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271화 (271/320)

89. 작은 사람들의 사귐 (1)

서기 1904년의 유럽은 이전의 수십 년 동안 그러하였듯, 화려하고 세련된 문명의 중심이었다. 나날이 발전하는 과학과, 전세계가 함께하는 진보 가운데에서 아름다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 시대가 끝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사실 언젠가 끝날 수밖에 없다는 불안을 억누르고자 그렇게 의도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이 더 맞는 말일 테다.

“불안감이라는 것이 대개 그렇지. 정말로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은 저의 무의식에 대해 본능적인 공포를 느끼기 때문에,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네.”

빈 최고의 골초 지그문트 프로이트 박사가, 그가 사랑하는 궐련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악력에 묵직한 시가를 맡기고 옆에 놓인 신문을 펼쳐보니,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화려한 국제 소식이 반겨주었다.

솔즈베리 후작의 사퇴 이후 한창 흔들리던 영국 정계는 결국 자유당의 캠벨배너먼(Henry Campbell-Bannerman)과 자유통일당의 조지프 체임벌린 두 사람의 경쟁 구도로 귀결되고 있었다.

독일에 대한 유화정책을 솔즈베리 후작의 연합 내각 아래에서 진두지휘한 이력이 있었기에 한때는 자유당의 낙승을 모두가 예상했지만, 캠벨배너먼 본인이 과격한 식민지 자치론을 내세우는 동안 체임벌린이 보수당의 밸푸어(Arthur Balfour)의 뒤통수를 때리면서 과거의 잘못은 모두 보수당의 허물이요, 자신에게 식민지 경영의 합리화와 식민지 확장을 동시에 이룩할 비책이 있다며 나서자, 본래 외교정책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이번 논쟁에서 결국 표심이 다시 자유통일당 쪽에 기울고 있다 하였다.

거기에 더불어, 오스트리아에게 훨씬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발칸에서는, 몰다비아-왈라키아 연합공국(現 루마니아)의 카롤 1세가 형식상의 주군인 콘스탄티노플의 술탄이 요구하는 그 석유기구 가입을 거절하면서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애초에 근동의 석유를 두고 세워진 기구였기에 명분 부족한 쪽은 술탄이었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석유를 생산하여 유럽에 수출하고 있던 플로에슈티 일대의 유전에 대해서까지 영향력을 확보하고 싶다는 술탄의 과욕이 문제를 일으킨 것이었다.

본디 독일의 호헨촐레른-지크마링겐 가문 사람인 카롤 1세로서는 저의 독립 구상에 오히려 땔감을 제공해준 셈이라, 이를 들고 발칸의 공동 경제권 건설을 운운하면서 불가리아나 세르비아를 끌어들일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근래 오스트리아-헝가리에 경제적으로 예속된 상황을 피해보고자 조선에서 무기를 추가로 구매하거나 러시아와 한편인 프랑스의 투자를 유치하려 동분서주하는 세르비아 역시 그에 꽤 호의적이라 하였다.

물론 그 뒤에는, 근래 러시아에서 농촌 개혁이 조금씩 진전되면서, 이대로는 모든 국정의 우선순위가 대외팽창이 아닌 국내의 발전으로 전환되리라 여긴 군부와 여러 귀족들이 다시 발칸을 입에 담고 있는 것이 한 가지 원인으로 작용했으라는 게 신문 논설기자가 나름대로 내리는 분석이었다.

‘볼셰비키’들은 나날이 세력을 키우고 있었는데, ‘양이 곧 질’이라는 일린 그 자의 말마따나 어중이떠중이들을 마구 받아들이다 보니 개중 능력 있는 어중이떠중이도 꽤 있었고, 점점 하나의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던 것이었다. 심지어 멀리 티플리스(現 조지아 트빌리시)에서까지 볼셰비키의 신문 『불꽃』 지가 무단번역되어 대량으로 유포되는 사건도 있었다 하니, 논설에 나름대로 일리가 있었다.

물론, 신문 기자라는 사람이 천리안을 지닐 수는 없으니, ‘그런 일이 있었다’ 정도로만 언급하였을 뿐 티플리스에서 출판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사람이 이오시프 ‘코바’ 주가슈빌리라는 곰보 청년임은 언급하지 못했지만.

좌우지간 영국은 영국대로, 독일과 프랑스는 또 그들 나름대로 조금씩 변하는 세상의 구도 가운데서 이리저리 움직일 구석을 찾고 있는데, 거기서 쏙 빠져 혼자 멈춘 시간 속에 있는 듯한 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의 사람들은 알게모르게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럴 때, 저를 대신해 그 불안에 이름을 붙여줄 이를, 무의식의 심연 대신 이 지구상에서 불안의 대상을 찾아줄 이를 대중은 원하기 마련이고.”

