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257화 (257/320)

84. 앵무는 포유류에 속하느니 (3)

나이 오십이면 슬슬 하루아침에 쓰러짐도 무리가 아닐 때였다. 어깨 뻐근하고 뼈마디 욱신거림이야, 처음 늙어보는 이들이나 놀라 두려워할 정도요 팔순 무렵 삭신 쑤시는 것에 비하면 아이들 장난이지만, 또 사람마다 수명이 다르니 이 몸이 어떠할지는 딱 잡아 단언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무리 귀남 본인이 마음 편히 산다지만, 그래도 나라 걱정은 가볍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요, 또 옛적 군밤 팔던 때보다야 여유롭다지만 임금 노릇이 마냥 한가한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물론 힘닿는 만큼 오래 살기를 바라는 것이 귀남의 욕심이어서 – 전하는 이야기로 삼천갑자 동방삭도 죽기 싫어 저승사자 피해다녔다지 않은가 - 곁가지로 몸에 좋은 보약이 무에 있는가 슬슬 찾고는 있었지만, 만일 불행이 불시에 닥친다면 장성한 세자가 보위를 이어받아야 할 것이니, 귀남 본인 생각에 과중하지 않은 선에서 조금씩 나라 돌아가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 하여, 끝내 결착을 내지 못하였단다.”

조선국이 장차 큰 난리를 맞이하여, 다른 구주 나라들과 같은 반열로 오르기 위해서는 결국 지금처럼 도의가 좋다하여 마구 따를 수는 없다는 것이 여러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천하의 형세가 급변하는 비상한 일이 그리 자주 있는 것은 아닌데 – 자주 생긴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문제였다 – 이를 조선국 국운을 한층 더 드높이는 발판으로 삼지 않는다면 또 언제 그러한 비상(飛翔)의 때가 올지 모르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도의냐 실익이냐 따지는 것이 어제오늘 일이겠냐만 그 경중은 이전과 같지 않았다.

“세간에서 문충공을 잇는 나라의 동량이라 하는 명신 넷이 모두 모였으니, 삼가 생각건대 시일을 더 두시면 스스로 명안이 나오지 않을지요? 천하대란이 정녕 일어난다 한들 당장 내일모레의 일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모두가 깊은 꾀를 내니, 마구 엉킨 실타래와 같게 되어 더욱 어려움이 있더라.”

그때, 갑작스런 ‘깩깩’ 소리가 부드러우나 근엄한 방안 분위기를 깼다. 새장 속 앵무새였는데, 줄곧 저를 챙겨주던 주인이 저 엉뚱한 중늙은이에게 관심을 주고 있으니 그것이 새삼 억울한 모양이었다. 두 사람 눈길이 그리 쏠리니 애매하게 눈치 밝은 새가 저의 재주를 뽐냈다.

“깍. 하옵나이다.”

“근래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재주 뽐내는 일이 늘다 보니, 익숙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줄곧 저리합니다.”

“뭐, 금수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느냐.”

세자가 구주 돌아볼 적, 카이저의 ‘배려’ - 실은 가만히 베를린에 두었다가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른다는 걱정 – 로 바쁘게 백림(베를린)의 사적들을 죽 돌아보았는데, 기실 별 생각 없던 세자와 두 일행으로서는 좋기만 한 일이었다.

그렇게 찾아간 곳 중 하나가, 옛날 보로사 임금이 저의 사냥터를 널리 열고 그 안의 진수(珍獸)들을 백성과 함께 즐기고자 만들었다는 백림 명승 박물학원(博物學園, 베를린 동물원)이었다. 거기서 문득 생각한 것이, 부쩍 근래 우울해하는 어머니께 기이한 짐승을 구하여 곁에 두게 하면 좋을 듯하여, 귀국하자마자 수소문해 앵무를 구했다.

헌데 정작 구해와 바쳤더니, 중전 민씨 곁에 두기만 하면 재채기를 하는 것이었다. 결국 돌고 돌아 세자 부부가 키우게 되었는데, 엉뚱한 경양대군이 퍽 좋아해 열심히 사람 말을 가르쳐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대신들도 논쟁하던 중에 저 새 이야기를 하더라.”

“그렇습니까?”

