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밤섬 나라 사람들 (4)
영국 여왕 조문하러 구주 간 세자가 현지에서 일을 벌일 무렵, 아주 일대는 또 다른 일로 시끄러웠다.
“대조선국이 아국의 든든한 벗이니 앞날에 먹구름이 있겠습니까? 항상 감사할 뿐입니다. 안탁과(安琢菓, 사타안다기)로 그간의 힘써주신 바에 조금이나마 보답코자 합니다.”
유구국 관헌 임성공(린 세이코)이 옛적 인연 내세워, 예조 아문들을 두루 돌면서 뇌물 아닌 뇌물을 바치고 있었는데, 물론 제대로 인정 바쳤다가는 유구국 국고도, 또 들통났을 때의 후과도 뒷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다년간 분석 끝에 알아낸바 조선국 치세 비결 중 하나가 달달한 먹거리라는 결론에 이르렀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무리 조선에 양과자 널리 퍼졌다지만, 흑설탕 들어간 그 단맛은 새 주전부리들과 견주어도 떨어지지 않는 것이라, 받는 사람들 마음에 퍽 들었다.
그것을 알아챈 일본국에서도 저들 화과자(和菓子) 싸들고 역시 널리 인정(人情) 나누니, 제대로 분쟁거리로 만들기에는 한쪽은 부담되고 한쪽은 체면 상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이상한 다툼을 하게 되었다.
어찌 되었든 한동안 일할 때 입이 심심할 일은 없어, 부쩍 나이 먹고 허리둘레 늘었다고 걱정하는 영의정 김홍집도 맛나게 먹고서 나중에 운동할 생각으로 꽤 맛나게 즐겼다.
“자, 이제는 일할 때 아닌가.”
기무회의 입시하려 광화문 안으로 들어온 예조판서 유길준을 김홍집이 붙잡아 세운 것도 그 대책을 고심하기 위함이었다.
“후, 어려운 일입니다. 이미 들었으니 모른체할 수도 없으련만...”
예로부터 인정, 그러니까 이런 과자 말고 달피(獺皮)나 인삼 같은 것을 받았다면 하다못해 능참봉 자리라도 하나쯤 내려줌이 도리이니, 나라 사이에 아무리 과자가 하찮은 물건이라지만 받아먹은 이상 언제고 신경써줄 수밖에 없는 이치였다.
더구나 유구국이 어디 멀리 나라도 아니고, 조선과 동일하게 율령 있는 나라이므로, 이것을 아문에 가져다주기 전 필히 진상하였을 것이었다. 저의 앞에서도 과자 전하면서 은근슬쩍 원하는 바를 털어놓고 갔으니, 하물며 성상 앞에서는 어떠하였겠는가.
“인광석(燐鑛石)이 장차 귀물이 된다 하였으니 이번 일은 자칫하면 크고 작은 두 나라의 원망을 살 것입니다.”
“구당(矩堂, 유길준) 자네 말마따나, 그것이 두려웠다면 아예 받지를 말았어야 했네. 그래도 맛은 있더군.”
유구국이 조선과 일본 두 나라와 수호조규를 맺은 뒤에, 무역하는 일이나 고기잡이 등에 관하여 몇 차례 더 장정(章程)을 세세히 정했는데, 일본국과는 특수한 사정이 하나 더 있어, 바다 가운데의 여러 작은 섬들을 누가 관할할 지를 두고 십수 년에 걸쳐 다투어오고 있었다.
개중 유구 말로 ‘우후아가리’, 뜻 새겨 대동도((大東島)라 부르는 무인도가 있었는데, 이름만 크지 실제로는 바다 가운데 암초를 겨우 면한 작은 섬이었다.
거리로 따지면 일본 구주보다 유구에 가까운 것이 만국전도만 보아도 명백하여, 옛 사츠마 쪽으로 이어지는 섬들 두고 다투기도 바빠 양쪽 모두 제쳐두고 있었는데, 얼마 전 서양에서 학문 배워온 일본 젊은이들이 그 섬 답사를 하다가 인광석, 그러니까 서양 말로 구아노(Guano)가 꽤 많이 있음을 발견한바 사안이 불거지게 되었다.
