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돌이켜 함께 (2)
임금의 호의호식하는 삶이란 과연 옥체 보전에 효험 있어, 올해로 몸의 나이 마흔 하고도 일곱이거늘 이전 생의 마흔일곱 때에 비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세월 흐름에 따라 몸의 느낌이 점차 저의 이전 늙은 몸을 떠오르게 하는 쪽으로 바뀜은 어쩔 수 없는 이치였다. 낮부터 밤까지, 허리부터 손끝까지 예전같지는 않으니, 이미 한 번 겪은 일이라지만 젊음 가심은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만큼 의젓하게 큰 아들들 – 막내가 아직 조금은 철부지이기는 했지만 – 을 보면 뿌듯해지기도 했다. 얼마 전 군복 벗고 저궁(儲宮)으로 돌아온 세자라던가, 저만 보면 일이 힘들다고 칭얼대는 것이 퍽 귀여운, 그러나 또 들어보면 툴툴거리면서도 할 일은 한다는 안양대군이라던가.
그러나 그보다 서러운 것은 주변 사람의 늙음이라. 지난 생에서야 저 혼자만 늙어가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오히려 저는 나이에 비교적 초연한데 그간 정든 주변 사람들이 주름살 생기고 허리 굽는 것을 보니 마음이 절로 아려왔다.
눈 어두워지면서 공안서 일을 고스란히 넘기고 궁내부 일만 맡아보는 중전 민씨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대원군이 남기고 간 마음의 구멍이 휑하니 컸다.
봄 오려면 겨울 거쳐야 하고, 젊은이 나오려면 늙은이 비켜서야 함이 세상 이치라지만, 아들된 사람으로서 어찌 그 이치를 원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원위 숨 거둔 뒤 아내 민씨도 더불어 세상을 등지니, 내외가 고희도 훌쩍 넘겨 천수 다하였으므로 아쉽고 안타깝되 또 과히 슬퍼할 것만은 아니라고들 하였다. 그러나 그간 그리도 신세 진 처지에 어떻게 또 비통히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허나 귀남의 마음이 암만 아프다 한들 세상이 멈추는 것은 아니요, 오히려 그 빈자리로 말미암아 더 많은 세상일이 일어나기 마련. 전봉준을 경무대로 불러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명 받들어 입궐하였나이다. 어찌 성상의 마음을 감히 함부로 입에 담겠습니까만, 미미하게나마 서글픈 마음에 위로를 전할 수 있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전봉준이 들어와서는 곧장 나름대로 예를 갖추었다. 처음에는 쭈뼛 몸둘 바 모르면서, 때로는 대놓고 칭신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그러지 않기도 하면서 혼동을 겪었는데, 지금은 드나든지 꽤 오래되어 그럭저럭 정돈이 된 모양이었다.
“이제 만민공산당이 그대만을 따르게 되었으니, 그 당 만든 이를 생각하면 나 또한 비록 궁장(宮牆) 밖의 일이라 하나 장차 어찌 될지 궁금히 여기는 마음을 금할 수 없는 것이오.”
위로와 안부 이야기를 거친 뒤 귀남이 곧장 물었다.
사세도 이롭지 못하거니와 국상도 당하였으므로, 김옥균도 마침내 저의 욕심을 거두어 올해 가을에 총리대신 추거를 새로 치르게 되었다.
오경석도 얼마 전 은퇴하였으므로 이제 조선국 만민공산당의 우두머리는 전봉준 한 사람이란 것이 세간의 총평이었다. 그러니 귀남으로서도 그간 종종 마주쳤던 이 사람이 장차 이름부터 흉한 그 당을 어디로 몰고 갈지 촉각 곤두세울 일. 지금까지야 그 대원군이 위에 있었기에 어느 정도 안심하였다지만, 이제는 세자를 위하여 귀남 자신이 대원군 노릇 – 혹은 아비 노릇 – 을 해주어야 할 것이었다.
