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237화 (237/320)

78. 푸른 산 맑은 물 (2)

자유당은 선비 정당이니, 이런 말 정도는 사석에서 해도 될 것이다.

“어찌하여 공상(工商)이 사(士)와 농(農)의 아래인지 알 수 있는 일이야.”

그런데 그것을 왜 두 해 뒤를 기약하며 저의 더욱 으리으리해진 저택에서 쉬고 있는 김옥균 앞에 와서 한탄한다는 말인가. 심드렁한 대꾸는 그런 의아함을 은연중에 담고 있었다.

“뭐, 틀린 얘기들은 아니지 않습니까. 예로부터 산천은 백성과 함께 누리는 것이라 하였으니, 나라에서 힘써 맑고 푸르르게 지킴이 가한 일이지요.”

“까치나 제비가 은혜 갚는다는 얘기는 들어봤어도, 무정외물(無情外物) 산천초목이 사람에게 보답한다는 소리는 못 들어봤네. 강산 푸르게 지켜주면 필요한 국용도 내어준다던가? 어디 산신령이 그리도 저의 재보를 희사한다 하는지 알려나 주게. 금도끼라도 받아가게.”

“알려드리면 우리 개화당에도 보답해주실 겁니까?”

잔에 자신이 좋아하는 위스키를 따라주며 김옥균이 물었다. 농담조는 가시지 않았지만, 제대로 개화당의 의견을 구하고자 한다면 대가를 내놓으라는 뼈가 들어 있었으니 김홍집도 조금은 정색하였다.

“고균 이 사람, 그러지 말고 꾀 좀 빌려주게. 아무리 몸 담은 파당이 갈렸다지만 정말로 옛날 붕당처럼 원수로 대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붕당이라. 명미당(明美堂, 이건창의 당호)의 그 글을 읽으신 모양입니다.”

“나랏일 한다는 사람이 안 읽을 수 없는 글이지 않은가.”

작년에 김옥균이 저의 임기 늘리겠다 발의하였을 때, 내각에서 겉돌던 강화도 선비 이건창이 문득 써야 할 글 있다 하고서 사직하였는데, 고작 반 년 만에 책 한 질이 나오니 이름하기를 『당의통략(黨議通略)』이라 하였다.

그 서문에 이르기를, 나라에 정당 셋이 있어 정립(鼎立)함이 반드시 오래간다 할 수도 없고, 지금의 사람들은 모두 지재와 인망이 빼어나 선묘(宣廟)에 비하여도 오히려 나음이 있지만 또 후대의 일은 알 수 없는 것이라. 하여 지난 이백 년을 살펴 후대의 경계로 삼고자 당이 나뉘어 싸운 까닭과 내력을 살피겠다 하였다.

“그러니 더욱 우리끼리 곰살맞게 대해야 하지 않겠는가? 명의(名義) 엄히 새겨 툭하면 난적으로 서로 대하니 그로써 붕당의 폐해가 심해졌다고 하던데.”

“그렇다 해도 자유당에도 사람이 많고, 또 어느 당에도 들지 않는 사람으로도 현량한 이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래도 이왕이면 어차피 내게 딴지 걸 사람의 말을 들어보는 게 좋지 않은가.”

굳이 따지자면 김홍집이 출마하여 개화당이 총리 자리를 잃었고, 그 김홍집이 자유당에 넘어가게 된 연유는 처음에 김옥균이 개각한다며 예조에 잘 있던 김홍집을 내쳤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서로 원한 품는다면 능히 품을 수 있을 터이므로, 이리 찾아와 귀찮게 하는 것은 꼭 옛정 생각때문만은 아닐 것이었다.

“그래도 정 싫다고 하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지요? 그냥 여쭙는 말입니다만.”

“뭐, 싫다는데 어찌 꾀를 억지로 쥐어짜겠는가? 그러고 보니 광통이도국의 양회(시멘트) 만드는 일은 얼마나 잘 되어가고 있을지 모르겠네. 동철에서 재령에 철정국(제철소) 지을 때도 고균 자네가 한몫 거들었지? 아마 어질고 현명한 우리 고균 아우가 얽힌 일이니 터럭만큼의 실수나 잘못도 없겠지.”

