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248화 (248/320)

82. 날아 오른 용 하늘에 있어 (1)

한때 달마다 이름 바뀌던 것이야 드나드는 사람들 머리가 굵어지면서 자제하게 되었다지만, 그래도 그때그때 흐름 따라 구락부 분위기 바뀌는 것만은 그대로였다. 구락부 세우던 사람들도 이제 다들 한 자리씩 생업 생겼으므로 예전처럼 그 안에서 매일같이 소일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가끔 찾아올 때면 그 사람 취향 따라 자연히 판이 차려지기 마련이었으니, 출입 잦은 사람이라면 문 열고 들어서자마자,

‘아, 오늘은 당구소리 요란하니 육체사 윤 선생(윤치호)이 찾아온 것이로군!’

‘웅성이는 소리 문 밖부터 선하게 들리니 금석(琴石, 홍영식)이 시 지으며 웃고 떠드는 모양이렷다.’

하는 식으로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착 가라앉은 가운데 진지한 말소리만 간혹 들리고 있으니, 말 많은 사람들 꽉 잡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고균 외에 또 누가 있겠는가?

“... 금번 추거가 장차 대업으로 이어질 기반이 될 것이니, 이처럼 준비함이 마땅할 것일세.”

모처럼 옛날 구락부 단골, 현 개화당 중진들끼리 모여서 구락부 세 내다시피 하였으니 – 정확히는 구락부 주인이 오늘은 저들끼리 쓰겠다고 한 것이니 누가 무어라 하겠냐만 – 개화당 당사에는 듣는 귀도 많고 또 그놈의 체통 때문에 김옥균 편한 대로 양주 한 잔에 담배 곁들이며 이야기하기도 곤란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확실하게 참의원에서 과반을 점하고, 더 나아가 자유당이나 공산당까지 끌어와 총리대신의 연임을 허하게끔 하겠다는 말씀이시지요?”

“그렇지. 이번에야 학교흥(學校興) 건으로 두 당 안에서도 입론하는 바가 나뉘고 있으니 쉽게 이기겠지만, 다음에도 반드시 그러하리라는 보장은 없으니 지금부터 대비해야 하지 않겠는가.”

처음 만민공산당이 과반 득표할 때도 그러했고, 황란 전후하여 개화당이 경제공약 내세울 때도 그러하면서 추거를 앞두고서 굵직한 정책안을 발표함이 관례처럼 굳어지고 있었다.

물론 요새 마음 놓고 쓴소리 늘어놓는 최익현이야, 정말 그렇게 나랏일에 도움 될 방책이 각 당에 있다면 어째서 참의대부들 모이는 자리에서 미리 내어놓지 않던 것이냐. 평소에 나랏일 도우면 민심은 절로 따라오는 것인데 그렇게 세간의 부평초 같은 주목을 받고 싶으냐 잔소리 하겠지만, 다른 두 당 생각에는 저들은 공약 내기를 자제하는데 상대가 뻔뻔하게 계속 내세우면 결국 홀로 손해보는 셈이라, 최익현 말에 공감하건 말건 행실을 따로 고치지는 않았다.

그런 와중에 아주대회 끝나자마자 불거진 건이 다름아닌 학교의 일이었는데, 전국 군현에 향교와 서원 없는 곳이 없고, 또 공산당의 역사적인 첫 공약도 이미 이루어진지 오래라 향교 옆에 여학 하나씩은 대개 있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서원이 늘어났다고는 하지만 결코 그 공량(수업료)이 대체로 헐하지만은 않았고, 특히 가르칠 교원이 부족한 여학으로 말하자면 더욱 그러하였다.

또한 서원 들어가기 전의 가르치는 일로 말하자면 여전히 서당이 전부였는데, 비록 익문사 시절부터 문교참판이 짜임새 있게 관리하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십년 세월이 흐르면서 예전처럼 훈장이 주먹구구로 학동들 가르치던 때와는 천양지차였지만 어쨌든 서양 물 먹고 돌아온 이들 보기에는 영 올바르지 않았다.

그러나 서양 물 먹고 온 사람이 개화당이나 자유당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고, 더구나 서당에 가기 어려운 집안 장정 및 아해들을 위하여 – 그리고 그들이 후에 향시에 붙기라도 하면 돌아올 추거단자를 위하여 – 공산당에서 경일학당 앞 야학을 본따 이곳저곳에 사숙(私塾)이니 야독당(夜讀堂)이니 하는 것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기도 했다.

