는 뤼거였고, 뤼거 본인도 저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솔직히 그들의 표만큼의 가치를 지니는 자들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누군가는 그들을 대변해주어야 하는 법. 그를 통해 정치권력을 얻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였다.

어쨌든 손 안의 책은 꽤 도움이 되었다. 조선 공사 앞에서 한 줄 인용하였더니 당장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저에게 넘어오는 듯하였으니.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 앞에서 동양의 고전 논어 어쩌고 하면 역풍만 불 것이 뻔하였으므로, 한동안 더 쓸모는 없을 것이련만, 기다리는 이 있어 시간 때우고자 잠시 펼쳐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나이 먹고 침침해진지 오래인 눈으로는 고작 가로등에 의지해 책 읽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가 이 아름다운 도시의 시장 ‘잘생긴 카를’(Der schöne Karl)이 아니었더라면 가로등을 탓했을 것이다.

“시장님, 공연이 끝난 모양입니다.”

마부, 정확히는 마부로 위장한 하사관이 말했다.

“알겠네. 움직이세나.”

이름과는 달리 궁중에는 있지 않은 궁중오페라(Hofoper) 공연장의 문이 열리고, 누구보다 먼저 나오는 대열이 있었다.

“지금 끼어들면 된다고 했나?”

“예, 시장님. 걱정 마십시오.”

공연장을 출발한 마차 대열 끄트머리에 한 대가 자연스레 더 따라붙어, 목적지 호프부르크 궁(Hofburg)을 향해 빈의 밤거리를 달려나갔다.

마차는 멈추고, 내려야 할 사람들이 내린 뒤, 본래대로라면 내릴 일 없을 사람도 따라 내려 인사를 건네었다.

“대공 전하.”

제국의 후계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온화하게 맞이했다.

“오, 왔는가. 하려던 일은 잘 된 모양이로군. 이왕이면 조금 더 일찍 끝내고 공연을 함께 참관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하, 저를 바라보는 눈이 조금 많은지라 신중함을 기하다 보니 그리 되었습니다. 여느 때처럼 훌륭한 공연이었으리라 생각하니 말씀대로 다소 아쉽군요.”

“그런가? 의외로군. 말러(Gustav Mahler)를 싫어할 줄 알았는데.”

“일각의 주장과는 달리 저는 외골수 반유대주의자가 아닙니다, 전하. 다만 잘못된 것을 돌려놓고 모두에게 최선의 길을 택하려 할 뿐이지요.”

“그렇겠지. 특히 자네에게 최선인 길을 말이야!”

레오폴드관을 향해 걷는 두 사람의 분위기는 그럭저럭 화기애애하였다. 그것도 그럴 것이, 서로에게 필요한 관계 아닌가.

“너무 당당하게 걷는 것 같아 의아한 모양이로군. 걸려도 변명할 거리는 있으니 걱정 말게. 황제께서는 쇤브룬 궁(Schönbrunn)에 계시고, 더구나 누가 묻는다면 자네는 오늘 나의 개인 소장품을 감상하러 온 것이니 하등 문제가 없다네.”

“개인 소장품이라 하셨습니까?”

“동양에서 새로 들여온 그 ‘수묵화’가 여러 점 있다네. 사실 내 눈에는 지루하기만 한데, 아내가 좋아해서.”

소싯적 ‘동양 트리오’ 국가들을 모두 여행하기도 한 입장에서 단언컨대 아내의 흥미는 그저 근래 조선이 어쩌고, 중국이 저쩌고 말이 많기에 생겼을 뿐인 관심이라, 언제고 식을 것이었다. 그리 되면 어디 대학에나 기증할까 생각하며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말했다.

그림에 소질이 없다는 학생들이 실제로는 그저 서양 화풍에 적합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는 법. 저의 기증품을 보고 마음 돌릴 이들 여럿 생긴다면 그 또한 사회의 공익에 합당한 것일 테다.

복도에 늘어선, 공식적으로는 이 회동의 이유가 된 낯선 그림들 사이를 지나 응접실에 들어서니, 대충 뤼거와 비슷한 연배의 중년 귀족이 자리에서 일어서 예를 갖추었다. 외무장관 아게노어 고우초프스키(Agenor M. Gołuchowski) 공작이었다.

“전하.”

“앉게. 앉게. 이쪽은 자네도 몇 번 들어보았을 ‘비엔나의 왕’ 뤼거 시장일세.”

“만나서 반갑소. 무언가 더 큰 것을 바라는 점에 있어서는 뜻이 맞으니, 앞으로도 계속 함께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오.”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각하.”

일반적인 자리라면, 빈 시장이 아무리 지지를 많이 받는다지만 제국의 외무장관과 어깨 나란히 할 수는 없을 테다.