두어 달 사이에 동궐 명물이 되었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사람 말을 한다고 사람이 아니듯, 도의를 말한다 하여 모두가 도의를 지키게 되는 것도 아니라 하였으니, 그들 논의에 비유로 끌어온 것이다.”

“그것이 이 이야기와 어찌 이어지는지, 소자 불민하여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

“걱정 말거라. 나도 잘은 따라가지 못하니, 지재의 높고 낮음은 하늘이 내리는 것인데 무슨 부끄러움이 있겠느냐?”

하면서 후에 김윤식이 정리한 바를 일러주었다.

“그러니까, 그 대만 땅 토인에게 그들 조상의 땅을 돌려줌과 이어지는 일이다. 고균의 말로는 그 땅 취득함에 있어 청국 관헌들을 끌어들인 것은 참이되, 지금 세간에서 말하는 것처럼 부정한 재보가 오고가지는 않았다 하는데, 그런 사정이 어찌 되었든 명분을 따른다면 사정 모르고 남의 선산을 침범한 것과 같으니 돌려줌이 가당하다.

허나 그것이 빌미가 되어 다른 땅 곳곳에서도 비슷한 주장이 나오게 되면 그때는 어찌하겠느냐? 대만 땅에서 나는 이윤이 줄게 되면 결국 아국의 경기 또한 가라앉게 되니, 바른 도를 따르다 민생이 어려워짐이 이와 같다 하더구나.”

대만은 엄연히 청국 땅으로 건성(建省, 성을 둠)한지가 오래인데, 실제로 한인들이 넘어와 경작하는 곳은 남서쪽 연안이 전부였다. 그러므로 처음 대만 땅이 조·일 두 나라에 열렸을 때, 자연히 그 외 땅을 먼저 빌려주게 되었으니, 한인 없는 곳 주인은 곧 생번(生蕃)이니 고산족(高山族)이니 하는 그 땅 원주민들이었다.

그들이 숫제 문명을 모르는 이들이라면 모를까, 교류가 오래되어 바깥 사정에 밝지는 못해도 대략은 알게 되었으니, 저 추장 와단이 북경이나 복주(福州) 아닌 이곳 도성에 와 통사정함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대란에 대처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도의에 따라 처신한다 하면 그 싸움을 말리든, 아예 관여하지 않든 해야 하겠으나, 그리하여 천재일우의 때를 놓치고 지금의 기세를 잃게 되면 그 또한 실리(失利)가 실덕(失德)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싸움으로 구주 나라들의 힘이 소진되기를 기다려 이익을 취하든, 그들 싸움에 적당히 발 걸쳐 실리를 얻든, 아니면 아예 말려서 최대한 다른 쪽으로 김이 빠지게 하든 무언가 해야 한다는 것은 공통된 의견이었다.

그러나 무엇이 가장 올바른 길인가 하는 데 있어서는, 무엇이 가장 이로운 길인가와 더불어 끝내 생각이 갈렸는데, 쟁점은 여기에 있었다.

“그리하여 나온 이야기가, 지금 구주 나라들이 우리와 함께 인의를 논한다고 하여도, 그들에 대한 의리를 반드시 끝까지 다하여야 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저 새에 이야기가 미친 것이지.”

“앵무가 사람은 아니라 하지만, 만약 말을 완전히 깨쳐 자유자재로 말을 나눌 수 있게 된다면 사람처럼 인의로 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 말 하는 짐승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를 놓고 동생들과 종종 가볍게 얘기 나누곤 하던 세자가 말했다.

“허, 다음 번에 대신들을 만나면 전해주어야 할 말이다. 절묘한 답이로구나.”

김홍집 정리해준 논지대로 따라가며 생각해보면, 천하를 모두 저의 편으로 삼겠다 하면, 천하를 위한다는 것이 꼭 명분에 그치지만은 않게 될 것이었다.

“아직까지는 멀리 떨어져 있어 같은 부류에 속하지 못하였다 하면, 이제부터라도 사해(四海)를 모두 동류(同類)라 칭하면 될 일이지.”

“아바마마?”

“아, 혼잣말이니 너무 염두에 두지 말거라.”

그러나 어느 안전이라고 염두에 두지 않겠는가.

“사해가 동류라 하면 확실히 경양대군은 기쁘게 여길 듯합니다.”

“그 무슨 말이더냐?”

