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269화 (269/320)

88. 백성의 나라 (2)

섬라국 공사 불씨, 그러니까 쁘릿사당(Pritsadang)은 섬라국왕의 조카 되는 이인데, 그 나라의 종실이 번영하기가 마치 그들 숭상하는 불경 속 항하(恒河)의 모래와도 같았으므로, 그 피가 귀하기는 하되 인신(人臣)으로서는 귀한 대접 받지 못하였다.

그 까닭인즉 섬라국왕의 노여움을 샀기 때문이었다. 근 이십 년 전, 영국서 수학하던 중 당시 베를린에서 열리던 회의의 추이를 살피고는, 적어도 장차 한동안은 밀림의 호랑이 같던 영프 양국이 주춤할 듯하니 얼른 나라의 제도를 구주 나라와 같게 뜯어고쳐야 한다며 당시 함께 수학하던 다른 종친들과 더불어 상소를 올렸는데, 어설프게 머리 굴린 것이 도리어 화가 되었다.

영국의 제도를 그대로 들여오자 하면 어찌 될지 뻔하였으므로 대신 조선국 국제를 본떠 군민공치 이룩하자 하였건만, 애초 군권에 있어서는 일말의 물러남도 허여하지 않으려던 국왕의 역린을 제대로 건드리고야 말았다. 더구나 그 조선국이란 불법을 숭상하기는커녕 도리어 탄압하여 거의 끊어지게 만들었다 이제 겨우 숨통 터준 못된 나라라지 않은가.

그 무렵이면 바로 옆 월남까지 조선국 손 닿은지 오래라 그 나라 사정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섬라의 불법 숭모는 조선의 정학 추앙과 닮은바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격으로 탄핵의 빌미 삼자면 족히 삼을 만하였다.

하여 ‘네놈 그리 좋아하는 조선 가서 돌아오지 말거라’ 하는 뜻으로, 본래 공식으로 통교할 생각도 없던 조선에 공사로 박아버린 것이 올해로 십삼 년이었는데, 조선이 마음에 들었는지 – 아니면 돌아가보았자 저 맞아줄 이 없음을 아는지 - 중간에 기관총과 신형 소총 파는 일을 돕는 등 여러 공을 세웠음에도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러던 차 난데없이 벼락을 맞게 되었은즉, 청국 신임 공사에게 『삼국유사』라는 책에 옛 아유타야와 이름 비슷한 나라 나오더라 일러준 것이 어찌 이리 되었다는 말인가.

“참으로 놀라셨을 것으로 압니다.”

“공사의 나라의 잘못도, 공사의 잘못도 아닙니다. 다만 예상치 못한 일이기에 잠시 당혹하여, 이처럼 사정을 묻고자 부르게 되었으니 부디 귀국의 뜻을 가감없이 들려주기를 청합니다.”

대관절 머나먼 섬라국이 무슨 곡절로 그런 혼사를 제의하였는가, 긴급히 소집한 모임에서는 결론을 채 내리지 못하여, 국왕 귀남 가라사대 그 나라 공사 불러다 사정 듣는 것이 오히려 빠르겠다 하였다.

마침 두 사람 모두 런던서 공부한 바 있었기에 말이 잘 통하였다.

“흠흠, 우선 무엄함을 무릅쓰고 나라 사이 우의를 위하여 미리 말씀드리자면, 왈라야 알롱꼰 옹주께서는... 귀국의 기준에 따르자면 부족하신 면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 내역은 이미 전해 들었습니다. 전하께도 이미 말씀 올렸으니 재론치 않으셔도 되겠습니다.”

섬라국왕이 그의 부왕 몽국왕(라마 4세)의 스물일곱 번째 여식 되는 배다른 누이를 후궁으로 들이니, 그 가운데서 나온 이가 어쩌면 섬라국부인(가칭) 차씨가 될지도 모르는 옹주였다.

“이 자리에 면암 경이 계시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하겠습니다.”

조선국 사람들 관점을 모르지 않는 쁘릿사당이 민망함에 농을 던지고는, 다시 외교관다운 말투를 회복하곤 말했다.

