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250화 (250/320)

82. 날아 오른 용 하늘에 있어 (3)

잠깐 떴다가 고꾸라진 비행기는 뼈대가 꽤 상했는데, 그래보아야 나무와 천으로 만든 것이라 사흘 공들여 고친 뒤에 다시 날린즉 이번에는 반 리가량을 날아가, ‘비행’이라는 말을 남부끄럼없이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임금이 ‘날았다’ 함은 거짓이 아니요, 그저 참말을 외상으로 한 셈이 되었다.

물론 그렇다 하여도 귀남 머릿속에 있는 그런 비행기는 물론이요, 『경화시보』 펴내는 곳에서 달마다 내는 『경화설총(京華說叢)』에 실리는 소설 속 문물과도 거리가 한참 있었다. 허나 이를 가지고 논박의 근거로 삼으려는 정객들이 어찌 그런 사실에 구애되겠는가.

“그러니까 가만히 있자고 했잖습니까. 가만 있어도 비룡재천(飛龍在天) 형국인 것을 너무 날아올라 항룡유회(亢龍有悔) 되었으니 이제 어찌하실 것입니까?”

섭영 속에서는 위풍당당하게 날아오르는 비행기 양날개에 이규 정위가 제안해 그려넣은 건괘(乾卦) 선명하니, 누군가 제멋대로 이름 붙이기를 건비호(乾飛號)라 한 것이 그냥 ‘나는놈(Flyer)’라 부르는 것보다 훨씬 있어 보였기에 라씨 형제의 의사와 무관하게 그 이름이 널리 퍼졌다.

그러므로 『역(易)』의 건괘 문언(文言) 가져와, 용이 너무 높이 올라가 도리어 후회하게 되었다며 박영효가 비꼬는 것이었는데, 김옥균은 그리 마음 흔들리지 않은 듯했다.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이요, 날아오른 비행기는 날아올랐을 뿐인데, 그에 맞추어 대처하면 될 것을 무에 호들갑인가.”

“호들갑은 저쪽에서 떨고 있는데 우리는 할 말이 없으니 난국 아닙니까?”

말 많고 탈 많은 김옥균이지만, 재지로 보나 명성으로 보나 그를 갈음할 만한 거물이 없는 것은 어쨌든 사실이라, 박영효도 뒤에서 열심히 험담은 할지언정 ‘그래도 고균 형 말고는 없다’ 하는 생각을 버리지는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잘 되어가던 추거 준비를 엉뚱한 논설로 헝클어뜨렸으니, 원망하는 마음 들지 않는다면 그것이 곧 성인군자일 테다.

“애초에 득실을 따졌더라면 이 일을 거론하지도 않았을 것이야. 형세로 따져도 가만히 앉아 얻을 수 있는 추거요, 또 성상께서 이 사람을 불러 함께 관람하자 하시었으니 어심도 비행기에 있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지 않았는가.”

개화당 당사 안 집무하는 방에 어지럽게 늘어져 있는 종이를 주섬주섬 정리하며 김옥균이 덤덤히 말했다.

“아니, 그렇다면 대체 왜...”

“만일 집정의 절요(節要)가 성심(聖心) 따름에만 있다면, 국제는 어찌하여 그리 제정하였으며 또 총리대신이나 참의대부는 왜 두었겠는가?”

신미년 이후에 상투 튼 참의대부들 사이에서 조금씩 불만이 일고 있었다.

그들도 저들 고장이나 당의 대의를 위하여 발의하고 싶은 사업이 많은데, 그를 위한 재정은 항상 부족하고, 그런데 항상 많은 국용을 떼어가는 군부는 멀쩡히 있었다.

몇 년 전에 끝났다고들 여기는 황란 동안 일본국이 부쩍 따라붙었는데, 이것이 그간 과하게 군비를 지출하였기 때문이며, 그러니 언제고 참의원 사람들이 목소리 모아 국헌으로 부여된 국용산정(國用算定) 권한을 제대로 써서, 문무 백관에게 나랏일 맡기신 큰 뜻에 부응해야 하지 않겠느냐 여기는 자들도 없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일리 있는 것이지만, 그렇기에 정말 무비에 들어가는 국용을 삭감하자는 것이 공론으로 나온다면 그때는 돌이킬 수 없게 될지도 몰랐다.

