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까마귀 검다 하여 (3)
석유를 얻으려 하니 조금 도와달라, 토이기국에도 이득 되도록 돕겠다 하였으나 단호한 퇴짜를 맞음에, 이는 필히 조선국이 홀로 석유를 차지하려 한다는 의심으로 인한 것일 터라 단정한 국왕 귀남이 다른 나라들 끌어들이면 어떻겠느냐 발의하였으니 예조에 일이 떨어졌다.
전후의 사정 살피니, 우선 세상 어느 곳에서 일을 벌이든 저들 빠뜨리면 섭하다 할 영국이 있으니, 마침 옛 대식국과 안식국 땅은 애급의 지척이라 영국이 더욱 관심 둘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거기에 영국과 더불어 토이기 나랏빚 관리에 힘쓰는 법국이 있으니, 앙숙인 두 나라를 한데 끌어들이면 비로소 조선이 어느 한쪽을 거들어 토이기 수탈하려 한다는 의심을 면할 것이었다.
또한 근래 토이기와 가까운 나라로, 부지불식간에 여러 차례 부딪힌 덕국이 있으니 그들 서럽지 않도록 끌어들이고, 반대로 가장 토이기와 소원한 나라일 아라사도 저들만 외톨이 신세 되기는 원치 않을 터인즉 끌어들이면, 비로소 주상 뜻에 맞는 형국이 갖추어질 것이라.
이제 예조에서 각국에 글을 보내 공식적으로 제안하는 일이 남았는데, 그에 앞서 공사관 통해 ‘만일 이러이러한 사업을 꾸민다면 귀국이 들어올 것 같은가’ 넌지시 물은바 호응이 작지 않다 하였다. 심지어 이유는 몰라도 근래 조선의 허물을 많이 짚고 다닌다는 덕국조차, 그 공사 라씨(Casimir von Leyden)가 상당히 구미 당기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했으니 다른 나라들은 불문가지였다.
그러므로 이제는 경연을 절반쯤 갈음한 정당 영수들과의 모임에서도, 성사를 눈앞에 둔 듯한 석유의 일이 화제로 오름은 당연한 흐름이었다.
겨울에 맞지 않게 훈훈한 하늬바람 불어오는데, 서토(西土)의 일을 거론키에는 외려 적절하여 김옥균이 운을 떼었다.
“이미 그 석유가 나오던 곳에 우리가 나아가 한 몫을 얻으려 했다면 어려웠을 것이나, 그렇지 않으니 다른 구주 나라 이끌어내기가 수월할 것입니다.”
영의정 자리는 – 본인 다짐으로는 어디까지나 잠시 – 내려놓았지만 개화당 우두머리 감투는 놓치지 않아 여전히 광화문 문지방과 연 끊어지지 않은 김옥균이었다.
추거야 어찌 되었건 나라 안에 정당 셋이 정립하고 있고, 각 당의 영수로 세 사람이 굳건히 버티고 있으니, 경연을 갈음한 이 정당 영수 모임에 들어오는 사람 면면이 변치 않은 것도 꽤 되었다.
“그 땅의 사정에 능통한 상인 굴씨가 이르기로도 그 일대에 석유가 많아 채굴하고자 하면 능히 캐낼 수 있다 하므로, 능히 여럿의 이익으로 삼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만일 토이기국 조정이 이러한 계책을 스스로 마련치 못한다면, 이미 그 도성에 여러 구주 사람들이 나아와 재무를 돕고 있으니 어찌 합심하지 못하겠습니까?”
김옥균 개인적으로는 첫인상이 원체 나빴기에 자동차가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어째서 그리 첫인상이 좋지 못하였는가를 감히 함부로 꺼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물며 개화당 터줏대감 박정양이 나아가 정사로서 교섭에 임하고 있으니, 당의 체통(과 다음 추거)을 위해서라도 석유 들여오기에 찬동함이 가당하였다.
