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246화 (246/320)

81. 큰 같음으로 무리를 맺다 (2)

자 라마를 자칭하는 몽고 비적이 아주대회 경사로운 마당에서 무엄한 언사 내뱉으며 난동을 벌였다는 소식이 바다 건너고 산 넘어 곧장 이곳 심양까지 닿았으니, 소식 빠르고 상세하기로는 이웃집 담장 넘어오는 것과 같아, 어찌 보면 ‘아주를 하나로 묶는다’ 운운하는 그 대회의 명분대로 이루어진 셈이었다.

옛날 같았더라면 ‘차마 함부로 옮길 수 없는 말’이라며 쉬쉬했겠지만, 사람 심리가 그러할수록 더 궁금해하기 마련이요, 남쪽 조선국 따라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고 만주 글로 된 ‘신보’ 발간을 적극 지원하기까지 하였으므로 곧장 그 전말이 상세히 심양 사람들에게도 전해졌다.

“하루라도 바람 잘 날 없으니 참 신기한 일이로구나. 저승에 이승의 물건 하나를 가져갈 수 있다면 신보 구독권을 가져가고 싶을 정도야.”

공친왕 이힌이 어제자 『만주의 소리』를 접어 내려놓자마자, 마른 기침이 한동안 이어졌다. 곁을 지키던 시종이 미리 준비된 차를 건네주었으니, 표정 어두우나 놀라움은 없어 이 병세 오래 이어졌음을 방증하는 듯하였다.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병석에 누우셔도 마치 하늘의 해처럼 곧장 일어나시니, 누가 감히 훙(薨, 제후의 죽음) 자를 입에 담겠습니까?”

병상 옆에 늘어선 이들은 동삼성, 혹은 근래 스스로 부르기를 ‘만주나(만주 땅)’ 소조정(小朝廷) 이끄는 젊은이들이었다.

마신이가 천수 다하고, 공친왕도 세월 앞에서 마치 한때 청조가 양이 앞에서 그러하였듯 무너지고 또 무너져, 누가 무어라 하지도 않았지만 동삼성의 내정은 북경에서 벼슬 버리고 내려온 옌창 이하 만인 젊은이들의 손에 들어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비록 바깥에서는 콧대 높이고 다닌다 한들, 그 중 저들의 위세가 어디서 나오는지 모를 만큼 어리석은 자들은 없었으므로 –그만큼 어리석은 자라면, 대청의 앞날은 창창하기만 하리라 여기고서 아직 북경에 눌러앉아 있을 것이었다- 공친왕의 아직 침침해지지 않은 눈 앞에서는 다들 고개를 숙였다.

“하하. 바깥에서 만주 겨레를 입에 올리고 다니는 이들이 그런 말을 하니 조금은 우스운 일이다. 죽으면 죽는 것이지, ‘훙’이든 ‘불록(不祿, 사士의 죽음)’이든 번거롭게 말을 만들어 따지는 것은 한인의 번잡한 예법 아니더냐.”

본래도 성정이 선량하다고는 하기 어려울 사람이, 신산(辛酸) 겪으면서 심사가 배배 꼬인 고로, 병문안 온 이들을 비꼬는 것이 하루이틀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당장 이 자리에서도 만주 말 대신 익숙한 한어로 말 주고받고 있었으니, 그 비꼬는 말 가운데 뼈가 있었다. 바깥에서야 만주 언문(言文) 진흥을 외치지만, 정말 이곳 동삼성에서 한 발짝도 나선 적 없는 이들을 제하면, 만한 두 말을 모두 하는 자는 있어도 한어보다 만어를 편히 여기는 이가 드물 것이었다.

아이신기오로 일족 내에서도 두 말이 모두 익은 자가 반절도 채 되지 않을 판이니, 아마 금상의 다음 대, 그러니까 ‘푸(溥)’ 항렬까지는 가야 겨우 목표한 바를 이룰 것이었다.

“좌우지간, 이 자들이 꽤 머리를 잘 썼어. 비열한 수도 불사하니 그 조상에 부끄럽지 않겠군.

