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260화 (260/320)

85. 여든 여덟 번의 수고 (3)

값 높게 부르겠다며 실랑이 벌이다가, 사람이 먹기에도 부족한 쌀을 그만 화마(火魔)의 밥으로 주었다 하니, 부뚜막 조왕신은 물론이요 어지간한 조선 사람이라면 노엽게 여길 일이었다. 외적 침노하매 차마 백성이 일군 곡식을 내어줄 수 없다 하여 곳간에 불 당긴 것도 아니요, 같은 조선 사람, 그것도 동리 어른이 와서 타이르는데 다툼 끝에 그런 사달이 나고야 말았으니 더욱 그러하였다.

글쓰는 사람 마음에 따라, 또 그것 읽는 사람 마음에 따라, 농군들이 저들 소출을 마음대로 하겠다는데 와서 강짜를 부린 동네 어른들의 잘못이 되기도 하고, 애시당초 사람 먹는 것으로 감히 못된 수작 부리려 한 농군들의 잘못이 되기도 하고, 금(金) 앞에서는 어떤 금도 긋지 않는 작금의 세태 잘못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누구 탓을 하든 사람들 이목은 확실히 끈 것이어서, 당장 전봉준이 전차에 오르자마자 들려오는 소리는 온통 쌀 얘기였다.

오늘은 양장도 따로 하지 아니하여 썩 훤하지만은 못한 풍채 고스란히 드러났는데, 그러므로 그가 차에 오르자마자 사람들이 그에게 시선 돌리고, 차마 그러지 못하는 장차수는 대신 귀를 쫑긋 세웠다.

“험험. 소생은 저기 식주공행에서 서리 노릇하는 임가라 하는데, 해몽 선생께 여쭙고자 하는 말이 있습니다.”

개중 나이 적당히 먹어 어디 가서 좌장 노릇 할 법한 사내가 목청 가다듬고 물었다.

“금번 김제에서 소란한 사정을 두고 이 사람 생각을 묻고자 함이겠구려.”

“바로 그렇습니다.”

“내 무슨 당을 이끄는지는 다들 알고 계실 것이오. 모두가 빠짐없이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우리 당의 소략하면서도 거창한 뜻인데...”

‘당연히 그 모두에 농군도 들어가지요.’라는 말 대신 에둘러 감추는 뜻이 나왔다.

“그러니 남들에게 돌아갈 먹거리가 줄어든다면 그 또한 온당치 못한 일 아니겠소?”

“역시 그렇지요?”

‘암, 암’ 하며 긍정하는 좌중을 보면서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아직은 때가 아니니, 씁쓸한 뒷맛과 함께 조용히 내리는 수밖에.

“광통교. 광통교외다.”

『삼국지연의』 좋아하는 것은 조청일 세 나라의 사정이 매한가지이므로, 관성대제를 모시느니, 허무적이 나오는 가락(적벽가) 즐기느니 하는 차이는 있어도, 지금 조선국 참의원에 세 당이 정립(鼎立)한 것을 위촉오 세 나라 사정에 빗댐은 모두 같았다.

물론 그리 되면 어느 한 당은 조위(曹魏)가 될 테니, 점잖은 사람들은 대개 마음 속으로만 생각하고, 또 눈치 빠른 사람들은 지금이 삼국지라면 근처의 누군가는 예형(禰衡)이나 양수(楊脩)일 것이므로 역시 스스로 입단속을 하였다.

여하간 기세 높은 한쪽에 맞서기 위해 나머지 두 당이 의각지세(犄角之勢)로서 뭉치는 것 하나는 그때와 같았으므로, 금번 소란에 있어서도 공산당 전봉준이 자유당 최익현 찾아감은 그 때문이었다.

물론 정말 따진다면 그때 최익현이 곧이곧대로 제게 힘을 빌려주지 않은 것이 사태의 원인일 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그가 공산당 훼방 놓을 생각으로 그리할 사람은 아니므로 아쉽게는 여길지언정 미워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설령 밉다고 한들, 당장 내일모레 입궐하면 또 앞서 전차에서와 동일하게 그의 생각 묻는 이 있을 테요, 그분으로 말하자면 전차에서 동행한 필부(匹夫)와는 그 물음 무게를 비할 수 없는 분이신즉, 그 자리 함께할 최익현과 미리 머리 맞대고 의견 조율함이 마땅했다.

