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270화 (270/320)

88. 백성의 나라 (3)

나라의 지존 되는 귀남과 그 아래 세자로 말하자면 경양대군이 그저 국외에서 각시 얻기를 바라는 줄로 알고, 그나마 눈치 있는 중전 민씨가 혹 혼례 올리고 어른 노릇하기 꺼리는 어린 마음에 저러는 것은 아닐까 살짝 의심만 하는 정도였으니, 항상 촐싹대며 이것저것 떠들고 다니는 경양대군에게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는 본심 있음을 알지 못하였다.

“... 물론 처음에는 그런 어린 마음도 있었지요. 하지만 시일 오래 끌면서 보니 이러한 것들이 눈에 들어와, 한껏 더욱 심란해지기만 합디다.”

이 일을 어찌 아버지께 고할까 삼형제가 함께 동궐에서 머리 맞대고 있었는데, 저의 고심을 마침내 바닥까지 털어놓은 – 처음이 어렵지, 큰형 앞에서 한 번 더 설명하니 조금 더 수월하였다 – 경양대군이 말을 마쳤다.

“거 어려운 일이로구나.”

“허나 지금 조선에서 우리가 이 얘기를 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습니까?”

주전부리상 하나 들여놓지 않고, 전등 하나 벗삼아 나름대로 은밀하게 이야기하는 삼형제였다.

나오는 이야기는, 그런 이야기가 나왔다는 것이 알려지면 곧장 여론에 떠밀려 죽여주시옵기를 청하여야 할 사람이 여럿 나올 법한 그런 이야기였건만, 그런 분위기에 맞지 않게 주변은 어수선하였으니, 세자와 대군들이 내관들 끌어들이지 않고 툭 터놓고서 얘기할 만한 곳으로 이곳 집복헌(集福軒)을 골랐기 때문이었다.

여러 해 전 귀남이 작첩을 금하여 후궁이라는 말도 신보의 해외기문(海外奇聞)과 서책 속으로 숨어든 이래 궁궐에 빈방이 여럿 늘었는데, 후궁은 물론이요 궁인들도 여럿 출가(出嫁)한바 밤에는 숙직하는 이들만 남고 저들 집으로 퇴궐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중 하나가 이 집복헌이었는데, 경양대군이 저의 체육하는 기구들을 여럿 들여두고서 편히 쓰는 곳이었다. 마당은 널찍하면서 여러 전각으로 둘러싸여 밖에서 보이지 않으니 서로 편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경양의 걱정이 과하다 할 수 있지 않겠느냐? 아바마마께 물론 전말을 아룀이 마땅하겠지만, 자칫 지나친 성려를 끼칠 수 있으니 그 또한 삼갈 일이다.”

부왕의 위엄과 추앙받음을 바로 옆에서 보기에 두 동생보다 잘 아는 세자가 말했다.

“그리고 나는 물론이고 후대에 다른 이들이 기업(基業)을 이어나가도, 어찌 아바마마와 같은 공덕을 세울 수 있겠느냐? 안양 네가 즐겨 읽는다는 그 소설 속에 나오는 것처럼, 저기 형혹성에서 성외인(星外人, 외계인)들이 침노해오지 않는 한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왕위를 두고서 은연중 경쟁하는 사이일 삼형제가 이리 화목하게 있는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으니, 금상을 경모하는 마음이 없지 않고서야 감히 그 덕을 더럽힐 만한 짓은 꿈도 꾸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저도 영이 말을 듣고 생각한 것이지만, 그, 사람 욕심이란 것이 있잖습니까. 만일... 어떤 사람이 있어 아들녀석이 천고의 왕재라고 추켜세워준다면, 반드시 노엽게만 여길 자신은 없습니다.”

저의 형 앞에서도 함부로 내어놓을 수 없는 말이련만 경양 녀석의 걱정을 듣고 저도 동감하는 바 있던 안양대군이 기어이 토로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지금 우리네야 괜찮지만은, 아바마마의 곁에서 직접 보고 배우지 않은 녀석들 대에 이르게 되면, 반드시 질투하고 원망하는 일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당장 고매한 선비들이 참의대부 자리가 걸리게 되면 옛 정 싹 잊고 싸우는 일이 군현마다 심심찮게 있다던데...”