속셈이야 어찌 되었건, 지금 어전에 동석한 세 사람 중 이러한 나라 사이 일에서 가장 셈 밝을 김옥균이 그리 말해주니, 귀남은 적잖이 흡족히 여겼다.
“경이 그리 본다니 참으로 고맙구려. 공산당은 어떻소?”
지난 추거에서의 석패에도 불구하고, 향시를 통과하여 도회에서 단자 던지는 고공들이 계속 늘고 있음을 확인하였기에 낙담하지 않고 있던 전봉준이, 역시 담담하게 답하였다.
“석유는 아직 그 쓰임새가 모두 드러나지 않았다 하나, 이미 알려진 바로도 민생에 큰 보탬이 될 것입니다. 자동차를 능히 움직여 인마의 수고로움을 더는 것 외에도, 방을 밝히거나 데우는 데 참으로 이로움이 많으니, 많이 들여와 널리 쓰이게 할 수 있다면 공산당의 뜻과도 맞습니다.”
그때 대쪽같으면서도 공순한 몸가짐으로 고개 살짝 돌리고 차를 한 모금 넘긴 최익현이 도로 잔을 내려놓으니, 나머지 세 사람은 모두 가배인데 홀로 강남서 들여온 차인지라 그 향이 유독 강하게 풍겼다.
굳이 따지자면 이 자리의 네 사람 중 가배 경력 가장 긴 사람으로는 첫머리가 일백삼십 평생의 후반을 이 콩뜨물과 함께한 귀남일 것이요, 가장 짧은 사람은 차라리 홍차가 입에 익을 해몽 선생인데, 엉뚱한 최익현이 홀로 차를 마시는 까닭은 무슨 별난 사정이 아니었다.
녹화회에서 밝히기를 가배가 과하면 심장에 좋지 않다 하였으므로 김홍집이 최익현의 근래 노쇠함을 (실지로 늙어본 귀남 생각에는 다소 과도하게) 걱정한바 은밀히 아뢰기를 그 잠 쫓는 기(氣)가 덜한 차를 내어달라 청하였던 것이다.
허나 사연이 어쨌든 네 사람 중 홀로 차를 드는 것이, 담담함에서 득의로움 오가는 나머지 세 사람과는 낯빛 다른 것과 어울렸다.
“신 익현 아뢰옵나이다.”
자연스레 잔 내려놓고 눈빛 오가, 저의 차례 되었음을 안 최익현이 운을 떼자 다른 이들도 잠시 긴장하였다.
“성상께서 보위에 오르사 뭇 국사를 오직 도의에 따라 행하시니 고금에 드문 아름다움이나, 설령 아무런 흠결이 없더라도 기와를 들어내고 구들을 뜯어 간언할 바를 찾아 아룀이 곧 신도(臣道)인즉 감히 말씀 올리고자 합니다.
토이기 조정이 함께 광무(鑛務) 나누기를 원치 않으니, 다른 나라를 끌어들여 그 완고함을 깨뜨리려 한다 들었사옵나이다. 그러나 이는 일찍이 성상께옵서 반포하신 뜻에 맞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자유당 일을 하다 보면 사민(四民)을 고루 만나매 영 어울리지 않는 미소를 지어 사람들로 하여금 편히 대하도록 할 때가 있겠지만, 지금 최익현에게는 그런 면모는 하등 보이지 않고 오직 상강(霜降) 새벽 서리같은 꼿꼿함이 있었다.
“지금 아국의 성세를 세인들이 말하나, 근원을 살피자면 이는 나라의 힘이 그만큼 강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직 스스로 지키기에 족하니 이것만으로 어찌 다른 나라들이 따르겠습니까?아국이 오로지 도리를 따라, 남을 해치기를 원치 않고 나서서 도왔으므로 비록 낯설게 여길지언정 종국에는 스스로 따라온 것입니다.
