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232화 (232/320)

76. 하늘에 묻다 (3)

아무리 총통이라는 귀한 자리라지만 외간 남자 누워 있는 침소에 불러들임은, 그 흥선군이 생각하기에도 옳지 않은바, 대신 이 일로 또 한양에 오게 된 서세창을 대신 얼렀을 뿐 청국에 대해서도 대원군은 일본과 일시동인(一視同仁)하는 마음을 베풀었다.

겉으로 드러난 모양새는 그러므로, 나라의 큰어른 대원위 합하를 위문하러 온 이들이 살 날 얼마 남지 않은 위인의 마지막 마음 받들어 동양평화를 위한 큰 고민을 하는 것이라, 퍽 아름답고 그렇기에 더욱 중간에 관두고 나갈 수도 없는 형국이었다.

이만하면 얘깃거리는 확실히 만들어두고 가는 셈 아닌가?

“이러고서 정말 안 죽으면 그것도 그것대로 망신이겠구만.”

“서양의 선유(先儒) 소씨가 논증하기를 사람은 모두 죽는다 하였다니 너무 염려는 마십시오.”

“거기에 무슨 논증할 게 있다고 그랬다는가? 퍽 실없는 사람이로고.”

문안 오는 사람이 여럿 있는데, 그 중에서 이렇게 괴악한 농담 주고받을 사람은 얼마 없었다. 대부분은 쩔쩔매다가 무어라 얼버무리기 마련이요, 저만큼이나 늙은 아내 민씨나 아들 주상에게는 아무리 대원군이라지만 차마 그런 농담 던질 수 없으니, 끽해야 말동무해주는 김가진이나 여전히 그놈의 임기에 미련 남았는지 통 바쁜 김옥균 정도가 전부일 테다.

“그나저나, 이제 막 공공연하게 시작한 그 회담이 벌써 세간의 이야깃거리 되고 있답니다. 우리야 태후 전하나 그 대구보씨(오쿠보)를 알지만, 서양 나라들이 면밀히 우리 사정을 살피고 있으니 묘한 일입니다.”

“무에 묘할 것까지 있는가. 사람 마음이란 저의 산통 깨는 사람 있으면 다들 민감해지기 마련이네.”

우선은 모임 취지를 공동으로 밝히고 시작하였는데, 벌써 대서 여러 나라에서는 ‘한양 선언’이라 하여 떠들썩한 모양이었다.

김가진이 재밌는 그림이라며 가져온 대서 신보의 도평(만평)에는 꼬부랑 글씨로 ‘중국(Chine)’이라 쓰인 큼직한 서양 전병에 칼집이 나 있고, 그것을 둘러싸고서 아마 서태후인 듯한 만주 여인 하나, 갓 쓴 선비 하나, 그리고 왜상투 튼 일본인 하나 – 양복 차림새를 맵시있다 여기는 김옥균과 오쿠보는 억울할 것이다 – 가 머리 맞대고 있었다.

그 뒤에는 여러 코쟁이들이 요란법석을 떨고 있는데, 아마 법국 신보라 그런지 유독 체통없게 두 팔 벌리고 난리치는 사람이 곧 덕국 황제요. 그 주변에 늘어선 것은 영국의 늙은 여왕 – 대원군 본인보다 한 살 위라 했던가 – 과 아라사의 젊은 사황(차르) 등등이었다.

“청국이 언뜻 보기에 쇠미하여 조만간 여러 성으로 쪼개질 듯하니, 이번에는 바다 건너의 오호(五胡)가 어떻게 그 땅을 열여섯 조각을 낼까 고민하고 있었던 모양이지,”

“다들 그랬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덕국은 그리 욕심을 낸 것이 맞다고 합니다. 허나 그 나라 안에서도 비율빈의 섬 하나를 빌림으로 만족하자는 파당과 기세를 몰아 더 나아가자는 파당으로 국론 나뉘어 어지럽다 하니, 이제 이렇게 우리 삼국이 뜻 모은바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실 뜻 모은 것은 대원군에게 팔 비틀린 것이요, 최대한 바다 건너 사정에 엮이지 않으려 하는 일본과 남은 자존심 지켜가며 최대한 조·일의 참여를 이끌어내려는 청국의 밀고 당기는 다툼으로 말미암아 약조의 절목을 정함에 있어 아직도 갈 길이 멀었지만, 그 요체는 그럭저럭 드러나 있었다.

