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267화 (267/320)

87. 살피지 아니할 수 없는 일 (4)

사건은 마토스의 반란군이 참패하면서 카스트로 정부가 유지될 가능성이 높아지던 때, 카이저 빌헬름 본인이 삼촌 되는 영국 국왕 에드워드 7세를 직접 찾아가서 구두 합의를 맺은 데서 시작하였다.

독일이 필리핀에서, 카리브해에서, 심지어 모로코에서 이런저런 일들을 벌이고, 독일 금융계는 카이저보다도 열심히 전세계를 누비고 다니며 영국의 빈틈을 노릴 무렵. 독일이 비록 동맹이라지만 위아래는 명백히 가려야 하며, 그러지 않는다면 언제고 동맹을 핑계로 원치 않는 무모한 모험에 함께 끌려들어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 주로 ‘빌리의 불독’ 독일민족당 인사들이 물어뜯는 자유주의나 사회주의 쪽에서 – 솔솔 나오고 있었다.

빌헬름도 그것을 모르지 않았기에 직접 영국을 찾아가 담판하는 수고를 들였는데, 그것이 오히려 더 큰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독일의 빚을 갚아주기 위해 왜 로열 네이비가 움직여야 하는가?’

‘대체 독일과 무슨 거래를 하였기에 카이저가 직접 찾아와 은밀한 회동을 가졌단 말인가?’

수상 솔즈베리 후작도 언론의 과장어린 보도 이면에는 독일에 대한 불신과 불안이 있음을 알았기에, 뒤늦게나마 진화에 나섰다.

그러던 차에 하필 중국에서 그런 기묘한 – ‘조선국 정부도 중국의 제안을 지지함’이라는 뱀발이 붙은 채 – 제의가 들어왔으니, 어떻게 거절을 하든 간에 독일과 추가적으로 교섭하였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질타를 받을 시국인 고로, 독일과의 상의도 최대한 절제되고 함축적인 언어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 골자만 살피자면 영국과 독일은 양국이 모두 참여하며 베네수엘라 측의 채무 이행을 보장할 수 있는 ‘책임 있는 강대국(Great power)’의 중재에(만) 찬성한다는 내용이었는데, 당연히 영국이 이해한 책임 있는 강대국이란 미국이지 중국 따위가 아니었다.

“폐하께서 예상보다 훨씬 개방적이고 유연한 사고를 하고 계심에, 우리 국왕 폐하의 정부는 다소간 놀라움을 표하고 있습니다.”

“무어, 다 같은 문명의 형제들 아니겠소? 내 귀국의 훌륭한 학자들의 의견을 접하며 많이 배우고 있다오.”

주독 영국대사 프랭크 라셀스(Frank C. Lascelles)가 말하는 ‘놀라움’이 그 뜻이 아님을 잘 알면서도 딴청 피우면서 카이저 빌헬름은 답했다.

“모든 국가와 민족이 대등하며, 문명과 야만의 구분이 주권의 차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귀국의 주장, 그리고 그에 맞는 실천 모두 항상 감명깊게 보아 왔소이다. 당장 얼마 전 서아프리카에서도 그러하지 않았소?”

영국령 황금해안(현 가나 남부)과 인접한 보호국 아샨티(Ashanti) 왕국의 주권을 재확인하면서 개발차관을 제공하기로 한 일을 꼬집어 말하니, 라셀스도 잠시 표정에 본심이 드러났다 들어갔다.