“그러니까 쉽게 말해, 선생님의 정교수 임용을 반대한 자들은 모두 뤼거 시장을 추종하는 소경 무리다... 그런 말씀이시지요?”

“뭐, 말하자면 그렇겠지만...”

말이 거창하지 실제로는 그저 툴툴대는 것 아니냐는 심드렁한 비판에 직면한 프로이트는, 전언(傳言) 대신 전령을 공격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자네는 조금, 거 뭐랄까, 여성스러운 행동거지를 갖출 필요가 있어.”

“그런 선생님부터 그 남근애착의 상징을 조금 멀리하시는 건 어떨까요?”

비서 아닌 비서, 학생 못 두는 교수 아래의 학생 홍매화(紅梅花)가 빠득빠득 대들었다.

“오늘 오후에 모임 있는 걸 뻔히 아시면서, 기껏 치워놓았더니 또 재가 한더미 쌓였잖아요. 오늘 수요일이라고요. 수요일.”

동양 정세가 대체로 안정되면서, 꼭 조선 아니더라도 이곳저곳에서 황인 학생들이 찾아와 배움을 구하는 일이 늘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중 가장 뻔뻔하고도 과감한 것은 역시 조선인들이었는데, 이는 물론 조선인 성정도 있겠지만 그들의 유학 선배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구주 올 때마다 속된 말로 한 밑천씩 챙겨 돌아갔으니 저들도 그리하려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녀 홍매화에게는 참으로 안타깝게도, 해몽 잘하는 서생 프로이트는 기실 끈 떨어진 뒤옹박이었으니, 유대인 몰아내자는 구호 외치는 작자가 근 십 년 넘게 판윤(判尹) 맡고 있는 이 도시 빈에 끈덕지게 붙어있는 것만 하여도 그 사리판단의 수준을 알 만하였다.

더구나 해몽의 원리라고 하는 것이 막상 와서 들어보니 부모님을 탐하느니, 국부(局部)의 일이 어쩌니 하는 것이 참으로 민망한 말이라, 만일 홍매화가 어디 양반가 규수였더라면 듣기만 하여도 얼굴 붉혔을 것이었다.

물론 홍매화는 양반가는커녕 저기 성산 바닷가 평범한 집의 여식인 데다가 조실부모하였으니, 얌전히 안방에 앉아 길쌈하고 어쩌고 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던 것이라. 덕국 말 입에 붙은 뒤로는 한 마디도 지지 않고 저쪽에서 툭 던지면 이쪽에서 휙 받아던지곤 하였다.

프로이트는 딱히 그런 반박을 괘씸히 여기지 않고, 거기에 사람 좋은 프로이트의 아내 마르타도 홍매화를 귀엽게 여기다 보니, 그렇게 오냐오냐 받아주기가 여러 달 지난 지금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홍매화의 입이 (프로이트 앞에서만) 걸어지고야 말았다.

“어휴, 내가 진짜. 무슨 광영 누리려고 여기까지 와서 저 화상 수발을 들고 있는지.”

“의식 이면의 말을 내 옆에서 그리 공공연하게 털어놓으려면 진료비부터 내게.”

“월급을 늘려주시면 생각해보지요.”

허나 돌아가려야 돌아갈 수 없는 것은, 그가 전국 무당들이 뭉쳐서 세운 경신계(敬神契)의 공론을 거쳐 당당히 이곳 오지리에 오는 대신, 제주도 공산당 사람들을 꼬드겨 제대로 된 예폔심방(女巫)은커녕 소미(小巫)도 아닌 주제에 남들보다 먼저 왔기 때문이었다.

제주도 사람으로 개화한 정국에 이름 날린 사람이, 출륙(出陸)하여 벼슬이 참의대부에 오르고 그 면암선생과 교분 두둑하게 된 자유당의 김희정(金羲正) 같은 이도 있고, 노사학원에서 학명 떨치고 고향 돌아와 소위 수산(水産) 진흥에 힘쓰고 있는 고승천(高承天) 같은 이도 있는데, 젊고 야심 많은 홍매화는 오지리 땅에서 무언가 한탕 건져 돌아가서 자신도 그 대열에 들기를 원하였다.

