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240화 (240/320)

79. 까마귀 검다 하여 (2)

로마의 황제이자 영원하고 숭고한 나라의 주인 되는 파디샤의 체통이 있었으므로, 조선에 감정 좋지 않은 압뒬하미트 2세라 할지언정 이쪽의 제안 정도는 한 번쯤 들어봄직 하지 않으냐는 조선의 요청을 마냥 거부할 수만은 없었다.

그러나 조선 사절을 황성(皇城) 코스탄티니예(現 이스탄불)에서 맞이하여 가뜩이나 위태로운 체면을 더욱 상하게 하고, 이곳저곳에서 준동하는 불순한 무리에게 엉뚱한 생각을 불어넣는 것보다는 그 흑심만은 정직한 서방의 나라들을 믿는 쪽이 낫다는 판단에, 만남을 허하기는 하되 그 장소는 멀찍이 떨어진 수에즈 운하 북단 포트 사이드(Port Said)로 정하였으니, 어차피 배 타고 오가는 판에 편리하기는 하였다.

“허, 과연 사해(四海) 교통하는 가운데에 있으니 천하의 요지라 할 만하군그래.”

개화당 안에서의 실권은 넘겨주었다지만 참의대부 자리는 놓치지 않고 있던 박정양이 호방한 감상을 내어놓았다. 천거를 받아 이번 협상에서 정사(正使) 노릇을 하게 되었으니, 나랏일과 집안일에 치여 바깥세상 구경이라면 끽해야 연해주와 중원 강남이 전부였던 – 물론 그 정도만 하여도 박정양 어렸을 적에는 꿈도 못 꾸던 외유였지만 – 박정양으로서는 감상이 없기가 더 어려웠다.

옛 대진 사람들이 아해(我海)라 부르고 그 뒤의 구주 사람들은 지중해라 부른다는 바다가 마른 바람과 함께 찰랑이니, 분명 절기는 겨울일진대 춥지는 아니하여 퍽 기이하였다. 물론 처음 벌열의 자제들이 대양 건너갔을 때와는 사정이 판이하여, 천하 만국의 풍토가 같지 않음은 전혀 새롭지 않은 일이었으나, 그래도 글로 보는 것과 직접 살갗으로 느끼는 것이 어디 같겠는가.

그러나 지금의 상황에서 저런 감상을 내놓으니 호방하다면 호방한 일이지만 답답한 바도 없지 않아, 예조 관원으로서 실무를 담당하기 위해 함께 온 박은식은 한숨을 삼켰다. 성균관 문턱을 넘을 제, 산(算)의 죽머리(竹)도 다시는 보지 않겠노라 결의하였기에 형조 아니면 예조를 마음에 두었고, 그 뜻 이루어져 예조에 왔는데 산학이 아니더라도 답이 없는 일은 여럿이 있었던 것이다.

“백암(박은식의 호)은 무슨 근심이 있어 그리 심울한가?”

‘공처럼 팔자 좋지 못하기 때문입니다.’라고는 차마 대꾸할 수 없는 일. 예조에 들어선 이래 처음으로 큰일을 맡았는데, 그 큰일이라는 것이 이미 반절은 물 건너간 건이었으니 똑같은 바닷바람도 한쪽에는 상쾌하지만 다른 한쪽에는 짭쪼름하니 불쾌할 뿐이었다.

“조정의 영을 받들어 이리 먼길을 하기는 하였으나, 성사되지 않을 것이 선하기에 고심할 따름입니다.”

“어찌 그리 단정하는가? 무릇 세상사란 운수 궁벽해 보일 때 비로소 변(變)에 이르는 법이니 너무 걱정하지는 말게. 이런 풍광을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보겠는가?”

그러나 심란함은 가시지 않았고, 두 사람이 조선말로 이야기 나누는 동안 역시 초조하게 널찍한 방의 다른 쪽 구석에서 제자리걸음하고 있는 굴벤키안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그저, 메소포타미아 일대에 석유가 많고 아직 쓰려는 이는 없으니, 조선을 통해 다른 여러 유럽 나라를 끌어들여 탄탄한 사업을 하나 차릴 요량이었다.

그러던 차에 파디샤가 조선의 제의를 단호히 거절하였다는 소식이 들려오니, 가뜩이나 서쪽과 남쪽에서 동시에 기독교인들의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 배후에 또 다른 이방인들을 들이기 싫어서 그러하리라 여기고서는, 있는 연줄 없는 연줄 동원하고 두 나라의 실무자들 사이에서 최대한 중재하여 이 자리를 마련하기는 했다.