“아국 역시 이백 하고도 오십 년 넘은 금령(禁令)을 깨고 제의하는 혼담입니다. 결코 가벼운 일시의 생각으로, 또는 귀국을 업신여겨 이러한 혼담을 제의한 것은 아니니 거듭 청하건대 국왕과 총리께서는 오해치 말아주십시오.”

구주 열국의 역사를 공부자(공자)의 춘추필법으로 다시 쓴다면, 공과는 제쳐두고 그 가계만으로도 군주의 절반은 이름조차 남기지 못할 것이라는 농담이 태서사(서양사) 가르치는 교수들 사이에는 있었다. 그러나 구주 왕가들을 보고서 다시 보더라도 곤란한 것은 곤란한 것이었다.

“그리고 앞서 말씀드린... 점을 제하면, 제가 듣기로도 참으로 훌륭하신 이로 귀국의 격에 맞는 배필이라 하겠습니다. 서책을 즐기기로는 소싯적 유모가 책을 숨겼다는 일화가 있으며, 상시 검약하여 진주 목걸이 하나 외에 꾸미는 바가 없으며, 각국 사정에 능통하며 영어가 유창하니...”

아무리 저를 써주지 않는 고국이라지만 조국은 조국이요, 저를 미워하는 임금이라지만 섬겨야 할 주군은 주군이라. 그 상정(常情)에 말미암은 찬사가 이어졌다.

“흠흠. 그대의 뜻은 잘 알겠소. 하면 귀국에서는 이득 취하려는 뜻 없이 오직 아름다운 인연을 위하여 이리하는 것이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그 조선국왕 친히 하유하니, 국익이 걸려있지 않고서야 어찌 허투루 말을 꾸밀까. 전봉준이 옥음을 옮기니 잠시 답이 나오다 말고 머뭇거렸다.

“그것이... 천하의 대세가 어그러질 때에 대비하여, 아주에서 의지할 곳을 얻고자 합니다.”

영국 정계의 논란이 어떻게 종식될지는 알 수 없으나,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어떤 식으로든 시암 근방까지 여파가 닿으리라는 것이었다.

대영제국의 해가 저물지 않도록 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지렛대는 막강한 해군이니, 이를 이용해 왕관의 보주 인도와 그 주변에서 무언가 다른 이익을 얻거나 이미 얻은 바를 재차 공고히 하려 할 법하였다.

이웃한 버마의 종주권을 확실히 하고, 추가적인 이권을 뜯어낸다던가, 저들의 해협 식민지 일대(現 말레이 반도 및 싱가포르)의 ‘안전’을 위하여 헐값에 시암의 인접한 영토를 넘길 것을 요구한다던가 할 것이요, 더 나아가 저들이 자칫 프랑스나 독일에 넘어갈까 다른 수를 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니면 저들 잘하는 이간질로, 조금씩 재흥의 기세 보이는 옆의 베트남을 충동질하여 싸움 붙일 수도 있었다.

여러 경우 중 가능성 높은 것도, 희박한 것도 있지만 어느 쪽이든 시암으로서는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일이라, 지난 수십 년 동안 애매하게 끊어졌던 북쪽의 아시아 국가들과 손을 잡고자 하였다.

“그리고 지금의 아주에서 조선국만큼 열국 형세의 가운데 있는 나라가 없습니다. 과한 칭송이 아닌 엄연한 사실이니, 당장 조청일 삼국이 어디에 모여 바깥 군대 더 들이지 않기로 약조하였습니까?

이제 이번 혼담을 하해와 같은 아량으로 받아들여 주신다면, 두 나라의 왕업에 반드시 큰 보탬이 될 것이요, 해동 대조선국과 섬라국의 인연이 다시 맺어져 재차 끊어지지 않을 튼튼한 들보와 같게 될 것입니다.”

중원과 해동 제한 나머지는 모두 오랑캐라며 무작정 낮추어 보거나, 선비님네 말씀하시니 그런가보다 하며 무작정 백성들이 뇌동하던 때는 지난지 오래였다.

