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살피지 아니할 수 없는 일 (2)
겨울바람 스산하니 불어가는데, 번씨차창 문양 대신 대청국의 용 형상을 단 검은 자동차 세 대가 북경 거리를 달려나갔다.
계절이 계절이니 대개 꽁꽁 동여매고 다니지만, 그 차림새는 꽤 달랐다. 저들 나름대로 ‘개화한 선왕의 복식’ 하고 다니는 이, 새 시대 맞춘답시고 단발에 양장 차려입은 이 – 꽤 머리가 시릴 것이다 – 도 있고, 옛적과 동일하시만 모자 벗겨보면 금전서미 대신 음양두(陰陽頭, 머리를 상당히 남기는 변발) 하고 있을 이까지.
삶에 찌든 것은 매한가지겠지만, 인천에서 공부하고 온 이들이 다들 부럽다 말하는 그 활기가, 거리에는 조금씩 감돌고 있었다.
하지만 그 활기가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가. 어찌하면 다시 끊어져 천하의 조롱 듣는 일 없도록 할 수 있겠는가. 총통 장지동은 어깨 무거울 뿐이었다.
병부에서 나선 행렬은 곧장 총통부로 향하여, 자광각(紫光閣) 앞에 멈추어 섰다.
가운데서 내리는 사람은 예허나라 힝전의 뒤를 이어 대청국 총통으로 봉직하는 장지동이요, 앞에서 내리는 사람은 벼락출세하여 경호를 맡고 있는 장작림이라.
“햐, 탈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참으로 대단한 물건입니다. 이런 기물을 바로 우리 옆 조선국에서 만들고 있다니 훌륭하지 않습니까.”
천하의 대국 총통 옆에서 할 말 치고는 퍽 경망스러웠는데, 장작림도 그것을 알고서 가볍게 말 던지는 것이었다.
“조선국에서는 요새 이 자동차가 퍽 유행하여 근엄한 시늉하는 서생들도 즐겨 몰고는 한다는데, 우리 북경에도 근래 꽤 수효가 는 모양입니다. 여기저기 오갈 때 눈 휘둥그래지는 사람이 드물어진 것도 그 때문이겠지요.”
이야기책을 볼작시면, 황제가 크나큰 성단 내린 뒤에 난신적자는 폐출되고 현량명신(賢良名臣)은 드러나, 비로소 천하가 태평해졌다 운운하면서 끝을 맺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서태후 재임하던 시기는 상하가 하나같이 놀란 마음 진정시키고 숨 고를 때라, 얼핏 평온한 듯하였으나, 이제 다시 하나둘씩 저의 욕심껏 목소리 내기 시작하면서 장지동의 머리도 아파오기 시작했다. 가끔, 옛날 산서순무 하던 때 공친왕의 군세를 태원에 숨겨주었다고 그 앙갚음 하려 생 막바지에 옹졸한 수작 부린 것은 아니냐며 이홍장의 혼령을 향해 속으로 농담 던지기도 하였다.
취임하자마자 총통 집무하는 전각을 별궁 서쪽 귀퉁이의 이곳 자광각으로 옮긴 것도 그 때문이었는데, 경관으로 이름난 강남에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십수 년을 내리 지내온바 영대와 삼해(三海)의 경치에 별 감흥 없기도 하였고, 도리로 따져도 그 이름이 훌륭하였다. 대저 광(光)이란 번쩍 빛나면서도 오래가지 못하니, 총통 자리 오르는 사람이 혹 무엄한 생각 하지 않도록 스스로 경계하는 뜻으로 이만큼 좋은 이름이 또 있겠는가.
허나 무엇보다도 자동차로 드나들기가 매우 편리하였다.
얼마 전 만장일치로 통과된 과거 혁파부터, 수면 위로 올라온 관제 개편까지, 자의원은 자의원대로, 조정 각 부처는 부처대로, 군부는 군부대로 욕심을 부리는데, 장지동은 저의 세력도, 욕심도 딱히 없는 드문 사람이라 오직 한 가지, ‘그렇게 하여 제대로 해낼 수 있겠는가?’만 줄곧 묻곤 하였다.
전임자 힝전 앞에서라면야 호언장담도 먹히겠지만, 순무로만 수십 년을 지내면서 온갖 행정에 밝은 장지동 앞에서 그랬다가는 차라리 옛날 ‘북양삼걸’처럼 된통 얻어맞고 끝내는 편이 낫겠거려니 싶은 처지를 당하기 마련이었다.