영국 땅에 저와 같은 심방 – 육지에선 무당이라 한다던가 – 이 있어 여러 나라 종친들도 찾아간다 하기도 하고, 또 한양에서는 서당에서 허드렛일하던 계집아이가 대군을 만나 종실의 귀한 사람이 되었다 하거늘, 총명하다 자부하는 자신이 못할 것은 또 무어란 말인가.

전국의 경신계(敬神契) 통하여 오지리 위야납(빈)에 사람 보낼 궁리를 한다면 그 가운데서 남주(南洲, 제주도) 사람이 뽑힐 공산은 적으므로, 제주 심방들과 공산당 사람들끼리 뭉쳐 고심하기를 저들끼리 먼저 사람을 보내려 한다는 소식 듣고서 번쩍 손 들고 나섰으니, 저 한 사람의 명운만 걸린 일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이역만리에 혈혈단신으로, 절개 지키는 데 은장도보다 훌륭하다는 매헌규방보국 특제 수총(手銃, 권총) 하나 들고서 이리 왔다.

“그리고 이미 여기서 맡고 있는 일이 많은데 어디로 도망을 가겠는가?”

“글쎄요? 저기 취리히에 있는 융 씨도 있고... 그쪽은 논문 심사도 끝나기 전 벌써 자리를 잡았다는데요.”

런던의 ‘신령의 여주인’은 유명하지만, 안타깝게도 해협을 건너는 일이 없는 고로 대륙, 그것도 유럽 한가운데 사람들은 펜에 의하지 않고서 교류할 길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젊은 샤먼이 또 하나 빈에 왔다 하니, 큰 화제는 되지 않아도 알 사람들은 다들 알았다.

특히 대대로 집안에 내려오는, 히스테리아인지 신기(神氣)인지 알지 못할 현상을 두고 학위논문을 쓰고 있던 카를 융(Carl Jung)이라는 젊은이가 큰 관심을 표했는데, 직접 빈에 찾아와 몇 차례 면담도 하였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이 정신분석이라는 신생 학문의 거두 프로이트를 만나게 되었고, 프로이트는 – 본인 말로는 천재는 천재를 알아보는 법이라나 – 수요일마다 그의 집에서 모이는 정신분석학 모임 사람들에게 융 칭찬을 늘어놓을 만큼 그를 마음에 들어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개인적인 호감과는 별개로, 프로이트가 몇 년을 노려왔던 정교수 자리를 두고 비꼬는 것은 타격이 컸다.

“자네, 비겁하게 그렇게 사실로 승부 보려 하지 말게. 아프잖은가.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내가 그 자리를 못 얻는 것이 어디 내가 부족해서인가?”

멀리 동양에서 온 소녀도 제자로 받아들여줄 만큼 – 그리고 그 제자 앞에서 여자의 남성기 결핍에 대한 컴플렉스나 히스테리아와 접신(接神)의 관계성 등을 말할 만큼 – 어떻게 보면 자유롭고 어떻게 보면 괴팍한 사람이 이 프로이트인데, 오직 그의 학문에 대해서는 고집이 심하여 반박을 쉬이 허하지 않았다.

더구나 여전히 터무니없다고는 생각하지만 그래도 프로이트의 언설과 이론 가운데 나름의 통찰 있음을 무시하지 않는 홍매화였으므로, 프로이트가 진지하지 않은 듯 진지하게 저리 말하니 퉁명스럽게 대꾸하는 대신 퉁명스러운 위로를 건넸다.

“뭐, 그건 아니지요. 사람들 중에 얼간이가 많다는 말씀은 백번 지당합니다.”

그러고서 문득 떠올리기를,

“정 그러면, 전략을 조금 바꾸어보는 게 어떨까요?”

“전략이라니, 무슨 말인가?”

“사실 그렇지 않아 보여도 세상이라는 게 인정(人情)으로 굴러가는 면이 있죠. 합리적인 외면이 의식이라면, 그런 어둡고 치졸한 부분이 무의식이랄까요.”

“내 개념틀을 엉뚱한 비유에 갖다 붙이지 말게.”

“미안합니다. 그래도 들어보세요...”

프로이트가 정치 얘기를 하면서 투덜대는 경우는 많았는데, 특히 대중의 지지와 독일의 지지에 힘입어 아직도 빈 시장 자리를 지키고 있는 카를 뤼거가 그런 투덜거림의 대표적인 예였다.

그의 오래된 사진첩을 정리하다가 발칸 여행 때 찍은 석회동굴 사진이 나왔을 때, 옆에서 보고는 ‘내가 단테고 저기가 지옥이라면, 뤼거 그놈을 저 무저갱 속에 밀어넣고 싶다’라고 하기도 하였으니 평소 감정을 알 만하였다. 단테인지 당케인지가 무얼 하는 사람인지는, 프로이트가 던져주는 다른 책 읽으랴, 그의 모임 행정 도우랴 바빴기에 아직 알지 못하였지만.

