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251화 (251/320)

83. 밤섬 나라 사람들 (1)

아침부터 진눈깨비 흩뿌리더니, 잠시 먹구름 사이로 해가 고개를 내민 뒤에는 나름대로 눈치를 보았는지 반쯤은 우박인 차디찬 겨울비가 내렸다.

퍽 눈이 드문 겨울이라, 이듬해 봄가뭄을 걱정하던 차 내리는 비였으므로, 굳이 따진다면 궂은 날씨를 고맙게 여겨야 할 테지만, 땅 위의 사정 여의치 않아 감사한 마음 지니기는 어려웠다. 그렇다 하여 하늘이 섭섭히 여기지는 않겠지만.

“세자는 피득혁(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잘 도착했다고 하더이다.”

“아무리 철도의 편리함이 있다지만 만리 타향 향하는 길인데, 그 길의 구천리쯤 될 곳에 무사히 당도하였다니 천근 무게를 절반쯤 내려놓은 심정입니다.”

중전 민씨도 올해 나이 쉰하나라. 대비들 타계한 이래로 옛 내명부 기준으로도 위에 다른 사람이 없고, 공안서 일 내려놓는 만큼 궁내부 일은 거머쥐었으므로 명실상부한 궁중의 큰어른이 되었다.

옛 궁궐 법도로 따지면, 생산한 대군 셋으로 아직 부족함이 있으니 진작에 후궁을 여럿 들였을 것이련만, 그럴 의사 없음을 귀남이 누누이 밝혔고 또 세자에 이어 얼마 전 안양대군까지 득남하였으므로 후사를 들어 이러쿵저러쿵할 여지도 없었다.

얼굴 본 것으로 따져도 거의 마흔 해 세월인데, 그동안 고왔던 얼굴에는 여간 분칠로 숨길 수 없을 만큼 주름이 생기고, 예전과 똑같이 달달한 가배를 마셔도 이제 조금씩 턱밑과 배에 살이 차오를 나이였다.

그중 주름은 근래 유행하는 매헌규방보국(梅軒閨房寶局)제 ‘박가분’을 애용하여 일말의 효험을 보았는데, 그런 사정 모르던 녹화회에서 그 안에 든 납이 사람에게 참 해로운 것이라며 따따부따 떠드는 바람에 급히 다른 것을 찾고 있었지만, 아직 신통치 않았다.

그러므로 민씨가 거울 보며 도로 한숨 짓는데, 이를 전해들은 귀남이 경양대군을 시켜 모후가 할 만한 운동거리를 찾아보라 하기도 했다.

영악한 막내 아니랄까봐, 교묘한 말솜씨로 본인이 그 작업을 하는 동안은 귀남이 속히 장가 가라는 잔소리를 하지 않도록 장담을 받았으나, 암암리에 민씨가 이미 여차하면 세자의 예를 따라 참한 규수 찾아볼 생각으로 한성 벌열가 곳곳에 뻗친 무시무시한 명부사의 연줄 – 다시 말해, 결혼한 궁인들 – 을 움직이고 있었으니,호랑이 무서운 줄만 알고 등 뒤의 이리는 몰라보는 셈이었다.

“그와 더불어, 함께 간 다른 젊은이들도 무고할뿐 아니라 잘 어울리고 있다 하니, 비록 구주 찾아가게 된 까닭이 경사는 아니라지만 그래도 좋은 일 아니겠소.”

세자가 멀리 가게 된 까닭인즉, 개국 510년(1901) 벽두부터 전해온 영국 여왕의 부고 때문이었다. 비록 말년에 다병(多病)하였다지만, 축수(祝壽)하는 백성 많아서인지 그만큼 천수 누리고 간 셈이었다. 향년이 여든하고도 넷이라, 영종대왕(영조)보다도 치세의 햇수가 많았다.