실제로는 ‘아샨테인들의 뛰어난 도덕성과 자립심, 불굴의 의지를 존중’한다는 명목으로, 아샨티 측의 요구 대부분을 반려하면서 – 이 과정에서 국내외적으로 치열한 언쟁도 있었기에, 언론에서는 ‘제4차 아샨티 전쟁’이라고도 불렀다 - 왕국 내의 금광 개발권 등 이권은 따내고, 대가로는 유학 지원처럼 별로 비용 나가지 않는 것들만을 제시하였으므로 영국으로서는 협상에서 명분과 실리를 모두 얻은 셈이었는데, 바로 옆에 겨우 얻어낸 식민지 토고란트(토고)가 있던 독일로서는 좌시할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독일이 마음대로 영국을 눈치 없다 비난할 수는 없었는데, 당장 모로코 옆 지브롤터 해협이 영국에 무슨 의미인지를 뻔히 알면서도 모로코에 접근하고 있지 않던가. 따지자면 서로 민폐 주고받는 동맹 관계라 해야 할 터였다. 물론, 상대가 먼저 잘못했다 굳게 여기는 점에서도 동맹이라 할 만했다.

“귀국의 논리대로라면 중국 역시 과거의 야만적인 풍습을 버리고 어엿한 문명국의 문턱에 접어들고 있고, 규모로 보나 역사로 보나 강대국이라고 할 만하지 않소이까? 그러니 귀국도 당연히 중국의 제의에 찬동하리라 믿었을 뿐이오.”

“사전 협의에 다소... 혼란의 여지가 있었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다만 지금이라도 입장을 재고해주실 수 있으실지요?”

“내 귀국에 동일한 제안을 하고 싶구려.”

이미 빌헬름의 본심을 눈치 챈 라살스도 평행선을 더 달리기를 원하지는 않았기에, 적당히 고개 숙이고서 고별하였다.

“어떤가?”

곧 접견 소식을 전해들은 뷜로우 수상이 대령하자, 빌헬름이 저 나름대로 오간 이야기를 요약해 전해주곤 물었다.

그랬더니, 평소같은 칭찬 대신 (뷜로우 하는 말 치고는) 직언이 들어왔다.

“국정에서 어떤 일관된 신념을 가지고, 흔들림 없이 추진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을 해내고 계시니 정부의 뭇 신료를 대표하여 감탄할 뿐입니다. 다만 영국의 반발이 걱정될 뿐입니다.”

“흥, 내가 직접 런던까지 찾아갔는데도 욕하던 것이 영국 여론인데, 설령 이번에 영국과 보조를 맞추었다 해도 끊임없이 트집을 잡았겠지. 대개 우리 독일의 성장을 질투하거나, 아니면 독일이 발전한 만큼 저들의 부른 배가 도로 홀쭉해질까 걱정하는 것일 텐데, 베네수엘라에서 받아낼 배상금 중 영국인들의 몫을 빠짐없이 챙겨주면 금방 무마될 여론이야.”

“그렇다면 중국이 제안한 그 협의체도 진지하게 추진하여야 할지요?”

내심 기대 담아 뷜로우가 물었다. 무슨 노력을 하든 – 때로는, 바로 그 노력 때문에 - 시시각각 다가오는 외교적 고립의 악몽 앞에서는 벗 하나가 절실하였다.

“독일이 설령 정당한 자리를 얻는다 하여도, 혼자서는 설 수 없다. 그렇게 주장해온 것이 그대였지 않은가? 한 번쯤 해봄도 나쁘지 않겠지. 영국도 결국 그 옛날 나폴레옹에 맞설 때는 다른 유럽과 함께했던 것처럼, 대세가 한 번 기울게 되면 돌아올 테고.”

“그렇지만 중국은...”

“황인 국가지. 뵈켈네 일당이 매일같이 외치는 것처럼 열등한 인종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쓸모가 없는 것은 아니잖은가. 당장 그들이 과거에 집착하여 외부의 충격 없이는 진보하지 못한다는 것만 보아도, 지금 우리 독일에게는 오히려 유용할 수 있겠지. 중국은 조선과는 달리 영국이나 프랑스에 빌붙는다는 선택지는 생각도 하지 않을 것이고.”