여러 나라 사람의 이목을 끌어와 그리 외쳤으니, 이곳 동삼성에 일궈둔 터전은 어느새 미리 만주 겨레를 위해 세워둔 것으로 못 박혀버렸고, 그러니 몽골도 그에 따라 자구지책 마련하겠다는 소리가 절로 힘을 얻게 되었지.”

“외번의 문제를 두고 한창 시끄러운 마당에 그리 난행 벌였으니 이르신 대로 비열하다 하겠습니다.”

천조 자리를 버린 중원과 외번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는 일은, 당초 이야기 나왔을 때부터 순탄하리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 생각보다도 훨씬 복잡다단하여 아직까지 지지부진하게 논쟁 이어지고 있었다. 금광 문제는 그 중 일각에 불과하였다.

처음에야, 외번들의 독립까지 가능하다는 입장을 취하면서 모든 논의를 다 받아들이려 했지만, 막상 떨어져나가게 내버려두자니 아쉬운 것이 사람 심리요, 또 토번이든 몽고든 떨어져나가면 영국과 아라사 둘 중 하나에 붙게 될 터인데 그리 되면 고스란히 중원의 손해 아닌가.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예전처럼 쉽게 양이에게 당할 중원이 아니므로 우선 내버려 두자는 쪽과, 이미 대청 세워질 때 하나로 묶인 외번을 그리 쉽게 놓아보낼 수 없다는 쪽이 다투고, 어느 쪽이든 결국 중원의 부(富)에 이끌려 외번들이 돌아오리라 전제하고 있었으므로 외번에서는 이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또 훌륭하지 않은가? 애초에 비열함과 고상함의 분별 따위 따지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최선의 수를 택하는 것이 초원의 법도인즉.

그리고 그에 있어서는 만몽이 같은 ‘초원의 겨레’라는 저 말에 일리가 있다 하겠네. 당장 이 자리에 순친왕이 와 있지 않은 것만 보더라도...”

아버지 이후완의 뒤를 물려받은 순친왕 자이펑(載灃)은 올해 나이 열여덟이니 겨우 성인 축에 드는데, 공친왕 와병하자마자 그의 후임으로 미리 정해져 지난 겨울에 이곳 심양에 와 있었다. 그 뒤에는 공화정부 일에 지난 을미년 이래 관여치 않던 자이티얀이 이례적으로 목소리 낸 일이 있다 하였다.

공식적으로야, 동삼성총독직은 그 중함을 다른 총독에 비할 수 없으므로 반드시 친왕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 황상의 뜻 전부였지만, 실제로는 지난번 원세개의 난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난다면 저의 친동생이라도 안전하길 바라는 마음에서일 테다.

어쨌든 황상의 혈육이요 친왕 자리 받은 아이신기오로의 사람일진대 이 자리에 없음은 그 의미 심장한 것이라. 겉도는 듯하다가 슥 들어오는 말의 칼날에, 이 사람이 그 옛날 북경 불탈 적에 천자 대신 나아가 양인들과 교섭한 그 공친왕임을 새삼스레 깨닫는 옌창이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굳이 숨김이 예의로도, 실리로도 옳지 않다 결심하여 곧 직고하였다.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전하. 이 자리에 지금 와 있는 자들은 모두 꾀하는 바가 있으니...”

“동삼성이 하나의 나라 구실할 수 있도록 떨어져나오기를 바라는 것이렷다.”

“예, 전하.”

분명 저들은 여럿이요 저쪽은 병든 노인 하나인데, 어찌하여 손에 힘 들어가며 땀 흘리는 것은 머릿수 많은 쪽이란 말인가.

“그리하여 몽고인들을 이곳 심양에 데려와 함께 획책한 것이겠지. 하이산(Khaisan) 그 자의 동향은 경조(京兆) 관헌들도 면밀히 살피고 있으니 노쇠한 나라 하여 어찌 모르겠는가? 이제 와서 그대들을 죄주려 하지는 않을 테니, 얼른 다 털어놓아 보게.”

주저하며 주변 한 번 둘러보고서, 옌창이 말했다.

