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230화 (230/320)

76. 하늘에 묻다 (1)

정유년에서 무술년 넘어가는 겨울은 그렇게까지 매섭지는 않았는데, 오히려 그 어중간한 추위로 인하여 몸 약한 사람들이 방심하고 보중(保重)하기를 경솔히 한 탓인지 유독 상사(喪事) 많았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나라의 근래 사정에 긴밀히 엮인 영초대감 김병학이, 가볍게 고뿔만 조금 앓다가 갑자기 자는듯 숨 거둔 것도 그 무렵이었다. 나이 일흔 하고도 다시 일곱으로 천수(天壽) 다하였다 해도 할 말 없는 일이나, 사람 욕심이란 것이 동방삭마냥 삼천갑자를 살아도 저의 명줄 다할 때는 아쉽기 마련.

바깥에서야 그 집안에 허물 많다 떠든다지만, 그런 시선 따위 신경쓰지 않는 동생 김병국은, 이왕 장수한 것 조금만 더 오래 살다 가지 무얼 혼자 먼저 가느냐며 꺼이꺼이 통곡하였다.

“거 우리 연도 참 오래 되었군. 그렇지 않은가. 자, 한 잔 들게. 늙은 사람 눈물 보여 좋을 것 없네.”

대원군은 김병학과 동갑이니, 저 혼자만 재밌는 농담으로 이제 천하장안 네 사람이 먼저 가서 다져놓았을 저승 밑천을 직접 가서 제 것으로 삼기만 하면 된다 떠들곤 하였다. 그런데 잔병치레가 확 끊겨 이리 멀쩡히 문상을 오고 반대로 아내 민씨가 앓아누운바, 김병국 슬픔이 남의 일 같지만은 않았다.

허나 근래 드문 호상임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으니, 어찌 슬픔에만 빠져 있겠는가? 계해년 환국만 하여도 금방 무너질 듯한 집안이요, 그 무너짐에 김병학과 그 동생의 책임도 적잖이 있었건만, 어떻게 기회 얻어 바다 건너 유람을 한 번 다녀온 이래 가세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그 아래 대에 이르러서는 영상 자리까지 도로 얻었으니, 비록 일신이 광영을 크게 누리지는 못했다 하나 전후 살피면 누구 부럽잖은 삶이었다.

“대원위 이르심이 맞습니다, 영감. 비록 좋지만은 않은 일이라 하나, 또 슬픔이 지나치면 몸에 좋지 않은즉 부디 살피시지요.”

아무리 나라의 예법이 크게 바뀌고, 근본 없는 집안들은 이왕 근본 없다는 소리 들을 것이면 새로 저들 예법 만들겠다며 서양의 예를 많이들 본받는다지만 – 당장 안인수가 몇 해 전 작고하였을 때도 그랬다 – 명문 벌열은 오히려 자존심 때문에라도 고루하다는 소리 감수하고 옛날 하던 대로 죽 하기 마련이었다.

그리하여 조문하는 무리 대접하는 것부터 빈소 차린 것까지, 모든 것이 문정공(김상헌) 보기에도 부끄럽잖게 옛 도리 지켰으니, 명문대가 체통 맞추어 준비한바 멋모르는 서양인은 무슨 축제라도 열리는 줄 알 법하였다.

이때를 맞이하여 옛 사람들이 모두 모였으니, 대원군 이하응도 있고, 역시 흰머리에 얼굴 자글자글해진 오경석과 유홍기도 있었다.

허나 저의 사람됨이 어떻든 형만은 지극히 생각하던 김병국 슬픔이 쉽게 달래지지는 않아, 몇 번 더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술기운으로 그 슬픔을 억누르자 하였는데, 세상 일이 늘 그렇듯 뜻대로 풀리지는 않아 대원군이 먼저 만취하였다.

하여 잠시 측간 다녀올 요량으로 몸 일으켜 – 운현궁 한 구석에 양옥 올린 저에게는 새삼스레 낯선, 고릿적 측간이었다 – 다녀오는데, 일 보고 나오는 길에 문득 바람이 퍽 차다는 느낌이 들더니, 갑자기 하늘이 한 바퀴 핑 돌았다.

어, 어 하는 사이 저의 정수리 위에 있어야 할 하늘이 눈앞에 놓였고, 주변이 갑자기 시끌시끌해졌은즉 비로소 자신이 쓰러졌음을 깨달았다.