“자네도 알지 않는가. 그 뜻하는 바는 다르지만 은연중에 조금씩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국용 쓰임 두고 볼멘소리 나오는 것을. 그것이 엉뚱한 쪽으로 흐르지 않게 하려면 부득이한 일이었네.”

주변에서 과하였다 하니 그리 보일 수도 있겠거려니 하지만, 그와는 별도로 자신이 실은 논설이 잘못되었다고는 여기지 않는 김옥균이었다.

“그리고 원래 남들 눈치는 잘 안 보는 성정이 내 고질이지 않은가. 자네가 참게.”

“그 말을 왜 고균 형께서 하십니까.”

감탄할 만한 뻔뻔함이야, 사실 어제오늘 일도 아니지만, 김옥균이 저의 허물을 스스로 인정함은 오늘에야 있는 일이었다. 그에 생각 미친 박영효가 되물었다.

“그런데 진심으로 고질이라 여기십니까?”

“내 어디 가서 반성도 잘 하지 않거니와, 설령 그런 일 있더라도 도저히 고칠 수 없으니 천성이요 고질이지. 그러나 다른 때라면 몰라도 이번에는 인신(人臣)으로 간언하고자 한 마음뿐이었으니 그 후과도 남에게 돌릴 것 없이 내가 짊어져야 하지 않겠는가.”

근래 고심 많다 들었는데 또 마음 속 어디가 꼬인 것인가. 아니면 정말 사람이 나이 먹다 보면 바뀌기도 하는 것인가. (만약 후자라면, 가뜩이나 올해 나이 마흔으로 기력 쇠할까 두려워 연해주 녹용을 남몰래 구하고 있는 박영효로서는 퍽 두려울 것이었다.)

“자, 입궐할 시각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네. 얼른 받은 글이나 건네주게.”

“전쟁이라...”

“그렇습니다. 전하.”

용상에 오른 임금이 노성 내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았는데, 귀남 입장에서는 팔자에도 없던 호의호식 하면서 여러 사람 도움 받고 있으니 짜증이나 심술은 부릴지언정 크게 노엽게 여길 이유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간혹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다면 굳이 목소리 높일 것도 없이, 정중하게 불러 타이르거나 적당히 그 일 관할하는 자 – 혹은 그런 자의 상관 – 불러와 이러이러한 사안은 다시 살핌이 좋겠다 하기만 하면 알아서 잘 이루어지곤 하였다. 삼십 년 전 전쟁을 하자며 망언한 그 이 아무개나, 저의 명에도 불구하고 중전에게 큰 슬픔을 주었던 내의원 정도가 예외였다.

허나 그럴수록 궁인들은 수군대기를, 저리 어지신 분께서 발끈하실 때야말로 땅이 흔들리고 하늘 뒤집히는 것이라 하였으니, 일례로 십수 년 전 아직 철들기 전의 경양대군이 하루는 쪼르르 달려와 묻기를,

‘아바마마, 그 신미년 이필제에게 벼루를 던지셨다는 것이 참이옵니까?’

하는 일이 있었다.

아마 중벌에 처하였다며 비유한 표현을 어린 마음에 곧이곧대로 듣고서 오해한 것일 터였다. 어차피 저를 두고 궁인들이 무어라 수근대든 악의 없음은 알고 있으나, 혹 지나치게 폭력적인 내용이 아이 교육에 좋지 않을까 걱정되어 언제고 중전 민씨에게 이르기를 궁인들이 간혹 언사 험할 때가 있다 하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그렇게 억눌렀기 때문에 음지에서 더욱 부풀려지는 게 아닌가 싶었다.

을미년 출병에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전쟁이라는 그 무서운 말을 먼저 찾아와 꺼낼 만한 사람은 그러니 어지간히 눈치가 없거나, 어지간히 담이 크거나 할 것이었다.

독대 청한 김옥균이 들어왔기에, 가볍게 ‘거 아들녀석이 저 좋아서 비행기 날린다는데 어째 그리 트집을 잡았소’라며 운을 떼었더니, 그럴 것 같지 않은 사람이 곧장 사과하는 말을 올렸다. 그런데 그 다음에 이어서 한다는 말이 곧장 장차 닥쳐올 큰 전쟁이었으므로, 아마 김옥균은 두 가지 유형에 모두 해당한다 해야 할 것이다.