“나는 그대 당이 받드는 그 이론이 무엇인지 상세히 알지 못하나, 다만 두려워하는 바는 혹 이로 말미암아 나라 안에 쟁투가 일어나고, 그로 인해 같은 나라 백성끼리 편 갈라 피 흘리는 일이 일어날까 하는 것이외다.
삼한이 가까스로 하나 되어 지금까지 일천 년을 훌쩍 넘겼는데, 아무리 마씨의 설이 훌륭하다 한들 그로 인해 강역이 갈린다면 이 어찌 온당하다 하겠소이까.”
그리하여 뜻하는 바를 살피고, 만에 하나 김일성이 같은 자가 먼저 나와 흉계 꾸미는 일 없도록 단단히 일러줄 생각이었다.
이를 위해 어젯밤 나름 준비한바, 그럭저럭 짜임새있게 묻는 말이 나왔다.
“사사로이는 제 장인 되는 마씨의 이론이 다툼을 논함은 맞으니, 이는 감추려 한들 감출 수 없고 또 감춰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과연 ‘빨갱이 본색’은 이 요지경 세상에서도 그대로일 것인가. 물으니 나오는 답의 첫머리가 저러하여 귀남이 저도 모르게 긴장하였다.
“그러나 어찌 반드시 피 흘리는 것이 세상의 밝은 이치에 든다 하겠습니까? 예로부터 무덕(武德)은 인명을 살상함에 있지 않았으니, 마씨의 이론에서 이르는 다툼에 있어서도 이는 마찬가지입니다.”
하고는 마씨의 이론은 이러한데 어떤 부분에서는 소상하지 못하고, 그에 대한 자신과 아내의 생각은 각각 이러하다 하면서 죽 늘어놓는데, 사실 대부분은 귀남의 귓바퀴만 스치고 지나는 내용이었다.
물론 전봉준이야, 갑작스레 주상이 공산주의 이론을 물어보는 것을 보고 넘겨짚기를, 정말 세간에서 이르는 것처럼 장인 어르신 사상에 어심이 쏠린 것인가 싶어 다소 흥분하였으니 그런 속사정까지 살피지는 못하였지만.
“... 하여, 비록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사이의 싸움은 피할 수 없는 것이나, 이 싸움에도 나름의 예(禮)를 지켜야 하며 그리하여야만 비로소 본디 뜻한 바를 모두 이룰 수 있다는 것이 저의 주장입니다.”
그사이 동아시아 인터네셔널도 여러 해를 거듭하면서, 비록 참가하는 나라 수는 별로 늘지 않았지만 오가는 이론은 꽤 정교해졌다. 그러면서 살살 유럽 쪽을 건드렸는데, 첫 선거부터 공산당이 과반 차지한 조선이나, 비록 공산당이 3당이라지만 애국공당과 입헌정우회 사이에서 공론의 향방을 결정할 수 있게 된 일본과는 달리 여전히 지지부진한 것이 유럽의 현실이었다.
결국 내분은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지만, 적어도 자신감 하나는 계속 붙었다. 떳떳하게 저의 주장이라며 성상 앞에서 들어 보일 수 있는 것도 그 덕이었다.
“그런데... 예컨대 후대에 어떤 간악한 자가 나와서 사실 그대의 주장은 모두 틀렸고, 사직을 뒤엎고 오직 저의 뜻대로 전횡함이 공산당의 참된 면모라고 우긴다면 이를 막을 수 있겠소?”
이를테면 ‘그 김가놈’이라던가, 하는 말을 마음 속으로만 덧붙이는 귀남이었는데, 전봉준 답하는 말이 놀라웠다.
“막을 수 없고, 막아서도 아니 될 일입니다.”
“무어라?”
“단지 어떤 뜻을 품고 그것을 내세운다 하여 어찌 막을 수 있겠습니까? 나라도 언로를 막으면 쇠미해지는데, 하물며 훨씬 사람이 적고 쉽게 편벽해지는 정당은 어떻겠습니까?”
“그렇다 해도 손 놓고 도저히 막지 못한다며 미리 체념하고 있어서야 되겠소?”
“그런 자들이 전횡치 못하도록 막는 것은 바로 성상께서 세우신 법도가 될 것이니 성려를 거두시옵소서.”
