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언덕 위의 도성 (1)
때는 바야흐로 개국 오백팔년(1899) 봄이라. 우수도 진작 지나 경칩 향해 달려가니, 밤바람도 근래는 훈풍이라. 휙 훑고 지나가는 와중에 때이른 봄꽃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그런데 그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지나치게 간지러운 모양이었다.
“에취!”
“아 보 수에(À vos souhaits, 재채기하는 사람에게 하는 말.), 어르신.”
이제는 개화당 ‘젊은이’라 부르기도 무색한 중진들과 술자리 마치고서, 기다리는 자동차로 향하는 김옥균이 거하게 재채기하니, 보좌관 안느장이 놓치지 않고 끼어들었다.
“가뜩이나 근래 봄철에 고생하시는데, 거기에 약주까지 과하시니 이런 것 아닙니까. 내일모레면 ‘하늘의 부름을 아실’ 나이인 분께서...”
“안 취했네.”
“예, 그러시겠지요.”
보좌관 안느장은 이제 저의 모국어 대신 ‘부국어(父國語)’로도 유창히 말 나눌 수 있게 되었지만, 유독 이럴 때면 프랑스어를 고집하곤 하였는데, 김옥균은 그것이 남에게 합쇼든 하소서든 공대하기 싫어하는 저의 성미 닮았기 때문이라 의심하고 있었다.
미리 시동을 걸어둔 자동차가 곧 그림자와 노명등 불빛 사이를 헤치며 나아가기 시작했다.
“석유 소란 이후로 부쩍 약주가 늘어나신 것 아십니까?”
신보에 오르내린 소식이라야, 토이기국 및 일대 제국(諸國)과 더불어 조선국이 석유 캐내는 일에 한몫 거들게 되었다는 것이 거의 전부요, 『경화시보』가 박정양의 공로를 조금 더 조명하고 『해동일보』에 박은식이 ‘돌궐후예유락지사(突厥後裔流落之事)’라고 짤막한 글을 몇 차례 연재한 정도가 그나마 더 언급할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안느장쯤 되는 내부자는 조금 더 그 사정을 깊이 알고 있었다.
“그런가?”
“정확히는 그날 자유당 당사 찾아가셨던 그 다음부터였지요.”
듣고 나서 생각해보니 일리가 있었다.
“마음 속에 얹히신 게 있는 것이겠지요.”
“관심법은 언제 터득했는가?”
“뭐, 혈연이라는 게 있으니 사람 마음속이 어디 멀리 가겠습니까? 제가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면 무슨 이유일까 생각해보면 금방 떠오르는 일이지요.”
여전히 입은 산 그의 아들이었다. 논쟁해보아야 이미 반절쯤 혼탁해진 머리로 도저히 이기기 어려울 듯하여, 지난 번 최익현과 이야기 나눈 뒤에 얹힌 사정을 털어놓았다.
“... 그렇게 된 게야. 한편으로는 도덕이니 의리니 하는 것이 허울뿐인 듯하면서도, 그 허울이 어쨌든 국익에 도움이 된다 하였으니 이를 도저히 부정할 수가 없더군.”
스스로 남보다 낫다 자부하였건만, ‘네 말대로라면 지금 조선은 무어란 말이냐’ 하는 듯한 최익현의 그 꼬장꼬장한 대꾸가 시일 흐를수록 머릿속에 계속 떠오르는 김옥균이었다.
“하지만 천하의 대세가 아무리 바뀌고 바뀐들, 결국 도의는 도의고 실력은 실력인데, 언젠가, 어떻게든 우리가 지닌 허(虛)를 실(實)로 채워야 하겠지. 하지만 그 길이 보이지 않으니, 지금 옆에 지나가는 저런 가로등이나 하나쯤 있으면 좋겠다, 그런 심정이야.
자, 이만하면 복채는 되었으니 해몽이나 해보게.”
“어르신 모르는 이야기를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고약한 녀석.”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기는 하였으나, 아무리 털어놓은들 그 근원은 그대로였다.
천하가 태평하면 농군들은 격양가(擊壤歌) 부르며 나랏님 계심을 잊는다는데, 지금 태평한 조선의 관료들은 업무 없던 시절을 잊은 지 오래였다.
하물며 나랏일 하나가 일단락이 되기 무섭게 새로 일이 터지곤 하니, 경무대 뒤에 있었다던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福地)’가 이르던 복락이 실은 일복 아니었냐는 무엄한 농이 야심할 때 가배잔과 함께 돌고는 하였다.