‘뭐, 이런 것 가지고서 호들갑이냐’ 하려 하였는데, 말이 제대로 나오지는 않았다.

어쨌든 발은 측간 안쪽에 걸치고서 하늘 보고 쓰러진 셈이니, 이대로 숨 거두면 그것은 그것대로 뜻 깊은 것이라 엉뚱한 흐뭇함이 머릿속을 스쳤다. 저쯤 되는 사람이라면 갈 때 이야깃거리는 남겨야 하지 않겠는가.

다만 남의 상갓집에 와서는 응당 쏠려야 할 관심을 자신이 모두 가져가게 되었으니 나중에 영초 만나면 ‘삼세번이라 하였으니 아직은 별로 미안하지 않네’라 해야 할까 실없는 생각도 문득 들었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아쉬움, 미안함이 뒤늦게 찾아왔다.

“합하, 합하!”

“아이고, 아이고! 이 어찌 된... 의생, 의생을 불러라, 어서!”

유홍기와 오경석이 달려와 하나는 저를 일으키려 하고 다른 하나는 머뭇대는 주변 사람들을 다그치는데, 그제야 혀에 힘이 돌아왔다.

“주상...”

“합하?”

“주상이 보고 싶구려.”

그런데 사람 명줄이 질긴 덕에 도저히 끊기지는 않으니, 정사 폐하고서 성상 달려오도록 만든 것이 되려 민망할 지경이었다. 아들 주상의 효성과 군밤, 그리고 내의원의 용한 처방 등등으로 말미암아 몸에 곧장 기력이 돌아왔는데, 늙어서 그런가 돌아오는 것도 통(通)과 불통(不通) 갈림이 명백해, 손떨림은 잦아들었으나 단전 아래로는 그 기력이 통하지 아니하였다.

하여 병상에서 몸은 일으킬 수 있으되 그뿐이어서, 온갖 요란 떤 것이 무색하게 심심하였다. 김병학이 좋아하던 박씨인가 방씨인가 하는 서양 악사는 숨 끊어지기 전까지 계속 악곡을 지었다는데, 퍽 끊어지지 않는 목숨 지닌 저는 어찌할까. 난초를 치든 글씨를 쓰든 해야 하지 않겠는가 싶었다.

그리하여 오늘은 붓 들어 휘갈기기를,

‘해 이어가도 죽지 않으니 목숨은 어디서 멎는고 (延年不死 壽何所止)’

라 하였으니, 갈 때 되면 가는 것이라 여길지언정 실제로 간다 하면 온갖 난리는 다 칠 아들 주상이 보면 기겁할 굴원(屈原)의 시구라.

문상하던 이가 도로 병문안 당하게 된 이래, 종종 그 아비 대신해 찾아오는 오세창이 감상하고서는 말했다.

“이토록 초연하시니 어찌 범인의 기개라 하겠습니까?”

“자네, 신보 채사한다는 사람이 그렇게 낯빛 못 숨겨서 되겠는가.”

서예와 그림 즐기는 사람으로서의 오세창은 정사를 묻고 듣는 그 오세창과는 다른 이여서 낯이 그리 두껍지 못했는데, 대원군도 이를 잘 알고서 놀리는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내 들킨 것이 자못 민망하여 오세창이 얼굴을 붉혔다.

“늙은이 말동무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인데, 어디 아첨하는 말을 강요하겠는가. 허심탄회하게 말해보게.”

“그것이... 실은 아라사 공사와 함께 예휘각에 소장할 합하의 서화를 죽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워낙 베베르 그 젊은이 –이젠 중늙은이가 다 되었지만 – 가 저의 그림과 글을 좋아하기에 종종 보내주곤 하였고, 또 예휘각 세운다 하였을 때 기증하거나 새로 그려준 것도 있었다. 그러므로 언제고 정리는 해야 할 것이었는데, 어쩌다 그때가 지금인 모양이었다.

“헌데 근래로 올수록... 흠흠...”

“별로다? 거 안타깝구만. 나름대로 만년에 화풍 바꿔보겠다고 유구국 풍광도 그리고 하였는데.”

사실 별로 안타깝지는 않았지만, 궁금하기는 하였다.

“무엇이 부족하던가? 내 가기 전에 걸작 하나쯤은 남겨놓고 가고픈데, 이 기회에 한 번 말해보게. 성현 말씀마따나 과즉물탄개(過則勿憚改) 아니겠는가?”