‘하물며 지존의 자리로 말할 것 같으면 어떻겠는가’ 하는 말은 굳이 붙이지 않아도 무방하였다.

무한한 군권 누리는 임금을 모시고 있다는 나라인 이상, 아무리 그 권한을 문무백관에게 나누어준다 한들 항상 가운데에 있게 마련인 지존의 자리에 힘이 실릴 수밖에 없고, 그 나라가 기울어가기는커녕 아주 가운데에 우뚝 서기까지 하였으니, 두 대군이 아무리 지금 형 앞에서 하등 욕심 없다 선언하더라도 훗날 어찌 될지는 알 수 없다는 말에 일리가 있었다.

“그렇다 하여도... 잠깐. 너희들 혹시 이리 모였음을 혹 누구에게 고하였느냐?”

바깥에서 사람 오가는 소리 들은 듯하여 세자가 말했다.

“그럴 리 있겠습니까, 형님. 그리고 저야 사시사철 십이시 중 언제 이곳 집복헌에 있어도 누가 하등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텐데요.”

“저 또한 다른 내관이나 궁인에게 언질 준 바 없습니다.”

“‘다른’이라 하면, 누군가에게는 고하였다는 것 아니냐.”

“고하다니요. 안사람에게만 말했을 뿐입... 아차.”

창녕부부인 별단이가 남편 다음으로 궁중에서 의지하는 사람이 시어머니 민씨인데, 소싯적 고생한 것이 같았기에 맞는 면이 있었으며, 욕심 있었다가 지금은 다소간 이루어져 만족하는 것도 비슷하였다. 더구나 누구에게나 예의 바르지만 차갑게 대하는 세자빈 김씨가 때로는 저도 모르게, 때로는 일부러 불편하게 만들 때가 있었기에 종종 중궁전과 연통 주고받으며 그에 대비하곤 하였다.

물론 이를 두고서 암투라 말한다면 정말로 지난 오백 년 동안 궁중에서 암투해왔던 수많은 궁인들의 넋이 다함께 현몽하여 ‘떽’ 할 것이었지만, 여하간 사정 여차하였으니 안양대군의 입이 경솔한 짓을 했다 할 만하였다.

“주상 전하 납시오!”

“무어 거창히 예 차릴 게 있겠느냐. 내관은 이만 물러갈지어다.”

“예, 전하.”

저만 받던 촉새 대접을 이제 둘째형이 받는다 생각하니, 무슨 소문만 나왔다 하면 의심어린 눈초리 받는 경양대군으로서는 통쾌할 일이었으나 – 물론 많은 경우 경양대군 탓이 맞았다 – 곧 발소리 주인이 나섰기에 그런 사정을 차마 염두에 두지 못하였다.

“공자께서 부모 계시면 불원유(不遠遊)하며 유필유방(遊必有方)이라 하시었거늘, 나갈 때도 들어올 때도 고하지 아니하니 이런 불효자가 있느냐.”

다른 임금, 예컨대 선대의 영종대왕 같은 이가 자식에게 하였더라면 훨씬 섬뜩하였을 말이지만, 귀남이 농담 담아 말하였다 하여도 은밀히 모인 것은 은밀한 것이라 뜨끔하기는 하였다.

“그래, 무슨 이야기들을 하려 그리 모였더냐. 양주서 돌아올 때 자못 기색 비장하였다고 들어 걱정하였다.”

이러한 연줄 있어 창경궁 구석의 은밀한 말이 곧 중전에게, 그리고 임금 귀남에게 차례로 전해지게 된 것이었다.

“다 이 불초한 아들 때문입니다.”

“되었다. 장가갈 고민을 해야지 무슨 불초 얘기냐. 간만에 삼형제가 다 모였는데 화로나 내어오라 해야겠다.”

