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258화 (258/320)

85. 여든 여덟 번의 수고 (1)

개국 오백십일 년(1902)은 지난 세 해와는 달리 비바람이 대체로 때맞추어 찾아왔다. 특히 연달아 가물었던 삼년 중에서도 지난해는 유독 심하였는데, 올해는 그렇지 않아, 춘한(春旱) 걱정은 벌써 과거지사요, 조심스레 대풍을 점치는 이들도 나오고 있었다.

전국에 제방이 튼실히 갖추어진 것이 어제오늘 일이 아니요, 저 호남 땅 바닷가 땅은 나날이 개간하여 소출 늘어나므로 과장하여 말하기를 지금 김제 한 곳의 소출이 선왕대 팔도의 소출에 맞먹는다고도 하였으니, 그까짓 가뭄이 대수더냐 할 수도 있을 테요, 실제로 아직도 그렇게 말하는 노인들이 전국 군현에 많을 것이다.

또한 이번 내각에서 수령에게 참견할 권한을 재차 확인받은 – 물론 예전처럼 주먹구구로 미풍양속 권장하는 것은 아니요, 신촌향약의 취지에 맞게 개화한 법도로 ‘작은 참의원’ 모양새를 갖추었다 - 군현 각지의 향회에서는, 배운 사람들이 문자 써가며 말하기를,

“하늘의 일이야 사람이 알 수 없으니 우순풍조(雨順風調)를 매년 기대할 수 없으나, 시화연풍(時和年豐)은 사람이 하는 것이니 지금의 형국이 실로 그렇지 않은가!”

라 하곤 했다.

한동안은 보와 제방 덕에 겨우 논에 물을 대었고, 슬슬 그것도 한계에 달할 무렵에는 선량하거나 야심 많은 유지들이 저들 돈으로 수차(水車)를, 그것도 어디 『기기도설(奇器圖說)』에 나올 법한 그런 구닥다리가 아니라, 맥안공행에서 미리견의 최신 상법(商法) 배워와 전국에 흩뿌리는 『양품채단(良品採單)』 - 젊은이들의 혀 꼬부라진 시쳇말로는 ‘가타로그(카탈로그)’ -에 나오는 신품을 들여오곤 하였다.

그리하여 대흉(大凶) 될 것을 소흉(小凶)으로 막았으니, 촌로들 말로는 이만하면 그들 젊었을 적 기준으로는 흉년은커녕 가히 소풍(小豊)이라 할 만하다 할 것이었다. 물론 어느 고을을 막론하고, 그런 노인들 말은 십분지구는 걸러 듣는 것이 젊은이들 버릇이었지만.

더구나 당장 굶어죽지 않는 것으로 만족하라고 백날 이야기하여도 결코 만족할 수 없는 것이 오늘날 젊은 농군들이었다.

바짝 벌어서 총명한 제 아들의 대에는 천석꾼을 만들어 주어야 하겠다느니, 자색으로나 품행으로나 동리 제일인 저의 딸은 뭇 반가에서 며느리로 모셔가고자 앞다투도록 만들겠다느니. 욕심은 많고 벗어나야 할 ‘가난’의 문턱은 점점 높아지므로, 작년에 끝내 물 못 대어 말라 죽어가는 이파리를 볼 때의 그 아찔한 마음은 올해에도 쉬이 잊히지 않았다.

그런 일로 마음만 아플 수 있는 사람은 그나마 여력이 있는 삼남의 농군이요, 그만 못한 영세한 이들은 끝내 빚을 갚지 못하고, 나날이 느는 군입 부양코자 공장이나 양행에 일을 알아보러 철도에 일가의 몸을 맡기고 어디론가 떠나기도 하였다.

“그런 사정을 이곳 도시 사람들은 모르겠지.”

대체 누가 만들었는지 보는 자신이 다 민망해지는 ‘해몽(海夢) 선생과 함께 희망의 바다로!’ 문구가 대문짝만하게 붙은 광고 초안에, 최대한 정중히 다시 해오라는 글을 첨부하며 전봉준이 말했다.

“뭐, 런던 사람들도 그러곤 했으니까, 대도시의 숙명이라면 숙명이지.”