허나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조선에 대한 코스탄티니예의 감정은 상상 이상으로 나쁜 것이어서, 잘못하면 저에게도 불똥이 튈 수 있을 듯했다. 그러니 오늘따라 구두축이 무거움도 당연하였다.

그렇게 무심하니 속 알 수 없는 사람 하나는 창밖을 감상하고, 속 타는 사람 둘은 서성이고 있는데,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들어오니, 복식과 생김새는 여느 서양인과 같되 단 하나 붉은 관모가 두드러지는 풍채 좋은 노인이었다.

“멀리서 오신 손들을 맞이하니 참으로 반갑습니다.”

유창한 불어로 응대하는 타우픽 파샤(Tawfik Pasha)였다. 그러나 그 유창함으로 말미암아 감정도 고스란히 드러났으니, 반갑다 함은 허사(虛辭)임이 분명하였다.

박정양의 답사를 시작으로 이런저런 상투적인 인삿말이 다한 뒤에 나오는 말이 이를 입증하였다.

“기실 우리 정부의 입장에서는 조선의 제의를 받아들일 이유가 전혀 없는 상황입니다.”

“허어, 그렇습니까.”

그리 여긴다니 정말 아쉽다는 것처럼 박정양이 대꾸하자, 타우픽 파샤의 눈가에 살짝 노기가 어렸다.

“귀국은 아국에 번속된 여러 자치령에, 파디샤 폐하의 정부와 적대하는 세력의 부추김을 받아 최신 무기를 판매한 바 있지요. 그리고 더 크게 보면 바로 그 세력의 우군이기도 합니다.”

나라에 유럽 사정에 능통한 인재가 그렇게 많지는 않기 때문에 외교와 재정을 번갈아 가며 담당하고는 있다지만, 본디 타우픽 파샤의 관심사는 현대 무기의 보급에 있었다. 그러던 차에 사사건건 반기를 드는 발칸의 소위 ‘자치령’들이, 아직 종주국도 완비하지 못한 무기를 어디선가 꺼내들었고, 그것을 공급한 나라는 숨기려는 뜻조차 없이 곧장 저들에게 통보하기까지 하였다. 특히 타우픽 파샤로서는 민감할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또한 확실한 증거는 없으므로 공식 석상에서까지 제기할 수는 없는 문제지만, 우리 정부의 위신을 깎아내리는 여러 활동에 귀국이 간접적으로 개입하고 있다는 의혹도 있습니다.”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동양인 얼굴은 ‘허어, 그렇습니까’라는 이전의 대꾸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었기에, 말하던 와중에 더욱 속이 답답해지는 파샤였다.

“혹 아국이 귀국에 잘못한 바가 있다면 우선 말씀해주시지요. 성현 이르시기를 잘못은 속히 고치라 하였으니, 만일 오해가 있었다면 이로써 풀고, 정녕 과오라 하면 고치기에 앞서 우선 깨우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한숨 푹 쉬면서 타우픽 파샤가 늘어놓는 내력이 이러하였다.

이십여 년 전 발칸의 속령들이 한창 시끄럽던 시절, 그때 차라리 대적 러시아와 대판 싸움 벌여 패전하였더라면, 당시에야 큰 망신을 당했을지언정 정정당당한 싸움의 결과이므로 후에 부끄러울 일은 없었을 것이었다. 그런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영락없이 전쟁이 일어나려던 차에 영국에서 나서서, 제국의 채권을 빌미삼아 평화를 위한다며 개혁을 강제하는 것 아닌가.

그 공공부채관리국이라는 것이 세워진 이래로 제국의 위신은 나날이 짓밟혔고, 발칸의 예를 따르겠다며 아르메니아와 쿠르드 등지에서도 불온한 무리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당장 군대를 동원하든, 민간에서 충성스러운 장정들을 모으든 하여 짓밟고야 싶었지만, 그랬다가 명목상으로나마 속국으로 남아있던 발칸의 자치령들이 이를 빌미삼아 떨어져나간다면 그 또한 패착이었다.

이제 겨우 베를린에 새로운 우군을 마련하여 이런저런 지원을 받게 되었으니 – 물론 대가가 없지는 않아, 멀리 필리핀 옆의 술루 술탄국에 칼리프의 이름으로 독일에 협력하라는 교서를 내려야 하였지만 – 곧 힘의 균형이 마땅히 그래야 하는 쪽으로 돌아가기는 하겠지만, 지난 이십 년의 서러움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바로 그 영국의 태도 변화를 이끌어낸 자리에 조선인들이 있었다지 않은가. 런던이나 한양이라면 모를까, 코스탄티니예에서 보기에는 조선이 러시아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자국을 대신 들이민 격이었다.

