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푸른 산 맑은 물 (1)
헐벗은 산은 볼썽사나울지언정 그 산의 틈바귀에서 나오는 것은 모두가 바라마지않는 황금이었다. 운산 안에서도 북진(北鎭) 일대는 곧 광무총국이 운영하는 금광의 지척이라, 그러한 황금의 힘이 세상의 빛을 보기 전에 거쳐가는 곳이었다.
그러므로 속설에 이르기를 지나가는 개도 1원짜리 종잇돈은 거들떠보지 않는다 하였는데, 신임 덕대(德大) 후보(厚保), 그러니까 허버트 클락 후버(Herbert Clark Hoover)가 와서 보니 지나가는 개가 정말 종잇돈에 큰 관심이 없는 것 같기는 했다. 정확히는, 세상사에 관심 가지기에는 척 보아도 기운이 없는 것이었지만.
“이거, 개뿐 아니라 사람도 그러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까?”
처음 개발할 때부터 벽돌로 그럴듯하게 지어올린 현장 사무실 – 그 옛날 뜨내기 미국인들을 붙잡기 위해 오페르트가 큰맘 먹고 지출한 덕에 꽤 모양새가 화려햇다 – 에 앉아 광산의 운영실적을 살피던 후버가 물었다.
“근래 병원에 드나드는 광부들이 부쩍 늘기는 했다오. 간혹 그 일가 중에도 기력이 없다던가, 계속 구역질이 난다던가 하는 이들이 있다던데, 올 여름이 부쩍 더웠던 탓이거려니 했지.”
인수인계를 하던 선임 이성옥이 별 생각 없이 말했다. 초창기에 워낙 미국인들이 많이 들어왔기에, 운산 일대에서는 아직도 엉터리 영어가 일상적으로 쓰이곤 했다. 그래도 이성옥쯤 되는 사람이면 구수한 억양으로나마 제대로 소통이 가능했다.
황란을 넘어서는 데 있어 금은의 증산이 보탬 된다 하여, 철강 같은 다른 업만큼은 아니더라도 이쪽 광무총국 산하의 광산에도 적잖이 예산이 투입된 바 있었다. 장비나 시설은 물론이요, 사람도 여럿 더 뽑았는데, 아무래도 인재는 결국 대접하는 쪽으로 몰리기 마련이라 처음 총국 문 열던 시절 몰려들던 어중이떠중이들과는 결 다른 사람들이 모였다.
고작 나이 스물다섯이지만 그 지재 뛰어났던, 그리고 그 지재가 너무나 뛰어난 고로 이전 직장에서 고스란히 쫓겨났던 허버트 후버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지금 사업 합리화로 이윤을 조금이라도 늘리는 것이 중요한데, 이렇게 병원 운영 쪽으로 지출이 늘어나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은 아닌 듯합니다.”
“지난 번 댐 짓는 안을 ‘어르신(Urseen)’께서 훌륭하다고 직접 칭찬하셨다 하니, 만약 무언가 개선할 점을 찾아서 보고한다면 발의한 사람 이름을 보아서라도 총국에서 가볍게 보지는 않을 듯하오. 하지만 정말로 이게 무슨 심각한 문제라도 되겠소?”
처음에는 주변에서 목탄 구해오는 일을 맡다가 어느새 총국에서 한 자리 얻게 된 이성옥은, 그간의 공을 인정받아 조만간 한양으로 상경할 예정이었다. 그러므로 얼른 일 넘겨주고 갈 생각에 바쁜 터라, 혹시 그 사이에 또 무슨 일을 이 후씨가 터뜨릴까 은근히 걱정하였다.
후버가 오자마자 곧장 상부에 제의했던, 지난번에 화력발전 대신 곳곳에 댐을 지어 수력발전으로 광산의 전력 수요를 충당하자는 안이 오페르트 본인의 칭찬을 받았다 하니 – 정확하게는 ‘이처럼 훌륭한 젊은이는 어디 가지 않고 계속 우리 회사의 인재로 활동해야 한다.’ 고 하였다던가 – 그처럼 젊은 사람의 눈치 보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최근 병가 내었던 광부의 명단과 일하는 광구를 확인해야겠습니다. 도와줄 수 있으실까요?”
