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밤섬 나라 사람들 (3)
뜬금없는 청에 당황하여, 대책 마련을 위해 다른 친우들과 긴급히 머리 맞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어디 멀리 외유 나간 것인지는 몰라도, 런던 근교 브롬리(Bromley)의 집에 찾아갔더니 집주인 크로포트킨은 그 자리에 없었다.
애초에 뭇 나라의 권세를 부인하여 저의 공작위도 버린 이이니 대조선국 세자께서 오셨는데 맞이하지 않는다고 언짢게 여김도 어리석은 짓이요, 더구나 세자 본인도 그리 위세 부리기를 좋아하지 않으니, 그냥 거기서 기다리기로 하였다.
안주인 소피아가 맞이하며 이르기를, 저녁 전에는 돌아올 것이라 하였는데, 거기에 가정교사 떼어놓고 도망온 늦둥이 외동딸 알렉산드라(Alexandra P. Kropotkin)가, 동양에서 온 왕자님이 신기하여 이것저것 물어보았기에 시간도 잘 갔다.
허나 반 시진쯤 뒤에 결국 알렉산드라도 끌려나가고 응접실에는 민영환과 세자 두 사람만 남았다.
“퍽 귀여운 규수요.”
집안이 집안이라 빠르게 변하는 세간 풍속과는 가풍이 동떨어져, 여전히 남녀 내외하는 데 익숙한 민영환은 영 어색했는데, 세자는 한양에 있는 딸 생각이 났는지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흠흠. 비록 구주 풍속에 남녀의 분별을 가볍게 여긴다고는 하지만, 저 규수가 유별난 것이니 크게 마음에 두실 일은 아니라 하겠습니다.”
“무어, 요즘 세상에 저들 하고픈 대로 살면 그 또한 족하지 않소. 더구나 막내, 그러니까 경양대군이 혼처를... 아차. 어, 실언을 했소.”
장가는 언제 갈 것이냐. 참한 처자 구하여 정혼을 해야 성심도 평온해지지 않겠느냐 할 때, 경양대군이 어버이에 더하여 큰형님까지 왜 그러시냐며, 저는 조선 아낙네는 꽉 막혀서 싫다며 마음에도 없는 핑계를 댄 적이 있었는데, 그것을 철석같이 믿고서 몰래 이곳저곳 살펴보고 있는 이척이었다.
그러나 그 ‘몰래’라는 것이 이 실언에서 볼 수 있듯 그리 은밀하지는 않아, 요시히토도 얼추 알고 눈치 빠른 순친왕 자이펑은 더 잘 알았으며, 이제 민영환도 다소나마 눈치를 채게 되었다. 천재일우 기회를 걷어차 영영 장동 김문 따라가지 못하게 되었다며 지금도 은근히 문중의 원망 받는 민승호라면 모를까, 민영환은 그런 궁중의 일에 관심이 있기는커녕 도리어 부담스럽게 여겨, 성급히 말을 돌렸다.
“바깥에 마차가 지나가, 그 소리로 인해 지금 무어라 말씀하셨는지 듣지 못하였으니 송구스럽습니다.”
“아, 그랬구려.”
“흠흠. 그나저나 이제 크로포트킨, 그러니까 구씨가 곧 돌아올 듯하니, 의관을 다시 갖추심이 좋겠습니다.”
“그나저나 앞서 물어보려 하였는데, 그대는 어찌하여 이리 윤돈의 사정에 밝소? 물론 그것이 공사의 일이기도 하겠지만, 안양대군도 얼마 전 덕을 크게 입었다고 들었소이다.”
자신이 소개해준 진령군 그 여인네가 정말 무슨 신기가 들렸는지 척척 인재를 추천해주어 안양대군이 넉넉한 마음으로 귀국하였는데, 이제는 그 형 되는 세자가 찾아와 저의 소개로 크로포트킨을 만나게 되었으니, 이러다가 정말 조선에서는 자신이 런던 마당발쯤 되는 사람으로 알려지는 것 아닌가 하는 고민을 하는 민영환이었다.
“모두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지는 격이니, 제가 힘써서 구한 것도 아닐진대 어찌 과분한 상찬을 듣겠습니까. 집주인 구씨도 마찬가지로, 제가 청하여 교유한 것이 아니라 어쩌다 보니 엮이게 된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민태호의 추천을 받아 높이 기용되었음을 어찌 알았는지 – 아마 공산당 연줄 탓일 테다 – 처음 글래드스턴이 조선과 연 맺은 이후로 대륙 반대편 나라를 퍽 친하게 여기던 선비와 문인(文人) 여럿이 저를 가깝게 여기곤 하였다.