나이 먹을수록 언변만 늘어나는 것인가. 귀남이 아니라 다른 임금이었더라면 어찌 감히 저를 농락하느냐며 노여워함이 족할 테다. (물론 전봉준도 눈앞에 다른 임금이 있었다면 이렇게 앞에서 저의 마음속 생각을 마구 털어놓지는 않았을 테다.)
“공산당을 꾸려 나랏일을 돕고 가난한 백성을 위하는 것도, 다른 정파들과 겨루어 세를 얻는 것도 모두 우리 조선에서 시작한 일은 아니지만, 비로소 공효를 얻은 것은 우리가 처음입니다. 눈과 귀가 있는 자로서 이것이 어찌 성상의 지극한 마음씀에서 나온 것이라 아니 하겠습니까?”
엘러노어가 들었더라면 나이 먹으면서 입발린 소리만 늘었다느니, 천생 봉건체제 하의 국민이네 놀리겠지만, 절반 이상은 진심이었다. 물론 전봉준 자신과 아내 둘이서 힘쓴 것도 있겠지만, 애초에 다른 나라들이 원래 그랬던 것처럼 우선 정부에 반대한다 싶으면 때려잡고 보는 쪽이었더라면 이런 성과가 얼마나 나왔겠는가.
“그러므로 혹 후에 불측한 마음 품은 자가 있다 한들, 정정당당하게 각자 하고자 하는 바를 다할 방도가 이미 마련되어 있거늘 어찌 저의 흉참한 짓에 사람을 그러모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귀남 듣기에는 영 못마땅하였다. 김일성이가 어디 온전히 저의 힘만으로 그런 짓을 했던가?
(평양부의 다섯살배기 소년 김형직(金亨稷)은 그 무렵 부내에 새로 열린 양과자집에서 과자 사 달라고 칭얼거리고 있었기에, 천만에 하나라도 하늘 같은 나랏님께서 아직 나오지도 않은 저의 아들 때문에 노심초사하고 있음을 알 리가 없었다.)
“지금은 우리가 천하 만방과 고루 수호하고 있다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가리라 보장할 수는 없소. 그런 나라에 흉적이 있어, 국내의 옳지 못한 마음 품은 자들과 작당하여 분란 일으킨다면 이를 그대의 당에서 막을 수 있겠소?”
물론 소련이니 중공이니 알 리 없는 – 얼마 전 공식으로 발족한 ‘청공(淸共)’이야 알지만 – 전봉준 듣기에는, 아무래도 인터내셔널을 통해 폭력혁명론이나 무정부주의 같은 것이 들어올까 성려를 기울이는 듯하였다.
헌데 그 부분에 미쳐서는 사실 딱히 생각한 적은 없는지라, 잠시 고민하게 되었다. 그런데 곧 다시 생각해보니, 고민한 적이 없는 이유가 명백하였다.
“이르신 것과 같이, 다른 나라에서 작정하고 아국이나 저희 당 안에 분란을 일으키려 한다면 이를 막기 어렵습니다. 허나 지금은 오히려 다른 나라에서 우리 당에서 배워가는 처지이니, 감히 아뢰건대 고심은 이르다 하겠습니다.”
조선의 공산당이 다른 나라에 귀감이 되고 있다는 말은 대원군 생전에도 종종 전해들었으니, 귀남 듣기에도 일리가 있었다.
그런데 그때 퍼뜩 떠오른 것이 있었다.
“그렇다면 조금 더 나아가, 지금의 형세를 타고 아예 다른 나라의 그 공산당 하는 이들도 딴생각 품지 않도록 잘 교화할 수 있지 않겠소?”
원 역사의 ‘빨갱이’들에게 이만하면 유쾌한 복수 아니겠는가? 물론 애초에 현생에서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두고 복수라 할 수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었지만, 그런 사정에까지 관심을 두어 깊게 궁구하는 귀남은 아니었다.
퇴궐하면서 전차 잡고서 집까지 머나먼 길을 갈 생각으로 심난해 하는 전봉준에게, 문득 뒤에서 말 거는 이 있었다.