그런데 토이기국 땅의 석유를 구하고자 다른 구주 나라들을 끌어오겠다 하니, 비록 말로는 이익을 나눈다 하지만 토이기를 세력으로 겁박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을 김옥균이 아니라, 귀남에게 예를 갖춘 뒤 곧장 반박하였다.
“석유가 이미 혹은 장차 귀물이 될 것임은 명백합니다. 면암 선생께서는 의롭지 못함을 말씀하시지만, 우리가 나서지 않는다면 이 귀물을 노리고 다른 구주 나라들이 들어올 것입니다. 덕국이나 영국, 법국은 그 거리가 가깝기도 하거니와, 스스로 힘만으로 능히 토이기를 억눌러 이권을 취할 수 있습니다.
어느 한 나라가 욕심을 내세워 토이기 땅을 침탈하는 것보다, 여러 나라가 함께 그 이권을 나눔이 토이기에게도 이롭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우리가 지금 안식국 옛 땅의 석유를 원한다면 여러 나라를 끌어들이는 것 외에 다른 방편이 있습니까?”
“석유가 아무리 귀물이라 하나 도의보다 귀하겠는가? 우리가 다른 구주 나라보다 예를 지킨다 하지만 어찌 남에게 잘못된 일이 우리에게는 옳은 일이 되겠는가?”
“예의 쓰임은 백성을 위함입니다. 예를 위하여 민생과 국익을 놓친다면 어찌 그것이 예라 하겠습니까? 각지지 아니한 술잔을 각지다 할 수 없듯, 예가 그 본뜻을 놓친다면 허례에 지나지 않습니다.”
화서 학통 잇는 사람 앞에서 『논어』 꺼내니 과연 적중하였는지 최익현 눈에 불이 일었다. 그러나 김옥균 또한 여느 참의대부들 상대할 때처럼 고양이 쥐 어르듯 꺼낸 말이 아니요, 진지함이 있었으므로 노여워할지언정 말로 면박하지는 않았다.
“처음 예라는 것이 나타났을 때는 이것이 오직 백성을 위하여 어긋나지 않았네. 그러나 후대에 이르러 이를 위정의 근본이 아닌 방편으로 삼았으므로, 대성(大聖)의 아래에 재아(宰我)가 나와 밤나무로써 애공(哀公)에게 아첨하였지. 그리하여 삼대를 내려온 예악을 사람들이 믿지 못하게 되어, 묵적(墨翟)이 나와 비악(非樂)의 설을 내기에 이르렀다네.
그러나 이단이 스스로 이단 되기를 원하였겠는가? 당대에 이미 예악의 흐트러짐이 심하였기에 이단이 일어난 것이지, 결코 그 반대는 아닐 것이야.”
어전에서 이만하면 언성 높인 축에 들 것이요, 주상 치세 처음부터 따라온 두 사람이 아니라면 이만큼 당당히 다투기도 어려울 것이다. 마침내 귀남이 정리에 나섰다.
“나는 여러 나라들을 끌어들여 함께 석유의 이로움을 나누자 하면, 필히 토이기가 의심하는 마음을 거둘 것이라 여기었소.
그리하여 이러한 방책을 중신들에게 전한 것인데, 지금 두 사람의 말을 살피니 미진한 바가 있었던 듯하오.”
당초 귀남 생각이야, 미래의 중동 부자 나라들 횡재할 일을 미리 훔쳐오는 것이었으니 아주 약간쯤은 미안한 일이었다. 그래도 다 훔쳐오는 것이 아니라 여러 나라와 함께 나누는 것이니 괜찮지 않겠는가 싶었다.
하지만 그 석유 나는 땅 차지한 쪽에서 보기에 억울한 마음은 매한가지. 도둑 홀로 들어오든 떼도둑이 들어오든, 원주인 보기에는 다 같은 날강도일 테다. 귀남 본인이야 나중에 그 석유로 떵떵거리고 사는 – 그랬으니 그 옛날 열사의 사막에 그렇게 많은 장정들을 데려다가 이런저런 공사를 시키고 품삯도 넉넉히 준 것 아니겠는가 – 미래를 알지만, 지금은 별 볼 일 없는 고장이라 하니 얼마나 두렵겠는가?