아일랜드 자치법 통과 이후 런던과 더블린 오가느라 도통 바쁜 그 버나드 쇼만 하더라도, 편지 주고받는 사이인 것은 전봉준과 엘러노어 마르크스 부부일 텐데, 왜 제게까지 곰살맞게 구는지 모를 일이었다. (하루는 그런 생각을 은연중에 보였더니 쇼가 놀리며 말하기를, ‘남과 안면 트기 꺼리는 것을 보니 잉글랜드 신사 다 되셨다’ 하였다.)
“여하간, 구씨로 말하면 아라사 대부의 자제였으나, 과격한 언행으로 탄핵당하여 고국을 떠나게 되었으니, 그 논지의 대강은 일면 공산당과 같으나 조금 더 나아가 활빈(活貧) 위하여 국권(國權) 폐할 것까지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 뜻이 편벽한 바가 없지 않으나 결코 무도한 흉한(兇漢)은 아니니, 혹 저하의 앞에서 무엄한 언사를 내놓는다 하여도 과히 언짢게 여기지는 않으시기를 청할 따름입니다.”
“활빈이라. 홍길동이 같은 사람이구려.”
민영환이 처음 그 이론을 들었을 때는 곧장 제자백가 중에서도 묵적이나 노담(老聃)이 떠올랐는데 – 생각해보면 노담도 말년에 함곡관 너머 서쪽으로 갔으니 혹시 그 시기 희랍까지 당도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다 – 세자는 근래 화두인 『홍길동전』을 먼저 떠올렸다.
물론 ‘활빈’ 두 글자 때문에 생각이 그리 쏠린 것이겠지만, 세자뿐 아니라 작금 조선의 젊은 세대들은 대개 다른 공부에 치여 윗세대만큼 경학에 밝지 못하므로, 금시초문 서양 이론을 보았을 때 제자백가 떠올리는 이들이 갈수록 줄기는 할 것이었다.
“홍길동이라 하시었는지요?”
소싯적에 경서만 읽었는지 의아한 눈치인 민영환을 위하여 세자가 해설해주었다.
“이야기책에 나오는 의적 수괴요. 근래 도성에서 새로 그 책을 발간하여 연일 화제라오.”
사연인즉, 여러 해에 걸쳐 꾸준히 나라의 행정을 가다듬고 있는 이조에서 간만에 불거진 문제로, 관아에서 쓰는 이런저런 소장(訴狀) 양식이 날이 갈수록 번잡해져 나이 많은 이들은 많은 대로, 젊은이들은 젊은대로 어려움 겪는 경우가 생긴 것이 시작이었다.
기실 이러한 사안은 기무회의는커녕 아문 문밖으로도 나오지 않을 소소한 것이었지만, 호조에서 퇴직한 어느 서생이 신보에 기고하기를 이조가 게을러 한 번 양식을 바꾸고서 고치지 않으면 될 것을 누차 번복하니 이러한 폐단이 생긴 것이라 비방하였으므로, 비로소 분란이 일어났다.
그때 귀남이 발의하기를, 관공서에 예시로 된 양식을 작성하여 구비해두면 그것을 참고하여 서로 편리하게 일의 출납을 처리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였다. 그때 예로 들기를 사람 이름을 성은 홍이요 명은 길동으로 하자 하였다.
어떤 연유로 사람 이름이 홍길동인가 궁금하게 여기는 이들이 있었으나, 곧 스스로 단정하기를 필히 근래 이름난 『홍길동전』을 성상께서 읽어보시고 그 뜻을 갸륵히 여기심이 아니었는가 하였다.
근래 대학원에서 ‘소품학(小品學)’ 궁구하는 사람들의 의론으로, 조선국에서 처음 국문으로 소설 쓴 이는 광해주(光海主, 광해군) 때 죄 받아 죽은 허균(許筠)이라. 그러므로 혹설에는 참된 탕평의 뜻을 펴고자 하심을 드러내어, 전 참의 이건창이 『당의통략』 낸 이후로 자유당 선비들이 꺼내고 있는 당쟁 화해론에 힘 실어주고자 하심 아니겠느냐 넘겨짚곤 하였다.
또 혹자는 짐작하기를, 그 글의 내용이 얼자 길동이 나라 세워 보위 오르는 이야기이니, 백성을 아끼시는 한결같은 뜻에서 나온 것 아니겠냐며 역시 넘겨짚고는 하였다.