“그래, 이제 얘기해 보게. 성과가 있었다고?”

“예, 전하. 이번 사안을 무마하고 유대인 임용제한을 완화하는 조건으로, 발칸 국가들과 우리 오스트리아의 평화로운 관계를 지지한다는 명분으로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등지에 대한 무기 판매를 제한해 달라는 제의를 잘 전달했습니다.”

“베를린은 물론이고, 자네 지지자들도 그리 좋아하지는 않을 듯한데, 괜찮겠는가?”

“베를린의 카이저께서는 개인적으로 조선을 싫어할 뿐, 독일의 우월함을 부정하지 않는 한 황인들 자체를 싫어하지는 않습니다. 예전에는 어땠는지 몰라도요.”

얼마 전 베네수엘라 사태에서도 중국의 제안에 동조하는 바람에, ‘천조’ 되기를 포기한 중국의 뒤를 이어 중국을 복속시킨 새로운 천자가 될 생각이냐는 비아냥을 듣기도 한 빌헬름이었다. (당연히 그 비아냥의 절대 다수는 런던에서 나왔다.) 딱 만평으로 그리기는 적당한 주제라, 자극적인 이미지들이 많이 나왔는데, 악화일로의 영독관계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었다.

“하, 자네가 우리 외무부 사람들보다 더 잘 아는구만그래.”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각하. 베를린의 뵈켈 씨와는 아무래도 협력하는 관계라서, 들려오는 바가 조금 있습니다.”

빈 시장을 넘어서는 욕심을 가지게 만든 것도 저 오토 뵈켈의 성공 때문이었다. 자신과 달리 수단과 목적을 구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가, 카이저의 눈에 들어 어느새 원내 2당의 수장이 되지 않았던가.

그렇기 때문에 이 모임. 그러니까 중국처럼 여러 민족 사이의 평화로운 공존과 자치를 보장할 방도를 모색하는 이상주의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거들먹거리는 헝가리인들을 견제하고 저들 폴란드인들의 세력 구축을 꾀하는 고우초프스키 공작의 비밀스러운 모임에 한몫 끼게 된 것이었다.

저쪽에서도 대놓고 연방제를 말했다가는 당장 제국의 주인 게르만인들과 새로 그 주인 대열에 낀 헝가리인들 사이에서 바로 짓눌릴 것이 뻔하였으므로, 일개 도시의 시장이지만 여느 장관 이상의 지명도와 지지를 지닌 뤼거가 필요하였다.

“좌우지간 이대로 성공만 한다면 좋겠군.”

“조선과 함께하는 일들은 처음 뜻한대로 되는 일이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전하. 물론 뤼거 시장처럼 훌륭한 사람이 나섰으니 성공을 의심치는 않습니다만, 혹 엉뚱한 쪽으로 튀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은근한 고민이 드는군요.”

“흠흠, 대신 우리가 손해를 보지도 않는 법이지요, 각하. 아시아와의 연줄이 생긴다면 각하의 입장에서도 치적이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도 엄연히 바다에 맞닿은 나라인데, 앞으로 지금보다 더 부상할 아시아 시장에 지금이라도 발판을 넓혀보아야겠지요.”

“자자, 그쪽 일은 나중에 생각하고, 우선 이 ‘합중국’ 방안을 조금 더 고심해보도록 하세나들. 아무래도 국내의 반발이 걱정인데...”

“그쪽에서는 결국 범게르만주의 노선을 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하. 모든 민족의 평등은 현실적으로도 그렇고, 정치적으로도 불가능합니다. 게르만인 아래에서의 평등이 – 헝가리의 반발을 제외하면 – 가장 현실적인 목표고, 나아가 발칸에 대해서도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는 근원이 될 것입니다.”

“뒷부분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앞부분은 우선 동감이네.”

그렇게 세 사람 모두 다른 생각을 품으며, 그들의 미래를 위해 주거니받거니 논의를 이어갔다.

그러다 보니, 조선이 제안에 동의했다는 것은 기억해도 때로는 지나친 성공이 실패보다도 더 해로울 수 있음은 잊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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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퓌스 사건 전후의 반유대주의 경향에서도 언급된 카를 뤼거는 그만큼 유럽 전체의 반유대주의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지만, 정작 본인은 앞서 다룬 것처럼 그에 그렇게 심취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에게 반유대주의는 점차 정체되어가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현실에 불만을 품은 서민층과 중산층을 규합하고, 동시에 여전히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교회를 끌어들일 방편이었지요.