그 땅 안에 서양 나라 군대를 더는 들이지 않고 혹 다툼이 생기면 그 안에서 해결하겠다는 결의였으니, 겉으로 드러내기로는 천하의 평화를 위함이라지만 그 실제 뜻은 여럿이 있었다.

바깥 군대를 ‘어지간하면 들이지 말자’ 정도로 저들끼리 합의하는 것이지, 서양 나라에게 경고한다던가 하는 형태는 아니요, 동맹처럼 구체적인 약조에는 한참 미치지 못하였지만, 조선 하나로도 유럽의 어지간한 국가만큼의 군대를 그러모을 수 있었으므로 속세의 때가 많이 묻은 양인들 마음에도 그 선의가 진솔히 울렸다.

더구나 그러면서도 저들끼리 싸우지 않겠다는 이야기나 바깥으로 군대를 보내지 않겠다는 이야기까지는 하지 않았으므로, 균세(均勢)를 위해서 부득불 그 안에서 이미 있는 동맹국을 계속 부둥켜 안고 갈 수밖에 없었다. (오쿠보 도시미치가 착안한 점도 여기에 있었다.)

(최근 산동에 투자할 방법을 많이 알아보고 있다는 덕국에 대해서는 지극히 환영하며, 멀리서 온 벗을 환영하는 마음으로 보내주는 모든 것을 고맙게 받을 테니 겸양하지 말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그보다 얼른 난초를 쳐야 할 텐데, 팔이 이 모양이라 곤란하군그래.”

대원군 나이가 얼마인데, 손 떨린 것이 어제오늘 일이겠는가? 그러나 오세창이 남긴 그 말 때문에 신경이 쓰여서인가, 평소 치던 난초 그림이 저의 눈에도 영 변변치 못했다. 그럴수록 늙은이 고집에 자격지심이 겹쳤으나, 한 번 흐트러진 마음이 돌아오지 않아 치는 이파리는 족족 시들고 바위는 그리는 족족 녹아내렸다.

“소관이 도울 일이라도 더 있을지요?”

“되었네. 공안서 총관씩이나 되는 사람을 종으로 부려서야 쓰겠나. 그 공안서 위엄도 따지고 보면 익문사에서 나온 것이요, 익문사는 이 사람 아래에 있던 천하장안 네 사람이 세운 것이니 따지고 보면 내 얼굴에 침 뱉는 격일세.”

아마 그가 떠난 뒤에도 김가진이 잘 해줄 것이다. 처음 며느리 민씨와 김가진 두 사람이 경합하는 모양새가 되었을 때는 잠시 걱정도 하였으나, 저의 재주 달림을 깨달은 중전이 먼저 한 발 물러난바, 어지간한 분란으로는 공안서가 갈라지거나 하지는 않을 테다.

“만에 하나, 내가 제대로 된 그림 한 폭을 남기지 못하고 가면, 자네가 위창(葦滄, 오세창) 그 사람에게 이야기해서 예휘각에 비장된 것 중 적당히 좋은 것으로 해서 대구보에게 전해주라 하게나.”

그리고 그만한 분란이 일어난다면야, 아들이 알아서 해주지 않겠는가.

아들 주상을 생각하니 문득 한 가지가 더 떠올라 당부에 덧붙였다.

“그리고 고를 때 신유년(1861)에 친 난은 빼놓고 고르라 하게.”