그러므로 아무개 모(某) 같은 다른 가짜 이름 내버려두고 ‘홍길동’ 명의로 소장을 만들어 널리 참고하게 하였으니, 그로 인하여 『홍길동전』도 새롭게 출간한바 목멱산 자락의 출간하는 사람들에게는 호재가 아닐 수 없었다. 가뜩이나 근래 소설계 유행이 옛 이야기책 줄거리 가져다가 요즘 사람 글솜씨로 산삭(刪削)과 가필 거쳐 내놓는 것이기도 하였으니 시기도 적절하였다.
민영환은 모르는데 저는 아는 이야기가 나왔기에 신나서 그 줄거리를 죽 읊어주는데, 얼자(孼子)가 임금 되는 이야기를 일국의 세자가 재밌다며 거론하는 것도 모양이 조금 이상하기는 하였다.
“국법이 싫어 바다 가운데로 떠나 새로 나라를 세웠다 하면, 결코 구씨가 듣고 좋아할 이야기는 아닐 듯합니다.”
“어찌 그렇소?”
“그의 주장을 살피자면 사람이 대개 사단(四端)이 있어 서로 돕고 또 아끼는데, 이것이 점차 나아가 완전히 어진 품성이 계발되니, 나라를 세워 법을 정함은 외려 이를 막을 뿐이라 합니다. 구씨가 무군론(無君論)을 설파한다 함은 이 때문이지요.”
세자 듣기 편하게 유학의 말로 옮겨 간략히 설명하기는 했지만, 크로포트킨 본인이 조선에 관심이 많은 것은 사실이므로 그렇게까지 오독이라 할 수는 없을 터였다.
허버트 스펜서와 토마스 헉슬리가 전우와 힘을 합쳐 골턴 논박하는 모임 연 이후로 시작된 관심은, 근래는 그 땅에 이주한 유대인들이 세웠더는 농업 협동조합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나라를 세우지 않는다면 어떻게 한다는 말이오?”
“환난상휼과 상부상조의 민풍(民風)을 세우고, 그것이 능히 스스로 지탱할 수 있도록 농토의 분배를 가지런히 하면 나라를 능히 갈음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한 것이오?”
맥락 떼어놓고 글로만 본다면, 그 나라 덕에 생업 있는 젊은이가 따져묻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으나, 세자의 어조는 궁금함이 가득했다.
“적어도 문헌이 전하는 안에서 상고해보면 그런 이치가 이루어진 바 없으니 가부를 쉽게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 저쪽의 말입니다.”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지, 또 묻는다.
“허나 막상 나라를 없앤다 하더라도, 예컨대 군현에도 수령 외에 향회가 있고 제조국에도 국장 외에 도중이 있는데, 결국 조정만 없지 누군가가 나서서 우두머리 노릇하지 않겠소?”
“그것은 구씨에게 직접 물어보심이 어떠할지요? 저 역시 그의 이론을 상세히 알지 못하는지라, 함부로 답하였다가 자칫 잘못을 범할까 두렵습니다.”
답을 회피하며, 회중시계 살피는 민영환이었다.
(오지 않는 크로포트킨을 기다리며 문득, 버나드 쇼 같은 사람이라면 오지 않는 객을 기다리는 다소 부조리한 내용만으로도 연극 하나쯤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였다.)
다행히 그로부터 약 오분 정도 뒤에 크로포트킨이 들어와 무례를 사과하였다.
예상대로 제의에 당황스러운 반응을 보이던 크로포트킨은, 세자가 저의 사상 얘기를 캐묻자 곧장 덩달아 들떠서는 마구 말을 늘어놓았다.
“... 하여, 상호 부조의 원칙이 관철된다면, 정부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사회가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 저의 결론입니다. 재화의 분배가 반드시 어떤 권위체를 통할 필요는 없고, 생활에 필요한 만큼 생산해 공동으로 나눈다면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는 것인데, 단순한 이상론을 넘어 실제 역사와, 사회적 동물들의 생태에서도 모두 쉽게 발견되는 경향이지요.
당장 고대 중국에서도, 임금의 이름을 국민이 모르는 것을 이상적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이것이 조심스럽게, 고대 중국의 원시적 유사-무정부상태를 방증하는 사례는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려우면서 뭔가 좋아보이는 말이라면 적어두거나 최소한 기억해두라는 부왕 가르침을 실천하는 세자였는데, 가뜩이나 아버지 닮아 순박한 인상의 세자가 그렇게 열심히 경청하니 크로포트킨도 신이 났다.
