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밤섬 나라 사람들 (2)
“폐하! 폐하, 괜찮으십니까?”
“괜찮은 것을 아니까 그렇게 허겁지겁 달려온 것 아닌가?”
만약 다른 군주가 습격을 당해, 베를린 시내의 본궁이 아니라 교외의 대리석궁(Marmorpalais)에서 요양하고 있다고 한다면 정말 중태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나, 빌헬름이 정말 언론 보도대로 중상을 입었다면 반대로 저의 건재함을 가장하고자 일부러 시내로 환궁하였을 것이었다.
카이저의 용태를 걱정하는 일반 시민들이라면 몰라도, 오토 뵈켈 정도 되는 카이저의 측근(물론 ‘측근’이라는 것은 뵈켈 본인의 생각이었지만)이라면 능히 눈치챌 수 있었다.
“사내라면 멋들어진 상처 하나쯤은 있어야지. 고작 뺨이 살짝 찢어진 정도라 흉터가 잘 남지 않으리라는 것이 주치의 진단이기는 했지만...”
“의연하시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반 촐(Zoll. 약 3cm)만 위에 맞았어도 눈을 다치셨을 텐데...”
만약 정말로 자신이 쓰러졌다면, 정치적으로는 아직 어린아이라 해도 무방할 황태자 빌헬름의 후견인이 누가 될지 눈치를 보느라 당분간 베를린 벗어날 생각은 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이, 카이저 빌헬름 눈에는 훤히 보였다.
아니, 일부러 허겁지겁 들어오는 시늉으로 충신 모양을 연기하는 저 어설픈 모습을 보면 이상주의자 아버지나 천생 군인 할아버지 눈에도 금방 들여다보였을 것이다.
“천인공노할 짓을 범한 그자는 무정부주의자라고 들었습니다.”
“정신병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일세. 그런 자들이 더 흉악한 음모를 꾸미기 전 이렇게 단초가 드러났으니 다행이지. 이 기회를 빌어 우리 독일 안의 암적인 존재들을 싹 쓸어냄이 마땅할 것이야.”
현장에서 검거된 범인 요한-디트리히 바일란트(Johann-Dietrich Weiland)는 정말로 정신적인 문제가 있던 자로, 무정부주의는커녕 학교 문턱도 겨우 넘은 조선소 노동자였다.
그러나 맞은 부위가 적당히 눈 근처이기도 했고, 무언가 좋은 생각도 났기에, 사건 이후 억지로 순행 일정을 마무리한 뒤 쓰러진 것으로 처리하고서 ‘급히’ 포츠담으로 돌아왔던 것이었다.
“아아, 귀하신 몸이 상한 것조차 독일 민족의 발전을 위한 계기로 삼으시려 하신다니 이 뵈켈은 참으로 탄복을...”
“됐네. 머리 아프게 하지 말게. 자네는 칭찬이든 아첨이든, 뷜로우(Bernhard von Bülow)를 배울 필요가 있어.”
취임한지 얼마 되지 않은 베른하르트 폰 뷜로우 수상이 그 이전, 외무장관 시절부터 카이저의 총애를 받아왔다는 것은 베를린 정계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아마 이 사건의 대처도, 큰 방향은 카이저가 정하지만 실제 정책은 뷜로우의 머릿속에서 나오리라 보는 것이 맞았다.
“예. 죄송합니다.”
“그렇게 내 앞에서 말을 창작할 시간에, 차라리 언론에 내보낼 장엄한 미사여구를 생각해보도록.”
적을 이기기 위해서는 먼저 적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던가.
“어쨌든 군주의 위엄과 공공의 질서를 한낱 말장난거리로 삼는 무리가 횡행하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 아니겠는가? 여기에 있어서는 사민당 놈들을 제외하면 모두가 동의할 것이야. 그렇다면 독일민족당이 본래의 목적대로 여론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가야지. 그렇지 않은가?”
지난번에 중진들이 번갈아가며 망신을 당한 이후로, 독일민족당은 내부에서는 다투더라도 카이저의 명에는 무조건 따르는 것이 철칙이 되었다.