물론 처음 문상의 일이 거론되었을 때 조정에서도 갑론을박이 가볍게나마 일었다. 만국의 형세가 어떠하다 하는 것이라면 깜깜이 겨우 면한 사람이 많지만, 만국의 예법으로 말하자면 지금쯤이면 외려 어지간한 구주인보다 더 장황한 논설을 늘어놓을 수 있을 자유당 내각이었다.

대등한 다른 나라의 국주(國主) 문상하는 법도는 경(卿)을 보냄이 마땅하니, 김옥균을 보내자는 자유당 일각의 사심 들어간 주장도 있고,

반대로 다른 구주 나라들은 그 나라 국왕이나 세자가 직접 가서 조문하므로 그 예에 따라 세자가 친히 감이 어떻겠냐는, 무엄함 무릅쓴 조심스러운 말도 있었으며,

예의 적용에 친소(親疏)의 차이가 있어 구주 사이의 법도를 조선에 그대로 적용할 수 없으므로, 둘을 절충하여 한 번 다녀온 안양대군이 다시 다녀옴이 어떻겠냐는 의론도 있었다.

허나 귀남 생각에, 이미 그 나라에서 일전에 대군을 초빙하는 예를 보였고, 더구나 나라 문호 연 이래 영국으로부터 많은 덕을 보았으니 따지자면 훙서한 영국 여왕도 조선국의 은인이었다. (또한 신하들 앞에서 결코 밝히지 않을 사심으로는, 안양대군 해외여행 하는 동안 군문에 있던 세자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

그리하여 은인의 나라에 흠례(欠禮)함이 맞지 않다고 한 마디 내었더니 무게추가 단번에 기울어졌다.

“또래 젊은이들과 어울림은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세자는 나라에서 귀하기로는 전하에 버금가니, 형제간에도 마음 트지 못하는 바가 있겠지요.”

“심정 선량하니, 안양 앞에서도 터놓지 못함이 있었겠지. 세자 장래 생각해도 과히 나쁘지 않은 일이오.”

말이야 그렇지만, 어디 가서 남에게 당하고만 있지 않을 안양대군보다 우직한 세자가 조금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니 이렇게 부부가 더불어 ‘세자에게 좋은 일이다’ 하며 주거니받거니 장담해주고 있는 것이었지만.

“좌우지간, 잘 지내고 있다 하니 일본국에서도 한시름 놓을 듯하오. 아무리 불민하다지만 그렇게 남의 나라에 와서 저들 종실 험담을 하다니, 그 나라도 참.”

조선이야 저가 좋아서 세자를 보냈다지만, 옆나라들에게는 본의 아니게 심란한 일을 만들게 되었다. 동맹의 구도로 따져 반대편에 있는 조선이 그러하니, 같은 편인 일본이나 어느 쪽에도 따로 속하지 않았지만 자존심은 남은 청국도 가만 있을 수는 없던 것이다.

저의 동생에게 좋은 구경 시켜주고 또 장차 험난해질 지도 모르는 청국의 정국에서 구주 연줄 하나가 귀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자이티얀은 신임 총통 장지동 – 총통 출마가 병상에 누운 이홍장의 마지막 부탁이었다고 하였다 – 을 설득해 순친왕 자이펑을 보내기로 했다.

그리되니 부득불 일본국에서도 태자 하루노미야 요시히토(明宮嘉仁, 후일의 다이쇼 천황)를 보내야 하는 상황이 되었는데, 국내에서야 ‘천황께서 계시는 만세일계의 일본’ 운운하지만 실제로는 고쿄(皇居, 황궁)와 영 불편한 사이였던 요시노부의 애국공당 내각 입장에서는 참으로 곤란한 일이었다.

그리고 요시노부와 정부에 곤란한 일이라면 심사 뒤틀리기로 일본국 제일인 메이지 천황에게는 환영할 일이라, 별 기대도 않고 있던 둔재 아들녀석이 이럴 때 쓸모 있겠다며 적극적으로 찬동하고 나섰다.