이렇게 판 깔렸으니 눈 질끔 감고서 의논하던 바를 토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근래는 그들 입보다는 손주 손녀 입에 자주 들어가던 군밤이 간만에 들게 되었으니 기뻐할 일이지만, 그럴 기분 들지 않을 만큼 밤 다 익을 때까지 진중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허어, 그리들 여기고 있었단 말이더냐.”

심각한 이야기와는 별개로, 아들의 심산 깊음을 기특히 여기며 귀남이 말했다.

“그러나 세자 말마따나 그리 두려워할 일은 아닌 듯하다. 너희가 모범을 보여 우애의 깊음을 드러낸다면, 옆에서 누가 감히 간악한 말로 이간질할 흉심을 품겠느냐?”

똑같은 말도 큰형 말이 태산이라면 아버님 말씀은 수미산(須彌山)인 고로 무게가 달랐다.

“후대의 일이라면, 내 보기에는 손주도 손녀도 모두 부모를 빼닮아 영특하고도 마음씨도 고우니 역시 누가 어린 마음을 부추기지 않고서야 문제가 되겠느냐. 다만 지금 미리 경계하는 방도를 구함은 가할 것이다.”

조선왕조 오백년에 변괴도 많고 얘깃거리도 많으니, 하다못해 귀남도 그의 형에게서 처음 듣고 – 그의 형은 소학교 시절 조선인 선생에게 들었다 하였다 – 그 후에 극장 간판으로, 신문으로, 나지오로 들었던 것이 단종대왕 슬픈 이야기요, 사도세자 뒤주 이야기라.

그때야 이조때 그런 일도 있었구나 하고서 넘겼지만, 저의 성이 김가 대신 이가 된 지도 오래인 지금, 그것이 저의 후손 대에, 그것도 금생에 겨우 얻은 아들과 손주의 대에 일어날 지도 모른다 하니 말이야 침착하여도 등골 오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옛날 우리 선대에 풍파가 많고 난정(亂政)도 정난(靖難)도 고루 있었지만은, 지금은 국헌이 반석 위에 올라 섰으니 우리네가 바른 마음 잃지 않고 또 간교한 무리는 미리 꾸짖어 흉참한 생각 못하도록 못박으면 경양이 걱정하는 그런 일도 없지 않겠느냐?”

“그런 방편이 있겠습니까?”

“그것은 지금부터 고심하여야... 흠.”

단종대왕 이야기 연상하였던 데 마음이 돌아갔다. 가뜩이나 지난번에 공조판서 이용직에게 활동섭영 만들어보라 하였는데...

“우선 하나 묻자꾸나. 경양 너는 금번 혼담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냐?”

“실은... 혼사를 올려야 하는지만 궁리하다 보니 깊이 생각지는 않았습니다.”

“나이가 나이이니 배필을 구하여야 하기는 할 테지만, 무엇보다 본인이 좋아야 하지 않겠느냐.”

아직 조선에서 그리 널리 받아들여지지는 않고 있는 ‘개화풍’ 말을 태연자약히 내놓는 귀남이었으나, 그의 평소 지론 그리하였음을 삼형제는 모두 알았기에 딱히 놀라지 않았다.

“솔직히 고하옵자면, 섬라국은 조금 멀고 낯설어... 더구나 이미 만천하에 조선에서는 연을 찾지 않겠다 공언하였으니, 이를 물리면 혹 국위에 흠이 되지 않겠습니까?”

“네 녀석들 말마따나 다들 나를 그리 추앙한다면 그만한 흠이 국위에 무엇이겠느냐?”

그런데 말하고서 생각해보니 저는 몰라도 아들 녀석 탓하는 사람은 후에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물론 국혼으로 얻을 수 있는 실리가 있다고 하니 경양 네가 혼사 물린 뒤에 뒷말 나올 것 걱정함도 일리가 있다 하겠다. 그러니 이리함은 어떻겠느냐?”

멀리 방콕에서 나름대로 굳은 결심 하고서 국혼 제의한 쭐랄롱꼰 왕이 들으면 간악하다 할 만한 파혼의 음모가 선량하다는 주상의 입에서 나왔다.

“허, 그리 하교하시었다?”