잠깐 고민하다가, 어차피 자신이 아니어도 경양대군이 저의 입으로 발설할 ‘해외결혼’ 이야기라 생각하며 세자는 직고하였다.

날 뉘엿뉘엿 저물 무렵, 『해동일보』 국사(局舍, 사옥) 옆에 검은 자동차 두 대가 섰는데, 한 대는 당당히 정문 옆에 섰고, 다른 한 대는 길게 드리운 그늘에 조용히 숨었다.

“직접 만남은 오랜만이구려, 일당.”

“고균 선생께서도 그간 무고하셨는지요.”

싱긋 웃으며 두 사람이 인사를 주고받았는데, 속마음은 피차 알고 있었으므로 그 웃음이 냉소 아닐 리가 없었다.

“아주 유고(有故)하였지. 남의 가르침 덕에 문중의 허물을 찾았으니 그대에게는 고마울 뿐이지만 말이오.”

“오직 의로움을 위함이니, 무슨 공을 탐하겠습니까?”

날 숨긴 말이 몇 차례 오갔다.

“『해동일보』에 싣고자 하는 기사가 있어 청탁코자 찾아왔다오.”

“『경화시보』와 같은 훌륭한 신보를 두고 저희 부족한 곳을 찾아주시니, 저희야말로 고마운 일입니다. 다만 채사하는 사람으로서 곡절은 궁금하다 아니 할 수 없겠습니다.”

“그 대표(다바오) 부민(部民)에게는 동차공사에서 잘못 뉘우치는 뜻과 함께 보상을 전하고, 그들이 정하는 일정한 넓이의 땅에 있어서는 속히 물러난 뒤 추후 범하지 않기로 약조하기로 했소이다. 우리 문중이 유책(有責)하니 어찌 내가 관여하지 않겠소.”

대개 부정한 일이 있으면 금력으로 무마함이 개화당에서 자주 택하는 방편이었다.

김옥균 자신이야, 장동 김문 이어가는 사람으로 부족하지 않을 정도의 금은보화만 있으면 족하니, 하옥대감이 그랬다는 것처럼 곳간을 은으로 채울 것까지는 없었다. (애초에 개화된 부호라면 자신의 재보는 집안 곳간이 아니라, 천하 곳곳의 금고에 나누어 두어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하루이틀이요, 더구나 조일동차공사는 이름 그대로 조선국만의 것도 아닌데, 한때 그러하였던 것처럼 금으로만 모두 위무할 수는 없을 것이요, 더구나 저의 이득을 위하여 공사의 수익을 덜어낸다면 그 또한 문제될 것이었다.

“장차 대만 산중까지 우리나 일본국 사람들의 손길이 닿을 것이오. 그리 되기 전 미리 그 땅의 사람들과 널리 교통하여, 이와 같이 서로에게 도움되는 약조를 널리 맺는다면, 지금 당장 동차공사의 이익이 주는 것 이상으로 널리 발을 뻗을 수 있을 것이외다.”

“대만 땅에 발 걸친 다른 이들이 가만히 있지만은 않을 듯한데, 선생께서 미리 헤아리신 바가 있으시겠지요?”

“물론이외다. 결국 이익의 논변으로 따지면 다툼이 일어날 수밖에 없으니 도의를 염두에 두어야 하는데,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도록 현지의 사람들과 역시 그곳에 나간 조일 양국 사람들, 그리고 대만성 관헌까지 모두 아울러 잘 중재하여야 하지 않겠소?

마침 누구보다 앞장서서 그들 토인의 어려움을 살피고, 그들을 위하여 목소리 내어준 등불과 같은 이가 계시기도 하고.”

그제야 본론이 나오니 이완용의 손에 절로 찬 땀이 맺혔다.

그러나 낚인 물고기도 몸싸움을 하는데 김옥균을 칠 때 하등 반동 없으리라 생각한 이완용은 아니었다.

“과찬해주시니 부끄러워 얼굴 들기가 어렵습니다. 그저 신보 운영하는 재야의 사람으로서 할 일을 다하였을 뿐이지요.

그런데 그러한 일을 함에 있어서, 다른 벌열과 필히 부딪혀 분란이 일어나지 않을까 두렵군요.”