“이르신 대로입니다. 하이산이 차하르에서 쫓겨나 동삼성으로 왔기에 그를 거두어 함께 모의하였습니다. 이번에 일본국에서 자 라마의 말을 옮겨 전한 것도 그 사람입니다.”

하르친 사람 하이산은 한인에 맞서 몽골 사람들이 뭉쳐야 한다는 생각에, 이미 수 년 전부터 저의 가산을 처분하고 형제들과 함께 내몽골 곳곳을 전전하며 그 뜻을 설파하다가 청 관헌들과 숱한 마찰을 빚은 바 있었다.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했는가? 이미 산해관 동쪽은 이름만 같지 실상은 다른 나라일진대, 그만하면 되었지 않은가?”

“송구스러운 말씀이오나, 애당초 전하께서 이렇게 다른 나라로 살림 차리신 뜻이 여기에 있지 않았는지요? 저희 생각에 잘못이 있다면, 용기가 없어 드러내 말하지 못하고 암중에서 획책한 것 하나입니다. 혹 헤아림에 미진함이 있다면 깨우쳐주시기를 청합니다.”

이제 노호성 들려오리라 여기고서 눈 질끈 감는데, 돌아오는 것은 허탈한 웃음이었다.

“그랬군... 하하. 그렇게 보였겠어.”

처음 쫓겨나 이곳 동삼성에 둥지 틀었을 때부터 확실히 하여야 했다. 공친왕 그가 되기를 원한 것은 심양의 칸이었는가, 아니면 대청 부흥에 이름 남길 금세의 주공(周公)이었는가?

이제 와서야 후회하건대 둘 중 하나로 마음 굳히지 못하고 사세 따라 흔들려,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부득불 저들 뜻대로 해석케 만든 것은 근본 찾자면 공친왕 본인의 잘못이었다.

황상 자이티얀이 공화정부에 대권을 넘기겠노라 선포한 이래로, 아니, 실은 그 전부터 동삼성 넘어오는 이들의 면면이 꾸준히 변하고 있었다.

화북의 한인들이 이왕 새 터전 구하러 가는 길 황금 나는 곳으로 향하겠다며 바다를 건너고, 또 저들 고향에서 지주의 땅을 빼앗아 나누어준다며 유조변(柳條邊) 도로 넘어가곤 하였다.

그 대신 넘어오는 이들은, 멀리 강남부터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넘어오는 같은 만인들, 주방팔기(駐防八旗) 기인들이었다.

만주 고관들이야, 자정원에 한 자리 얻거나 자의원에 연줄 대거나 하는 식으로 저들끼리 어찌 계속 중원에 발 붙이고 있을 수 있지만 (당장 대총통 되시는 분의 사례가 있지 않던가) 나머지 땅의 큰 고을마다 있는 만성(滿城, 주방팔기 주둔지의 속칭)에서 한족들과 나란히 살던 이들은 그만큼 사정이 여의치 못하였다.

처음 변법을 하던 시절 이미 변발을 폐하였으니, 눈치껏 음양두(陰陽頭)하는 이들부터 옛적 태평천국 장발적처럼 머리 기르는 이들, ‘개화풍’으로 단발하는 이들 등등. 다 같이 금전서미 하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한인과 만인으로 나뉘었다.

그뿐이랴? 각 성에 매서운 서양 병기 든 군대가 들어오니, 비록 나라에서 얼마 안 되는 은을 기인들에게 계속 주고는 있다지만, 이미 한인들이 무슨 의원이다 하여 차지한 조정에서 과연 만인들, 그것도 별 세력도 쓸모도 없는 기인을 얼마나 챙겨주겠는가?

하여, 건륭 연간에는 저들이 일찍 귀부하였다며 기인의 일원이라 주장하였던 집안(한인팔기)의 후예들은 바로 그 족보를 내세우며 슬며시 한인들 사이에 끼어들고, 도저히 그럴 수 없던 이들은 적어도 그 피와 터럭을 근거로 핍박당하지는 않을 동삼성 ‘만주 땅’으로 향했다.