바깥에서 본다면, 일국의 세자와 (전) 공작이 무정부주의를 두고 열띈 일방적 대화 나누는 것이 기이하겠지만, 가운데 낀 민영환 제하고 묻는 이와 답하는 이가 모두 즐거웠으니 그런 사정이야 알 바 아니었다.
“험험. 세자 저하. 송구하오나 시각이...”
“아, 그렇지. 그래서 처음 제의했던 대로 덕국에서 연다는 그 모임에 안건 내는 일은 어찌 생각하는지 물어봐 주시오.”
이곳에 오기 전, 세자 이름으로 된 서한을 보내기를, 언론에서 말하기로 무정부주의니 아나키즘이니 하는 것이 귀한 사람들의 피를 남김없이 흩뿌리는 데 있다 하던데 그것이 사실이냐며 단도직입으로 물은 바 있었다.
크로포트킨 답하기를 혁명적 변화가 필요하며 지금의 점진적 개혁노선에는 미진함이 있다는 데는 저들도 동의하지만, 이번 카이저 피습과 같은 그러한 정치적 폭력은 과거 ‘인민의 의지’ 사건에서 볼 수 있듯 더 큰 억압과 혼란의 불씨만을 남길 뿐이라 하였다.
“정중히 거절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애초에 저와 동지들의 이론을 폭력적이고 반사회적인 – 기실 가장 반사회적인 것은 국가일지도 모르는데요! - 것으로 호도하는 그런 모임에 저희가 거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나아가 항변해야 하지 않겠소?”
하다못해 군신의 관계에서도 온당치 않다 여기는 일에는 나아가 상소하고, 옛날 만주(晩周) 때도 성현들이 열국을 유세하는 것이 도리라 배웠던 이척의 생각은 이러하였다.
“나 또한 정말로 그런 불측한 자들과 어울리는 것이 그대들 본의 아닌가, 처음 글 보내기 전까지는 짐짓 두려워하고 있었는데, 하물며 천하의 다른 이들은 어떻겠소?
우리가 받드는 성현 공자께서도 써줄 나라를 찾아 천하를 주유하시었다는데, 그대들은 그럴 나라도 필요하지 않으니 스스로 원한다면 쓰임을 얻을 수 있을 것이오.”
말재주 어눌한 듯하다가 이렇게 갑자기 뼈 있는 말을 진솔히 던지니 그 화법조차 아버지 닮은 것일까.
결국 말한 대로 저 모임에 전언 보내어볼 방도를 진지하게 고민해 보겠노라는 답이 돌아왔다.
“정말 다윈의 그 이론이 맞는 것인지, 조선 국왕과 비슷한 짓을 하더이다.”
빌헬름 2세가 빈정거리며 말했다.
뺨의 상처에 댄 거즈 하나가 환자 티의 전부였다. 처음 행세한 대로 중상이었다면 얼굴이라도 칭칭 붕대로 감고 있어야 하겠지만, 그러면 여러 나라 대표들 앞에서 저의 위엄이 무엇이 되겠냐며, 열심히 신설 ‘국민계몽부(Volksaufklärungsamt)’ 통해 알린 바로는 국민의 성원에 힘입어 기적과 같이 회복하였다 하였다.
물론 그런 기적을 직접 만들어내야 하는 사람들은, 국민들이야 그러려니 하고 넘길 만한 말이 타국 외교관들에게는 카이저 본인에 대한 불신을 조장할 수 있음을 알았기에 다소간 불만을 품었지만, 이제 와서 다른 황제를 알아볼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대사관들을 통한 사전 조율 과정에서 살핀 바로는, 그쪽에 혹한 반응이 적지 않습니다. 영국뿐 아니라 프랑스에서도, 경계하는 듯하면서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합니다.”
뷜로우의 중립적인 보고에 냉소가 돌아왔다.
“혹했다기보다는, 애초에 별 기여를 하지 않고 빠져나갈 핑계를 원했던 것이겠지.”
조선국 세자가 찾아와서는 심심한 위로와 자성의 뜻을 밝힌 것이 어제였다.
다른 사람, 예컨대 뵈켈 같은 아랫사람 앞에서야 조선이 만악의 근원이라는둥, 나약해진 서구 사회를 황인들이 위협하고 있다는둥 아무 말이나 하여도 괜찮겠지만, 막상 이척의 앞에서는 근엄하고 진중한 시늉을 하느라 싫어하는 티도 제대로 내지 못하였다.