“허나 그렇다 한들 꺼낸 말을 물릴 수도 없는 노릇이오. 고균 말마따나, 이제 우리가 상인 굴씨를 끌어들여 그 땅의 석유를 거론하였으니, 구주 나라들의 이목에 이미 들었소이다. 만약 우리가 물러난다면 덕국이든 법국이든 토이기를 겁박하여 대신 그 이익을 얻으려 할 것이오.”
김옥균이 같은 말을 했더라면 벌써 두어 번쯤 반박하였을 최익현이었고, 실제로도 약간은 치기어린 마음에, 저쪽이 경서를 꺼내왔으니 자신은 헤겔 – 파리 시절에, 이론은 퍽 도학에 가까운데 정작 터무니없는 말로 성현을 매도하였기에 애증어린 관심으로 천착한 바 있었다 - 이라도 꺼내올까 생각하며 두 발쯤 목청에 장약(裝藥, 장전)하고 있었는데, 진심으로 자기 생각이 짧았다는 투로 옥음 내리니 어깨가 반 치쯤 내려앉았다.
“확실히, 우리 국운이 조금 흥성해졌다 하여 다른 나라를 위하는 마음을 거둔다면 이는 반드시 화가 될 것이오. 그렇지만 우리가 우리를 위하지 않고서 어찌 남들을 먼저 위하겠소?”
김옥균의 말 반절, 최익현의 말 반절에 자신이 알던 바를 양념으로 버무리며 주상이 앞서 말한 주춧돌 위에 기둥을 하나 세웠다.
그 조선의 사절이 본국에서 새로운 협상안을 받아왔다 하여 재차 만남을 청하니, 어쨌든 잘 접대하여 돌려보내라는 명 받들어 온 타우픽 파샤도 본인의 생각과 무관하게 응할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우리로서는 귀국은 물론이요 다른 나라들도 딱히 신뢰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하겠다는 듯, 협상 서두부터 곧장 타우픽 파샤는 단언하였다.
“물론 이익의 비율이나 투자액 같은 것으로 좋은 조건을 제시할 수도 있고, 그 뒤에 어쩌면 호의가 있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유럽 나라들과 여러 차례 교섭하면서 알게 된 것으로, 한때의 호의를 믿기에 사람의 기억은 너무나 짧습니다.”
“사람의 기억이 짧으므로 법도를 세우고, 사람의 정동(情動)을 종잡을 수 없으니 인의를 말하는 것이지요. 아국에서도 그리하여 재차삼차 고심한바 이러한 방안을 내어놓은 것입니다. 우선 일별(一瞥)을 청합니다.”
자세한 내막까지는 몰라도, 처음에 받았던 지시 – 정중하게, 다른 구주 나라들과 함께 찾아올 터이니 조금만 기다려달라 전하라는 것 – 가 번복된 것을 보면 아마 도성에서도 말이 많았을 듯하였다.
그런 진통 끝에 나온 안이란, 조선 홀로 석유를 구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모두 융통할 수는 없을 것이요, 머나먼 토이기에 제대로 발 뻗을 세력도 마찬가지로 홀로 모을 수는 없으므로 여러 나라들을 끌어모으는 것이라는 데 있어서는 이전과 다르지 않았다.
차이라면 토이기 조정을 위한 제안이 하나 더 들어갔다는 점이었다.
“다른 나라들을 더 끌어들여라? 제가 제대로 본 것이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잘 보셨습니다.”
“허나 더 끌어들일 나라가 어디에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면 만들면 될 일이지 않습니까?”
이제는 정말 후세인(後世人)이라 해도 될 후세인이 날뛰던 귀남의 희미한 기억 속 중동에는 이름 이상한 나라가 여럿 있었는데, 그들 중 태반이 석유 나오는 나라에 들었다.