그렇게 넘어온 이들이 북경 조정을 원망하면 원망했지, 무슨 황은(皇恩)을 마음 깊이 새기겠는가?

그들도 다 같은 대청 백성이라 하였지만, 그러면서 자신이 한 일은 무엇이었는가? 여차하면 만인들의 마지막 보금자리 될 고향 땅을 다지겠다 하였지만, 이미 그 ‘여차하면’은 적지 않은 만주 사람들 눈에는 직면한 현실이었다.

“만약 몽고가 떨어져 나가면, 그것을 핑계로 동삼성도 자립하겠다며 요구할 생각이었겠지. 이미 중원에서는 뜻을 펼 수 없게 되었으니, 이곳에서라도 정사를 맡아보고자 하는 그 욕심에.”

“어찌 두말하겠습니까.”

‘전하 가신 뒤에, 남은 이들은 나름대로 살아남아야 하지 않겠습니까.’라는 말이 혀와 귀 대신 눈 사이에 오갔다.

더구나 이미 여러 사람의 사정 켜켜이 쌓여 복잡한 북경 정국에 비해, 이곳 동삼성 만주국은 한 사람 아래 나날이 발전해왔으니 얼마나 말끔하면서도 구미 당기는가? 떠밀려 왔든, 꿈에 취해 왔든 만주 젊은이들이 공친왕 떠난 뒤의 동삼성 내정에 한 발 걸치기 원함을 어찌 원망하겠는가.

“이 일이 경사(京師)에도 전해졌으니, 조만간 추궁하는 말이 이쪽에도 전해지겠지. 그로써 동삼성 사람들과 조정을 이간질하고, 찬동하는 세력을 모으는 데 그대들 노림수가 있을 테고.”

동삼성과 북경이 갈라서게 되면, 외번들 입장에서는 적진에 분열 일어나고 든든한 우군 생기는 격이요, 아이신기오로 샨키(善耆)처럼 동삼성은 용흥지지로서 결코 대청에 거스르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심양의 정적들도 누를 수 있으니 옌창 입장에서는 상부상조라 할 만했다.

“저희도 감히 흉험한 생각을 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설령 자립한다 하여도 대서 오지리국(오스트리아-헝가리)이나 일본국의 사례를 따르고자 한다 하겠지. 알고 있네.”

회한 가득한 목소리로 공친왕이 말했다.

“그대들이 그대들 하고자 하는 대로 행하여 이 소란이 일어났으니, 나 또한 나의 하고자 하는 바로써 막을 방책을 구하겠네. 여기에는 이의가 없으리라 믿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양심이 없지 않고서야 어찌 공친왕더러 가만히 있기를 청하겠는가.

하여 곧 한양으로 전보 한통이 갔는데, 서두가 이러하였다.

‘조선국 최 공은 보시오. 일전에 북벌을 경하하였던 그 값을 받고자 하오.’

받아본 최익현은 곧장 주상에게 직소하였으므로, 때마침 열리던 기무회의의 안건들은 모두 뒷전으로 밀리고 아주대회에서 일어난 소동과 그 여파를 논하게 되었다.

“아국이 나라 사이 수호를 위하여 주동한 행사일진대 이리 매번 소란이 일어나니 결코 옳은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또한 아국이 도의 헌양하여 여러 나라 가운데 명성을 얻었으니, 비록 직접 간섭함은 옳지 않으나 또 가만히 좌시할 수만도 없는 것입니다.”

사정전에서 엄숙한 기무회의를 여는데, 상 위에는 밤과자 – 얼마 전 전역하고 귀남이 가르쳐준 군밤 비법으로 밤 들어가는 과자를 만드는 회사 차린 천덕만이가 진상한 것이었다 – 놓여 있었다.