“... 저기 조선국 한성 사는 저의 고우(故友) 우남(雩南, 이승만)만 하더라도 모으고 모은 재산으로 한 대 장만할 생각을 하고 있다는데... ”
하지만 장지동 나이도 어느새 고희 바라볼 때라, 그렇게 한바탕 하고 나면 체력도, 심력도 다하곤 하였는데, 그럴 때를 잘 가려서 이렇게 장작림은 일부러 화제 돌리면서 딴생각 들게끔 만들려 노력하곤 하였다.
“자네 벗 우남은 대관절 무얼 하는 젊은이기에 매번 나오는 사연이 달라지는가?”
“그만큼 어딜 가든 일을 벌이는 성정이기에 저 같은 작자와 교유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과연 그 뜻이 성공을 거두었다.
귀국한 뒤에 난데없이 심양에서 모르는 사람 편지글이 계속 오기에 곤욕을 치르던 이승만 참위 – 지금은 주인 없어진 『해동일보』에서 더 높은 곳 오를 궁리를 하고 있었다 – 였는데, 한동안 성의 없는 답장만 하다가 장작림 자신이 갑작스레 현달하니 그때부터 보내는 글보다 받는 글이 훌륭해졌다.
물론 거기서 조그만 이야기만 나와도 곧장 침소봉대하여 이야기거리를 만들고 있었으므로, 일천 공리(公里, 킬로미터) 밖에 있는 이승만은 고작 ‘한양에 자동차 많다’ 한마디 첨언하였다가 까마득히 높은 사람과 저의 자칭 벗에게 공히 험담을 들은 셈이 되었다.
“허 참. 내 그래도 명색이 총통인데 이리 스스럼없이 헛소리하는 것을 보면 확실히 자네도 기인(奇人)은 기인일세.”
“기인 알아보는 사람도 기인이지 않겠습니까.”
스스럼없는 대꾸에 듣기 드문 너털웃음 나왔다. 허나 이번에도 역시 일말의 진실은 있었으니, 기인이라기보다는 말 그대로 대인(大人)이라 해야 할 고 이홍장이 저를 기용하여 장작림이 여기 이 자리에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귀국한 이홍장이 저의 회군이 범한 잘못은 저 스스로 고치겠다며 여생 불태운 사업 중 하나는, 전 북양군의 문제 일으킨 자들을 산산히 쪼개어놓는 일이었다. 그러나 정무군 신식 군대의 머리와 등허리에 기관총은커녕 말 타고 활도 제대로 못 쏠 노인들을 채워넣을 수는 없는 것이라, 대신 생각하기에 각 성으로 쫓겨난 이들 빈자리에 능력 있는 다른 성 젊은이들을 끼워넣으면 사사로운 연분으로 파벌 생기는 일을 막을 수 있을 듯하였다.
좋은 기회가 생기리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난이 진압되고 나서 뒤숭숭한 북경에 눌러앉아 있던 장작림도 그 덕을 보았는데, 거기에 더 천운이 따라 총통부 경호하는 일 맡던 군부 사람들이 줄줄이 사거(死去)하거나 사직하여, 서른도 되기 전 이 자리에 올라오게 되었다.
그 뒤에는 지금처럼, 저의 은인 이홍장이 특별히 높이 세운 장지동을 위하는 마음 반절, 후에 자신이 이처럼 위세 높은 사람이라 우길 때 근거로 삼을 마음 반절로 속없는 젊은이 행세로 말동무 자처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때, 문지방 넘어 나오는 이 있어 모처럼 가벼워지던 분위기 도로 엄중해졌다.
“흠흠. 대인, 오셨습니까.”
“아, 복오(卜五, 서세창), 무슨 일인가.”
“위내서랍국의 시무와 관련하여 조선국과 논의하는 일을 두고 또 의견이 갈리었습니다.”
관제가 곧 바뀐다 하면, 어쩌면 마지막 예부상서가 될 지도 모르는 서세창이었다.
“음, 우선 안에 들고서 논의하세나. 바람이 맵네.”
“예, 대인.”
저 안까지 따라갈 계제는 아닌지라, 장작림은 절로 발걸음을 돌렸다.
“위내서랍국 쪽에서는 아직 돌아온 바가 없는가?”
“여전히 미국을 믿고 억지를 부리고 있습니다. 덕국과 영국에도 그리할진대, 더 멀리 있는 아국은 어떻겠습니까.”
“허.”