정말 원수 사이라면 비수와도 같을 협박이었는데, 어째 너스레처럼 들리는 것이 따뜻하였다. 그래도 김홍집 입에서 나오리라 믿기는 어려운 것이었지만.

“허.”

“독설도 자네 덕에 배운 재주 아니겠는가.”

정말 탓한다면 몇 해 전 알프레드 드레퓌스를 모함한 치들을 탓해야 할 일이었다.

“좋습니다. 생각 몇 가지를 말씀드리도록 하지요. 단, 잘못되어도 저는 모르는 겁니다.”

“잘 되면 나는 자네에게 물어본 적이 없는 걸세.”

‘내가 알던 도원 형님은 어디 가셨는가’ 한탄하는 혼잣말이 들려왔던 듯하였지만 김홍집은 무시했다.

“논의의 개략은 전해 들었으리라 믿네.”

“운산 금광에서 광독으로 갱부 여럿 와병한 이야기라면 저도 들었습니다. 그것이 문제되었다고 이야기가 나오니 여항의 다른 상고들이 먼저 나아와 은혜 베풀어주기를 청하였다는 것도요.”

“그래서 나나 일재나 모두 골머리를 앓고 있지. 물론 가당치 않은 요구이니 받아들이지 않을음도 족히 마땅하나, 그리되면 고공들이 뭉쳐서 삯에 병구완할 만큼을 더 얹어주든, 공장의 기기를 제조국 돈으로 뜯어고치라 하든 하지 않겠는가?”

조선 사람들 몸보신 좋아함을 같은 조선 사람치고 모를 리 있겠는가. 하물며 그 옛날 박규수가 처음 추거에서부터 노인 봉양하는 의원 세운다 하여 쏠쏠하게 재미를 보았으니, 개화당 김옥균은 더욱 잘 알 것이었다.

“대서에서야, 그런 소리들 하면 곧장 찍어누르기 십상입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볼멘소리 커지지 않도록 규제하는 법도를 두고는 있습니다. 적당한 선을 구하여 따른다면 해소될 문제 아니겠습니까.”

“나도 거기까지는 생각하였다네. 그런데 아뢸 방편으로 이러이러한 안을 고민하고 있다고 일재에게 얘기했더니, 그 자리에서 경기를 일으키더군.”

“허허... 이제 연세도 연세인데 조심하시라 몇 번 고언도 하였는데요.”

“아니. 이 사람 취했나? 정말 경기 일으켰다는 것이 아니라 굳세게 반대하였다는 얘길세.”

“아. 실언을 했습니다.”

“미안하다 하려면 일재에게 미안하다 하게. 그처럼 몸 축내게 만든 연유를 누가 다 만들었는데.”

‘그건 우리 주상 전하...’라고 토 달려던 김옥균은 불현듯 누가 보아도 (물론 지난 네 해에 한정하면 절반쯤은 자기 책임이 맞기는 했지만) 자신의 잘못이라고 할 것임을 깨달았다. 목으로 넘어가는 위스키가 유난히 씁쓸했다.

“여하간, 일재 말하기를 정말로 사람 아니 상하도록 나라 안에 널리 규제를 편다면 참으로 나라 사정, 그러니까 요즘 말로 경제가 도로 어려워질 것이라 하더군.

옛날 환재대감께서 처음 기기창과 제조국을 세우시던 때만 하더라도 싼 값에 마구 기기를 들여와 역시 싼 삯으로 사람을 부렸지 않은가. 그런 곳이 아직도 한두 곳이 아니지.”

“자칫 물산의 값이 오르게 되면 암만 수호의 도의를 다한다 해도 결국 청국 같은 곳에서 서로 앞을 다투는 사이인 일본국 같은 나라들에게 밀리는 원인이 된다는 걱정이로군요.”

“그렇지. 물론 처음 개항할 때에 비하면 우리 공장(工匠)의 술기가 참으로 빼어나게 되어 몇몇 부문에서는 부끄러움 없이 자랑할 수 있게 되었다지만, 그래도 영국이나 덕국 등에 비하면 여전히 한참 뒤처지지 않는가.”

그러므로 주상께 직소하여 아예 저들 욕심 많은 고인(賈人)과 고공들의 청을 가납치 않도록 하거나, 약간의 미움 받을 각오를 하고 나라에서 금법을 정할 터이니 너희의 재보로 알아서 하라고 해야 할 것이었다.

