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움직이는 바큇살 (3)
얼떨결에 저의 형이 하는 일을 대신 맡으면서 그 ‘복사(輻射)’라는 말을 표준으로 정하는 일을 자신이 하였기에, 태씨는 영국 말로 말하고 귀씨는 법국 글로 읽었으므로 오해가 생겼다거나 한 것은 아님을 너무나 잘 아는 경양대군이었다.
어쨌든 오해라고 얼버무리고서 급히 수소문하였더니, 다행히 그 어뢰를 어쩌고 하는 것은 무선으로 송음하는 술기를 응용한 것이라 딱히 문제될 바가 없었다. 그러나 워낙 이것저것 되는 대로 떠든 탓인지 다시 잘 보니 정말로 귀씨가 걱정할 만한 것도 있어서,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폴로늄과 조소늄에서 방출되는 독특한 복사를 활용한 오존 제조공정 – 살충, 살균에 특효.’
정강사로 넘어간 그 많은 도안 중 저런 문구가 떡하니 찍혀 있었으므로, 멋모르고 귀씨에게 곧장 귀씨가 발견한 그것이 정녕 저리 쓰일 수 있는 것인가 누군가 물어보면서 이러한 소동이 일어난 것이리라.
한 장 넘기니 더 심각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조소늄의 군사적 활용 – 정제공정 개선을 통한 대량생산 및 살포 / ‘비행 기계’를 이용?’
절박함과 불안에 떨지언정 자신이 좋아하는 고압 전기와 같은 그 빠른 두뇌 회전은 여전한 테슬라였다. 태평양 건너오던 중 생각할 시간은 많았다. 개중 농업에 관한 것은 모두 배제하고 나니, 그 나라에서 퀴리 부부라는 무명 과학자를 초빙하여 새 원소를 발견하였다는 데 생각이 자연히 미쳤다.
그리고 듣기로 강력한 군대를 가진 나라에서 그런 과학기술에 투자를 하였다면, 관심사도 완전히까지는 아니라도 상당히 그쪽에 치우쳐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동태평양 지나고 있을 무렵 테슬라의 생각은 그러하였다. 서태평양에 들어섰을 때는 그것도 따분해져, ‘잠수함’을 위한 동력장치나 산소 발생장치 같은 것을 – 머릿속으로만 – 구상하느라 한양에 당도하였을 때는 본인도 크게 의식하지는 않았지만.
좌우지간 도안의 표제만 보아도 자신의 선에서 함부로 처리할 건은 아닌 듯하여 – 이런 일은 잘 처리할수록 도리어 후에 제게 일 더 많이 떨어지는 것 아니겠는가 – 곧장 아바마마 뵈러 나아갔다.
때는 겨울이니, 아무리 날 풀렸다 한들 아버지 계신 곳은 대개 경무대일 테다. 미리 전화하여 들려 한다 내관에게 이르고서, 응달마다 눈 남은 후원을 성큼성큼 걸어갔다.
하여 아버지 주상 계신 문앞에 이르렀더니, 분명 언제든 오면 된다고 내관이 옥음 받들어 뜻을 전해줬건만 앞서 온 객이 있는 것 아닌가.
“경양대군은 들라.”
들어가 보니 아버지도 계시고, 큰형 세자도 있고, 먼저 온 객일 신임 총리 전봉준도 있는데, 무언가 깊이 얘기하면서 저를 부른다면 필히 귀씨나 태씨, 둘 중 하나 혹은 둘 다의 이야기일 테다.
“귀씨 부인이 어찌하여 일을 하지 않겠다 하였는지 그 사정을 들었으렷다?”
“예, 그 뜻을 묻고, 정강사 있는 병조 아문에 들려 그 말이 참인지 가리고서 곧장 찾아뵈는 길입니다.”
귀남이 가만히 앉아 전봉준 하는 이야기와 경양대군 하는 이야기를 모두 맞추어보니, 어쨌든 그 태씨인가 하는 사람이 별의별 소리를 다 하여 논란이 된 것은 맞아 보였다.