‘어리석음이 남의 이야기같지 않다’ 하려다가, 일개 야인이라면 몰라도 대총통으로서 할 말은 아닌 고로 속으로 삼켰다.
가씨, 그러니까 서양 말로는 시프리아노 카스트로(Cipriano Castro)가 집정한 이래, 그간의 나라 안 싸움으로 발생한 국외인의 손해는 물론이요 그간 쌓인 빚도 갚지 않겠다 단언하였는데, 아직까지 가장 손해 클 영국과 덕국 두 나라는 동맹으로서 공동대응만을 천명하였을 뿐 별다른 움직임을 – 겉으로는 - 보이지 않고 있었다.
고작 아편 팔겠다고 멀쩡한 남의 나라에 쳐들어와 행악하던 이들이 백 년도 되지 않아 갑작스레 도의를 알게 된 것은 아니었다. 한편으로는 이미 일전에도 드러난 것처럼 미국이 저들 문지방 앞에서 구주 나라 군대가 오가는 것을 원치 않고, 이를 가씨가 알고서 십분 이용하려 하였기 때문이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두 해 전 가씨의 무도함에 노하여 분연히 떨쳐 일어난 마도씨(마누엘 안토니오 마토스, Manuel A. Matos)가 있었기에 그에게 기대 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불운히 마도씨는 한낱 의상(義商)이라, 아래에는 향용(鄕勇)이 있을 뿐으로 군을 손에 쥐고 있던 가씨에게 연전연패하였다. 그리하여 이제 본격적으로 함대를 꾸려 위내서랍을 압박할 궁리를 덕국과 영국에서 하고 있었는데, 그들 두 나라만 나선다면 위내서랍국에서도 그들 두 나라에게만 빚 갚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우선 운을 떼자는 심정으로 국서를 보내 정당한 노임 지급 및 지연에 따른 보상을 요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함대 꾸려서 보내겠다 시늉할 발상을 하였다.
“정녕 파병하실 생각이신지요.”
“그 또한 여의치 않네. 지금 병부를 다녀왔는데, 살진빙 그자가 이르기를 만일 실제로 전선을 보내게 된다면, 강원(疆遠)이나 위원(威遠) 정도만이 가할 것이라 하더군. 그 이상, 예컨대 제우(制宇)와 같은 거함을 보낸다면 위세 보임엔 족할 것이나, 빈틈이 크게 생겨 중원 근해의 방비가 크게 흐트러질 것이요, 정원(定遠)이나 그 이하는 크기도 크기지만 천하 수군의 흐름에 크게 뒤쳐져 자칫 비웃음거리만 될 것이라 하였다네.”
제우라 하면 지금 대양수사에 단 두 대뿐인, 영국 기준으로는 ‘전함’에 속할 – 전선들 중 유독 가장 큰 것만 싸움배(戰艦, Battleship)라 칭하니 기이한 습속이었다 – 거함이니, 같은 아주에서는 역시 비슷한 시기에 영국에서 사들인 조선의 영수(寧守)나 일본의 부사(富士, 후지급 전함)만이 비할 규모였다.
“허, 정원이 뒤쳐졌다니...”
성 하나를 쌓아도 버리지 않고 이천 년을 내리 보수해온 중원에서 보기에, 고작 이십 년 만에 북양수사의 자랑이었던 정원이 망신거리가 되었다는 말은 쉬이 이해되지 않았다.
“과연, 조선국에 감군 공표 늦춰달라 암암리에 청한 것이 잘한 일이었습니다.”
조선국이 감군한다는 소식 들려오면, 이를 빌미삼아 대양수사도 어디 보내지 말고 적절히 줄일 생각이나 하자는 말 나올 것이었다. 그러면 반대로 조선국 군병 줄어드는 만큼 대청이 군비를 늘려야 한다는 의론이 나올 것이요, 그렇게 아옹다옹하는 사이 위내서랍 핑계로 서양 나라들과 천하대사를 두고 대등히 교섭하는 전례를 남기려는 장지동의 계획은 완전히 어그러질 것이었다.
슬프게도 둘 다 일리가 있었다. 물론 의견 갈리는 가장 큰 이유는 중앙으로부터 얻는 이득과 걷어 올리는 조세 중 어느 쪽이 더 많은가에 따라 화북과 강남의 이해가 갈렸기 때문이었고, 일리가 있을 뿐 결국 따지고 보면 단견(短見)을 넘지 못하였기에 어느 쪽 편도 들 수 없었지만.