그 소식 들은 유구국이 먼저 대동도는 저들 섬이라 선포하고, 뒤늦게 일본국이 일말의 협의 없이 그리 선언함에 항의하니, 세상 다른 어느 나라에서 싸움 일어나도 조선이 끼어드는 판에 어찌 바로 저들 남쪽 바다에서 일어날 일에 마음 두지 않겠는가.
시간문제라 여기는 두 나라가 한양에 사람과 과자 보냄은 이 때문이었다.
“지금까지의 전후 사정을 살피면, 당연히 유구 땅이라 여기고 넘어갔을 것에 갑자기 일본국이 딴지 거는 모양새입니다.”
“일본국도 그것을 알고 있으니 걱정하여 이리 궁색한 수를 쓴 것 아니겠는가.”
새롭게 아문 아래 편성된 정강사의 첫 번째 일은, 장차 천하 대란(大亂) 일어난다면 그 꼬투리는 어디서 잡힐 것인가 하는데 있었다.
영 울적한 이야기지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요, 또 더할 나위없이 중하면서도 복잡다단한 물음이었다. 그리하여 김홍집 본인이 그 첫 모임에 직접 나아가 명하기를,
‘당장 조석간의 급한 것부터 멀리 백년 뒤의 일까지, 지금 다툼의 소지가 될 수 있으리라 여겨지는 바는 가감없이 적어 내도록 하시오.’
라 하였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라면 역시 구주의 다툼이었다.
이미 구주의 형세가 영국과 덕의지 두 나라 대 법국과 아라사 두 나라가 서로 견주고, 나머지 천하는 그에 맞추어 이리저리 나뉘었으므로, 혹 분란 일어난다면 여기서 한두 나라쯤 가감될 뿐 대개 그대로일 듯한데, 천하 만국 사정이 복잡하게 얽히고 설키기를 그치지 않아 오만 잡다한 사안으로 싸움 불씨 생길 수 있을 것이었다.
또 그 다음으로는 천하 이곳저곳에 저들이 속국으로 삼은 나라들끼리, 혹은 속국이 종주국에게 분란 일으켜 그것이 두 동맹 사이의 크나큰 전쟁으로 번질 수도 있는 일이요, 아니면 정말 사소한 것에서부터 일이 불거져 끝내 전란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것이었다.
이 중 세 번째의 경우에 관해, 정강사에서 후자의 ‘사소한 것’에 들 수 있는 물산들을 죽 열거한바 그 중 대략 앞에서 두 번째 정도에 이 인광석이 있었다.
고작 편복(蝙蝠, 박쥐)이나 바다새의 변이 쌓여 만들어진 것이라 하지만, 쓰임새 무궁하여 특히 시비(施肥)할 때 효능 으뜸가니, 척박한 황전(荒田)도 저 인광석으로 만든 가루를 쓰면 곧 호남이나 길림의 여느 옥토 부럽잖은 소출이 나온다 하였다.
그러므로 반대로 생각하면, 지금은 아니더라도 장래에 천하의 인광석이 동나게 되면 그때까지 그것에 의지하던 농토는 모두 옛적으로 돌아가 크나큰 기근이 일어날 것이었다. 그리고 꼭 그때까지 가지 않더라도 그 광석 산지나 산출량을 두고 싸움이 날 법도 하였는데, 이미 불과 십수 년 전에 그 산지를 두고 남미주에서 큰 싸움 일어나기도 하였음에서 이를 알 수 있었다.
“일본 사람들이 유구를 핍박한 것이 수백 년이니, 아직 그 대동도에서 얼마나 많은 인광이 나올 지는 모르지만 혹 이것을 목줄로 삼아 그간 원한을 갚으려 할까 그것을 두려워하는 것이겠지요.”
“허나 일본국 욕심도 아예 과하다 할 수는 없잖은가. 인광석은 비료와 화약 만드는 데 쓰이니, 둘 다 모두 유구보다 일본에 훨씬 긴요한 것이지.”
“그렇다고 일본국 손을 들어주면 또 유구국은 크게 두려워할 테고요.”
물론 정말 조선이 제대로 중재하겠다고 나선다면야, 예컨대 죽 늘어서서 일본국 구주 섬까지 가는 그 열도에서 섬 두엇을 더 유구에 넘긴다던가 하는 식으로 타협하게 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누구 원망 사기는 참 쉬울 듯했다.