그리고 충성은 적어도 지금까지는 보답을 받아 왔다. 사민당의 불온분자들이야 저를 카이저의 나팔수로 취급한다지만,
“어쨌든 내 멀쩡한 것은 확인했으니 물러가게. 이쪽에서 곧 내놓을 지침에 쌍수 들어 환영할 준비나 해 두고.”
“예, 폐하.”
뵈켈이 공손히 고개 숙이고 나가자마자, 밖에서 기다리던 수상이 들어왔다.
“오, 수상. 어서 오시오.”
“폐하, 평안하셨습니까.”
“그대를 등용한 이래 늘 그렇듯 편하기 이를 데 없다오.”
뵈켈이 보았다면 그 온도차를 보고 적잖이 섭섭히 여길 문답이었다.
“처음 환궁하셨을 때 말씀하신 대로, 금번 사건을 독일에 유리하게 풀어갈 방편을 마련해 보았습니다.”
그렇지만 뷜로우 입장에서는, 이것도 재주라고 항변할 것이었다.
“폐하의 혜안대로, 사태의 본질은 누가 감히 무엄한 짓을 저질렀느냐가 아니라, 그런 자들이 횡행할 수 있는 조건이 어떻게 조성되었느냐에 있습니다.
러시아를 필두로 불온세력을 양지로 끄집어내는 정책이 확산되었는데, 물론 나름대로의 효과는 있을지 몰라도 결국 극단주의를 뿌리뽑는 데는 실패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의 안정이 사상의 자유로 인해 침해받는다면 그것이 어찌 올바르다 하겠습니까?”
“그 말이 참으로 옳소.”
적당히 비위를 맞추어주면서, 그 속에서 할 말은 하는 것이 뷜로우의 비결이라면 비결이었다.
“그렇지만 아직 유럽의 다른 나라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거나, 알더라도 여러 여건의 제약으로 조치를 취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용하는 세력도 있지요.”
대표적으로 조선이 있을 테다. 뷜로우 개인 생각으로는, 동양 약소국이 명분 놀음으로 그만큼 국력을 키워나갔으니 나름대로 현명하다 싶었지만, 당연히 카이저 앞에서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역시 그대는 제국의 보배요. 그러면 구체적으로 세울 수 있는 대책으로 무엇이 있겠소?”
“어찌 빈손으로 와 폐하의 귀중한 휴식을 방해하겠습니까?”
빌헬름이 좋아하는 멋들어진 필기체로 제목이 장식된 – 그리고 장황한 문단 말미마다 굵게 요점을 정리해둔 – 서류를 진상하며 뷜로우가 말했다.
“허, 이것은... 결국 명분 놀음이 아니오?”
“명분을 내세움은 맞지만 ‘놀음’은 아닙니다, 폐하. 오히려 폐하께서 싫어하시는 그런 위선적인 행태를 변화시키는 근원이 될 수도 있지요.”
이른바 ‘반(反)아나키즘 국제회의’ 기획안을 내려놓으면서 빌헬름이 다소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뷜로우가 목소리를 냈다.
“물론 우리 독일의 강성해지는 국력을 바탕으로 새로 국제관계를 정립하는 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기는 하지만, 그 뒤에도 어떤 식으로든 공조는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았다가는, 저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에게 또 다른 누군가가 편승하여 저들의 생각을 펼치려 할 것입니다.”
카이저가 싫어하는 조선의 이야기를 유추할 수 있도록 넌지시 말을 던졌더니, 과연 카이저도 그에 생각이 미쳤다.
“더구나 우리 독일의 부상을 마치 유럽 문명의 위기인 것처럼 포장하는 소위 자유주의자들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때에 대비해서라도 우리가 우리 나름의 미래 구상이 있음을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한다면 우리 이웃 국가들에서도 호의적인 세력을 모을 수 있겠지요.”
남의 나라 여론을 이용하는데 있어서는 비스마르크의 반의 반도 못 미친다는 것을 뷜로우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정도 재능으로도 남의 나라 안에 호의적인 여론을 일으키는 정도는 할 수 있을 터.