“그래보아야 미봉책일 뿐인데, 진퇴양난의 형세가 되었네. 전선을 보내어 공을 세우면 공을 세우는 대로, 아예 못 보내어 교섭에 끼지 못하게 된다면 못하는 대로 국론이 갈릴 터이니...”
“그래서 예부 안에서 나온 말이, 이왕 조선에 말을 전하여 그들의 이목을 끌었으니 당당하게 행보 함께하자는 청을 새로 보내자는 것이었습니다.”
“조선국이 아무리 이번 일에 관여한 바 없지 않다 하나, 그 국인이 해 입은 것도 아닐진대 그리 청함은 과도한 것일세.”
“대인 말씀하신 바와 같은 뜻이 예부 안에서도 나왔습니다. 자의원에서도 아마 비슷하게 갈리겠지요.”
잠시 고민하던 서세창이 본심을 꺼냈다.
“차라리 전선 보내는 일을 지금이라도 철회함이 어떻겠습니까? 대인께서는 당을 따지면 국민당이시니, 강남 제성(諸省)에서 대인을 탓하는 이는 드물 것입니다.”
“애초에 지구 반대편 일이니, 과욕 부리지 않음이 원래 맞겠지... 그러나 지금 천하 형세는 놓치기에 너무나 아쉬운 것일세.”
도광 연간의 어지러움이라면 몰라도, 함풍 연간의 국난(제2차 아편전쟁)은 장지동이나 은퇴한 서태후, 병상 붙박이 공친왕을 비롯해 아직 기억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때에 비하면 지금 중원의 방비와 형국은 천양지차였다. 한편으로는 정예한 군사가 경조와 각 성에 구비되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백문제개 이후 여러 나라가 함께 중원에서 교역하여 예전처럼 구주의 한 나라가 마음대로 전횡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당당히 아편 팔던 이화양행(怡和洋行, 자르딘-마테슨)이 요새는 자성한다면서 상해 일대에 아편 중독자를 위한 의원을 세우고, 아편 판매는 ‘최대한 신중히’ 하겠노라 선언한 것이 어디 갑작스레 영국인 심성이 선량해져서겠는가?
아편 하면 반대하기로 유명한 글래드스턴이 오랫동안 집권하는 동안에도 공공연하게 아편 팔던 이들이 기세 확 죽은 것은, 지난 십수 년 천하 정세로 보았을 때 여차하면 군함 몰고 와서 윽박지를 수 있던 호시절이 영영 지났음을 깨달았기 때문일 테다.
“천하 형세라 하시면...”
“영국 한 나라가 홀로 힘 드러내던 시절은 저물고 있고, 구주와 아주, 비주, 미주 등등이 모두 하나로 묶이고 있네. 중원에 다시 힘이 돌아오고 있다고 하지만, 남들은 몰라도 복오 자네 정도라면 실상을 알고 있겠지?”
공화정부 시기부터 대신들 몇몇이 서양 나라들을 시찰하곤 하였는데, 그 외의 자잘한 실무에 있어서는 대개 조선과 일본을 본따 배워오곤 하였다. 특히 재무에 있어서는 조선국이 제일이라, 조선왕의 어명으로 그 나라 ‘경제’의 현황을 손바닥에 올려놓듯 볼 수 있다는 지표가 여럿 마련되었는데 그 제도 또한 배워왔다.
중원이 워낙 광대하여 대략적으로 추산할 뿐이었지만, 눈 비비고 고쳐보아도 믿기 곤란하였다. 도처에서 난이 일어나고 백성들이 유리걸식하던 시절이라면 모를까, 중흥 운운하는 지금도 중원의 소출이 다 합쳐봐야 작고 작은 영국 본토를 조금 상회하는 수준이요, 덕국과는 비등하였다.
“어느 영국 사람이 말하기를, ‘사(詐)가 있고 기망(欺罔)이 있으며 또 통계가 있다(Lies, damned lies, and statistics)’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 사람이 우리 수치를 들고 와 추산하였거늘 사실과 다르면 얼마나 다르겠는가.”
하늘과 땅이 닫혔다 다시 열리지 않는 한, 설령 중원의 인(人)과 물(物)이 여느 구주 나라 부럽잖게 부흥한다 하더라도, 옛날의 천조들처럼 하늘 아래 가운데 나라를 진심으로 자처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어쩌면 그런 시절은 아예 없었고, 다만 어리석은 착각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주명(朱明)은 토목의 변을 당하였고 조송(趙宋)은 정강의 변을 당하였으며, 이당(李唐)도 고려·토번·회흘(回紇) 상대로 고투하였다. (이 중 해동을 정벌한 일의 본말에 관해서는 근래 명망 높은 화서학원에서 『동사신편(東史新編)』을 내놓은바 중원에서도 잘 알려져 있었다.)