“예판이 되어 올릴 말씀은 아닌 듯하나, 수수방관함은 또 도리가 아니겠지요?”
“우리를 저들 싸움에 끼어들이는 것을 속으로 괘씸하게 여길 수도 있겠으나, 그런 심정이 있더라도 다스려야 하겠지.”
아주에서 가장 작고 약한 나라가 유구국이기에 오히려 그 상징성이 높고, 더구나 열국이 병립한지 오래인 구주로 말하자면 사소한 일에서라도 남의 나라 이익은 줄이고 저들 나라 이익은 늘림이 상례라, 서툴게 서양 물 든 유구 조정에서는 생각하기에, 조선이 모른체하지 않으리라 여겼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일 일어나고 있으니 얼른 끼어들라며, 재촉 삼아 과자를 건네주고 있었으니, 신경은 쓰이지만 어디 가서 뇌물이라 할 수는 없는 딱 그 정도의 적당한 물건이었다.
그때, 이제는 익숙한 낮은 목소리로 내관이 주상전하 납심을 고하였다.
“오, 일찍들 오셨구려.”
소략한 예를 갖추는 두 사람에게 귀남이 인사 건넸다.
“그래, 무슨 국사를 논하고들 있으셨소?”
대동도 다툼 이야기를 직고하였더니, 귀남도 대략 그저께 구주 소식 들려왔을 때부터 입에 붙은 큰아들 자랑은 잠시 접어두고 그 자리서 잠시 생각에 빠졌다.
자신도 전해듣기로 그 구안호인지 인광인지 하는 것이 참으로 긴요한 귀물이었는데, 만약 그렇게 귀하였다면 언제고 전생에서 소식을 들었을 법도 했다.
허나 비료를 원조로 받는다던가, 어디에 비료 공장을 세운다던가 하는 얘기는 귀동냥으로 들었을지언정, 그 비료 원료로 인하여 한국이나 어느 다른 나라가 곤경 처했다는 말은 도통 들어본 바 없었다.
그러므로 적어도 반백 년 안에 필히 귀남 그가 아는 비료가 창안되어 이러한 문제를 거론하는 것 자체를 어리석게 여길 때가 올 터인데, 그러니 이번 일에 있어서도 – 마음 같아서야, 이런 소소한 일은 일본국 골탕먹는 쪽으로 일관함이 어떻겠느냐 제의하고는 싶었으나 – 지금뿐 아니라 미래의 일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성심을 헤아릴 수는 없는 김홍집과 유길준은 아마 저들과 마찬가지로 양편 사이에서 고심하시는가보다 하고 있는데, 그때 아들 자랑하던 가락이 떠오른 귀남이 말했다.
“금번에 세자가 효유한 무군론자들이 실은 어느 한 나라의 백성으로 살기를 원하지 않을 뿐 딱히 파륜(破倫)한 자들은 아니라 하니, 오히려 나라 사이 다툼에서는 사심 없이 나서리라 믿을 수 있지 않겠소? 듣기로 그들이 이제 저들의 설이 허황되지 않음을 입증코자 그럴 자리를 찾고 있다는데, 대동도 그 섬에 이들을 불러들여 광무에 힘쓰게 하면 어떻겠소?”
영국 여왕 조문하러 구주 간 세자가 현지에서 일을 벌였다 하였는데, 전후 사정은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으나 어쨌든 자칫 조선의 허물이 될 수 있는 일을 다른 재야 서생 끌어들여 잘 해명하였다 하였으므로 귀남은 저의 첫째아들이 퍽 기특하였다.
더구나 주영공사 민영환이 전말 고하고자 치계하면서, 그 구씨 이하 사람들은 범상하는 흉당과는 다르므로, 다소 이론에 편벽함이 있기는 하되 화이부동(和而不同)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할 것도 아니라 하지 않던가.