얼마 전 맞춘 돋보기 안경이 아직 어색한 엘러노어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지난 추거에서 청년고공회(靑年雇工會) 이끄는 이동녕(李東寧)에게 인천 참의대부 자리를 넘기고 – 애초에 인천부는 공산당 터전이라, 볏단 사이 ‘공(共)’자 그려진 공산당 깃발만 든다면 김옥균이 나와도 뽑힌다고 농담들 하곤 하였다 – 당사 가까운 마포에 새로 집 구하여 상경한 전-마르크스 내외였다.

대원군 떠난 후 운현궁은 완흥군(이재면)의 것이 되었는데, 가담항설로 논하기를 장종대왕(사도세자) 추숭이 실은 성상의 친형 되는 이에게 군호를 주기 위함이라 할 만큼 혈육의 정이 도탑다지만, 그렇다 하여도 본래의 석파대감 계시던 자리를 모두 메우기에는 한참 부족하였으며, 또 재면 역시 종친으로서 아버지의 하던 일을 이어가서는 아니 됨을 알 만큼은 족히 되었다.

거기에 오경석이 모든 당직 내려놓고 은퇴하면서, 아무리 도성 지척이라지만 엄연히 다른 부인 인천에서 한양 오가며 만민공산당 안팎의 일을 모두 처리하는 것도 곤란하게 된바, 여러 사람 채근 못 이겨 이리 집을 옮기게 된 것이었다.

“그럴지도. 여하간 다녀올게.”

“몸조심하고. 요새 부쩍 무서운 이야기들도 많이 나오던데.”

“이제는 대놓고 걱정도 하네. 오래 살고 볼 일이야.”

한양의 민총이 나날이 늘고 있었고, 그들의 살림살이는 날로 복잡해지기에, 옛날 포도청의 허술함이었더라면 좌우포도청의 모든 포졸이 항우장사였더라도 모두 다스리기는 역부족이었을 터였다.

허나 지금도 겨우 버티는 정도라, 본격적으로 늘기 시작한 인구가 일거리 찾아 도시로 몰리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잡다한 죄인들도 늘고 있었다.

옛날에야 운현궁에 마땅히 바쳐야 할 품이나 삯도 내지 않고 그처럼 행악하는 간특한 무리가 있을 때면 법도를 아는 – 그리고 더 정확히는 저들 목숨줄 쥔 이를 아는 – 강호의 협객들이 스스로 처리했겠지만, 지금은 그 차마 공론으로 말할 수 없는 뒷골목의 유제(遺制)도 조금씩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어디 멀리 가는 것도 아니고, 남대문 안쪽 다녀오는 건데.”

“그래도. 네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내 정계 장악의 꿈에 차질이 생긴다고.”

독일과 영국의 후예로서, 유일한 외국인 국회의원이 프랑스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언제고 때가 되면 자신도 고시를 보아 마 진사 소리 듣겠다는 것이 근래 엘러노어가 하는 농담이었다.

물론 간혹 독일 여인네 말투로 나와 섬뜩한 진담처럼 들릴 때가 있기는 하였지만, 엘러노어로서는 추거철마다 뜻 이루지 못한 남편이 부쩍 어깨 무거운 듯해 던지는 말이었다.

“하하... 그래. 적당히 앞가림하는 한에서 열심히 할게.”

그렇게 저를 걱정하는 아내라면, 인력거 타고 다니라며 용돈은 좀 더 주어도 되지 않겠느냐며 치고 들어갔으면 어땠겠는가 하는 생각이 전차 기다릴 때에야 겨우 들었으니,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할 일이었다.

올해 추거로 영의정 자리에 오르게 된다면, 훗날 대비하여 미리 전직 총리에 대한 예우로 관에서 쓰는 자동차 한 대씩을 내려주는 그런 법을 만들자고 제의하면 어떨까, 실없는 생각을 할 무렵 전차가 앞에 와서 섰다.

옛날 인천부에서 도성 오가던 때부터 전차를 애용하였으니, 이제 해몽 선생 오셨다고 아는체할 사람들이 적지 않으련만, 금일은 남의 눈을 피해야 할 사정이 있는 고로 귀국한 이래 좀처럼 입지 않는 양장에 모자까지 썼다.