“해몽 왔는가.”

“그간 별고 없으셨는지요.”

“자네야말로 유고하였겠지.”

예의 그 경주 수정애체(안경) 벗으며 최익현이 말했다. 저 애체로 말하자면 자유당을 굳건히 지지하는 멀리 경주 둔차(鈍次) 선생, 그러니까 최부잣집 주인장이 경모하는 뜻으로 보내온 것이라, 최익현쯤 되는 사람이라면 경주 남석(수정의 일종) 애체 대신 가벼운 양유리로 된 것을 언제든 장만할 수 있으련만 사람을 생각하는 뜻으로 계속 쓰고 있다 하였다.

그런 사정과는 별도로, 가뜩이나 나이 먹고 매서워진 인상이, 반쯤 눈매 가리는 저 남석 애체를 쓰니 더욱 날카로워진 듯하였기에, 마주 대하는 전봉준으로서는 불평할 일은 아니었다. (근래 저 공효를 노리고서 일부러 남석 애체를 구해서 쓰고 다니는 공안서 고관들도 있다 하던가.)

침 한 번 삼키고, 조용한 헛기침 한 번 곁들인 뒤에 본심을 꺼내었다.

“사람 먹거리 두고 농간부림도 못난 짓인데, 하물며 햅쌀을 그리하였으니 노엽게 여기는 이들이 많을 것입니다.”

“대저 식화(食貨)란 팔정(八政)의 으뜸이라 하였지.”

“그러나 노엽다 하여 어찌 그것으로 옳고 그름을 분별하겠습니까? 김제의 안규홍 그자를 위하여 옹호하고 나서고자 합니다.”

“그대 당이 중히 여기는 도회의 고공들이야 그간의 정이 있으니 얼마간 따른다 쳐도, 부득불 국론이 둘로 쪼개지지 않겠는가?”

전봉준 그를 나무란다기보다는 그간 조용조용히 세 키우며 뿌리 넓히기에만 치중하는 듯하던 자신이 마치 김옥균이 할 법한 행보를 마음에 품었음을 의아히 여기는 듯하였다.

“지금 당장 쪼개지더라도 우선 총리대신 자리에 오르면 도로 합할 방책이 나올 것입니다.”

“허, 이 사람. 아니 그러던 사람이 권세 욕심이 생겼는가.”

이번 추거를 준비하면서 전봉준이 스스로 던진 물음이기도 했다.

욕심이 없다 하면 거짓말일 테다. 그러나 정말 감투 쓰고서 위세부릴 생각인가 하면 그것은 아니었다. 물론 자신이 영규(領揆, 영의정) 되어 엘러노어에게 지아비 품계 따라 정경부인(貞敬夫人) 제수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궁금하기는 하였지만.

그렇다면 어째서, 유독 이번 추거에서는 이기기를 바라는가?

“때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바뀐 것은 아니고?”

“조금 들어주시지요.”

“그래, 말해보게나.”

또 한 차례 한숨. 최익현이 애체 벗었다고 안심한 것을 취소하며 말을 잇는다. 최익현의 눈길이 부담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와 별도로 이미 그의 마음 속에 든 고심이 또한 무겁기 때문이리라.

“자유당 분들 좋아하시는 말로, 백성은 자고로 이식위천(以食爲天, 먹거리를 하늘로 여김)이라지요. 그런데 또 백성의 마음은 하늘의 뜻이라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백성 가운데서 먹는 것만을 하늘로 여기지 않는 이가 나온다면, 이는 무엇을 뜻하겠습니까? 누군가는 그들을 위하여 새로운 정책을 마련하고 국정을 일신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네 한 사람이다, 그 말이렷다.”

“감히 자천(自薦)컨대 그렇습니다. 연유는 이렇습니다...”

둑 터진 것처럼 생각이 쏟아져 나왔다.

시작은 그 정강사 모임 소식을 건너건너 들었을 때부터였다.