“그렇다 합니다. 국초의 제도를 살피면 훈민정음을 지은 뒤에 바로 『용비어천가』를 펴내었으니, 활동섭영을 나라에서 처음 만든다면 마땅히 나라와 종사의 위엄을 드높이는 것이 전례에 맞다 하겠으나...”

처음 투영기 시연할 때 말 한 번 잘못 꺼냈다가, 졸지에 일 떠맡게 된 공조판서 이용직이 말했다. 물론 선비가 인정(仁政) 거들어 나랏일 맡음에 어찌 마다하겠냐만, 아무래도 옥음으로 하교한 바가 민감할 수밖에 없는 사안인 고로 독단으로 추진하기에는 무엇하였다.

“태조대왕 창업하실 때부터 숙묘조까지 차례로 다룬다라... 우리가 공산당 내각이 아니었더라면 오해를 많이 살 뻔하였소.”

듣는 총리 전봉준이 농담을 하였다.

그러나 뼈 있는 농담이었다. 영종대왕 시기부터는 영남의 여러 사족들은 물론이요 개화당과 자유당의 여러 인사들이 긴밀히 얽힐 수밖에 없는 고로, 아직 세월이 충분히 지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제외하게 되었다.

(프랑스 같은 나라에서 이 소식을 들으면, 로베스피에르와 당통의 다툼이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격 아니냐며 기이하게 여기겠지만, 영국에서는 오히려 격식 있는 나라라면 저것이 맞다고 할 일이었다.)

그러나 그러고 난 뒤에도 족히 삼백 년은 넘는 세월에, 그 사이 일만 따져도 창업과 계유년 정난, 두 차례 반정(反正), 두 차례씩의 왜란과 호란 등등. 마지막 병란(兵亂)으로 말하자면 감군으로 뒤숭숭한 판에 병조가 쌍수 들어 환영할 일이지만 – 당장 삼군부에 소식 들어가면 전국의 선공(船工)을 모아다 판옥선과 귀선을 만들어올릴 것이다 – 나머지는 그리 가볍지 않았다.

그나마 왜란이야 옆 나라의 정승 하는 사람 집안에서 보기에도 헐뜯을수록 좋은 일이므로 괜찮겠지만, 호란만 해도 예조에게는 끔찍하게 민감한 일이었다. 청국과 동삼성에서 볼 때만큼 민감하기야 하겠냐만.

“우선은 건국의 대업을 다루는 내용으로 두 각에서 반 시진 정도를 만들 생각입니다. 그만큼만 되어도 유례없이 긴 것이라, 여러 사람이 고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 부분은 잘 만들기만 하면 후환 없겠지만, 당장 국초의 큰일이라면 세조께서, 흠흠.”

“그 일에 있어서 특별히 하명하신 바가 있는데, 윤음이 비상한바 마땅히 깊이 새겨야 할 듯합니다.”

가라사대, ‘이 나라가 임금의 나라인 만큼 백성의 나라이기도 하니, 군민공치 큰 뜻이 여기에 있노라. 왕업이 오랜 세월 전해 내려오며 덕행과 의리에 가감이 없지 않았으나, 이를 백성에게서 감춘다면 어찌 올바르다 하겠느냐’ 하였다.

그러면서 혹 두려워하는 이들을 위해 경양대군이 손수 이 큰일을 거들게 하겠노라 하였다. 아첨과 진심 담아 하는 말로 금상의 대에 문물예악 정비함은 국초 세종대왕과 어깨 나란히 한다 하였는데, 다른 것은 몰라도 대군들에게 이것저것 나랏일 맡기는 데 있어서는 비슷하다 할 만하였다.

그보다 중한 점은, 종친 중에서도 대군이 직접 나서게 되었으니, 혹 왕실을 무엄하게 다루었다 하여도 대군이 직접 나서서, ‘내가 종친이지 네가 종친이냐’ 하면 나오던 말도 쑥 들어갈 것이라 – 사실 경양대군 덩치라면 종친이 아니라도 쑥 들어가게 할 수 있을 테다 – 후환 걱정 없이 편히 어명대로 만들 수 있게 되었다는 데 있었다.