그 벌열의 맨 앞에 있는 것이 장동 김문일 테요, 필히 부딪힌다 함은 예견이 아닌 경고였다. 그러나 ‘내 순순히 당할 것 같으냐. -너희 집안 부정한 것의 증좌가 여럿 있으니 얼른 세운 가시를 도로 숙여라’ 하는 뜻에도 김옥균은 동요하지 않고 수긍하였다.

“그렇소. 그러나 그 또한 저들의 부덕, 아니, 이 사람의 부덕이오. 그러니 혹 부정한 재물이 있다면 주인에게 돌리고, 부정 일어날 구석이 있다면 곡직을 바로잡아야 할 것이오. 그것이 하루아침에 될 것은 아니나, 완료하기 전에 어찌 고개 들고 민심을 끌어올 생각을 품겠소? 당장 다음번 추거에도 이 사람 대신 금석(홍영식)을 개화당에서 내세우기로 하였으니 미리 알고 계시오.”

공안서 들어가면 둔갑술 배운다는 농담이 있었는데, 이런 말 내놓는 것을 보니 눈앞의 사람이 김옥균이 아니라 둔갑한 공안서 사람인가 싶어 그 실없는 농이 문득 떠올랐다.

당장 저의 총리 시절 국법을 고쳐 임기를 두 해 이어가려 했던 사람이, 스스럼없이 추거 욕심 내려놓겠다 하니, 속임수가 아니라면 비장한 각오가 있는 것일 텐데, 아마 전자 아닌가 생각하고 속셈을 읽는 사이 또 한 번 채찍같은 혀가 움직였다.

“물론 오래 묵은 폐단을 파헤치는 것이니, 올바른 눈으로 잘잘못을 가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오직 사람들 눈길 끌고자 요설 내놓는 이들도 있을 것이오.

허나 이 모든 것이 우리 조선국과 아주 이웃들을 위함인데, 이미 높으신 대군께서도 그런 뜻을 현양하셨으니 미혹될 구석이 얼마나 오래 가겠소?”

“무, 무어라 하셨습니까?”

“허어. 신보 운영한다는 사람이 소식이 이리 늦어서야 되겠소?”

물론 그 소식 아는 사람이 지금 한양에 다 합쳐 스무 사람이 채 되지 않을 것이므로 이완용으로서는 억울한 반문이었다.

경양대군의 약은 생각에, 굳이 전례를 살필 것도 없이 멀쩡한 저의 나라 사람들을 내버려 두고 남의 땅에서 배필 구할 왕실이 있을까 싶었다. 이대로 몇 년 조용히 있다 보면 저를 귀찮게 하는 – 물론 그 뒤의 애틋한 마음과 걱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 주상과 어머니 중전도 결국 조용히 뜻을 거둘 것이요, 그 사이에는 속히 가약 맺으라는 소리를 면할 수 있을 테니 손해 볼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사정 모르는 귀남은, 아무리 자신이 원해서라지만 저의 개인 사정이 바깥에 알려져도 좋다고 흔쾌히 답하는 막내아들이 퍽 대견하였다.

어쨌든 이 소식이 퍼지게 되면, 대만(臺灣)인지 대갑(臺岬)인지 남쪽 바다 너머의 사정보다 훨씬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될 것이요, 김옥균을 어찌 해볼 여지는 그만큼 좁쌀만해지게 될 것이었다.

“사해가 동포일진대, 어찌 태어난 곳이 조금 떨어져 있다 하여 남으로만 여기겠소? 대군께서 그런 뜻을 밝히셨으니, 조선국에 태어나 종실의 크나큰 은덕 입은 몸으로 그 뜻을 모른 체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외다.”

물론 저 말만을 속에 품은 것은 아니었다.

함께 궁에서 전해들은 이야기를 듣고 번쩍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으니, 금세의 자공이 되겠다 생각한 저의 뜻과 맞닿았던 것이다. 권세 욕심을 잠시 내려놓고 달려갈 만한 목표였다.

물론 김홍집이나 저의 다른 사형들이라면 모를까, 눈앞의 이완용에게 얘기할 만한 것은 아니어서, 매정하게 못을 박으며 김옥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옥균 전별하느라 심력(心力)이 동난 이완용이 푹신한 의자에 무너지듯 앉자마자, 또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휴. 또 무슨 일인가?”

“별일 아니외다. 심려치 마시오.”