“또 다른 방편은 역시 대서에서 하는 것인데... 지금 우리말로 옮기자니 바로 떠오르지는 않는군요. 음, 건강보험이라고 해야 할까요?”

남들이야 김옥균이 한량 되더니 정말 한량처럼 군다고 여길지 몰라도, 실제로는 남들과 똑같은 내용을 궁구하더라도 심득하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남는 여유만큼만 빈둥거리는 것이었다. 서양에서 무슨 제도를 어떻게 운영한다 하는 만큼은 금방 떠올릴 수 있었다. 대강을 설명하니 저도 프랑스에서 들어 알던 것이라, 김홍집도 곧 이해하였다.

“하지만 그것도 결국 국용 나가는 일 아닌가?”

“그건 그렇지요. 하지만 당장 지출되는 일은 아니고, 설령 일터에서 독을 쐬더라도 몸이 금방 축나는 경우가 그리 많지는 않으므로 한 번에 국법으로 금제를 내려버리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고공이 늘어난다고 하지만 아직 그렇게까지 많은 것도 아니고요.”

“허, 눈속임이라.”

“우정(홍종우의 호)에게 듣기로 아국 살림이 매년 백분지 얼마씩 빠르게 커나가고 있다 하였습니다. 능히 비용을 감당할 수 있을 때까지만 속이면 되는 것이니 완전히 떳떳하지는 않아도 권도(權道) 바깥에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김홍집이 곰곰이 생각해보아도 그 정도가 현재로서는 그나마 정도(正道)에 가까울 터였다.

“고마우이.”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다음 기무회의에서 넌지시 아뢰고, 참의원 통하여 발의하도록 하지. 그러면 개화당도 한몫 끼는 식으로 할 수 있지 않겠나?”

“잘 되면 개화당 김 모 발상임을 누락치 마시기를 청합니다.”

“글쎄, 큰 기대는 하지 말게. 성상께서 설령 가납하시더라도 조정의 일이라는 것이 또 여러 사람 입을 거치다 보면 엉뚱하게 풀리기도 하지 않는가? 그때가 되면 누구 발상인지 따지기도 무엇하게 되겠지.”

저 말 역시 다른 사람이 했다면 ‘네놈에게서 볼 덕은 다 보았으니 이제는 모르는 일이다’ 하고 입 씻는 격으로 들리겠지만, 김홍집과 함께 성상을 이야기하는 것이었으므로 진심으로 나오는 말임을 알았다.

“잘 찾아보아라. 좋은 구절이 하나쯤 있을 것이다.”

“예, 아바마마. 허나 참으로 송구하오나...”

“선현들 말씀이 얼마나 방대한데 그 중 알맞은 것 하나쯤 없겠느냐? 그리고 이로써 또 한 번 배울 수 있으니 참으로 좋은 일이지 않으냐.”

세자 닦달하여 경전 뒤적이게 만드는 귀남이 미안한 마음에 얼버무렸다.

김홍집과 김옥균이 서로 무슨 구상을 하는지 알 리 없는 귀남이었지만, 금광의 일이 어쩌다 소위 환경 – 아직은 없는 말인 듯했다 – 문제까지 닿았음은 능히 알 수 있었다.

귀남의 전생 말년의 일이었다. 봄과 가을은 어째 짧아지고 (애초에 나이 먹을수록 한 해 자체가 갈수록 짧아지는 느낌이기는 했지만) 또 툭하면 하늘이 뿌연 안개로 뒤덮혀 숨만 쉬어도 매캐한데, 한때는 그것이 연탄을 너무 많이 때서 그렇다고 하고, 그 다음에는 차가 많아서 그렇다고 하고, 또 그다음에는 되놈들 때문이라고 하였다.

좌우지간 그 미세먼지인지 수모구인지는 처음 상경했을 때는 없었던 것이므로, 한국이든 중공이든 북괴든 필히 사람의 소행이기는 할 터였다. 당장 지금도, 처음 자신이 이 몸에서 눈 떴을 적 거리에 진동하던 냄새가 매캐한 연기 내음으로 갈음된 지가 꽤 여러 해였다.