천하에 대란이 일어나는 것이야, 비록 완화되었다지만 제국주의 열강의 생리가 어디 가지 않으므로 언제고 일어날 법한, 불가피한 계단 문턱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허나 그만한 일이라면 필연적으로 조선의 만백성도 얽히게 될 것이요, 조선이 지난번처럼 잠시 마실 다녀오는 정도로 개입하든, 아니면 숫제 구주 한 구석에 있는 나라처럼 진력(盡力)하든 그 후과는 역시 만민에 두루 미칠 것이었다.

그리고 만약 그것을 김옥균과 그 무리의 손에 그대로 맡기게 된다면...

“우리가 구주 나라들이 일으킨 문명의 도움을 받았다 하나, 그들의 잘못까지 답습한다면 어찌 이를 본받음이라 일컫겠습니까. 그러나 근래의 추세를 살피면 자못 두려운 바가 있는 것입니다.”

대읍(大邑)과 변촌(邊村)의 차이는 벌어지고, 늘어나는 인구를 생각하면 다시 도시 안에서도 빈부의 사이가 넓어질 것이다. 청일 양국이 빠르게 치고 올라옴에 따라, 비록 철강이나 기계 등을 조금씩 직접 만들 수 있게는 되었다지만 아직 나라 살림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면필 따위의 제조는 그 이익이 갈수록 줄 것이다.

굳이 그의 장인을 환기할 것도 없이, 이런 형국을 벗어나는 한 가지 방법은 이미 유럽 나라들이 질리도록 보여준 바 있었다.

“그리 시무책을 올리려거든 이곳이 아니라 금궁 안에서 상언하여도 될 것 아닌가? 금상께서 언로를 넓게 하신 것이 모두 이를 위함이거늘.”

“비록 국제에서 이르기를 군권(君權)이 한없다지만, 실지로는 집정(執政)하는 이가 따로 있으니 뜻을 실어 펴기 위해서는 자리를 노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민심을 얻어 군심(君心)을 돕고, 지존을 거들어 백성의 이로움을 위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이번 쌀 소동이 없었더라면 조금은 생각이 달랐을지도 모른다. 이미 자신은 저의 계책 대강을 안느장 통해 개화당에도 전했으니, 이전처럼 느긋하게, 그리고 느슨하게 나섰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세상은 숨가쁘게 변하고 있었고, 자신이 인천부와 도성에 머물며 책 쓰고 아내와 노닥거리면서 당의 영수 노릇 하는 동안에도 멈추지 않았다. 당장 자신만 하더라도, 금년 대풍이 들었을 때 무슨 난국 일어날지를 뻔히 알면서도, 설마 곳간 걸어잠그기야 하겠느냐며 안일하게 있지 않았는가?

그리고 한 번 그렇게 밭은바 소임을 버렸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마음은 급해지고 상념은 쌓여갔다.

“그래서 내게 무얼 청할 생각인가? 자네의 뜻을 거들어, 저 난행한 무리를 비호하고 그 뜻 드높다 현양해주기라도 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개화당보다야 제가 낫지 않겠습니까?’라는 말을 할 만큼 급하거나 사리가 어둡지는 않았지만.

허나 그 침묵 속에서 나오려던 말을 꿰뚫어본듯 최익현이 차갑게 대꾸하여, 설득하고자 준비했던 그 많은 논리를 무용(無用)하게 만들었다.

“답은 듣고 싶지 않네. 썩 돌아가게.”

어깨 늘어뜨리고 집에 돌아와 푹 자빠지듯 앉을 무렵, 해 떨어지고 한참 지나 옛적 인정 치던 것을 연상케 하는 종소리 울리니, 집주인 심란함을 무색케 하는 이 청량함은 곧 맥안공행 전영(특허) 초인종(招人鐘)에서 발원한 것이라.

기운 없는 남편 생각해 호다닥 대신 달려나간 엘러노어가 곧장 돌아와 이르기를, 전봉준 그가 응당 맞이할 손이라 하였다.

이것이 정치인자(政治人者) 숙명이려니 하고서 의관 급히 정제 후 객 맞이한즉 다름아닌 최익현이었다.

“낮의 일은 이 사람이 잘못하였네.”

무슨 말씀이시냐며 물을 틈도 없이 대뜸 사과하고서 말을 이었다.

“내 돌이켜 생각해보니, 자네와 뜻이 맞지 않음만 생각하여 말이 지나쳤어. 사사로운 생각으로 말미암아 남 위해 일을 꾀함에 불충하였으니(爲人謀而不忠乎) 부끄러운 일 아닌가.