돌아보니 어명 받들고 나온 젊은 승지라. 이르기를, 성상께서 가뜩이나 힘든 길 오가는데 고생이 많으니 돌아갈 때라도 자동차 타고 가라며 한 대 내어주었다 하였다.
“망극한 성은에 참으로 감사할 뿐이니 이를 아뢰어 전해주시오.”
“물론입니다, 영감.”
생각해보면 삼당 영수에게 벼슬이 없으면 특진관 제수하여 종종 입궐케 한 것도 벌써 여러 해라, 저 ‘영감’ 소리도 꽤 익숙했다. 딱히 무얼 한 것도 없는 듯한 자신이 종2품으로 대제학과 같은 급이라 하니 생각할 때마다 조금은 머쓱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매번 전차 타고 오가는 것도 고역이라 성은을 사양 없이 받들었다. 특히 요새는 사대문 안에 워낙 이런저런 국이니 양행이니 하는 건물이 늘어서, 해 저물 무렵인 지금은 성밖으로 나가는 것만 해도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물론 인력거나 자전거로 철도 아닌 그냥 길 역시 붐비기는 하지만, 그래도 만원 전차만 할까.
하여 여전히 낯선 – 최익현이라면 모를까, 저나 공산당이 자동차를 가까이 둘 이유는 아직 없었다 - 저 기물에 몸 맡기니, 푹신한 좌석에 한 번 놀라고, 의외로 빠른 속도에 두 번 놀랐다. (차 모는 무관 이르기를, 지난 번 대군의 그 일 이후로 친제하신 표어 네 글자 ‘안전운전’을 모두가 마음에 새긴다 하였다. 그렇다면 이전에는 얼마나 더 빨리 달렸다는 것인가?)
하지만 누가 그랬듯 사람은 적응하는 동물이라. 철교 지날 무렵에는 창 밖 감상 대신 앞서 성상 하유하신 바에 골몰하였다.
이제 대원군이 떠난 이후로 종실과의 연은 없어진 공산당이니, 귀남은 그저 조언을 할 뿐 당의 앞길 정하는 것은 전봉준의 몫이었다.
그러나 저의 입으로 인정한 것처럼 당이 지금까지 오는 데 있어서 은인에 해당하는 – 장인 마르크스가 들었더라면 당장 그날 밤 꿈에 현몽하여 어찌 된 내력인지 샅샅이 고하라 할 일이었다 – 분이 주상이기도 하고, 또 그 조언이 그럴듯하기도 하였으므로 퇴궐하는 내내 저 말을 실천할 방안이 있는가 고심하였다.
그리하여 돌아왔더니, 전에 저의 집에서 반 년쯤 묵다가 러시아로 돌아간 그 젊은이에게서 서간 한 통이 와 있다는 것 아닌가. 마지막으로 들었을 때는 한때 자신이 경일학당에서 했던 것처럼 배움터에서 장인어른 이론 공부하는 모임을 꾸렸느니 어쨌느니 했던 것 같았는데, 무슨 곡절로 또 간만에 글을 부쳤는가 싶어 아내가 다 읽자마자 빼앗아 보았다.
“허. 이거 좀 이상한데.”
“그렇지? 내가 보아도 갑자기 독일에 가 있던 이들 몇몇이 돌아온 후로 우리 제자만 떼어놓고 저들끼리 뭉쳤다는 게 수상하긴 한데. 어떻게 해야 할까?”
엘러노어 물음에 전봉준이 답했다.
“뭘 어떻게 해. 인터내셔널 이끄는 정당으로서 할 수 있는 지원은 해 주어야지. 더구나 이론에 있어서라면야, 할 말을 아끼는 것이야말로 조선 사람답지 않은 태도 아니겠어?”
조선 사람도 아니거니와 여전히 저의 남편 이론은 엉터리라며 (남편 앞에서만) 투덜대는 엘러노어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건 말건 전봉준은 서랍을 뒤져 곧장 펜과 종이를 꺼냈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 뒤덮인 것은 고작 하루아침 만의 일이었다.