“뭐라 해야 할지 함부로 말씀 올릴 수는 없으나... 그, 기백이라 해야 할는지요. 그것이 뒤로 갈수록 부족하다 하겠습니다.”

눈 질끈 감았다 뜬 오세창이 이실직고하였다.

기백이 부족하다? 어찌하여 그리 되었는가 영 이해는 되지 않아, 그가 물러간 뒤에도 계속 고민하는 대원군이었다.

그 다음으로 김가진이 문안하러 들어왔을 때도 계속 그 고민을 하느라 – 그만한 나이쯤 되었으면 한참 젊은 것들 떠들 때 딴생각할 권한 정도는 있지 않은가 – 집중하지 않고 있었다.

“... 하여 끝내 참의원에 의사를 묻기로 하였는데, 아직은 두고 볼 일이라 합니다.”

“그런가.”

노환에 해로울 수 있다는 의생 말을 듣고서, 운현궁 대문 안에 신보나 여타 대원군 심사 놀래킬 만한 물건은 일체 들이지 말라는 지엄한 하교가 있었으니, 그 효심 뭉클하기는 하나 늘그막 적적한 대원군의 소일에는 도움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뜻이 있는 곳에 길 내는 것은 – 남들을 족치든 갈구든 하여 – 대원군 본연의 장기라. 김가진을 충동질하여 이렇게 시사를 듣곤 하였는데, 자신이 청하여 자칫 무엄한 일이 될 수 있음에도 이렇게 상세히 고하는 바깥 사정을 한 귀로 흘리니 노인의 변덕이라 해야 할 것이다.

“개화당에서는 영상이 두 해는 더 집권할 만큼 공을 세우지 않았느냐 하고, 그렇다 해도 없는 법을 지금에 와 만들어서는 아니 된다고 자유당에서는 반대하니, 옳고 그름을 두고 여전히 첨예히 다투고 있습니다.”

어느새 김옥균의 임기도 끝을 향하고 있었는데, 지재와는 별개로 욕심은 많은 김옥균이었기에 아랫사람에게 지시하여 발의하기를, 공산당 민태호가 사직하여 참의대부 추거와 총리대신 추거가 서로 때 어긋나게 되었은즉, 이를 고치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임기는 두 해를 늘려 다시 추거의 때를 맞추자 하였다.

이것이 도의에 크게 잘못된 일이라면 반드시 다음 추거에서 패할 것이므로 무슨 문제가 있겠느냐 하였지만, 저들이 김옥균 없으면 아직 딱히 내세울 사람 없음-물론 여기에 있어서는 다른 두 당도 처지가 그리 다르지만은 않았지만-을 아는 자유당과 공산당에서 보기에는 억지 주장이요 남은 두 해 동안 개화당 아래에서 다른 총리감을 물색하겠다는 심산이라.

하여 김가진 말마따나 크게 다투고 있었는데, 애초 그렇게 권세 있는 사람끼리 다투도록 하게끔 이 나라의 국헌을 주상과 함께 정한 것이 대원군이었은즉 딱히 심란한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바깥 소식은 또 있는가?”

그제야 잠시 김가진에게 마음 돌린 대원군이 물었다.

“공안서에서 확인하기를, 덕의지국의 동향이 심상치 않다 합니다.”

“덕의지국이?”

“그렇습니다, 합하. 비율빈에 저들의 수영 둘 땅을 얻어내려 협상을 함에 이어서, 이제는 산동에서도 비슷한 땅을 알아보고 있다고 합니다. 저들이 아무리 은밀히 움직이려 한들, 생김새가 다르니 얼마나 감출 수 있겠습니까.

예조와 공안서에서 함께 살펴서 중지(衆智)를 모아보니, 헤아린 바는 이와 같았습니다. 근래 일본국 추거에서도 영길리보다는 조선과 가까이 지냄이 마땅하다 하는 애국공당이 신승(辛勝)이라 하나 집정하여 옛 장군이 다시 그 나라의 권병을 잡게 되었으니, 영국은 자못 이를 근심하고, 덕의지국이 대신 나서서 영국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아주에서 저들의 힘을 키우려 하는 것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청국에서도 썩 기껍게 여기지는 않겠군그래.”

“그러나 지금 정난한 지가 오래지 않아 여러 대서 나라들의 눈이 쏠리고 있은즉, 먼저 나서서 덕의지를 막기도, 그들과 협상하기도 곤란한 듯합니다.”