아들이 셋에, 모두 무탈히 장성하여 이미 손주까지 여럿 보았으니, 적어도 가정 꾸리는 데 있어서는 막내아들 장가보내기를 제하면 걱정은 딱히 없을 터였다. 전생에서 이러하였다면 팔불출 소리 들을까봐 어디 가서 자랑은 못했겠지만, 지금 조선 하늘 아래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없으므로, 임금 자리 덕을 이럴 때 보지 않으면 또 언제 보겠는가?
그런데 막상 건수가 생기니 펴져 있는 멍석이 없었다. 아내 민씨는 저보다 먼저 자식 자랑을 할 터이니 그 앞에서는 얘기해보아야 공효가 없고, 주변의 궁인들은 이미 한 순씩 싹 돌았는데, 기무회의는 고작 열흘에 한 번 열리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아들의 행적에 억지 트집을 잡아서 다른 중신들을 불러모을 수도 없는 노릇.
“신이 전해듣기로 구씨가 광무에 뜻을 표한 바는 없다 하였는데, 그를 끌어들이는 방책으로 과연 마땅한 것이 있을지는 함부로 말하기 어려운 듯합니다.”
“아, 영상, 그것이...”
유길준이 대신 나섰다.
대개 어떤 학통에는 권위 있는 모임이 있어, 그곳에서 중론을 정하면 일개 유학(幼學)도 따르기 마련인데, 무군론, 그러니까 무정부주의는 정의상 그런 위계가 있기 어려웠다.
크로포트킨이 밝힌 입장도 그러므로 사실상 저와 마음 맞는 사람들의 이야기지, ‘나는 댁에게 동의한 적 없소’ 하고 나설 사람들도 한둘이 아니요, 이해는 하면서도 정부에 협조한다는 행위 그 자체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그러나 크로포트킨 본인도 그런 비판을 그저 허허 듣고 넘길 성품은 아니어서, 곧장 반박하기를,
‘그대들은 파리 코뮌은 이러이러해서 참된 모임이 아니었다 말하고, 조선 공산당은 또 저러저러하여 제대로 된 당이 아니라고 떠든다. 그렇다면 제대로 하는 무정부주의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실천이 없으면 어떻게 남을 설득하겠는가?’
망명자 신세라지만 마음에 품은 뜻은 되려 그윽해질 뿐이었는데, 그때 조선국 세자가 찾아와 나아가 말하지 않는다면 누가 그것을 알겠느냐 말 던지니, 본인은 그렇게까지 깊은 고민 하지 않고서 아끼고 위해주는 마음으로 한 얘기였는데 듣는 사람 귀에는 울림이 컸다.
가뜩이나 근래 조국 러시아에서 스톨리핀과 일린이라는 두 젊은 사람이 앞장서서 농지개혁을 외치고 있다는 소식 듣고 자극을 받기도 한 크로포트킨이었다.
사실 농촌 개혁이야 이미 몇십 년은 묵은 의제였고, 국가와 종교에 의한 억압이 계속되는 한 진정한 개혁이나 진보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 크로포트킨의 신념이기도 하였으므로 처음에는 별로 귀기울이지도 않은 소식이었다.
그런데 그 두 젊은이들은 실제로 마을 한둘을 정해 정책을 시행했다는 차이가 있었다. 스톨리핀의 발상이 효험이 있기도 하거니와, 이것을 부풀리는 재주로 러시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일린과 그 무리가 있었기에, 바깥에 당당한 통계와 함께 제시되기로는 간단한 자영농 정책만으로 생산량이 다섯 배로 늘었다는 식으로 전해지곤 하였다.
그러니 새 차르가 그렇게까지 반체제 인사들을 탄압하지 않는다는 말 나온지도 오래라 은연중 귀국도 생각하던 크로포트킨은 도리어 부끄럽게 여겼다.
‘저 청년들은 신념과 이성으로서 변화를 이끌고 있다. 비록 방향은 궁극적으로 바뀌어야 하겠지만, 적어도 수레바퀴를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무얼 하고 있는가? 이제라도 나서야 한다!’
반발하는 사람들에게 정 그러면 무정부주의는 너희들끼리 하라며, 아예 신디컬리즘(Syndicalism)이라고 새로 사상의 이름을 정하기까지 한 크로포트킨의 단언이었다.