허나 설령 귀남이 듣더라도 고생 많다 허허 웃으면서 군밤을 내려주질지언정 – 물론 맛나게 먹은 뒤에 주상 떠나시면 닥쳐올 후과는 가볍지 않을 것이다- 차마 언짢게 여기지는 못할 것이었는데, 특히 지금은 더욱 그러하였다.
어느새 명년으로 다가온 첫 아주대회의 개최지는 어어 하다 보니 홀라당 일본으로 넘어가버렸는데, 이웃나라 조선을 비롯해 다른 아주 나라들과 끈끈한 연을 만드는 데 필사적이었던 요시노부네 애국공당에 비해 여러 사정이 복잡히 얽혔던 다른 나라들이 진력하지 못한 탓이 컸다.
예컨대 청국만 하더라도 외번들이 독립할지 말지를 두고서 정식으로 교섭이 막을 올린 가운데, 북양군과 보국회를 원수로 생각하는 화북 출신의 옛 지주들은 손덕명과 그 일당이 무슨 낯으로 아직 경조(京兆) 더럽히냐며 언성 높이곤 하였다.
하와이나 류큐는 아주대회 같은 큰일을 처음으로 맡기에는 나라의 힘이 언감생심이요, 그나마 남은 조선은 윤치호가 개화당 표심과 저의 육예 사랑하는 마음 가운데서 갈등하던 끝에 후자를 택하는 바람에 – 결과적으로 총리직이 자유당에 넘어갔으니 완전한 패착은 아니었으나 - 대회 규칙에서 일본 쪽에서 많이 양보를 얻어내는 조건으로 일본에 양보하고야 말았다.
자유당 선비들도 이에 어느 정도 동의하였는데, 명분으로 생각하여도 조선이 앞장서서 시작한 아주대회인데 스스로 드높이는 것을 첫 전례로 삼게 된다면 옳지 않은 것이요, 더구나 윤치호 말처럼 명분 얻은 덕에 일본국의 각종 고약한 악습, 예컨대 나름 동맹이라고 영국에서 엉뚱한 것을 배워 와 자동차를 음방(陰方)인 오른쪽에 앉아 모는 것 등을 고치게 되었으니 이 또한 좋은 일이라.
허나 소년이 굴렁쇠 굴리던 시절(88올림픽) 생각하던 귀남은 영 마음에 맞지 않게 여긴바, 이왕 이리된 것 꼭 나아가 이름을 드높이라 하였다. 더구나 그 개최할 곳이 장기(나가사키)로, 정한이니 무어니 하는 흰소리 하곤 하였다는 사츠마 땅이었으니, 더욱 져서는 아니 될 것이라 하유하였다. (조선에서는 모를 일이나, 이것이 정적 오쿠보를 배려하는 척하면서 그 땅의 불온한 무리들에게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주려는 너구리 요시노부의 심계이기도 하였다.)
마침 그때를 전후하여, 안태훈의 아들 안중근이 오랜 고민 끝에 포술로써 보국하겠다며 그 포부 밝히니, 부귀한 집안의 자제가 이렇게 나섬이 기특하고 또 얼추 전생의 그 사람이 맞는 듯하기도 하여 귀남이 하교하기를 이 대회에 나아가 이름 떨치는 이에게는 상급으로 군역을 면해주겠노라 밝혔던 것이다.
이것이 곧장 참의원 거쳐 국법으로 굳어지니 – 다음 추거를 생각하면 어찌 감히 반대하겠는가 – 몰려드는 팔도 장정 앞에서 윤치호와 서재필은 고역을 치루었다.
그러나 그것도 한철 일이요, 이제는 조금은 한산해져 육조의 절반이 달라붙거나 할 일은 없을 듯했는데, 그때를 못 참고서 석유의 일이 터지고, 그 다음에는 미리견 땅 전선(戰船)이 고루 인사를 도는 판에 또 촉각을 곤두세워야 했다.
“... 하여, 주인이 없던 남양 절해고도 왜익도(웨이크Wake 섬)를 금번에 차지하게 되었은즉 이에 주변국에 이웃의 도리로 널리 수호하는 뜻을 전하고자 한다 합니다.”
“허어, 먼 곳에서 그리 좋은 뜻 품고 찾아왔으니 설령 교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왔다 하여도 유원(柔遠)의 법도를 아끼지 말아야 할 터인데, 더구나 오래 알고 사귀었던 미국에서 찾아왔으니 어찌 환대하지 않을 수 있겠소? 예조와 병조에서는 이를 알고 흠례가 없도록 잘 처결하기를 바랄 뿐이외다.”