“그러면 눈을 피해서 오면 될 일 아닌가?”

초나라 사람 글을 썼더니 졸지에 오기(吳起)가 되는 것인가.

“뭐, 늙은 사람이 이렇게라도 쓰임새가 있어야 하겠지. 한 번 자네가 적당히 둘러대면서 제의해보게.”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이 늙은이 입으로 직접 말하기는 무엇하지만, 나 정도 되면 청국과 일본국에서 병문안 올 정도는 되지 않겠는가?”

대청 공화정부가 언제까지 그 ‘공화’라는 이름을 이어갈 수는 없고, 각 성이 자치를 모두 이룰 때까지 그 위를 비워둘 수도 없는 고로, 우선은 임시로 총통을 세우게 되었다. 또한 총통이 있으면 그가 거느릴 조정, 아니, 정부가 있어야 하고, 사람이 일하려면 관직으로서의 자리뿐 아니라 실제로 앉아 일할 자리도 있어야 하므로, 청사를 새로 두어야 할 터였다.

황제가 멀쩡히 있으니 자금성을 차지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자금성 안에 세들어 살기도 무엇하며, 어지간한 관청들은 자금성 근방에 몰려 있는 판에 새로 터를 잡기도 곤란하였다. 그때 황제 자이티얀이 기꺼이 북·중·남 삼해(三海)의 별궁을 내어주어, 총통부로 삼게 되었다.

“새 단장이 잘 되어가는 듯하구려.”

정난(靖難) 이후 종실에 나날이 찾아오던 풍랑은 간만에 잦아들고, 한가로움을 되찾은바 본인 표현으로 ‘옆집’ 공사가 어찌 되어가고 있는가 궁금하여 찾아온 자이티얀이 가볍게 운을 떼었다.

“모두 황상의 은덕입니다.”

둘러보는 황제를 수행하여 옆을 함께 걷던 임시 총통이 고개 꾸벅 숙이며 공손히 받았다.

“무얼, 경사의 어디를 둘러보아도 금궁 바깥에서 나랏일 다루기에 이만한 자리가 또 없지 않소. 그나저나 그리 시일이 짧지 않았는데, 적어도 이곳은 치장하기를 마쳤으니 보기 좋소.”

무심코 자이티얀의 눈이, 공화정부 요인들의 초상을 걸어둔 벽에 가 닿았다. 정확히는 그 중 맨 위에 있는 총통, 더 정확히는 총통 초상 아래의 이름에 닿았다.

“처음 보았을 때, 황은의 무거움에 눈물 흐름을 알지 못했습니다.”

총통 예허나라 힝전(葉赫那拉 杏貞).

기실 권위는 높아도 실권은 없는 자리가 지금의 총통 자리였다. ‘제대로 추거 치를 때까지’라는 단서가 붙어 있기도 하고, 이름값만 그럴듯한 사람을 우선 추대해두자고 자의원 안에서 합의가 이루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럴듯한 이름값의 사람이라면 지금 북경 조야를 모두 둘러보아도 딱 둘, 그러니까 이홍장과 서태후 두 사람이 있을 뿐이었는데, 아무리 본인은 죄가 없다지만 사람들 마음 속에서는 원세개 작란에 연좌된 셈이었던 이홍장이 나서기에는 피차 곤란하였다.

그리하여 어디까지나 임시이며, 그 자리에 주어져야 할 권한은 아직 넘어가지 않았음을 신신당부하면서 – 그때 손덕명이 보낸 그 매서운 눈빛을 어찌 잊겠는가 – 황실의 사람이 아닌, 국민당 영수로서의 예허나라 힝전을 총통 자리에 앉히자 합의하게 되었다.

물론 말이 그렇지, 실제로는 바로 그 만주 황실이라는 점이 전례 없는 자리에 전례 없는 인사를 결정하는 중대한 원인 중 하나가 되었음을 모두가 알았지만, 속사정이 어찌 되었건 총통직의 귀추는 분명한 사실이라.

그리하여 한때 서태후라 불렸던 여인이, 아등바등 차지하여 권세 누려보고자 할 때 썼던 그 직함을 내려놓자 오히려 실권은 없을지언정 훨씬 위세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하, 총통 자리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지 않겠소.”

“이르신 바도 옳지만, 사실 눈물이 흐른 까닭은 이름 두 글자 때문이었습니다.”

“이름이라? 저 두 글자가 그리 무거웠소?”