그러므로 옆에 앉은 이가 영감 소리 들으며 궁도 자주 오가는 사람인 줄 꿈에도 모르는 주변 사람들은 늘 그렇듯 저들 할 말을 떠드는데, 추거가 올 겨울임에도 – 향시 통과하는 사람이 늘면서 재작년 참의원에서 법을 정하기를, 추거는 농한기에 하는 것으로 못을 박았다 – 그런 이야기 대신 다른 잡다한 얘기들을 열띠게 늘어놓고 있었다. 그 덕에 귀동냥만 한 사발이라 심심할 틈은 없었다.

도회의 사람들이 농사의 풍흉 대신 관심 가질 일이라면, 다음날 신보로 또 온갖 기이한 나라 안팎 사정이 소개될 때까지 모두 늘어놓아도 부족할 것이다.

예컨대 경양대군이 이왕이면 나라 밖에서 배필 구하려 한다는 소식 전해지고서 미국 전역이 뒤집어진 이야기는 어떠한가?

은연중 창녕부부인 조별단의 예를 생각하며, 그렇게나 태조대왕처럼 늠름하고 헌걸차다는 경양대군 대감의 눈에 혹 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던 한양의 처자들로서는 한숨으로 구들장 꺼뜨릴 일이련만, 그 외 사람들에게는 그저 흥미로운 일이었다.

물론 나랏님의 아들 되시는 분 이야기이므로 거론할 때 정중함을 잃어서는 아니 되겠지만, 조선국에 태어나 구중궁궐 안 소식 궁금하지 않게 여기는 자가 – 애초에 그 안에 사는 사람을 제하면 – 얼마나 있겠는가?

그런데 저들 나라에 – 공식적으로는 – 종친이나 귀족이 따로 없는 미국에서 또 그 소식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으니, 다시 태평양 건너오는 메아리 같은 소식은 그 자체로 흥미진진한 것이었다.

아무리 조선이 동양의 중요한 나라이자 문명의 동반자라지만, 대륙 반대편 황인 국가임은 변함없는 사실이었기에 정작 유럽에서는 흥미는 끌지언정 진지하게 여기는 왕실은 없었다. 멀쩡히 군주가 있는 중국도, 일본도 옆에 있는데 굳이 유럽에서까지 혼처를 구할 리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허나 근엄한 아주의 식자들은 모두 궁금한 마음에 몰래 수소문은 할지언정 겉으로는 이를 입에 담지 않고, 그나마 가능성 높을 아이신기오로 황족 안에서는 너무 격이 높은 사람을 보내도, 낮은 사람을 보내도 머리 아픈 일이라 – 보낼 만한 혼기 된 처녀가 있는지는 논외로 치더라도 – 역시 말을 꺼내지 않고 있었다.

그러므로 경양대군은 저의 꾀가 맞아떨어졌다 여기며 은근히 기쁘게 여기고 있었는데, 엉뚱한 미국에서 관심을 보인 것이다.

유명한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재산깨나 있는 총각은 반드시 아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진리’인데, 평범한 여인이 귀한 집 자제 만나 출세한다는 이야기에 드러내놓고 열광할 수 있는 나라가 미국이었다.

그리하여 당대의 절세미인 이블린 네스빗(Evelyn Nesbit)이 청혼을 생각하고 있다느니, 샌프란시스코의 평범한 여급이 동양의 귀공자를 만났다는데 혹시 그 사람이 모두가 생각하는 그이 아니냐느니 하는 이야기가 마구 신문에 실리고 있었다.

물론 아예 ‘상류사회(Vanity fair)’의 실정과 어긋난 이야기는 아니었다. 저에게 집착하는 철도재벌 2세 소우(Harry K. Thaw)에서 벗어나고자 네스빗이 정말 그런 생각을 품고 있던 것은 사실이었고, 또 자타공인 극동 전문가가 된 시어도어 루즈벨트도 그해 여름 뉴욕에서 막 데뷔탕트를 마친 질녀 엘러노어(Anna Eleanor Roosevelt)에게 비슷한 얘기를 꺼낸 적이 있었으므로. (엘러노어가 이미 먼 친척뻘 되는 프랭클린(Franklin Delano Roosevelt)와 눈이 맞았음은 꿈에도 모르는 시어도어였다.)