고하였더니 곧장 이러한 하교 내려온즉 받들지 않고 무엇하겠는가?
그러나 이것만으로도 머리 복잡한 판에 미국에서 또 은밀히 연통 들어왔으니,
“삼가 청하건대 부디 듀이(George Dewey) 제독이 이끄는 태평양함대를 맞이하실 때, 마리아나 제도의 일은 거론하지 말아주십시오.”
하는 정중한 청이었다.
그러나 조선이 관심 가지지 못하게 하기에 이만큼 잘못된 방법도 드물 것이었다.
“반드시 말하라는 것도 아니요, 거론치 말아달라는 것이니 이는 딱히 힘쓰지 않아도 될 일이기는 하나, 그 청이 기이하니 연유를 짚지 않고 넘어가는 것은 옳지 않을 듯하오. 혹 도울 바가 있는데 차마 말하기 저어되어 드러내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지 않소?”
하물며 동네 개구쟁이도 ‘이 단지 안의 물건을 맛보지 말라’ 하면 반드시 맛보기 마련인데, 남의 나라 사정에 퍽 관심 많은 조선에, 그것도 특히 미래 생각에 미국에 유난히 각별한 마음 품고 있는 귀남에게 그리 청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리 뛰고 저리 뛴 끝에 – 하필 총리대신도 김윤식 다음으로 예조의 큰어르신인 김홍집 아닌가 – 마침내 유길준 선까지 올라와 신속히 뒷사정 고하려던 차, 예조에 또 다른 벼락이 내리쳤다.
“큰일입니다!”
“오던 미리견 전선이 갑자기 화약이라도 터져서 가라앉았다던가?”
호들갑에 섬뜩한 농담으로 대꾸하는 유길준이었는데, 개의치 않고 달려온 참의가 이어 고하였다.
“화약이 터지기는 터졌는데, 비율빈 여송(루손)에서 터졌답니다. 몇 해 전 찾아왔던 비율빈 이씨(호세 리살)가 다시 찾아왔습니다.”
잠깐 말을 잊은 유길준이 얼마 뒤에야 정적을 깼다.
“우선 사정을 들어보아야 하겠군그래.”
천하 사람들의 사랑방 되는 것도 천하 만방에 다리 뻗친 조선국의 업보라면 업보 아니겠는가 생각하며, 혹시 모르니 성상과 영상께도 전하라 지시하였다.
원래대로라면야 내년에나 찾아왔음직한 사람이 이렇게 미리 찾아온 연유 청취한즉 그리 유쾌한 사정은 아니었다.
“역모라 하셨습니까?”
리살의 표현은 ‘쿠데타(coup d'état)’였지만, 어차피 대다수 조선 사람들 보기에 몹쓸짓인 것은 거기서 거기였다.
“대략 그렇습니다.”
한숨 새로 내쉰 리살이 사정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한양에서 저도 모르는 새 필리핀의 부통령이 된 리살의 귀국을 기다렸다는 듯, 마닐라의 신정부는 둘로 나뉘었다.
“듣기로는 이미 독립 이전부터 같은 카티푸난 내에도 파벌이 나뉘어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러던 것이 정부가 세워지면서 양지로 곧장 드러난 것입니다.”
아시아에서 입지를 새로 다지기 위해 기꺼이 독립에 필요한 지원을 해주겠다는 독일의 제안이 갈등의 시작이었다.
“붕당이라면야 어느 나라든 사람이 모이면 생길 수 있는 것이지만, 그런 여상한 일이었다면 부통(부통령)께서 직접 이리 찾아오시는 일은 없으셨겠지요.”
위안 반, 재촉 반으로 유길준이 말했다.
“맞는 말씀이십니다. 한때의 동지들이 이렇게 쉽게 분열될 줄은 몰랐습니다. 차라리 누군가에 의해 매수되어서 혁명을 배반하였다던가 하면 마음은 조금 편했겠지만, 의견의 충돌이 이렇게 극단으로 치닫게 되었으니 참 서글픈 일입니다.”