1907년 빈으로 이주하여 소년기를 보낸 아돌프 히틀러도 뤼거의 정치노선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스스로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뤼거에게서 가장 깊은 인상을 받은 점이 반유대주의 자체가 아닌, 반유대주의를 매개로 한 서민층의 정치적 동원과 보수적 사회 기득권층의 포섭이었다는 사실은 뤼거가 반유대주의를 어떻게 수단으로 사용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뤼거는 1910년 당뇨 합병증으로 갑작스레 사망하였지만, 그가 남긴 정치적 영향력은 1차대전으로 합스부르크 제국이 해체될 때까지 – 시각에 따라서는 오늘날 오스트리아에 남아 있는 극우주의까지 – 이어지게 됩니다.

작곡가이자 당대에는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더 유명했던 구스타프 말러는, 작중에서는 인생에 별 어려움이 없는 상황입니다. 물론 자신의 지휘와 연습 스타일에 불만을 품은 오케스트라 구성원들이나 궁중오페라(이름과는 달리 작중 시점에서는 황실 소유가 아니었습니다.) 경영진과 끊임없는 마찰을 빚고는 있었지만 – 말러 본인은 여기에 빈에 만연한 반유대주의가 영향을 주었다고 의심했는데, 일말의 가능성은 있지만 사유의 전부는 아닌 듯합니다 – 알마 쉰들러와 금슬 좋은 가정생활을 누리면서 명지휘자로서 명성을 날리고 있지요.

그러나 1907년을 기점으로 ‘9번 교향곡’의 저주를 피하지 못하고, 본인의 건강 악화, 아내의 외도, 두 딸의 사망 등 온갖 악재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 후 미국과 유럽을 전전하며 작곡에 전념하다가 요절하게 되지요. 그러던 중 1910년 프로이트를 찾아가 장장 4시간에 걸친 상담을 받기도 했습니다.

오스트리아 다민족 국가로서 민족주의의 발흥과 함께 많은 진통을 겪게 되었습니다. 보오전쟁 패배 후 대타협을 통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으로 거듭난 뒤에도, 사실상 게르만계가 독점하던 기득권을 헝가리인들이 나누어 가졌을 뿐 폴란드계나 다른 소수민족들 – 원 역사에서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까지 여기에 포함됩니다 – 의 불만은 여전했지요.

1830년생으로 1848년 제위에 올라 1916년까지 장수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자식복이 없어서, 1889년 황태자 루돌프가 권총자살을 한 뒤에 대가 끊길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결국 제위는 그의 조카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에게 돌아오게 되는데, 보수적이었던 프란츠 요제프와 이상주의적인 진보 성향의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사사건건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그를 따르는 진보계 인사들은 원 역사에서는 1906년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고질적인 민족문제 해결을 위해 ‘大오스트리아합중국(Vereinigte Staaten von Groß-Österreich)’ 구상을 내놓았습니다. 물론 이는 현실적인 정치적 지지를 얻지 못했고, 특히 다양한 민족이 복잡하게 섞여 살던 중앙유럽의 현실로 인해 민족에 따른 분할을 강제할 경우 엄청난 영토를 상실하게 되는 헝가리는 이에 결사적으로 반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프란츠 페르디난트 본인의 죽음, 그리고 그 죽음이 촉발한 제국 전체의 죽음으로 인해 합중국 안은 영영 공상으로 남게 됩니다. 그러나 작중에서는 오토 뵈켈의 성공을 질투한 뤼거의 야망, 그리고 원 역사에서도 자신의 위치를 이용해 폴란드계 귀족과 정치인들을 세력화하려 노력한 외무장관 고우초프스키 등이 뭉침으로써 어느 정도 기반을 얻게 되었습니다.

평양 능라도에서 열리는 대규모 카드섹션 매스게임이라고 하면 오늘날에는 완전히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습니다만, 1904년 당대에는 나름대로 충격적인 광경이라 하겠습니다. 물론 당시에도 단체 체조라는 개념으로 매스 게임과 유사한 것이 존재했지만, 카드섹션이 등장한 것은 1910년대 미국 대학 간의 미식축구 경기에서였다고 하니 작중에서는 세계 최초인 셈입니다.

원 역사의 1900년 파리 올림픽은 파리 박람회의 부속행사로 개최되어 아테네 올림픽보다 훨씬 큰 규모로 열렸는데, 여성 종목-테니스, 펜싱 등-이 생긴 첫 올림픽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작중에서는 아주대회에 밀렸지만 다양한 실험적 종목들이 등장했는데, 자동차 경주, 열기구 경주(무려 프랑스에서 러시아까지 가는 경주였습니다.) 등이 그것입니다. 따로 개막식을 열지는 않았지만, 이런 독특한 경기들로 인해 1896년 올림픽보다 훨씬 볼거리가 많았다는 평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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