평소에도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라면 말을 아끼기는커녕 파산 직전까지 늘어놓곤 하는 빌헬름이었지만, 그를 가까이서 꽤 지켜봤다 자부하는 뷜로우 눈에는 적어도 외교의 일에서는 점차 그의 주군이 심사숙고를 하고 있음이 보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현실성이 꼭 담보된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허황된 구상을 현실로 옮기는 것이 카이저 아래 정부의 일이라고 하면 또 할 말이 없을 테다.

“우리 독일과 같은 나라들이 세계에 많이 있을 걸세. 새로운 세상. 우리 독일 국가와 민족의 수위권만 인정하면 모두가 자신의 힘에 맞는 응당의 몫을 누릴 수 있는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 홀로 설 수는 없네. 중국이든, 모슬렘 술탄들이든, 하다못해 저기 아비시니아나 콩고의 추장들이든. 끌어들일 것은 끌어들이고 써야 할 것은 써야 해. 그것이 요새 하는 생각일세.

단순히 어떤 명분을 내세우는 것으로는 부족하니, 그들을 끌어들일 실리가 있어야 해. 영국과 프랑스가 내세운 그 주권이나 문명의 논리로 그들을 역으로 옭아맨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통쾌하지 않은가?”

“뵈켈에게는 그렇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독일, 무엇보다 독일’만 주장하는 이들이 불행히도 나라 안에 많이 있으니 말입니다.”

“꼭 그렇지만도 않네. 라첼(Friedrich Ratzel) 교수가 쓴, 그 독일 민족의 생활공간(Lebensraum) 운운하는 글을 그대도 읽어보았으리라 믿네만.”

“그렇습니다, 폐하. 다만 다소... 과격하더군요.”

“과격하다? 세계 곳곳에 유니언 잭을 꽂고 다니는 영국을 생각하면 오히려 겸손하다 해야 하지 않겠는가?”

걱정은 삼키고 우선 내놓을 말을 내놓기로 뷜로우는 마음을 먹었다.

“폐하의 심안은 잘 알았습니다. 마땅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혼신을 다하겠습니다.

다시 현안으로 돌아오면... 말씀하신 대로 중국의 제의를 받아들여 영국이 끝내 이탈한다면, 우리 독일이 잃는 만큼이나 얻는 것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유럽 국가들을 통틀어 불신하는 미국인들도 달랠 수 있고, 영국의 도움을 받아 이번 봉쇄에 합류하게 된 이탈리아도 영국에 배신감을 느낄 테니 어쩌면 우리 쪽으로 포섭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당연한 얘기지만 세상에 그렇게 잘 풀리는 일은 없었다.

러시아를 상대할 때는 튀르크의 ‘정당한 권리’를 잘만 인정해주던 영국이 중국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였으니, 그들의 위선을 드러낸다는 데 있어서는 빌헬름의 뜻이 적어도 독일 내에서는 이루어진 셈이었다.

그러나 영국은 독일을 비난하고, 독일 여론은 왜 중국 따위에게 독일의 이익을 대신 맡기느냐 반대하는 쪽 따로, 영국이 빠진다면 영국에게 베네수엘라에서 뜯어낼 배상금도 지급해서는 안 된다고 우기는 쪽 따로 있어 역시 벌집 헤집은 듯하였다.

그리하여 몇 차례 언쟁 끝에 영국은 해상봉쇄에서 빠지고, 영국만큼 여론에 민감하지도 않았거니와 뵈켈이 저의 몇 안 되는 장기 십분 활용한 독일은 – 애초에 영국을 끌어들인 것이 미국 걱정 때문이기도 했다 - 중국과의 협상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한편, 영국과 독일이 서로 싸우느라 봉쇄 전선이 흐트러지고 있다는 데 고무되어 재차 강경한 말 쏟아내던 베네수엘라의 카스트로는 곧 강적을 만나게 되었으니, 호왈백만(號曰百萬) 이천 년의 중국이었다. 그들과 허풍으로 겨루려 하는 것보다 차라리 해안을 봉쇄한 독일과 영국 해군을 해안포와 구식 포함으로 상대하는 것이 더 승산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 머나먼 동양 나라에 끽해야 정크선이나 조금 있지 않겠느냐며 센 척 허장성세를 부렸더니, 나오는 말이 이러하였다.