하여, 내 발상한 바가 있어 사과를 겸해 들려주고자 찾아왔다네. 옛날에, 나라의 중한 자리에 올라 무슨 뜻 개진할지 서로 뜻 내놓았던 것을 기억하는가.”

“어찌 그것을 잊겠습니까.”

그때, 백성을 널리 프롤레타리아로 일깨우는 것과 선비로 만드는 것을 두고 겨루자고 하였던 것은 지금도 생생했다.

“여전히 해몽 자네의 생각은 옳지 않다 여기니 다른 생각은 없네. 그러나 사람의 식견이란 성인이 아니고서야 편벽하기 마련이므로, 공론의 제도가 그리하여 세워진 것 아니겠는가? 대저 논의가 그릇되었다 하여 그 뜻까지 사특하다 몰아붙임은 잘못된 것이지.”

“그리하면...”

“그때 약조하였던 그 뜻으로 돌아가자, 이 말일세.”

여전히 아리송한 전봉준에게 최익현이 계속 설명 늘어놓아, 앞서 자유당 당사에서와는 반대 모양새를 이루었다.

“지금도 구주 식자들 사이에 종종 회자되는 일이, 저 간재(전우)가 윤돈 땅에서 진화론 논박 벌인 것일세. 그로 말미암아 살갗 색 다른 이들을 짐승과 같이 보던 무리들이 모두 오늘날에는 그들 중 우인(愚人) 대접을 받게 되었으니, ”

조금 점잖은 ‘인종학’ 내지는 ‘인류생리학’ 하는 사람들이야 널리고 널렸지만, ‘네그로(Negro)는 유인원과 인간 사이의 잃어버린 고리’ 운운하던 자들은 기세가 죽은지 오래였다. 어디 골방에서 말다툼한 것도 아니고, 당당하게 런던 학회에서 사흘 동안 공개토론회를 했거니와, 반대편 골턴만큼이나 전우의 뒤에 있던 이들도 저의 할 말 많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스펜서와 헉슬리여서, 그때 나온 논지를 그들의 여생 동안 열심히 떠들고 다녔던 것이다.

그 이후의 복잡한 구주 사정도 스펜서와 전우의 편을 들어준 셈이었는데, 예컨대 흑인이 기질상 유약하고 나태하므로 유럽 백인들보다 엄격한 교육이 필요하다는 소리를 벨기에 사람 앞에서 함부로 하였다가는 자칫 멱살을 잡힐 수도 있는 것이요 – 지금이야 조금 나아졌다지만, 한때 정부가 휘청이던 시절 혼란은 많은 벨기에 사람 기억에 남아 있었다 – 황인들은 비열하고 비도덕적이라는 얘기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연회장에서 했다가는, ‘저런 사람과 어울리면 안 된다’며 다 들리는 귓속말로 자녀에게 당부하는 귀족들을 보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나마 베를린이라면 조금 사정이 낫겠지만.

“그렇다면 자네가 원하는 그 공론에 부치는 일도, 굳이 금궁 안에서 꺼내어 어심을 어지럽게 하거나, 신보나 당을 통해 민심을 갈리게 하느니 차라리 공변되고 당당하게 논변하는 자리를 만들어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상대방이 참선비 면암 선생이라 참 다행이라고 좋게 생각한 것도 잠시, 이어지는 말에 피가 식는 느낌이 들었다.

“자유당은 이번에 운양(김윤식)이 아니 나온다 하면 숫제 사람을 내보내지 아니할 요량이었는데, 만일 이처럼 좋은 뜻으로 자리를 만든다면 내 직접 나서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이미 하여본 총리 자리에 무슨 미련도 없으니, 내 공변된 자리를 더욱 공변되게 만들고자 양측으로 하여금 모두 뜻을 펼 수 있게 도와주겠네.”

개화당과 공산당 양측을 논박하려는 순수한 마음으로 참여하겠다는 말을 다른 사람이 하면 얄밉겠지만, 최익현이 하면 그것은 두려움 그 자체였다. 그러나 이곳까지 찾아와 그를 도울 생각으로 저리 제의하는 것일 테니, 어찌 거부하겠는가.