그런 나라가 발칸에 당당하게 무기를 팔아넘기기까지 하였고, 거기에 더불어 공공연히 성지의 수복을 논한다는 유대인들까지 자국에 받아들였다 하지 않던가. 바로 그 성지의 보호자 되는 파디샤로서는 그러므로 조선 국왕을 곧장 적대하지는 않더라도 의심의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던 것이다.

“물론 이 중에는 말씀하신 것처럼 오해의 산물도 없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그런 것을 제외하고 보더라도, 귀국과 직·간접적으로 엮여서 우리가 얻은 이익은 없고, 잃은 바는 많습니다. 귀국의 제안을 우호적으로 볼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구구절절이 늘어놓는 말이 결코 하루아침에 지어낸 것은 아닐 것이요, 이 고관 한 사람만이 조선을 미워함도 아닐 터였다.

잠시 조용히 있던 박정양이 다시 입을 열었을 때는 그 어조가 훨씬 숙연하였다.

“말씀 감사합니다. 아국이 다른 나라를 대함에 반드시 예와 인의를 지키려 하였는데, 이러한 허물이 있음을 깨우쳐 주시니 어찌 귀담아 듣지 않겠습니까. 허나 이번에 이 석유를 개발하는 일로 말하자면 반드시 후일 큰 이익이 될 것이므로, 아국이 뜻해서든 뜻하지 않게든 귀국에 미친 폐해를 갚는 일말의 단초가 될 것입니다.”

언제고 영남대로를 필두로 나라의 가도를 크게 넓혀 능히 자동차가 오갈 수 있게 해야 한다는 발상은 성상 마음속과 호조의 높은 사람들 머릿속을 제하면 바깥으로 아직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자동차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도성에 널리 퍼져 있었으니, 성상이 친히 한강의 쇠다리를 건너고, 거꾸러뜨린 삼전도비를 이 자동차로 옮겼으며, 심지어 얼마 전에는 대군이 함부로 말하기 뭣한 그 사건도 일으킨 바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수레 움직이는 석유가 장차 새로운 귀물이 되리라는 것은 자동차라는 문물의 이름 들어 아는 조선의 식자라면 능히 공감할 수 있는 바였다.

“오늘날 천하의 문명이 크게 흥성하여, 기물 만드는 솜씨가 나날이 발전하고 또 이로써 치부하는 법도도 정교해짐이 하루도 그치지 않습니다. 근래 공고국(콩고)에서 크게 흥업(興業)한 전례도 있으니, 귀국의 동쪽 변방 또한 능히 그렇게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자전거와 자동차 수레바퀴에 상교(橡膠, 고무)를 대어 훨씬 편안하고도 빠르게 하는 기법이 근래 널리 퍼지면서, 그 상교가 많이 나는 공고국이 갑작스레 부귀의 원천이 되어가고 있다 하였으니 이 또한 근래 유명한 사례였다.

마침 콩고에서 손을 뗄 방도를 한창 구하던 차에 이렇게 되었으므로, 백의의(白耳義, 벨기에) 국왕 예씨의 현량함을 아는 사람들은 마침내 하늘의 보답을 받았다 일컫고는 하였다. 그래보아야 그간 투입하였던 막대한 예산의 작고도 작은 부분만을 환수하는 격이었고, ‘상국(上國)’의 은혜를 갚으려는 현지인들의 관심이 너무나 열렬하여 오히려 착복하거나 수탈할 구석은 없었지만, 적어도 나라 전체가 휘청이던 몇 년 전과는 천양지차였다.

그러므로 박정양 생각에 별 쓸모 없는 사막만 있다는 토이기의 동쪽 땅에서 석유가 난다면, 장래에 큰 도움이 될 것이었는데, 여전히 파샤의 반응은 냉담하였다.

“귀국은 항상 인의를 말하지만, 정작 그것이 풀려나가는 모양을 보면 반드시 호의라고 할 수도 없을 듯합니다. 더구나 앞서 수백 년간 우리를 괴롭혀 온 유럽의 기독교인들 역시 겉으로는 항상 선의를 내세워 왔는데, 하물며 고작 서로 안 것이 수십 년에 지나지 않는 귀국은 더욱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어찌 그리 말씀하십니까? 비록 세계(世系)가 오래 이어진바 그 맺고 끊어짐에 누락이 있다 하지만 청사(靑史)에 우리의 연이 있으니 결코 남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고금의 사서를 두루 살핌에 있어서는 나름의 자부심이 있던 박은식이라, ‘고작 수십 년’이라는 말에 욱해 저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그 무슨 말이오?”