가장 처음 꺼낸 그 가계의 문제를 제한다면, 집안의 격이 떨어진다고는 할 수 없고, 전례없는 일이기에 나라의 여론이 크게 놀라기는 할 것이나 개화한 시대에 있을 법한 나라의 경사라며 시일 두고 널리 알리면 통촉하여 달라며 길을 막는 이는 없을 것이다. (물론 ‘그 나라에 그런 인습이 있기는 하다’ 정도로 최대한 가계 문제는 다루지 않으려 노력해야 하겠지만.)

더구나 어린 딸을 귀엽게 여기는 마음이 섬라 땅에도 없지 않을 것이므로, 칭송하는 말을 상당 부분 걸러 듣기는 해야겠지만, 이 불 무어라 하는 사람 찾아오기 전 전봉준이 아뢰기를, 굳이 과하게 부풀려 말하였다가 자칫 파탄의 지경에 이르게 할 만큼 어리석은 자는 결코 아니라 하였다.

“귀국이 혼담 제의한 뜻은 잘 알겠소. 그러나 그대도 앞서 거론하였듯, 이 일은 귀국뿐 아니라 아국에도 처음 있는 것이니, 그대 나라에서 말하는 허왕후의 일도 연수로 따지면 거의 이천 년 전의 일이외다.”

“예, 전하. 어찌 감히 정도를 넘어서 뜻을 강권할 마음을 품겠습니까? 다만 경건히 가부를 말씀주시길 기다리겠습니다.”

막내아들 평소 이르기를, 이왕 한 번 하는 혼인은 조선 처자 외에 바깥에서 해로할 연을 구하고자 한다 하였고, 저의 막내처럼 서양식으로 무언가 하는 것을 좋아하고 또 총명하여 서책 좋아한다 하였으므로, 며느릿감으로 보나 아들의 안사람으로 보나 흠결을 찾기는 어려웠다.

물론 귀남도 어쩔 수 없는 옛날 사람이라, 동남아 사람은 게을러서 못 산다느니 하는 소리를 간혹 들어 나름 일리 있겠거려니 여겼고, 동란 직후에는 서울에서 백인이든 흑인이든 여러 외국인에, 그 뒤에는 이른바 ‘튀기’들까지 종종 보고서 퍽 못나게들 생겼다 여기곤 하였다. 허나 집안이 (역시 조금 망측하기는 했지만) 다름아닌 일국의 왕실이요, 타고난 재주로 따지자면 저나 아내 민비나 누굴 들어 씨가 못났다며 흉볼 계제는 아니었다, 물론 아내에겐 말 못할 일이었지만.

또한 처음 다르게 생긴 사람들 보고 기이하게 여겼던 것으로부터 수십 년이 지나서는, 외국인 며느리 야무지다 하는 이야기가 노인정에도 종종 들리고, 테레비에도 그런 예가 간혹 나왔다.

그러므로 곰곰이 생각할수록 저의 아들 원하는 대로 해줌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싶은데,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바 있어 섬라국 공사 물러난 뒤에 물었다.

“영상, 그대는 어찌 생각하오?”

“지엄한 종실의 일을 어찌 신하된 몸으로 함부로 말씀 올리오리까.”

그러나 전봉준은 똑같이 칭신하지만 아무래도 조정에 오래 몸담은 사람은 아닌 고로, 함부로 말씀 올릴 수 없다고 고하고서는 대신 정중하게 말씀을 올렸다.

“다만 그 정략에 따라 혼약 맺는다 함의 득실을 따져 고하자면 이와 같습니다.

섬라국은 일만 리 바다를 두고 떨어져 있으니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여도 문제될 바는 없을 것입니다. 물론 그 나라도 강역이 작지 않고 민총은 많아 남쪽 땅에서 위세가 높지만, 청국과 일본을 사이에 둔 우리로서는 굳이 그들과 친하지 않아도 잃는 이익은 적으며, 굳이 친하여 얻을 이익은 크지 않습니다.”

“만일 성혼이 된다 하면 어떻겠소?”

“세자가 아닌 대군의 대혼(大婚)이므로, 다른 나라들도 놀랄지언정 경계하는 마음을 품지는 않을 것입니다. 위세를 서로 빌려주는 이상의 교분을 맺기에는 앞서 아뢴 것과 같이 일만 리 거리가 있으므로, 여기에 있어서는 공사 불씨가 거론한 바와 같이 득이 실보다 많다 하겠습니다.”