“국운의 성쇠는 고래로 예외가 없으니, 영국이 독존하던 때도 이제 막을 내리고 있네.”
저 수치의 또 다른 함의가 여기에 있었다. 이미 영국은 전함을 제하면 천하제일이 아니요, 덕국과 미국이 치고 올라오고 또 한때 영국만도 못하였을 대청도 조금은 기세가 돌아오고 있었다.
그렇다면 영국과 법국, 아라사가 지금까지 만들어두고 조선 같은 나라들이 양념을 쳐 왔던 이전의 천하는, 말하기를 도의를 숭상하며 문명을 널리 퍼뜨린다는 그 천하는 어찌 될 것인가?
“그 다음의 일은 금세의 사람이 함부로 논할 수 없는 것이나, 적어도 도광·함풍 연간에 그러하였던 것처럼 앉아서 당할 수는 없네. 오히려 우리가 먼저 나서서, 다른 나라들과 함께 교섭하고 강화하는 풍조를 지금부터 만들어야지.”
어디로 갈지는 몰라도, 적어도 그 흐름에 대청이 할 말은 해야 하리라 여겼기에, 그 단초 얻어보고자 혹자는 무리하다 할 욕심을 부렸다. 하다못해 이태리도 함대 보내겠다 제의하는 판에 대청이라고 못할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던 중 사실 그것도 만만치 않다는 살진빙의 말을 듣고 왔으니 심란할 수밖에 없었다.
“이 서 모는 식견이 짧아, 대인 이르시는 바에 마땅한 방책을 내놓지 못하겠습니다.우리가 전선을 보내지 않으면서 위내서랍 교섭에서는 한 자리 얻는 것이 상중상(上中上)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반드시 때가 지금만 있는 것은 아닐 터입니다. ”
“글쎄. 지금 바깥을 나가 보게. 중흥을 입에 담지 않는 자가 있는가? 아직 지난날의 괴로움이 모두 잊히지 않았을 때 못을 박아두지 않는다면, 반드시 후에 과분한 마음 품는 자가 나올 것이야.”
그러나 미리 걱정하는 마음이 아무리 고매하다 한들 뾰족한 수가 스스로 나오지 않으니 어찌하겠는가.
그나마 다행히, 옆의 나라는 다른 어느 나라도 아닌 조선이었다. 전선은 아주 동쪽을 출발하여 세 대양을 모두 거쳐가야 하지만, 전신은 똑같은 길을 가더라도 빠르기가 번개와 같으니, 말 한 마디로 갚는 천냥 빚이 반드시 자신의 것이어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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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역사에서 1884년 갑신역추로 실권을 잃은 공친왕은 청일전쟁 발발 후 다시 총리아문에 복귀하였으나, 실권은 거의 없었습니다. 병세가 중하여 어쩔 수 없이 실무에서 배제한다는 것이 서태후의 공식적인 입장이었는데, 그것이 사실인지 핑계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후 1898년 실제로 병으로 쓰러져 사망한 것을 감안하면 건강이 썩 좋지는 않았던 듯합니다. (1833년생으로 고령이기도 했습니다.) 작중에서는 같이 있으면 피곤한 사이인 서태후와 정치적·물리적 거리두기를 한 덕에 조금 더 오래 살고 있습니다.
본래 역사에서 장작림은 한인 정착촌 자경단(대단) 우두머리 노릇을 하던 중 동삼성 지방 관군으로 편입된 후 본능적인 처세술과 통솔력 덕에 빠르게 군벌로 성장합니다. 러일전쟁 후 만주에서 날뛰던 마적들을 토벌하면서 명성을 떨쳤고, 원세개와 결탁하고 그의 사후에는 북양군벌의 분열을 적극 이용하면서 중국 최대의 군벌 세력을 구축하기에 이릅니다.
원 역사의 이승만은 만민공동회에서 처음 이름을 떨친 뒤 『매일신문』과 『제국신문』 등의 언론 활동으로 두각을 드러냈습니다. 작중의 행보도 크게 다르지 않은데, 다만 원 역사와는 달리 고시에 등과하였고, 자신의 이름을 직장생활의 윤활유로 사용하는 못된 펜팔이 하나 더 있다는 것 정도가 차이라 하겠습니다.
