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249화 (249/320)

82. 날아 오른 용 하늘에 있어 (2)

귀남이 처음 ‘비행기라 하면 좋겠다’ 한 이후로 이름이 굳어진 그 비행기로 말하자면 여러 사람의 기구한 사연이 얽혀 있었다. 잘 가다가 하늘 대신 도랑에 빠져버린 녀석을 끌어내려 애쓰는 라이트 형제와 일꾼들 얘기만은 아니요, 난감해하면서 지켜보고 있는 안양대군, 아니, 정위(대위) 이규에게도 해당되는 바 있었다.

처음 안양대군이 해외여행 가서 ‘하늘 나는 기계’ 발상을 물어왔을 때부터 귀남은 생각하기를, 쓸모 있는 물건이 이제 슬슬 나올 때가 된 듯하니 이왕이면 현생에서도 일찍 만들어 널리 쓰면 좋으려니 싶었다.

비행기 공덕은 이미 전생에서도 많이 보지 않았던가?

사위 나라 도우러 이박사님 처갓집에서 보내주었다는 쌕쌕이 호주기는, 비록 멀리 퍼져나가는 비행운만 보고서 아마 저것이 그것인가보다 짐작하는 것이 실제 본 경험의 전부였으나, 그럼에도 그 뜨르르한 명성이 귀남 귀까지 들려올 정도였으니 필히 그 동란통에 혁혁한 공을 세웠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전생 막바지에 얼마 안 되는 매상의 상당 부분을 책임져준 관광객들도 인천 어드메에 그렇게나 훌륭하게 지었다는 공항 통하여 들어왔을 것이었다.

그런 생각 들 참에 영민한 둘째아들이 제 형의 모범을 따를 생각인지 귀남이 슬슬 얘기 꺼내려던 무렵 먼저 자신도 군문 들겠다 하였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형에게 지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 아우 마음이므로, 참위로 시작해 참령으로 나올 만큼 공이 큰 – 적어도 군부의 주장에 따르면- 세자를 따라갈 수 있도록 배려하는 마음으로, 대군 자신이 시작한 업무를 계속 이어나가 비행기로 나라 지킬 방도를 생각해보라 하였다.

그의 형이 집앞에서 몸 편하게 지내던 것을 옆에서 본 안양대군이야, 얼렁뚱땅 공조 벗어나 몇 년쯤 시간 보내다가, 저의 자리 없어졌다는 핑계 대면서 아문에 영영 고별할 생각이었건만, 안타깝게도 몸을 옮기니 일도 따라오는 판국이 되었다.

당초에는 암담하게 여겼지만, 또 그사이에 일재주도 조금은 생기고 남에게 자랑하는 보람도 어느 정도는 있었던 것이라, 마음 다잡고 적당히 진지하게 임하고 있었다. 군부에서도 이미 익숙한 가락이라 곧장 이규 정위의 공로를 상찬하곤 하여, 한 해가 다 가기도 전에 참위에서 정위로 올랐다. 거기에 미리견 땅에서 재주 있는 두 형제가 찾아오는 등, 의도한 것 이상으로 일이 잘 풀려가므로 흡족할 따름이었는데...

“친림하시었거늘 시연을 올바르게 하지 못하였으니 모두 불초한 소자의 잘못입니다.”

실패만 벌써 두 번이었다.

처음에는 아라사 치씨(치올코프스키)의 도면을 바탕으로 한 번 만들어보자 하여, 고개 갸우뚱하는 라씨 형제도 우선 따랐다.

그러나 과연 그들 장담대로 날기는커녕 제대로 뜨지도 못하는 물건이 나왔으니, 형제가 입을 모아 말하기를 설령 떴다고 한들 공중에서 운신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라 했다.

그렇다면 대안이 있느냐 물었더니 저들 평소 궁구하던 바가 또 있다 하였다. 하여 그리 해보자 합의한 뒤에 형제가 즉각 뚝딱 만들어낸 기물은 모양새 그럴듯하여, 안양대군도 큰 기대를 품었다.

