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움직이는 바큇살 (1)
“고생들 했네.”
완전히 파김치 꼴이 된 홍영식과 전봉준이 만약 넋을 놓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 고생을 시킨 본인이 할 말은 아니라고 불평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반대로 지난 두 시진 동안 당하였던 기억에 한 마디라도 더 토 달 생각을 아니 하였을 수도 있겠지만.
“구업(口業)은 본디 즐겁게 여기지 않으나, 비록 뜻은 다를지언정 바른 도리 구하는 마음만은 하나같음을 내 알았으니 아무리 정도(正道)에서 더 나가거나 모자람이 있다 하여도 어찌 함부로 무어라 하겠는가.”
이 역시 이미 할 말은 과하게 다 내놓은 사람이 하기에는 심히 부적절한 말이었다.
일대의 대논쟁 – 논쟁이라고만 하기에는 형식이 조금 이상하기는 하였지만 – 끝난 참의원 회당에 모여든 이들이 썰물처럼 밀려나가고, 삼삼오오 남아 저들 이야기 나누는 사람과 각 당의 사무 보는 이들, 그리고 열심히 설치해둔 이런저런 장비들을 옮기거나 분해하는 이들 정도가 남았다.
수근수근 대는 이들, 낑낑대는 이들 공히 있지만, 앞서의 열기는 식은지 오래여서 고요하다 할 만하였다.
지금 한양에 강연할 곳이 한둘이 아니었는데, 개중에는 정말 강당이라 부를 만한 점잖은 곳도 있고, 말이 강당이지 실지로는 악공이나 소리꾼들이 재주 부리는 곳도 있었다.
한쪽은 윤돈에서 그 강설(講說)로써 재미를 본 전우가 노사학원 사람들을 충동질하여 – 대원군 떠난 뒤에 가야산은 무주공산이라, 목소리 큰 전우의 세상이 되었다 – 이른바 여민강학(與民講學)을 내세운 것이 시초요, 다른 한쪽은 대원군 후원 받아 전국 명창들 모으고 다닌 가선대부 신재효(申在孝)가 시작한 일을 여악(女樂)으로 출세한 신재효의 제자 진채선(陳彩仙)이 물려받아 세운 것이 발원이었다.
어찌 되었든 몇 순 전 최익현이 제의하여 추거 코앞인 지금 성사된 이 국사공론회(國事公論會) - 전적(典籍) 상고하여 더 유서깊은 이름 찾으려던 최익현을 다른 두 사람이 만류하여 저 이름대로 가게 되었다 – 열기에는 적당하지 않았는데, 그렇다고 전봉준이 던져본 제안대로 육조거리나 운종가에서 하기에는 또 날씨가 추워진지 오래였다.
그러던 차, 궁에서 권하기를 어차피 나랏일이요, 모두 각자 당에 몸 담아 이름 날리는 사람이니 번듯한 참의원 양옥에서 함이 어떻겠느냐 하였다. 마침 삼당이 돌아가며 맡게 된지 오래인 참의원정(參議院正)이 이상재로, 말주변과 재치로는 참의대부 중 으뜸이라며 당색 무관하게 칭송받는 사람이었기에 자리 준비를 맡길 만하기도 하였다.
허나 처음 한 마디 말한 뒤에는 줄곧 최익현 한 사람이 논의를 이어가, 세 당 사람이 각자 논변하는 것이 아니라 홍영식과 전봉준이 돌아가며 최익현과 문답하는 식이 되었다.
중간 쉬는 틈에 이상재가 머쓱하니 전봉준에게 변명하기로는,
‘험험. 저도 천생 예의지방 조선국인인지, 연로하신 면암 선생 말씀에 차마 토를 달기 무엇하여 가운데서 무어라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였는데,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이라 당하는 사람은 공산당에 저 하나면 되었다 여기는 전봉준은 사감(私感)으로만 살짝 원망하였다.
“면암 선생께서 고언(苦言)으로 깨우쳐주시니, 아직도 국사 맡기에 미진함 많음을 스스로 깨닫습니다. 부디 추거 뒤에도 많은 가르침 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홍영식이 먼저 마음에도 없는 답례를 올렸다.
“저 또한 매한가지로 선생 덕에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을 많이 들어 알았습니다.”