“허어...”
슬슬 어울리는, 노인스러운 한탄은 귀남의 입에서 나오는데, 정작 근심 깊어지는 것은 전봉준이었다.
테슬라의 도안을 정강사에 넘기고서, 보시라, 이처럼 과학의 힘으로 병비는 늘리면서 들어가는 비용은 줄일 수 있으니, 이제 다시 나라의 병력을 국력에 맞게 줄이고 그 준 만큼을 경제 재흥케 하는데 보태자 할 생각이었는데, 첫 문턱에서 이처럼 발목이 잡혔다.
이익 숭상하는 이들은 물론이요, 이제 명분과 도의 숭상하는 이들로서도 저의 ‘군축’ 생각을 가로막을 연유가 생겼으니, 진심으로든 핑계로든 귀씨 부인의 언사가 참으로 온당하다 할 이들이 나오리라는 것을 벌써 눈앞에 떠올릴 수 있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저의 정책에 힘 실어주리라 여기고서 마구잡이로 정강사에 넘길 것이 아니라, 그 농경에 도움 된다고 떠들던 말 비평하였던 것처럼 조금 고생스럽더라도 당의 인재들과 함께 검토하였어야 했다.
총리 노릇 시작하자마자 욕속부달 과유불급의 처지에 처했으니, 이제 정면으로 사안을 마주하는 수밖에 남지 않았다.
“화평도 중하지만, 민생 위한다는 큰 뜻을 놓고 보면 결국 모두 배불리 잘 살게 하는 것이야말로 중한 일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군비를 줄일 수밖에 없고, 병기 만드는 법도를 새로이 창안하여 열 사람 몫을 한 사람이 할 수 있게 함은 이를 위한 계책입니다. 허여해 주신다면 귀씨 부부는 신이 직접 설득토록 하겠습니다.”
“경은 참으로 한결같구려.”
일전에 ‘강철과 피죽’ 운운하며 군비를 줄이자 하였던 것을 상기시키며 귀남이 말했다. 다른 당이라면야 잊었을 법도 하련만, 하필 말 꺼낸 것이 공산당이었지 않던가.
“정녕 군비를 줄이지 아니하면 경세제민에 간난이 생기겠소?”
“신도 배움이 깊지 못한바, 반드시 그러하다 단언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옳고 그름 어느 쪽으로 밝혀지더라도 반드시 그 책임은 신이 지겠습니다. 그것이 감히 말씀 올리건대 성상께서 밝히신 군민공치의 큰 뜻이요, 부족한 신을 믿어준 수많은 백성들을 위함이라 하겠습니다.
성상께서 사위하시어 국운이 크게 일어나고, 마침내 오늘의 성세에 이르렀음을 어찌 하루라도 잊겠습니까? 허나...”
“괜찮소. 내 그대 뜻은 잘 알겠소이다.”
주변에서 칭송하는 소리 듣는 것이 어디 하루이틀이겠냐만, 귀남 본인 생각에도 그 부흥이니 무어니의 공 대부분은 저에게 있지 아니하였다. 물론 남들 다투려는 것 화해시키고, 또 때때로 사소한 발의하여 나라와 백성에게 도움 되게끔 하는 것이야 저의 공덕이라 하겠지만, 그것이 자신이 임금이라 가한 일이었는가, 아니면 군밤장수 재주로서 능히 할 수 있는 일이었는가 따진다면 마땅히 전자였다.
“일전에는 우리가 병비를 늘리면 남도 따라서 늘리기 마련이니, 선을 정하여 먼저 넘지 아니함이 마땅하다 하였던 것으로 내 기억하오. 헌데 이제 경도 알겠지만, 언제고 천하가 대란할제 우리 스스로 지키기 위해서는 군병의 힘을 아예 내려놓을 수도 없는 것이외다.”