그리고 빌헬름 앞에서 말하지 못하는 복안으로는, 이렇게라도 해서 영국을 붙잡아놓을 필요가 있었다. 이미 양면전선의 악몽이 가시화되는 상황에서 미덥잖은 동맹이라도 유지해야 하는데, 어떻게든 영국 내 보수파를 중심으로 대독 유화여론을 이끌어낼 생각을 해도 모자랄 판에, 영국 없이도 독일 홀로 프랑스와 러시아를 이길 수 있다는둥, 신형 전함에서 주도권을 획득하기 위해 이 기회에 얼른 건함 예산을 크게 늘려야 한다는둥 육·해군이 돌아가며 속을 긁고 있었다.
“흠, 하기야 나도 영국에 불만은 많지만, 어차피 앞으로도 함께 가야 할 사이니까. 좋소. 한 번 해 봅시다. 그런데...”
문득 자신이 할머니 장례식 끝나고 귀국할 무렵, 멀리 동양 세 나라의 왕자들이 함께 찾아와 조문하겠다 한 소식이 떠올랐다. 도착했을 때 소소하게 언론에 보도되기도 하였으니 아직 런던에 있을 것인데, 다른 둘은 몰라도 조선 왕자라면 그 아버지 닮아 엉뚱한 일을 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예, 폐하. 말씀하십시오.”
“별 것 아니오. 내 너무 과민하게 생각한 모양이외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엉뚱한 주장이 튀어나올 경우에 항상 대비하도록 하시오.”
자신의 목숨을 위협한 국제 무정부주의의 음모, 그리고 그런 자들이 전횡하도록 방관하였던 기존 국제사회에 대한 비난과 지금부터라도 힘을 합하자는 선동조의 주장까지 온갖 생각이 잡탕처럼 버무려진 빌헬름 본인 명의의 성명은, 가뜩이나 여론의 관심이 쏠려있던 덕에 금방 런던으로도 전해졌다.
조선을 직접 지목하지는 않았지만, ‘최근의 일부 그릇된 흐름’이라고 지칭한 것이 겨누는 나라 중 조선이 있음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그 성명에 동참하여, 이탈리아 국왕 움베르토뿐 아니라 그 전에도 비슷한 음모들이 여럿 적발되었다는 식으로 언론들이 그 무시무시함을 한껏 부풀려 보도하였는데, 따지고 보면 그 뒤에 모두 독일발 보도가 있을 테지만 판매부수가 중한 입장에서는 소식 근원이 베를린이든 부에노스아이레스든 크게 상관 없었다.
“대저 덕의지국 군주가 아국의 기풍을 그릇되었다 여겨, 꺼리는 뜻을 드러내곤 하니 이는 익히 알려진 바입니다. 동궁 저하께서는 너무 심려치 마시지요.”
그러나 세자의 생각은 달랐다.
“이것이 정말 아국의 잘못이라면 참으로 무안하고도 송구한 일이 아닐 수 없소.”
“허나 세상에 어찌 아국이 그런 참담한 난행을 옹호하겠습니까?”
“내가 듣기로, 오이밭에서 신발 고쳐매면 그 또한 잘못이라 하였소.”
사람이 살면서 잘못은 범하기 마련이고, 그래서 그 잘못을 알려줄 벗과 신하들을 많이 두어야 한다는 것이 이척이 아버지에게서 많이 듣던 이야기였다.
특히나 잘 모르고서 실수로 그런 잘못 범하였다가 자칫 큰일날 수도 있으므로, 귀남이 종종 당부하던 말이었는데, 공사관에서 소식 들은 이척의 머릿속에 그래서 곧장 떠오른 것이다.