“우리도 신식 거함 여러 척 있으니 요즘 세상에 넉 달이면 족히 카리브해까지 보낼 수 있다. 그리고 범선만 있다 한들 무슨 상관인가? 복건(福建) 뱃사람들은 바다 위에서 고기잡이하며 수십 년을 능히 살 수 있는데, 이들 백 명 중 하나씩만 가려서 귀국 바다 앞에 보내어도 능히 모든 항구를 틀어막을 수 있다.”

거기에 더불어, 정말로 첨단의 순양함이 원양 나아갈 준비를 마치었다, 중원 사람들의 애국애족 마음이 모인 흥화성금(興華誠金)이 쌓여 족히 파견된 함대를 열 갑자는 유지할 돈이 쌓였다 운운하며 거짓과 참이 섞인 말이 마구 나오기 시작하니, 카스트로 쪽에서도 불안해하는 목소리가 조심스레 나오기 시작했다.

늘 장담하기를 미국이 결코 유럽 국가들의 ‘횡포’를 용납하지 않으리라 했는데, 영국이나 독일이라면 몰라도 중국이라면 미국과 별 악감정 없는 사이였고, 엉뚱한 짓을 벌여 문제를 절로 만드는 카스트로를 미워하는 이들도 – 대표적으로 귀국하여 다음 대선을 노리면서 언성 높이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 많았다.

대서양 양편을 좌고우면해보아도 우군이 없는 판에, 근세 들어 처음으로 아시아 나라에게 짓밟힌 문명국이라는 불명예를 감수할 것이냐는 불만까지 나오고 있던 차, 결국 워싱턴 D.C.에 은밀한 글 한 통이 전해지게 되었다.

“결국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면서?”

농협과 감군 일로 녹초 되어 돌아온 전봉준에게 위스키 - 배달상회 5주년 기념, 3분 염가(30% 할인)로 여러 병 사들였다 - 한 잔 따라주며 엘러노어가 물었다.

인천부 살 때든, 그 전 고부 살 때든 꿈도 못 꾸었던 고대광실에서, 미녀는 아니지만 사랑하는 안사람과 대작하니 어찌 좋지 않겠느냐 하겠지만, 실제로 기분이 썩 좋지 못하였다.

심지어 그 고대광실 얻으려던 것이 소소한 모략의 성공에 말미암은 것으로, 김기범 옆구리를 찔러 안건 부치기를, 총리대신 경호를 위해 나라에서 집 한 채를 정하여 그곳에 총리가 가솔 거느리고 들어와 살게 하자는 것이 성사된바 이런 호사도 누리게 되었지만, 그래도 입이 쓴 것은 쓴 것이었다.

“그래보아야 중국과 베네수엘라, 멀리 유럽 나라들, 그리고 미국 정도밖에 안 엮인 일인데... 아, 그 정도면 많이 엮였구나. 여하간 조선과는 별 상관 없는 일일 텐데...”

“그런 것치고 퍽 기가 죽어 있다?”

“뭐, 그렇지. 힘들어서 그런 것은 아닌 것 같고.”

“힘들다기보다는, 고민이 많아서.”

엘러노어는 혼인했을 때 이미 그쪽 기준으로도 노처녀였다. 더구나 이리저리 바쁘게 살다 보니 어느새 삼신할미가 아이 점지해준다 하더라도 산모 일신의 안녕 두려워 마다할 나이가 되었으니, 넓은 집 안에 부리는 이들 제하고서는 부부 둘에 서울 올라온 뒤에 데려다 키우는 개 한 마리가 전부였다.

“고민할 게 뭐 있나?”

“그야, 군비 줄이다가 전쟁이라도 나면 내가 책임을 지겠다고 공언했으니까 그렇지.”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아마 어전에서 똑같이 – 물론 말은 조금 가려서 – 아뢰기는 했을 것이다.