허나 그 기대도 날틀과 함께 도랑에 박혀버렸으니, 비행기 일에 모처럼 심기일전하여 공들이던 만큼 허탈함과 민망함이 뒤따랐다.

“무거운 기물이 하늘을 난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더냐? 내 헛되이 발걸음하였다며 누굴 탓하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니 염려치 말거라.”

다행히 어딘가 역린만 건드리지 않으면 항상 온후하신 부왕답게 용안에 책망은 서리지 않았다.

“이렇게 행차하였으니 바람도 쐬고 좋지 않더냐? 장차 나라의 큰 계책으로 삼을 기물인데, 그 작동을 증험함에 반드시 때와 장소를 가린다 하므로 네 어머니는 물론이요 내각이나 참의원에서도 트집은 잡지 못할 것이다.”

“항상 하해와 같으시니 그저 감읍할 따름입니다.”

허허 너털웃음 덕에 듣는 안양대군도 마음이 한결 놓였는데, 돌아보니 저의 의도와 무관하게 졸지에 구경 오게 된 김옥균이 눈에 들어왔다. 헌데 반가운 마음에 다가갔더니 그쪽은 썩 표정이 좋지 않았다.

“험험. 모처럼 오셨는데 헛걸음을 만들어버렸으니 무안한 일이오.”

“대군, 아차, 이 정위께서 어찌 고의로 그리하셨겠습니까? 다만...”

옛날 사총(四寵)을 셈 잘하는 것으로 줄 세운다면 어윤중 바로 다음이 김옥균일 테다. 허둥지둥 뒷수습하러 가려는 오빌을 붙잡고 저 비행기 어쩌고 하는 기물이 뜻대로 하늘 난다고 가정한다면 그 성능 어떠할지를 간략히 물은바, 금방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저 비행기가 굳이 군에서 채택하여 쓸 만한 것인지는 영 확신이 서지 않아 고심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정위께 딱히 무슨 원망하는 마음 품은 것은 아니니 심려치 마시지요.”

“군에서 쓸만하지 않다 함인즉...?”

“옛날에 묵적(墨翟)이 삼 년에 걸쳐 나무로 솔개를 만들었는데, 하루를 날더니 망가졌다고 합니다.

저 비행기 역시 그러하지 않습니까? 설령 뜻을 이룬다 하더라도, 한 번에 많은 짐을 싣지도 못하고, 또 빠르고 간편한 것으로 말하자면 자동차만 못합니다. 물론 사람이 하늘을 나는 것이 반드시 선도(仙道) 따위의 허황된 일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진지하게 국용을 들여 궁구할 것도 아닌 듯합니다.”

김옥균을 비롯해 오늘날 식자들이라면, 구주와 미주에서 새롭게 재주와 기물 창안하는 소식을 종종 듣기 마련이었다.

그러므로 덕국에서 체펠린(Ferdinand von Zeppelin)이라는 자가 쇠붙이로 거대한 기구를 만들어 하늘에 띄웠다는 소식도 놓치지 않았다. 뽐내기 좋아하는 데 있어서는 유럽 군주 중 맨앞에 있다 해도 과언 아닐 카이저 빌헬름과 그의 나팔수 독일민족당이 열심히 홍보하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섭영과 그림까지 곁들여 상세히 소개된 체펠린의 비행선(Luftschiff)을 떠올리며 이제 겨우 도랑에서 조금씩 나오는 ‘플라이어(Flyer)’를 보면, 자연히 비교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과학 혹은 공학의 일이라면, 너무 멀리 내다보아 구름 속에서 헤매는 공산당이나 눈앞 대신 머릿속 경전 줄글에 생각 갇히곤 하는 자유당 대신 개화당이 나서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으로 비유하면 아직 태중에서 나오지도 못한 것이 이 비행기외다. 조금만 더 믿고 기다린다면 필히 성과가 날 것인데...”