“늙은이 잔소리가 얼마나 도움이 되겠느냐만, 앞날 창창한 사직의 동량에게 남의 산 돌만큼의 공이라도 될 수 있다면 어찌 혀를 아끼겠는가.”
“아끼실 수 있도록 갖은 힘을 다하겠습니다.”
그에 있어서는 홍영식도 공감하였다.
원수 집안의 자제도 하사로 군문 들어가 삼 년간 같이 고생하다 나오면 집안 묵은 원한은 모두 잊는다 하는데, 행사 전후의 준비하는 시간 합산하여 세 시진 함께 있던 홍영식과 전봉준의 사이에도 그런 묘한 공감이 조금은 생겼다.
처음 시작할 때, 그 쌀 불사른 일을 두고 잘잘못을 따지면서, 그 사태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곧장 논변하였는데, 풍기가 문란하니 아랫사람 잘못이다, 어질지 못하니 윗사람 잘못이다 하는 수준을 훨씬 뛰어넘어 각자 하고자 하는 뜻을 내세웠다.
입론 끝나고서 각자 생각하는 정책도 털어놓는데, 예컨대 홍영식은 말하기를,
‘개화당은 예로부터 기물로써 부도(扶道)함을 아름다운 덕으로 삼았으니, 이번이라고 어찌 다르겠습니까? 대저 오곡 가운데서 쌀이 가장 귀하다 하는 것은, 무릇 벼가 다른 곡식보다 공이 더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생각건대 금번의 안타까운 사고가 일어난 것은 대개 사람 부리는 삯이 떨어진 미가(米價)와 비등하였기 때문인데, 그렇다면 그 삯을 줄이면 될 일입니다.
이미 수리(水利) 완비하여 가물 때 물 대는 공력을 감한 것처럼, 기계로서 사람 손 가는 일을 대체하게 되면, 소출은 절로 늘고 값은 헐해질 것이요, 헐한 값으로도 소출이 많아지니 이윤 또한 늘어날 것입니다.’
하면서, 장차 조선국이 면필 대신 무겁고 복잡한 기계 만드는 일로 부국을 꾀해야 할 것이니 이로써 만사 해결할 것을 말하였다.
반면 전봉준이 내놓은 답이란,
‘지금 나라의 궁방전에 유대인들이 들어와 소위 농협을 세웠는데, 그 제도에 배울 점 있어 근처의 공산당 몇 곳에서도 따라 시행하고 있습니다.’
하면서, 지금 향약 외에도 나라의 농군들끼리 힘 합하여 모내기나 가을걷이를 하는 갹사(醵社)니 농계(農契)니 하는 것이 있으므로, 구본신참하는 마음으로 이를 활용하자 하였다.
‘서로 농사일 돕는 데 그친다면, 이미 나라의 소출이 크게 늘어 곡가 자체가 헐해지고 있으니 잠시 변통하는 것일 뿐 근본은 고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농가의 소출을 곧이곧대로 도회의 곡행에 넘길 것이 아니라, 논밭 대신 과실 열리는 여러 나무를 널리 심고, 또 남는 곡식이 있으면 헐하게 파는 대신 술을 빚거나 떡을 만들어 그 값을 높이면 될 일입니다.’
그 외에도 도회의 고공들이 언제든 이팝 먹을 수 있게 하면서 변촌 농군들도 풍족하게 살게 할 방책을 이것저것 말하였다.
그렇게 행사의 서두에는 당색 따라 각자 큰 뜻을 제시하고, 그 다음에는 이번에 불거진 농촌의 문제에 한쪽은 기계 들여오기를, 한쪽은 사람 모임을 세세히 내세우며 겨루었는데, ‘잘 들었다’ 얘기하면서 최익현이 곧장 발의라기보다는 비평에 가까운 말을 꺼내기 시작하면서 당당한 기세가 마멸되기 시작하였다.
“그렇지만 크고 작은 뜻을 모두 나오게 하였으니, 농담삼아 자찬하자면 희랍의 소씨가 하였다는 문답법과도 같다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배불뚝이 소크라테스가 아니라, 대쪽같은 최익현이 하는 말이라, 지금 농담이라고 내세운 말만큼이나 어울리지 않는 자평이었다.
“흠흠, 그나저나 두 시진에 걸쳐 논박 주고받았으니, 혹 과한 언사가 있지는 않았을까 두렵습니다.”