처음 취임하였을 때, 미심쩍게 여기는 데서 그쳤던 정강사에서 실제로 어떤 논의가 오갔는가를 듣고 대경하였던 전봉준이었다.
“천하의 대란을 군병으로만 다스릴 것은 아니라 하겠습니다. 다른 방도를 기필코 찾고야 말겠습니다.”
“만일 그런 방도가 없다면? 그때는 어찌하겠소?”
“신이 모든 책임을 지고, 대란을 가장 바람직하게 헤쳐나갈 길을 뚫겠습니다.”
총리의 말 들은 임금이 잠시 눈을 감는다.
“그렇다면 내 그리 귀씨에게 이르리다.”
“아바마마, 태씨의 일은 어찌하시겠습니까?”
세자 물음에 귀남이 답하였다.
“금번 논란은 태씨가 기이한 병기를 고안한 데서 말미암았으니, 다른 일을 주면 총리가 다른 길 모색하는 동안의 여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굳이 군비가 아니라 하여도 아직은 그의 지재를 쓸 구석이 많이 있으니, 내 생각해둔 바가 또한 있느니라.”
전생의 수많은 물건들 중 요긴한 것을 꼽는다면, 전자제품 중 전화기나 테레비는 그 안에 들지 않았다. 더구나 전화기만 보아도, 지금 나와있는 것으로도 족하지 않던가. 허나 이 계절에 특히 떠오르는 것이 따로 있었으니, 곧장 태수인가 대수인가 하는 그이에게 먼저 머리 써보라 할 방안을 일러주었다.
그리하여 전봉준도, 경양대군도 나가고 방에 다시 둘이 남았다.
“성덕 그윽하니 불초 소자는 감탄할 따름입니다.”
“부자 사이에 칭찬 과함도 좋지 않으니라.”
정작 저는 세자나 다른 대군들이 뭘 했다 하면 – 요새는 큰손녀 귀여움 자랑도 추가되었다 – 그 사람 앞에서든 뒤에서든 기특하다 칭찬하고 다녔으므로, 퍽 앞뒤 맞지 않는 옥음이었다.
“내 나라 잘 이끌었다고 사람들이 말하지만, 어찌 그것이 이 한 사람 공이었겠느냐? 그저 가운데서 다툼 중재하고 간혹 떠오르는 바 있으면 일러주었을 뿐이니, 국운을 홀로 논할 만한 재주는 일신에 없느니라.”
“그것이야말로 성덕 아닐는지요.”
전생 내내 스스로 못난 사람이라 여기며, 좋든 싫든 겸손하게 살아온 사람이 아니고서야, 과한 욕심, 과한 질투쯤 품을 수 있을 것이요, 소소하게 가족과 함께 일상 보내면서 먹고 입는 데 불편함 없는 것만도 과분히 여길 만큼 전생이 빈궁하지 않고서야, 사심 한 번쯤은 품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리 한 번 살다 돌아온 사람 아니고서 그런 이들이 얼마나 있겠는가?
“내 무엇을 미리 알아 옳고 그름을 가리겠느냐. 다만 과하거나 모자란 것은 재주껏 피하고, 재주 있는 현량한 이들을 믿고 맡길 뿐이다.”
그리고 저의 생각대로 하고 허물이 된다면 그것도 짊어지고 가겠다고 단언한 전봉준은 거기에 드는 듯하였다. 과연 그의 각오가 실제로 나름의 효험을 볼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만에 하나 정말로 일이 어그러진다면, 그때 남들과 함께 헐뜯는 것이 아니라 북돋아주고 다른 방법으로 공을 세울 수 있게 해주면 될 일이다. 스스로 재주 부리기 어려운 이상에야 그렇게라도 해야 하지 않겠느냐.”
언제까지고 성공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지금까지는 그리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니, 귀남 나름의 자신감이라면 여기에 있었다.