“그때를 대비하여야 한다고 논의 내어놓으면 곧장 반박하는 말이 나올 것이었으므로, 비행기와 같은 기물이 세인의 이목을 현혹시킬까 두려운 마음에 성급하게 트집을 잡았습니다. 이는 엄연히 옹졸한 신의 잘못이므로 허물을 주신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허나 저의 그 논설에서 입론한 바는, 적어도 신의 생각에는 하등 틀림이 없습니다.”

김가진에게 상께 언제든 직고하라 단서 붙이고서 부탁하기를, 옛적 운현궁 정강사 모임에 끼었던 무관들과의 연줄이 되어달라 하였다.

특히나 항상 국용에 목마른 수사 사람들이 적극 참여하였는데, 예전 정강사 모임에서도 곁다리 취급이었기에 – 옛날 노이합제(누르하치) 날뛰던 시절도 아니고, 바다로 북변 오갈 일은 없지 않은가 - 이번에야말로 동아줄 잡아볼 생각에서였다.

“예컨대 수사의 일만 보아도, 구주 나라들이 재차 새로운 전선 창제하기를 시작했으니 바다 위에서 천하 제일이라 일컫는 영국이 그 앞에 있다 합니다. 덕국 또한 이미 높이 올라섰으나 만족히 여기지 않으니, 국법을 새로 정하여 거함을 스스로 만들겠다 하니, 아주 일원은 화평하나 그 바깥에서는 다시 어지러움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공식적으로는 영국을 도와 러시아와 프랑스 함대를 북해와 발트해, 그리고 세계의 기타 여러 구석에서 견제하겠다며 야심찬 건함에 나서고 있는 독일이었다. 그에 대응하듯 영국도 파슨스의 터빈을 이용한 새로운 전함과 순양함 건조 계획을 검토하고 있다고 공개하였는데, 겉으로 내세우기로는 독일이 양을 책임지는 만큼 영국은 이제 질을 제고하겠다는 것이었지만, 아마 실제로는 독일의 추격 시도를 좌절시키기 위함일 것이었다.

“아주 나라들은 평온하여 서로 다투지 않으니, 인명 상하지 않음은 물론 좋은 일이나 그로 인하여 병비가 소홀해지는 폐단은 피해야 할 것입니다. 아국뿐 아니라 청국이나 일본국도 이제 그럴 기미가 보이고 있습니다.”

그나마 조선은 성상의 뜻 확고함을 모두가 알고 있어, 예컨대 군대 가는 장정 수를 줄이자던가 그 기간을 단축하다는 이야기를 (아직) 함부로 꺼내지는 못하지만, 일본국은 조선 무섭다 외치는 이들이 있어 겨우 예산을 지켜내는 정도이며, 청국은 사정이 더하였다.

남·북양 및 여타 성의 함대 대부분을 합하여 ‘대양수사(大洋水師)’를 꾸리고, 남북양 어느 쪽에도 연이 없는 복건성 사람 살진빙(薩鎮冰)을 초대 대양제독으로 삼기까지 하였으니 모양새는 그럴듯하였으나, 살진빙은 작고한 이홍장이나 저도 중원 대란에 책임 있다면서 벼슬 내려놓고 국민당 자문으로 합류한 장지동처럼 저의 세력 그러모으기 위해 새로 거함을 들여오거나 할 힘도, 뜻도 없을 것이었다.

“허...”

“물론 지금 아국이나 다른 나라를 함부로 대할 구주 나라는 없습니다. 그러나 병비란 쓰임 없다 하여 가볍게 여길 수 없음이요, 더구나 장차 천하 대란을 도의로써 수습하기 위해서는 부득불 군병의 힘이 함께하여야 할 것입니다.”

몸만으로 따지면 저와 동갑이지만, 넋은 그렇지 않아 부지불식간에 저보다 어리다고 여겨왔던 김옥균이었는데, 그의 말이 얼마나 이치에 닿는지는 귀남이 홀로 가타부타 따질 것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가볍게 저의 욕심만을 차리고자 난언 내놓음은 아닐 것이었다.

“천하의 일을 헤아림에 경이 빼어난 것을 내가 어찌 의심하겠소. 그러나 한 가지 묻고자 하오.”

“하문하시옵소서,”

“우리가 뜻을 정한다면 정녕 저들과 같이 거함을 거느리고 위세를 얻을 수 있겠소?”