평소 관리하는 것과 달리 심통난 본심이 그대로 드러났는데, 문을 발칵 열고 들어오면서 하는 말마저도 이완용의 속을 긁는 사내가 있었다.

“그대는...”

“이름 날리려 나랏일 받드는 것 아닌데 굳이 통성명할 것까지야 있겠소이까.”

그러나 굳이 이름 묻지 않아도 근래 유행하는 – 독일에서 하도 열심히 선전을 한 덕이었다 - ‘덕국주(德國主, 카이저)’ 식으로 흰수염 치켜세운 저 사람이 공안서 총관 김가진임은 알 수 있었다.

“국헌에 언로를 넓히는 뜻이 있으니, 설마 총관께서 이를 모르시지 않으시겠지요.”

기싸움할 여력은 없어 곧장 언론의 자유를 꺼내었는데, 하루이틀 듣는 가락은 아니어서 능글맞은 대처가 돌아왔다.

“물론이오. 그 국법 세우신 분이 누구신데 이 사람이 어찌 사사로이 거스르겠소? 그러나 근래 육조, 특히 병조 안쪽에서 일어나는 일이 새어나가 우리 공안서까지 그 사안이 넘어오게 되었는데, 이에 따라 이곳저곳 수소문하다가 잠시 들렸소.

헌데 와보니 하필 다른 일로 한창 어수선하더이다. 내 보지 않으려 해도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조금 있던데, 어디 가서 함부로 발설하지는 않을 테니 아랫사람들 책을 잡지는 마시오.”

함부로 발설하지 않겠다면 즉 발설해야 할 곳에서는 기탄없이 털어놓겠다는 뜻이요, 그곳이 어디인지는 이완용이 아니라 말단 채사인(기자)이라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터였다.

“정말 원하였다면야, 저기 방구석 그늘 속에서 나타나서 볼 일 다 보고 도로 그림자로 사라질 수도 있겠지만, 일당 그대가 무슨 흉악한 일 범한 것도 아닌데 굳이 그럴 것까지야 있겠소이까.

더구나 전하여야 할 말이 하나 있어, 이리 노곤함을 더하게 되었으니 부디 귀를 기울여주기를 청할 뿐이오.”

“무엇인지요.”

“성현 말씀에 이르기를 하늘을 거스르면 망하고 따르면 길하다 하였소. 그런데 다른 땅 위의 하늘은 어떤지 몰라도, 우리 조선국으로 말하자면 하늘이 분란을 싫어하니, 이를 거스르고 일이 여의치 않다 원망한다면 어찌 현명한 처사라 하겠소?”

자신이 무얼 그리 했다고 그러는가. 하고 원망하기에는 너무나 높은 하늘이었다.

그러나 개인의 설움을 제쳐놓고 보면, 저의 조상 땅을 어찌 바다 건너온 외지인에게 팔 것이냐 하고서 반발하는 이들을 꼬드겨 팔지 못할 것을 팔게 하는 데 있어서는 이완용만한 인재가 없는 것도 사실이었으니, 곧 뜻을 거둔 이완용이 대만으로 향하여 명성 떨치게 된 것도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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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역사 독립운동가들이 한 것으로 유명한 ‘카이젤 수염’은 본디 메이지 일본을 통해 들어온 것입니다. 모든 면에서 프로이센을 따라하려 노력했던 일본답게, 빌헬름 2세가 본격적으로 ‘세계정책’을 추진하며 건함경쟁에 나서자 그의 풍채를 따라하는 유행도 생겼는데, 일본 해군을 시작으로 점차 서민층까지, 그리고 해협 건너 조선까지 번지게 되었습니다. 보기에 멋들어진 만큼 관리가 어려워, 전용 화장품까지 나왔다고 합니다.

베를린 동물원은 본래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의 사냥터로 시작했는데, 이후 호헨촐레른 가문의 여러 군주들을 거치면서 공원 비슷한 기능을 하는 휴양림(‘동물정원 Tiergarten’)으로 변하게 됩니다. 이후 1844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공식적으로 대지와 동물들을 기증해 베를린 동물원으로 개장하게 되는데, 이후 2차대전 말기에 많은 피해를 입기도 했지만 결국 복구에 성공해 지금도 서유럽 최대의 동물원으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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