처음 사람 좋은 귀씨 부부가 찾아와 그들 말로는 국립연구소, 이쪽 말로는 ‘격치물성청(格致物性廳)’ 맡게 되었을 때만 하여도 이 신설 관청의 운영을 맡은 참의 변수는 퍽 좋게 여겼다.
부부 중의 바깥사람으로 말하자면 천생 호인이라 변수는 물론이요 청의 실직 맡은 온갖 구실아치들까지 가깝게 여기고, 안사람 귀씨 부인은 사람이 조금 딱딱하기는 하여도 할일을 하는 데는 누구보다 부지런하였다.
거기에 더불어 자신이 맡은 그 과학 분야의 일을 나누어 맡아보는 자리가 하나 생겼기에, 이 감투는 뉘의 것인가 궁금히 여기던차 주인 나오니 곧 안양대군이라.
그리하여 몸도 편하고 곧 달릴 출세가도 생각하면 마음도 절로 편해지는 것이었는데, 세상 운수가 호사(好事)만 연달아 있기는 어려워 이 태씨라는 작자가 그의 옆에 뚝 떨어지고야 말았다.
“재능 낭비도 이런 재능 낭비가 있나. 에휴.”
“흠흠. 궁 옆입니다. 말씀을 조심하시지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무선 기술 쪽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이런 자질구레한 잡일이나 하고 있고, 그나마 제대로 한 번 해보려니 예산이 없다고 줄이라 하고. 이게 말이 되오?”
확실히 재주는 뛰어나, 그새 조선말도 능숙해졌는데, 어떤 국외인들은 상스러운 말부터 배운다더니 이 사람은 투덜거리기를 먼저 배웠다.
허나 대궐이 지척인 육조거리에서 성상께서 친히 하유하신 중대한 사무를 ‘잡일’로 치부하는 것은 목숨의 문제로 비화할 수 있는 것이었다.
‘겨울철에 만백성 유용하게 쓸 수 있도록, 전기로 데우는 구들장이나 보료를 만들어봄이 어떻겠는가.’
즉 전기장판 만들라는 뜻이었는데, 이르기를 구들장은 나무로 때면 산이 헐벗고, 연탄으로 때면 자칫 그 독에 사람 상할 수 있으나 전기는 그런 폐단 없으니 얼마나 좋으냐 하시었다.
그리고 테슬라 생각에도 그런 난방기구는 딱히 많은 고민을 요할 것도 없이 단순한 것이라서, 도안 정도는 눈 감고도 그릴 수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그렇게 눈 감고 도안 그리고서, 저 하고픈 일 하면 될 것이련만, 대개 기인이사가 그러하듯 벽(癖) 있는 이 사람은 차마 그리할 수 없었다. 에디슨이나 웨스팅하우스(Westinghouse)의 상표 달고 출시될 것이라면 모를까, 테슬라 본인 이름 달고 나갈 물건이 평범해서야 되겠는가?
그래서 스스로 만족할 때까지 이것저것 덧붙이다 보니, 옆에 붙은 변수가 일러주기를 개발예산이 한참 모자랄 것이라 하였다. 잘 모르는 변수가 보기에도, 이것이 가칭 ‘전기 보료’ 도안인가, 아니면 저기 『일천일야담(一千一夜譚, 아라비안 나이트)』 나오는 양탄자 도안인가 싶을 정도였다.
개중에는 테슬라 코일(별매)을 이용한 무선 송전 기능처럼 쓸데없는 것도 있었지만, 과전력 차단을 위한 안전장치처럼 쓸모있는 것도 있었으니,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그러므로 현실을 직시하여 허황된 것은 빼고 긴요한 것은 넣는 식으로 선택을 할 것이었다.
허나 이 걸어다니는 『천공개물(天工開物)』은 곧장 호조로 달려가 담판을 지으려 하는 것이었다.