만일 다른 참한 규수가 있다면 모르겠지만, 미국 땅에서 넘어오는 혼담은 대개 진지하지 못하거나 영 격이 맞지 않고, 그나마 근방에서 통혼할 만한 애신각라씨로 말하자면 그쪽도 손이 귀하여 과년한 처자가 드물었고 더구나 옛 천조국과 옛 제후국 사이에서 격을 따지자니 가깝기 때문에 더욱 어색하였다.

“거 정말 천행이구려. 이제 대군 한 사람만 좋다 하면 가히 실행할 수 있겠는데, 하필 이럴 때 저의 형을 보러 양주로 출타하였다 하니 아쉬운 일이오.”

그래도 명색이 혼담 얘기인데, 전화로 이야기 주고받는 것은 부자 정리에 맞지 않잖은가. 그런 면에서는 여전히 옛날 사람인 귀남이었다.

한편, 부왕의 지레짐작과는 달리 혼담 소식은 청천벽력과 같이 들은 경양대군은, 우선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 저의 형 참령 이규가 오늘 또 양주행한다는 말이라, 곧장 달려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의 차에 올라탔다.

느닷없는 불청객에 차가 꽉 차고, 앞에서 장차(운전)하는 – 그때 빙판길 미끄러진 이래로 어지간해서는 손수 차 몰지 않는 안양대군이었다 – 이는 어째 차가 잘 나아가지 않는 듯한 느낌 받으면서도 함부로 거론치 못하였다.

그리하여 평소보다 약간 늦게 도착했는데, 무슨 곡절로 그리 뚱해서는 생각 빠져있는지 물어도 옆으로 흘리면서는 저의 작업하는 – 정확하는 남 작업하는 것 바라보는 – 곳 옆을 서성였다.

“인석아, 게서 비켜라. 부서지겠다.”

“뭐, 툭하면 부서진다는데 하나쯤 더 망가진들...”

귀씨 부부가 종종 성균관 나아가, 이제 그 원수같은 산학과는 고별하리라 – 호조로 떨어질 불우한 중생을 제하면 – 다짐한 이들에게 물상학(物象學) 가르침 베풀 때면 하는 이야기 중 하나가, 물질이 이른바 평형에 있다 하여도 실제로는 꾸준히 줄었다 늘었다 하며, 다만 그 줄고 느는 양이 맞아떨어지기에 변함없어 보일 뿐이라 하였다.

같은 논리로 따지면 촉새 동생 녀석이 끊임없이 소문을 옮기고 다니는 것은 그만큼 듣는 바가 있기 때문일 터. 항상 귓구멍 큼직하게 열어두고 다니므로 그 섬라와의 국혼 소식도 듣고 이리 온 것일 테다.

“고 녀석은 네 형수 되는 분께서 나흘 전 찾아오셔서는 친히 올라서 타는 시늉을 하신 보배로운 날틀이란 말이다. 저리 비켜, 얼른. 아차, 어, 그러니까. 농담이다. 실제로 그런 일은 없었으니 어디 가서 얘기는 하지 마라.”

치명적인 실수를 범한 줄만 알았는데, 의외로 별반 반응이 없었다. 사람이 늘 하던 짓을 하지 않으니 궁금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영(坽, 경양대군)아, 정녕 그 혼담이 마음에 걸리는 것이냐? 혼약이라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더라. 우리 전래되는 예법대로 하여도 그렇고, 심지어 듣기로 천주교회에서는 더욱 소략하다던데...”

“형님.”

“경양대군은 신부 차씨를 평생토록 사랑할 것을 천지신명 앞에 약조합니까? 여기에 그렇노라 답만 하면 된다 하니 간례(簡禮)도 그만한 간례가 없지.”

“아, 형님, 좀!”

어디서 어설프게 들은 천주교 혼례 성사하는 말을 놀리듯 읊었더니 덩치 대호만한 놈이 노성 내어 온 창고가 울렸다. 멀리서 신형 비행기 점검하고 있는 라이트 형제 중 누군가 놀라 공구 떨어뜨리는 소리가 났다.