그리하여 아주 조선국에서 총리 자리를 두고 공개토론회를 벌인다는 소식이 정사의 일 떠들기 좋아하는 조선인들부터 시작하여 천하 만방에 전해지게 되었다.

홍영식은 혹시 이리 될 줄 알고 고균 그 사람이 저에게 금번 추거를 떠넘겼나 잠시 의심하고, 한창 광통이도국 관련하여 문중에 출납된 가산 중 정말 부정한 것과 조금은 덜 부정한 것을 가리느라 애쓰던 김옥균은 소식 듣고서 자신이 아예 출마치 아니한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한편 먹거리 귀한 줄 모르는 못된 버릇이 백 년이나 일찍 뿌리를 내렸다며 혀를 끌끌 차던 귀남은, 반드시 그것이 논제로 올라올 터이니 백성들이 널리 듣고 깨달을 방편을 마련하라 윤음을 내렸다. 당장 그의 전생에도 못 먹고 못 사는 사람들이 그 아프리카 어디에 가면 지천이라, 어린것들이 길거리에서 음식 먹다 버리는 것을 볼 때면 마음이 좋지 못하였는데 – 이왕 그리 먹다 버릴 것이라면 차라리 저의 군밤이나 더 사가면 되었을 것이었다 – 좋은 기회다 싶었던 것이다.

전화로 말소리 전하여 듣기를 원하는 이들은 팔도에서 능히 들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넘어, 더 나아가 부내의 관아에 들지 못하는 이들을 위하여 – 비록 그 수신하는 기기가 널리 퍼지지는 않았지만, 아예 없지도 않았다 – 경기 일원에서 널리 들을 수 있도록 무선송음(無線送音) 준비하라 하유하였으니 이 또한 천하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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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대선 토론은 1960년 존 F. 케네디와 리처드 닉슨 사이에 진행되었습니다. 이때 케네디는 텔레비전이라는 새로운 매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오늘날에도 선거 홍보 및 미디어 활용의 성공 사례로 언급되곤 하지요. 하지만 그 이전에도 비슷한 시도가 없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컨대 1940년 미 공화당 대선후보 웬델 윌키가 라디오로 생방송되는 대선 토론회 개최를 프랭클린 D. 루스벨트에게 제의하였으나 거절당한 사례가 있으며, 그 이전에도 공적인 토론 그 자체임을 강조하기 위해 공개된 장소에서 정치인들이 토론을 벌인 사례는 종종 있었습니다. 다만 대선토론이라는 점에서는 작중 조선이 최초 타이틀을 가져가게 되었습니다.

조선이 함께 가져가게 된 최초 타이틀은 라디오로 방송되는 최초의 공식 행사라는 기록이 되겠습니다. 무선통신의 기술적 기반은 이미 19세기 후반에 모두 다져진 상태였지만, 당시 보다 중요하게 인식되었던 무선통신 분야는 무선 전보였습니다.

최초의 무선 음성통신은 1899년 브라질의 지 모우라(Roberto Landell de Moura) 신부에 의해 실현되었는데, 이는 교회도 과학을 통한 인류 복지 증진에 공헌할 수 있음을 보이는 데 의의가 있었습니다. 이후 실용적인 방송은 1906년 캐나다의 페센덴(Reginald Fessenden)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여기에는 1904년 진공관이 발명된 것이 크게 기여했습니다. 작중 조선의 시도는 아마 시도에 의미가 있는 수준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겠습니다.

지나가듯 언급된 경주 최부잣집 둔차 선생이란, 11대 최부자인 최현식입니다. 가훈에 따라 진사 이상의 자리를 노리지 않은 그는 집안의 선행을 이어갔으며, 경술국치 후에는 아들 최준과 함께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지요.

조선시대에도 애체(페르시아어 ‘에이나크’의 음역이라는 설이 유력합니다)로 불리는 안경이 널리 쓰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요. 경주 남산에서 나기에 남석이라 불리는 수정으로 만든 애체는 조선 최고의 명품으로 남녀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다만 자연광물을 사용하기 때문에 유리 안경과는 달리 색을 띄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사진에 등장하는 조선인들의 안경이 마치 선글라스처럼 보이는 원인입니다. 을사의병을 해산하고 압송되는 최익현의 유명한 사진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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