“적어도 내년 추거에서 순풍(順豊)군은 공산당이 낙승이겠구려.”

순풍군은 즉 순흥부와 인접한 풍기, 그리고 옆 영천의 일부가 합쳐져 만들어진 곳인데, 천순(天順) 연간의 의리(단종 복위운동)를 숙종대왕께옵서 밝히어 순흥도호부 이름을 회복한 이래로 그것을 내심 자랑스레 여겨오고 있었다. 순흥과 풍기 두 고을 모두 유풍(儒風) 강한 곳이라 자유당 터전이었는데, 적어도 옛 순흥 쪽에서는 이번 소식이 전해지면 눈물 흘리며 망궐례를 올리고도 남을 것이었다.

“그러나 ‘백성의 나라’ 그것은... 아니, 되었소. 이는 예조와 더불어 이야기할 일이외다.

좌우지간 추진함에 있어 흔들림 없도록 하시오. 전례가 없다 하나, 그만큼 한번 이루어내면 천하에 조선국 국위를 떨치는 일이니, 군병에 의하지 않고서 명리 얻는 것은 우리 내각의 총의이기도 하지 않겠소이까.”

“예, 영상.”

곧 기무회의 안건으로 올라올 사안이니 미리 고하고자 찾아왔던 이용직이 하직하고서 전봉준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쁘릿사당에게 들어 아는 바에 따르면 시암 국왕이 가만히 있지는 않을 듯하였다. 대군과 옹주가 혼례 올려 인연(因緣) 생기게 되면 자연스레 인연(人緣)도 따라 생기는 법 아닌가. 물론 정말로 파혼할 생각으로 그런 윤음을 내리시지는 않았으련만.

그보다 더 중한 것은, 여전히 어심이 저러하니, 천하대란에 대비하여 열국 사람 끌어모으는 데 있어 거리낄 바가 없어졌다는 데 있었다.

‘이 나라는 군주만큼이나 백성의 나라다’ 하면 ‘너희 나라도 임금 모시고 있지 않으냐’하고 반문할 구주 나라들의 입을 막으면서, 전쟁 싫어하는 만국 백성들을 한데 묶을 수 있으니, 잘 된 일 아닌가.

혹시 이번 활동섭영 만드는 일로 무언가 그럴듯한 것이 나오게 된다면, 정강사에 넘겨 이것을 천하대란 대비하는 데 쓸 수 있겠느냐 물어봄직도 하다 생각하는 전봉준이었다.

“거, 이렇게 발목을 잡힐 줄이야.”

‘네 형 군복 벗을 때까지만 겸직하라’ 하는 하교로 말미암아 공조에 원래 있던 안양대군 자리와 신설된 ‘활동섭영감독’ 자리를 함께 맡게 된 경양대군이 허탈히 말했다.

“네가 좋아 못 살겠다는데 어찌할 테냐.”

섬라국에서 보내온 답을 일부러 친히 전해주러 찾아온 세자가 속 좋게 껄껄 웃으며 경양대군 속을 긁었다.

분명 아바마마 말씀하시기를,

‘듣기로 섬라 임금은 자신의 권세를 나누어 맡김을 가장 꺼려한다 하니, 지금 와 있는 공사 불씨도 우리 조선국 모양새 따라 국헌 고치다 하였다가 미움을 샀다 하더라.

그 나라 옹주가 네게 시집오기를 원하는 것은 물론 나라의 이익 때문이기도 하겠지만은 네가 뉘 아들인지 참 헌걸차고 뛰어나기 때문이지 않겠느냐? 헌데 네가 갑작스레 그 나라 임금 싫어할 만한 언설을 내어놓는다면, 그때는 저쪽도 반드시 마음이 바뀔 테다.’

하시어 그때는 참으로 그럴듯하다 여겼다.

그리하여 섭영 만들기 전부터 혹 주변에 지나가는 채사군 있을까봐 종종 그 ‘백성의 나라’ 윤음에 찬동하는 뜻을 여럿 밝히고, 그 외에 섬라국왕이 싫어할 만한 말이 또 무엇 있을까 고민하며 지금까지 바쁘게 지내왔는데, 돌아온 말은 외려 한술 더 떠, 옹주가 오히려 더욱 좋다면서 한 번 만나보기를 청하겠다고까지 하는 것 아닌가.