여하간 백분지일만큼의 진실과 나머지의 과장이 섞여 온통 난리였는데, 하물며 대를 이어 동화 속에 나온 듯한 사랑 이야기를 전하였던 조선 왕가였으니 말 꾸미기에는 금상첨화라. 그리고 다시 태평양 건너 조선에 그런 호들갑이 한번쯤 걸러서 전해지니 조선 사람들 생각에도 퍽 재미있는 사정이었다.

그 외에도 온갖 기이하고 이목 끄는 잡설들이 범람하니, 지금 그의 옆자리에서는 성주 한주학원에서 소백산에 세운 관성대(觀星臺)에서 형혹(화성) 관측한 이야기를 두고 갑론을박을 또 벌이고 있었다.

“예끼, 그것이 정녕 운하라고 한다면 그 임금은 마치 수 양제와 같은 작자일 터인데, 설령 그 땅에 사람 같은 영물이 또 있더라도 외알씨(H. G. 웰스) 쓴 소설마냥 포악하고 간특한 무리 아니겠는가.”

“그러나 섭영을 보면 분명 물길이라 하는데, 운하든 수로든 잘 파면 만백성의 보배가 되기 마련 아닌가? 외려 옛 중원의 대우(大禹) 같은 이가 있어 척박한 땅에서도 능히 살아갈 수 있게 한 것일 테니 함부로 혼암(昏暗)하다 할 일이 아닐세.”

그 떠돌이별을 억리경(億里鏡, 천체망원경)으로 자세히 들여다 보니 마치 바다와 운하 같은 것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하여, 미리견의 학자 노씨(퍼시벌 로웰)와 구주의 여러 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있다 하였다. 그러던 차에 한주학원에서 노씨의 설을 지지하는 말을 꺼내니, 대서양을 오가는 논쟁에는 큰 영향이 없겠지만, 조선의 식자 및 식자연하는 이들에게는 흥미로운 사안이었다.

이렇게 재미있는 얘깃거리가 많으니 풍흉이 어떻고 하는 이야기가 얼마나 중히 들리겠는가? 앞서 집에서 나눈 문답이 떠올라 피식 웃었다.

“선혜청. 선혜청이오.”

그런 사정은 알더라도 신경쓰지 않을 장차수가 차를 세웠다.

선혜청이 문 닫은 지 오래이므로 이제 지명으로만 남았을 뿐이었다. 요즘의 시쳇말로는 이태동(異胎洞)이라고도 한다는데, 한몫 챙기려 넘어온 국외인이라면 모를까, 아비가 코 높고 살갗 색 다른 사람일 뿐 똑같은 조선 사람인 이들 입장에서는 다분히 듣기 싫을 말이었다.

어쨌든 그쪽에서 도로 골목으로 한참 들어가야 나오던 ‘작은 파리’가 점점 넓어져, 옛 선혜청 있던 숭례문 쪽으로 뻗어나와 하나의 동을 칭할 만하게 되었으니, ‘이태동’이라는 말이 ‘조금은 덜 작은 파리’보다는 남의 입에 잘 붙기는 했다.

확실히 생김새 다른 사람들이 여럿 오가는데, 농협의 일 때문인지 아니면 도저히 농사는 못 짓겠다며 도시로 나온 것인지 알 수 없는 유대인들도 한 움큼. 한껏 꾸민 것이 과연 멋을 위함인지 밥벌이를 위함인지 알 수 없는 이색(異色) 여인 등등. 저 이름난 심양의 외국인 거리만 하겠냐만 여기도 제법 다채로웠다.

조금 더 들어가면 이제는 조용한 주택가가 된 본래의 ‘작은 파리’가 나오는데, 그 중 꽤 공들여 지은 양옥이 그가 만나러 온 사람 사는 곳이었다.

“흠흠. 계시오?”

“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선생님. 얼른 들어오시지요.”