남이야 어떻게 오해를 하든, 귀남이 지금까지 툭하면 군대의 일을 두고 이래저래 지시해온 것은 오직 전생의 그 설움을 면하기 위함이었다. 괜히 남을 건드려 원한 살 일 만들지 말자 하는 것이라면 모를까, 그렇게 남을 건드릴 만한 힘을 길러서 무언가 거창한 것을 이루어보겠다 하는 생각은 따로 없었다.

더구나 그렇게 거창한 소리 하면서 자신 있게 무슨 성전이니를 외치던 나라가, ‘귀축영미’와의 싸움 몇 년 만에 놋쇠그릇 공출해가던 것을 기억하고 있지 않던가.

“어찌 해보지 아니하고 가부를 논하겠습니까? 재차 사죄하면서 구차히 변명하자면, 신이 비행기를 근거로 허황된 논설 내놓는 것을 경계하고자 하였던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안작(雁雀)을 면하였다 하여 곧장 대붕(大鵬) 되는 것은 아닐진대, 무릇 병(兵)이란 마음대로 되지만은 않는 것이외다. 물론 경의 말대로, 나라의 간성(干城)이란 인재나 도의만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으니 필히 방비함이 가할 것이오. 이에 있어서는 그대의 뜻이 상찬할 만하다 하겠소.

그러나 장차 천하 대란이 찾아올 때를 어찌 대비할지에 있어서는, 구주 나라를 따라 성급히 전선을 만들어내는 것이 꼭 상책일지는 모르겠구려.”

지난 생에 듣기로, 일본 무너뜨린 공은 무슨 거함이 아니라 무서운 원자폭탄 두 발에 있다고 했다.

학식 짧은 자신은 그것이 정확히 언제 이루어진 일인지는 모르지만, 다시 말해 지금 열심히 군사력을 길러보아야 잘못하면 후에 무용지물이 될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꼭 수사를 정비해야만 천하 전란 가라앉힘에 한몫 거들 수 있겠소?”

“그것은...”

자신 있게 대답하려던 김옥균 말문이 멎었다. 어쨌든 비행기는 정말로 날지 않았던가? 자신이 정말 자공이 되려거든, 때로는 안연보다 못할 때 있음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신이 부족하여 함부로 가부를 논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어찌 앞날을 모두 꿰뚫어볼 수 있겠소. 하지만 내 경의 말을 들으니, 확실히 앞날을 대비할 필요가 있을 듯하오.”

옛적에 흥선대원군도 저를 위하여 운현궁에 무관들을 모아 북벌 궁리를 함께 했다고 했던가.

“공안서에서 듣기로, 그대 당이 이번에 뛰어난 인재를 모아 사사로이 모임을 꾸렸다 들었소. 그들에게 시켜서 함께 고민하게 함은 어떻겠소? 어쩌면, 그렇게 고민하다 보면 지난번처럼 비전지전(非戰之戰) 계책이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외다.”

그리하여 공식적으로는 군부 아래에 다시 정강사 모임이 부활하게 되었는데, 세간에서는 이르기를 김옥균이 어심 거스른바 그가 개화당 안에서 모았던 인재들을 고스란히 바쳐 그런 모임을 창안하였다 수군대곤 하였다.

그러나 어쨌든 임금 귀남이, 개화당에서 내놓은 논설에도 일리가 있다고 기무회의에서도 발언해주었으니, 무슨 거래가 있었으리라 짐작하는 것과는 별개로 개화당 손해는 아니었다.

“허, 이것이 장안 떠들썩하게 하는 그 건비 비행기더냐.”

“예, 형님. 벌써 꽤 수효가 많습니다.”

동력 일으키는 부품을 제하면 무슨 기기묘묘한 재료 요하는 것도 아니요, 동체는 나무와 천으로 만드는 것이라, 라씨 형제는 그날의 ‘성공’ 이후 곧장 여러 비행기를 만들고 있었다.

물론 벌써 누구에게 팔거나 할 생각은 아니요, 날개의 모양과 너비를 어찌 하여야 가장 잘 나는지를 살피고자 많이 만들어둔 것이니, 엄밀히 따지면 모형만 만들어도 될 것에 헛되이 공력 들이는 일이었다.