“물론 그렇겠지요. 사람의 슬기가 나날이 발전하니, 당장 기차나 자동차만 하여도 저의 소싯적에는 도깨비 놀음이라 여겼을 기물입니다.

하지만 언제고 자라나리라 여기면서, 오늘 묘목 심어 내일 아름드리 거목 되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감히 말씀드리건대 잘못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안양대군이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주상 역시 새롭고 신기한 문물을 즐기는 마음에 이리 북돋은 것이므로, 아직까지는 이 비행기 기물에 힘 쏟는 것을 간언하여 바로잡을만한 과오라 할 수는 없을 듯하였다.

“물론 나랏일을 행함에 내일모레뿐 아니라 짧게는 일세(一世), 길게는 기백 년을 생각하여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시급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에는 마땅한 분별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고서는 곧장 어조를 가다듬었다.

“나이 먹으니 절로 잔소리가 늘은 탓에, 이 정위의 심사를 괴롭게 하지는 않았을까 염려되는군요. 떠오르는 생각을 그대로 드러냈을 뿐이니, 결코 이 정위를 공박하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말에 이미 매서운 날이 서 있었으니, 귀경한 김옥균이 곧 몇 글자 끼적이고는 ‘무비시론(武備試論)’이라는 표제로 『경화시보』에 실은바 대강은 이러하였다.

‘천하 정세가 비록 드러나기로는 안온하나, 무릇 시운(時運)은 함부로 이렇다 말하기 어려움이 있으니 변하고 통함에 그침이 없고 그 차오르고 이지러짐이 오묘하기 때문이다.

우리 대조선국이 이제 충용한 만백성의 힘으로 강병 거느렸음을 만방에 알렸으나, 만에 하나 큰 환란이 닥쳤을 때 능히 우리 힘으로 헤쳐나가 나라와 백성의 이익을 지킬 수 있는가 하면, 비록 어제까지는 족하였다 하여도 내일은 어찌 될지 모르는 것이다.’

하면서 이르기를, 지금 나라에 가장 절실한 병비는 곧 수군이라 하였다. 이미 구주 열국이 더 크고 강한 전선을 만들고자 경쟁하기 시작하였으니, 만일 어느 나라가 최신의 술기를 한데 모아 새로운 배를 만들어낸다면, 마치 수사(水師)가 거느리던 수많은 판옥선이 기선 들어온 이후로는 단번에 ‘구목선(舊木船)’으로 한데 묶여 도태된 것처럼 건제함 같은 큰 쇳덩이 배도 한낱 고철덩이와 다름이 없게 될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때그때 만들어 쓰거나 남의 나라에서 들여올 것이 아니라, 보다 체계적으로 건함(建艦)을 준비하여, 여차하면 다른 나라와 끊임없이 경쟁할 만반의 준비를 다하여야 한다 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자세를 갖춤에 있어 가장 방해되는 것이 있으니, 이제 인간사에 전쟁할 일이 얼마나 있겠느냐는 대책 없는 낙관보다, 묘수(妙手) 얻어 단번에 다른 나라를 타파할 수 있으리라 여기는 그 요행 바라는 심보가 더 해악이 크다고 하였다.

이미 학제 개혁을 둘러싸고 공산당과 자유당에서 자중지란 일어났으니 각 군현에서 어부지리로 올라올 참의대부들이 많으리라 여기던 개화당 중진들은, 갑작스레 새로 이렇게 논쟁 일으키는 김옥균을 일부 원망하기도 하였으나 - 이미 일전에 한 번 군비 문제를 추거철에 꺼냈다가 골탕 먹은 기억도 선하게 남아 있었다 – 곧 김옥균의 복안을 듣고서 조금 더 믿어보기로 하였다.

공산당 쪽에서 급히 내건 반론은 역시 개화당은 군비를 늘려 총칼로 저들 이익을 도모함이 차마 버릴 수 없는 품성이요, 그 짐은 고스란히 단자 던질 국인(國人) 어깨 위에 올려진다는 것이었다.