하지만 말이 그렇지, 공작위 상속은 포기했다지만 여전히 몸과 마음은 귀족인 사람이 어떻게 저와 비슷한 백면서생들을 이끌고 밭을 일굴 생각을 품겠는가? 오히려 그들이 규탄하는 극단주의자들이야말로 개중 젊은 노동자들이 많았으니 남이 보면 웃을 일이었다.
그렇다고 사업을 하자니 평소 외치던 바와 완전히 맞지도 않을뿐더러, 무정부주의자들끼리 실험적인 방식으로 기업을 꾸려나간다 하면 밑천 대줄 사람이 있지도 않을 것이었다.
어쩌면 그의 일생에서 가장 거하게 내질렀을 지도 모르는 호언장담의 무게가 슬슬 어깨 위로 느껴지기 시작할 무렵, 그 고민을 넌지시 민영환에게 전하였다.
“... 하여, 다른 방식으로 그들 나름의 생업을 조직할 방편을 구하고 있다 하니, 만일 우리가 인광석 광무를 제안한다면 가하다 받아들일 수도 있을 듯합니다. 성상께서 이르신 것과 같이, 그들은 나라의 위엄은 대개 중하다 여기지 않으므로, 설령 대동도를 유구국 땅으로 인정하고 그 섬에서 영업케 한다 하더라도 유구국의 사사로이 원망하는 마음에 함께 치우치지 않을 것입니다.”
차근차근 설명하다가 자신도 그럴듯하다며 넘어가게 된 유길준이 말을 마쳤다.
“성상의 말씀이 한없이 밝으나, 여전히 우려되는 바가 있으니, 만일 구씨가 말과 물 다른 대륙 반대편 해중고도(海中孤島) 찾아오기를 원치 않는다면 계책이 어그러질 것입니다.”
“꼭 그들이 찾아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유구국 조정이 손수 관할하지 않는 광무국에서 인광석의 일을 도맡는다 하면 일본국이 그리 두렵게 여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구씨가 원하지 않는다면 천하에 다른 사람이 없겠습니까?”
“흠흠. 내 하려던 말도 저와 같소.”
숟가락도 수랏상 숟가락이라면 무게가 천근과 같은 법이었다.
그리하여 순조롭게 ‘국제 신디컬리즘 협회’ 이름으로 국적 없는 기업이 하나 생겼는데, 일개 회사가 섬 전체를 운영하게 되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가 향료 제도를 점거한 이후 어쩌면 처음일지도 모르는 사례였다.
물론 가뜩이나 무정부주의자들 언행에 관심 가지게 된 언론의 호들갑이 가장 컸지만, 어쨌든 동인도회사라면 한때 합스부르크 왕조와 어깨 나란히 하면서 너희처럼 우리도 주권 있다고 외쳤던 회사라, 국가와 거상들의 자본이 아닌 자발적인 협동조합 위주로 꾸려진다는 점을 제외하면 꽤 기분 좋아지는 비유였다.
그러나 몇 달 뒤에, 막상 그 섬에 당도하고서는 후회가 막심해졌으니, 아무리 채굴 간편한 구아노라지만 엄연히 허리 굽혀 삽질하고 곡괭이질 하는 일이요, 무엇보다 서태평양의 낙도(落島)라는 것이 소설에서 말하듯 그렇게까지 낭만적인 곳은 아니었다.
그래도 누구 눈치 보지 않고 편하게 일하면서 하고 싶은 바를 할 수 있는 곳임은 변함이 없으니, 이상향을 두 손으로 가꿀 정력 있는 청년을 구하자는 – 즉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저 대신 일할 사람을 구하자는 – 생각으로 런던에서 원격으로 할 수 있는 홍보와 행정 업무는 모두 도맡아서 했는데, 다행히 효과가 꽤 좋았다.
혹자는 어쨌든 이름난 사람이 야심차게 추진하는 일이니 믿어보자는 생각에, 또 유럽이나 미국을 떠나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뛰어들고, 간혹 언제고 저의 겨레가 완전히 독립하면 참고할 만한 바를 배울 수 있으리라는 마음으로 들어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전자에 레온 촐고시(Leon Czolgosz) 같은 사람이 있던 반면, 보스니아의 완전한 독립을 꿈꾸는 청년 페타르 코치치(Petar Kočić) 같은 이도 있었다.