그러니 영 께름칙한 예감은 접어두고 우선은 새파란 사람 말을 듣기로 했다.
그랬더니 곧 뚜렷한 추세가 보이기 시작했다.
“대바위, 매봉, 다리골... 모두 최근 새로 시안화 공정을 도입한 곳 아닙니까? 혹시 이것 때문에...”
“독극물이라고 광부들에게도 누누이 신신당부하였으니, 그들이 마음대로 꺼내어 썼다던가 한 것은 아닐 테요. 극독이니 만약 정말 그리하였더라면 벌써 크게 다치거나 죽은 자가 나왔겠지.”
“그러면 결국 어딘가에서 누출이 되었거나, 완전히 밀폐가 되지 않았다는 뜻인데... 이것도 골치아프기는 마찬가지군요.”
‘설마 수습하지도 않고 도망할 테냐’ 하는 눈빛으로 후버가 물었다.
“흠흠, 우리 두 사람 모두 덕대라고는 하지만 운산의 금광 운영 전체를 총괄하는 것은 아니지 않소. 우선 할 수 있는 일을 해보도록 하시오.”
전임자들의 잘못으로 젊은 사람이 고생하게 된 것은 안타깝지만, 이성옥 자신도 돌이켜보면 보고 배운 대로 했을 뿐 딱히 도리를 어기거나 하지는 않았다. 후버가 보기에 어떠하든 그러므로 떳떳하다고 자부하였다.
도리란 무엇인가? 아무리 광부가 몸 쓰는 궂은일이라지만, 광무총국은 엄연히 나라에서 운용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인명 상하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요, 일이 터진다면 수습하는 것은 고스란히 광무총국의 몫이었다. 이를 아는 이성옥이었기에 자신은 나름대로 할 일을 다 했다고 여긴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바깥으로 드러나면 또 곤란할 텐데, 그냥 병원 예산을 줄이는 것은 어떻습니까? 정말로 사람이 죽은 것도 아니고. 헛구역질이나 무기력 정도라면 그렇게 심한 것도 아닌데.”
“이 사람! 말을 삼가시오. 도중 사람들 귀에라도 들어가면 어쩌려고 그런 무서운 말을...”
“도중? 노조 말입니까? 그것은 왜...”
“여기는 미국이 아니오. 잘못하여 공안서까지 얽혀들게 되면 그 뒷감당은 어찌하겠소?”
기겁하는 이성옥을 보고서 진심인가 싶어 갸우뚱한 후버였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이 동네는 핑커튼 탐정사무소 같은 것은 없고, 그나마 있는 곳은 회사의 편이 아니므로 주의하라는 얘기를 들었던 것도 같았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광산의 경영은 합리화되어야 하고, 그러려면 소출을 늘리든, 지출을 줄이든 해야 하는데...”
“그것은, 흠...”
차마 ‘내 알 바 아니다’라고 말하고 갈 수는 없던 이성옥이 말을 잃었고, 그사이 후버도 고민에 빠졌다.
남들만큼은 아닐지라도 후버 역시 눈치가 있는 사람이다. 반강제로 조선에 온 것은 기회이기도 했지만 위기이기도 했다.
여기서 실적을 내지 못한다고 해서 창창한 앞날이 가로막히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먹구름은 한움큼 낄 것이요, 학창 시절부터 연애를 이어온 루 헨리(Lou Henry)와 제대로 살림 차리는 것도 요원해질 테다.
하지만 잘못하면 여러 사람의 미움을 살 수 있는 이런 일에서 주도적으로 나서는 것이 과연 올바른 대처인가? 동양인 광부 몇몇이야 저를 원망하든 말든 딱히 상관은 없지만, 이성옥 말대로 아시아 도처에 눈과 귀가 있다는 공안서, 그리고 그 뒤에 있을 국왕은 두려웠다.
“총국을 통해 이실직고하든, 아니면 확실히 감추고 다른 수 생기기를 기다리든, 무언가 결단을 내려야 하기는 할 테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않다가 어디 신보나 사헌부 귀에라도 들어가면, 그때는 차라리 공안서에 걸리는 쪽이 더 나았으리라 여기게 될 수도 있으니...”
한숨 푹 쉬며 이성옥이 말했는데, 그러잖아도 우물쭈물하고 있는 후버를 더욱 곤란하게 만들 뿐이었다.