“성상께서도 그리하여 친람하지 아니하시겠다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나라에서 언로 넓게 펴는 뜻이 여기에 있으니 걱정치 말게.”
멀리 있는 군현에는 전화에 의탁하여 소리를 전하고, 가까운 경기는 혹은 전화로, 혹은 그 복사음성(輻射音聲) 기기로 무선 송음하겠다 하였는데, 처음에는 전화 통해 실황을 전해들으려던 성상께서 무슨 뜻에서인지 그 마음을 거두었다 들었다.
“그것이... 저는 괜찮으나 해몽이 꺼낸 말 중 혹 어심을 거스르는 것이 있지 않을는지...”
철 든 이후로는 성품 원만하여, 당 이끌기에는 사람이 과히 온후하다는 것을 제하면 참 좋은 사람이라는 세평 듣는 홍영식이었다.
그런 사람이 하는 걱정이므로 최소한 절반은 진심일 텐데, 그 말 듣고 잠시 돌이켜 생각한 전봉준이 말했다.
“그러나 면암 선생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언로 널리 편 뜻이 여기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누군가는 반드시 짚어야 할 일이었습니다.”
결국 기계 들여오는 일이든 농협 지원하는 일이든, 홍영식이 지나가듯 말한 것처럼 나라의 경제에 관한 일이라면 ‘점심조차도 거저 주는 법도는 없는’ 것인데, 이미 경제개발 오개년계획에 의거하여 나라에서 자동차 부품을 조금씩 만들고 있으므로 곧 조선의 논밭에 필요한 기계를 조선 땅에서 모두 만들어 쓰게 되면 될 일이라 에둘러 답한 홍영식과는 달리 전봉준은 조금 더 직설적으로 말했다.
‘군비는 비록 가볍게 여길 수는 없는 것이나, 또 반드시 무겁게만 여겨서 족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 면암 선생께서 그 농협을 전국에 널리 보급함에 마땅히 비용이 들 것이라 하시는데, 군비를 줄이면 그 예산으로 족히 해결하고도 남을 것입니다. 당장 지난해 호조에서 공표한 바에 따르면...’
하였는데, 홍영식 생각에 이는 전봉준 본인도 모르는 사족(蛇足)이었다.
“이미 지난 추거에서 그... 고균의 언설로 말미암아 일대 논쟁이 벌어질 뻔하지 않았습니까? 다행히 곧장 그 비행기 시연이 대성공하여 사그라들기는 하였으나...”
“그건...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군그래. 상께서 군병의 일에 있어서는 뜻이 확고부동하시니. 허나 지금 해몽이 집정한 것도 아니요, 맹랑한 말을 한 것도 아니니, 어지신 성상께서 어찌 허물로 여기시겠는가?”
“그리고 허물로 여기신다 하여도, 때에 따라서는 간언하기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큇살 서른 개가 모인다 한들 바퀴통이 비어 있어야 비로소 수레가 쓸모있다(三十輻共一轂 當其無有車之用) 하였으니, 오히려 공론에 따라 국사를 처리하는 큰 뜻에 따르기 위해서는 미리 정해진 답이 있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도덕경』 나오는 얘기가 전봉준 입에서 나오니, 사람 좋게 걱정하던 홍영식과 최익현이 모두 그를 놀라 바라보았다.
“흠흠, 그것이...”
“아, 이 사람. 설마 내 경학을 들어 자네를 논박할까 내 보지 않았을 노담(노자)의 글을 준비했던 것인가?”
껄껄 웃는 것을 보니 딱히 노여워하지는 않는 듯하였다.
“이 사람도 한때 젊었던 시절이 있어, 그런 글도 놓치지는 않았다네.”
그런 시절 없었더라면 자신이 박규수라는 사람을 만날 일이 있었을까.
“자네가 까다로운 늙은이 하나 때문에 퍽 고생이 많았네그려.”
재차 별 쓰임새 없는 사과를 하는 최익현이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홍영식과 최익현의 걱정하는 일은 바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근심해야 할 사람은 따로 있었으니, 바로 공조의 뭇 벼슬아치들이었다.
“듣지 못하시었다?”
“그렇다 하더이다.”
며칠 뒤 국사공론회 소식 싣는 일로 『익정신보』 찾아와 이야기 나누던 중, 홍영식이 걱정한 바가 떠올라 혹 궁 안 소식 들은 바 있느냐 물었더니 오세창이 대답했다.