그렇게 많은 이들의 호응을 얻었다는 사실에 고무되어 런던의 푹신한 의자에 앉아 속죄하듯 밤늦게까지 일하는 크로포트킨이야, 그런 사정까지는 알 수 없는 것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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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의 우후아가리 제도는 현실에서는 그 뜻을 한자로 옮긴 뒤 음독한 다이토 제도(大東諸島)로 알려져 있습니다. 류큐처분 이후인 1885년 처음으로 일본이 영유권을 주장하였고, 1900년에 이르러서야 개척 시도가 처음으로 이루어졌지만, 류큐가 독립국으로 남아 있는 작중에서는 상황이 조금 다르게 되었습니다. 실제로는 작중 인물들이 습관적으로 ‘섬’으로 지칭하는 것과는 달리 큰 섬 세 곳과 여러 암초로 구성되어 있으며, 지금은 인구가 2천 명 정도이지만 구아노 채굴이 최전성기에 이르렀을 무렵에는 4천 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작중에 나온 것처럼 구아노는 하버-보슈 법의 발명으로 합성비료의 대량 생산이 가능해지기 전까지 매우 중요한 자원으로 취급되었습니다. 특히 남미 해안의 섬들은 19세기 최대의 구아노 생산지였는데, 일례로 1879년 남미의 태평양 전쟁(Guerra del Pacifico. 작중에도 언급되는 전쟁입니다.)으로 페루와 볼리비아의 해안가 구아노 산지를 차지하게 된 칠레의 국가재정이 약 20년 만에 9배로 증가할 정도였지요.
사타안다기는 설탕을 듬뿍 넣어 만드는 일종의 오키나와 전통 도넛입니다. (엄밀히 따지면 다양한 해외 음식문화의 영향을 받기는 했습니다.)
동아시아에서도 ‘아나키즘’의 역어로 ‘무정부주의’는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예전은 물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훨씬 당당하게 아시아에 입성하게 된 아나키즘이 새로운 명칭을 구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라 하겠습니다. 원 역사에서는 20세기로 넘어가는 시점 프랑스에서 태동해, 불어 명칭 ‘생디칼리슴’이 널리 퍼졌는데, 여기서는 그것이 영어식 ‘신디컬리즘’이 될 듯합니다.
원 역사의 크로포트킨은 1차대전 중 독일을 비난하며 전쟁 수행의 정당성을 역설하는 ‘16인 성명서(실제로는 15인만 서명했습니다)’를 내어 무정부주의자들 안에서도 거센 논란에 휩싸였습니다. 작중에서는 훨씬 이른 시기에, 조금 더 발전적인 방향으로 국가권력과 결탁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발상이 당대 무정부주의와는 다소 결이 다른 것이 사실입니다.
표트르 스톨리핀의 농지개혁은 러시아 농업사상 가장 성공적인 정책으로 유명합니다. 지금까지 러시아인들 사이에서 존경받는 역사 인물을 꼽는다면 항상 5위 안에 드는 것은 그 때문이지요. 농노해방 후에도 농민 대부분이 지역 공동체에 매여 있어 생산성이 열악하던 러시아 농촌을 자영농 위주로 재편하여, 놀라울 만한 농업 증산을 이끌어냅니다. 이 개혁은 소련 성립 후에도 신경제정책을 통해 일부 계승되는데, 하지만 스탈린과 흐루쇼프 시기를 거치면서 다시 미국에서 곡물을 수입해와야 하는 상태에 처하게 되지요.
레온 촐고시는 원 역사에서는 매킨리 대통령을 암살한 인물입니다. 이전에도 언급된 ‘외로운 늑대’형 무정부주의자로, 사회성이 떨어져서 같은 무정부주의자들 사이에서 혹시 ‘프락치’가 아니냐는 의심을 받기도 했지요.
페타르 코치치는 보스니아 출신 세르비아인으로, 독립을 위한 정치활동과 문학활동 양면으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작중에서는 아직 열혈 대학생입니다만, 원 역사에서는 정신적 탈진으로 1차대전 발발 직전 정신병원에 입원하기 전까지 많은 급진적 청년들 – 예컨대 가브릴로 프린치프 – 에게 영감을 주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