결과적으로 둘 중 누구의 공덕인지는 알 수 없으나, 공안서도, 사헌부도 아닌 국왕 귀남에게 직접 걸리게 되었으니 그나마 나은 일이기는 하였다.
시작은 이러하였다.
후버가 운산에 도착해 막 일을 시작할 무렵, 운 좋게도 – 적어도 그때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 그해 채굴 목표량이었던 15만 대돈(大頓, 톤)을 초과 달성했다는 보고가 한양에 도달했다. 이대로라면 해 넘기기 전에는 20만 돈을 넘기고도 남을 것이라 하여 모두가 기뻐하였다.
그때 전생의 기억을 토대로 주상 발의하기를,
“산천에 묻혀있던 보화를 캐내어 나라의 재보로 삼으니, 그 공이 참으로 크다. 무릇 갱부(광부)란 고되고도 고된 일인데, 오히려 이처럼 큰 공을 세웠으니, 마땅히 나라에서 치하하는 조처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물론 총국에 직접 포상하는 것도 좋겠지만 몸소 고생하는 이들을 위무함만 못하다 하여, 특히 그 소출이 많은 광구의 갱부와 십장에게 포장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논의를 마치고서 운산 금광에 전하여 사람을 선별하려 하였더니, 어째 그런 갱부들치고 몸이 성한 이가 드물었다.
그 소식 들은 귀남은 처음에는,
“얼마나 나라를 위하여 힘썼으면 그리 몸이 축났겠는가? 참으로 안타깝고도 기특한 일이다.”
하였는데 더 알아보니 그 일가 중에도 유난히 병자가 많은 것이라, 퍽 괴이쩍게 여기어 그 연유를 알아보라 하였는데, 하문한 것이 ‘죽여주시옵소서’ 간청으로 돌아왔다. 멀쩡한 사람을 대체 왜 죽이라는 것인가 하여 더욱 의아하게 여긴바, 김가진을 불러 혹 저들이 말하지 못하는 원통한 구석이 있지는 않은가 세심히 살피라 직접 일러주었다.
하여, 죽여달라 하였더니 정말 죽일 기세로 공안서가 달라붙게 되어, 사안의 전모가 금방 밝혀져 이곳 한양에 모두 전해지게 되었다.
“광독(鑛毒)이라?”
“그렇다고 합니다, 도원 형, 아니, 영상.”
영 피곤한 눈의 어윤중이 우선 답한 뒤에, 듣는 귀 있음을 뒤늦게 깨닫고서 부르는 말을 고쳤다.
‘영상’이란 법국서 돌아온 뒤 어쩌다 자유당 손짓에 넘어온 김홍집이었다.
물론 어디 가서 부족하다는 소리 들을 나이나 경력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직 최익현이 정정하게 살아있는 판에, 자신 같은 사람이 굳이 필요하겠는가 싶었는데, 최익현 이르기를,
‘영규(영의정) 자리는 한 번으로도 족하거니와, 이 사람은 천생 성품 용렬하여 남의 티끌만한 트집을 잡는 데만 능하니 어찌 무거운 자리를 함부로 자임하겠는가? 사세가 그러하여 자리 채울 사람이 부족하였을 때는 나아갔을 따름이나, 지금은 훌륭한 후인이 여럿 있으니 그 앞길 막음이 외려 불가한 일일세.’
라 하며 사양하였다. 좋게 보면 다음 세대 인재를 위함이요, 정말 심사 꼬인 사람 – 예컨대 저의 친우 김옥균 – 이 본다면 부담되는 자리 내려놓고 남의 제삿상 감과 배의 자리 정해주기에 재미 붙일 생각이냐며 무어라 했을 테다.
허나 벗으로 말미암아 사실상 좌천을 당해 멀리 파리까지 갔다 온 김홍집이 그렇게 깊게 사정 파고들 계제는 아니어서, 곧장 합세하기로 했다.
그리고 적어도 이번 추거에서는 최익현의 뜻이 결코 편벽한 곳에 있지 않음이 명백히 드러났다. 그가 물심양면으로 자유당의 연줄 동원해주지 않았더라면, 아마 추거에서 힘 쓰기는 어려웠을 테다.