이대로 계속 무엄한 소리를 한다면, 옆에서 지켜보든 곁다리로 전해듣든 할 공안서나 사헌부를 염두에 두고 뺨이나 한 대 때림이 오히려 구명할 방도 아닐까 생각할 무렵, 다행히 그 위험한 문턱은 넘지 않은 채로 호조 아문의 문턱을 넘었다.
“대감, 그간 별고 없으셨는지요.”
“그간 무탈하였다만 어째 자네는 탈을 붙이고 오는 듯허이. 명일 오면 아니 되는가?”
“명일은 곧 휴무하는 날인즉 어렵지 않을는지요.”
“그리하다면 또 그 다음날이 있지 않은가.”
격치물성청 수용을 두고 종종 호조 드나들다가 안면 생긴 판서 홍종우가 친히 맞아주었다. 근래 보기 드물게 표정에는 한점 시름 없이 해맑았는데, 품계로 보나 공적으로 보나 한참 아랫사람인 변수를 맞이하여 이리 농담 주고받는 것도 그 덕이었다.
한편으로는 잘 되었다 함께 기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변수도 사람인지라 얄밉게 여기는 마음이 조금 들었다.
“그때는 대감께서 아니 계실 테니, 부득불 지금 승낙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소천(小泉) 이 사람, 말이나 못 하면...”
혹 성상의 뜻이 다시 군비를 늘리는 쪽으로 기울까, 다른 두 당을 잘 다독여 참의원을 끌어들여야 했기에 공산당 내각은 옛날 김옥균 했던 만큼의 개각은 하지 않았는데, 구름재 – 요새는 ‘구름재’라 하면 운현궁이 아니라 참의원을 돌려 이르는 말이었으니, 주객의 전도가 이와 같았다 – 풍문에는 평하기를, 전봉준을 필두로 관직 경험 있는 이가 적었기 때문이니 명실(名實)을 공히 취한 것이라 하였다.
허나 호조와 병조는 반드시 공산당 쪽 사람을 넣을 생각이었는데, 그것이 전봉준 집권의 가장 큰 목표와 맞닿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뜻이 없었다 하더라도 호조는 한 번 물갈이될 수밖에 없었으니, 정강사 일로 한양에 돌아온 김윤식의 혈색 좋았던 것이 사연의 시작이었다. 환갑도 훌쩍 넘긴 이가 외려 저보다 젊어보임을 부러워한 어윤중이 그 비결 물으니,
‘자네도 알면서 행하지 않을 뿐일세.’
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어윤중도 금번 추거 전부터, 여차하면 도망, 아니, 천하 유람할 것이니 이는 후임에게 부담 주지 않기 위해서라 떠들어대곤 하였다. 그러면서도 필요할 때 저를 찾지 말라고도 하고 다녔으니, 어윤중 대신 그 자리에 채워넣을 사람이라면 누가 있겠는가.
코뮌 사람들 넘어와 호조 관원 가르친 이래 이미 호조에 유능한 인재가 많고 많은데, 위의 사람들은 어윤중이 있고 홍종우가 있는 줄만 알고 있으니, 진퇴를 함께함이 처신의 도리였다.
그러나 뒷마무리 깔끔하지 못하였다고 험담 듣는 것도 홍종우가 감내하고자 하는 바는 아닌고로, 말로는 가볍게 튕기면서 테슬라의 제안서를 검토하였다.
“어디 보자...”
그리고 애체 써서 세세한 절목을 검토할 것도 없이 즉답이 나왔다.
“아니 되네. 유사(有司)에 넘길 것도 없겠어.”
“아니, 각하, 너무하시는 것 아닙니까?”
테슬라가 먼저 발끈하며 나섰다.
“미국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우리 조선국 사정이 허무맹랑한 일에 아낌없이 국용 내어줄 만큼 좋지는 않소. 이는 엄연히 백성의 혈세요, 금번 내각에서도 당장 큰일 하는데 많은 재정을 요할 것인데 어찌 나가는 것을 단속하지 않겠소?”