“죄송합니다.”

“아니, 나도 미안타. 정말로 마음에 짐이 있는 모양이로구나.”

“후...”

“대관절 무엇으로 인하여 그리 고심한다는 말이더냐.”

“혼사를 원치는 않고, 일전에 고한 바가 있으니 물릴 수는 없고. 그리하여 고심할 뿐입니다.”

사내로 태어났으면 배필 만나 혼례는 치루어야 하지 않느냐 물으려 했더니, 둑 터진 것처럼 우수수 푸념이 이어졌다.

“혼사 치른다 칩시다. 그 뒤에는 어찌 됩니까?”

“어찌 되긴. 대군 사는 것이 늘 그렇듯, 하고픈 것 하면서 조용히 살아야지.”

기실 대군은커녕 그냥 왕자군만 되어도, 툭하면 유배에 사사하던 것이 불과 반백년 전 일이므로, 대군 처신하는 법도가 무엇인지는 진즉에 끊어진지 오래요 유일한 이야기 근원은 옛 운현궁이었다.

그리고 그 운현궁 주인 걱정하던 가장 큰 것은 역시 왕실 위엄이므로, 대놓고 이야기는 하지 않아도 넌지시 세자의 처신과 대군의 처신을 – 대원군 역시 전해들은 것에 저의 궁리를 덧붙인 것이었지만 – 일러주곤 하였다.

“그런데 그게 되겠습니까?”

“위에 부왕이 계시고 그 바로 밑에 큰형님께서 계실진대 조선 팔도는 물론이요 천하 만방에 누가 감히 무어라 하겠느냐?”

“형님은 요새 이 비행기 일에 바쁘셔서 모르십니다. 아직 말도 제대로 못 뗀 아이들 두고서 벌써 궁 안에 넌지시 비교하는 소문이 도는데...”

“무어라?”

저의 아들딸이라면 어버이와 별단이와 함께 가장 끔직이 아끼는 사람으로서 안양대군 또한 어조가 일시에 바뀌었다.

“물론 아직은 무엄하다며 무어라 할 것은 없습니다. 그 선을 넘었더라면 저보다 공안서나 궁내부가 먼저 나서서 솎아내었겠지요. 하지만 몇 년 뒤에는 어찌 될까요? 하물며 저까지 혼례 올려서 사람이 여럿 생기게 되면?”

“그야... 아...”

아무리 권력을 나누고 나누었다 한들, 군왕의 위엄이란 사라지지 않고 도리어 스스로 샘솟아 하늘에 닿았다. 옛날과 같이 전권 쥐고 국사 전체를 농단할 수 있는 사람은 나기 어렵고, 오직 가운데서 중재하며 모두를 거머쥐는 이만 있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실제로 이룩하여 모두의 숭앙 받는 분이 궁에 계시니, 그 뒤를 이을 사람 누구인가 가만히 따져보는 이가, 설령 지금은 저도 모르게 그리할지라도 몇 년 뒤에는 대놓고 그리하고, 더 나아가서는 숫제 파당을 이룰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지금의 국제가 주윽 이어져 몇 대를 내려간다면, 그때는 또 달라지겠지만, 과연 그때까지 권세 욕심내는 사람의 본성이 가만히 있을 것인가?

“그렇다고 해도... 내 말한 것처럼 사내 되어 혼례 아니 치를 수는 없으니...”

“그러니까 이 못난 아우는 그저 비겁하게 피해다니기만 했던 것입니다. 저나 누가 될지 모를 안사람은 물론이요 자식들까지 거기에 끼는 것이 두려워서요.”

말하고 나니 정말로 자신이 비겁하고 한심하게 느껴졌는지, 황소 눈망울이 그렁그렁해졌다.

”해결할 방도는 없고, 그저 우리... 집안끼리 이대로 영영 화목하길 바라면서요. 아버님, 어머님, 형님들, 형수님들, 조카들. 이렇게.”

덩치 큰 놈이 평소 실실대고 다녀 실제로도 솜덩이 같은 줄 알았건만, 의외로 단단한 고민이 깊은 속 안에 감추어져 있었다.