태후 시절부터 자신을 대할 때 진심이었던 적이 별로 없었음을 아는 자이티얀이었기에, 은근히 비꼬면서도 그 말에 겸양하는 허사(虛辭) 없음을 깨닫고서 놀라고 있었다.

“신이 갈구하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전에는 알지도 못하였습니다. 이제야 깨달았으니 만시지탄이요, 모르면서도 결국 오늘에 이르렀으니 천우신조입니다.”

세상이 저를 알아주기를 바랐다. 여인이 출세하는 방도로 자신이 아는 길을, 근세의 누구보다 철저하게 따랐다. 그러니 시운이 절로 따라와 마침내 저 한 사람을 빼놓고 정국을 논할 수 없는 지경까지 당도하였다.

물론 저를 떠올려준 천하의 운세는 돌기를 멈추지 않아, 공친왕이 난을 꾸미고 이홍장은 호시탐탐 권세를 탐하여 끝내 조선으로 몸을 피하기까지 하였다.

그 후 다시 저 있어야 할 곳에 돌아와 국민당 꾸렸을 때, 문득 스스로 물었다.

신유년(1861) 이후 자신이 권세를 한 번도 놓치지 않았다 한들, 후대에 저를 기억해주었을까? 아마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확실히 발자국은 남겼을 것이므로 기억들은 해주었을 테다. 서태후로.

그 이름 뒤에 있던 사람이 누구였는지, 무얼 원하였는지는 아마 누구도 몰랐을 테다. 본인조차 그것을 모르고서, 그저 어떻게든 권세와 위신을 그러모으면 될 일이라 여기고 있었으니, 성인(聖人)이나 신선이 내려와 세상사 꿰뚫어보지 않고서 어찌 알았겠는가.

“만약 조금만 더 일찍 깨달았더라면, 내 오래 전에 두 글자 불러주고서 대신 나랏일 할 힘이나 돌려달라 하였을 텐데. 퍽 안타까운 일이오.”

허나 그런 진심이 있건 없건 광서제 자이티얀으로서는 씁쓸할 수밖에 없는 일. 그렇게 저를 손에 넣고 마음대로 하고자 갖은 수 다 썼던 사람이 이제 와서 고백한들, 그리고 만에 하나 힝전이 정말로 반성한다 한들, 다 지난 일 아닌가.

앙갚을할 일도 앞으로 없겠지만, 응어리진 마음 풀리기 어려운바 용서할 일도 없을 것이었다. 세월 흐르면 조금은 원망도 잊히겠지만, 적어도 하늘이 힝전에게 허여한 시일 안에는 아니 될 일일 테다. 그저 원망하는 말에 가시가 별로 돋치지 않았음에 서로 만족해야 하리라.

한동안 침묵 지키는 두 사람 발걸음은 중해와 남해 잇는 띠 모양 땅을 지나, 남해 한가운데 영대(瀛臺)로 향했다.

방술(方術)의 서책에 이르는 말로 발해(渤海) 가운데 영주(瀛洲) 있다 하니, 바다의 이름을 훔쳐 온 이 호수 남해 가운데에 세운 전각 영대는 거기서 이름을 빌려왔다.

“이곳 영대의 경관은 삼해 가운데도 단연 최고요. 오늘처럼 하늘이 맑을 때나 반대로 안개 피어오를 때면, 과연 신선 사는 곳 이름값을 하는 누각이지.

그대는 이곳 나무에 벌레가 많다 하여 꺼렸다고 들었지만, 당분간 이화원은 재건할 수 없을 테니 곤명호(昆明湖) 대신 이 남해로 만족해야 하지 않겠소이까.”

서태후가 재건할 마음만 품었다가 끝내 뜻 못 이룬 이화원인데, 아무리 서양 군대가 매섭다 한들 건물은 불태워도 호수는 메우지 못해 둘레 족히 시오리는 될 곤명호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허나 설령 옛 성세가 복원되었다 한들 이 영대는 나름대로의 멋이 있다고, 타타라씨 섭영 찍을 때 종종 따라와 함께 오붓한 시간 보내던 자이티얀은 여기고 있었다.

“그러니 잘 써주시오. 우리 대청을 위해서라도.”

“예, 황상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어색하니 묵직한 분위기를 깨뜨리려, 자못 쾌활한 시늉 하면서 자이티얀이 박수하였다.