거기에 더하여 천역(賤役) 소리 듣던 사람들도 끌어들이고 있었는데, 처음에는 잡스런 무리 모음에 무슨 공효 있겠는가 여겼지만 근래 돌아가는 형세를 보니 꼭 그렇지도 않아, 이대로라면 수 년 안에 도로 공산당 천하가 될 듯하였다.

“솔직히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세간에서 우리네를 일컬어 벌열 도련님들이라 하니, 실제가 어찌 되었던 그리 일컬어짐은 적어도 작금 조선에서는 좋지 못한 일이야.”

그런 콧대 높은 도련님 티를 아직도 팍팍 내고 있는 김옥균이 눈 한 번 깜짝이지 않고서 그런 말을 하니, 딱히 김옥균이 좋아서 따르는 것은 아니라고 우기는 – 그러나 사실은 툴툴대는 것만큼 정도 붙고, 또 김옥균 외에 다른 끈도 없으므로 아예 떨어져나가지는 못하는 – 금릉위 박영효가 저도 모르게 살짝 코웃음을 냈다.

그러나 틀린 말도 아니었으니, 그렇게 끌어들이는 무리 중 한 부류로 무당과 복술(卜術)하는 이들도 있었는데 그들 중 일부가 회(會)를 꾸려, 영국에서 그리 잘 나간다는 진령군처럼 저들도 개화한 술수를 배워 명성 드높일 궁리를 하고 있기도 하였다.

처음에야 대관절 무슨 헛짓거리를 하는가 했는데, 근래 오지리국에 해몽(解夢) 용하게 하는 선비 부로(扶路, 지그문트 프로이트) 씨가 있다 하여 그 도성 유야납(빈)에 가서 배울 젊은 박수나 무당을 구한다고 하지를 않나, 무속 가운데에도 음사(淫祀)만 있는 것은 아닐 테니 학자와 더불어 조사하고 체계를 잡아보자 하지를 않나, 이대로라면 자칫 공산당에게 또 한 수 접어줘야 할지 모르는 판국이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런 구상은 개화당 명문자제들끼리 모아두면 장동구락부 대문 빗장 걸어잠그고 백 년쯤 고민해도 그 안에서 나오지는 못할 것이라.

하여 금번 추거의 대책을 고민함에 저들 머리 총명함만을 믿지 말고 우선 개화당 주변 겉돌던 인재들로 명안 있는 사람을 찾아보자 하였으니, 당색은 개화당이되 ‘명문가 도련님들’과는 도통 어울리지 않아 겉돌던 신기선(申箕善)이 ‘미워도 다시 한 번’ 심정으로 찾아와 계책 전하기를, 법국에서 하는 것처럼 관례 올리기 전의 어린아이들이 배움터 나아가는 것을 국법으로 정하고 서당을 갈음할 학교를 널리 세우자 하였다.

그에 따라 공약으로 내세웠더니, 효험이 굉장하였다. 각 군현의 공산당 내에서도 어쨌든 학교가 늘어나 여력 없는 집안에서도 국문과 사칙연산은 배울 수 있으니 좋은 것 아니냐는 쪽과 고스란히 조세로 돌아올 것이며 혹 관에서 수작 부릴 수도 있으므로 반대해야 한다는 쪽이 나뉘고, 더불어 배움이라 하면 또 차마 반대할 수 없던 자유당 내에서도 균열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번은 요행이라 보아야 할 것일세. 결국 민심을 얻어야 능히 집권하는 것인데, 다른 쪽 갈라놓을 생각만 하고서 계책을 내었다가는 오래 못 가지.

그리고 우리끼리 머리 마주댄다 하여 항상 명안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추거에서 이기기 위해 저 공산당처럼 이곳저곳 초야 누비면서 우리 조선국 만백성과 교유하자 하면 당장 나부터도 나설 생각 아니 들 것이야.”

김옥균 너스레에 한 차례 웃음이 돌았다.

“우리 당이 다른 둘에 비해 확실히 나은 점이 있다면 역시 금력 아니겠는가? 그러니 당 안에 스스로 집현전(集賢殿)을 꾸려 미리 주요한 현안을 추려내고 양책(良策) 내놓게 하면 될 일이지. 뭐, 자칫 무엄하게 보일 수 있으니 당호(堂號)야 적당히 고쳐야 하겠지만.”