어찌 되었든, 프로이트가 몇 년을 노력했지만 겨우 조교수(Professor extraordinarius) 자리를 얻었을 뿐, 실제로는 나오는 급여도, 배정되는 강의도 없으니, 홍매화가 빈에 온 이후만 쳐도 여러 차례 정교수 자리를 노렸다가 번번이 실패하곤 하였다. 프로이트도 사람인 고로 답답하여 몇 번 대학 측에 무슨 결격사유 있느냐 물었더니 나오는 말이 ‘복잡한 사연 있노라’ 할 뿐이었다.

아직 젊어 견식 넓지 않은 홍매화지만, 어쨌든 조선 사람으로서 이런 상황이라면 바로 생각나는 ‘사연’이란 곧 인정의 결핍이요, 공부 많이 한 선비가 되어서 인정 바칠 가산이 없다면 언제든 과거 보고서 변통하면 될 일이었다. 상담 하면서 귀한 사람들도 여럿 만나곤 하는 프로이트가 어찌하여 이 연줄을 쓰지 않는가. 사람됨이 청빈하여 명성을 귀히 여기지 않는가 하면 분명 그것도 아니어서 의아하게 여기던 차,

“그렇게까지 해야 하겠는가? 시의회 출마?”

그해 겨울에 시의회(Gemeinderat) 보궐선거가 있었는데, 뤼거네 기독교사회당에 반대하는 이들의 표심도 무시할 수 없었고, 빈 인구의 대략 십분의 일은 유대인이었으므로 만일 출마한다면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겠지만, 그의 친우 아들러(Alfred Adler)라면 모를까 직접 정치판에 뛰어드는 것은 프로이트의 선호하는 바가 아니었다.

“아니면 조금 더 쉬운 방법으로는, 그쪽 일을 맡아보는 관헌에게 잘 보이는 방법도 있겠지요. 예나 지금이나 동서를 막론하고, 재보 앞에서는 사람의 마음이 물러지는 법 아니겠어요?”

재보 쓰지 않고서 – 오히려 받으면서 - 사람 옆에 눕혀두고 그 마음 안을 들여다보는 것을 업으로 삼는 프로이트로서는 낯선 얘기였다. 그러나 홍매화 말마따나, 언제고 손 놓고서 열리지 않는 문만 두드릴 수는 없는 법. 때로는 옆에 혹시 열린 창문은 없는가, 문 옆 골목을 기웃거릴 필요도 있지 않겠는가.

“마침 공사관에서 듣기로, 올해에 그런 쪽으로 쓰라고 따로 재정을 배정한 바가 있다고 하던데요.”

“아니, 남의 나라 관리를 매수하기 위한 예산이 있다는 말인가?”

“그건 아니고... 아, 맞나? 저도 잘 모르겠는데, 여하간 그렇게 액수가 크지는 않지만 선생님 홀로 쓰시기에는 충분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전봉준 내각의 야심찬 계획 중 하나였다. 지난해에 무슨 곡절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보이기에는 난데없이 시작된 일이었는데, 천하의 공론을 우의와 화평을 위해 돌리도록 힘쓰겠다며 이런저런 일을 입안하더니 그 중 하나가 각 공사관에 좋은 여론 만들기 위한 기금을 배정한 것이었다.

옛날 자신이 런던에서 다른 선비들이 글래드스턴 도와서 선거운동하던 시절 떠올린 전봉준의 발상이었는데, 당연히 도의 숭앙하는 나라에서 그런 일을 은밀하게 할 수는 없고, 이왕 하는 것 정정당당히 드러내며 한다는 것이 그에 붙은 단서였다.

“뤼거 그자가 정말로 유대인들을 싫어해서 그런 것은 아니니까 – 그래서 더 혐오스러운 것이지만 – 그자나, 교육청장에게 호소해서 유대인 공직임용 제한을 완화해달라 청탁하면 가능은 하겠지.”

“그만하면 되지 않을까요? 선생님 한분만 위한 것도 아니니까요.”

“글쎄... 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그러나 결코 그렇지는 않았다.

잠깐 제자의 말에 혹하여 조선에 손 벌린 대가는 가혹했으니, ‘빈의 왕’으로 재직하면서 이제 슬슬 더 높은 곳을 노리던 카를 뤼거는 곧장 노발대발하는 시늉을 하면서, 세르비아 내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이권을 침해하는 조선이 어찌 그렇게 뻔뻔한 시도를 할 수 있냐며 비난 성명을 낸 것이다.