비록 스승 다케히토 친왕(有栖川宮威仁)이 따라붙는다고 하지만, 병약하고 우둔하다는 평이 워낙 많았기에 외교적인 문제를 일으킬 공산이 적게 잡아도 백에 한둘은 될 것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곤란해하던 중, 문제의 근원 조선국에서 제의하기를,

‘구주 땅은 열국이 병립한 것이 오래되어, 그 왕실들 사이에 교유하는 법도도 여러 해에 걸쳐 이루어진바 배울 바가 없지 않습니다. 예컨대 몇 해 전 아라사 세자가 내방하였을 때 익히 드러났듯, 대통을 잇는 귀한 분들이 무리지어 교유하면서 좋은 교분을 쌓으니, 이것이 종실을 두텁게 하고 또 나라 사이 수호하는 양책(良策)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이제 정한론 함부로 꺼내지 못하게 되었으나 성질은 어디 가지 않은 못된 무리들이야, 일본국이 조선에 골탕 먹은 것을 모두 합하면 어쩌면 분로쿠와 게이쵸의 역(文祿·慶長の役, 임진왜란·정유재란)을 앙갚음하고도 남았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수근대겠지만, 요시노부 한 사람 입장에서는 사실 조선 덕에 자신이 ‘양복 입은 쇼군’ 된 것과 다름없어, 저 제안을 환영할지언정 거부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리하여 요시노부 쪽에서 어찌하면 ‘우리 동궁 전하를 잘 부탁드립니다’라는 말을 최대한 돌려 하면서도 오해의 여지가 없게 할까 고심한 끝에 겨우 감사의 뜻을 보냈는데, 막상 세자의 말을 들어보니 일본국 세자 가인(요시히토)은 저와 성정 비슷하여 의외로 금방 친해진 모양이었다.

그러니 귀남이 판단하기야, 일본국에서 그 ‘천황’과 신하들 사이가 영 불편하다 하였으니 못난 마음에 저들 윗사람 험담하였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기야, 그런 엉터리 충심이었으니 전생에서도 읍내에서 ‘황국을 위하여 일억옥쇄(一億玉碎)’ 외쳐대던 자들이 정작 광복하던 팔월에는 몰래 내뺀 것 아니겠는가.

“다만 한 가지 걱정은... 아, 아닙니다.”

“무엇이오?”

“여인의 기우(杞憂)에 불과합니다.”

공안서 일에서 손을 떼었다지만, 한성 안에 있을 세작들의 동향을 파악함에 있어서는 궁내부의 혼인한 여관(女官)도 한몫 거들기 마련이라 김가진과 종종 연락 주고받던 민씨가 성급히 말을 돌렸다.

“그리 말하고 나서 아무것도 아니라 하면 누가 믿겠소.”

“실은...”

영국 여왕이 세상을 떠나면서 졸지에 함께 묻힐 뻔한 소식으로, 구주에서 간악한 모의 하는 흉당(凶黨)의 소식이 있었다.

그 흉당 신봉하는 바는 곧 ‘무군론(無君論, 아나키즘)’인데, 처음 최익현 통해 조선에 소개되기로는 천하의 몹쓸 종자들이었다. 거기에 칼 마르크스로부터 내려오는 제1인터내셔널에서의 구원(舊怨)으로 보나, 얼마 전 전봉준이 『모순론(矛盾論)』 내면서 재천명한 노선으로 보나, 만민공산당 입장에서도 무정부주의자들을 좋게 보아줄 이유도, 용의도 없었다.

물론 무정부주의자 쪽에서도 파리 코뮌에서부터의 악연이 있었고, 또 최근의 간악한 분열 술책이 조선에서 기인하였다는 의혹이 조금씩 제기되고 있었기에 역시 이 동쪽의 옛 은자 나라에 감정 좋을 리 없었다.