나이 먹고서 팥으로 메주 쑤는 얘기도 그럴듯하게 만들 수 있는 언변 생긴 김옥균이 내놓는 논리에 다들 찬동하여 구락부 모임은 그럭저럭 좋게 파하였다.

나와보니 반달도 어느새 서쪽으로 기울어, 야심함을 절로 알 수 있었다. 근래의 허랑방탕한 – 적어도 인정 치던 때 기억하는 중늙은이 이상의 사람들 생각에는 - 풍습으로 젊은 남녀들이 밤새 술을 벗삼아 노니곤 하였으나, 그것도 어느새 점잖은 동네 된 장동 인근의 이야기는 아니요 저기 마포나 ‘교남(橋南, 한강대교 남쪽)’ 이야기였다.

이제는 익숙해져서 딱히 요란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 시동 소리와 함께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는데, 문득 느낌 이상하여 뒤를 보니 다른 자동차 한 대가 계속 따라오고 있었다.

“허, 동농 저 사람, 늙어서 점잖아지기는커녕 헛걱정만 느는구만.”

자동차가 적어도 한성부 안에서는 더 이상 기물(奇物)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지만, 그래도 그 수효가 아주 많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굳이 저를 따라오면서 엉뚱한 데로 새지는 않나 살핀다면 필히 공안서일 테고, 더구나 다시 차체를 살피니 붙은 표(標) 가운데 글자가 경(京)도, 기(畿)도 아니요, 민간의 물건이 아님을 뜻하는 갑(甲) 자였으므로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므로 더 걱정할 것도 없이, 궁금한 마음만 품은 채 편히 뒷자리에 고개 대고서 집으로 가서는, 바로 손 맞이할 준비를 하라 하였은즉 한 각도 채 지나기 전 김가진이 당도하였다.

“동농, 오랜만이오.”

“먼길 다녀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겠소. 귀국하자마자 추거의 준비로 또 필히 고될 터인데 이리 불편한 자리에 앉게 하였으니 미리 사과하리다.”

“허허, 우리 사이에 무어 그럴 것까지 있소?”

김옥균과 김가진 사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갸우뚱 할 만도 하지만, 어쨌든 자주 만난 것은 사실이었다.

“공산당의 뿌리에서 다툼 일어났으니, 고균 그대의 당에는 참 호재라 하겠소.”

“이번은 그렇지만, 이미 지난 추거에서 한 번 개화당으로 인해 고배 마신 해몽(전봉준)이 또 당하였으니, 다음번에는 더욱 절치부심하여 나올지도 모를 일이외다. 자강불식(自彊不息)의 뜻을 그러니 어찌 잊겠소?

그나저나 이리 만날 줄 알았다면 내 장기 명물 가수저라(加須底羅, 카스테라)라도 사올 것을 그랬구려.”

“무얼 그리할 것까지 있겠소이까. 이미 구하여 맛을 보았으니 심려치 아니하셔도 되겠소.”

즉 찾아온 이유 중 적어도 하나는 일본국에서 있던 일 때문이라는 뜻이었다.

“내 귀국하려던 차에 어느 일본인을 만났는데, 술회하기를 독실한 불자로서 근래 천하 정국을 두고 떠오르는 바 있어 벼르고 벼르던 끝에 찾아왔다고 하더이다. 혹 그 때문이오?”

“바로 맞추셨소. 그 전중지학(다나카 치가쿠)은 일본국에서도 무민(誣民)한다 하여 사람 붙여두고 있는 이라, 난언(亂言)으로 혹 조일 두 나라 사이에 사달 일으킬까 걱정하는 말이 들려오더이다.”

공안서가 북경에 사람 보내던 것은 지난 을미년 정난 이후로 주춤해져서, 예전처럼 황명으로 확언 받았다 하여 이곳저곳 들쑤실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일본국으로 말하자면 정난 이후로 부쩍 음지에서 소통하는 일이 늘었으니, 이웃끼리 부딪히다가 자칫 큰 다툼으로 비화하는 그런 일 – 당장 동해에서 전선끼리 부딪힌 것도 그리 오랜 일은 아니잖은가 – 이 없도록 미연에 막고자 하는 요시노부의 뜻이었다.