그러나 그런 비난 성명 나온 당일 밤 은밀하게, 조선 공사관을 찾아가는 이가 있었으니, 그 사람 또한 카를 뤼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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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듯 나온 곰보 ‘코바’는 달리는 그 코바가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조지아인이라 해도 무방할 이오시프 주가슈빌리입니다. 가난한 구두공의 아들로 태어나 신학교에 진학했다가, 등록금 미납과 반체제 활동으로 인해 제적당하고 이런저런 직업을 전전하던 중, 원 역사에서는 레닌의 저작을 접하고 볼셰비키에 합류하게 됩니다. 그 무렵 자신이 좋아하던 소설 속 주인공 이름을 따 – 그는 조지아어로 여러 편의 시를 쓰기도 한 문학인이기도 했습니다 - ‘코바’라는 별명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러시아어로는 너무나 발음하기 어려웠던 그의 성 대신 이 별명이 더 널리 쓰이게 됩니다.

이후 볼셰비키의 혁명사업에서 자금 조달이나 소수민족 문제 등을 맡던 그는, 레닌 사후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뒤 ‘코바’라는 이름을 기억하던 동지 대부분을 숙청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강철 남자’ 스탈린이 남았지요.

원 역사에서 1875년부터 1878년까지 이어진 러시아-튀르크 전쟁과 동방위기에서 왈라키아-몰다비아 연합공국은 루마니아 왕국으로 독립하게 됩니다. 작중에서는 그렇지 않아, 1866년 카롤 1세가 왕으로 부임하면서 형성된, 형식상으로의 종주국-번국 체제가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러시아의 남하가 재개될 조짐을 보이면서 이러한 현상이 다시 위협받고 있습니다.

루마니아의 플로에슈티 유전지대는 이후 2차대전에서 독일의 몇 안 되는 원유 생산지로 기능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사실은 그보다 훨씬 전부터 원유 채굴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텍사스와 중동, 인도네시아의 석유개발이 시작된 뒤에도 루마니아는 세계 3위의 산유국 자리를 한동안 지켰고, 1900년에는 유럽에 최초로 난방이나 조명용이 아닌 내연기관용 휘발유를 수출하기도 했지요.

1878년 베를린 조약을 통해 발칸의 이권이 사실상 분할될 때,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영향권 안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세르비아는 그 영향권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했고, 이는 원 역사에서도 1904년부터 조짐이 보이기 시작해 1908년까지 이어진 무역분쟁 – 주 품목이 돈육이었기 때문에 ‘돼지 전쟁’이라고도 불립니다 – 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1902년 자신이 그토록 원해왔던 교수 자리를 얻습니다만, 이는 작중에 나온 것처럼 명예직을 조금 넘는 수준의 조교수직이었습니다. 결국 정교수로 임용되기 위해 프로이트는 청탁을 시도하는데, 작중에서와 달리 원 역사에서는 자신으로부터 상담을 받은 귀부인들을 통해 청탁을 넣게 됩니다. 정치에는 별반 관심이 없던 프로이트였지만, 뤼거의 ‘나이롱’식 반유대주의-그는 개종한 유대인 포르처를 부시장으로 임명하기도 하고, 유명한 말 ‘누가 유대인인지는 내가 정한다!’를 남기기도 했습니다-에 대해서는 깊은 염증을 보였는데, 작중에 언급된 신곡 비유는 실제로 그가 남긴 말이기도 합니다.

카를 융은 원 역사에서는 몇 년 뒤에 비로소 프로이트와 연을 맺게 되는데, 작중에서는 그의 졸업논문(“소위 오컬트 현상의 심리학 및 병리학에 관하여”) 때문에 훨씬 일찍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원 역사에서는 자칭 영매였던 자촌 헬레네 프라이스베르크를 연구 대상으로 삼았는데, 작중에서는 거기에 사례 하나를 더 추가하게 되었습니다. 융을 매우 마음에 들어했던 프로이트는 그를 신생 국제심리학학회의 종신 회장으로 추대하려 하기까지 했지만, 이후 융이 그의 리비도 이론이 지나치게 심리현상을 성으로 환원한다고 비판하자 둘의 사이는 완전히 틀어지게 됩니다.

홍매화는 1910년대까지 이어진 제주도 내의 무속 조직체 심방청의 마지막 장(도황수)을 맡은 무당(예편심방)으로, 생년은 전하지 않으나 작중에서는 젊은이로 설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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