‘아차’ 하였을 때는 이미 늦어있었다. 수습을 위해서라도 얼른 떠오른 바를 모두 털어놓아야겠다 생각하며 박은식이 말을 이었다.

“소관이 고기(古記)를 살피니 지금으로부터 일천 하고도 약 삼백 년 전에 이미 두 나라의 연이 있었습니다. 아국의 전조는 고려요, 그 고려는 삼한을 일통한바 그 중 하나가 고구려인데, 이때 귀국 전조의 가한(可汗) 계민(啓民)에게 사절을 보냈다 하였으니 이는 『자치통감』에도 나와 있습니다.

연으로 따지면 우리의 가까움이 이와 같으니, 오히려 고금을 통틀어 보면 천하에 귀국과 가까운 나라로 중국과 우리 조선이 첫째와 둘째요 구주 열국은 그 다음일 것입니다.”

갑자기 튀어나오는 역사 이야기에 통변하던 역관과 전해들은 타우픽 파샤가 차례로 어안 벙벙해졌다.

“험험. 박 부사의 말이 잠시 엉뚱한 곳에 닿기는 하였으나, 그 통의(通義)로 이르자면 틀린 것도 아닌 듯합니다. 귀국이 불운을 당하여 이번 대에 이르러 다른 나라로부터 업신여김과 침노함을 당하였으니 이는 안타까운 일이요, 아국이 그에 한몫 하였다니 더욱 송구한 일입니다. 하지만 어찌 우리가 다른 구주 나라와 같다 예단하겠습니까?”

박정양이 대신 나서서 뒷수습을 했다. 하지만 타우픽 파샤의 마음을 돌려놓기에는 역부족이어서, 도로 정신 차리자마자 재차 확언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렇다 한들 여전히 우리로서는 귀국의 그 선의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귀국은 스스로 다른 나라와 같지 않아 항상 도의를 숭상한다 하지만, 이미 전례가 있으니 어찌 그대로 믿겠습니까? 혹 다른 제안이 있다면 모르겠으나, 적어도 이... 석유의 건에 있어서는 현재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결국 모임은 성과 없이 파하였다. 책상에 앉은 박정양이 금번 서행(西行)의 일을 죽 적어내려가고 있는데, 본국에 보고할 일 논의코자 다시 박은식이 찾아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후우... 어쩌자고 그런 말을 했는가? 물론 돌아가는 형국으로 보아서는 무슨 의론을 꺼내어도 통하지 아니하였겠지만, 그래도 괴이쩍은 설로써 상대를 놀라게 함은 예가 아닐세.

그래, 무엇하다 늦었는가?”

늦은 것은 앞서 뜬금없이 돌궐 이야기를 꺼낸 탓이었으니, 박은식 본인 외에 탓할 사람은 없었다.

없는 입맛에 소략히 석식 마치고서 박정양 찾아가려 하는데, 앞서 타우픽 파샤와 함께 왔다는 젊은 무관 하나가 찾아와 저를 붙잡고서는, 자신이 앞서 고래로부터의 연이 있다며 언급한 그 돌궐이라는 나라는 무엇하는 나라였으며 그 이력과 세계는 어떠하였는지를 꼬치꼬치 캐묻는 것이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청사를 논함에 있어서는 열과 성 넘치는 박은식이어서, 궁금증 넘치는 무관의 눈을 보자 절로 혀가 노닐기 시작하였다. 물론 듣던 무관이야, 이 멀리 동쪽에서 온 이방인이 저도 모르는 저의 ‘투르크 겨레’ - 요즘 사관학교에서는 조국의 명운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말 오가는 모임에 한자리씩 끼기 마련이었다 – 이야기를 하기에 결코 지나칠 수 없던 것이었지만.

좌우지간 그리하여 돌궐이 흉노 발흥한 땅에서 일어나 선비족과 다투고 이어 수·당대에 봉변하여 멀리 서녘으로 흘러들어간 내력까지 모두 털어놓을 무렵에는 이국의 달이 지중해 수면 상하에 떠서 거리를 밝히고 있었다.

“... 하여 이처럼 연거푸 예를 지키지 못하였으니, 그저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내 보니 자네는 외무를 맡기에 맞지 않는 인재로군그래.”

가벼울지언정 책망은 책망인지라 긴장한 박은식에게 청천벽력같은 말이 들려왔는데, 어째 어조가 사납지 않았다.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학동들 가르치는 문헌을 가다듬는 그런 일에 적임자인 듯하여 그리 말했다네. 혹 위에 청하고자 한다면 내게도 연통이나 한 번 넣어주게나.”