대통령 안드레스 보니파치오(Andres Bonifacio)가 이끄는 막디왕(Magdiwang) 파는 현실론을 내세웠다.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보다 먼저 유럽과 접촉한 우리지만, 기나긴 식민지배를 거치면서 자생을 도모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당장 많고 많은 섬들 중 정부의 지배가 닿지 않는 곳이 한둘이 아니고, 멀리 술루 술탄국은 벌써 민다나오섬을 제패하려는 야욕을 드러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준 것은 독일뿐이니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
멀리는 프랑스와 영국을 번갈아가며 이런저런 이익을 취한 조선과 일본이 있었고, 보다 가깝게는 아프리카의 콩고도 있었다며 내세우는 주장이었는데, 전쟁까지 불사하며 독립을 주장해왔던 과격파들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막달로(Magdalo) 파벌, 그리고 그들을 이끄는 에밀리오 아기날도(Emilio Aguinaldo). 그들 모두는 몰라도 대부분은 분명 투철한 사명감으로, 대의를 위해 그런 주장을 펼치고 있지요. 하지만 그 어떤 대의도 피와 폐허 위에는 설 수 없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본인의 군재와 카리스마로 빠르게 막달로 파의 지도자로 올라선 아기날도는, 독일의 야심이 결코 섬 한둘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 경고하였다.
‘보니파치오는 지난 수백 년의 역사에서 대체 무엇을 배웠는가? 도독부가 제 발로 물러난 것은 무슨 도덕이나 운명이 아니라, 오직 힘이 부족했기에 그런 것이었다. 나날이 국력이 오르고 있는 독일이 이제 마닐라의 정부 청사를 다시 도독부로 쓰겠다고 하면 그때도 저들은 기꺼이 고개를 숙일 것이다!’
도독부가 물러나면서 부패한 군인들이 뿌리고 간 구식 화기 따위로 무장한 군벌들이지만, 그 수가 적지 않았고, 더구나 술루 술탄국도 남쪽에서 재기를 노리고 있었다.
이런 판에 개입하였을 때 순수한 마음으로 정부를 도우리라고 기대하기에 리살은 벌써 너무나 마음이 늙어 있었다.
“그런데 굳이 아국을 찾으심은 어째서인지요? 아국과 덕국 사이가 진(秦)과 초(楚)만큼은 아닐지라도 오월(吳越)만큼은 될 터인데... 결국 원인은 덕국에 있으니 그들의 진의를 확인받으면 될 일입니다.”
“물론 베를린에 도움을 청한다면 쉽게 해결될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그 값을 우리가 낼 수 있을지는 모를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 대신 엉뚱한 것을 내어주고 그 값을 덮어씌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요.
우리가 그쪽에 조차지를 약속했으니, 이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카이저는 최신 전함이라도 보내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신 아기날도가 주장하는 것처럼, 우리 정부를 꼭두각시로 만들고, 이름뿐인 독립국으로 전락시킬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이제 갓 독립한 사랑스러운 조국에 그런 운명을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비율빈과 한양 거리가 가벼운 마음으로 오갈 만한 것은 아니므로, 결연한 각오 품고 왔으리라 여겼더니 과연 그대로였다. 그렇지만 그 굳은 뜻에 감탄하는 것과는 별개로, 국록을 받는 입장에서 반드시 물어야만 하는 것이 있었다.
“그러면 아국에 대신 도움을 청하시려는 것입니까?”
“면목 없습니다만... 그렇습니다. 이미 보니파치오 대통령은 무력진압을 준비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저는 마지막으로 다른 수단을 찾겠다는 명분으로 이곳까지 급히 왔고요.”
‘명예로운 후퇴’의 일환으로 도독부가 철수할 때 양국 수호의 상징으로 남기고 간 무기와 함정 몇 척, 그리고 허울뿐이라는 비난을 겨우 면할 정도인 군사고문단이라지만, 그래도 아직은 아기날도와 그 일파를 군사적으로 진압할 만큼은 되리라는 것이 막디왕 파벌의 기대였다.
“우선 귀국의 어려운 사정은 잘 알겠습니다. 조정에서 논의하여 곧 정해진 바를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어차피 ‘조선이 개입하여 압력을 행사해준다면 무엇을 내줄 것이냐’와 같은 질문의 답은 뻔하였으므로, 차라리 묻지 않음이 도의에 맞았다.
그리고 곧 조정에서도 옳고 그름을 두고 다툼이 일어났다.
“비율빈국의 사정이 그러하다 하여도, 우리가 나서서 병기나 사람을 보내는 것은 불가한 일입니다.”