신보에 실리는 이야기만 본 이들이라면, 엄중한 나랏일이 논의되는 자리를 상상할 때 결코 그런 근엄한 중신들이 과자 우물거리는 모양새를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중신들도 체통이 있을진대 어찌 저들이 청하여 이런 모양새를 만들었겠는가? 안양대군 구주 다녀온 이래 유독 그 ‘과학’ 소식들이 이곳저곳에 많이 전하는데, 그 중 하나로 달콤한 음식 안에 이른바 당분(糖分)이 있어, 그것이 몸 안에서 변화 일으켜 머리 움직이는 힘을 제공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 이치 규명한 것은 덕국의 어느 사람이되, 옮겨서 널리 퍼뜨리는 것은 안양대군이요, 그의 공을 마치 자신의 공인 것처럼 기특하게 여기는 사람은 다름아닌 주상이라. 더구나 지난 수십 년간 군밤과 가배를 필두로 달달한 주전부리 널리 전파해온 사람이 또 누구던가.

하여 귀남이 싫증나거나 다른 일로 마음 쓰이게 되기 전까지 한동안 기무회의는 감미(甘味)회의가 될 것이었다.

“공친왕이 묻기를 외번이 모두 떨어져나가려 하니, 아예 이를 막지는 못하더라도 잠시 붙들어맬 방편이 있겠느냐 하였습니다. 우리가 지난 출병에 있어 동삼성의 도움을 받은 바 있고, 또한 청국과의 우의가 있으니, 숙고할 제의라 하겠습니다.”

이처럼 직접 몽고의 일이 조선과 얽히게 된 것은 아마 전조 고려 말엽, 잘 쳐봐야 세종조 전통 연간에 출병 청한 것(토목의 변) 정도가 전부일 테다.

그러므로 당색을 떠나, 비율빈에 이어 이번에는 마찬가지로 머나먼 몽고의 일에 엮이게 되었으니 어느 정도에서는 분명한 선을 그어야 매사에 조선이 휘말리는 것을 미리 막을 수 있으리라 보는 이들이 있고,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게나마 돕는 뜻을 표해야 한다는 이들이 있어, 기무회의에서 간만에 논쟁이 일어났다.

그런데 듣는 귀남이 걱정하는 바는 그와는 다른 데 있었다.

“그 자 무어라 하는 이가 장기(나가사키)에서 난행한 바는 전해들었소. 만일 그것이 무슨 원통한 곡절 때문이 아니라 사람 사이 이간질을 위한 책동이었다 하면 참으로 근심스러운 일이나, 무릇 사안이란 여러 면이 있는 법이지 않겠소이까.

다만 그 ‘올바른 가르침’이라 통칭한 것이 마음에 걸리는구려.”

“원대 이후로 몽고 백성들이 널리 석교를 숭상하게 되었으니, 다만 활불(活佛)을 숭상하는 것이 아국의 석교와는 다를 뿐입니다.”

예판 유길준이 바로 고하였다.

처음 청나라 오가던 이들이야 별 허황된 석교 별종도 다 있다 여겼다지만, 지금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물론 절로 그리 된 것은 아니요, 신설 봉천대학교 석좌교수 구스타프 오페르트가 힘써 설파한 덕이었다.

만주 건너온 조선 사람들, 특히 유학 배운 세도가 서자들이 어설프게 알고서 떠들다가 독실한 만주 사람들과 사이 틀어지고 주먹다짐까지 하게 되는 일이 적잖이 있어서, 그것이 얼핏 보면 허황되게 보일 수 있으나 실은 나름의 내력과 전통이 있는 것임을 글로 널리 알리고 퍼뜨린 것이다. (형 에른스트 때문에 억지로 유학을 공부한 것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 누가 알았으랴?)

“그렇다니 더 우려되는구려. 불교를 비롯해 여러 가르침이 있으니, 이들은 대개 백성의 마음을 평온케 하지만 간혹 편벽한 폐단이 생기고 또 여러 백성을 현혹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오. 지금까지 몽고 백성들이 불법을 숭상하였다는데, 갑자기 그것을 받들어 하나의 나라를 만들겠다고 하니 혹 엉뚱한 가르침이 있는 것 아니겠소?”

천생 선비인 다른 관헌들 듣기에도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아무리 여러 나라와 더불어 수호한다 하지만, 여러 중신들이 이른 것처럼 아국이 매사에 끼어듦은 온당치 않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번 일은 의심되는 바가 있으니 어찌 살피지 않겠습니까?