끝내 열국 사이 큰 쟁투 벌어진다면야, 부득불 군비를 늘려야 하겠지만, 혹 군비 늘리지 않고 국방 튼튼히 할 방편 없는지 찾아보는 것이 먼저라는 주장이었는데, 그러면서 근래 여러 사람의 눈길을 끈 비행기를 거론하였으니 바로 김옥균이 노리던 바였다.

‘그런 술수가 있기를 바라며 요행을 기다리고 있으니, 막상 화란 닥친다면 시급히 방책 마련하느라 더욱 국용을 낭비하게 될 것이다. 당장 비행기만 보아도, 혹자는 옛날에 화차나 귀선(龜船, 거북선)으로 적은 사람이 많은 적을 무찔렀던 것만을 떠올리며 큰 기대를 품고 있지만, 당장 제대로 날지도 못하고 있지 않은가?

반면 지금부터 대계(大計) 세워 차근차근 병비를 늘려나간다면, 들어가는 수용은 오히려 적고 군비로 나가는 것도 대개는 고스란히 백성들 몫으로 돌아갈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상책이다.’

제2차 경제개발 오개년계획도 면포 등등의 가벼운 물산을 넘어, 복잡한 기기나 기선 등등을 제조할 수 있는 설비 갖춤에 방점 있었으니, 급히 꾸리는 바람에 아직 이름도 제대로 붙이지 못한 개화당판 집현전 학자들이 그럴듯한 수치를 함께 제시하면서 김옥균 논설에 일리 있음을 방증해주었다.

그리고 그러한 주장이 하필 그 내용 영문으로도 옮겨 간행하는 『경화시보』 통하여 주로 나갔으니, 윌버와 오빌 라이트 두 사람도 금방 소식을 전해듣고 한숨 푹 내쉬게 되었다.

“미안하다, 오빌. 차라리 데이튼(Dayton)에 남아 있었더라면 이렇게 마음고생할 것까지는 없었을 텐데...”

“그게 왜 형님 잘못입니까.”

“그때 랭글리 박사에게 그 편지를 달라고 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도 없었겠지.”

공기역학에 관해 조언을 얻고자 스미소니언 재단의 새뮤얼 랭글리(Samuel Langley) 박사를 찾아갔는데, 책상 위에 기묘한 문양 찍힌 편지가 성의 없이 놓여 있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된 것이 발단이었다.

‘조선, 그러니까 코리아의 ‘안양 대공’인지 하는 사람이 보내오는 초빙 서한일세. 관심 없다고 정중하게 답변해도 다시 비슷한 글을 보내온 것이 벌써 세 번째라, 조금은 덜 정중한 답변을 보내볼 생각이었지.‘

선심 쓰듯 무슨 내용인지 궁금하면 읽어보라 하였는데, 내용인즉 그 나라 정부가 각종 미래 기술에 관심이 많고 특히 동력비행 분야의 발전 가능성에 크게 주목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찾아오면 물심 양면으로 지원해줄 터이니 호의적인 답변 기다리겠노라 하는데, 프린스든 아치듀크(Archduke)든 귀족 칭호에는 별 감흥 없는 미국 사람들이기도 하고, 더구나 랭리는 에어로드롬(Aerodrome)이라 멋들어지게 이름도 붙인 저의 날틀 개발을 두고 이미 육군과 5만 불짜리 연구용역을 맺은 지 오래라 딱히 아쉬울 것도 없었다.

반면 자전거 가게 운영하며 쪼들리지는 않지만 넉넉하지도 않은 살림 쪼개 연구 진행하던 두 형제는, 잠시 눈 맞춘 뒤에 비슷한 결론을 내렸다.

아무리 이제 그 지명도에서 겨우 일본 정도를 제쳤을 조선이라지만, 엄연히 정부에서 보증하는 연구 지원이었다. 더구나 얼마 전 그 나라 전 총리라는 사람도 와서 한 차례 여론 뒤흔들고 갔을 정도이므로, 다른 나라라면 몰라도 미국에는 분명 호의적이라 할 수 있을 터.