(그 와중에 『해동일보』에서 개화당 내각 젊은이들의 미숙함을 헐뜯는 기사도 여럿 나와 세 모으기에 도움을 주기는 했는데, 저의 이름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김홍집이 뒤에서 알아보니 이호준의 아들 완용이라는 자라고 했다.)
물론 상대로 개화당이 내세운 이가 바로 눈앞의 어윤중이었기 때문에, 서로 날선 공방을 벌이거나 하지 않았던 점도 컸다.
“추거로 인해 잠시 아문을 비웠더니, 정말 일이 많이 쌓인 모양이로군그래.”
“후우. 고균이 그리 쩨쩨하게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저 겉도는 사이 계속 남아 실무를 돌보는 사이 입이 걸어진 어윤중이었다.
“쩨쩨하게?”
“아 글쎄, 추거 끝나면 개화당 젊은이들을 밀어넣어 모자란 인력을 벌충해주겠다 하였는데, 추거에서 이긴 뒤의 말이었다며 이제 와서는 말을 바꾸지 뭡니까. 에이.”
그러나 서로 성정 아는 사이였으므로 원망은 할지언정 한(恨)에는 한참 못 미쳤다. 그것을 알고서 김옥균도 발을 뺀 것일 테니 괘씸하기는 하였지만.
결국 김옥균이 두 해 더 재임하는 것이 무산된 뒤, 개화당에서는 계책 세우기를, 황란이 사실상 끝났다지만 경제개발 오개년계획은 새롭게 추진될 것이므로, 여기에 방점을 두고 전가의 보도인 경제공약 으로 다시 힘을 써보자 하였다.
반대로 자유당에서는 두 해 뒤로 다가온 아주대회를 비롯해, 다시 돌아온 삶의 여유를 온 백성이 함께 누리도록 하자는 식으로 공약을 내세웠는데, 이른바 ‘민생지질(民生之質)’ 넉 자였다. 최익현이었다면 점잖지 못하다 했을 방안이었지만 의외로 효험 쏠쏠하였으니, 과연 요동치는 법국 정계를 직접 체험한 사람답다 할 일이었다. (정말 요동치는 것 겪은 것으로는 최익현본인만 하겠냐만.)
어쨌든 굽이굽이 곡절 끝에 일인지하 총리대신 자리까지 올라왔은즉, 그간 고생하던 저의 사제를 위하여 육조 전체에게 고루 일감을 나누어주기로 – 이번 추거에서 졸지에 공산당에게 갈 단자를 많이 빼앗아왔으니, 이런 부분에서라도 공산당스러운 일을 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 하였다. 그러나 암만 육조에 일을 나누어주어도 그것이 고스란히 우의정으로 복귀한 어윤중에게 올라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이치라.
생각 그에 미쳐 문득 무안해진 김홍집이 다시 본론을 들고 나왔다.
“좌우지간 이 광독의 사안은 상감께서 친히 성려 베푸셨으니 속히 처결하는 바가 있어야 할 터인데, 일재(어윤중) 자네가 보기에 무슨 뾰족한 수가 있겠는가?”
“그나마 그 무슨 청화인지 청산인지 하는 것을 도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병의 뿌리가 깊은 사람은 없으니 지금이라도 노후하거나 흠결 있는 건물을 모두 고치도록 하면 될 일입니다.”
물론 그것만 해도 지시하는 사람이 어윤중이라면 – 아니면 어윤중의 뒤를 이어 호조를 맡게 된 홍종우라던가 – 충분히 무서운 일이기는 했다. 꼼꼼하기도 꼼꼼하거니와, 늘상 말하기를 많은 것을 바라지 않고 딱 자신의 절반만큼만 성심(誠心) 다하라 하는데, 가뜩이나 재주 있는 사람이 관록까지 붙어 그 절반도 어지간한 절반이 아니었던 것이다.
“선례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당장 지난해 일본국에서도 구리 캐는 고을에 비슷한 일이 있어, 그 참의대부 전중(다나카 쇼조 田中正造)이라는 자가 앞장서서 성토한 바 있다 들었습니다.”