물론 빌헬름 자신이 자책과 더불어 스스로 변명하기로는, 눈앞에서 비난하거나 매도하는 것도 상대에 따라 유불리 갈리기 마련인데, 저 순박하게 생긴 동양 젊은이를 꾸중했다가는 도저히 모양이 살지 않을 듯해 그러하였다고 했지만, 뷜로우 수상은 – 역시 카이저 앞에서는 일언반구도 내지 못하는 속마음으로 – 사고만 안 친 게 어디인가 싶었으므로 트집을 잡지 않았다.
조청일 삼국 왕자들의 방문과 문제의 그 무정부주의자 성명서는, 공식적으로는 별개의 건이었다. 하지만 크로포트킨인가 하는 그 러시아인이 밝히기를, 그의 벗 조선 왕자의 조언에 힘입어 이렇게 글을 쓴다 밝히기까지 하였으니, 관련이 있다고 유추할 것까지도 없었다.
크로포트킨 딴에는 당연히 무정부주의자 때려잡자는 모임에 무정부주의자가 서한 보내는 상황에서 저의 선의를 보증받을 필요가 있었고, 애초에 그를 설득한 사람인 세자는 그런 것 정도는 자신이 해줘야 한다 여겼기에 – 물론 사전에 한양에 연락 보내 승낙을 받았지만 - 순순히 동의하였다.
누가 러시아 귀족 출신 아니랄까봐 유려한 프랑스어로 쓴 그 서한의 요지는, 왕족을 암살한다던가 하는 그런 폭력행위는 결코 저들의 본뜻이 아니며, 타인의 생명을 함부로 해치는 것은 인간의 선의를 중시하는 자신들로서도 간과할 수 없는 악행이므로 저들의 ‘양심’을 넘지 않는 한에서 필요시 수사에 협조하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행간의 교묘한 내용으로는, 그 반대급부로 무정부주의의 ‘합법적’ 활동을 치안 당국에서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는 그런 함정도 숨겨져 있었는데, 당국 입장에서도 사회주의자들처럼 노조를 결성하여 시위를 벌인다던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 세대처럼 무슨 몽상에 나올 법한 공동체를 어디 촌구석에 꾸리는 정도라면야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기는 했다.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실제로는 범죄 수사나 범죄자 인도에 대한 규약 정도로 끝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독일이 주도하여 유럽의 질서를 지킨다는 인상을 주는 것 자체의 가치는 무시할 수 없습니다.”
어쨌든 발전한 기술의 힘으로 국제 범죄에 맞설 수 있게 되었고, 더 나아가 무엇이 사회적 안전을 해치는 범죄인지 규정하는 데 있어서도 어느 정도 독일의 관념과 이해관계를 반영할 수 있을 테니, 눈송이 처음 본 하룻강아지처럼 날뛰는 경무청만큼은 아니더라도 좋게 볼 이유가 없지 않았다.
이만하면 쇳조각에 뺨 한 번 스친 것으로 이끌어낸 성과로는 충분하고도 남지 않는가 자평할 법도 한데, 뒷맛이 영 개운치 못하였다.
“그러나 이대로라면 아쉬운 면이 있군. 동양인과 결탁한 잡배들이 펜대 놀려서 명성을 얻은 것도 영 그렇지만, 무엇보다 당초 생각했던 것만큼의 인상이 없잖은가.”
영국이나 프랑스의 보수주의자들이 ‘그래도 카이저 말에 일리가 있다’하면서 눈에 거슬리는 옆의 자유주의자나 사회주의자들과 거리를 두게끔 만드려던 것이, 이렇게 겨우 경찰과 무정부주의자 사이의 약조로 영 시시하게 끝나버리게 되면 섭섭한 일일 터였다.
“아직 회담이 공식적으로 시작되지는 않았으니, 원하신다면 의제를 설정할 때 폐하의 의중을 십분 반영할 수 있습니다. 다만 직접적으로 이를 드러낸다면 그만큼 반발도 사기 쉽겠지요.”
“흠...”
옛날의 카이저였다면 모를까, 직접 의회정치나 대중들 선동하는 일에 손을 대기 시작한 이래 마음대로 언행 드러내기 전 한 번쯤은 – 물론 딱 한 번 정도였지만 - 생각하는 습관을 들인 빌헬름이어서, 뷜로우의 말에 바로 반발하는 대신 잠시 곱씹으며 책상을 두드렸다.
“그러면 이렇게 하지. 다른 나라들을 끌어들이세.”
“다른 나라라 하시면...”