신유년이라면 곧 아들 녀석이 이상하게 철이 들어서, 무슨 바람 불었는지 제게 군밤을 바쳤던 해다. 그때의 그 밤이야 맛 좋다 하는 것 외에 별 기억은 없다만, 그 맛 혀에 감도는 동안 쳤던 난이야 따로 팔거나 넘기지 않았은즉 고스란히 예휘각에 있을 터였다.

“예, 합하.”

아무리 늙은이 말동무 해준다며 농담도 던진다지만, 물어야 할 때와 묻지 말아야 할 때를 가리는 정도는 잊지 않은 김가진이 군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김가진 나간 뒤에도 종이는 여전히 허옇고 먹물은 붓에만 머물렀다.

그의 난에서 풍격이 바뀌었다 하면, 역시 그 계기로 떠오르는 것은 계해년 전후였다. 그때를 즈음하여 파락호 흥선군에서 임금의 생부가 되어, 그토록 그리던 대계를 이루고 마음껏 권력에 취하였다.

아마 그로 말미암아, 쓸개 핥는 구천(句踐) 심정으로 지금은 장동 김문에 검은 난초를 넘겨주지만 후에는 반드시 검은 탕약을 먹이리라 다짐하였을 적 그 비분강개한 심사가 풀려서 절로 기백도 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하였다. (그 다짐이 김옥균과 김가진이 관아에서 야근할 때 절로 이루어지리라는 것은 꿈에도 몰랐다.)

허나 시문과 그림을 두고 다른 사람에게는 허풍 떨지언정 저에게는 거짓 말하지 않을 오세창이 말하기를 뒤로 갈수록 기백 쇠하였다 하니, 계해년에 바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가랑비에 옷 젖듯 서서히 빠진 것일 테다.

그렇다면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머슴 노릇하는 말쑥한 젊은이가 – 요새 개화풍 중 하나였다 - 문 두드려 잡상에서 나왔는데, 이르기를 총리대감 오셨다 하였다.

“허, 장동 김문으로 시작하여 장동 김문으로 끝나는가.”

자주 드나드는 사람 김가진도 어쨌든 장동 김문이니, 하옥대감 김좌근 대부터 죽 내려와 삼대와 함께하는 연이로구나 할 만도 했다. 듣지 못했는지, 아니면 알아듣지 못했는지 별 말 없이 본론을 꺼냈다.

“문안을 겸해 감사의 말씀을 올리고자 찾아왔습니다. 본디 총리로서 제가 해야 할 일 아니었겠습니까? 물론 예조의 관할이기는 하나, 그렇다 하여도 결국 제가 진작 손을 대었어야 하였습니다.”

“알면 되었네.”

지루하게 밀고 당기던 임기 문제는 대원군으로 인해 갑자기 물벼락 맞은 셈이 되었다. 그 사이 생각해보니 확실히 저의 실책이 적지 않았던 것이라. 감사하다 함은 나라 사이 수호(修好)를 지켜준 것에 대함만은 아닐 테다.

“그러잖아도 한 번쯤 왔으면 하고 있었네.”

“미련하여 대원위께서 그러하신 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미련하다니. 그것을 꿰뚫어 보았으면 격벽투시(隔壁透視)에 관심(觀心)할 줄 아는 것이니 그게 괴력난신이지 무언가.

좌우지간, 던지려는 물음이 있네.”

“하문하십시오.”

“내 지금 난을 치려 이리 문방사우를 늘어놓고 있었다네. 그런데 난초가 말이야... 자손 번창하는 뜻이 있다는 속설이 있지. 자네가 보기에 금상은 어떠한가?”

“금상께서는...”

문득 훅 들어오는 물음에 답이 나오다 말았다. 아마 영상 노릇하면서 정말 가까이서 모시고 함께 나랏일 살피기 전이라면 이야기가 곧장 나왔을 테지만, 알아갈수록 보이는 것이 달라졌다.

한참 고민 끝에 내놓은 답은 이러하였다.

“성인(聖人)을 닮으신 범인(凡人)이시라 하겠습니다.”