“뭐, 이치에 닿지 않는 황당한 면이 적지 않았으나 살필 만한 뜻도 없지는 않았소. 굳이 숨길 것도 없거니와 기군(欺君)은 추호도 생각지 않으니 기억 나는 대로 모두 밝혀 드리리다.”

‘본화(本化)’니 ‘다가올 말법(末法) 시대’니 운운하는 소리야 크게 귀담아듣지 않았지만, 그 다음의 말은 생각할 바를 던져주었다.

“이르기를, 한때 승냥이 소굴과 같던 천하가 비로소 잠시 평온을 얻었으니 그 가운데에 우리 아주가, 그러니까 그들 말로 바른 가르침 베푸는 중심에 아주가 있다 하더이다.

그런데 이는 어디까지나 잠시의 소강(小康)이요, 언제고 다시 구미 나라들 사이에서 교화의 이로움을 믿지 않는 어리석은 자들이 일어나 큰 전쟁이 발발할 것인데, 그때 반드시 신력(神力)을 드러내어 천하 만방을 정법(正法)에 귀의케 해야 한다... 뭐 그런 얘기였소.”

“허, 이르신 대로 황당한 언설이외다.”

“허나 듣고 나서 곰곰이 되새겨보니 광언(狂言) 가운데에 일말의 이치가 없지 않았소. 덕국에서 툭하면 영국이나 법국이 추앙한다고 내세우는 도의를 마땅치 않게 여긴다는 얘기가 종종 들려오지 않더이까.”

“공안서가 관할할 일은 아니나, 그로 인해 예조에서도 간혹 근심하곤 한다 들었소.”

“지금 천하의 형세를 말하자면 이미 날아오른 영국과 법국이 있고, 날아오르려다 날갯죽지에 올가미 씌워졌다 여기는 덕국이 있고,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한 아라사나 미국이 또 있소. 그것이 동맹의 약조로서 둘로 나뉘어 지금은 서로 지탱하며 경동(輕動)하지 않는다지만, 덕국은 영국에, 법국은 덕국에 구원(舊怨) 깊으니 언젠가 부딪히기는 할 것이외다.”

“그래서 전중 그 자의 말이 이치를 스치고 지나갔다 하는 것이겠구려.”

“그리고 그때를 대비하여 ‘신력’을 길러야 한다는 것도 그렇지. 내 일찍이 포부 밝히기를 천하를 아국에 맞추겠노라 하였는데, 그것이 순탄히 이루어진다면 좋겠지만 그렇게 될 공산이 얼마나 있겠소?”

그러므로 금세의 자공 되고자 하는 입장에서 총리 임기 네 해는 너무 짧고, 반드시 뜻 이룰 때까지는 집권할 생각에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해보자며 개화당 사람들을 추스른 것이었다.

“군병의 힘이라면 지금도 족하다 할 수 있지 않소? 이 역시 공안서 총관 되어서 함부로 할 말은 아니지만, 얼마 전에는 융비총국에서 마침내 ‘자장방총(自裝防銃)’ 초안을 만들어 진상하기도 하였은즉.”

처음 인천부 제조국에서 ‘그러니까... 그, 쏜 뒤에 스스로 탄을 재는 그러한 총’을 만들어보라 한 귀남의 윤음을 고스란히 이름으로 옮길 수는 없어 임시로 ‘자장방총’이라 이름한 그 총은, 아직 시제(試製) 소리를 면하려면 갈 길이 멀었다. 그러나 아직 천하에도 유례가 드문 종류의 병비라 하니, 사정 모르는 이들은 대단하다고만 여길 뿐이었다.

“아니, 그것으로는 충분하다고 하기 어렵소. 물론 우리가 지난날 청국으로 출병함에 단번에 정병 수십만을 모았으니 천하가 아국의 강성함을 알았지만, 중원은 물론이요 당장 옆 일본만 하여도 대병(大兵)이 직접 오가기는 어려운 일이외다. 그러니 천하 전체의 대세를 논함에 있어서는 어떻겠소?”

조선 수사의 열악한 상황을 떠올리며 김옥균이 말했다.

블라디보스토크나 페트로파블로프스크의 러시아 함대야 설령 사달이 나더라도 육군으로 연해주 항만을 점거하면 절로 고사할 것이니 염려될 바가 없으나, 남쪽 바다라면 사정이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았다.