신중한 오빌은 그래도 고향 데이튼(Dayton) 인근에 남자는 쪽이었고, 반면 윌버는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른 경쟁자들이 덜컥 그 제의를 받아들일지도 모른다며 부추겼다. 그리하여 결국 태평양 건너오게 되었는데, 기대 이상의 환대를 받은바 처음의 의심은 곧 사라졌다.

“그래도 덕분에 최첨단 부품들을 지원받아 동력비행기 모델 여럿을 실험해볼 수 있지 않았습니까? 미국에 남아있었더라면 또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지요.”

“그래. 그렇게 여겨준다니 고맙구나.”

오빌 말마따나, 기대 이상의 지원을 받기는 했다.

적당히 맞바람 일정하게 부는 쾌청한 기후가 필요하므로 기상 자료를 달라 하였더니, 아직 그렇게 체계화된 자료는 없지만 조선 팔도의 천기 변화가 무쌍하여 무슨 날씨를 원하든 팔도 중 어느 한 곳에서는 겪을 수 있을 것이라며, 그들 몫으로 화물차를 배정해주겠다고 하였다.

또 그 다음으로 잡인들의 보는 눈 걱정을 잠시 꺼냈더니 호쾌하게 왕실 사유지를 내어주어, 좁은 땅에서 그나마 주변 눈과 귀가 적은 곳을 얻었으니, 가까운 마을이라 해보아야 유대인들 모여 사는 – 처음 ‘유대인’ 소리 들었을 때는 귀를 의심하긴 했다 – 곳이라 보안은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다.

동력 관련해서 필요한 부품이 있다면 번씨차창을 통해 구해올 수 있으니 말만 하라고 했을 때는 또 어땠던가.

그러나 지금은 그동안 받은 호의가 거꾸로 뒤집혀 짐이 되는 듯했다. 저들의 작은 발명이 정치적 논란 한가운데에 휘말려 들어가게 되었으니 앞날 알 수 없어 불안하고, 정말로 이러다가 일 없으니 돌아가라며 통보받게 된다면 동양의 소국에서조차 공상(空想) 취급받은 발명이라며 미국 안에서 웃음거리 될 것이 명백하였기에 그만큼 두려웠다.

“너무 걱정들은 하지 마시오. 내 장담한 바는 꼭 지킬 것이니.”

그들이 작업장으로 쓰고 있는 도성 북쪽의 널찍한 창고에, 이제는 영어가 익숙해진 안양대군의 위로하는 말소리가 울렸다.

“비행기를 폄하하는 자들에게, 다음 번에는 반드시 멋지게 하늘을 날아보일 것이라고 일러주고 오는 길이외다. 그러니 걱정 말고 다음 시연을 준비하면 되겠소.”

“예?”

“분명 잘 날 것이라 하지 않았소이까. 그리고 그렇게 될 것이오.”

비행기 조립하여 날리는 것은 라이트 형제요. 그것을 받쳐 하늘에 띄워주는 것은 하늘과 땅 사이 공기일 터인데, 엉뚱한 안양대군이 이리 장담하니 솔직히 부담만 더 드는 느낌이었다.

“그러니 이왕이면 이 비행기도 조금 멋들어지게 꾸밈이 가하겠지. 혹 원하는 문양이라도 있소? 내 화공을 부르리다.”

안양대군은 성공을 굳게 믿는 듯했다. 조심스레 윌버가 그 자신감의 근거를 물으니 나오는 말이 이러하였다.

“내 점을 쳐보았는데 건(乾) 괘가 나왔으니 이번에는 필히 성사(成事)할 것이외다.”

그러니 날개 양쪽에 – 동양 전통 문양인 모양이었다 – 막대기 세 줄씩을 그려넣자고 하면서 안양대군이 말했다.