“신하된 이가 퍽 무엄하군그래.”

“물으시니 답하였습니다.”

“그래, 사사롭게는 피로 이어지신 분을 범인이라 헐뜯음은 어째서인가?”

“간혹 범상치 않은 발상을 친히 내놓으시나 치밀한 계교는 없으니 범(凡)이요, 굳센 뜻은 있으나 이를 꾸준한 방책으로 만들어 이어가지 못하니 이 또한 범이요, 사람을 믿고 맡기시되 사사로운 정에 얽매여 내치지시는 못하시니 또 한 가지 범입니다.”

아마 자신이 금방 떠나리라 여기고서, 진솔한 답을 원한다 여기고 또 그리 털어놓아도 혹 후환은 없을 것을 알기에 이리 토로하였으리라.

“그러면 지금 아국이 이리 성세 이룬 것은 무엇에 말미암음인가?”

“성덕으로 인하여 위아래로 돈독한 신의가 있고 또 여러 인재가 있어 보필에 부족함이 없었으니 이것이 그나마 답이라 할 수 있지 않을지요. 그 이상은 하늘에 물을 일이라 하겠습니다.”

“말은 잘 하는군.”

“일국의 영상 아니겠습니까.”

하등 겸양 없이 대꾸가 오갔다.

“그래, 무엄한 말을 하게 시킨 것은 자네 말마따나 이 사람이니 더 묻지는 않겠네. 다만 이것은 청하고자 하네. 자네 말처럼 성상께서는 일국을 이끄시는 분으로서 흠결이 없지 않으시지. 허나 그것 아는가? 흠결 없다고 여기는 것만한 흠결이 없네. 자네나 나나, 모두 누가 꼬집기 전에는 도통 머리로는 알아도 실제로는 경계할 수 없는 그런 흠결이지.”

“그렇지만 그 외에도 흠이 훨씬 많은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주상은 성심으로 받들더라도 다른 이들 중 옥석을 가리는 것은 신하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 아니겠습니까?”

“그야 그럴지도 모르지. 자네야 이름자부터 옥이니 뭐. 헌데 반대로 옥을 아무나 품을 수 있다고 여기는가? 옥이 돌을 가려내는 것은 쉬워도 돌이 옥을 저의 가까이에 둠은 쉽지 않은 일이야. 반드시 쳐내거나, 옥을 더렵혀 돌보다 못하게 만들고자 하기 마련이지.

그러니 잊지 말아주게. 자네가 금상을 보필함은 자네에게도 중한 일일세. 꼭 지금처럼 곁에서 모실 것까지야 없겠지만, 적어도 다른 궁리하며 바라는 바가 상하간에 어긋나게는 하지 말게나.”

결국 그렇게 분위기 잡아두고서 하는 말이 자식 부탁이라는 말인가. 대원군 스스로 살짝 웃음이 나왔다.

아마 김옥균 본인도 완전히는 아니어도 일말의 감은 가지고 있을 테다. 그러니 스스로 욕심에 마음 쏠려 다 늙은 사람보다 먼저 손 쓰지 못함을 죄송하고 스스로 부끄럽게 여겨 이곳까지 밤늦게 온 것 아니겠는가.

“예, 합하. 마음에 깊이 담도록 하겠습니다.”

김옥균이 고개 숙이는데 뭔가가 떠올랐다.

“허.”

“합하?”

“아닐세. 문득 깨달은 것이 있어서. 좌우지간 내 설령 이번에 병석 털고 일어나더라도 또 얼마나 가겠는가. 이것을 고별 삼아 부디 마음에 새기기를 재차 당부할 뿐이네.”

김옥균 나선 뒤에 사람 다시 불러, 진작에 말라붙은 먹물을 새로 갈아오라 하였다. 그사이 백지를 보면서 또 생각에 잠긴다.

“허, 범(凡)이라.”