곱씹고 곱씹던 중, 갑자기 안양대군이 피식 코웃음을 흘려 절로 주의를 끌었다.

“우습구나.”

“무엇이 말입니까?”

“그 무소불위 권세 지니신 아바마마를 두고 우리 둘이서 무엇하고 있단 말이냐. 이따 돌아가서 곧장 아바마마를 찾아뵙자꾸나. 그런 걱정이 있다면 가장 마음 아파하실 분을 두고 우리끼리 고심하면 그것이 어찌 옳은 일이냐?”

딱 맞추어 라이트 형제가 신형 엔진의 점검을 마치고 가동을 시작하여, 창고가 기계음으로 꽉 메워졌다.

--- *** ---

태국의 쭐랄롱꼰 왕, 즉 라마 5세는 태국이 식민지로 전락하는 것을 막아내고 태국의 근대화를 이루어내었기에 지금도 대왕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또한 제한적인 서구화를 꾀하면서 절대왕정을 기반으로 한 근대국가 건설을 꾀했다는 점에서는 원 역사의 고종을 연상케 하는 면도 있지요.

그러나 실제로는 피상적인 유사성과는 달리 여러 조건이 달랐습니다. 집권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유림을 적으로 돌린 고종과 달리, 태국의 경우 이미 절대왕정을 이론적으로 지지하는 불교가 뿌리을 깊게 내리고 있었고, 쭐랄롱꼰은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습니다. 또한 선대에 버마와 베트남, 말레이 반도 사이를 모두 통일하면서 얻은 영토가 있었기에, 이를 분할하여 열강에 넘기는 조건으로 불평등조약 개정 등을 이끌어낼 수도 있었지요.

여담으로, 17세기 중반 외국인들이 너무 늘어나 정치세력화할 위험이 발생하자, 귀족 집안과의 유착을 막기 위해 당시 국왕 쁘라삿 통은 태국인과 외국인의 통혼을 금하는 법을 제정했습니다. 작중 언급된 오래된 금령이 이것입니다. 현재도 태국 왕실은 외국인과 결혼한 왕족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2019년 우봇라타나 라자칸야 공주가 외국인과의 결혼으로 일반인 신분이 되었음을 역이용해 親탁신계 정당의 총리 후보로 도전하였던 사례도 있습니다.)

물론 조건이 비교적 우호적이었다고 해서 태국의 근대화가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1880년대 서구 유학파 엘리트 및 왕족들을 중심으로 입헌군주제 채택 주장이 일어났던 것은 그 예입니다. 본인도 왕족인 쁘릿사당은 이때 이 움직임의 핵심에 있었다가 단단히 쭐랄롱꼰 국왕에게 밉보이게 되고, 인재 하나가 아쉬웠던 시기였기에 귀국 후 한동안 근대화 업무를 돕다가 결국 1890년 축출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후에도 그는 승려로 명성을 쌓아 귀국하려 시도하거나, 진신사리를 찾아 국왕의 환심을 사려 노력하는 등 정계 복귀를 노렸는데, 작중에서는 완전한 축출도 기용도 아닌 재외공사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쭐랄롱꼰의 노력으로 완비된 절대왕정은 대공황과 함께 흔들리기 시작해, 결국 피분송크람의 군부 쿠데타로 이어집니다. 이때 약화된 왕권은 20세기 후반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이 적극적으로 중재자 역할을 수행하면서 (혹은, 자유주의 운동을 정략적으로 억압하면서) 다시 강화되어 오늘날에 이르게 됩니다.

왈라야 알롱꼰 공주는 쭐랄롱꼰 국왕의 이복남매이자 후궁이었던 사왕 와타나(Savang Vadhana)의 딸로, 서구 문물에 관심이 많았고 학구열이 강했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여권 신장운동과 여성 교육에 있어서도 많은 공헌을 했는데, 이는 한편으로는 본인의 능력 덕분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복동생 와치라웃(라마 6세)와의 깊은 친분에 힘입은 것이기도 했습니다. 작중에서는 아직 나이가 스물에 불과하기에 본격적인 정치적 행보는 보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담으로, 앞서 언급한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의 고모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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