자신이야 몸에 좋다는 것은 죄다 먹는 듯하니 그래도 괜찮지만, 딱 전생의 자신 같은 가난한 이들에게는 어떻겠는가? 더구나 언제고 후손들을 위해서는 지금 명분을 다져놓아야, 마음 놓고 우리는 최선을 다했으니 지금의 환경 문제는 모두 네놈들 탓이라며 다른 나라들에게 마음껏 잔소리를 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니까 군자라면 천지인 삼재(三才)를 모두 보살펴, 어느 하나라도 상하지 않게 잘 보듬어야 그것이 예의다. 대략 그와 통하는 구절을 찾으면 된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지 않으냐.”

분명히 사서삼경 중 어딘가에서 본 기억이 났다. 아니, 『자치통감』이었던가? 이것저것 모두 챙겨오게 하였으니 언제고 나오기는 할 것이다.

“학문 부족한 소자보다 다른 통달한 이에게 하문하심이 낫지 않겠습니까?”

옛날 이 몸의 머리가 (그나마) 팽팽 돌아갈 적에는 어디서 들었던 말을 그대로 옮기기도 쉬웠는데, 이제는 옛날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세자 앞에서 어떻게 그것을 인정하겠는가.

“에헴, 군왕의 위엄이라는 게 있지 않으냐. 그리고 세상 어디에 설복시켜야 할 사람에게 먼저 물어 ‘그대를 설복할 수 있는 구절을 찾아주시오’라 청하는 법도가 있단 말이더냐.”

소문 낼 만한 사관에게는 그의 안사람 임 상궁이 이번 혼례 1주년에 받고자 하는 물건이 있는데, 입을 다물면 알려주겠노라 얘기하여 입막음을 해 두었다. 어쩌다가 저의 본 생 말미에 퍼진 그런 날라리 풍조-간혹 겨울에 사라는 군밤은 안 사고 저들끼리 수다 떠는 남녀들이 있던 것이다-가 이곳 지엄한 궐내까지 퍼졌는지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일이나, 이미 이루어진 형세는 최대한 이용해야 하지 않겠는가.

(자신이 언제고, 별단이 마음 식을까 걱정하는 안양대군에게 그 백일이니 일주년이니 하는 것을 젊은 선남선녀들이 챙기곤 하더라 하고 지나가듯 일러주는 바람에 그런 풍조가 궐 안에서 밖으로 퍼지고 있었음은 꿈에도 모르는 귀남이었다.)

“그리고 세자 네게는 군밤으로 삯을 주는 셈이지 않으냐. 서책을 벗삼으며 주전부리도 얻으니, 예전 같으면 백 번 중에 한 번도 사양하지 않았을 것이다.”

순한 세자 얼굴은 도저히 감정을 감추지 못하는 것이어서, 무엄하게도 됫박만큼 입이 나왔다. 물론 세자에게 묻는다면야, 부왕과 어머니 중전, 그리고 아내 이렇게 세 사람 앞에서만 그리한다고 대꾸할 테지만.

“양만리(楊萬里) 이르기를 ‘군자는 은혜가 금수까지 미친다 (君子恩及禽獸)’ 하였사온데...”

“오, 좋구나.”

“다만 뒤이어 말하기를 ‘그러나 주공께서도 반드시 무소와 코끼리를 쫓으셨을 것이다 (周公必驅犀象)’라 하였습니다.”

받아서 보니 혹시나 후인들이 곡해할까봐 친절하게 한 번 더 부연하기를, ‘성인은 어짊이 초목에 미치지만 후직(后稷)일지라도 반드시 씀바귀와 여뀌는 뽑았을 것이다’라 하였다. 취장절구 노리던 귀남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었다.

“거 다시 사서삼경을 찾아보자꾸나. 내 기억에 『논어』는 아니요, 시·서·역경도 아니었으니 지금 다시 보면 떠오를 지도 모른다.”

하면서 본인도 부지깽이 내려놓고 서책을 잡았다.

다행히 자신의 말이 맞아서, 『중용(中庸)』에 그 구절이 있었다. 그래도 자신이 홀로 찾을 수 있는 것을 공연히 세자만 고생케 하였다는 생각에 민망할 뿐이었다. (그리 따진다면 애초에 부르지 말았어야 하지 않는가, 하는 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였다.)