그것이 범상함이라면 대원군 자신이나 김옥균이나 확실히 범상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또 생각해보면, 강산 바뀌는 사이에 저도 바뀌어, 모난 곳 깎이고 한은 풀렸다.

그 뒤의 저는, 평생 원수 될 줄 알았던 장동 김문도, 그 다음 정적 될 줄 알았던 박규수도 뒤로 한 저는 과연 범상치 않은 사람이었는가?

‘그래도 앞뒤 가리지 않고 날뛰는 그 교만함은 사라졌으니 또 화는 안 당하지 않았는가.’

대신 마지막까지 아들 걱정이나 하면서 아들을 귀히 생각하면서도 모자라게 여기는 자에게 부탁하였다.

어느 쪽이 더 좋았는가, 생각하면 난초 치는 데서는 그 옛날 천하장안 모두 거느리고 인정 친 밤거리 활보하던 흥선군이 더 좋았다. 하지만 짜릿한 멋을 제쳐두고 생각하면, 어느 쪽이 더 복락에 가까웠는가. 저는 아들이 고마운가? 아니면 아들이 제게 고마워해야 할 것인가?

‘하늘에 물을 일이로다.’

아니, 사실 구차히 하늘을 끌어들일 것도 없다. 머리는 몰라도 나머지 몸은 – 정확히는 기력 남아있는 허리 위만이겠지만 – 알고 있으니, 손이 움직이고 눈이 뒤따른다.

곧 일필휘지로 저어, 번질 것은 번지고 머물 것은 머무는데, 드러나는 모양새 볼작시면 뾰족한 것과 뭉툭한 것이 공히 있으되 난초도 아니요 바위도 아닌 군밤이었다.

저의 마지막이 인구에 회자될 것 같으면, 마지막 그림도 필히 그러할 터. 그것을 남 주기는 아깝지 않은가. 물론 난초라고 받았는데 군밤이었을 때 대구보의 얼굴도 궁금은 하였지만.

“게 있느냐.”

지키는 사람 불러 곧 치우라 하였는데, 문득 주상이 한 번 더 보고 싶어졌다. 이왕이면 직접 그림을 넘겨줌이 좋지 않겠는가.

“거 궁에 기별을...”

그러나 다 큰 주상 눈물 흘릴 일 만들어서 좋을 것 없겠다 싶어 곧장 단념하였다.

“아니, 되었느니라.”

“예, 마님.”

공손히 고개 숙이고서 전깃불 끄고 나가니 휘영청 보름달만 밝았다.

그래도 한 폭 그림은 남겼으니 보람차다 생각하며, 이하응은 눈을 감았다.

늙은이 잠자리답지 않게 뒤척임 없이 곧 새근새근 들숨과 날숨이 이어지다가, 동틀 즈음 누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멎었다.

--- *** ---

원 역사의 대원군은 1898년 2월 사망합니다. 한 달 전 죽은 부인 여흥부대부인 민씨의 뒤를 이어, 운현궁에서 숨을 거두지요.

그러나 그때 대원군과 고종의 사이는 돌이킬 수 없이 망가진 뒤였습니다. 을미사변에 대원군이 간접적으로 관여했으리라 여겼던 것인지 – 실제로 당시에 많은 이들이 의심하였으며, 정황도 없지는 않습니다 – 을미사변 직후 궁으로 소환되기도 했고, 아관파천 후에는 한동안 양주에 은거하기도 했습니다.