“그로 인하여 공조에서는 아마 지금쯤 여러 사람 곡소리 나고 있을 터인데, 방음기(라디오)라는 것이 관에나 겨우 있는 새 기물이므로 경기 일원에서 불편하였을 백성은 없겠지만은, 정작 중요한 한 분이 불편을 겪으셨으니 여간 큰일이 아니잖습니까.”
조선 사람들 참을성 없다는 것은 동삼성과 일본국 등지에서 공히 하는 험담인데, 과연 전화 놓인 곳마다 몰려들었던 이들도 처음 두 사람 입론과 최익현의 첫 반박 나오자 하나씩 자리 비우기 시작하여, 잠시 쉴 무렵에는 모여들었던 군중은 열에 하나꼴로 겨우 남았다 하였다.
물론 그만큼 사람이 많이 몰린 탓이요, 사실 첫 입론만 들어도 이번 쌀 불탄 일에 대한 입장은 명백히 알 수 있었을 것이련만, 모처럼 옛날 생각에 전화 대신 나지오 들으면서, 여우같은 마누라와 함께 화롯불 쬘 생각하던 귀남으로서는 사정이 달랐다.
“설마 꾸짖기야 하셨겠는가?”
“그러실 상감은 아니시지만, 이름 숨기기를 청한 한 소식통이 채사군에게 이르기를, ‘네놈이 정녕 우리를 호조처럼 만들고자 작정을 하였구나’ 하는 소리가 나왔다 하니 필히 무언가 하유하신 바가 있을 것입니다. 예컨대 다음에는 이런 일 없도록 단단히 준비하라 하셨다거나...”
사실 귀남은, 침전에 방음기 가져다둔 궁인이나 그 방음기 준비한 사람들의 잘못이 아니라며, ‘다음에 잘 하면 되니 심란히 여기지 말라’ 하였을 뿐이었는데, 잘못이라면 그 말을 기무회의 끝물에 공조판서에게 한 것이 잘못일 테다.
“그 외에는 따로 궁에서 나온 이야기는 없던가?”
“수소문하면 뭔가 나오기는 하겠지만, 함부로 신보에 실을 만한 것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 것은 아니라 하겠습니다.”
대개 신보에 속한 채사군 외의 소식통이란 창호지와 같아 안팎의 불빛을 모두 통과시키는데, 궁에 관한 소식통이라면 공안서든 궁내부든 거기 실지로 속해 있든, 속한 사람과 닿아 있든 할 것이요, 둘 중 어느쪽에 속하는지는 일개 채사군이 함부로 캐낼 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인생사 새옹지마라.
아무리 의심의 벽을 반쯤 허물었다지만 그래도 무릎께는 남아있는 것이 공산당 걱정인데, 그 공산당에서 군비를 전용하여 농촌에 쓰자는 의론 나왔음을 전해들은 귀남은 곧장 다음 경연에서 대관절 무슨 뜻에서 그리하였느냐 캐물었다.
그러나 전봉준도 할 말은 하는 사람이라, 최익현 앞에서 했던 말을 고스란히 옮겨서 – 물론 그도 사람이니 어찌 두렵지 않았겠냐만 – 아뢰었다.
잠깐 생각하기로도, 아무리 저 말이 틀렸다고 생각한다지만 추거 앞둔 시점에 임금이 손수 한 당의 영수 되는 사람에게 면박 줌도 마땅하지 않은 일이었다. 옛날과 달리 군대 다녀온 사람도 한둘이 아닌 지금, 설마 저런 말이 통하겠느냐 생각하고서 추거 뒤에 다시 보자 여기는 귀남이었는데,
“그랬는데 떡하니 내가 되어버린 거지.”
“저런.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겠네.”
“뭐, 처음 그 토론회 할 때부터 싫어할 사람이 생기리라 짐작은 하였지만.”
“그렇게 지엄한 자리에 반대파가 생길 줄은 몰랐겠지.”
아무리 그래도 쌀 태워먹은 짓을 옹호함은 마땅치 않다 여기는 사람들도 있지만, 반대로 아무리 쌀이 중하다 해도 쌀만으로는 밥벌이 되지 않는 세상이니 이해할 만하다 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며, 점점 늘어나는 매단자(유권자)는 후자가 더 많았다.