얼마 전 어디 고도(孤島)를 내어주었다가는 섬 전체가 집어먹힐 것을 우려한 필리핀 정부가 마침내 독일에 빌려줄 항만을 정하였으니, 스페인 치하부터 군항으로 쓰여 왔던 루손 섬의 수빅(Subic) 만이었다.

코친차이나와 마리아나 제도, 아니, 차모로 자치령(가칭), 그리고 필리핀까지 점차 북적이는 바다에 조선이나 청, 일본이 나서서 무언가 해볼 수 있느냐 하면 딱히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특히나 건제함을 들여온 이래 예산의 문제를 운운하며, 거함보다는 조선 혹은 청국 선정국(조선소)에서 나오는 자잘한 전선을 위주로 전력을 확충해온 수군이었기에, 이미 앞다투어 해군력 증강을 말하는 유럽 국가들과의 격차는 해 거듭할수록 더 벌어지기만 할 것이었다. 아주 안에서야 지금 정도로도 족하였을지 몰라도, 장차 천하에 나아감에 있어서는 어떠할 것인가.

“천하 대란이 일어난다 한들 이곳 아주까지 전화가 미치기는 어려울 것이외다. 그러나 그때 목소리를 제대로 내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만전의 대비를 갖출 필요가 있소. 내 전중 그자의 말을 듣고 생각한 것은 그러하였소이다.”

그 후로도 몇 번 떠보듯 다른 뜻 없나 캐물은 김가진이 곧 만족한 듯 물러가니, 김옥균은 그제야 자신이 참고 있던 줄도 모르던 숨을 편히 내쉬었다.

김가진이 장동 김문 서자로 지내면서 문중에 원한 품은 것이야, 그때 이후 수십 년 지나면서 많이 씻겨 내려가기도 했으니 그 때문은 아니었다. 물론 본래 그리 선량한 인상은 아닌 사람이 세월과 더불어 독기 품으면서 눈매 매서워지기도 하였지만, 그렇게 따지면 김옥균 자신이 천하 유람하며 만난 사람 중 더한 사람도 여럿 있었지 않은가.

허나 김가진이 얽힌 일이면 결국 궐 안쪽까지도 이어지기 십상이요, 그러다 보면 지금까지의 경험에 비추어 보아 엉뚱한 일에 자신이 휘말리곤 하였으니, 긴장한 것은 아마 그 때문이었을 듯했다.

그리고 후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그 예감은 적중하였다.

영 미심쩍은 일인과 김옥균이 만났다는 소식을 듣고서, 아직 일본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는 못한 – 그리고 아마 평생 거두지 못할 – 귀남도 상당히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김가진이 가서 탐문한 바 그 말에 넘어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타산지석 삼아 훌륭한 마음을 품었다는 것이었다.

자신과 또 이런 데서 뜻이 맞았구나 여기면서, 추거도 임박한 판에 김옥균을 호출하니, 오라는 곳은 궐 안도, 바닷가도 아닌 양주(楊州) 인근 옛 궁방전 벌판이었다.

“그대가 장차 천하에 난이 일어날 때 능히 제압할 방책을 그리 고심하고 있는 줄은 내 미처 몰랐소이다. 그런데 이번에 우연히 들어 알게 되었고, 또 그대가 좋아할 만한 일이 마침 결실을 맺게 되었으니, 어찌 군신(君臣) 의리로 내 홀로 이 구경을 하려 하겠소이까?”

그러나 이번에 영국 해군이 도입한 터빈이나 근래 구상되고 있다는 신형 전함 등등을 생각하던 김옥균은, 바닷물이라곤 한 방울도 보이지 않는 이 벌판에 홀로 덩그라니 있는 저 기이한 기물은 대관절 용도가 무엇일까 고심할 뿐이었다.

그러건 말건 눈앞에서는 사람들이 오가며 기물 위에 덮여있던 천을 치우고, 무언가 부지런히 조이고 닦고, 또 깃발을 펄럭이며 풍향과 풍속을 재고 있었는데, 그때 벌판에 함께 나와 있던 사람들 중 하나가 옥균을 보고 다가와 아는체를 했다.

“혹시 지난번 미국에 찾아오셨던 미스터 킴 되시는지요?”

“맞소만.”

“반갑습니다! 저는 귀국 정부와 함께 비행 기계(Flying machine)를 만들고 있는 윌버 라이트(Wilbur Wright)라고 합니다. 저쪽에 있는 제 동생 오빌(Orville)과 함께 일하고 있지요.”