시몬 볼리바르의 독립운동에 힘입어 독립을 쟁취한 베네수엘라는 곧 정치적 혼란에 빠져들어, 군벌 지도자(카우디요)들에 의한 사실상 독재가 20세기 중반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개중에는 비교적 유능하게 개발독재를 수행한 경우도 있었지만, 정치적 불안정과 개인적 무능, 탐욕 등으로 인해 큰 파란을 일으킨 경우도 있었는데, 작중에 등장한 치프리아노 카스트로는 베네수엘라에게는 불행히도 후자에 속했습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로 넘어가는 동안 베네수엘라는 굵직한 국제정치적 위기에 세 번이나 무대를 제공하였는데, 작중에 등장하는 채무불이행과 임금체납 사태는 이 ‘트릴로지’의 두 번째에 속합니다. 첫 번째 사건은 1895년 작중에 언급된 것처럼 영국령 가이아나와의 영토분쟁으로 촉발되었는데, 먼로주의에 입각한 미국의 개입으로, 중재-사실상 미국과 영국의 양자협상-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영국이 미국의 세력을 인정한 전례로, 국제정치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 후 내전으로 인해 베네수엘라 경제는 많은 타격을 입고, 특히 베네수엘라의 경제적 기반 구축에 많은 투자를 했던 독일이 상당한 피해를 입었는데, 여기에 대한 독일과 영국 투자자들의 배상 요구를 치프리아노 카스트로가 일축하면서 두 번째 위기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는 1차 위기에서와 동일하게 미국이 개입을 막아주리라 여겼고, 시어도어 루스벨트 행정부는 한편으로 카스트로에게 상당한 불쾌감을 느끼면서도 (국무부장관 엘리후 루트는 카스트로를 ‘미친 짐승’이라고 원색적으로 모욕하기도 했습니다) 영국과 독일이 베네수엘라에 대한 해상봉쇄를 추진하는 데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강한 의구심을 표했습니다.
그러나 마토스와 경제 엘리트들이 이끈 반란이 끝내 실패로 돌아가 정권교체에 따른 배상 협상 가능성도 요원해지게 되자, 결국 빌헬름 2세는 에드워드 7세와 직접 회동하여 공동대응 방침에 합의하고 1902년 겨울 베네수엘라에 최후통첩을 보내게 됩니다. 이후 1903년 초까지 해상봉쇄가 이어지는데, 여기에는 작중에 언급된 것처럼 이탈리아도 소규모 함대를 보내 참여했습니다.
작중에 언급된 경제 지표는 매디슨(2007)의 유명한 지표를 참고했습니다. 식민제국들의 GDP를 과소평가했다는 비판을 받곤 하는 추산이지만, 중국이 압도적인 1위가 아니고 앞으로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은 청일전쟁이나 의화단 전쟁을 겪지 않아 여전히 ‘동치중흥’ 인식이 이어지고 있는 작중 청에게는 충분히 큰 충격이 될 것입니다.
의화단 전쟁 후 시작된 청말신정 시기에 있었던 청 정부의 한 가지 치적은 아편 퇴치였습니다. 물론 완전한 근절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1907년 영국과의 협상을 통해 청은 자국 내 아편 생산량을 줄이고 영국은 1920년 완전 금수를 목표로 아편 수출량을 감축하는 합의를 도출해내었고, 사회 기층에서의 대중적인 아편 반대운동에 힘입어 청 국내의 아편 생산량은 1906년 35,000톤에서 1911년 4천 톤으로 감소하게 됩니다. 그러나 신해혁명 후 유럽 국가들은 자국 기업들의 아편 금수조치를 이행하지 않았고, 중국 내륙의 군벌들은 자금 확보를 위해 다시 아편 생산에 손을 대게 되었습니다.
작중에 언급된 신형 전함들은 원 역사 일본이 청일전쟁 후 영국에서 들여온 후지급 전함과 대략 동등합니다. 원 역사에서 일본 해군은 청일전쟁 후 거함의 필요성을 인식해, 영국에서 대량생산되기 시작한 전드레드노트급 전함을 다수 도입했고, 이는 러일전쟁에서의 해전 승리로 이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작중의 동아시아는 건함경쟁 추세에서 반보쯤 뒤떨어져 있고, 도입 수량도 훨씬 적습니다. 후지급을 제외한 다른 전함들은 당연히 가공의 전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