“유럽에서 시작된 잘못이 그 주변으로도 퍼져나갈 수 있지 않은가? 우리의 반문명국 이웃들이라던가.”
“콘스탄티노펠(Konstantinopel, 콘스탄티노플)의 술탄이라면, 확실히 이 모임의 취지에 동감할 듯합니다. 훌륭한 생각이십니다.”
“아, 그렇지. 튀르크도 끌어들일 수 있겠어. 하지만 내가 염두에 두던 것은 다른 나라였네.”
소형 지구본 – 그의 집무실에 있는 많은 기물들은 한손으로 들 수 있도록 고만고만한 크기였다 – 을 앞에 옮겨놓으며 빌헬름이 말했다.
“마로코(Marokko, 모로코)는 어떤가? 위치로 보나, 지리적 인접성으로 보나 최적의 입지인 듯한데.”
“새로 즉위한 술탄이 프랑스의 침투를 경계하여 영국에 접근하고 있다고는 들었습니다. 지중해에 대한 이해관계를 생각하면...”
“무정부주의가 활개치게 된 것도 결국 우리보다 앞서나갔다 자처하던 나라들의 실책에 말미암은 것이지 않은가? 청년 같은 활기와 건전함을 지닌 우리가 앞장서야지.”
“예. 말씀대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당장 프랑스와 연을 끊고 독일과만 교류하자는 것도 아니고, 조금 긴밀한 관계를 맺겠다는 정도라면 같은 동맹인 영국도 크게 반발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하며 뷜로우가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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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이 허균이 지은 최초의 한글소설이라는 통념은 경성제대 조선문학 교수 다카하시 토오루(高橋亨)에 의해 처음으로 주장되었고, 이것이 다카하시의 제자인 김태준이 저술한 최초의 국문 소설사 연구서 『조선소설사』(1933)를 통해 널리 퍼졌습니다.
견본에 특정한 이름(placeholder name)을 집어넣어 양식 작성시 참고할 수 있게끔 하는 것은 의외로 역사가 깊은데, 설령 무주지(無主地)라 할지라도 반드시 토지 소유권 주장자가 있다고 가정해야 했던 중세 잉글랜드의 관습법으로 인해 ‘존 도(John Doe)’ 혹은 그와 유사한 이름을 일종의 기본값으로 사용한 것이 영미권에서의 연원이라고 합니다.
표트르 크로포트킨은 무정부주의, 그중에서도 무정부공산주의의 거장입니다. 당시 러시아의 많은 반체제 운동가들처럼 본인은 귀족 출신으로, 류릭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서깊은 집안의 자제였지만 의절당하게 됩니다. 그는 시베리아에서 초급장교로 지내면서 동시에 여러 지리학 연구를 하기도 했는데, 이때 유형 생활을 하던 반체제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무정부주의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인류가 상호부조를 기반으로 한 무정부 사회로 진보해나갈 것이라고 주장했던 그는, 그 반대 논지를 펴는 사회진화론과는 대척점에 서 있었는데, 특히 그는 경쟁만큼이나 협력이 인간을 비롯한 모든 사회적 동물의 본성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작중에서는 전우가 먼저 사회진화론 논쟁을 선점하는 바람에 어쩌다 동양 사상과도 연이 닿게 되었습니다.
표트르 크로포트킨의 외동딸 알렉산드라는 1887년생으로 작중 시점에서는 한창 사춘기입니다. 아버지가 사망한 뒤에는 곧장 미국으로 이주하여 저술 활동에 힘썼는데, 아버지를 존경했지만 본인은 무정부주의자와 거리가 멀었다고 합니다.
원 역사에서 1898년 개최되고 이후 1904년에 한 번 더 열린 반(反)무정부주의 국제회의는, 정치적으로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작중에서와 비슷하게 실무적 차원에서의 협력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점차 악화되는 열강들 사이의 관계에도 국제 범죄에 대해서는 공조해야 할 필요성이 인식되었고, 이에 따라 수사 공조와 정보공유 등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습니다. 이후 협력의 범위가 무정부주의에서 인신매매 같은 다른 범죄로 넓어지면서, 후일 인터폴 결성까지 이어지는 실무적 협력의 토대가 되었지요 (M. Deflem (2005). “Wild Beasts without Nationality: The Uncertain Origins of Interpol, 1898-1910.” in P. Reichel (ed.), The Handbook of Transnational Crime and Justice. Thousand Oaks, CA: Sage Publications).
작중에 등장한 독일의 국민계몽부는 가공의 기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