그 무렵이면 김홍집은 아직 파리에 머물 때기는 했다. 토치기(栃木) 현 – 헌법 1조를 위해 요시노부가 양보한 것 중 하나가 완전한 폐번치현이었다 – 의 아시오(足尾) 동광에서 나온 광독으로 인근의 마을이 모두 폐허가 되었다 하여 그 일대에서 인망이 높던 전중이 나서서 이를 해결해 달라 청원하였는데, 같은 애국공당 대신 엉뚱한 공산당이 나서서 도와준바 그럭저럭 뜻한 바를 이루었다고 했다.
“제련하면서 나오는 유황과 여타 녹물이 곧 독이 되었다 하여, 이를 최대한 줄이고 농사에서 손해 본 이들에게는 보상해주겠다 하였다고 합니다. 운산은 농사짓는 이들이 없다시피 하고, 그 일대는 오배 선생이 금맥을 찾기 전에는 사실상 무인지경이었으니 훨씬 사정이 좋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족할까?”
“금광의 일을 금광에서 해결하는데 그것으로 족하지 않겠습니까?”
질문을 반문으로 받는데, 김홍집은 여전히 확신이 서지 않는 듯했다.
“그랬으면 좋겠지만, 성상께서 이미 어심을 기울이셨으니 혹 이로써 시끄러워질 소지가 생길까, 그것이 걱정이로군그래.”
“영상, 속언에 말이 씨가 된다 하였습니다.”
주상 모신지가 수십년이라, 이런 부분에서는 묘하게 촉이 좋은 두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말이야 저렇게 해도 어윤중도 김홍집과 함께 걱정하였는데, 아닌 게 아니라 곧 엉뚱한 데서 소란이 터져나왔다.
공안서가 아무리 은밀히 움직인다지만, 신보 채사군들의 은밀함도 신보의 매출이 늘어남에 따라 자연히 함께 고강해지고 있었는데, 따라서 급히 공안서가 운산으로 향하여 광독 옮은 갱부들의 사정을 듣는다더라 하는 이야기도 금방 이곳저곳 입소문으로, 그 다음에는 신보 지면으로 퍼지게 되었다.
사람 마음은 간교하여 쉽게 이익 취하려 하기 마련이라, 곧 이와 같은 청원이 곳곳에서 올라오기 시작했다.
“저희가 비록 금은을 캐는 것만큼 나라에 공헌하고 있지는 않으나, 백성의 여러 편의를 위하여 물산을 풍족하게 하는 소소한 공은 있다고 감히 뿌듯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운산의 소식을 듣고 살피니, 저희의 영업하는 터전에도 비슷한 폐단이 적지 않았습니다.
성상께서 공상의 업을 크게 일으키시고, 더불어 도중을 꾸리는 은총을 내려주시니 어찌 저희가 하루라도 은혜를 잊겠습니까? 다만 저희 스스로 이 폐해를 끊어 없애기에는 힘이 부치니 백번 무엄함을 무릅쓰고 이처럼 청을 올릴 따름입니다.”
어느 나라에서는 이런 문제가 있으면 이곳저곳에 인정 흩뿌려 입막음하려 한다는데, 이 나라 조선에서는 공장주들이 도중과 입을 맞추고서 이렇게 저들 어려운 사정을 먼저 이실직고하니 퍽 기이한 일이기는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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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에 등장한 후버는 미합중국 제31대 대통령이 되는 그 후버가 맞습니다. 고아 출신으로, 개교 첫해 등록금이 면제되었던 스탠포드대에 진학해 지질학을 전공한 뒤 곧장 광업계에 뛰어들었지요. 이때 오래된 광산의 운영을 ‘합리화’하는데 뛰어난 소질을 보여, 젊은 나이에 각광받게 됩니다.
하지만 1897년 호주에서 일하던 시절 경영진과 마찰을 빚고, 결국 우호적인 추천서를 써 주는 조건으로 회사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원 역사에서는 이때 이홍장이 외국 자본을 유치하여 설립한 개평광무국(開平鑛務局)에 취직해 한동안 천진에서 지냈습니다. 이때 의화단 전쟁에 휘말리기도 했지요. 이때 배운 중국어는 아내 루 헨리 – 스탠포드 동문이자 캠퍼스 커플 – 와 대화할 때 항상 썼다고 합니다. 작중에서는 대신 한국어를 쓰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대돈이란 곧 미터법에서 쓰는 톤(Metric ton)입니다. 척관법에서의 무게 단위 ‘돈’과의 혼돈을 막기 위해 앞에 ‘대’ 자를 붙여 구분한다는 설정 되겠습니다. (여담으로 현대 중국어에서는 이를 ‘톤噸’으로 음차해 쓰고 있습니다.) 원 역사의 운산광산 채굴량은 1902년 13만 4,600톤, 1903년 20만 3,567톤에 달했기 때문에 훨씬 원활한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는 작중 1898년 시점 20만 톤을 돌파한 것은 그렇게까지 대단한 것은 아니라 하겠습니다.