그러나 무슨 일인지 김옥균이 입장 확 바꾸어, 근근이 1당 자리 지킨 지난 추거 이후로 융비총국 재정을 대범히 내어주기로 하였으니, 이 정도의 낭비야 낭비라 하기도 무엇하였다. 더구나 이렇게 창고에 죽 여러 대가 늘어서 있었으므로 사실 만듦새 허술하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는 사람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자못 웅장하였다.

정위 이규의 새 부서는 무엇을 하는 곳인가 궁금하여 찾아왔다는 세자와 경양대군도 그런 사람에 들었다. 특히 성정 진중하지 못하고 또 첫째 형과 달리 반드시 진중해야 할 처지도 아닌 경양대군이 촐랑대며 말하기를,

“형님, 제가 타봐도 됩니까? 듣기로는 장차 여기에 사람 태우고서 강남도, 일본도 갈 수 있게 될 것이라던데.”

하니, 저도 아버지 눈에는 똑같이 촐랑대는 것처럼 보임은 모르는 안양대군이 혀를 찼다.

“네 덩치로 하늘 날기를 바란다면 하늘도 황당히 여기지 않겠느냐?”

“거참, 과학의 발전에 통달하신 형님께서 벌써 그리 말씀하시면 아니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제 생각인데, 아바마마께서도 이를 탈 수 있도록 하려면 훨씬 크게, 이왕이면 자동차처럼 안에 사람 타는 모양새를 제대로 갖추어야 할 듯합니다.”

멀리서 지난번 비행으로 휜 뼈대를 갈고 있던 라이트 형제가, 뜻밖의 귀한 방문객을 보고서 다가와 귀를 기울였다. 물론 그들을 위해 조선말로 이야기하던 것을 영어로 바꿀 리는 없었지만, 그래도 지난 번 곤욕으로 생각보다 세상 일이 녹록하지 않으니 항상 주의해야 한다는 귀한 교훈을 얻었던 것이다.

“어차피 어명 받들어 비행기를 계속 만들어나가다 보면 절로 이루어질 형국이다.”

세자가 갑자기 진중하게 말했다.

“예?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제 공식으로 융비총국 산하 아니더냐. 어명을 받들지 않으면 또 누구의 명을 따르겠느냐.”

하면서 두루마리 하나를 건네주는데, 어보가 찍혀있기는커녕, 흔하디 흔한 공문 양식에 성의없는 비(秘)자가 붙어 있었다.

“엥, 이것은...”

“정강사에서 의결된 바이니 어명과 진배없다.”

장차 삼십 년 동안 추진할 큰일로서, 이제 막 하늘 난 비행기에 앞에 기관총 달아보라는둥, 아래에 진천뢰나 화포 실으려면 얼마나 많은 공이 필요할지 살펴보라는둥, 말은 거창하나 옆의 비행기를 보면 한숨 나올 지시가 떡하니 적혀 있었다.

“걱정 마라. 어차피 하루이틀 내로 이루라는 것도 아니고, 정강사에서 다루는 가장 중한 사안도 아니니.”

“겉으로 드러내기로는 새로운 문물을 어찌 군비에 접붙일지 그것을 다루는 기구라 들었습니다만...”

“물론 그 말이 맞지. 하지만 어찌 나랏일이 그리 간단하겠느냐? 대계(大計)를 기물 하나에만 맡길 수는 없는 법.”

그렇다면 대관절 무엇이 모임의 본의란 말인가? 갸우뚱하면서도 우선 이 청천벽력같은 요구사항을 라이트 형제에게 옮겨주는 이규 정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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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이 추진하였던 정당 싱크탱크 구상이 어물쩡 국영 군사·안보 싱크탱크로 흡수되어 버리면서, 세계 최초의 – 사실 이것도 영국의 페이비언 협회(Fabian Society)를 싱크탱크로 분류할 경우 최초는 아닙니다 – 정당 싱크탱크 설립은 미뤄지게 되었습니다. 안보 관련 싱크탱크는 작중 시점에서 드물기는 하지만 아예 없는 것은 아닌데, 대표적으로 아서 웰즐리가 1831년 설립한 왕립합동군사연구소(Royal United Services Institute)가 있습니다. 지금도 현역으로 기능하면서 영향력 있는 군사학·안보전략 연구소로 남아 있지요.