“제대로 봐 주십시오. 충분히 투자할 만한 것이란 말입니다!”
양심과 상식 갖춘 사람이라면 하지 않을 소리를 태연하게 하는 테슬라였다.
“그럴 만큼 한가한 곳이 아니오. 우리 호조는. 이 사람이야 겨우 망(忙) 끄트머리의 한(閑) 얻은 것이고.”
“아니, 호조 일이 많으면 얼마나 많다고...”
차라리 궁 앞에서 계속 성상의 험담을 하게 내버려두는 쪽이 좋지 않았을까, 일그러지는 홍종우 얼굴을 보며 변수는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험한 소리 두어 대목 나온 뒤에 테슬라가 말하기를,
“휴우... 알았습니다. 세상에 쉬운 일 하나 없으니 이거야 원. 하나 만들어드리면 되잖습니까, 까짓거.”
“무엇을 말이오?”
“호조가 바쁜 이유는 나랏돈 출납하는 번다한 사무 때문이라 하셨잖습니까? 그러면 스스로 계산하는 기계 하나쯤 만들어드리면 될 일이지 않습니까?”
“그게 가능한...”
“진공관을 이용하면 못할 것도 없지요. 지금까지는 사실 크게 중요하지 않은 성질이라고 여겼지만...”
아직 해보지는 않았지만, 고작 사칙연산 정도 하는 기계라면야 그리 복잡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조금 더 사업의 성공과 실패에 대해 신중하게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호언장담한 것만큼 일이 단순하지 않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겠지만, 그런 사람이었다면 테슬라가 이 지경에 처하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이 ‘전기장판’ 도안을 재검토하라고 아랫사람에게 말씀 한 마디만 해 주시면, 이 ‘계산 기계’를 무조건 하나 만들어서 호조에 납품하도록 하겠습니다.”
저의 동포들과 함께 하겠다는 핑계 대면서 마침내 광무총국의 자문직도 모두 버리고 양주 시골집에서 서른살 아래 조선인 아내와 말년 보내고 있는 오페르트가 들었더라면, ‘공무도하(公無渡河)’ 운운하며 만류하였을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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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관에서 일어나는 열전자방출(thermionic emission) 현상은 이미 19세기 중후반에 발견되었지만, ‘그’ 에디슨이 ‘에디슨 효과’라고 이름까지 붙이면서도 따로 상용화는 하지 않은 것에서 알 수 있듯 전자공학에의 쓰임새는 한동안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이후 1904년 마르코니의 회사에 자문을 제공하던 물리학자 J.A.플레밍이 정류기로서 진공관의 가능성에 주목하면서 본격적으로 초기 전자제품에 쓰이기 시작하지요. 테슬라도 1890년대에 형광등을 발명하고 X선 관련 실험을 하면서 진공관을 많이 다루었지만, 테슬라 코일을 활용한 무선 형광등 발명에 치중하느라 전기회로에의 적용 가능성은 간과한 것으로 보입니다.
원 역사의 에른스트 오페르트가 언제 결혼하여 아들 카르트를 얻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1832년생인 그가 1851년에 홍콩으로 건너와 1867년까지 머물렀음을 고려하면 동양으로 오기 전 결혼한 것은 아닌 듯합니다. 남연군묘 도굴에 실패하고 독일로 돌아가는 일이 작중에서는 없었으므로, 작중에 등장하는 연하의 아내는 현지처라기보다는 본처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라비안 나이트』는 이미 18세기 초에 유럽에 소개될 만큼 유명한 이야기로, 19세기가 되면 빅토리아 시대의 기호를 반영하여 관능적 요소가 배제된 판본이 동아시아에도 소개됩니다. 이런 식의 이야기를 가장 좋아할 일본에서 먼저 1875년 첫 번역본이 나왔고, 중국에서는 1900년에 나왔지요. 역시 이야기책을 좋아할 젊은 세대인 변수가 알라딘의 양탄자 이야기를 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