더구나 이제 나라 돌아가는 사정을 알고 있어야 할 나이라면서 조금씩 듣기 시작한 나랏일 중에, 법국 공사로 머물던 지금의 영상이 덕국 임금의 부덕을 근거로 풍문거핵을 한 바 있었으니, 지금 조선국이 하지도 않은 일로 원한을 샀다고 억울하게만 여길 수 있다는 말인가? 그때의 일이야 본뜻은 신원(伸冤)에 있었으니 그럴 만하다고 하겠지만, 어쨌든 억울하게 욕을 본 셈이 된 덕국 국왕에게는 미안한 일이었다.
“더구나 지금 이 사람이 나랏일 받들어 이곳 구주까지 왔는데, 그러한 일이 있음에 덕국 공사에게만 맡긴다면 이 또한 맞지 않은 듯하오. 그러니 내 성상께 청하여, 흉사 당한 덕국 대군주를 위문코자 찾아가려 하오.”
쇠고집으로는 형제 가운데 으뜸인 세자가 이리 말하니, 민영환이 어찌 뜻을 정면에서 꺾겠는가. 하지만 할 수 있고 없고와는 별개로 옳고 그름을 따지는 데 있어서는 민영환도 세자 못지 않았다.
“군자는 구저기(求諸己, 잘못을 스스로 구함)함이니 세자 저하의 어지신 마음을 어찌 제가 모르겠습니까. 허나 행하지 않은 잘못을 반성한다 하면 그 또한 거짓이니, 군자의 도리가 아닙니다.
또한 이 일은 구주 안에서 벌어진 것이니, 대륙 반대편의 우리가 함부로 나아가 거론할 바가 되지 않습니다. 설령 좋은 뜻으로 다가간다 하여도, 저쪽에서 능히 헐뜯을 수 있는 허물은 많고, 우리가 지킬 도의는 그곳에 없으니, 그에 맞추어 처신할 따름입니다.”
조목조목 논변하니, 결국 오래가지 않아 세자의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그제야 한숨 한 번과 함께 나온 속뜻이 있었다.
“... 실은 두렵게 여기는 바가 있소.”
“무엇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지금 들으니 저 안나기(安那其, 아나키즘) 일당이 범상(犯上)함이 한두 번 일은 아니라 하오. 언로를 넓게 열어 공론에 막힘이 없게 함은 근래 구주뿐 아니라 우리 땅에서도 힘쓰는 바인데, 그렇다면 저 흉당의 모의가 우리 쪽까지 퍼질지도 모르는 일이지 않소? 혹 성덕에 누가 될까 그것이 두려울 뿐이외다.”
겁 많은 것으로도 맞닿는 바 있는 일본국 세자 가인과 함께 숙소에서 사전 뒤져가며 신문 읽던 이척의 본심이었다.
정말 저렇게 흉악하여, 언제든 목숨 버려두고 오직 인군(人君)을 죽여 없애겠다며 날뛰는 무리가 조선 팔도에도 뿌리를 내린다면, 사랑하는 그의 아버지 주상을 포함해 위험해질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많겠는가.
아버지 사랑에 있어서는 이척과 공감할 수 없지만, 그 외에 있어서는 비슷한 심정이던 요시히토도 동감하여, 둘이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심하다가 나온 안이 마침 덕국에서 여러 나라 사람들을 모으겠다 했으니 찾아가보자는 것이었다. 아무리 조선국을 미워하는 임금이라지만, 그래도 사람인 이상 생명 아끼는 마음은 똑같을 테니, 자신들이 끼어서 혹 취할 방도 있는가 듣는다면 꺼릴지언정 대놓고 마다하지는 않지 않겠는가?
그런 논리까지 나오니, 민영환도 차마 계속 말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솔직히 매우 명민하지는 못한 세자를 덕국에, 그것도 다른 두 귀빈과 함께 그대로 놓아보낸다면 도통 안심이 되지 않는 것이어서, 어찌하면 후환 없이 일을 해결할 단서를 얻을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차.
세자가 가진 무정부주의에 대한 근심을 끊어 없애, 잘 해봐야 병문안 정도로 끝내면 가할 일이라는 데 생각이 미친 민영환이 말했다.