그런 판에, 내부의 고변으로 이태리국 임금을 시해하려는 흉모(凶謀)가 적발되었다. 붙잡힌 불례시(가에타노 블레시)는 자결하기 전 외치기를,

‘모든 왕에게 죽음을! 모든 국가에 파멸을!’

이라 하였다고 하니, 근래 별 해괴한 소식도 사람들 눈길 끌고자 다 싣는다는 악평이 생긴 『해동일보』조차 함부로 옮기지 못해 조선에서는 전모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공안서 귀에는 고스란히 들어왔다.

“어디를 가든 간악한 자는 있기 마련이니 사람 사는 세상의 어쩔 수 없는 설움이오. 허나 그 무리가 저들 나라 안에서도 성공치 못하였으니 수완 변변치 않음을 알 수 있거니와, 설령 노린다 하여도 다른 임금들을 노리지, 우리네 걱정하는 그런 일을 벌이겠소이까?”

누구 달래는 데는 영 재능 없는 귀남이 말했는데, 말하고 나서 보니 저도 계속 머리 한 구석에 맴도는 것을 금치 못하였다.

결론적으로 귀남의 말은 들어맞았는데, 일부만 맞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모두 들어맞았으니 문제였다.

한 나라 안에서도 세자가 공무(公務)로 움직임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세 나라의 귀인이 한꺼번에 멀리 나아감에 있어서는 어떻겠는가?

그나마 조선국은 부왕 즉위 후에 번다한 예를 없애고 도로의 편리함을 널리 갖추어 예전처럼 거둥 한 번에 막대한 비용이 따르는 일은 없게 되었다지만, 그것도 고작해야 인천부 공장이나 양주 비행장 살피러 갈 때의 일이다.

그러므로 한성에서 – 옆의 일본국 가인은 동래에서부터 – 기차에 몸 싣고서 심양 당도한 것은 온갖 전후의 준비로 인해 출발이 족히 늦어진 뒤여서, 이미 여왕의 국상이 윤돈에서 이루어지고 있을 때였다.

허나 조문하는 뜻은 변함이 없고, 또 그만큼 아주 세 나라가 함께 찾아옴은 의미가 있는 것이므로, 시일 늦어짐이 문제되지는 않을 것이었다.

“...라고 순친왕이 그러더이다. 그러니 그대는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익숙한 한강에 비하면 그리 강폭이 넓지도 않고, 또 이곳 날씨는 장마로 큰물 생기는 일이 없다 하였거늘 어째서 속요(俗謠)로 무너져내린다고들 한다는지 알 수 없는 윤돈교(倫敦橋, 런던 브릿지)의 이름난 두 탑을 보면서, 이척이 요시히토를 달랬다.

기차와 배편을 합해 한 달을 내리 달려왔으니 아무리 젊은 나이라지만 몸이 축남은 어쩔 수 없었다.

‘옛날 연행길 오갈 때는 한 번 사행에 반 년은 족히 걸렸고, 요동팔참 지나는 데만 한 달이 걸렸다고 한다. 몸 편히 지구 반대편까지 가는 것이 얼마나 편하더냐.’

하는 것이 차마 몸 조심해서 다녀오라고는 앞에서 하지 못하는 귀남의 말이었는데, 반대로 세자 본인이 꽤 힘들다 여기고 병약한 요시히토는 중간에 한 번 앓아누울 뻔하기까지 하였으므로 대체 그때는 어떻게 오갔는지 모를 일이었다.

“고맙습니다.”

저 때문에 늦었다는 얘기 나올까 노심초사하던 요시히토가 조용히 답했다.

“그리고 영국의 사왕(嗣王)께서는 자동차를 좋아하시니, 비행기도 좋아하실 것이외다. 설령 언짢게 여기신다고 하여도 한양에 연통 넣어 한 대쯤 진상하겠다 하면 혹 노엽게 여긴다 하신들 금방 마음을 푸실 것이오.”