결국 베네수엘라 사태는 그럭저럭 일단락되어가고 있었는데, 그 과정은 처음 뜻한 바와는 다소 달랐다.

카스트로 정부, 정확히는 시프리아노 카스트로의 아래에 있던 고메즈(Juan Vicente Gómez)가 반군의 마토스와 결탁해, 관세 수입을 담보로 배상금과 체불된 노임을 지급할 테니 부디 중재에 나서달라며 매킨리 행정부에 제의한 것이다.

이 난장판이 저들 앞마당에서 일어나는 것도 그리 좋게 보고 있지 않았던 매킨리 행정부 – 테디 루즈벨트가 사사건건 나서면서 여론몰이 하는 것도 썩 보기 좋지는 않았다 – 가, 중국인 노동자의 노임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줄 것을 보장하고서 피부 허연 사람들만의 중재 모임을 영국과 독일에게만 제안했는데, 결국 호언장담한 것과는 달리 영독 양국에서 논란이 크게 이는 것에 당황한 빌헬름도 따르기로 마음을 고치게 되었다.

그 결과 처음 조선이 제의하였던 국제중재 같은 것은 영독의 싸움 사이에서 휴지조각이 되어버렸고, 미국은 위신을 챙겼다. 청국도 어쨌든 열강 상대로 저의 목소리 제대로 내어본 셈이라, 벌써 마치 영국에 설욕한 양 의기양양하는 이도 있다 하였다. (다행히 그런 자들은 곧장 식견 없는 무리라는 비난을 받았다.)

물론 조선이야 애초에 관련이 그리 없는 일에 어쩌다 끌려들어가게 되었으니 딱히 잃은 것은 없고, 오히려 옆 청국이 이득 본 만큼 조선도 일정 부분 이롭게 되었다 해야겠지만, 금번 사태가 전봉준 자신이 보기를 원치 않던 세상의 한 면모를 보여준 듯하여 마음이 아팠을 뿐이었다.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열강들이 지금껏 도덕이나 명분을 따른 것이, 정말 선량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오직 이익이 되었기 때문임을 전봉준이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그 ‘이익’의 일부가 조선과 청의 군사력에 상당 부분 말미암았음을 원치 않게 상기당했으니, 병장에 호소하지 않고 장차 찾아올 대란에서 나라 위할 길 구하겠다 공언한 전봉준으로서 심란하지 않겠는가.

청국이 저들 구미 열강 사이에 끼는 시늉이라도 할 수 있던 것은 첫째로 그들에게 해군이 있기 때문이요, 둘째로 청국 자체뿐 아니라 그 옆 조선이 만만하지 않아 설령 청의 해군을 쉽사리 무력화하더라도 옛날처럼 별 탈 없이 북경으로 밀고 들어간다던가 하는 것은 불가능해졌기 때문이었다.

“결국 도의와 명분 지탱하는 것이 화포와 전함이고, 군비 줄이면서 도덕을 위하는 길은 없다면, 나는 굉장히 잘못된 생각을 오래 전부터 했던 것이니까.”

“글쎄. 반대로 –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지만 – 한차례 대전쟁이 일어나고 제국주의니 뭐니 싹 같이 공멸해버리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

“그래도 패자가 있으면 승자도 있겠지. 그렇게 전쟁이 파멸적이라면, 그만큼 더 많은 것을 패자에게서 강제로 뜯어내려 할 테고, 거기서도 결국 목소리는 손에 쥔 군함의 톤수에 따라 나오겠지.”

“에이, 전쟁에 승자가 어디 있다고. 다 같은 노동자·농민들이 죽어나가는 건데.”

“어?”

“뭐가?”

“아니, 별 건 아니고. 전쟁에 승자가 없게 되면 네 말처럼 될 수도 있겠다 싶어서.”