안양대군 왈, 옛날에는 장례식 절차를 두고도 수십 년을 싸운 나라였으므로 비행기 정도로 당론 갈림은 예삿일이라 하였는데, 그가 하는 다른 말과 마찬가지로 라이트 형제에게는 하등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 말에 하늘에는 심장이 없다(無心)더니, 정말로 며칠 뒤에 딱 알맞게 서풍 부는 쾌청한 날이 찾아왔다.

“아니, 왜 이리 사람이 많습니까?”

“요새 선거철이라 그렇다오. 다들 입이 무겁거나 무게추 달 수 있는 사람들이니 걱정은 마시오.”

“정말이지 조선은 이상한 나라입니다.”

“우리나라가 좀 그렇지. 하하.”

그들에게 쓴소리 내놓는 미스터 김 외에도 여러 사람이 와 있고, 그들 사이에서 계속 무어라 논쟁하는 소리 나오는 것으로 보아 아마 조선의 정치인들인 모양이었다.

행운 빈다는 소리 한 마디 하고 그의 아버지 있는 쪽으로 안양대군 달려가니, 플라이어와 관중들 사이의 거리가 유달리 멀게 느껴졌다.

“풍향, 풍속 모두 딱 맞네.”

“날벼락이라도 좀 쳤으면...”

윌버가 잠시 농담을 던진 뒤 마음을 다잡았다.

“후... 까짓거. 해 보자.”

“응.”

곧 시계를 맞추고 시동을 걸었다. 시계바늘 초침과 함께 프로펠러가 돌기 시작하니, ‘휙’ 하는 호각 소리와 함께 깔아둔 레일을 따라 동체가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눈앞의 땅만을 바라보는데, 어느새 레일 구간이 끝나고 아래에 푹신한 공기만 있다는 것이 몸으로 느껴졌다.

이제 조종간을 당겨 상승하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그리고 그때.

‘아차!’

찰나의 순간에 긴장으로 힘을 너무 주었음을 깨달았다. 갑자기 고개를 치켜세운 플라이어가 바람을 정면으로 맞더니, 위에 누운 사람 따위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살포시 바닥에 내려앉았다.

“형, 괜찮아?”

급히 달려온 오빌이 물었다.

“몇 초?”

“괜찮아, 형.”

“몇 초나 날았는데?”

“2.1초...”

뒤를 돌아보니 실제로 비행한 거리는 오십 피트(약 17m)나 겨우 넘길까 싶었다.

“하...”

“한 번쯤 더 기회가 있지 않을까?”

만상 교차하는 가운데, 헐레벌떡 다른 관헌과 함께 의기양양한 표정의 이규 정위가 달려왔다.

“경축하오! 이로써 청사에 길이 남을 것이오!”

“그 무슨 말씀이신지요?”

“험험. 어쨌든 날지 않았소이까.”

하다못해 그 옛날 환관 조고(趙高)도 사슴을 말로 둔갑시켰는데, 무한한 권세를 전유하는 대조선국 국왕께옵서 잠깐 뜬 비행기를 훨훨 나는 것으로 바꾸지 못할 리가 없었다.

하물며 미리 언덕 아래에서 대기하던 섭영군 다섯이 동시에 그 떠오르는 순간을 붙잡아 바로 섭영을 내어놓았음에랴.

--- *** ---

‘이박사님 처갓댁 쌕쌕이 호주기’는 사실상 한국전쟁에서 활약한 모든 유엔군 소속 제트기의 통칭이라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아내 프란체스카 도너는 오스트리아 출신인데,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에도 오스트리아와 오스트레일리아를 혼동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저런 표현이 생기게 되었지요.