“이렇게 배신당할 줄이야...”
“다 당신 때문입니다! 이 책임, 어떻게 질 겁니까?”
졸지에 당 전체가 몰락할 지도 모르는 위기를 몰고 온 셈이 된 겔판드(Israel L. Gelfand)의 넋두리에, 옆에 있던 마르토프가 발끈하여 매섭게 쏘아붙였다. 하지만 그 역시 목소리에 힘이 없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낸들 알았겠나? 그리고 이제 와서 탓한들 무슨 소용이고?”
“그게 당신이 할 소리입니까?”
독일 내에 러시아 사회주의 운동을 후원하는 세력이 있으며, 사회민주노동당을 통해 대규모 노동운동을 전개한다면 독일 내의 동지들이 자발적인 후원을 바탕으로 자금을 지원해주겠다는 것이 겔판드가 들고 온 전언이었다.
결론적으로 거짓말은 아니었다. 독일사민당이 아닌 독일민족당 당원들이 모은 것이었지만 어쨌든 자금은 자금이었으므로. 그렇기 때문에, 말이 러시아 전체의 모임이라지만 실제로 투쟁에 나섰던 경험은 별로 없던 – 그들 가운데서 쫓아낸 일린이 그나마 가장 경험 많은 축에 들었다 – 젊은이들은 열광하였다.
허나 이를 바탕으로 모임을 꾸리고, 민스크부터 예카테린부르크까지, 오데사부터 비보르크까지 공장이 세워진 곳이면 모두 지부까지 세워 체계적으로 투쟁을 진행해나갈 계획까지 벌써 세우고 있었는데 – 꿈은 크게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 그때 청천벽력같은 소리가 베를린에서 전해왔다.
자신들은 그저 유럽에 팽배한 자유주의와 경제적 방종을 경계하여 국제적으로 동지들을 모았을 뿐이었는데, 알고 보니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은 숫제 체제를 전복할 공산으로 암암리에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더라. 하여 급히 지원을 중단하였으니, 자신들의 결백을 알리고자 이렇게 공고한다 운운하면서 누명을 덮어씌우는 것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세상에 어떻게 이런 거짓말을 할 줄 알았겠나? 우리가 조선의 지령을 받았다고? 그렇게 거짓말을 해서 저들이 얻는 것이 어디 있다고?”
“이 혼란 자체가 목적이겠지요. 독일 놈들이야 러시아든 프랑스든 뒤흔들기를 원할 테니. 그리고 그 계획은 잘 들어맞았지 않습니까?”
당장 오늘 아침 오흐라나와 경찰들이 들이닥쳐, 저들이 상세하게 세웠던 투쟁 계획을 모조리 압수해갔다. 그들을 현장에서 체포하지는 않았지만, 과연 이 자유가 얼마나 갈까?
“너무 걱정들은 하지 마시오, ‘소수파(멘셰비키)’ 동지들.”
문 벌컥 열리면서 들어온 사람은 몇 주 전 그들 손으로 내쫓았던 울리야노프였다.
“조선의 지령까지는 아니고, 그저 선배들에게 조언 조금 구했을 뿐인데, 이것이 이렇게 엉뚱한 오해를 불러올지 누가 알았겠소? 불편을 끼친 점은 사과하지.”
“그 무슨 소리인가?”
평소에 하던 헛소리 – 농민들까지 끌어들여 동시에 사회주의로 나아가자는 것이 헛소리 아니면 무엇인가 – 만으로도 짜증이 날 텐데 이 시국에 찾아와 속을 긁으니, 겔판드와 마르토프 모두 눈빛에 날이 섰다.
“자세한 것은 이 새로 창간된 신문을 보면 알 수 있으니 앞으로도 애독해주기 바라오.”
『불씨(Iskra)』라는 제목을 단 신문을 책상 위에 올려둔 블라디미르 울리야노프는 그렇게 냉소 한 번 던진 뒤 도로 걸어 나갔다.
궁금해지는 것도 사실이라 급히 읽어보니 뒤집어질 만한 내용뿐이었다.