이척 주변에 자동차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부왕과 동생이 있는데, 두 사람 모두 비행기도 좋아하므로, 그가 세자시강원 있던 시절 배웠던 서양의 논변학에 따르면 영국의 새 임금도 그러할 공산이 컸다.

물론 진지하게 한 말은 아니요, 오는 사이에 말 트다 보니 비슷한 구석 있어 꽤 아끼게 된 가인 생각에 하는 농이었다.

“또 영국은 아라사와 사이가 좋지 않으니, 만약 누가 무어라 한다면야 이게 다 아라사 철도가 신통치 않은 탓이라 하면 되지 않겠소?”

모르는 사람이 보면 진담이라 여길 만큼 무심하게 툭 던지는 엄청난 말에, 언제 걱정했냐는듯 요시히토도 피식 웃었다.

처음 동래에서 만났을 때 잔뜩 주눅들어서, 그 스승이라며 따라붙은 무슨 친왕의 눈치를 보던 것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항상 가인의 옆을 지키던 그는 처음에는 눈치를 주면서 둘 사이에 이렇게 대화하는 것을 막으려 했는데, 그것이 하루이틀 일로 그치지 않고 나중에는 이척의 언질 받은 순친왕까지 합세하자 끝내 포기하고야 말았다.

‘조선국 세자께 간청드리옵나니, 부디 구주 열국의 국인 앞에서만은 자제하여 주십시오.’

저쪽에서 먼저 백기를 들었으니, 참령 하던 사람으로서 투항하는 적을 어찌 더 건드리겠는가.

어느새 강어귀도 지나, 국상을 맞아 간소한 환영 행사가 준비된 부두에 당도하였다.

환영하는 인파랄 것은 딱히 없으나, 대신 정중한 기색 완연하여, 당초 일각에서 걱정하였던 것처럼 대접이 소홀하거나 할 일은 없을 듯했다.

그런데 꼭 군무에 턱걸이나마 해보았던 이척이 아니라 할지라도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어째 경비가 삼엄해 보입니다.”

“그러게 말이오. 우리가 대륙 건너오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우리 탓은 아니겠지요?”

“우리가 무얼 한 게 있다고 탓을 하겠소? 염려치 마시오. 우선 내려서 곡절을 물어보면 될 일이니.”

내려서 물어보았더니, 과연 그러하였다.

내심 요시히토가 걱정하였던 것과는 달리 조선이나 청, 일본의 탓은 아니었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조선 탓이라고 할 만도 하였다.

할머니의 상을 마치고 독일로 돌아가, 브레멘 시를 순방하던 카이저 빌헬름이 괴한의 습격을 받아 쓰러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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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에서 이척이 본 것은 런던 브릿지가 아닌, 조금 더 하류에 있는 타워 브릿지(Tower Bridge)입니다. 양쪽에 솟은 높은 탑 덕에 런던의 랜드마크로 유명하고, 그로 인해 훨씬 유서 깊지만 지금은 별 볼 일 없는 진짜 런던 브릿지와 혼동되곤 하지요. ‘런던 브릿지가 무너진다(London bridge is falling down)’라는 동요는 이미 1718년 곡조가 채록되고 1879년 미국의 세계 동요집에도 수록될 정도로 작중 시점에서도 유명하지만, 정작 그 노래의 근원이 된 런던 브릿지 위의 무허가 건물들은 구 런던 브릿지와 함께 철거된 지 오래입니다.

원 역사의 빅토리아 여왕은 1901년 1월에 사망하였는데, 작중에서도 비슷하게 숨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각종 노환으로 고통받던 말년을 생각하면, 딱히 이상할 일은 아닙니다. 빅토리아 여왕의 장례식은 임종을 지킨 아들 에드워드 7세와 외손주 빌헬름 2세를 비롯해, 역대 가장 많은 왕과 왕족이 모인 행사이기도 했는데, 이때 영국에서 교육받고 있던 태국의 왕자 와치라웃(후일의 라마 6세)을 비롯해 빅토리아 여왕과 직접 혈연으로 이어지지 않은 왕족들도 대거 참석한 바 있습니다.