나온 사람은 김옥균 보좌하는 안느장 푸와송-킴이요, 이곳은 작년에 그가 미국과 조선 피가 섞인 아내를 만나 정착한 보금자리였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고균 선생님 댁이나 저희 당 당사 대신 저희 집에 직접 찾아오시겠다 했을 때는 깜짝 놀랐습니다.”

“공산당 버릇이외다.”

저와 아내 머물던 인천 집에서 오세창과 김가진 등을 데리고 공산당 나아갈 길 궁리하던 시절 생각하며 한 말이었는데, 만약 공산당 뒤에 운현궁과 공안서 있던 시절에 이런 말을 했더라면 조금은 다르게 들렸을 테다.

“혹시 당이나 고균 어른께 해가 될까 두려워 미리 선생을 만난다는 것을 고했으니 양해를 구합니다.”

“그 정도야 무어. 나라도 그리했을 터이니 너무 염려치는 마시오. 실은 우리 당이나 다른 신보의 눈길 때문에 이리 사가(私家)로 찾아온 것이라.”

“그러시군요.”

품에서 문서철 하나를 꺼내며 전봉준이 말했다.

“이번 추거 전에 무언가 일이 일어날지, 아니면 다음 내각에서 벌어질지는 모를 일이지만, 전국에 우리 당이 뻗어 있다 보니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드는 바가 있어서 말이오. 하여 시무책을 만들어보았는데, 아직 나라의 정책으로 삼기에는 엉성하기 그지없지만 미리 이렇게 전하여 개화당에 알려주고자 하오.”

“무슨 뜻에서입니까? 저희보다야 저쪽 자유당을 찾아가심이 더 나았을 텐데요.”

조선말을 머리 굵은 뒤에 배운 사람답게 안느장이 직설적으로 물었다.

추거가 점점 나라의 법도로 굳어져가면서 생기는 현상 중 하나가, 공산당과 자유당이 점차 하나로 붙는 것이었는데, 여기에 불만 품는 이들이 상호간에 많았지만 ‘그래도 개화당보다는 낫다’ 하는 이들이 더 많았다. 그리하여 군현 추거에서 서로 조금씩 보태주곤 하였고, 총리 추거에서도 그런 마음이 꽤 있었기에 지난 추거에서 김홍집이 무난히 당선된 것이었다.

당장 그로 인해 지난번에 고배 마신 전봉준을 비롯해, 지도부에서는 썩 그런 동향을 좋게만 보지 않았는데, 그래도 당장 자유당과 공산당이 뜻 같이하는 부분도 적지 않고,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단자 던지는 사람의 마음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보면 알겠지만, 문제는 경제요. 그런 일이라면 개화당이 더 나으니까. 내 작심하였으니 다음 추거의 향방이 어찌 될지는 모르겠지만, 세상 일은 모르는 것이므로 이렇게 미리 전해주는 게요.

일이 벌어진 뒤에 전한다면 그때는 내 의도를 어쩔 수 없이 의심하게 되지 않겠소. 정당들 사이가 옛 당파 싸움과 닮은 면이 있다면 이런 것이겠지.”

“예.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황란의 여파가 가시고 여러 도시에 ‘경제개발’이 이루어지면서 점차 같은 나라 안에서도 대읍과 농사 많이 짓는 군현 사이에 소득을 비롯해 여러 격차가 생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아직은 매우 허술한, 계책의 원안이나 겨우 될 법한 방안이오. 그렇지만 설령 다음 추거에서 지더라도 나라에 큰 어지러움이 생기지 않게 하려면 취해야 할 방편이기도 한 듯하니, 가볍게만 여기지는 말아주기를 청하오.”

이게 정말 그렇게까지 중한 일인가, 전봉준의 진심을 읽는 것과는 별개로 의심을 거두지 못하는 안느장이었다.

몇 달 뒤, 죽 이어진 가뭄 동안 계속된 수차 등등 장비의 힘과 역시 늘어난 비료의 양으로 인해 기록적인 대풍이 찾아오면서 그 의심은 비로소 거두어졌다.