나라의 예법에 배필로 정해진 남녀가 미리 만나보는 것도 할 말 많은 일이건만, 그럴 줄 알았는지 섬라국에서도 꾀를 썼다.

“휴우, 영국과 법국 가운데서 지금껏 버틴 나라니 계책 하나는 비상하리라 예상하였어야 하였는데...”

“뭐, 한 번 만나보자 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 다음에 대놓고 꺼리는 기색 보인다면 그때 아바마마 말씀마따나 파혼은 어렵지 않은 일일 테다. 아바마마 확언을 옥음으로 직접 듣고 왔으니 염려는 말거라.”

마침 내년 아주대회가 평양에서 열리는데, 이번부터는 섬라국도 참여하겠노라 한 것이다. 사실 참가는 이미 옆의 대남이 먼저 하였기 때문에 언제고 섬라 안에서도 뛰어들어야 한다는 소리가 나오고 있었고, 더구나 그 종목이 시문(詩文)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당수(唐手) 같은 박투도 있었으니 나름대로 자신도 있었다. 시암의 ‘무에(Muay)’ 역시 싸움 재주로 훌륭하거니와, 국왕 본인부터가 이를 진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일행에는 왈라야 알롱꼰 옹주도 끼어 있을 것이었다.

거절하자니 아주대회의 명분과도 맞지 않고, 더구나 대남은 물론 머나먼 하와이까지 끼고 있는 판에, 그 옛날 왜란때 이십만 수군을 (말로만) 보내주겠다 약조한 사이인 섬라국이 끼지 못함이 말이 되겠는가.

“네, 형님.”

“그럼 나는 가보마.”

돌아가려는 세자를 경양대군이 붙잡았다.

“형님. 전에는 말씀 못 드렸는데... 감사합니다.”

“부왕의 은덕이지 내가 무슨 한 일이 있겠느냐.”

“어쨌든 형과 원손께는 송구스러운 이야기지 않습니까.”

“되었다. 마음에 담아두지 말거라.”

그러나 사람 생각이 마음에 담지 말라 하면 더 떠오를 수밖에 없는 것이라.

“어쨌든 잘 풀렸지 않으냐. 그리고, 이렇게 하였는데도 후환을 아예 끊지 못할까 걱정하시면서 아바마마께서 비책을 내려주시기까지 하셨으니 안심함이 마땅할 테다. 덩치도 큰 녀석이 우거지상 쓰면 사람 여럿 놀라지 않겠느냐.”

그 네 글자는, 결국 삼형제 걱정이 임금이 너무나 높은 자리이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니, 정말로 임금의 위엄과 권세 욕심으로 일대 파란이 걱정될 때 취할 조치라.

‘내 너희에게 비책(祕策)을 하나 전해줄 테니, 바라건대 너희가 이것을 쓸 일이 없으면 다음 대에 전하여 대비하는 방도로 삼도록 하거라.’

하고서는 나이 먹어도 개선이 없는 예의 그 어필로 적어 내려주었다.

‘만에 하나 그리하여 논란이 크게 일어난다면, 이것으로 나라 이름을 갈음하도록 해라. 그리하면 반드시 논쟁이 잦아들 것이야.’

물론 그리하여도 왕실은 왕실로 남을 것이라 귀남은 생각했다. 당장 전생의 대한민국에서도 그 풍파를 겪었는데도 영친왕 부부가 창덕궁에서 그리 오래 살았으니 – 그 영친왕 부부와 이 몸이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지만, 여하간 생각하면 묘한 일이었다 – 어찌 이번 생이라고 다르겠는가? 그에 따르는 권세가 예전같지는 않겠지만, 오히려 그렇게 되면 임금 자리 올라보겠다며 다투는 일도 아예 없어질 것이다.