메이지 천황은 내향적이면서 보수적인 성격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신정부와 딱히 사이가 좋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정부가 주도한 천황 신격화와 이를 통한 국민정체성 형성 정책에는 잘 따랐지요. 그러나 아들에게까지 이어지는 대인기피증으로 인해, 후일 다이쇼 천황으로 즉위하는 아들(서자였으나 유일하게 성년까지 살아남은 아들이었기에 태자가 되었습니다.) 요시히토는 사이가 좋고 나쁘고를 떠나 거의 만나지 않았다고 하지요.

그로 인해 어려서부터 병약하고 내성적이었던 다이쇼 천황은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결혼 후에 잠시 자유로운 생활을 했지만 아버지가 요독증으로 사망하면서 다시 불행이 찾아오게 됩니다. 답답한 궁중 생활로 고통받던 그는 재위 직후부터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곧 보행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와병생활을 몇 년간 이어가던 중 사망하게 됩니다.

주의가 산만하고 한 번 생각한 것을 바로 말하는 버릇이 있어 둔재 혹은 정신이상으로 취급받았지만, 인간적으로는 선량하고 매력적이었다는 회상이 있습니다. 또 야사에 따르면 일본에 와 있던 영친왕 이은에게도 관심을 가져서, 조선어를 사적으로 공부하려 했다고도 하지요. 작중에서는 평소 소원이었던 유럽 여행과 더불어, 영친왕 대신 그의 이복형 이척과 교우하게 되었습니다.

19세기 후반은 다양한 정치사상과 더불어 정치적 테러가 횡행한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앞서 등장한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 사건에 이어, 작중에서는 무산된 프랑스 대통령 사디 카르노의 암살이나 역시 무산된 가에타노 브레시의 이탈리아 국왕 움베르토 1세 암살이 그 예라 하겠습니다.

이 두 사례 모두 이탈리아(계) 무정부주의자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특징이 있는데, 이른바 ‘행위에 의한 선전(Propaganda of the Deed)’ 독트린에 입각하여, 극단적인 정치적 행동으로 혁명적 변화를 촉발한다는 목적의식을 가지고 이루어졌습니다.

원 역사 조선에서는 1910년대~20년대를 풍미하였던 화장품인 박가분이 조금 일찍 등장했습니다. 두산그룹의 비조 박승직 회장이 꽤 성공을 거두었던 ‘박승직상점’ 운영을 잠시 접어두고 광무개혁 시기에 관직 진출을 시도하였던 원 역사와는 달리 상업에 죽 매진한 결과로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유해성 논란도 (박가분의 주 성분은 백납이었습니다.) 일찍 일어나면서 졸지에 히트 상품 하나가 일찍 무대에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에도 막부 시기의 공가-무가 관계는 복합적인 면모가 있는데, 한편으로는 천황을 통제의 대상으로 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통치 정당성을 위해 협조하고 때로는 도와야 하는 대상으로 보았습니다. 전후 일본에서도 천황의 중심적 지위에 대한 재조명이 일본의 경제적 부상이 정점에 도달하여 미국까지 위협할 정도에 이르렀을 때에 이루어졌으며, 그 전 고도성장기에는 오히려 굳이 천황에 의존할 필요가 없었기에 천황에 대한 관심 자체가 약한 모습이 나타났는데, 국내 통치에 큰 문제를 겪고 있지 않은 작중 일본 입장에서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조상의 방침을 이어가는 것은 이 때문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양익모(2019). “에도막부의 천황관에 대한 재고- 천황에 대한 막부의 통제를 중심으로.” <일본사상> 37; 이상봉(2005) “전후 일본 보수정치와 상징천황제: 1990년대 신국가주의의 상징천황 이용을 중심으로.” <21세기정치학회보> 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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