첫째로, 주요 도시의 노동자들을 포섭해 파업이나 기타 불법적인 투쟁을 벌이려는 계획은 당내 소수파들의 독단에 의한 것으로 러시아 내 사회주의 운동가들 전체의 의사와는 무관하다는 어처구니 없는 주장이 있었다.
둘째로, 러시아의 충실한 동맹국이자 벗인 조선과 긴밀한 연을 맺고 있는 것은 자신들 ‘다수파’이며, 저들 소수파는 오히려 조선 만민공산당에 반대하는 파벌이므로 독일에서 나온 소위 고백이란 일말의 진실도 없는 무고에 불과하다는 것이 있었으니, 저들 위해주는 척하면서 결국 자기네 세력에 이로운 소리를 늘어놓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러시아의 개혁과 발전은 ‘마르크스-전 노선’에 의해 담보된다는 밑도 끝도 없는 주장으로 논설을 끝마침으로써 황당함을 완성하는 듯하였다.
물론 이는 착각에 지나지 않았는데, 재무장관 세르게이 비테가 무슨 생각인지 ‘다수파’와의 면담을 추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뒤에야 더 황당한 일이 아직 남아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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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명 알렉산드르 파르부스(Alexander L. Parvus)로도 알려진 이스라엘 라자레비치 겔판드는 원 역사에서도 다분히 문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리투아니아 유대인 집안 출신으로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하였지만, 러시아의 미진한 경제적 발전 상황을 감안했을 때 혁명운동은 어렵다고 판단해 독일로 이주, 독일 사민당과 교류했습니다.
그러나 겔판드는 개인적으로 사치스러운 생활 습관을 가지고 있었고, 나중에는 콘스탄티노플에서 금융업에 뛰어들어 일약 거부로 출세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로 인해 동지들의 비판을 많이 받았고, 특히 한때 그와 연이 있던 레온 트로츠키는 ‘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부고’로 그를 통렬히 비난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겔판드는 여전히 (저 나름의) 사회주의 신념을 버리지는 않았고, 콘스탄티노플에 머물면서 독일과 접촉해 새로운 공작을 추진했는데, 독일의 지원을 받아 러시아 내 혁명을 추진한다는 전략이었습니다. 비록 레닌 본인은 독일의 지원을 받는 데 있어 상당히 부정적 – 여기에는 논란의 여지가 다소 있습니다 – 내지는 미온적이었지만, 결론적으로 이 공작은 성공해 러시아가 1차대전 후기에 협상국 대열에서 이탈하게 되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와 독일 정부 사이의 커넥션이 폭로되면서 그는 독일과 러시아 사회주의 세력으로부터 배척당했고, 베를린 근교의 별장에서 호의호식하다가 사망합니다. 작중에서는 원 역사보다 십수 년 앞서 독일에 이용당했고, 제2제국 패망으로 인해 곤경에 처했던 것과는 달리 독일 쪽의 토사구팽에 당하게 되었습니다.
김일성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그의 8대조가 전주에서 평양 근교로 이주한 이래 그의 집안은 대대로 평양에서 살아왔다고 합니다. 작중에서 엉뚱하게 등장한 김형직이 평양 주민으로 나오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원 역사의 『불씨(이스크라, ‘불꽃’으로도 옮기곤 합니다)』 지는 1900년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창간되었습니다. 이미 시베리아 생활을 한 번 한 뒤에 – 지난화에 지나가듯 언급된 나데즈다 크룹스카야와 결혼한 것도 유형생활 중이었습니다 – 탄압을 피해 독일로 이주한 레닌이 편집자로 활동하였지요. 독일과 영국, 스위스 등에서 발간되어 러시아 내로 밀반입되는 식으로 유통된 『불씨』 지는 1900년대 러시아의 지하 반체제운동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였지만, 레닌 본인은 노선갈등이 본격화되면서 1903년에 편집에서 손을 떼었고, 『불씨』의 간행은 멘셰비키 일파에게 넘어가게 됩니다. 멘셰비키와 볼셰비키의 정치적 입장이 뒤집힌 작중에서는 창간 과정도 상당히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