“자, 그나저나, 내 이리 행차한 것은 구경만을 위함이 아니었소이다. 우리 총통께서 조선을 한 번 다녀오셔야 하겠소.”

“조선 말씀이십니까?”

조선에서 보낸 세월이 꼭 나쁘지만은 않았지만, 그렇다고 무슨 낙이 있느냐 하면 동철의 배당금 들어올 때 아끼던 환관 장공희가 말끔하고도 신묘하게 도표로 그려서 –역시 김옥균의 농간 아닌 농간이었다- 보여주던 것 정도가 전부였다. 본인도 그러할진대 밖에서 보기에는 사실상 이홍장에게 치여 망명 생활한 것이니 어떻겠는가.

그러므로 옛 보국회 젊은이들에게만 신정(新政) 맡길 수 없다 하여 여러 노대신들은 소위 출양고찰(出洋考察, 해외시찰) 떠난 판에, 서태후 힝전이 기쁘게 여기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거리낌 없이 얘기 꺼낼 수 있는 사람은 북경에 하나뿐이었다.

“조공의 예는 폐했다지만 여전히 사이 좋은 이웃 아니겠소. 그런 나라에 찾아가 나라의 재추(宰樞) 되는 이를 문안함은 마땅한 도리라 할 수 있겠지.”

이것이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저의 뜻과 무방하게, 한양에서 조선과 일본국을 만나는 것을 감추는 핑계로써 힌전이 도로 조선행을 하게 된 사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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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중국 지도부의 관저로 사용되고 있는 중난하이는, 금나라 때부터 내려오는 유서깊은 황실의 별궁입니다. 본래 그 자리에 호수가 있던 것을 꾸준한 공사로 인공호수처럼 가꾸고 그 주변에 정원과 별궁을 둔 것이지요. 호수가 북·중·남의 3개인데 그 중 국민당 시기 공원으로 개방된 북해를 제하고 남은 중해와 남해를 합쳐 오늘날 중난하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상징성과 의례를 위해 구성되다 보니 실제 거주하기에는 썩 좋지 않던 – 작중 광서제가 불평하기도 하지요 – 자금성과는 달리 중난하이는 경관이 아름답고 위치도 적절하여 그 이후에도 황제들이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특히 영대 주변의 남해는 명대에 영락제가 새로 판 것인데 (여기서 나온 흙을 쌓아올린 것이 자금성 뒤편의 경산景山입니다), 그 가운데 영대는 본 역사에서 무술변법 실패 후 광서제가 유폐된 곳이기도 했지요.

의화단의 난 당시 수난을 겪기도 했지만, 이후 선통제 푸이가 즉위하면서 그 생부 순친왕 자이펑이 섭정왕부를 세웠고, 그것을 원세개가 날름 삼켜 북양정부 총통부, 잠깐 황제병 들었을 때는 신화궁(新華宮)으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작중에서는 순친왕이 재건한 건물이 많이 섞인 원 역사의 중난하이와는 상당히 그 공간의 구성이 다를 듯합니다.

작중 예허나라 총통의 이름으로 나온 힌전(杏貞)은 사실 정사에는 전하지 않는 이름입니다. 그 외에도 행아(杏兒) 등 다른 이름이 여럿 전하지요. 하지만 그렇게 고대의 인물도 아니고, 또 순친왕 이후완에게 시집간 동생 예허나라 완전(婉貞)의 이름을 생각하면 힌전이라는 이름은 나름대로 신빙성이 있다고 봅니다.

이름을 중히 여겨 함부로 입에 담지 않던 동아시아 정주민 문화와는 조금 다르게, 만주족은 성(무쿤·하라)은 오히려 일상에서 그리 많이 사용하지 않고 이름만을 주로 사용하는 관행이 있었습니다. 서태후가 정말 본인의 이름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모르겠지만, 한스럽게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측천무후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한 일이 측천문자를 만들어, 자신의 이름을 뜻하는 글자를 새로 창조한 것이었음을 생각하면, 이런 이름에 대한 집착이 서태후에게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한국에서는 제주도의 별칭으로도 쓰이는 영주는 본디 중국 도가 전승에 나오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입니다. 발해 – 우리가 아는 보하이 만이 아니라, 중국 동쪽 바다의 통칭입니다 – 의 동쪽 멀리에 신선이 사는 섬 봉래(蓬萊)와 방장(方丈), 영주가 있고, 여기에 불로초와 불사약이 있다는 전승은 선진시대부터 내려오는 유구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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