처음에는 좋게만 여겼는데, 곧장 쌀값이 폭락하기 시작하면서 이곳저곳에서 다툼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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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블린 네스빗은 사진이 보급되고 대중매체의 영향력이 확산되는 시기에 등장한 스타로, 아버지를 일찍 여읜 뒤 가난하게 살다가 사진술의 보급으로 막 생겨난 개념이었던 ‘패션 모델’로 데뷔하게 되면서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로 인한 유명세를 혹독하게 치르게 되었는데,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재벌 2세 소우로부터 집착적인 구애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재정적인 문제를 고려해 소우와의 관계를 계속하기로 마음을 먹었는데, 여전히 집착을 버리지 못한 소우가 네스빗에게 구애했지만 결국 소원해진 사이였던 건축가 스탠포드 화이트를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네스빗 본인도 황색 저널리즘의 피해자가 되고야 말았습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아내이자, 가장 존재감이 뚜렷했던 영부인으로 지금도 회자되는 엘러노어 루스벨트는, 원 역사에서도 1902년 여름 먼 친척 프랭클린 델라노 루스벨트를 만나 사랑에 빠졌습니다. 이후 삼촌 시어도어의 도움을 일부 받아 결혼까지 하게 되고, 프랭클린이 소아마비로 하반신 불수가 된 이후에도 빈틈없는 정치적 동반자로서 그를 지원하는 한편 독자적인 사회운동가 활동으로도 이름을 남기게 됩니다.

‘화성의 운하’는 이미 19세기 후반부터 널리 퍼진 논쟁의 대상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퍼시벌 로웰처럼 화성 표면의 줄무늬가 인공적인 운하라고 보는 쪽이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분광법을 비롯한 당시의 관측 기술을 근거로 삼아 생명체가 존재하기 어렵다고 주장하는 의견도 존재해 팽팽한 논쟁이 이루어졌지요. H. G. 웰즈의 『우주전쟁The War of the Worlds』(1898)에서 생명체가 존재는 하지만 척박하여 장기적으로 거주할 수 없다는 설정을 취한 것은 나름의 중도 노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와는 별도로 화성 표면의 어두운 부분이 바다 혹은 호수일 것이라는 생각은 17세기 하위헌스에 의해 발견된 후 상당히 오랫동안 이어졌습니다. 특히 운하설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이탈리아 천문학자 스키아파렐리(G. Schiaparelli)는 광학적 관측을 바탕으로 화성의 ‘지도’를 만들기도 했는데, 그가 바다라고 생각했던 부분은 사실은 오히려 고지대였고, 그가 수로(나중에 ‘운하’로 오역된)로 추정한 것들 역시 대부분 착시였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하지만 그가 붙인 지명 상당수는 지금도 남아있는데, 일례로 하위헌스가 발견한 ‘모래시계 바다’는 스키아파렐리에 의해 리비아 연안의 시드라 만에서 따온 대(大)시르티스(Syrtis Major)로 명명되었고, 지금은 그 가장자리인 예제로 크레이터에 NASA의 퍼서비어런스 로버가 착륙해 있습니다.

잘 알려진 공산주의의 상징 ‘낫과 망치’는 원 역사에서는 1895년 칠레에서 처음 사용되었지만, 본격적으로 널리 퍼진 것은 역시 소련의 등장 이후입니다. 그 전에는 망치와 쟁기, 단검 등 다양한 도안들이 등장했고, 또 소련 등장 이후에도 각국 공산당에 의해 개별적으로 조금씩 수정이 이루어졌지요. 작중에서는 딱히 복잡하지 않은 공(共)자가 먼저 마크로 쓰이게 되었는데, 창힐 선생이 본다면 꽤 흡족하게 여길 듯합니다.

맥안공행의 <양품채단>이 따온 미국의 최신 상술이란, 카탈로그를 통한 우편판매를 말합니다. 빠르게 발달하는 소비문화에서 상대적으로 배제되어 있던 미국 농촌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시어스(Richard Warren Sears)가 시작한 것으로, 처음에는 시계와 보석 판매로 시작했다가 점점 범위를 넓혀 1894년에는 재봉틀과 자전거까지 다루는, 오늘날 ‘홈쇼핑’의 원류가 되었습니다. 카탈로그가 가장 두꺼웠던 1895년에는 총 쪽수가 532페이지에 달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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