“무릇 병법에도 이르기를 지피지기(知彼知己)를 귀하게 여기니, 제가 듣기로도 저들 무리 중에 반드시 사특한 일당만 있는 것은 아니라 하였습니다. 개중에는 아국 공산당과 교분 있는 이곳 윤돈 선비들도 있는데, 생각건대 그들도 이 일에 있어서는 펴고자 하는 뜻이 있지 않겠습니까?”
예컨대 엘러노어 마르크스와 교분 있는 사람으로, 혹 어울리다가 귀국하여 공산당 당여로 간주될까 두려워 민영환이 염두에만 두고 있던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도 있고, 아니면 그 쇼의 친우로 고국과 법국에서 두루 쫓겨났다는 아라사 사람 표트르 크로포트킨(Pyotr Kropotkin)도 있었다.
이것이 무정부주의자 크로포트킨에게, 무정부주의자들 때려잡자는 모임 열리는 베를린에 찾아가려 하니 도와줄 수 있겠느냐는 황당한 요청이 전해지게 된 사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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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듯 등장한 황태자 빌헬름은 카이저 빌헬름의 장남으로,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 호헨촐레른 가문의 정계 복귀를 꾀한 인물입니다. 그러나 히틀러가 ‘장검의 밤’을 통해 나치당 내의 반대파들을 모두 숙청하면서 끝내 좌절하고 정치를 포기하게 되지요. 이름이 아버지와 같은 것은, 후계자 이름을 빌헬름 and/or 프리드리히로만 고집해온 호헨촐레른 가문의 빈곤한 작명철학 때문입니다.
원 역사에서 빌헬름 2세가 당한 봉변은 1901년 3월 6일에 일어났습니다. 빌헬름의 행렬을 구경하던 20세 젊은이 바일란트가 갑자기 빌헬름에게 자신이 들고 있던 고철 조각을 던졌는데, 그것이 얼굴을 맞춘 것이지요. 일설에 따르면 투척한 것도 바일란트 본인의 뜻이 아니라, 갑작스러운 간질 발작 때문이었다고도 합니다 (P. Strotmann (2016.9.13.) “Das Attentat, das keines war.” WK Geschichte.)
움베르토 1세의 암살로 무정부주의자들에 의한 테러리즘이 한창 이슈화되었던 시국이었기에 이 사건도 곧장 암살 시도로 간주되었지만, 곧 검거된 바일란트에 대한 취조가 이루어지면서 사실 무근으로 밝혀졌습니다. 바일란트는 사건 직후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되어, 1939년에 사망하게 됩니다.
베른하르트 폰 뷜로우는 1900년대 독일의 수상으로서, 비스마르크 체제가 완전히 붕괴하고 독일의 외교적 고립이 가시화되는 상황 속에서 나름대로의 외교적 돌파구를 마련하려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빌헬름 2세의 야망과 융커·군부 계층의 팽창주의 여론 사이에 치이면서 결국 1909년 사임하고야 말지요. 하지만 처음 외무장관으로 기용되어 수상에 오를 때까지만 해도, 빌헬름의 비위를 잘 맞추어주면서도 자기 할 말은 어느 정도 하는 편이었습니다. 빌헬름 본인도 처음 몇 년에는 뷜로우에 대해 강한 신뢰를 보였습니다.
원 역사의 아나키즘은 지난화 작가의 말에 언급한 것처럼 20세기로 넘어가는 시점에 수많은 테러리즘 시도로 이어지게 되는데, 이 중에는 극단적 아나키스트뿐 아니라 오늘날 표현으로는 ‘외로운 늑대’들에 의한 범행도 많았습니다. 그 중 하나가 (작중에서는 일어나지 않은) 1898년의 오스트리아 황후 엘리자베트(시시) 암살 사건인데 (공교롭게도 이 또한 이탈리아인 루이지 루케니의 범행이었습니다), 이는 1898년 12월 ‘무정부주의에 대한 사회적 방어를 위한 로마 국제회의(International Conference of Rome for the Social Defense Against Anarchists)’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 배경에는 작중에서와 동일하게, 여론과 각국의 국내정치에 의해 부풀려진 위협인식이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