한국전쟁에 참전한 호주 왕립공군 77전대는 참전 초 P-51 머스탱을 운용하였으나, 소련과 중공의 지원으로 MiG-15기가 공중전에 투입되면서 영국제 글로스터 미티어로 기종을 전환하게 됩니다. 그러나 잘 모르는 입장에서는 미군의 F-80 슈팅스타나 F-86 세이버와 구분하기 어려워, 결국 제트 전투기의 통칭이 ‘호주기’로 굳어지게 되었지요. (여담으로, 이로 인해 무언가 날랜 것을 지칭하는 ‘호줏기’, ‘호적기’ 등의 속어가 한동안 쓰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한국전쟁 기간 중 77전대는 약 19,000 소티를 기록했으며, 공여받은 90기의 미티어 중 54기를 손실했습니다. 이미 한국전쟁 시점에서 구식에 속했던 미티어의 성능 한계로 인해, 1952년 무렵부터 77전대는 제공임무보다는 근접항공지원 등 비교적 활동 공역이 한반도 중부에 국한되는 임무를 수행했는데, 미군기가 아닌 ‘호주기’가 된 데에는 프란체스카의 존재 외에 이러한 면도 있었을 듯합니다.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 ‘발명’은, 당시의 많은 발명이 그랬듯 당대부터 지금까지 많은 논란에 휘말려 왔습니다. 이미 1890년대에는 동력을 활용한 비행기 제작 시도가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었고, 작중에 등장한 스미소니언 재단의 새뮤얼 랭리처럼 증기 엔진을 이용해 무인기를 이륙시키는(1896) 등의 성과를 이루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라이트 형제의 공적은, 단순히 날개 위에 엔진을 올리는 데서 그치던 그러한 시도에서 벗어나, 역시 촉망받던 분야인 글라이더 영역의 경험을 접목한 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는 다른 어떤 경쟁자들보다도 안정적이고 정밀한 조종을 구현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엄연히 ‘발명’이 아닌 ‘개선’이었고, 그로 인해 랭리나 글렌 커티스(Glenn Curtiss) 같은 선발 및 후발 주자들과의 오랜 특허분쟁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결국 라이트 형제의 기술적 우위와 독창성이 인정받기는 했지만, 그 과정에서 라이트 형제는 많은 고통을 겪어야 했지요.

라이트 형제 역시 이러한 점을 잘 알았기 때문에, 비행기 시연과 실험에 있어 항상 신중한 태도를 취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양날의 검이 되어, 키티호크에서의 비행 성공 이후 바로 정부 계약을 따내지 못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비행기를 시연하거나 심지어 비행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을 하는 데도 주저하곤 하는 두 민간 발명가를 도저히 믿을 수 없었지요.

라이트 ‘형제’는 사실 라이트 오남매로, 윌버와 오빌 위에 형 둘, 누이동생 하나가 있었습니다. 이들 오남매는 모두 재능이 뛰어났는데, 특히 막내 캐서린은 당시에는 드물게 대학까지 졸업한 인재였지만, 윌버와 오빌을 지원하기 위해 교직의 꿈을 포기하고 두 사람의 자전거 가게를 대신 운영하며 비용을 지원해주었습니다. 비록 사후에는 그 업적이 상당 부분 잊혔지만, 다행히 생전에는 공로를 인정받아 오빌, 윌버와 함께 프랑스를 비롯해 여러 나라에서 훈장을 받은 바 있습니다.

원 역사에서는 1903년 12월 중순 데이튼 인근의 키티호크에서 이루어진 라이트 형제의 비행은, 사실 며칠의 간격을 두고 여러 차례 이루어졌습니다. 언덕의 경사를 이용해 필요한 속도를 얻으려던 12월 14일의 첫 시도는, 언덕에 설치해둔 레일 구간이 끝나자마자 윌버가 지나치게 빨리 상승을 시도하는 바람에 금방 실속에 빠지면서 고작 3.5초 동안 105피트(약 32m)를 비행하는 데 그쳤지요. 사흘 뒤인 17일에는 거세고 꾸준하게 바람이 불어서, 그 덕에 보다 원활한 비행이 가능했습니다. 이때 세운 기록이 12초간 120피트를 비행한 것이었고, 점차 능숙해진 두 형제는 같은 날 여러 차례 비행을 시도해 마지막에는 59초간 850 피트(약 260m)를 비행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둘은 비행기술과 설계 양쪽에서 빠르게 진전을 이루어, 1905년에는 39분 동안 39km를 비행하는 대기록을 세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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