원 역사의 운산금광에서 원석을 파쇄하여 금을 골라내기 위해 처음 청산화 공정을 도입한 것은 1899년이었습니다. 운산금광에서도 당시 최대의 광구였던 대바위 광구에 도입되었고, 이후 매봉, 극성동, 다리골 등 다른 대규모 광구에도 지속적으로 도입되었습니다. 이때 광독 문제가 발생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1930년과 1931년 연이어 광독 문제가 주민들에 의해 제기되고, 이후 별다른 대책 없이 조용히 지나갔던 것을 보았을 때, 이전에도 문제가 존재하였고 다만 수면 위로 올라오지 못했을 뿐인 가능성을 충분히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작중에서는 후버가 제안한 것으로 등장한 수력댐은 원 역사의 운산에서도 그대로 사용되었습니다. 기계화가 진행되면서 석탄이나 목탄으로 전력 수요를 감당하기 어렵게 되자, 일대의 지형을 사용하는 방안이 나온 것이지요.
후버와 함께 등장한 이성옥은 본래 역사에서는 이때 목탄과 기타 목재를 공급하는 하청업자로 운산 금광과 연을 맺은 의주 출신 광업가입니다. 알렌의 회사와의 계약을 통해 상당한 자산가가 되었고, 이를 다시 투자해 운산 일대에서 알렌과 계약해 독자적인 금광을 – 당시 운산에서는 흔한 일이었습니다 – 운영하였지요. 이후 운산의 대표적인 부호가 되어 1917년에는 광부들의 채무를 자신이 대신 상환해주는 등 지역사회에 많은 공헌을 했습니다.
운산금광은 노동환경이나 보수 측면에서 당시 다른 광산들에 비해 딱히 좋다고 하기는 어려웠지만, 알렌 본인의 직업 때문인지 유난히 광부들을 위한 병원만은 잘 되어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평안도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이, 자기들 고향에 있는 병원보다 잘 되어 있다고 찬탄한 기록이 남아있지요. 식민지 시기에도 병원의 운영은 계속되어, 운산 주민들이 미국인 의사들을 기리는 송덕비를 세우기도 했습니다(박범(2019), “동양합동광업회사의 운산금광 운영과 광산도시 북진의 지역사회”, <이화사학연구> 59).
지나가듯 일본 사례로 언급된 아시오 광독 사건은, 원 역사에서는 훨씬 불행하게 끝났습니다. 이미 전국시대부터 채광이 시작되었던 아시오 동광은 잠시 폐광된 뒤 서양 기술을 이용해 다시 채굴되었는데, 한때는 일본 구리 생산량의 4분의 1을 차지할 만큼 그 규모가 컸습니다. 그리고 그만큼 일대의 광독 문제도 심각했는데, 지역에서 인망이 높아 제1회 중의원 선거에서 토치기현 의원으로 당선된 다나카 쇼조는 의회 개회 직후부터 이를 문제화하려 노력했고, 메이지 덴노에게 직접 상소를 올리려 시도하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큰 효력을 거두지 못했고, 오히려 정부의 미움만 사게 되었습니다. 메이지 정부는 피해를 입은 마을에 보상하는 대신 마을 자체를 강제로 옮겨버리는 조치를 취했고, 이에 반발한 다나카 쇼조는 국회에서 하품을 하였다는 이유로 관리모욕죄로 기소되어 잠시 옥고를 치르기까지 했습니다. 결국 러일전쟁 개전을 앞두고 민심을 다독여야 했던 정부가 광산 운영 측에 확실한 조치를 지시하여 어느 정도 해결되기는 했지만, 1973년 광산 폐광 이후에도 지금까지 중금속 잔류 문제가 남아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