전봉준 말을 전해듣고, 쌀값 떨어지는 것이 그러면 옳지 않다는 말이냐 하고 고공들 중 반발하는 이들이 있기는 하였으나, 대신 그의 구상대로 이루어지면 술값이 싸진다 하니 곧장 사그라들었다던가. 물론 어리석어서 그렇게 팔랑귀처럼 행세한 것이 아니라, 그와 그의 당을 믿고 따르는 마음이 있었기에 그리하였을 것이었지만.
“아직 공식적으로 취임도 안 했잖아. 마음 단단히 하라고. 가장 적이 많을 총리가 될 테니.”
“예, 부인(Dame) 예정자 각하.”
조만간 정경부인 될 엘러노어에게 전봉준이 농담삼아 답했다.
그러나 엘러노어 말은 진담이었다. 최익현이 개화당과 공산당 양쪽을 꾸짖는 것을 보고 그에게 단자 던진 이들이 많았는지, 아니면 구관이 명관이라 여겼는지, 의외로 개화당 갈 단자를 자유당이 가져가면서 공산당이 근소히 앞선 것이다.
농촌의 힘과 최익현네 자유당 힘 빌어 마침내 총리 자리 오르게 되었으니 얼떨떨하니 기쁘기도 하지만, 현실은 바깥에 부는 겨울바람처럼 냉엄하니 각오를 새롭게 해야 할 것이었다.
“설령 싫어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해야 할 일은 해야지.”
그때, 초인종 소리 요란히 들려왔다. 집안일 돕는 젊은이가 곧장 나갔다 들어와서는 고했다.
“저, 어르신. 바깥에 기이한 양인(洋人) 하나가 와서는 이상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상한 말이라니?”
“‘도둑질 알아보지 못한 값을 치르라’하고 있는데, 무슨 도둑질이냐 물어보니 우리 조선국이 도둑질 거들었다며 황망한 소리를 하지 뭡니까.”
“어디서 온 누구이기에 그런 말을...”
노발대발하다가 곧장 정색하면서 저의 이름 적힌 단자 건네주는, 다소 우스꽝스러웠던 모습을 생각하며 소매에서 꺼내 다시 읽었다.
“니콜라 테슬라(Nikola Tesla)라고 하던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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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를 정리함으로써 국악에 지대한 공헌을 한 신재효가 흥선대원군의 후원을 많이 받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병인양요 후 척양을 주장하는 노래를 만들고, 경복궁의 준공을 기념하는 연회에서 제자 진채선을 시켜 공연을 하기도 하는 등 정치적인 행보도 보였는데, 대원군이 실각하면서 고창에 낙향한 뒤에도 사재로 구휼을 한 공으로 통정대부를 제수받고 벼슬이 호조참판에 오른 것을 보면 인품이나 정치력 중 최소 하나는 뛰어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안타깝게도 고창 기생 출신으로 최초로 이름이 알려진 여성 명창이 된 진채선의 후일담은 전하지 않습니다.
원 역사의 홍영식은 비록 단명하기는 하였지만 온후한 성품으로 같은 개화파 내에서는 평이 좋았다고 합니다. 물론 무언가를 좋게 평하는 일이 드물었던 황현의 ‘모두까기’에서는 자유롭지 못했지만요.
그는 보빙사 사행을 다녀온 뒤에 농기계 도입을 건의하기도 했는데, 설령 그의 건의가 곧이곧대로 반영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질 수 있었을지는 의문스럽습니다. 당시 그가 보고 감명을 받았다고 알려진 콤바인은, 증기기관을 사용하는 시제품이 아니라면 대규모 축력을 요구하는 거대한 기계였기 때문이지요.
이후 1890년대 내연기관이 상용화되면서, 보다 우리에게 익숙한 형태의 농기계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트랙터의 경우, 상업적 성공을 거둔 첫 내연기관 모델이 등장한 것은 1902년이었으며, 자력주행 가능한 콤바인이 널리 보급된 것은 1920년대였습니다. 홍영식이 말한 농업의 기계화는 작중 시점에서 바로 이루어지기는 어렵다고 할 만합니다.
‘갹사’, ‘농계’ 등은 오늘날 두레로 통칭되는 조선 촌락 내의 상호부조 조직입니다. 그 외에도 농사(農社) 등, 지역과 마을마다 부르는 이름이 상이했다고 전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