그런데 지금의 지도를 볼작시면 토이기 하나요, 그나마 엉뚱한 쪽에 조막만한 나라 몇이 있을 뿐이었다. 이왕 석유를 미리 끌어다 쓰게 되었으니, 조금 미래를 앞당겨봄도 가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귀남 생각이었다.
“석유가 반드시 그 바그다드 고을 인근에만 있겠습니까? 청진(淸眞, 이슬람)의 도를 따르는 이들은 반드시 귀국 황상의 말을 듣는다 하였는데, 그들 중 귀국에 번속하는 나라가 여럿 있다 들었습니다. 멀리 비율빈까지도 영이 닿거늘, 이 일대는 어떠하겠습니까?
이들이 모임에 함께하도록 한다면 귀국이 세력의 약소함을 근심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뜨악하던 타우픽 파샤의 표정이, 박정양이 책상 위에 펼쳐둔 지도를 보더니 조금 진지해졌다.
“그대들이 페르시아라 부르는 동쪽 나라는 논외이며, 그 옆 바그다드 인근 역시 선대에 겨우 되찾은 땅으로 함부로 다룰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쪽 조약국(條約國, Trucial states. 現 아랍에미리트 구성국 및 그 인접국)이나, 하심 가문이라면...”
프랑스어로 아라비아 반도라고 적힌 성지와 그 인근의 땅들을 보면서, 타우픽 파샤는 조금씩 깊은 생각에 빠져들어갔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할수록 터무니없어 보이기는 할지언정 아예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가뜩이나 소위 칼리프가 기독교도들에게 붙잡혀 있는 것과 진배없다며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에게, 얻고자 하는 바를 조금 나누어주어 잃을 것이 많아지게끔 만든다면, 그때부터는 코스탄티니예만큼이나 런던, 파리, 베를린의 뜻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이방인들의 장담대로 석유가 정말 중요해진다면 그때는 말할 것도 없고, 설령 고무 정도의 가치로만 끝난다고 해도 공적채무국 손에 붙잡혀 나날이 추락하는 코스탄티니예의 위신을 생각하면 분명한 이익이었다.
어쩌면 그 골칫거리 반역도당 사우드 가문까지도, 적당한 미끼를 물려주고 끌어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안팎의 듣는 귀를 생각하면, 아직은 파디샤 앞에서만 꺼내야 할 이야기였지만.
영국이 작심하고 농간을 부린다면 곧장 떨어져나갈 남쪽 영토를 속국으로 반쯤 독립시키고 – 이미 발칸의 전례가 있으니 기독교도들도 무어라 하지는 못할 테다- 얻은 명분으로 이미 떨어져나간 소국들을 끌어들인다. 이슬람의 땅(Dar al-Islam)을 하나로 (물론 저 동쪽의 이단들은 빼고) 묶는다는 이런 생각에 마음이 설레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말일 것이다.
“흠흠, 이 자리에서 함부로 가부를 말씀드릴 수는 없겠으나... 처음의 제안에 비하면 검토해볼 여지가 상당히 많은 듯합니다. 이러한 조치를 취할 경우 귀국의 전폭적인 지지를 기대해도 되겠지요?”
“아국은 예의지방을 자처하고 있습니다. 오직 충서(忠恕)로 임하고자 할 따름입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지지할 수 있으되 과할 경우는 책임질 수 없다는 뜻이리라 해석한 타우픽 파샤가 응대를 위한 미소를 지었다. 그제야 박정양의 옆이 비어 있음이 눈에 들어왔다.
“그나저나, 지난 번에 만났던 다른 사절분께서는 자리를 비우신 모양이로군요.”
“나랏일을 받들어 왔는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귀국의 서장관(書狀官)이 나누고자 하는 이야기가 많다 하여 따로 만나고 있다 합니다. 혹 듣지 못하셨는지요?”