그때, 누가 무얼 잘못 건드렸는지 ‘어... 어?’ 하는 소리와 함께 천과 나무로 된 그 기물이 갑자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모르는 사람 – 예컨대 귀남 – 은 저것이 정말 날아갈까 궁금해하며 바라보는데, 한 몇십 미터쯤 가다가 옆으로 풀썩 쓰러졌다. 다친 사람이 있냐고 묻기조차 무안할 만큼 너무나 맥없이 쓰러져서, 보는 이들 얼굴에 난감함이 절로 서렸다.

“어... 원래는 저렇지 않습니다.”

어색하게 윌버 라이트가 변명을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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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화 말미에 잠깐 등장한 다나카 지가쿠는 니치렌 불교와 국가주의를 결합한 국주회(國柱會)를 이끌었습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올바른 영적 가르침을 보유한 일본을 중심으로 세계 여러 나라들을 하나로 합한다는 관념을 여기에서 내세웠는데, 이는 이시와라 간지와 같은 군부 인사를 통해 점차 극단적인 군국주의 사상으로 변하게 됩니다.

자동차가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이미 번호판 제도는 존재했습니다. 최초의 차량등록 및 번호판 관련 법규는 1893년 프랑스에서 제정되었고, 1898년 네덜란드는 모든 자동차의 등록을 의무화하였지요. 다만 단순히 등록한 순서대로 발급하는 것을 넘어 지역이나 목적에 따라 분류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이후였는데, 여기에서는 조선이 원 역사 유럽보다 앞서나가는 셈입니다.

의무교육 제도는 본래 18세기 프로이센에서 시작한 이후 한동안 몇몇 국가에만 국한되어 시행되었습니다. 많은 경우에는 학교의 설립만을 국가 혹은 지방정부의 의무로 법제화할 뿐, 보편적인 초등교육까지 명시하지는 않았지요. 영국의 초등교육 의무화가 1880년, 프랑스는 1882년이었고, 작중 시점에서는 아직 네덜란드나 벨기에는 비슷한 법제를 논의만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다만 일본의 경우 1872년 기존의 데라코야(寺子屋) 같은 전근대 기초교육을 철폐하고 의무적으로 초등교육을 시행하였는데, 여기에는 지방 통제를 위한 정치적 목적도 있었습니다. 교육비를 민간에 강요하는 문제로 지속적인 반발이 일어나고, 더불어 서양식 교육을 그대로 들여오면서 오히려 정부의 통제에 저항하는 자유주의 기조가 기층에서 확산되는 등의 문제가 있었지만 (이에 대응하기 위해 반포된 것이 1890년의 『교육칙어』입니다.) 결국 20세기로 넘어가는 시점에서는 그럭저럭 잘 자리를 잡게 되었지요.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일본은 조선의 서당을 단번에 철폐하기보다는 초등교육기관으로 존치시키려 하였는데, 문화통치기에 이른바 ‘개량서당’이 조선식 근대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기 시작하면서 결국 1929년 개정된 『서당규칙』을 발표, 사실상 서당 탄압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는 그만큼 서당을 중심으로 하는 전통 교육제도의 생명력을 반증하는 사례라고도 하겠습니다. 1921년 조선교육조사위원회에 제출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조선 전역의 서당은 2만 5천여개소, 학동은 30만에 달했다고 합니다 (정선영(2007), “일제강점기 제주도 개량서당 연구”, 제주대학교 석사학위논문).

신기선은 원 역사에서도 개화당 내각에 동참하였는데, 김홍집 내각에서는 공무대신과 군부대신을, 이후 광무개혁 시기에 학부대신을 역임하는 등 정치적으로 딱히 적을 두지 않는 온건한 면모를 보였습니다. 하지만 동도서기론적 입장에 있어서는 매우 강직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1907년에는 대동학회를 설립해 초대 회장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Die Traumdeutung)을 내놓아 유럽 사회 전체의 화제가 된 것은 1899년의 일입니다.

지금도 유명한 나가사키 카스테라는 원 역사에서 가수저라라는 이름으로 통신사를 통해 조선에도 알려진 바 있습니다. 귀한 설탕과 계란, 밀가루가 들어간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름만 들었을 뿐 한두 번 이상 맛보기는 어려운 음식이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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