이만하면 자신의 가족이 후에 풍비박산나는 일은 없겠거려니 하면서, 금세의 다른 이들이 보면 그 자리에서 기절초풍할 만한 네 글자 ‘大韓民國’을 내려주는 귀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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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역사에서 단종을 ‘노산군’에서 단종으로 다시 복권해준 것은 숙종이었습니다. 본인의 정통성에 하등 문제가 없는 숙종이었고, 오히려 먼 조상의 일을 누군가 반복할까 두려워해야 하였기에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공정왕’으로만 불리던 태종의 형 정종에게 묘호를 정식으로 올린 것도 숙종임을 생각하면 그냥 본인이 이런 쪽에 관심이 많았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왕실의 공식 입장과는 별개로 단종의 슬픈 사연과 계유정난을 둘러싼 극적인 사건들은 후대인의 상상을 늘 자극해 왔습니다. 남효온이 지은 문제적 전기소설 『육신전』은 조선조 내내 선비들 사이에서 계속 퍼져나갔고, 결국 정사에 준하는 가치를 인정받기에 이르렀습니다. 또한 근대에는 이광수가 1920년대의 히트작 『단종애사』를 연재한 이후 1940년대 국문 신문들이 정간될 때까지 단종에 관한 소설이 계속 창작될 만큼 계유정난 이야기는 인기를 끌었지요.

이는 대한민국 수립 이후에도 마찬가지로, 1960년대 군사정권 하에서도 민감할 수밖에 없는 단종 이야기가 계속해서 영화로 창작된 것을 보면 이 이야기가 가졌던 매력을 알 수 있습니다 (윤진현(2013), “1960년대 세조정변의 영화화와 현실인식.” 『세계문학비교연구』 42).

지금의 영주시 순흥면인 순흥은 원 역사에서 단종 복위운동이 일어난 곳으로, 세조는 무자비한 진압 후 아예 도호부 전체를 없애버리는 강수를 둡니다. 통상 강상죄가 일어날 경우 부를 현으로 강등시키는 정도의 조치가 행해졌던 것을 감안하면 그 강경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후 숙종이 단종을 복권하면서 다시금 순흥도호부가 세워지게 됩니다.

하지만 1914년 총독부에 의한 행정구역 통폐합에서는 두 동강이 나, 읍내를 포함한 대부분이 인접한 풍기와 함께 영주에 편입되게 됩니다. 영주 역시 본래 영천(榮川)이었다가 다른 영천(永川)과 혼동된다는 이유로 당시에 이름이 바뀌었지요. 작중에서는 순흥과 풍기의 두 이름을 따 ‘순풍’이 되고, 순흥 대신 영천이 둘로 쪼개지게 되었습니다.

지나가듯 언급되는 태국 무술은 우리가 아는 그 무에타이가 맞습니다. 쭐랄롱꼰 왕은 개인적으로 격투기에 관심이 있었고, 또 국기(國技)로서 무에타이를 체계화하고자 하기도 했습니다. 당시에는 고무술(古武術, Muay boran)이라고만 불렸는데, 쭐랄롱꼰 사후 권투가 태국에 들어오면서 그에 대비되는 ‘태국 무술(Muay Thai)’이라는 표현이 정립되게 됩니다.

원 역사의 영화는 20세기 초 『달세계 여행』, 『대열차강도』 등 최초의 상업적 극영화들이 여럿 등장하면서 본격적인 발전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독자적인 극 전통이 있는 다른 문화권에서도 같은 시기 비슷한 시도들이 자체적으로 있었습니다. 예컨대 일본에서는 1897년 뤼미에르 형제의 영사기가 처음 선보이자마자 가부키나 분라쿠를 촬영해 상업적으로 판매하려는 시도가 시작되었고, 1903년에는 최초의 영화관 덴키칸(電氣館)이 개관하였습니다. 그 뒤에는 최초의 전문적인 일본인 영화감독 마키노 쇼조(牧野省三)가 등장해, 1908년 ‘혼노지 전투(本能寺合戰)’를 시작으로 사극을 만들기 시작하였으니, 80년 앞서 ‘조선왕조 오백년’을 찍으려는 귀남의 의도는 사실 그리 시대를 많이 앞서갔다고 할 수는 없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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