일전의 그 무관의 친우들, 예컨대 평소 이슬람과는 별개로 존재하는 ‘투르크다움’에 천착하던 메흐메트 지야(Mehmet Ziya) 같은 젊은이들이 그 ‘돌궐’ 이야기에 크나큰 관심을 보였기에 재차 박은식을 찾아갔던 것이었다.
허나 대체 무슨 이야기길래 그리 열의를 띄고서 묻는가 하는 궁금증은, 지금 받은 제안을 어떻게 간만에 국위를 선양할 방도로 삼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 비하면 가벼운 것이어서, 타우픽 파샤의 머릿속 멀리 뒷편으로 금세 밀려났다.
“언제고 찾아오리라 기다리고 있었네.”
“기다리시게 하였다니 송구스럽습니다.”
곧 수정된 제안이 여러 공사관을 통해 전해지게 되었다는 소식이 신보에도 실릴 무렵, 김옥균은 손수 최익현 있는 자유당 당사를 찾았다.
자유당이 최익현 한 사람의 당이었던 시절도 있었다지만, 그리 따지면 개화당도 박규수도 사랑방이 세력 전부였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총리 낸 지도 여러 해요 당세로도 밀리지 않으니, 안태훈과 그를 따르는 소위 재벌들도 여러 차례 출연하여, 광통교 옆 한 모퉁이를 다 차지하였다.
그러나 당사가 차지한 땅이 넓은 근래 유행 따라 양옥으로 여러 층 쌓아올리거나 하지 않고서 우직하게 옛적 기와집으로 일관하였기 때문이요, 그 내부의 꾸밈도 호화로움과는 거리가 멀었으니, 모르는 사람이 보면 요새 서원도 이만큼 검박하지는 않다 할 것이었다.
간혹 재벌이 이를 아쉽게 여겨, 개화당을 십분지일이라도 따라하여 꾸밈이 어떻겠느냐 하고 출연금은 자신이 내겠다 제의할 때면, 근래 적어도 일신만은 한가한 최익현이 손수 타일러 돌려보내곤 하였다.
역시 말업 종사하는 상한은 어쩔 수 없다며 고개 젓는 대신, 충분히 그렇게 여길 만도 하다 생각하고서 말로 풀어 설명하는 것이었으므로 최익현 딴에는 고루함 벗어던지고 훨씬 나은 쪽으로 변화한 바였으나, 문제라면 타이르는 말이 최익현 한가한 만큼이나 늘어져 어디 대학원에서 ‘예학의 대본(大本)과 변통’이라 이름하고서 강론할 만큼 상세하게 나오곤 하였다는 데 있었다.
그리하여 그 타이르는 일이 대략 네다섯 번쯤 있고 나서는 다른 일은 몰라도 당사의 검소함을 문제삼는 사람은 나오지 않게 되었고, 최익현이 어울리지 않는 미소 지으며 ‘잠시 머물면서 들어보라’ 하고 운을 뗄작시면 몸서리치며 도망하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 그리고 그 땅의 사정에 능통한 상인 굴씨가 이르기로도 그 일대에 석유가 많아 채굴하고자 하면 능히 캐낼 수 있다 하므로, 능히 여럿의 이익으로 삼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접받은 찻잔 내려놓으며 김옥균이 말했다.
“일전에는 어전에서 내 말이 과하였네.”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순순히 사과하는 것은, 그것도 상극인 자신에게 그리하는 것은 필히 뒤이을 다른 말이 있기 때문일 테다.
“군자국 되려 하는 나라에서 취할 계책이라 하기에는 미진함이 있었기에, 견리사의(見利思義) 네 글자 새기려다 중(中)을 잃었다네.
허나 이 늙은이 간 뒤에도 그대는 오래 남아 나랏일 거들 것인즉, 이때를 타고 당부하고자 하는 바가 있음이야.”
“말씀하시지요.”
“지금까지 우리가 도의로 처신하였다 여겨 왔는데, 그로 말미암아 억울하게 여기는 나라가 나타났지. 타이르고 위해주어도 부족한 것인데, 하물며 이익을 말함에 있어서는 어떻겠는가?