무언가 머릿속에 번뜩 하고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다음번 정강사 모임에서 한 번쯤 거론해볼 가치는 있는 발상이라, 머릿속 공책에 열심히 적어내려가며 그와 함께 위스키로 목을 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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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역사의 베네수엘라 위기에서도 독일은 영국과의 협력을 모색했습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행정부가 베네수엘라의 채무불이행 이상으로 유럽 세력의 무력개입에 극히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기 때문이지요. (실제로 1903년 초 해상봉쇄 과정에서 무력충돌이 일어나자, 독일이 베네수엘라를 점령할 가능성을 우려하여 독일 함대에 대한 공격이 미국 내에서 검토되기도 했습니다.)

빌헬름 2세는 에드워드 7세와 직접 만나 단독협상을 하지 않고 공동대응 기조를 유지한다는 확언을 받아냈는데, 이 합의에 관해 영국 내에서 매우 비판적인 반응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작중에서보다 훨씬 일찍 독일을 경계하는 감정이 발생했고, 더구나 교주만 사건 등으로 팽창주의 기조가 분명히 드러났기 때문에 자칫 독일에 이끌려 원치 않는 무력분쟁에 휘말릴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원 역사에서도 미국의 개입으로, 미국이 베네수엘라 대신 중재에 나서 – 1차 위기에서도 동일했습니다 – 베네수엘라의 관세 수입 일부를 강제로 차압해 채무액과 내전피해 보상금을 지급하는 형식으로 베네수엘라의 두 번째 위기는 막을 내리게 됩니다. 시프리아노 카스트로는 그 후에도 그럭저럭 집권을 이어나가던 중, 자신의 부하 후안 비센테 고메스의 배신으로 축출되게 되는데, 전임자와 동일한 군사독재자였지만 훨씬 유능했던 그는 카스트로의 정적 마토스 등 경제 엘리트를 등용하고 석유개발에 나서는 등 베네수엘라를 남미의 부국으로 끌어올리는 데 일조하였습니다. (물론 그 이면에서 열심히 착복을 하는 등, 20세기 후반 제3세계 독재자와 비슷한 면모도 많았습니다.)

지나가듯 언급된 아샨티 왕국은, 19세기를 거치면서 영국과 네 차례 전쟁을 벌인 끝에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그 중 네 번째 전쟁은 아샨티의 주권을 상징하는 ‘황금 의자’를 두고 벌어졌기 때문에 황금의자 전쟁(War of the Golden Stool)이라고도 불리는데, 작중에서는 적어도 총탄을 주고받는 형태로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약 30년 뒤 나치에 의해 훨씬 악랄하게 오용되는 ‘생활공간(Lebensraum)’ 개념은, 20세기로 전환되는 시기 프리드리히 라첼에 의해 처음 제시되었는데, 이는 사회진화론과 지정학, 그리고 라첼 본인의 미국에서의 경험 등에 바탕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가 제시한 ‘생활공간’ 개념은 ‘강한 민족’의 자존을 위해 지리적인 팽창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도, ‘지배민족’의 우월한 문화의 교화를 받고 대신 물질적으로 지배민족을 부양하는 방식의 ‘공존’을 인정했는데, 이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폭력의 문제에 대해서는 의도적인 것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상술한 것처럼 2차대전 시기 나치에 의해 가장 비극적인 방식의 ‘해결’로 이어집니다.

‘강대국’의 정의는 그것이 나폴레옹 전쟁의 전후처리 과정에서 처음 명문화된 이후부터 아직까지도 유동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보통은 물질적 권력이나 전쟁에서의 승리 등을 자격 요건으로 다루기는 하지만 – 대표적으로 러일전쟁 후 일본의 부상 – 실제로는 다른 조건들이 많이 존재해 왔습니다. 1차대전 승전국 대열에 들어선 일본이 베르사유 조약에 인종차별 철폐를 명시하여 자신의 강대국 지위를 확인받고자 했던 것도 이러한 장벽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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