“험험. 미안타. 내 불민하여 괜히 너를 번거롭게 했구나.”

진솔하게 미안하다 하니 세자가 깜짝 놀랐다.

“공론에 부쳐서 잘 되면 세자 네 공이라고 해 주마.”

좋은 게 좋은 것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다음 기무회의에서 예상대로 그 일이 거론되자 귀남이 곧장 말했는데, 한쪽은 성현 말씀을 내세우고 한쪽은 실리를 말하는데 그 오가는 방향이 30여 년 전과는 정반대였다.

뜻 부딪힌 뒤에 귀남이 먼저 말하였다.

“그래서, 우리만 그렇게 공장의 법도를 정하면 통상의 이익은 줄어들 것이므로 다른 방도를 구함이 가하다, 이런 말이오?”

“실로 그렇습니다, 전하.”

“그러면 다른 나라도 예를 모두 갖추도록 도와주어야지, 우리가 여러 서양 나라의 덕을 입어 개화의 이로움을 얻었는데, 이제 와서 우리만 좋은 일을 하고 다른 나라들은 계속 잘못 범하도록 내버려두면 그것이 예의 아는 나라라 하겠소?

『중용』에 이르기를 ‘사물의 본성을 다할 수 있으면 천지의 화육을 도울 수 있다(能盡物之性 則可以贊天地之化育)’라 하였으니 그것이 이를 이른 듯하오. 다른 나라들이 혹 사물의 이치를 모두 밝히지 못해 도의를 다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우리가 미리 면밀히 살펴 알려주면 그것이 천지를 모두 돕는 길 아니겠소?”

사물의 본성을 다한다 함은, 다시 말해 총명한 자신의 둘째아들처럼 과학에 힘쓰는 사람이 있으면 된다는 뜻 아니겠는가? 이 기회를 빌어 아들 자랑도 할 수 있을 터였다. 다만 안양대군이 아버지의 큰 사랑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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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대기오염은 시기에 따라 조금씩 다른 양상을 띄었습니다. 예컨대 우리가 미세먼지의 주요 증상으로 인식하는 악시정의 경우, 198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꾸준히 악화되었다가 2000년대 이후 꾸준히 개선되는 경향이 나타나며, 연중 편차와 일중 편차는 지속적으로 변화하였는데 이는 그 원인이 달라지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김용표·김진영·김영성(2000); 김민석 등(2020)).

원 역사의 이건창은 김홍집 내각의 친일 성향을 문제삼아 지속적으로 협조를 거절하였고, 이것이 빌미가 되어 1896년 유배형에 처해집니다. 이후 출사하지 않고 강화도에서 지내다가 1898년 병사하였지요. 작중에서는 관직을 내려놓은 사유도, 대표 저서 『당의통략』의 집필 사유도 모두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조선시대 당쟁사 연구의 필수 사료 중 하나인 『당의통략』은 그의 아버지 이상학이 저술한 『국조문헌』을 편집한 것입니다. 이건창은 여기에서 선조 시기부터 영조 재위기까지의 당쟁사를 서술하였는데, 동서 분당의 원인을 김효원과 심의겸의 대립에서 찾는 것 등 조선시대 당쟁에 대한 여러 통념은 여기서 기원하였습니다. (너무나 유행한 탓에 식민지 시기 일본 학자들의 소위 ‘당파성론’에 인용되기도 했지요.) 19세기 초부터 유행한 당론(黨論) 류의 완성본으로, 자신의 집안이 속한 소론의 입장에 편중되었다는 비판을 받기는 하지만, 그 저술의 체계성과 당쟁 자체에 대한 비판의식 등은 지금도 높이 평가받고 있습니다.

원 역사의 일본은 당시 모델로 삼았던 독일의 사회보장제도를 일찍이 학습하였으나, 실제로 국내에 적용하는 데 있어서는 다소 신중한 태도를 취했습니다. 일본의 건강보험법은 1차대전으로 인한 특수가 끝나고 노동쟁의가 빈발하게 된 1922년에 이르러서야 제정되었습니다. 이후 건강한 병력자원 확보라는 이면의 목적을 가지고 1938년 국민건강보험법으로 확장되기에 이르렀지요. 작중의 김옥균이 조선에 건강보험은 시기상조라고 보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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