박영효는 1939년까지 장수하면서,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 동지들의 험담을 많이 남긴 것으로 유명합니다. 김옥균에 대해 비판적 내지는 악의적인 회고를 많이 남겼는데, 이는 갑신정변 실패 후 망명지(일본⟶미국)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에 – 그 본인이 소위 말하는 ‘금수저’였기 때문에 ‘천역(賤役)’을 꺼렸던 탓도 있습니다- 일본에서 그럭저럭 잘 지내던 김옥균을 질투하였기 때문이라는 시각이 있습니다.

오늘날의 ‘대양해군’과는 다른 이유로 ‘대양’(남양+북양)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대양수사의 첫 대제독 살진빙(싸전빙)은 원 역사에서는 남양수사와 북양수사를 오가면서 해군의 주요 인사로 발돋움했습니다. 청일전쟁에서도 거의 유일하게 유능한 지휘관이었다는 평을 받으며, 이후 남·북양을 오가며 해군 지휘관으로 경력을 쌓았으며, 1952년 사망할 때까지 고향 복건성의 유력자로 지위를 유지했습니다.

20세기로 접어들면서, 쥘 베른으로 대표되는 유토피아적 미래관과는 대조되는, 보다 현실주의적이고 때로는 냉정한 미래관이 민간에서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전에도 지나가듯 등장한 H.G.웰즈의 경우, 예컨대 1903년 『육상 철갑함(The Land Ironclads)』에서는 특수하게 개조된 바퀴로 움직이는 기갑차량을, 1908년 『공중에서의 전쟁(War in the Air)』에서는 독일의 비행선 선단의 기습 폭격으로 시작되는 세계전쟁을 그리고 있지요.

또한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기술을 적극적으로 군사 분야에 접목하여 질적 우위를 달성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독일의 부상과 함께 불붙기 시작한 건함경쟁에도 반영되어, ‘드레드노트 혁명’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그 이전까지의 전함을 조금 과장하면 모두 무용지물로 만들었던 드레드노트급 전함의 등장은, 역설적으로 후발주자들의 추격을 용이하게 함으로써 건함경쟁을 더욱 가속했지요.

하지만 드레드노트의 개발은 변화의 원인이라기보다는 기술의 발전추세에 대한 대응에 가까웠습니다 (이러한 시각의 대표적인 예로는 Fairbanks(1991), “The Origins of the Dreadnought Revolution.” The International History Review 13(2) 참고.).

빌헬름 2세 시기의 해군력 팽창은 작중에서도 등장했듯 독일 국내의 여론과 독일 황립해군, 그리고 빌헬름 본인의 야망 등이 복합되어 나타난 결과였습니다. 하지만 한동안 독일은 자국의 해군력 확장이 꼭 영국에게 위협이 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프랑스·러시아의 해군력에 맞서 영국 본토와 지중해 등 세계에 뻗친 이익을 모두 보호해야 하는 영국의 부담을 덜어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빌헬름 2세 및 그의 치하 독일의 팽창 욕구가 거세지고, 국력 면에서 독일이 영국 본토를 추월함에 따라, 1900년대 중반이면 이러한 시각 이상으로 독일 위협론이 거세지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헬름 2세는 여전히 외교적으로 영국과의 관계를 최소한 중립 정도로 유지할 수 있으리라는 (근거 없는)희망을 버리지 않았고, 이는 1차대전 발발로 이어지는 여러 원인 중 하나가 됩니다.

작중에서는 영독동맹과 러불동맹이 모두 조기에 구체화되면서, 영국의 불만이 독일에 대한 직접적인 견제나 동맹의 파기보다는, 육군까지 신경써야 하는 독일이 해군력 경쟁에 완전히 따라오지 못하게끔 하려는 쪽으로 표출되고 있습니다.

원 역사의 일본도 이러한 추세를 감지하고 따라가려 노력했지만, 당장 러일전쟁의 군비로 국가경제가 휘청이는 상황에서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드레드노트와 비슷하게 대구경으로 함포를 통일하는 개념 하에 설계를 시도하였던 최초의 일본산 전함 사츠마급(薩摩)의 경우 예산과 기술 양쪽의 한계에 부딪혀 설계 변경 끝에 1910년에야 초도함이 진수되었고, 그 다음의 전함과 순양전함 등에서도 한동안 비슷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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