내가 근심하는 것이 여기에 있네. 말로야 예를 지킨다지만, 앞서 어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분명 예의를 지켜 이익을 얻는 이와 그렇지 못한 이가 나뉘니 이것이 오늘날 천하일세.”
“무도한 나라와 예의 지키는 나라 사이에 다툼 일어날 것을 근심하시는지요?”
“그렇다네. 인의를 말하고 행한다 하여도, 사람이 하는 이상 분하게 여기고 또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아예 아니 나올 수는 없는 것이지. 그렇지만 이를 당연한 것으로 넘겨버린다면, 그때부터는 어질지도, 의롭지도 못하게 될 것인즉...”
“그렇다면 마땅한 방편이 있겠습니까?”
“있어야 할 것이야. 미안하게 되었네. 우리가 스스로 어질다 여기어 양혜왕(梁惠王)과 같게 되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고민하는 수밖에.”
‘그러면 열심히 고민한 뒤에 답 나오면 알려주십시오. 우선은 제 마음대로 하고 보겠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저희 당도 한껏 노력하겠습니다.”
겉과 속의 대꾸가 다르게 나왔다.
--- *** ---
최익현의 훈계같은 간언에서 언급된 밤나무 이야기는, 『논어』에서 자주 공자의 속을 썩이는 제자로 등장하는 재아의 일화 중 하나입니다. 노나라 애공이 재아에게 천자가 토지신에게 제사 지내는 제단(社)의 제도를 물었을 때, 재아가 답하기를 ‘주나라가 제단 주위에 밤나무(栗)를 심은 것은 곧 백성들로 하여금 두려워하게(慄) 하려던 것’이라 한 일이 있었습니다. 공자가 이를 듣고, 가뜩이나 어진 정사와 거리가 멀었던 애공이 엉뚱한 일을 하는 데 근거를 제공하였다 하여 마뜩잖게 여겼다는 기록이 전합니다.
원 역사에서 칼루스트 굴벤키안은 유럽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직후부터 중동, 특히 현 이라크 일대의 석유 개발에 착수했습니다. 그러던 중 아르메니아인 학살이 시작되면서 사업의 맥이 끊기게 되고, 결국 1897년 영국으로 이주하게 되지요. 거기서 로열 더치 셸을 비롯해 여러 석유회사와 협력하였고, 이때 자신의 개발에 대한 보수로 지분 5%를 개인 소유로 가져가면서 큰 부를 모으게 됩니다. 이후 1912년에는 이미 사이가 틀어질 대로 틀어져 있던 영국과 독일의 자본을 동시에 유치하여 이라크석유회사의 전신이 되는 터키석유회사(Turkish Petroleum Company)를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작중에서는 그것과 비교가 되지 않는 규모가 될 지도 모르는 협의체의 설립에 한몫 끼게 되었네요.
중동에서 패권을 오랫동안 유지했던 오스만 투르크는 18세기부터 본격적인 쇠퇴를 겪었는데, 이는 유럽에서의 도전뿐 아니라 같은 이슬람 세계 내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동쪽에서는 이란의 발흥으로 이라크 일대를 잠시 상실하였고 –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이라크 내 시아파와 수니파 갈등의 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사우드 가문의 줄기찬 반란에 시달렸지요.
이미 대항해시대 초기부터 유럽 세력과 교류와 반목을 계속했던 아라비아 반도 남부와 동부 해안의 소국들은 이때 영국에 의존하여 오스만 제국의 재진출에 대항하려 했는데, 직접적으로는 영국의 보호령을 자임함으로써 안전을 꾀했습니다. (물론 영국이 얽힌 일 상당수가 그렇듯, 이 과정이 완전히 자의에 의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쿠웨이트와 현 아랍에미리트 토후국들, 바레인 등이 모두 이에 해당하는데, 특히 현 아랍에미리트 일대의 국가들은 ‘조약국’으로 통칭되곤 하였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