“이는 여송 정부 안에서 파당이 갈린 것인데, 그 바탕을 살피면 덕국의 뜻을 의심하는 것에 갈림의 근원이 있습니다. 덕국에 알려 이를 해소하게 할 수는 없겠습니까?”
“그리하면 오히려 덕국이 다른 수를 먼저 쓸 것이므로, 하지 않으니만 못할 것입니다.”
몇몇 중신의 정말 야속한 속 생각으로는, 그때의 그 아주대회 때 일과 얽히지만 없었더라면 나몰라라 하였을 것이었다. 허나 비율빈도 엄연히 대회 참여를 약조한 나라로, 아주 만방의 화해(和諧) 운운하는 마당에 그 나라의 어려운 사정을 방관하였다 하면 이 또한 온당치 않은 것이라.
“다른 나라를 끌어들여 덕국으로 하여금 받고자 한 바만 받도록 할 수도 있지 않겠소?”
그때 무언가 떠올린 귀남이 말했다.
“미국은 듣기로 그 발상이 구주 여느 나라와는 달라, 남을 돕기를 좋아한다 하였소. 설령 그것이 허명이라 할지라도 엄연히 널리 퍼진 명성일진대, 비율빈 사정이 그처럼 딱하다 하면 도울 수도 있지 않겠소이까?”
이것이 제발 정치적인 사안을 몰고 오지는 않기만을 바라던 워싱턴 D.C.의 맥킨리 행정부에, ‘참으로 송구스러우나 염려하던 사안을 전하게 되었음.’으로 시작하는 조지 듀이 제독의 전문이 전해지게 된 사연이었다.
--- *** ---
알러지라는 개념이 처음 제시된 것은 1906년이며, 20세기 중반 면역학의 발전에 힘입어서야 그 기전이 본격적으로 밝혀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봄철 고생을 해결하려면 화타나 편작쯤은 돌아와야 할 것입니다.
원 역사에서 막달로와 막디왕 두 파벌의 갈등은 필리핀 독립전쟁 중에 본격적으로 불거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카비테(Cavite) 지역에서 스페인군을 여러 차례 무찌르며 새로운 지도자로 부상한 아기날도는, 다른 카티푸난 지도자들과는 달리 서구식 교육을 받은 엘리트(일루스트라도)에는 들지 못했지만, 토호 집안 출신으로 타고난 카리스마와 군재가 있었기에 삼촌이 이끄던 막달로 파벌을 이끌게 되었습니다.
결국 아기날도는 자신이 이끄는 막달로 위주의 통합에 성공했고, 원 역사에서는 막디왕 쪽에 엮여 있었지만 두 파벌의 통합을 시도하였던 보나파치오는 아기날도 집권의 정당성과 그가 독자적으로 스페인 측과 휴전협상을 진행하는 것을 문제삼던 중 반역죄로 기소되어 처형당합니다. 아기날도 역시 1897년 11월 공화국을 선포하였지만, 스페인군의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정부 인사들의 망명과 혁명군 유족에 대한 보상금 지급을 조건으로 사실상의 항복을 결정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후 미국이 얽히게 되면서 그의 운명은 다시 한 번 널뛰기를 하게 되었지요.
통상 예법에서 상석은 남향할 수 있도록 북쪽으로 잡으므로, 귀빈을 차의 뒷자리에 앉힌다면 운전대의 위치는 귀빈 기준 좌측(동쪽)에 있는 것이 예에 맞다고 주장할 여지가 있습니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자동차의 사례에 억지로 예법을 맞춘 것이기는 하지만, 사문(斯文)이 최익현과 자유당, 그리고 그의 유학 레이서들에게 있기도 하거니와 귀남옹에게 익숙한 것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굳어질 듯합니다.
19세기 말엽으로 가면서 점차 제국주의 열강의 면모를 보이게 된 미국은, 아메리카 권역에서의 영향력 독점이라는 목표가 완수되기 전부터 태평양에 주목하였습니다. 정확히는 태평양을 통한 아시아와의 교류 가능성이었는데, 이를 위해 중간 기착지로 서태평양의 섬들을 노렸지요. 무인도 웨이크 섬은 원 역사에서 1899년에 미국령이 되었고, 미서전쟁의 결과로 필리핀 도독령의 일부였던 마리아나 제도를 할양받았을 때는 괌까지 손에 넣게 됩니다. 이때 살짝 끼어든 독일은 스페인으로부터 마리아나 제도 북쪽(북마리아나 제도, 사이판 등지)을 손에 넣었다가 1차대전 이후 일본에게 상실하게 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