다행히 악의는 없고 오히려 재밌는 사람 만났다는 반응이라, 박은식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자, 그러면 이제 무거운 소식을 전할 방편을 논하도록 하세나...”

전보 타고 전해진 보고에 여러 사람이 놀랐는데, 귀남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허, 이런 사정이 있었단 말이오?”

토이기 사람들 보기에는 저들이나 구주 나라들이나 속 검기는 매한가지라 하니, 저들은 까마귀요 자신은 백로라 여겨왔던 고관들은 물론이요 귀남 마음에도 적잖이 울리는 바 있던 것이다.

그러나 놀라고 또 분히 여기는 마음을 넘어 생각하니, 또 그렇게 바라봄도 일리가 있는 것이었다.

“저들 조정이 이리 꺼리는 뜻을 보여왔으니, 말을 물려 없던 일로 함도 가할 것입니다.”

조심스레 예조판서 유길준이 건의하였다.

“내 생각이 짧았소. 욕심이 과하였으니 저들이 경계함을 어찌 괴이쩍다 하겠소이까?”

남들이 차지하기 전에 먼저 가서 한몫 챙긴다면 그 석유로 후손들이 잘 살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시작한 일이었는데, 아닌 게 아니라 남이 보기에는 별반 다를 것 없는 욕심이었다.

“그러나 저 석유는 장차 큰 귀물이 될 것인데...”

그렇다고 내려놓자니 또 아쉽기는 아쉬운 것이라.

“사사로운 마음으로 남의 땅에 있는 것을 우리가 전유하려 하였으니, 비록 그 수익의 일부를 나누어주려 하였다 하나 이 역시 과욕이외다. 그러니 저들 또한 우리가 다른 구주 나라들과 다를 바 없다 하여 꺼린 것 아니겠소?”

잠시 고민하던 끝에 보고 전하러 찾아온 유길준에게 조심스레 말을 꺼내보았다.

“그러니 다른 나라들을 끌어들여 함께 토이기를 돕도록 하면 어떻겠소?”

대륙 반대편의 압뒬하미트 2세가 듣는다면, 결국 조선 혼자서는 말에 힘이 실리지 않으니 떼로 몰려와 빼았겠다는 것 아니냐고 항변할 법한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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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우픽 파샤, 현대 터키어로는 휘세인 테브픽 파샤(Hüseyin Tevfik Pasha)는 원 역사에서도 압뒬하미트 2세 아래에서 재무장관으로 여러 해 동안 봉직한 다재다능한 인물이었습니다. 본래 군인 출신으로, 주미공사를 맡기도 하고 독일제 마우저 소총의 구매를 추진하기도 하는 등 오스만 제국에서 여러 일을 맡아 수행했습니다. 또한 수학에도 재능이 있어 – 작중 박은식과 상성이 맞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일까요? - 터키어로 선형대수와 기하학 교과서를 저술하기도 했습니다.

원 역사에서는 1870년대 중반 동방위기에서 러시아에게 군사적으로 참패를 당하고 굴욕적인 조약을 맺었다가, 다른 유럽 국가들의 도움으로 겨우 피해를 회복한 오스만 제국은, 파디샤 압뒬하미트 2세의 치세 하에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게 됩니다. 비록 고질적인 재정문제에 시달리기는 했지만 느린 속도로나마 근대화가 추진되었고, 그 외에도 여러 자유주의적 개혁을 시도했지요.

그러나 이러한 자유주의 개혁은 빠르게 내적·외적으로 서구 열강의 침탈을 당하는 상황에서 독으로 작용했고, 결국 1880년대에 이르러 압뒬하미트 2세는 전제정치로 통치 노선을 선회하게 됩니다. 18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아르메니아인 학살 역시 그 일환이었지요. 하지만 작중에서는 (오스만 시각에서는) 거시적인 타격 없이 훨씬 교묘하게 서구 세력의 침탈이 행해지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반자유주의적 면모도 강하게 나타나지는 않고 있습니다.

지나가듯 언급된 술루 술탄국 문제는, 원 역사에서는 미국과 오스만 제국 사이에 다루어진 이슈였습니다. 필리핀을 병탄한 뒤 이슬람 국가로 필리핀 제도 서쪽에서 수마트라 섬에 걸치는 영향권을 확보하고 있던 술루 술탄국을 제압하기 위해, 미국의 맥킨리 행정부는 압뒬하미트 2세를 설득해 미국에 전적으로 협력하라는 지시를 내리게끔 하였습니다. 이는 일시적으로 성공을 거두었지만, 결국 모로 반란(Moro Rebellion)으로 이어져 많은 사상자를 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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