작중에서도 고종은 대원군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유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김가진이 어설프게 인용한 것은 논리학 교재에 흔히 나오는 삼단논법의 예제, “모든 인간은 죽는다 /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다 /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입니다. 이미 3세기 논리학 교재(섹스투스 엠피리쿠스의 『회의주의 개론 Pyrrhōneioi hypotypōseis』에도 원형이 등장할 만큼 유명한 예제인데, 중세까지만 해도 ‘죽는다’ 대신 ‘동물이다’가 들어가 있던 것이 1843년 존 스튜어트 밀의 저서에서 처음 ‘죽는다’로 바뀌어 등장합니다. (개인적인 추측입니다만, 소크라테스에 대한 밀의 학창시절 감정이 담긴 것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글 서두에 언급되는 만평은, 중국의 반식민지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그림(‘왕과 황제들의 케익’Le gâteau des Rois et... des Empereurs)으로 1898년 프랑스 신문 『르프티주르날』 - 전에도 작중에서 몇 번 언급되었습니다 – 에 실렸습니다. 중국의 분할과 이를 둘러싼 열강의 각축을 보여주는 유명한 만평이지요. 본디 그림에서는 빅토리아 여왕과 빌헬름 2세, 니콜라이 2세와 그 뒤의 마리안느(프랑스의 의인화), 일본이 중국이라는 케익을 나누어먹으려 신경전을 벌이고, 이홍장이 뒤에서 팔을 높게 들면서 의미 없는 반대를 하는 구도였는데, 여기서는 인물 여럿이 추가되고 케익 앞과 뒤가 바뀌었습니다.

이 사건을 촉발케 한 것은 1897년 독일의 교주만(膠州灣, Kiautschou) 점령이었습니다. 한창 고조되던 반기독교 정서로 인해 – 앞서 의화단 에피소드에서 나왔던 것처럼, 산동은 가장 반기독교·반외세 정서가 심했던 곳에 들었습니다 – 독일인 신부 둘이 살해당하자(거야교안鋸野敎案) 이를 빌미로 바로 교주만을 점령한 것이지요.

이는 이미 러시아의 뤼순 조차, 청일전쟁 후의 삼국간섭 등으로 가열되기 시작한 중국에서의 영향력 각축을 가속시켰고, 프랑스, 영국 등도 해안에 추가로 조차지를 얻어내게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결정타는 역시 의화단 운동이었지요.

독일의 교주만 점령은 한편으로는 점차 커져가는 위신에 대한 요구와 이미 대중국 수출에서 영국 뒤를 바짝 추격하게 된 경제적 유인에 따른 것이었지만, 독일의 고질병인 군사적 확장주의가 또한 크게 작용했습니다.

독일 제국해군의 사실상 시작과 끝을 함께한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Alfred Peter Friedrich von Tirpitz) 제독을 비롯해 해군의 주요 인사들, 그리고 여러 이해관계자들은 영국을 누르고 세계 패권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 해군의 육성을 강력히 내세웠습니다. 하지만 지정학적으로 보아도 당장 불리한 위치에 있는 독일이 영국을 해군으로 압도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지요.

그에 대한 대책으로 제시된 것이 아시아에 대한 영향력 투사였습니다. 중국에서 말라카를 지나 인도와 이집트로 이어지는 아시아 항로를 제압할 수 있다면, 승산이 적은 북해에서의 대결보다 훨씬 승산이 있고, 영국을 압박함으로써 장차 벌어질 전쟁에서 쉽게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실제로 독일은 1896년 카티푸난의 봉기로 독립투쟁이 시작된 필리핀의 점령과 해군기지 설치도 고려했고, 이것이 무위로 돌아갈 무렵 거야교안이 일어나자 교주만을 공격하게 됩니다.

다만 작중에서는 원 역사의 제국해군이 영국의 동양항로를 차단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입지로 간주했던 필리핀이 먼저 독일에게 열릴 기미를 보이고 있고, 이로 인해 확장주의 진영 안에 균열이 발생했습니다.

독일은 교주만을 그전까지 차지하였던 동·서아프리카나 서태평양의 섬들과는 달리 ‘제대로 된’ 식민지로서 문명화된 세계 패권국으로서 자신의 지위를 보이기 위한 모범으로 기획하였습니다. 그러한 기도가 그렇게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지만, 적어도 현지에 세운 맥주 생산설비가 고스란히 칭다오 맥주로 이어지게 되었으니 사소한 공마저도 전무하였던 것은 아니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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