무릇 그러한 일이 있을 때 상책은 직접 나아가 묻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영의정 김홍집이 말하니 대체로 타협할 만한 안이라 모두가 끄덕였다.

헌데 그 제안된 바를 상세히 살피자면, 불법(佛法)으로 나라를 세우겠다는 그 이치를 살피고자 나라의 고승들을 모아 멀리 몽고 땅에서 그 활불에게 묻도록 하겠다는 것이었으므로, 선비들 모였다는 조정에서 나온 계책이라고 하여도 수십년 전 조정 생각하는 사람이 들었더라면 기함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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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에 들어 내몽골 일대에서 한인과 몽골인의 민족 갈등이 발생하고, 더불어 청 조정이 점차 ‘한화(漢化)’되어간다는 인식이 몽골 왕공족 사이에서 퍼지게 되면서 점차 몽골 안에서도 독립 여론이 비등하게 됩니다.

이미 작중에 등장한 하이산이나 자 라마 같은 이들에 의해 여러 방법으로 민족주의 고취가 시도되었지만, 사회주의 혁명 이전에 가장 큰 성공을 거둔 것은 티베트 불교를 통한 결집이었습니다. 하이산은 원 역사에서도 강직한 성품으로 인해 청 관헌의 미움을 사, 북만주로 일가와 함께 이주하였는데, 작중에서와 달리 여기서는 러시아 영사와 친분을 쌓고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투신하였습니다. (1900년대 초를 전후한 몽골 민족주의 운동의 초기 동향에 관해서는 이평래(2008), “1911년 몽골 독립과 민족통합운동의 초기과정” <동향사학연구> 104을 참고했습니다.)

팔기군은 잘 알려진 것처럼 청 초기부터 군사력의 핵심을 이루었습니다. 제도가 완전히 형해화된 뒤에도 팔기제는 신해혁명, 심지어 변경 지역에서는 중일전쟁 직전까지 유지되었습니다. 일종의 지방 주둔군이라고 할 수 있는 주방팔기는 강희~건륭 연간에 걸쳐 청 전국 70여 개소로 주둔지가 늘어났고, 각지에서 독립적인 주둔지를 구축해 현지 한인과 (이론상) 동화를 피했습니다.

이후 청의 몰락과 함께 기인들 역시 상당수는 현지 한인 사회에 동화되었지만, ‘기인’이라는 의식만은 이어져 중공 정부 수립 후 ‘소수민족’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만주족을 구분짓는 기준도 팔기의 병적(기적)에 선조의 이름이 있는지였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만주족은 비록 그 언어는 거의 상실하였으나 여전히 1천만 명 이상 남아 중국 각지에 분포하고 있지요.

지나가듯 등장한 순친왕 자이펑은 원 역사에서 청의 마지막 황제 푸이의 생부이자, 광서제 자이티얀의 동생이었습니다. 광서제는 차남인데 자이펑은 5남인 관계로 터울이 꽤 큽니다.

말미에 등장하는 ‘활불’은 티베트 불교 특유의 환생 개념을 말합니다. 연암 박지원이 연행에 나섰을 때, 열하에서 판첸 라마에게 조선 사절들이 예를 갖추는 문제를 두고 갈등이 벌어진 바 있지요. 결과적으로 처음에는 ‘불승’에게 절하기를 거부하였던 조선 사절단은 황제의 스승에게 맞는 예를 갖추었습니다만, 여기에 대해서는 조선과 청, 티베트 측 기록이 모두 갈립니다.

19세기 말~20세기 초는 유기화학 역시 크게 발전했던 시기입니다. 『셜록 홈즈』 초기 판본에도 홈즈의 ‘지적인’ 취미로 등장할 만큼 당대에 큰 관심을 끌기도 했지요. 포도당 대사에 관한 연구는 본디 에탄올 발효에서 시작했는데, 에두아르트 부흐너(Eduard Buchner) 같은 뛰어난 과학자들에 의해 작중 시점에서는 완벽하게는 아니어도 상당 부분 진척된 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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